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16
“쿨럭!”
에리카의 모습이 보였을 때 최인성은 온몸이 심흑과 나선을 상징하는 칠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연이 있으니 알피스는 필요하지 않겠군. 혹시라도 꿈의 힘이 부족하다면 유은하에게서 얻어라. 그게 우리는 더 좋아.”
에리카는 총구를 최인성에게 겨눈 채 물었다. 눈동자가 탐색의 빛을 담고 최인성의 몸을 훑었다.
“그래, 심흑의 힘은 어땠지? 맛있었나?”
최인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래넌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하아, 하아…….”
“힘은 많이 강해졌지만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하네.”
“닥쳐. 욱…….”
최인성은 래넌을 노려보며 다시 한번 기침했다.
“맘만 같아선 느긋하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덕분에 과격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최대한 안정적인 방법을 쓰고 싶었다.”
“너희들이? 헛소리를.”
“중요한 일엔 신중하다고, 우리?”
최인성은 래넌의 말을 무시하며 주위를 훑었다. 에리카의 말보다는 대륙의 상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북아메리카에 대륙의 일부를 빼앗겨 작아졌던 남아메리카 대륙이 다시 반으로 동강 났고, 그 범위에 있던 그림자 도시도 전부 파괴되었다. 최인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피난 영역을 넓혔지만, 인명 피해도 세 자릿수에 가깝게 나왔다. 피난을 맡고 있던 캐시가 마법에 조금 휘말렸고, 루니라는…….
‘알토를 놓쳤나?’
알토와 최상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데다, 루니라가 레일리가 있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쁘지 않은 인선이다. 루니라는 슈카와 상성이 나쁘지 않고, 알토를 찾아낼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건 레일리뿐이다.
그리고 루니라에게 자신의 자리를 맡긴 레일리와 경찰과 자리를 교대한 셰린이 최인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셰린은 내 상태를 보기 위해 오는 것이겠고, 레일리는……설마 알토가……아버지가, 이 근처에 있나?’
최인성의 예상은 맞아들었다. 래넌이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허공을 향해 이렇게 말을 건 것이다.
“알토 형, 빨리 왔네? 그런데 어쩐지 도망쳐 온 것 같다? 루니라 쟤 굉장히 멀쩡한데? 나보고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한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허공이 퍼즐처럼 조각나며, 그 안에서 알토와 최상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 루니라가 생각보다 성가시더라고. 기회가 왔을 때 도망쳐오지 않으면 타이밍에 안 맞을 것 같더라.”
“흐으음~.”
“인성아!”
알토가 모습을 드러낸 것과 거의 동시에 레일리가 최인성의 옆에 내려섰다. 규율의 지팡이에서 내질러진 힘이 래넌의 지휘봉으로 인해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그래서? 레일리, 너도 도망쳐 온 거야?”
레일리가 분한 눈으로 래넌을 노려보곤 최인성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래넌이 지휘봉으로 공격한 탓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났을 때, 레일리의 옆으로 셰린이 내려섰다.
“…….”
“셰린 누나도 왔네. 안녕, 누나.”
“오랜만.”
래넌과 벨다는 셰린을 보며 눈빛을 누그러뜨렸으나, 에리카, 제르간, 알토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레일리는 불안한 눈으로 셰린의 팔을 붙잡았다.
“마음이 복잡한 건 알겠지만, 지금은 인성이가 우선이에요.”
“네, 알아요.”
“인성아, 라스 씨랑 첸 씨는?”
“내, 안에, 있…….”
“래넌,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이 이상은 인성 씨의 몸이 위험해.”
“그건 안 돼. 지금 아주아주 중요한 실험 중이거든.”
“저 사람 목숨을 망칠 생각이야? 저 분은 너희한테도 중요한 사람인 것 아니었어?”
최인성의 마력을 확인하는 셰린의 눈동자에 초조한 빛이 어렸다. 물끄러미 셰린을 바라보던 래넌이 또 한 번 웃었다. 셰린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흐음, 그렇구나. 누나도 감지능력만으로는 최인성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거구나. 트라던트의 힘이 너무 강해서, 과부하가 걸렸다는 것 외엔 알아보기 어려운 모양이네.”
“그건…!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해! 인성 씨의 몸은 이제 한계야!”
“맞아. 우리가 그렇게 몰아붙였지.”
래넌이 셰린과 레일리를 막아서는 사이 에리카가 좀 더 최인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에리카, 확인은 마쳤어?”
“아니. 지금부터 확인해 볼 참이다. 아직은 꼭꼭 추스르고 있군.”
최인성은 속에서 무언가 흘러넘칠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레일리, 셰린, 래넌의 대화도, 알토와 에리카의 대화도 이해하지 못했다.
「……님.」
……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림자, 그림자의 목소리다. 가연이다. 최인성은 지금까지 계속 쥐고 있던 심연의 검을 들었다.
그 위로 거대한 트라던트 창이 떨어져 내렸다.
“큭!”
“이 이상은…!”
“방어…….”
레일리가 치켜든 규율의 지팡이와 셰린이 손에 모은 마력을 래넌이 지휘봉으로 내리쳤다. 강렬한 음파가 두 사람의 마력을 산산조각 냈다.
“윽!”
“안 돼. 둘 다 가만히 있어.”
래넌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셰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이 이상은 인성 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
“설마 우리가 그걸 모르고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린 누나보다 많이 예상했고, 많이 알고 있어. 제대로 대응책도 생각해 왔다고.”
레일리가 눈을 휘번득 치켜뜨며 지팡이에 다시 마력을 모았다.
“너희가 가져온 대응책이 제대로 된 대응책일 리 있겠어?”
“이건 우리에게 필요해서 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너희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야.”
“헛소리도 정도껏 해! 그런 일이 존재할 리 없잖아!”
래넌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놀랍게도 존재하더라.”
지휘봉에서 생겨난 붉은 음악이 레일리를 거칠게 밀어냈다. 샐레나의 마법을 따라한 음악. 레일리는 자신의 마력이 불안정해진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셰린이 교감마법으로 레일리가 마법을 구현하는 걸 도왔으나, 자신보다 강한 혈족끼리의 공명을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래넌이 샐레나의 파편을 손 위에 소환했다.
“쓸데없는 힘 낭비 그만해. 샐레나를 앞에 두고 손도 발도 못 쓰는 주제에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레일리 넌 네 동료나 잘 봐.”
“남의 유해를 더럽히고 있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레일리는 분한 심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최인성이 오기 전까지 레일리는 온 힘을 다해 규율마법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니고 어머니의 파편 앞에서 전부 산산조각 났다.
“뭐 정 그렇게 최인성이 걱정된다면……흐음, 그래, 에리카 형을 방해하는 건 안 되지만, 레일리 네가 최인성에게 회복마법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봐줄게.”
“뭐라고…?”
“셰린 누나의 회복마법은 최인성의 마력에 영향을 많이 줘서 안 되지만, 레일리 네가 가진 치유마법은 보편적인 회복마법이잖아. 여차하면 내가 제어할 수도 있고.”
그러며 래넌이 샐레나의 파편을 손에 쥔 채 흔들어보였다.
“최인성의 상태를 보다 많은 방법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특별히 허락할게,”
레일리는 분함에 이를 갈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최인성을 향해 회복마법을 펼쳤다. 셰린이 간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살폈다. 그러나 직후 기이한 느낌과 함께 회복마법이 최인성의 몸에서 튕겨 나갔다.
트라베리아가 방해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래넌의 시선이 탐색의 빛을 담고 가라앉았으며, 셰린이 눈을 부릅떴다.
“왜…….”
셰린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레일리가 당황하는 한편, 최인성은 떨어지는 트라던트 무기를 향해 심연의 검을 휘둘렀다. 창이 검의 공격에도 튕겨나가지 않고 최인성을 짓누른다. 최인성은 노이즈가 끼는 눈에 애써 힘을 줬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둔하다. 통각이 마비되었는지 온몸을 타고 도는 통증이 이제 통증이 아닌 압박감처럼만 느껴진다. 마법은 걷혔는데 그림자들과의 연결이 안 좋다.
과부하를 넘어서 이제 몸과 마법이 한계라는 게 명백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당장 에리카와 래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님.」
레일리의 회복마법이 튕겨 나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심지어 최인성은 레일리가 자신에게 건 마법이 회복마법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 이상은 안 돼, 최인성!」
파직!
최인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 안의 힘이 움직였다. 심안의 힘이 최인성의 그림자를 짓누르던 트라던트 창을 튕겨 냈다. 아니, 튕겨 낸 걸까? 어쩌면 심연의 힘을 해석해 감싸 안은 것도 같았다.
“아…….”
결국 그림자 안으로 심연과 심흑의 힘을 듬뿍 담은 트라던트의 마력이 파고들었다.
창이 그림자에 흡수되는 모양새가 기이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스스로가 있어야 할 장소에 돌아간 것 같았다.
…빠직!
그런데 그 순간, 최인성의 안에서 무언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계인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에리카는 멈추지 않았고, 최인성은 다시금 떨어진 마법을 조금이라도 튕겨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빠직….
휘두른 심연의 검에 금이 갔다. 그런데 상태가 이상했다. 에리카의 마법에 상쇄되어 금이 간 게 아니었다. 공격과는 관계없이, 수명이 다한 물건이 부서지는 것처럼 금이 전염되었다.
검 표면이 분해되듯이 깨졌다. 그림자가 떨어진 마력을 흡수했다. 그런데도 금을 따라 어둠의 마력이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욱, 으욱!”
최인성이 크게 기침했다. 입 안에서 암흑이 안개나 조각처럼 흘러넘쳐 떨어졌다.
“인성아!”
“인성 씨!”
가슴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을 울컥 토해 낸 최인성은 제 손을 보고 흠칫했다. 손에 금이 가 있다. 금 사이로 암흑과 그림자가 슬금슬금 새어나왔다. 지금 최인성의 몸은 인간의 육체라기보다는 그림자에 가까웠고, 그림자보다는 트라던트에 가까웠다.
광대한 에너지와 차원을 가두고 있는 그릇이, 그 표면이 깨어지고 있다. 분해되고 있다.
표면만이 아니다. 육체 안쪽 깊숙한 곳이 욱신거렸다. 그림자 곳곳에서 힘이 새어 나왔다.
최인성은 다급히 그림자를 조종했다. 그러나 그 조종하려는 마력마저 깨어지고 만다.
“셰린.”
셰린은 불안하게 부서지는 최인성의 마법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에리카가 셰린을 불렀다.
“확인해도 된다.”
셰린은 항의할 생각도 못하고 최인성에게 달려갔다. 당황한 눈으로 부서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최인성은 그림자가 연결되자마자 먼 곳으로 보내려 했던 세 키메라를 당장 그림자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계속 자신의 그림자에 있다간 함께 부서질지도 모른다!
“아, 나왔다.”
“드라이어드…….”
불안을 눌러 참으면서도 셰린에게 저주의 근원을 내민 최인성이 소리쳤다.
“라스! 나 대신 부탁해! 데리고 도망쳐!”
“…….”
라스가 망설이는 눈으로 최인성을 돌아보았다. 셰린이 떨리는 눈으로 최인성의 팔과 마력을 더듬었다. 최인성의 그림자에서 번개가 튀며 셰린의 손이 몇 번 튕겨 나갔다.
“안 돼, 이건, 어떻게…!”
“셰린 씨! 인성이의 상태는 어떤가요?”
소리치던 레일리는 자신을 지나치는 래넌을 보고 흠칫했다. 래넌, 벨다, 제르간, 세 사람이 동시에 키메라 일행을 노렸다.
라스와 첸이 하미아를 감쌌다. 레일리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마법을 휘둘러 래넌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의 네 힘으론 날 가로막을 수 없을 텐데?”
“시끄러워! 그건 우리 엄마의 힘이야. 내, 힘이야! 마음대로 가지고 놀지 마!”
“내가, 도와.”
라스가 그림자의 힘을 이끌어내 레일리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라스는 최인성의 가디언이고, 그림자는 최인성의 힘이다. 그림자가 도깨비의 불꽃 속에서 조각조각 깨어지며 일그러졌다. 최인성의 마법에서 시작된 실금이 라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을 느끼고 최인성이 소리쳤다.
“라스! 그림자를 버려!”
“싫어.”
“위험해!”
“괜찮. 제어, 가능.”
“라스!”
라스가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첸이 의아한 눈으로 속삭였다.
“왜 그러죠, 라스?”
이를 갈고 한 번 숨을 들이쉰 라스가 드물게도 멀쩡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멀쩡한 가디언이 나밖에 없어! 가연도 유이도 영도 최인성의 부담을 받아들여 똑같은 상태! 그림자 도시도 이미 금이 가고 있어! 자신이 영향을 미치는 걸 알고 세 사람 다 레미가 보내 준 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지만…! 내가 멀쩡한 건, 나만 유일하게 최인성의 일부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 최인성의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는 건 나뿐!”
라스는 억지로 그림자의 힘을 붙잡으며 레일리에게 엄호를 보냈다.
레일리는 라스의 힘으로 겨우 멀쩡하게 내질러진 마법을 조정하며 지팡이를 좀 더 꽉 쥐었다.
상황은 지금 난장판이었다. 최인성의 그림자는 이상하고, 셰린은 최인성을 살피며 떨고 있고, 트라베리아는 어째서인지 키메라를 노리고 있다. 하미아를, 하멜의 심장에서 비롯된 드라이어드 하미아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래, 레일리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자신이 하미아를 보호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림자를 통해 얻은 전황 정보를 레미에게 전해 듣긴 했지만 어떻게 그것을 마음으로 납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러나 레일리는 격정을 억누르며 다가온 벨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적의 공격을, 막아라!”
벨다가 구현한 밤하늘이 파괴의 번개를 불러냈다. 규율의 지팡이가 레일리의 언령에 답하며 붉게 빛났다. 래넌이 손에 쥐고 있던 붉은 마법석을 좀 더 쥐기 편한 형태로 바꾸며 흔들었다.
“안 통하네요~. 라스가 원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모를까, 둘 다 불안정한 힘을 끌어안고 있는 주제에 뭘 어쩌겠다는 건지.”
“막아! 부서뜨려!”
레일리가 온 힘을 짜내며 벨다의 공격을 튕겨냈다. 마법석에 힘을 빼앗기면서도, 레일리의 마력은 눈부시게 빛났다.
“자, 거기에서 멈춰.”
“안 멈춰! 누가 멈출 줄 알고!”
샐레나를 꼭 닮은 래넌의 음악과 레일리의 음악이 부딪혔다. 끄트머리부터 마력이 빼앗긴다. 하지만 레일리는 몸 주위의 마력만은 확실하게 붙잡아 제 자리를 지키게끔 했다.
그림자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라스 대신 첸이 레일리를 도왔다. 타오르는 영혼이 레일리를 지켰다. 날아온 음표의 반은 라스가, 나머지 반은 첸과 레일리가 밀어냈다.
레일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숨을 골랐다. 슈카와의 전투도 있어, 레일리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아까보다는 마력을 제어하는 게 괜찮아졌다……고 평하기엔 마법을 제어하는 범위가 너무 좁은걸?”
“닥쳐!”
레일리가 지팡이로 샐레나의 마법석에서 나온 선율을 쳐냈다. 샐레나의 파편이 닿는 순간 레일리의 마법이 분해되려고 한다.
‘이건 파편일 뿐이야. 진짜가 아니라고. 에리카의 마법이 섞여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지배력이 강한 거야. 그래서……그게 제일 분해!’
어머니의 힘이지만, 이것은 이제 ‘트라던트’다. 그리고 트라던트를 다루는 에리카와 유클라프는 샐레나의 마법을 계승한 레일리보다 훨씬 강하다. 이 결과가 그 힘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기에 분하다. 이렇게 무력하게 자신들의 마법이 가지고 놀아지는 게 분하다!
선율이 레일리의 마법을 채 분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레일리의 마력에 흡수당했다.
“리카르트 규율마법, 4대 계승자는 나야! 우습게 보지 마.”
“잘 알아. 한 번도 방심한 적 없어.”
샐레나의 마법석에서 나온 음률이 래넌의 음악과 합쳐진다. 금홍빛으로 빛나는 마법이 레일리의 위로 떨어졌다.
“첫 번째 적, 배제, 방…어!”
레일리는 비명을 삼키며 어떻게든 래넌의 음악을 막아냈다. 제대로 버티지 못해 무릎 꿇으면서도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런데 레일리, 꽤 말이 험해졌다? 전에는 싸울 때도 정중한 말투만 썼잖아.”
“씨발! 욕 쓰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라스는 최인성이 자신의 몸에서 거두려 하는 그림자를 애써 몸에 담으며 제르간의 공격을 튕겨냈다. 최인성이 또 한 번 라스를 불렀다.
“라스!”
“안 돼! 나도, 같이!”
그러면서 라스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알토를 경계했다.
이렇게 트라던트의 범위 바깥에서 보니 명확했다. 최상헌은 알토와 클라인 남매에 의해 마법과 정신을 조종당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최상헌은 트라베리아에 충성했을 텐데, 그림자 도시의 길을 효율적으로 찾기 위한 조치였던 걸까.
알토는 최상헌의 옆을 지키면서도 끼어들까 말까 틈을 보고 있었다.
“위험해. 금방 그림자를 추스를 테니까, 그때까지만 놓아!”
“안 돼요! 라스 씨! 제발 그림자를 돌려주지 마요! 붙잡아 주세요!”
불안한 눈으로 최인성을 살피며 간헐적으로 마법을 쓰던 셰린이 비명처럼 외쳤다.
“셰린 씨…?”
“제발, 인성 씨, 제발……가만히 있어요!”
하미아가 래넌의 마법에 밀려 비틀거리는 레일리를 나무로 부축했다. 녹색 나무가 지닌 회복능력이 레일리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켰다.
하미아는 비틀거리는 최인성과, 마찬가지로 비틀거리며 자신을 지키는 동료들을 보다 불안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제 괜찮다. 난……사실, 죽어도, 별로…….”
“닥쳐요! 난, 왜, 내가, 하필이면 내가 당신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레일리가 숨을 골랐다.
“동료들의 얼굴을 봐서 지켜 주고 있는 거예요! 알았으면 전력을 다해 살아날 생각이나 해요!”
레일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기 위해, 혹은 본능적으로 키메라들은 트라베리아의 명령을 따른다. 이 드라이어드는 슬라임일 때 SR 대원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갓 장군 시리즈가 되었을 때는 레일리의 친구 레베카의 목숨을 빼앗았다. 머릿속에 공적인 감정과 사적인 감정이 뒤섞였다.
연맹에는 무르시엘, 첸, 라스, 듀크의 살인을 보고 들은 마법사가 많다. 트라베리아와 싸우기 위해, 싸워서 살아남기 위해 그걸 감수하고 받아들였다면 레일리 역시 이 분노를 참아 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참기 괴로웠다.
그나마 레일리가 드라이어드에 대한 감정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드라이어드의 살인이 실비아의 명령에 의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인성이 드라이어드를 감싸는 이상, 그녀는 그 살인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응.”
울음에 잠긴 하미아의 목소리에 레일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처럼 살기 위해 항상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음도 안다.
그때 하늘 위, 유럽 대륙에서 화살과 공간마법이 떨어졌다. 지금 유럽에서는 피난 도시 재구축, 나선의 탑 배제, 벨다를 제외한 에리카의 측근들과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유럽의 상황은 조금씩이나마 연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레일리와 키메라 일행이 한계 직전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지켜내는 사이 셰린은 최인성의 상태를 확인하며 절망을 삼키고 있었다.
처음엔 트라던트의 힘이 너무 짙고 불안정해 바로 상태를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교감하여 최인성의 상태를 확인하면 할수록 셰린의 심정은 절망에 가까워졌다.
금이 가는 몸과 마력.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순수한 암흑의 힘. 유클라프와 꼭 닮은 심흑의 힘…….
에리카가 셰린의 뒤로 다가왔다. 레일리는 그 모습을 경계하면서도 키메라 일행을 지키는 걸 우선했다. 트라베리아가 최인성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셰린이 불안을 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가 확인하려 한 건 이 결과였구나.”
“그래. 당신이라면 알아보리라 생각했어.”
“마지막 순간까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너희는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모하게 힘을 밀어 넣은 거야?”
셰린은 눈물이 맺힌 눈을 부릅뜨며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쩌겠다는 거야? 돌이킬 방법이 있다고? 이걸?!”
흐트러지는 마력을 조금이라도 억누르고자 부스러지는 그림자 날개를 붙잡던 최인성이 물었다.
“셰린 씨, 지금 제 상태가 어떻기에…….”
“목숨을 갈아 넣어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힘을 끌어내 제물로 퍼붓겠다는 거야?”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셰린 세비어. 전선에서 멀어졌다고 냉정함까지 잊으면 어떻게 해.”
에리카가 한 걸음씩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지금의 최인성이 어떻게 최대한 힘을 끌어낸 상태라 말할 수 있지? 몸에 담아내지 못하고 힘이 줄줄 새어 나오는 망가진 그릇으로 둘 바엔, 이전의 상태가 훨씬 쓸모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최인성은 에너지를 덕지덕지 끌어모은 덩어리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빚은 그릇이야. 순도 높은 힘과 능력이 필요한 거다.”
“…셰린 씨, 지금 제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그건 내가 설명하마. 셰린보다는 우리가 더 잘 알거든. 결과만 본 자와 전조를 모두 살피고 결과까지 예측한 자가 지닌 정보의 정밀도와 양은 다를 수밖에 없지.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셰린이 떨리는 손으로 최인성의 팔을 꽉 붙잡았다. 셰린의 손에서 계속 치유의 마력이 퍼지고 있었지만, 최인성의 마력은 계속 무너져 내렸다. 얼굴에 금이 가고, 손가락이 두어 개 조각났다.
“베로니카의 추정이 맞아 떨어진 거다. 네가 지금 부서지고 있는 이유는, 네가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뭐?”
최인성은 부서지는 육체 속에서 어둠을 추스르려 애쓰며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최인성. 네가 트라던트와 공존하고 있는 걸 확인했을 때, 연옥의 힘을 받고도 살아 있는 걸 알았을 때, 우리는 꽤 기뻤어.”
에리카의 시선이 진중하게 최인성의 몸을 훑었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네 힘이 반드시 필요하거든. 웬만한 트라던트 무리보다, 이전에는 북아메리카였던 탑의 영역보다, 살아 있는 네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 죽음이 더 유용하기 때문이야.”
“…….”
“그래서 네 힘을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베로니카가 너에 대해 두 가지를 새로 추정, 혹은 알아냈어. 하나는 네 마법이 감정에 반응해 성장한다는 것.”
“…….”
“모든 인간이 성장하는 방법은 결국 비슷하다 할 수 있어. 시련을 이겨 내고, 싸움을 이겨내고, 벽을 넘는 거지. 하지만 같은 생명체는 없기에, 그에 따른 세부적인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지. 너는 격렬한 감정을 느낄수록 성장 폭이 커진다고 하는군. 눈치채고 있었나?”
최인성은 말없이 에리카를 노려보았다.
“네 힘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네가 탑의 모든 힘을 그 안에 담아야 했어. 그런데 여기에서 두 번째 사실을, 문제를 알게 됐다. 심흑의 마력이 너에게 너무 무겁다는 거야.”
“무겁…….”
“네 마력은 그림자. 그림자는 어둠의 하위속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