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10
그 길을 가연의 보라색 힘이 뒤따랐다. 유이가 먹은 나선의 정보, 심안이 파악한 나선의 흐름, 트라던트의 의지를 읽는 가연의 고유 능력. 나선을 만들 재료는 충분했고, 이미 존재하던 나선의 탑이 두 번째 탑을 받아들일 근거도 충분했다.
도깨비의 환상이 현실로 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에리카가 미소 지었다.
“봐라, 벨다. 재미있지?”
“왜 그렇게 기뻐해, 에리카?”
“기쁘고말고. 이번 실험이 끝나면 내가 죽어도 이 불완전한 세계를 조정해 줄 자가 생기는 것인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어.”
두 번째 나선이 일으키는 불꽃 너머에서 라스가 에리카를 올려다보았다. 에리카는 평온한 어조로, 그러나 다소 흥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약하니까.”
다른 마법사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말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기와 달리 연맹에는 강대한 마법사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에리카의 힘은 12명의 커븐 로드 중에서 7번째다. 지닌 역할의 중함도 ‘관리자’ 중에서는 가장 낮다. 그러므로 에리카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기에는 약하다.
인간의 대다수는 약하니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법 높은 편이지만, 틀림없다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에리카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하며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최인성을 향해 물었다.
“자 그럼, 이다음엔 어떻게 할 거지?”
에리카는 나선을 이끌었다. 최인성과 라스가 나선의 궤도를 비틀고 있지만, 그들의 인도와 강제력은 엘리시아와 유클라프의 권한을 받고 트라던트와 연결된 에리카보다 낮다.
허나 그림자 공간을 향한 강제력은 당연히 최인성이 훨씬 높다. 나선의 공간이 노리던 차원을 비껴 나갔다. 에리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유클라프의 마법을 통해 공간마법에 관한 경지가 높아졌지만, 에리카의 인지능력은 두 사람의 경지보다 낮다. 이 결과는 거기에서 온 것이다.
이어 나선의 공간을 따라 익숙한 무언가가 흘러들어 왔다.
“…흐음. 그것 참, 수고를 덜었군.”
“무슨 일이야?”
“잠시만. 상황이 급하니.”
에리카가 손을 움직이자 새까맣게 물들어 있던 조합창에 불이 들어왔다. 에리카는 조합창 너머의 상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나야. 거기도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네.”
「뭐야, 갑자기? 형이 지시한 거잖아.」
“그건 그렇고 좋은 기회가 찾아와서,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거기로 가야겠다. 연결하마.”
「그래? 난 뭘 하면 돼?」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문제없다. 말했잖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화면 속에서 천진난만한 목소리의 주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그렇다면야 난 편하고 좋지! 빨리 와!」
그림자 속에 들어간 최인성은 유럽 대륙과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를 감지하며 조정하고 있었다. 심안은 트라던트의 정보를 정리하는 힘. 그 능력은 이제 최인성의 컴퓨터마법이나 전기마법과 합쳐져 그림자의 정보까지 샅샅이 모아 오고 있다.
그림자 도시의 상처와 새블레의 공간에 가시를 박고 있는 파편의 기척이 최인성의 감각 속에서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다. 공명하는 나선의 힘을 하나하나 지각하며, 최인성은 집중했다.
라스가 최인성이 말했던 방법대로 트라던트의 힘을 불러들였다. 최인성이 건네준 그림자가 라스에게 스며든다. 그리하여 라스는 최인성의 ‘가디언’이 되었다.
「라스의 힘은 내가 조정할게. 주인님은 그림자 도시를 더 깊은 차원으로 옮기고 지키는데 집중해.」
‘부탁해.’
나선을 직접 비트는 것은 라스와 가연에게 맡겼다. 라스에게 가연을 보내며 최인성은 트라던트와 그림자, 모든 공간을 파악했다. 꿈이 위치한 장소, 그림자의 깊이, 새블레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원…….
에리카는 유클라프만큼 깊이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클라프의 마법으로 비롯된 ‘나선’은 상당한 깊이까지 꿰뚫어 올 것이다.
최인성은 유클라프로 인해 ‘세계의 축’에 닿았을 때의 감각을 되살렸다. 트라던트의 의도를 읽고, 트라던트의 흐름을 읽었다. 나선이 생겨날 장소, 힘이 모이는 곳, 나선의 궤도.
‘상대가 나선이라면 꿈속이 더 유리해. 하지만 그림자 도시에 붙어있는 가시가 너무 많아. 세 번째 피난로까지 피난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트라던트를 떨치고 세계를 모두 가라앉히기엔, 시간이……. 어디가 더 유리하지? 어디가 더 많이 살릴 수 있지? 어느 차원을, 어느 위치를 선택해야…….’
그림자 도시들을, 무너진 그림자 도시에서 더 깊은 꿈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을 나선에 닿지 않도록 옮겨야 한다. 측근들과 트라던트 몇 개를 같이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선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다.
안전한 곳 따위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두 번째 꿈의 도시로 피난했다 할지라도 전원을 구할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그래도 최인성은 그 사실을 알기에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시도 생각과 마법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순히 옮기는 정도로는 안 돼. 영역을 비틀어야해. 사람이 없는 공간을 구부려서 쿠션을 만들자. 나선이 닿지 않도록, 튕겨 내도록, 최소한 비껴 내도록…….’
이미지를 상상하던 최인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부족해. 그렇다면……그래. 나선에게 닿는 차원의 정보를 바꾸자. 트라던트가 원하는 건 에너지, 사람의 목숨. 그러니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는 거짓된 차원까지만 꿰뚫도록 정보를 속이자. ……은하가 그러던 것처럼.’
그림자를 따라 전기가 뻗어졌다. 심안의 제어력이 그림자와 트라던트를 향해 뻗어졌다. 최인성이 만든 정보를 그림자 도시에 깃든 레미와 유이가 받아 읽었다. 차원의 위치와 깊이를 속이는 직접적인 환각마법이라면 레미와 유이가 더 잘 안다.
‘대체 에너지는, 그림자 속의 기억, 악의……. 먹이를 주는 꼴이 되더라도 좋아.’
그림자 사이사이로 레미가 마법석을 세웠다. 최인성은 초조한 심정을 삼켰다.
‘가리고, 조정하고, 속여서……최대한 많이 살릴 수만 있다면…….’
치직…….
최인성의 그림자 위로 감정이 흘러넘치며 한순간 수많은 영상이 최인성의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결계 안에서 뛰어다니며 사람을 피난시키는 셰린, 유펠르시아, 김형일, 그것을 방해하는 측근들.
사람들의 감정, 어둠, 기억. 이윽고 그림자 영역 안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생명체의 그림자가 최인성의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와……진짜 슬라임이잖아?’
코앞에 커다란 호박을 쓴 얼굴이 나타났다. 검은 눈구멍 안에서 커다란 호박색 눈망울이 깜빡였다.
‘한동안 내가 먹이를 주래. ……악령을 먹다니, 거 참 또 끔찍한 놈을 만들었네.’
작은 손가락이 제 몸을 꾹 눌렀다 물러났다.
‘말랑말랑해……. 그래도 다른 커다란 놈들보다는 낫다. 섬뜩한 기척도 안 느껴지고.’
최인성은 몸을 스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선의 탑이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겉보기엔 일직선인 것처럼 보이는 이 나선은 하늘과 바다를 꿰뚫고, 바다를 파고들어서는 트라던트 가시 탓에 초콜릿처럼 녹은 그림자 세계로 침투한 다음, 꿈, 그림자, 공간,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잡아먹으며 자라날 것이다.
‘안 돼! 제발, 제발…….’
벌써 그림자 길 몇 개가 잡아먹혔다. 마법석을 잡아먹고, 그림자의 악의를 잡아먹고, 보다 깊은 차원 안으로 파고든다. 역시 나선의 감지능력을 속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하물며 모든 그림자 도시를 나선의 범위에서 비틀어 비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최인성은 나선의 범위에 있는 도시와 길을 최대한 비틀었다.
콱!
다급하게 그림자 도시 몇 개를 비튼 최인성의 몸을 나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팔이 꿰뚫리고, 상처를 따라 나선의 힘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최인성의 안에 흘러들었다.
“큭…….”
나선의 공간이 최인성을 이끌고 빠르게 추락했다. 피난은 완벽하지 않았고, 나선의 파편이 만들어 낸 임시 탑의 크기는 너무 컸다. 그림자 도시 다섯 개가 채 때를 맞추지 못하고 나선의 탑에 말려들었다.
콰지직!
섬뜩한 소리에 최인성은 눈을 부릅떴다. 민간인을 지키는 호신구가 나선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건 한 번뿐. 이만한 질량이 계속 부딪치는 데 ‘한 번’만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팔을 꿰뚫린 것을 기회로 삼아 나선의 탑에 간섭했지만 휘말린 사람 중 구할 수 있었던 것은……아주 일부뿐. 셰린이나 유펠르시아의 마법사가 일부러 나선의 궤도를 따르며 방어마법을 펼쳤고, 라스도 두 번째 나선을 통해 사람을 보호했으나, 마찬가지로 구할 수 있었던 목숨은 소수에 불과했다.
교감하고 있는 나선을 통해 생명이 꿰뚫리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져 와, 최인성은 한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 간 생명 중 반 이상은 나선의 탑에, 일부는 최인성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자신이 정말 트라던트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최인성은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이내 트라던트에 흡수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적극적으로 나선에서 생명과 영혼을 흡수했다. 아니, 돌려받았다.
제 안에 담는다면 적어도 그 죽음이 트라베리아의 손에 이용당하는 일은 없으리라. 동료에게 맡기면 제대로 성불시킬 수 있다.
생명을 먹은 나선의 탑이 점점 몸을 불렸다. 최인성은 레미, 그림자들, 라스와 함께 다급히 조치했다. 그림자 도시를 보다 먼 곳으로 치웠고, 공간을 더 비틀었으며, 나선이 꿰뚫고 있는 차원 주위에 차원막을 펼쳤고, 심안의 에너지를 퍼트려 나선의 정보를 조정했다.
최인성의 조정에 맞춰 에리카도 나선을 움직였다. 영원 같은 밀고 당기기가 시작되었다.
나선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그럴수록 최인성의 안에 흘러들어오는 트라던트의 힘도 많아졌다. 부담스러운 마력에 토할 것 같았으나 최인성은 어떻게든 정신을 곧추세웠다.
그림자 도시를 좀 더 나선에서 떨어뜨려야 한다. 꿈의 도시도 더 멀리 보내야 한다. 꿈의 도시는 나선의 인지 범위 바깥에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것은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대부분의 차원을 파괴한다.
‘좀 더, 제어, 해야.’
최인성은 꿰뚫린 팔을 나선의 탑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심안의 전기가 이끌리듯 나선의 탑에 퍼지며 더 많은 정보를 최인성에게 가져왔다. 그 순간, 나선의 힘을 통해 멀리 흩어져 버린 그림자 도시의 흔적이 최인성의 그림자에 연결되었다.
“……!”
벨라의 낫에 의해 분리된 다른 대륙의 그림자 도시. 다만 모든 도시가 연결된 것은 아니다. 흘러들어온 흔적은 비교적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두 대륙, 남아메리카와 스틸라의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비명 소리.
「쿠과과과광!」
싸우는 소리.
최인성의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그림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섞였다.
…사라진다. 그림자가 사라진다. 아픔과 고통, 눈물 섞인 절규.
“욱…!”
무시무시하게 죽어 가고 있다!
최인성의 그림자가 계속해서 죽음을 끌어당겼다.
익숙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그림자가 느껴진다. 가장 괴로운 것은 모든 것을 느끼면서도 구하겠다 결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결하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거기든 여기든 어디든 안전하지 않다.
「너무 실망스럽다. 이대로 힘을 전부 뺏길 거야?」
연결된 흔적에서 래넌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목소리와 함께 어떤 풍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색을 가진 트라던트가 힘을 발하자 남아메리카의 메인 방어마법이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레일리가 슈카를 보며 이를 악물고 있다. 루니라의 혼돈이 거세지고, 혼돈 앞으로 아주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최인성의 아버지, 최상헌…….
연결이 좀 더 깊어졌다. 나선의 힘을 이용하면 비교적 가까운 남아메리카 쪽과는 쉽게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전력이 늘어나기야 하겠지만, 대신 적도 늘어난다. 하물며 이 나선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그림자 도시마저 꿰뚫고 말 것이다.
위험하다. 남아메리카의 전황도 그리 좋지만은…….
‘흐음.’
그러나 선택권을 쥐고 있는 것은 최인성이 아니라 에리카였다.
‘이렇게 연결해 주다니. 그것 참, 수고를 덜었군.’
“아…….”
최인성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나선의 궤도가 바뀌었다. 나선이 최인성의 의지에 반응했고, 에리카가 그것을 읽었다!
“안, 돼…….”
추락의 끝에서 현실을 향해 올라가는가 싶던 나선이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이 상태로 대륙이 합쳐져 봤자 나선의 확대로 피해가 커질 뿐이다.
최소한 나선을 사람이 없는 곳에 연결시켜야 한다. 그리고 트라던트의 확대로 인해 남아메리카의 그림자 도시가 고정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기술은…….
“쿨럭!”
최인성은 마력을 토해냈다. 농도 짙게 주입된 나선의 힘 때문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주인님, 괜찮아?」
「괜찮아. 나선의 궤도는 내가 조정할게.」
라스의 말과 함께 두 번째 나선이 더 선명한 빛을 발했다. 최인성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나선의 힘이 좀 더 흘러들어 왔다.
‘…아니. 라스 넌, 정보를 읽는 힘이 부족하잖아.’
「가연이 있어. 당신의 힘은 필요하지만,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을 받아들이진 마. 당신이 싸우지 못하면 그게 더 피해가 커.」
‘응. 알아……. 괜찮아.’
최인성은 숨을 들이키며 아주 많은 감각을 떠올렸다. 예를 들어, 유은하를 따라 우주의 꿈속을 헤맸을 때.
지금 온몸에 느껴지는 무게는 우주보다 광대한가?
─아니, 그만큼 광대한 정보와 위압감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둘의 타입은 전혀 다르다. 우주는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를 지니고 있으나 악의는 없다. 허나 자연의 광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결국 모든 힘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할 수 있어. 더,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게 좋아. 나선의 궤도를 비트는 것 외에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나선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고개를 든 순간, 최인성은 함께 나선을 타고 있던 죽음의 숲과, 드라이어드 하미아와 눈이 마주쳤다. 나선을 따라 그림자의 흔적이 다시금 최인성에게 연결되었다. 아까보다 선명한 기억이 최인성의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강해지고……있는 건가? 이 녀석은 체질 탓에 마력이 안 느껴져서 모르겠네.」
「크기는 커도, 생각보다 귀여운걸? 말랑말랑하고.」
「하, 진짜. 미치겠다. 저놈들은 대체 왜 저렇게 날 괴롭히는 거야?」
단편적으로 쏟아지는 목소리. 그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커다란 호박을 둘러쓴 작은 몸집의 남자가 있었다. 잔잔한 감정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시야의 주인이 ‘이그니’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달라붙어? 음……그래도 말랑말랑해서 나쁘지 않네. 어? 너 힘을 전달해 줄 수도 있어? 오, 조금 기분 좋다. 이래서 사람이 동물을 키우나.」
「어? 왜 자꾸 한숨 쉬냐고? 하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 상대로 내가 뭐라는 거람. 그래도, 못 알아들어도 좋으니까, 아니, 못 알아들어서 좋아.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줘. 내가 말이야, 겁이 많거든? 엄청 엄청 많거든? 그리고 내가 인생(人生)을 살아 봐서 아는 건데, 위험한 놈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런데 자꾸 그 위험한 놈들이 날 놀리겠다고 다가온다고! 아, 진짜! 무섭다고! 악령인 만큼 무섭다고! 대체 그놈들은 왜 그러는 거야? 어릴 때부터 마주했던 게 어디 나뿐인가?」
「그 녀석들 진짜 이상해. 내가 뭐라고 자기 속마음을 다 털어놓느냐고. 그래도 그 인간 정말 신기하긴 신기하더라. 어떻게 인간이 우리한테 그럴 수가 있지? ……한 번 만나 보고 싶긴 하다. 하, 이제 괴물 소굴은 지긋지긋해. 사람이랑 만나 보고 싶다……. 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 사람이라고 아주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도 제법 있거든.」
「뭐 그래도 잘 따라 줘서 조~금 기분 좋긴 해. 내가 이런 말 한 건 비밀이다?」
이그니가 얼굴에 둘러쓴 호박 모자에 양 손을 대며 고개를 살짝 떨었다. 안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이고, 그런 녀석들도 동료라고. 뭐, 동료는 소중히 여기는 게 좋으니까…….」
「이그니, 여기 있었군요.」
「으헉! 아, 진짜! 난 안 듣는다니까!」
「이그니….」
「왜 달라붙고 지랄이야! 라스! 떨어져! 떨어지세요! 떨어져 줄래? 아 쫌!」
최인성은 이를 악물며 탑을 내려갔다. 드라이어드의 숲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슬라임의 몸체로는 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에 항상 느릿하게 움직였던 풍경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시야의 주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뛰고 있었다. 달려간 길 끝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시야가 넓어지며 가슴 안으로 벅찬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슬라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생생하게 흘러넘쳤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상대. 인간형이 되어 손을 잡아 보고 싶었던 상대.
그 상대가 눈앞에 있다. 커다란 호박을 둘러쓴 얼굴이 하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헉! 누구……세요…?」
「나, 는…….」
「아, 아아!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동료 분……. 힉! 저, 전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하미아의 손을 뿌리친 이그니가 다급히 달렸다.
「거, 거의 라스 급이잖아……. 섬뜩해…….」
그 이후로도 이그니는 계속 하미아를 무서워하며 피했다. 그렇다고 마법으로 붙잡는 것은 너무 강압적이었고, 주변의 동료들이 그걸 두고 볼 리 없었다. 이그니는 의사인 것도 있어 동료들에게 두루두루 사랑받는 편이었다.
하미아가 어쩔 줄 모르는 동안 이그니는 만나기 어려운 먼 곳으로 떠났고……죽었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믿을 수 없던 주인님들의 손에 죽었다.
최인성은 드라이어드가 만든 숲을 손으로 헤쳤다. 아무리 트라베리아가 그녀에게 잘해 주고, 상냥한 목소리를 들려줘도, 하미아는 단 한 번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말 못하던 슬라임이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슬라임의 육체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만, 슬라임의 내부에 스며드는 영혼이나 생명은 고통스러워했고, 울부짖었다.
슬라임일 때는 무감각했던 것들이 드라이어드가 되고나니 선명해졌다. 그녀는 트라베리아의 실험이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이그니나 가끔 말을 걸어 주던 ‘동료’들만이 하미아의 즐거움이었다.
최인성은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그림자를 읽으며 수풀을 헤치고 하미아를 마주했다. 하미아가 나무로 최인성을 공격하기보다 먼저, 최인성이 하미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네가 좋겠다.”
최인성이 그림자를 등진 채 곱게 눈을 접었다.
“방어 술식 발동!”
대비했던 상황이었다.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고 망가져가는 세계를 되돌리기 위하여, 아직 살아 있을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연맹은 지구로 돌아가야 했고, 트라베리아는 새블레에 경고를 남겼다.
방어벽을 몇 겹이나 치고, 그 위에 봉인을 가하더라도, 트라베리아는 방어를 부수고 말 것이다. 누군가는 죽고 말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구로 돌아가 싸우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나라를 다른 공간에 숨겨 놓고 강한 마법사들만 바깥에 나갈까 했으나, 그건 너무 위험했다. 목표를 정한 트라베리아의 추적능력은 무시무시했고, 지킬 수 있는 마법사가 적은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시 국민들의 목숨은 단 한 명도 보장하기 어렵다.
그림자 도시 곳곳에 쳐 둔 레일리의 규율 영역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방어진이 펼쳐졌다.
“그림자 도시 복구.”
윌리엄이 그림자 도시를 복구하며 총을 쏘았다. 무시무시하게 헤집어진 그림자 도시 위로 공간 방벽이 생겨났다. 그래도 유은하의 정화마법과 루카의 봉인마법이 있어 벨라의 마력이 생각보다 오래 남지 않아 다행이다.
윌리엄과 레일리는 호신구와 각자의 마법을 통해 비교적 위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공간마법과 규율마법을 합친 그림자 도시 안의 보다 튼튼한 요새로 이동시켰다. 이후 현실에 있는 본부 다음으로 규율마법이 강하게 적용되는 그림자 SR 본부를 가동시켰다.
레일리는 미리 입력해 두었던 규율을 계속해서 퍼트리며 규율마법에 잡히는 동료들을 채팅 창에 초대했다. 목소리를 따라 문자가 떠올랐다. 통신이 아니라 문자 채팅으로 연결한 것은 위험한 상황일 경우 한꺼번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글을 남겨 두는 편이 위험이 지나간 후에 상황을 확인하기 편하다.
『레일리: 남아메리카만 따로 떨어진 것 같아요.』
『윌리엄: 다른 대륙도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느낌, 벨라와 유클라프였습니다.』
『루니라: 디나가 없어! 같이 있었는데!』
『첸: 라스도 없군요. 별무리도, 무르시엘 멤버도 없습니다.』
『알리사: 같이 있었던 사람이랑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 거야? 거기다 너흰 스틸라에 있었잖아? 레일리 회장님! 우리 멤버랑 경찰 멤버 중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나요?』
『레일리: 으음……일반 대원중에는 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간부 중엔 없어!』
『루니라: 그런데 디나 말곤 다 있어! 루피 퀴리 바인 하울 루지 밀 다 있어!』
『베르조: 경찰 소속 동료는 100명 정도가 없다.』
『레일리: 연맹 대원도 한 50명 정도가 없어요!』
그때 레일리는 기이한 감각을 느끼고 팔뚝을 쓸었다.
마법이 약간……흔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그마한 틈새를 가느다란 바늘로 긋는 것 같은……그런 기이한 감각이었다. 공간의 힘에 민감한 윌리엄은 그것을 보다 노골적으로 느꼈고, 레미가 커다랗게 경고했다.
「환각마법의 기척이 확인되었습니다. 마력 패턴으로 보아 래넌 클라인입니다.」
레미가 ‘숨겨진 마법’을 실체화 했다. 환상의 주인이 보는 광경을 꿈과 그림자의 세계가 비춘다.
실체화 된 것은 악보, 즉 ‘음악’이었다. 래넌의 오선과 음표가 아주 은밀하게 레일리와 윌리엄의 마법 안을, 겨우겨우 복구되고 있는 그림자 도시를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음악에 닿는 사람과 마법에게만 혼란을 주어 그림자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을 바깥으로 유도하고, 아직 그림자 도시 바깥에 있는 사람은 길을 헤매도록 만들고 있다.
새블레에 존재하는 마법 패턴을 순식간에 귀로 익히고, 그에 걸맞은 음률을 연주하여 파고든다. 이게 클라인 남매의 음악이 무서운 이유였다.
세계가 숨어든 음악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수호구도 바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미와 그림자 도시가 한 번 공격으로 받아들이자, 수호구 안에 있는 ‘환각마법’이 발동했다. 그림자 도시도 정신방어마법을 발동했다.
그사이 레일리와 윌리엄은 영역에 파고든 오선을 배제했다.
“아, 들켰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미로써는 아무리 유은하의 환각마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래넌 클라인의 음악을 완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어 규율 술식에 붙여 넣은 아이템에 나타난 표식을 보고 레일리는 굳었다.
남아메리카 마법사 중에는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다. 하긴, 자연의 가호로 숨긴 것을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마법사는 새블레를 통틀어 이소영, 김준영, 유은하, 오시언, 네 사람뿐이다.
때문에 만일을 위해 그들의 마법을 이용해 조금이나마 자연의 가호를 파악할 방법을 찾았다. 다만 새블레 안, 그것도 규율마법의 지배권 안에서만 가능한 방법이다.
술식에 짜인 ‘자연의 가호 감지 카드’와 유은하의 꿈 조각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레일리: 알토가 벌써 그림자 도시 안에 들어갔어요!』
이어 유은하의 꿈 조각 위로 또 다른 형상이 떠올랐다. 레일리가 숨을 삼키고는, 이어 이를 갈았다.
『루니라: 내가 갈게! 내 혼돈속성은 자연적이지 않은 힘. 자연의 가호를 흐트러뜨릴 수 있어. 그림자 도시도 좀 엉망이 되겠지만……루피랑 퀴리가 보조해 줄 테니까 괜찮아!』
『레일리: 알토와 함께 최상헌의 기척이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