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37
「우선 여러분, 키메라에는 손을 대지 마세요. 그것은 트라던트와 힘을 공유하고 있어, 잘못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잡아 삼켜 질 거예요. 그건 트라던트의 빛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촉매입니다. 트라던트는 아직 애매하지만 트라던트의 빛을 가속화 시킬 키메라가 터질 시키는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라던트의 빛이 팽창하는 시기도 그림자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곧 예상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론체르타의 방어와 피난은 제가 전면적으로 맡겠습니다. 여러분은 빛의 상태가 위험한 곳부터 사람들을 피난시켜 여기로 데려와 주세요.」
「아, 이동은 내가 도와줄게! 나가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이제 나가도 괜찮지? 응? 디나 누나.」
서한울의 목소리였다. 디나가 수긍했다.
「네. 여러모로 준비할 점은 있겠지만 이제 B랭크 중위 이상 마법사 분들은 바깥에 나가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렇대! 내가 꿈을 통해 길을 안내할게. 한국이라서 눌리고 있는 거지, 그림자 영역의 상태는 엄청 좋아. 반짝반짝, 담긴 감정이 뭐 이리 다양하담.」
서한울의 성격을 잘 아는 무하의 동료 심현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네가 안내를 하겠다고? 그림자가 신기하다고 딴 길로 새는 거 아냐?」
「아이 참,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히 언젠가는 이 세계를 구경해 보고 싶지만,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럴 때는 안 그래. 은혜는 갚아야지. 음……아니다. 이런 걸 은혜를 갚는다고 표현하긴 어렵지. 하여간 내 의무는 해내야지? 은혜는 다음번에 제대로 갚고.」
「네가 의무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게 놀랍다…….」
「가장 먼저 빛이 터질 부산과, 가장 키메라의 상태가 위험해 보이는 합천부터 피난을 부탁드릴게요.」
분위기가 약간 어수선해진 상황에서도 디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이 동의한 직후 에펠로나와 그림자의 빛이 마법사들을 이동시켰다.
빛으로 가득했던 문 안쪽은 한 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최인성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옛날 영화나 어린아이 용 연극에서 익히 들었던 것 같은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주위에 가득했다.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뚜렷한 언어가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딱히 방심하지는 않았는데…….”
최인성이 여전히 옆에 서 있는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갈라졌네.”
최인성의 오른편에 서 있었던 강인하가 어느새 없었다. 이성진이 무심히 대답했다.
“어차피 인하와 우리의 목적은 다르니 헤어져도 별 문제가 되진 않아.”
“그렇긴 하지. 그럼 넌 일부러 갈라지도록 놔둔 거구나?”
“어. 클라렌스의 기척이 느껴졌거든.”
“클라인 남매가……클라렌스가 질 걸 알면서 둘이 만나도록 놔둔다고?”
“다 같이 죽을 각오를 마쳤나 보지.”
“하여간 미친 것들…….”
미소가 무너지며 눈동자 너머의 음울한 분노가 최인성의 표정을 물들였다.
“클라렌스와 아피스는 인하의 빛에 한 번 당했어. 설령 미로에 흘러든다 해도 인하라면 소속마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찾아낼 거야. 혹은 인하를 가두고 동료와의 연락을 위해 클라렌스와 아피스를 한국에서 내보낸다 해도…….”
미소 짓는 이성진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담겼다. 최인성이 자주 짓는 ‘분노를 숨긴 미소’는 이성진에게서 배운 표정이었다. 흉내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의 미소가 풍기는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은하와 소영이가 있으니 놓칠 일은 없어.”
“응. 하지만 그 정도는 클라인 남매도 알 테니 그럴 일은 없다고 봐.”
“그건 그렇겠군.”
최인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성진을 향해 약간 의문을 드러냈다.
“너도 참 철저하게 지킨다. 어떻게 공과 사를 그렇게 잘 구분하는 거야?”
“네가 할 말이냐? 그리고……한 번 외면 받았던 적이 있는 만큼 리더의 분노는 사고 싶지 않아.”
“아, 그땐 정말 고생했지.”
“정신적으로 괴로웠어.”
최인성은 불과 몇 년 전의 과거를 떠올렸다. 복수를 결심한 초기에 그들은 이성진의 말을 본능적으로 믿고 따랐다. 그들 중에서 이성진이 가장 스스로의 중심을 잘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유은하 역시 이성진을 믿고 의지했다. 하지만 복수의 시작으로부터 몇 년 후, 약 1년 정도 유은하가 이성진을 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성진은 그 시기 동안 냉랭한 표정 속에 감정을 숨기며 많이 고뇌했고, 괴로워했다. 적어도 다른 동료들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괴로워했다.
강인하와 이소영은 그 시기에 이성진이 고뇌했다는 사실만 알 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모른다. 이성진이 잘 숨겼기 때문이다. 무너질 것 같은 처참한 표정을 본 건 최인성뿐이었다.
그래서 더……유은하와 이성진의 사이를 응원했었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
최인성은 이성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발랄한 아코디언 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시공간마법으로 시간을 비튼 공간……이려나.”
“‘찬란한 추억’.”
클라인 남매가 읊었던 언령 그대로 빛에 바랜 ‘찬란한 추억’이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몇 번이고 마법이나 기억을 통해 보았던, 어린 시절 최인성과 이성진이 살던 마을이다. 최인성의 눈빛이 섬뜩한 빛을 품었다. 이 풍경을 망쳤던 게 누구였던가.
“‘그리움, 사랑, 눈물, 행복, 미소, 다정함, 과거, 삶’.”
최인성이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한국에 숨겨둔 악보는 시간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안배였나 봐.”
“사용한다기보다, 지금 보니 한국에 담긴 모든 시간을 힘으로 변환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군. 아니면 반대로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시간으로 변환시킬 생각이었던가. 이걸로 알겠군. 한국의 완성형은 거대한 시공간마법일 거야.”
“어때? 지금도 그 예상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래, 오히려 확신했어. 시간이 모이고 다시 탄생하는 장소. 한국은 틀림없이 그 녀석들이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세계의 구심점이다.”
그렇다면 숨겨진 ‘문’ 역시 트라베리아와 통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가……. 으음, 이렇게 보니 클라인 남매의 특기가 왜 시간마법인지 알 것 같아. 그들의 마법은 시간의 결정체였던 거야. 아니, 사실 모든 마법은 따지고 보면 시간의 결정체지만, 그래도 예술만큼 사람의 시간과 역사가 드러나는 힘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놈들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가 6년간 소리를 차곡차곡 쌓은 결과가 바로 지금의 한국이라는 거지.”
“응.”
“아니, 6년이란 표현은 잘못됐나. 클라인 남매에게 지배당한 꽉 닫힌 6년, 한국의 모든 과거, 지금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 클라인 남매와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고대하고 고대하여 갈고 닦은 몇 백 년. 그것이 쌓여 만들어진 게 지금의 한국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무시무시하네.”
시간은 지나면 자연스럽게 쌓인다. 그 흘러간 세월을 소리를 통해 모조리 빛으로 바꾸는 게 클라인 남매의 힘이라면, 설령 미리 눈치챘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막고 대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게 최선이다.
“인하도 지금쯤 과거의 풍경 속에 있으려나.”
최인성과 이성진의 몸 위로 얼핏 어린 시절의 형상 혹은 시간이 스쳤다 사라졌다. 보통 마법사였다면 시간의 이치에 맞춰 어린 모습으로 돌아갔으리라. 하지만 이성진과 최인성은 시공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데 설마 이게 연주회라는 건 아니겠지? 이건 너희의 음악이 아니잖아.”
질문에 반응한 것처럼 공간이 일그러지며 길이 바뀌었다. 그들은 어느새 어두운 극장의 막 앞에 서 있었다. 막 앞에 놓인 축음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어떨까? 음악가들이 연주회에서 피로하는 음악은 자작곡보다는 이전부터 내려온 익히 알려진 곡일 경우가 많으니까. 작품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쌓으며 변화하지. 그러니 여기 한국은 우리가 만들고 엮은 가장 위대한 음악이란다.]“방금 그 음악은 우리의 소리를 이용한 거잖아. 저작권은 어디 갔어?”
[저건 너희만의 음악이 아니란다. 나는 너희의 음악에 반응한 한국의 시간을 너희에게 보내 주었을 분이야. 그곳에 흐르는 연주의 저작권은 굳이 따지자면 이 나라에 있고, 이 나라는 지금 우리의 것이지. 저작권을 논하려면 한국을 우리에게서 돌려받고 말하도록 해.]“양아치들 같으니라고.”
[말이 심하네~. 그리고 우리는 너희의 소리를 따라 연주할 수는 있어도 너희의 기억에서 소리를 빼낼 수는 없어. 특히 사신님의 기억을 어떻게 건드리겠니?]이성진이 골치 아프다는 눈으로 붉은 막을 매만졌다.
“너희가 주위에 흘려 놓은 음악은 즉…….”
[세계의 기억.]릴리가 작게 속삭였다.
[한국은 지금 추억을 노래하고 있어. 그 풍경은 너희를 사랑하는 대지가 너희에게 보여 주는 풍경이야.]최인성이 인상을 썼다. 지금은 클라인 남매가 지배하고 있지만 그들이 있는 이 땅은 한국, 별무리 모두가 어린 시절을 보낸 땅이다.
[우리의 마법에 엮여 있는 한 가닥이 너희를 향해 흘러갔을 뿐, 너희 말대로 연주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너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연주회관의 입구야.]“입구라…….”
최인성은 잠시 긴장을 삼켰다. 그는 성장했고, 지금이라면 분명 클라인 남매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실력과는 별개로 커븐 로드는 몇백 년 동안 마법을 탐구해 한 분야의 극의 극에 도달한 마법사였다.
유클라프가 공간마법으로 세계의 구조를 바꾼다면, 클라인 남매는 음악으로 세계를 만든다. 그들은 하나같이 경이롭기 그지없는 권좌에 있다.
[그 장막을 넘어오면 서곡이야! 해설이 필요하면 손뼉을 두 번 치면 돼.]래넌이 시범을 보이듯 손뼉을 두 번 쳤다. 아코디언 소리는 어느새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성진과 최인성은 여전히 미지에 가까운 두 사람의 마법을 조금 더 알기 위해 그들이 내세운 규칙을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클라인 남매가 지배하는 한국의 중심에서 두 사람이 만든 규칙을 거부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
이성진이 망설임 없이 막을 열어젖혔다.
막 안으로 들어서자 반투명한 황금빛 길이 그들을 맞았다. 길은 하늘을 향해 이어지며, 중간중간 롤러코스터 선로처럼 기울어진다. 풍경 저편에 있는 투명한 외벽 덕에 한국의 광경이 비쳤다. 하늘을 둘러싼 덩굴 트라던트, 한국에 솟아오른 커다란 트라던트, 모두 몸에 지닌 색상은 달라도 하나같이 황금색 시간을 뿌리고 있었다.
트라던트를 둘러싼 빛이 점점 커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귀에 들리는 곡조가 변화했다.
“변하는 한국이 ‘서곡’이라. 언제나 그렇지만 참 악취미네.”
“디나를 중심으로 다들 잘 움직이고 있는 것 같군.”
바깥이 보일 뿐만 아니라 감각도 연결된다. 그 덕에 두 사람은 바깥의 상황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최인성이 심어둔 그림자를 따라 디나의 ‘생명의 호수’가 퍼진다. 그림자와 꿈을 통해 디나, 김준영, 서한울, 노아가 길을 안내한다. 계약의 각인이 심어졌던 6명의 마법사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살아 숨 쉬고 있다.
움직이는 마법사들, 꿈에 젖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트라던트 빛에 잡아 삼켜지는 키메라.
상황은 저리도 급박한데 주위를 맴도는 곡은 발랄하다. 현악기를 중심으로 온화한 음률이 몇 번 활발하고 발랄하게 튕겼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래도 바깥의 동료들이 잘해 주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클라인 남매는 연주회라고 초대해 놓고 말뿐인 행동으로 시간을 끄는 둥, 전면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과 명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그에 맞는 길을 택한다. 그게 커븐 로드라는 족속들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 끝에 계단이 보였다. 마력의 움직임이나 분위기로 보아 계단 너머부터 구간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최인성은 계단에 도달하기 전 잠시 멈춰서 손뼉을 두 번 쳤다.
“왜?”
“무슨 일이 생기나 확인해 보려고.”
길 한가운데에 황금빛이 모이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클라인 남매의 측근이며 한때 무기 연합 캐티아의 부총수였던 필립 패스너다. 최인성은 예전에 비해 야윈 필립을 훑었다.
“살아 있었네요?”
“최대한 오래 살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살아 있어야지.”
필립은 죽는 게 무서워 캐티아를 배신했고, 현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꽤 덤덤해 보였다.
“해설자인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질문에 대답하는 것. 그리고 나는 여기, 서곡만의 해설자다.”
“다음 곡의 해설자는 누구죠?”
“반.”
배신할 만한 타이밍이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반과 데미안은 아직 적인 그대로다. 그것과는 별개로 최인성과 이성진은 그 말에 의문스러워졌다.
“……반은 말이 느려서 해설에는 안 맞지 않나?”
“스스로 자원했다. 한 번 해설을 불렀으니 자동으로 다른 해설자와도 전부 마주치게 된다.”
“다음 해설자는 또 누군데요?”
“지스.”
“그 다음은?”
“커븐 로드 두 분이시다.”
다행히 넘어야 할 구간이 많지 않다. 최인성은 질문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답을 줄 수 있죠?”
“애매한 질문이군. 그렇다면 해설자로서 내게 맡겨진 말을 하겠다.”
필립이 손을 뻗었다.
“서곡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길이 없는 곳으로 움직여라. 변화하는 한국을 더 구석구석 확인할 수 있다.”
최인성이 발로 바닥을 몇 번 두드렸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돌아가는 건 내키지 않네요.”
“그리고 지난 한국에 대해…….”
필립이 금빛으로 빛나는 한국을 어딘지 경탄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청와대에 대해, 최상헌에 대해,”
“…….”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마. 그게 서곡의 해설자인 내 역할이다.”
최인성과 이성진의 눈에 살기가 섞였다.
“설마 그걸 해설이라고 맡겼을 줄이야……. 정말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네.”
“찬란한 추억. 추억은 지나면 전부 과거가 된다. 클라인 두 분은 내게 해설을 맡기기 전 그렇게 말씀하셨다.”
최인성은 그 말의 의미를 잠깐 생각했다. 기분이 더러운 것과는 별개로, 죽은 최상헌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자는 이제 아주 적다. 지난 십 몇 년 간 최상헌을 가장 가까이서 본 것은 클라인 남매다. 필립은 짧은 몇 년간이나마 최상헌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최인성은 진득하게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필립을 지나쳐 계단을 올렸다.
“그래요. 그러면 다음에 듣지요.”
“……그래. 긴 서곡은 끝났다.”
계단은 생각보다 높았다. 한 칸, 한 칸, 올라갈 때마다 풍경이 바뀌었다.
“해설자로서 마지막으로 하나 말하마.”
“…….”
“나는 어린 너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말에 최인성과 이성진의 걸음이 멎었다.
“캐티아에서 거래하면서 너희 가족과 두어 번 만났다.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은 적었지만 전화로는 제법 이야기를 나눴지. 너희 아버지의 작품은 그만큼 인기가 있었거든.”
“…….”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모두 두렵지만, 그 중에서도 클라인 남매가 가장 무섭다고 생각한 것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최상헌을 만나고, 그들의 예술에 대한 사상을 들었을 때였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 한줄기 놓치지 않으며, 강한 마법사를 앞에 두고 우리 같은 범인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형일 뿐. 같은 장인으로서 최상헌과는 한국에서도 그럭저럭 교류를 나눴다. 3년……정도 목숨을 연장했나. 생각보다는 길었다. 놀랍게도 길게 느껴지는군.”
최인성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성진과 함께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죽음이 무섭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토록 괴로웠는데, 무엇 때문에 무서움을 잊게 되었을까. 죽음이, 공포가, 추억이 되어버려서? 고통과 공포를 잊게 하는 클라인 남매의 온화한 음악에 완전히 물들어서? 아니면…….”
화르륵….
그 소리는 한국에서 움직이거나 터지는 빛의 소리에 비하면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성진과 최인성은 놀라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필립의 가슴에서 터진 금색 불꽃이 필립의 몸을 감싸 빛으로 바꾸고 있다.
“무슨…!”
걸어 올라갈 때와 달리 두 사람은 단숨에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렸다. 이성진은 타오르는 필립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숨겨져 있을 때는 알 수 없지만, 발동하면 알 수 있다.
“소리의 각인이로군.”
이성진이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최상헌이나 6명의 계약자 안에 있던 것과 비슷한 ‘소리의 계약서’가 필립의 안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말했지 않나. 지난 추억은 과거가 된다.”
“…….”
“과거는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하…!”
“너희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다.”
‘너희를 제외한’, 최인성의 표정이 굳었다.
“했던 말과 다르네. 바로 삼키기 어렵다더니, 이제 보니 우리를 ‘과거’에 남겨 둘 생각이 없는 거잖아. 그 녀석들 우리랑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있는 거야?”
그리고 클라인 남매가 칭한 ‘너희’는 필시 별무리 세 명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죽는 게 무섭다고 했을 때, 두 분은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보다는 조금 오래 살게 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무렵이 되면 죽는 게 무섭지 않아질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내심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필립의 가슴에서 시작된 불꽃은 머지않아 필립의 온몸을 덮었다. 과거, 죽음이 무서워 동료를 배신하고 트라베리아의 밑에 들어간 자는 자신의 존재가 음악으로 변해 세상에 흩어지는 것을 초연한 눈으로 받아들였다. 필립의 몸이 불꽃으로 변해감에 따라 서곡의 풍경 역시 온통 금색으로 물들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니 우습군. 내 삶은 이제 과거에…….”
뒷말을 흐린 필립이 이내 어느 때와 다름없이 냉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가라. 서곡이 끝나기 전에.”
공간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최인성은 이성진에게 목깃을 붙잡혀 계단에 끌려 올라가면서도 서곡의 그림자를 상세히 살폈다. 한국의 주요 트라던트와 연동되어 있는….
콰과과과과─!
계단 끝에는 새로운 막이 있었다. 이성진의 손이 막에 닿은 순간 엄청난 빛과 커다란 화음이 그들이 지난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온통 빛뿐이라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는 과거를 응시하던 최인성이 인상을 썼다.
“참 기분 더럽게 만드네.”
이번에는 막 옆에 아무것도 없었다. 최인성이 막을 걷으려 한 순간 막 너머에서 푸른빛이 도는 띠는 창백한 손이 나왔다. 다음 해설자의 등장이었다.
“좀비, 반인가.”
“왜 손만 보여 주는 거지?”
창백한 손이 막 사이에서 힘없이 몇 번 움직였다.
“잡으라는 건가?”
이성진이 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막이 열리며 넓은 공간이 그들을 삼켰다. 공간 너머로는 여전히 한국의 풍경이 선명하게 비쳤으며, 그들 주위로는 녹음이 짙고 높은 건물이 많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전주곡.”
목소리를 따라 앞을 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정장을 차려 입은 반이 이성진의 손을 놓았다.
“안녕….”
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곧바로 최인성이 질문했다.
“당신도 해설이 끝나면 트라던트에 삼켜져 사라집니까?”
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트라던트에 물들지 않았으니까……. 내 특수한 이력…때문에…….”
반이 천천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조금……물들고 오래…….”
“물들 때까지는 삼켜지지 않는다는 겁니까?”
“응…….”
“너희 키메라도 각인이 새겨져 있나?”
“음…. 없을…걸? 우리는, 문장이 있고, 표식도 있고…. 그리고, 있더라도……몰라. 알 수 없어….”
적어도 유은하 일행은 트라베리아의 측근들에게서 ‘각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계약자들 안에 있는 각인은 계약의 증표가 새겨져 있다는 전제로 샅샅이 뒤진 후에야 찾아냈고, 필립의 안에 소리의 각인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발동된 후에야 알았다.
“필립한테 새겨진 것도……몰랐는걸…….”
유은하 일행이 찾아내지 못했듯, 반 역시 필립의 안에 소리의 각인이 새겨진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반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이 그들의 안을 파고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다지 강한 힘은 아니었다.
“여긴……대지의 기억……. 대지의 기억이, 전주곡…….”
최인성이 혀를 찼다.
“무슨 준비곡이 두 곡이나 됩니까?”
“최대한 많이, 다양하게……담고 싶다고…….”
“들어오자마자 공격할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정신을 물들일 정도로 짙거나 혼란스러운 음악인 것도 아니고.”
“이 정도 힘이면, 보통은…물들어……. 성향에 따라……더 잘 물들고…….”
반의 눈빛이 드물게도 날카로워졌다.
“무르시엘의, 하무라 처럼, 정신 방벽이 강한 수준이더라도……1악장에 들어가면……물들걸…? 다른 사람이라면…여기에서…….”
“여기의 연주가 그 정도로 전염력이 강합니까?”
“자연의 가호…….”
그 대답에 최인성은 그만 납득했다.
소리의 각인을 발견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클라인 남매가 연주하는 음악의 진면목은 그들이 ‘소리’라는 자연과 교감한다는 것에 있다. 클라인 남매의 음악은 보이는 마력보다 더 강하다.
“하물며 여긴…한국의 중심부……. 대지의 기억은……특히, 자연의 가호가 강해…….”
“…….”
최인성과 이성진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걸을 때마다 풍경이 변했다. 다양한 건축물, 짐승들, 식물들, 기후, 대지.
“하지만, 두 분은……이정도 음악으론…두 사람한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아…….”
“생각보다 수다스럽군.”
반이 느릿느릿, 그러나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얼굴에 밝은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해설자가 됐어…….”
그 후로도 반은 조금씩 떠들었다. 보이는 풍경이 어디의 풍경인지,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 사소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가끔 중요한 이야기도 나왔다. 서곡과 전주곡이 어느 지역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그중 하나였다. 첸과 라스의 동기인 ‘쟈넷’의 이야기도 나왔다.
“쟈넷은 요즘 데미안을 잘 따라……. 혹시 첸이 궁금해 하진 않고…? 조금, 의외야……. 둘 중 한 명은, 여기에…올 줄 알았는데…….”
“인원을 추리고 추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최인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나왔다.
“필립이 완전히 닳아 버린 건, 유일하게 같은 인간 측근인 최상헌이…사랑을 택한 걸 보고 난 후야……. 음……그러니까, 청와대 숙소에 사는 인간 측근은, 둘뿐이었어……. 그래서 필립은, 최상헌에게 동질감을 가지고…있었거든……. 하지만 선택은…많이 달랐어….”
“…….”
“미안……. 음, 아….”
반이 조금 전보다 차갑거나 사나워진 이성진과 최인성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이번엔 그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강인하는 간주곡에 있어…….”
“우리랑 마주칠까?”
“아니…….”
반이 고개를 저었다.
“길이 달라서……. 1악장이랑 2악장엔 지스 님……3악장에 래넌 님……4악장에, 릴리 님…….”
반이 검지와 엄지를 세워 사이를 벌렸다.
“강인하는 악장들의 틈새에 있어…….”
“틈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