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4
훈련실을 나선 후 잠시 밖에서 놀던 우리는 오랜만에 유정 언니, 인호 오빠와 함께 민희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우리가 주로 모이는 장소는 예전부터 계속 민희네 집이다. 그건 익숙해져서 편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초등학생인 민희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보통 2~3시지만 제현 오빠는 보통 6시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혹은 실습 때문에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동안 민희는 혼자다. 때문에 우리는 외로움을 잘 타는 민희의 집으로 자주 놀러 갔다.
민희의 집 앞에 도착하자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앞뜰에서 서성이고 있던 시하가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특히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를 보고 놀랐다.
“어? 시하야, 웬일이야?”
“아, 응. 엄마가 반찬 좀 갖다 주라고 하더라고. 근데 민희 네가 아직 집에 없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들어가 있지. 마력 인식 되어 있잖아?”
“그, 그러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다. 나는 약간 머뭇거리며 시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시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가……. 나만이 아니라 시하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시하가 나를 한 번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기왕 온 김에 너도 같이 놀다 가! 오랜만에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가 놀러 왔으니까! 요즘 너랑 별로 안 논 것 같아. 그러니까, 응?”
민희의 말에 시하가 조금 고민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약간 눈빛이 흐려졌지만, 시하는 곧 웃었다.
“응. 그럼, 그럴게.”
“와!”
우리는 다 함께 민희의 집에 들어섰다. 부모님 없이 둘이서만 사는 것치고 민희의 집은 꽤 깔끔했고, 또 넓었다. 하긴, 청소 로봇이 있으니까. 저 로봇의 손은 두꺼운 집게 손이라 요리는 잘 못하지만 청소나 빨래는 척척 한다. 가끔 보면 정말 신기하더라. 어떤 회사에선 안드로이드도 개발했다지. 다만 아직은……매우, 엄청, 천문학적으로 비싸다더라.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친구들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으며 거실로 달려갔다. 인하만이 나를 따라서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아, 참고로 시하는 그런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민희에게 끌려 들어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그리워서 기분이 묘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보던 모습인데 싶어서.
나는 복도를 따라가며 이미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친구들을 향해 물었다.
“뭔가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민희야, 지금 집에 뭐 있어?”
“응? 으음……음료수는 없고……맞다! 녹차가 있어! 밖이 추우니까 그걸 마시자. 그리고 저기 위에 찬장 안에 과자가 있어. 냉장고에 귤이 있고.”
“그래, 알았어.”
내가 주방으로 향하자 민희는 다시 친구들과 대화에 집중했다. 집에서 놀 때 간식을 준비하는 건 주로 내가 한다. 아니, 여긴 우리 집이 아닌데 말이죠.
간식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손님이 오면 보통 상을 좀 차리잖아? 또 이야기를 나눌 때 간식이 없으면 뭔가 좀 허전하고. 그런 생각에 내가 준비하고 있으면 인하가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와 도왔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이런 건 항상 나와 인하가 하는 일이 됐다. 뭐, 불만은 없다. 냉장고를 뒤지면서 몰래 조금 더 먹고 있기도 하고.
사실 나, 이래 봬도 많이 먹는다. 아니, 진짜로. 라면 한 개를 끓인 뒤 밥을 말아 먹어도 배가 조금 남는다니까? 아이치고는 경이로운 위장이다.
내가 과자를, 인하가 마실 것을 준비했다. 나는 그릇에 귤을 쌓았다. 작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진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재밌었다. 인하도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티백을 넣어 녹차를 완성했다. 인하가 나를 보며 물었다.
“녹차는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긴, 쟤네는 뭐든 먹지만.”
“맞아.”
우리는 쟁반 위에 간식을 올리고서 조심조심 부엌을 나섰다. 민희네 집은 다행히 복도와 방 사이에 턱이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질 테니까. 아직 몸이 작아서 이런 걸 들면 앞이나 아래가 잘 안 보여 걷기가 매우 불편하다.
우리가 부엌을 나서는데 덜컹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과 복도 하나로 이어진 맞은편 거실로 들어가려던 우리는 잠시 발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막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아까 느꼈던 제현 오빠의 위압감을 떠올리곤 무심코 흠칫했다.
“어, 은하랑 인하네. 와 있었구나.”
천호 오빠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와 인하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제현 오빠가 성큼성큼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방에 가기 위해선가. 그렇게 생각하고 한 걸음 뒤로 비키려고 하는데, 제현 오빠가 나와 인하가 들고 있던 쟁반을 빼앗았다.
“……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간식이네. 또 누가 와 있어?”
“어……한수랑, 현호랑, 시하랑, 인호 오빠랑 유정 언니요.”
“많이도 왔네. 아, 이건 내가 갖다 놓을게.”
“어,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내 인사에 제현 오빠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나는 안심했다. 제현 오빠가 쟁반을 들고 거실 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오빠, 어서 와! 미안, 대화에 심취해서 몰랐어.”
“호오. 이제 그런 단어도 쓸 줄 아냐? 책을 싫어하는 네가 별일이네.”
“에헤헤. 은하한테서 배웠지롱!”
“그럴 줄 알았다.”
“그게, 그게, 굉장해. 은하는 어려운 말을 많이 쓰거든. 그러다 보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알게 됐어. 국어 시간에도 칭찬받았어. 국어 시간에 나온 단어, 다른 애들은 다 모르는데 우리는 알고 있었거든. 평소에 은하가 쓰던 말이라서!”
“그래?”
음, 나는 뺨을 긁적였다. 그야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데다, 뭣보다 소설가였던 만큼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어휘를 알고 있는 편이다. 나 같은 경우엔 그 단어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기에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돌 맞겠지…….
나와 인하는 친구들 옆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현 오빠는 잠깐 한수와 시하, 현호와 인호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해 준 뒤(한수는 여전히 질색하더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가기 전에 내 머리도 쓰다듬어 줬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이제 익숙하게 정리했다.
“인호 형이랑 유정 누나를 만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네. 오늘은 웬일로 같이 온 거야?”
“응? 아, 수준별 수업 하나를 같이 배우게 됐거든.”
유정 언니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자 시하가 놀랐다.
“수준별 수업……?”
“응.”
유정 언니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다물었다. 시하가 머뭇거리며 유정 언니의 눈치를 봤다. 아! 민희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 시하한텐 아직 말을 안 했었네. 우리한테 개인 선생님이 생긴 거 알지?”
“그야, 응…….”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게 전투 훈련인데, 근데, 전투 훈련은 제대로 하려면 대련 상대가 필요하잖아. 그치만 선생님들과는 실력 차가 너무 많이 나니까. 가상 상대랑 하는 대련만으론 좀 많이 부족하잖아? 그래서, ‘멘토링’이라는 게 있는데.”
“멘토? 그게 뭐야?”
“그러니까……선배가 가르쳐 주는 걸 말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한테 대련을 가르쳐 줄 선배가 붙었어. 고등학교 선배야. 근데 알고 보니 학생회 선배들이 가르쳐 준대! 그러니까 우리 오빠네.”
“아아…….”
시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거기에서 오랜만에 언니랑 오빠를 만났어. 아마 당분간 계속 만날걸? 같이 훈련하게 됐으니까!”
“그렇구나.”
시하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약간 머뭇거렸지만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뭔가, 안 보는 사이 나만큼 소심해진 것 같다. 나는 물끄러미 시하를 바라보다가, 문득 불안해졌다. ……정말로 그런 걸까?
“잘됐네.”
“응!”
민희는 활짝 웃었다.
대련 수업은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되었다. 우리는 방과 후, 주말을 막론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갔다. 기초만 쌓게 해 준다는 것치고는 꽤나 열심이었다. 서두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요맘때는 성인 마법사라면 다들 바쁠 시기다. 마법사 랭크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데다가, 학생회는 학생회대로 인수인계도 해야 한다. 아마 본격적으로 바쁜 시기에 접어들기 전에 우리에게 대련의 기본을 다져 주려는 것이겠지.
참고로 그 대련 이후로 우리를 지도할 선배들이 따로 정해졌는데, 내 지도 선배는 무섭게도 제현 오빠였다.
“너는 일단 직접 공격보다는 응용 기술을 연습해라.”
“응용 기술요?”
“예를 들어 이런 거지.”
휙, 나는 한순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제현 오빠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겁을 먹었지만 내 심정과는 다르게 눈은 면밀하게 그의 마력을 살폈다.
반사적으로 휙 뒤로 물러났다. 다른 건 몰라도 스승님이 회피 훈련만큼은 혹독히 시켰거든. 눈과 감지능력이 합쳐져 회피는 꽤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전 내 다리가 있던 자리에 제현 오빠의 발 공격이 지나갔다. 제현 오빠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씩 웃었다.
“뭔지 알겠냐?”
“어……. 아, 중심을 무너뜨리는 건가요?”
무술 실력은 기본만 좀 배운 애송이 수준이지만 만화와 소설, 영화를 통해서 간단한 전투 지식은 습득하고 있다. 제현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야. 바로 핵심을 찌르네.”
뜻하지 않게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몸에 익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지. 내가 직접 몸으로 상대방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까, 넌 그걸 피하면서 나한테 공격을 맞혀. 네 ‘고유마법’으로. 알겠냐?”
“저기……그, 제 고유마법은 직접공격마법이 아닌데요…….”
“그걸 어떻게 하는 것도 마법사의 역량이지. 공격에 쓸 수는 있는 마법이지?”
“그건……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각마법을 공격으로 사용한다라? 그것도 직접 공격이라고? 일단 다른 속성마법을 흉내 내야겠다. 차라리 속성마법을 사용하는 게 더 효율이 좋을 것 같지만, 나는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매우 굴렀다.
제현 오빠가 스파르타라는 말은 뻥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과장도 아니었다. 마법을 쓰고 기술을 직접 몸으로 받으면서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는지 모르겠다. 제현 오빠는 능숙해서 마법을 먹어도 몸에 약간 충격이 왔을 뿐 그게 상처나 멍으로 남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매우 힘겨웠다.
암만 열심히 훈련을 해 왔어도……그건 어디까지나 ‘연습’이다. 몸과 몸을 부딪치는 그런 게 아니라 생각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마력을 쥐어짜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마력을 많이 쓰면 몸이 많이 고단해진다. 그러나 그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첫날은 진짜 공격을 하나도 성공 못 해 구르기만 했다. 방어마법은 마력도 무술 기술도 아닌 오직 마법을 막을 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방어마법을 언제 써야 하는지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한 가지를 더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마력을 움직이려 하는 것과 마법을 쓰려고 하기 전의 마력의 움직임은……조금 다르다.’
눈과 기감을 통해 나는 그것을 느끼고 구분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방어마법을 적절히 전개할 수 있게 됐다. 제현 오빠가 그런 나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굴렀다 말했지만 훈련은 매일이 아니라 며칠에 한 번 주기였다. 학생회도 바쁘니까. 그럼 대련이 없는 날엔 뭘 했냐고 묻는다면, 그거야 당연히 마법 훈련이 아니고 뭐겠는가.
대련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스승님은 다양한 이유로 자주 나를 불러 훈련을 시켰다. 뭐, 내가 단편 소설을 써서 금상을 받은 걸 안 이후로는 훈련 외의 이유로도 부를 때(나보고 시나리오를 써 보라고 하시더라.)가 있긴 했지만 그건 젖혀 두고, 거기에는 내 의지도 다분히 들어 있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보호해야 할 동생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인하와 한수가 선배들이랑 대련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저번에 함께 대련했을 때도 ‘굉장하다. 이게 바로 재능이란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 저런 게 바로 재능이구나…….’
인하와 한수는 아직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어린 주제에 마법 센스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러자 뒤처지기 싫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는 그 재능을 갈고닦아야 한다. 왜냐고? 모두와 대등하고 싶으니까. 조금이라도 주춤한 순간 뒤처지고 말 테니까. 실력이나 재능이 대등하지 않다고 해서 마음마저 대등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호승심도 들었다.
강한 전투 마법사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역시 그건 아니다. 하지만 친구들을 보고서 나는 더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만큼, 지고 싶지 않은 만큼, 더욱더.
그래서 좀 더 열심히 훈련하기로 했다. 어느 날 서로를 돌아봤을 때 뒤처져 있는 것은 싫으니까. 게다가 난 역시 마법이 좋다! 계속해서 내 나름대로 마법을 갈고닦고 싶다. 그러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어떤 마법사가 되고 싶은 걸까?’
나는 아직 어리다. 미리 장래를 정해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장래에 커서 어떤 마법사가 되고 싶은 걸까?
마법사의 종류는 매우 많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것이 전투 마법사, 그다음에는 보조 마법사다. 보조 마법사도 종류가 많이 나뉜다. 다만 여기에서도 역시 전투 마법사를 보조하는 직업이 제일 많다.
그다음에는……장인이다. 장인 계열 마법사. 마법 무구나 마법 아이템을 개발하는 사람들. 혹은 마법을 섞어서 여러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그 외에도 마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생활마법을 개발해 내는 사람들도 있다. 의료 마법사도 대표적인 직종이다.
나는 내 마법을 되돌아보았다.
전생에 나는 어릴 적에 이루고 싶은 꿈을 정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재능을 갈고닦아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럼 지금은?
나는 마법에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러나 ‘직업’에는 목표가 없다. ‘마법사’로서의 목표는 없는 것이다.
‘인하는……전투 마법사가 되겠지? 한수는 보조 마법사가 될 수도 있겠다. 민희도, 사격마법만 봐도 전투 마법사 확정인가? 현호는 어떨까?’
선아 아줌마처럼 자기에게 맞는 의뢰를 골라 하는 프리랜서도 괜찮겠지. 내가 가지고 있는 환각, 문자, 결계를 이용해서 나는 어떤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
‘방어형 마법사니까 그런 계통으로 일하려나? 국방부라든가……결계 마법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국방부는 나라의 보안을 지키는 마법사 조직이다. 결계를 이용하여 이 나라를 커다란 위협에서부터 지키고 있다. 그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아님 우리 학교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은희 언니처럼.’
한순간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는 이루고 싶은 꿈이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그 꿈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하루하루 충만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하지만……지금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게는 마법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에는 이루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거지. 난 어리니까.’
꿈이 있는 나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전생에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 눈앞에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제현 오빠도 우리 학교의 가드가 된다고 했었지…….’
제현 오빠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천호 오빠와 함께 바로 가드가 될 거라고 그랬다. 천호 오빠도 작년에 B랭크로 올라갔다.
고민하던 나는 내가 쉽사리 꿈을 정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꿈이 정해지지 않았어도 하고 싶은 일은 많았다. 이미 마법은 내 삶 자체니까.
한동안은 그저 앞을 보자. 고유마법을 계속 개발하다 보면 언젠가 분명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관심이 생겨서 한번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스승님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어거지로 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였다. 참 나, 금상을 받았다곤 하나 아직 10살인 아이의 무엇을 믿고 시나리오를 쓰라고 하는 건지. 뭐……쓰다 보니 좀 재미가 붙긴 했지만.
처음 썼을 때 스승님이 초반부를 읽더니 ‘설마 이렇게 잘 쓸 줄이야.’ 하고 감탄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조금만 더 써 본다는 게 지금 연애 시나리오 게임 한 편을 다 쓰게 생겼다.
스승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어떤 의미지?”
“그냥 동기가 궁금해서요.”
“흠……그렇구나…….”
스승님은 내가 방금 전에 완성한 챕터 2를 읽다 말고 고민에 잠겼다.
“음……사실……별건 아니란다. 동생 친구 녀석들이 엄청난 망나니여서……그 두 녀석을 잡아 놓고 상식을 던져 주다 보니 의무감이 생겼달까……그게 보람 있어서 하게 되었던 것 같구나.”
응? 뭐라고?
나는 잠깐 당황했다. 평범한 질문을 던졌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 친구가 망나니였다고? 두 명이나?
‘난 준휘 선생님이 모범생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설마 하고 물었다.
“그거 설마 민 선생…….”
“별것 아닌 이야기다. 신경 쓰지 말거라.”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맞구나, 응. 그중 한 명이 민 선생님이구나.
사실 크게 놀랍진 않다. 민 선생님은 언뜻 친근해 보여도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타입이다.
조금 궁금해졌다.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은 어떻게 친해진 걸까. 두 사람은 정말 친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볼 때마다 대개 함께였다. 함께 걸어가거나, 함께 앉아 있거나, 서로를 향해 다정히 웃고 있다.
‘근데 한 명 더 있었다고? 그 사람은 또 누구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
나는 가끔 스승님한테 이끌려 시나리오 쓸 때를 제외하고는 훈련에 매진했다. 장래를 생각하며 고민하던 것도 그만두었다. 마법과 함께하다 보면 나에게 맞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법을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끼는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아니, 어른이라도 누군가에게 붙들려 훈련을 하라고 종용당하면 지치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 땡땡이도 치고 싶어지겠지. 나도 제현 오빠한테 붙들려 고단하게 구르다 보면 그러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친구들은 어련하랴. 게다가 수업 시간도 아니고 자유 시간을 빼서 훈련하고 있는데.
훈련을 시작한 지 보름이 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선배들에게 붙들려 대련 훈련을 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민희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아……요즘 놀 시간이 없어.”
“확실히……좀 힘드네.”
한수가 동의했다. 음, 사실 이 훈련을 전부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내가 별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하나에 빠지면 원래 푹 빠지는 성격이어서, 전생에도 그랬다. 평생 소설만 썼는데도 가끔 슬럼프가 올 때를 빼고는 질리지 않고 매일매일 소설을 쓰고 또 썼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다섯 살 때부터 꾸준히 마법을 연습해 왔는데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훈련 추가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잠시 후, 피곤한 기색으로 끙끙대던 민희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제안했다.
“……우리, 내일은 확 땡땡이칠래?”
잠시 고민하던 인하와 현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럴까?”
“그래. 가끔 쉬는 날도 있어야지~.”
나는 친구들을 보며 곤란함을 느꼈다. 심지어 거기에 인하마저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아니, 뭐, 마음은 이해해. 말하자면 초등학생이 학교 수업에 이어 학원까지 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풀타임으로 공부를 하는 기분일 것이다. 그게 2주째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다음 달이 되면 싫어도 그만두게 된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전투의 기본 요령을 최대한 많이 익혀 두고 싶어서 안달 나 죽겠는데.
친구들이 동조하자 민희가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좋아! 그럼 내일은 당당하게 땡땡이……!”
“저기, 민희야. 솔직히 그거 무리야. 왜냐면 담당하는 게 너희 오빠잖아.”
“…….”
민희가 입을 다물었다. 친구들이 시선을 피했다. 그래, 제현 오빠라고, 그 제현 오빠. 너희들이 땡땡이를 친다 한들 제현 오빠가 너희를 못 찾을 것 같니. 안 혼나고 끝날 것 같니. 그리고 원래는 우리가 제현 오빠한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다. 선배들은 매우 바쁘고 우리는 시간이 차고도 넘치는 초등학생이다. 대충 선배들이 얼마나 바쁜지 인지하고 있던 나는 그들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너무 연속으로 해서 힘드니까 내일 말고 모레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자.”
“그치만……그건 재미가 없잖아! 땡땡이의 묘미는 말 안 하고 째는 거란 말이야!”
요 꼬맹이가. 어디서 그런 톡톡 튀는 어휘를 배워 오는지. ……아, 난가? 범인 나였나?
“오빠네도 많이 바쁠 거 아냐. 어차피 다음 달이면 수업은 끝나. 그냥 빨리하고 끝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자 민희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은하 넌 힘들지도 않아?”
“난 전투가 서툴잖아. 어차피 전투 마법사는 안 할 것 같고, 그러니까 배울 수 있을 때 배워 두고 싶어.”
“체엣. 은하는 너무 고지식해! 원래 좀 땡땡이도 쳐 봐야 하는 거라고!”
민희는 휙,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쨌거나 우린 땡땡이칠 거야! 흥! 너희들도 째고 싶지?”
“뭐…….”
한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에 반해 현호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게 힘들었나? 아니다, 그렇게 놀고 싶었나? 설마 인하까지……정말로 의외였다.
“흥!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한테도 연락할 거지롱! 알았지? 우린 내일 안 갈 거다! 괜히 혼자 가서 후회하지나 마!”
“어, 야!”
민희는 완전히 삐쳐서는 당황하는 한수와 인하, 현호를 이끌고 함께 텔레포트 해 사라져 버렸다. 이런…….
내일은 주말, 확실히 친구들이 쉬고 싶어 할 만도 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어떻게 하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심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많이도 의견 차이를 빚었다. 이런 사소한 다툼은 하루만 지나면 괜찮아진다. 분명 민희라면 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은하 너 치사해~.’라면서 틱틱대다가 다시 평소처럼 웃겠지.
걱정인 건 제현 오빠한테 혼나는 건데……에라이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다음 날, 친구들은 예고한 대로 훈련에 불참석했다. 나는 당일이 되어서야 ‘그래도 제현 오빠한텐 뭐라 말을 해 뒀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 평소엔 다 같이 왔었는데 오늘은 나만 홀로 쭈뼛거리며 훈련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제현 오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그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땡땡이군.”
으엉? 아직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데 바로 확신하는 거야? 나는 약간 당황했다. 선배들이 흘끗 나를 돌아보며 동의했다.
“하긴, 애들이니까. 슬슬 힘들다고 울 때도 됐지. 여태까지 약한 소리 한 번 안 뱉었으니 오히려 제법이야.”
“은하는 왔네? 빠질 거면 친구들이랑 다 같이 빠져도 되는데.”
선배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모였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유서준 선배의 말에 대답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애매하게 아는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어색하다.
“전 그냥 열심히 훈련하려고요…….”
“장하다. 안 힘드냐?”
“힘들긴 한데, 그래도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싶어요. 마법을 좋아하니까…….”
유서준 선배가 놀라며 눈을 크게 떴고, 제현 오빠가 밝게 웃었다. 와, 제현 오빠가 이렇게 웃는 건 보기 힘든데. 제현 오빠가 나에게 다가와 이제 꽤 길어진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넌 진짜 어떤 마법사가 돼도 크게 될 거야.”
직설적인 칭찬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에헤헤. 그때 뒤에서 벌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어? 나는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한수는 마주 보고 서 있는 나와 제현 오빠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해?”
“아무것도……. 한수 넌 땡땡이치는 거 아니었어?”
“생각해 봤는데, 나도 그냥 하려고.”
한수가 픽 웃었다.
“내가 이번에 인하 그 녀석 따돌린다고 고생 좀 했다. 민희 찔러서 인하 못 도망가게 한 다음 빠져나왔거든.”
“이런…….”
그럼 지금쯤 인하는 엄청 삐쳐 있겠군. 한수는 어린애면서 재능도 뛰어나고 심지어 노력파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나야 뭐 진짜 어린애가 아니니 논외다.
혼자가 아니란 게 조금 기뻤다. 그래서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수를 향해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서 솔직히 안심했어. 우리 하는 이상 열심히 하자.”
“……어어, 그래.”
한수가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제현 오빠가 우리를 보며 약간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우리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자, 그럼, 오늘 훈련 시작한다.”
주민희는 지금 완전히 삐쳐 있었다. 원래부터 성실한 유은하는 그렇다 치자. 박한수마저 훈련에 나갈 건 또 뭐란 말인가.
『발신인: 한수♧
생각해봣는데 난갈란다.』
주민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박한수가 가면 틀림없이 유은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강인하도 따라가려 할 거다. 주민희는 강인하마저 보낼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지금 강인하의 팔을 꼭 붙들고 있었다.
‘씨. 역시 식물 빠돌이라고 저장해 버릴까 보다.’
참고로 저번에 쓰려다가 걸려서 좌절된 닉네임이었다.
반면, 강인하는 지금 좌불안석이었다. 속으로는 박한수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혼자만 은하한테 가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훈련을 하러 나갈 걸 그랬다. 힘들다는 것에 동의한 결과가 이거였다. 강인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친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실하다. 심지어 유은하는 선배들과의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도 또 훈련을 한다. 누구나 그 모습엔 기가 질릴 것이다.
강인하도 이제는 모든 것을 서로에게 말할 나이가 지났다는 것을 알고 있고, 혼자 훈련을 한다고 해서 1학년 때처럼 마구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들의 선생님들도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