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43
‘어떻게 다시 균열에 돌아가기는……어렵겠네. 거기다 이제 저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때 바로 옆에서 오선과 현이 어긋나며 숨어 있던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하 선배?”
시온과 김준영을 위시한 일본 기거시민 피난 팀이었다. 강인하는 김준영의 손을 따라 커튼처럼 밀려난 현 덩굴을 바라보고 감탄했다. 감각이 음악으로 변한 상황에서도 김준영은 클라인 남매의 마법에 교감하여 그들의 마법을 일정 이상 비틀고 있다. 시온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역시 인하 씨였군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서 놀랐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큰 부상은 없어 보입니다.”
무하의 의사가 강인하를 한 번 살폈다.
“몸은 괜찮아. 음악에 밀려 악장에서 쫓겨났어. 그래도 뭐…….”
강인하는 힘을 빼앗으려드는 솜털을 태우며 속삭였다.
“내가 할 일은 했어. 했지만……으음…….”
“청와대에 돌려보내 드릴까요? 선배 혼자선 못 돌아갈 것 같은데.”
김준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클라인 남매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강인하 혼자 힘으로는 청와대 안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강인하는 시선을 가라앉히며 청와대에 남은 적의 숫자를 속으로 셈했다.
클라렌스는 검으로 심판해 죽였다. 슈카는 아피스를 감싸고 죽었다.
‘클라인 남매, 제르간, 지스, 아피스, 오제.’
강인하는 조금 망설이다 꼽았다.
‘반, 데미안.’
문장을 제거할만한 상황이 찾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반과 데미안도 적이다. 고민하던 강인하는 솜털로 가득 찬 주위를 쭉 돌아보았다.
“…아니. 괜찮아. 거기다 너는 나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기분 나쁜 장소를 그림자 길이 아니라 현실을 따라 걷고 있다니.”
“그게, 바다 너머로는 그림자 길이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하물며 이런 무시무시한 환경 속에서 길을 잇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요. 귀환 때는 에펠로나 씨가 길을 열어주기로 했는데, 이젠 그것도 어려울 것 같네요.”
“확실히 무시무시해.”
클라인 남매의 음악은 힘의 특수함은 물론 강함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마력을 빼앗는다. 강인하도 지금은 태우는 음악보다 빼앗기는 마력 양이 더 많았다.
“움직이는 중에 갑자기 변하더군요. 하지만 김준영 씨가 음악과 교감하여 가호를 펼친 덕분에 첫 접촉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접촉한다고 죽지는 않았겠지만……기분은 많이 더러웠겠지요.”
“그거 때문에 바다를 건너는 데 공연히 시간이 많이 걸렸어.”
서한울이 투덜댔다. 강인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의 몸을 빛으로 감쌌다. 그때 멀리에서 빛이 번쩍였다. 강인하는 에펠로나의 신호를 향해 빛을 뿌리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턴 나도 피난을 도울게. 일본과 중국의 첫 번째 트라던트가 도시를 집어삼키기까지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서두르자.”
강인하의 빛이 이번엔 주위를 둥글게 휘감아 방어막을 만들었다. 강인하는 일행과 함께 순식간에 일본으로 쏘아져 나갔다.
숨이 막히는 기분과 함께 최인성은 느릿느릿 눈을 떴다. 가늘고 흐린 시야 사이로 드넓은 봄이 그를 맞았다.
‘격자…?’
격자가 연속되어 이루어진 줄 알았던 둥근 유리 돔은 자세히 보니 둥글게 말린 투명한 필름 무리였다.
금색 솜털로 가득한 바닥, 여린 풀잎과 싱그러운 꽃잎.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먼 곳에 있는 넓은 정원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저택이 있고, 2단 분수대를 중심으로 정원에 다양한 물건이 늘어서 있다.
꽃으로 장식된 하얀 테이블, 3단 트레이에 올려진 디저트 세트.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함 무리와 많은 양복들. 액자에 싸여 세워진 수백 장의 그림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악기들, 화려한 장식품.
잘 보니 물건들이 종류에 따라 모여 있다. 악기도 재료에 따라 달리 모여 있다. 정원을 이용한 전시관인가…….
……머릿속에 계속 발랄한 음악이 흘러 들어왔다.
의식이 몽롱하고, 온마력이 하늘에 흩어져 붕 떠다니는 것 같다. 하늘에 흩날리는 꽃잎과 솜털은 누군가의 기억이거나, 누군가가 만든 악보다. 그리운 목소리가 스친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림…….
자……가…….
……………………….
“찢어져라!”
낮은 목소리가 눈부시고 평화로운 광경에 금을 그었다. 최인성은 앞으로 쓰러지며 기침했다.
“윽……쿨럭!”
여유롭게 연주를 이어가던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 씨?”
최인성은 낯선 손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다급히 뒤돌았다. 딱딱한 검은 비늘이 돋은 손의 주인은 바로 장군 시리즈 데미안이었다.
최인성은 비로소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주위를 돔처럼 메운 필름 칸 안에 자신은 갇혀 있었다.
‘찬란한 추억’ 속에.
“우윽….”
자세히 보니 필름무리가 유리 돔처럼 두꺼워 보였던 건 여러 장의 필름이 겹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최인성은 구역질을 삼켰다. 그사이 그림자 세계가 너무 희미해졌다. 데미안이 최인성의 입 안에 디나가 만든 마법약을 집어넣었다.
“정신 차려라.”
“그래, 너는, 아니, ‘너희’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릴리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첸, 라스, 이그니와 사이가 좋았지.”
최인성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몸이 온통 음악 덩굴에 휘감겨 엉망이었다. 여전히 정신은 둔하고, 마력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데미안이 인상을 썼다.
“떼어 내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네 그림자는 네 것이기 이전에 유클라프와 최상헌에게서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그들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콜록, 콜록.”
콰과과광!
최인성과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도움으로 주박에서 벗어난 듯한 이성진이 덩굴에 휘감겨 엉망인 상태로 종말의 힘을 휘둘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힘이 분산되며 굽어졌다.
“그리고 너희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 그 시점에서 너희는 한 번은 저들의 음악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거다.”
릴리가 정원에 보이지 않는 래넌에게 말을 걸었다.
“래넌, 반을 주의해. 반과 데미안은 무척 친했으니 혹시 모르지. 허무로 가득 차 완전하지 않은 그 감정으로 친구를 따를지.”
릴리가 손을 휘두르자 빛무리가 최인성 일행의 주위를 둘러쌌고, 필름 격자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한국의 수많은 추억이 뒤섞여 있는 빛무리가 그들의 시야와 감각을 어지럽혔다. 데미안이 기침했다.
“쿨럭! 젠장…….”
데미안의 핵에 새겨진 표식이 평소와는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다. 눈부신 금빛, 클라인 남매의 색이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상대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하고 힘을 봉인하려는 움직임이다.
“가연!”
그림자의 힘을 불러내며 최인성은 데미안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문장을 제거할 시간이 없었나? 일단 약은 먹은 것 같은데. 클라인 남매의 힘이 우리의 예상을 넘어선 탓에 약만으로는 몸을 지키기 힘든 거구나.’
거세게 흐르는 음악의 흐름 속에서는 생명력에 닿는 디나, 정예리, 유은하의 힘도 쉽게 희미해지고 만다.
여전히 마법에 ‘살의’가 잘 담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필요한 건 살의가 아닌 수호였다. 가연은 본래 가득 찬 살의로 목숨과 꿈을 깨부수는 존재였으나, 최상헌의 그림자를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다정한 수호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이 제 아무리 클라인 남매의 영역이고, 주위가 클라인 남매의 힘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별무리와 커븐 로드의 힘은 본디 대등하다.
이성진이 검으로 데미안의 문장을 베어 냈다. 곧바로 그림자의 수호가 데미안의 가슴에 깃들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힘이 불완전해서 완벽하진 않을 거예요.”
데미안이 유은하에게서 받은 정화 아이템을 꺼내 핵에 끼워 넣었다.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불안한 힘으로 어떻게든 데미안을 가디언으로 변화시키며 최인성은 그림자들을 통해 상황을 확인했다.
4악장과 함께 클라인 남매는 한국의 모든 시간을 개화시켰다. 모여든 생명들의 시간, 자연에 남은 시간, 그들이 만든 작품의 시간, 그 모든 시간을 실질적인 힘을 지닌 시간마법으로 바꾸어 발동했다.
한국의 자연은 클라인 남매의 소리를 따르고, 이성진과 최인성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마법사다. 더하여 최인성의 그림자에는 유클라프의 공간마법과 최상헌의 그림자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클라인 남매가 아주 잘 아는 곡조가 말이다.
이성진과 최인성은 4악장이 발동한 순간 시간에 휘말려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최인성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데미안은 최인성과 이성진을 봉인할 기둥으로 함께 시간 속에 넣어졌다.
데미안은 이 순간에 별무리를 붙잡을 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있던 다른 장군 시리즈도 비슷한 역할이겠지. 최인성은 숨을 골랐다. 이곳에 없는 반이 신경 쓰였다.
데미안은 액자 속에서 스스로의 안에 봉인해 두었던 힘을 풀었다. 그 힘을 이성진과 최인성을 구하기 위해 사용했다. 액자에 남겨진 공간은 지금도 클라인 남매의 음악을 침식하고 있다.
“그리고 또……면목 없습니다. 저것은 원래 릴리와 래넌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마법이었지요?”
“그래,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너희가 나타나고, 한국이라는 음악회의 막이 열려, 곡에 관한 설명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아마 클라인 남매는 음악회에 쓸 곡에 관해서는 제르간 등 같은 동료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리라. 유은하의 꿈은 커븐 로드의 감정조차 파헤치니까. 어쩌면 즉흥적으로 내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시간과 추억을 모은 선율, 스스로가 지닌 살의를 조각내 적인 강인하에게 내밀어 불살라 버리는 각오.”
“그럼 클라인 남매는 자신의 살의를…….”
“그래, 강인하를 보낸 ‘간주곡’에 두었다. 이제는 강인하의 빛에 타올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겠지.”
“…….”
“내바친 살의를 빛으로 채워 간주곡을 조율하는 이음새로 삼는다. 그렇게 강인하의 빛마저 조율하고 한국의 악의를 묻는다. 그리하여 너희의 살의마저 지운다. 차곡차곡 쌓은 시간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무수히 많은 시간을 잇는다.”
데미안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봉인한 힘을 최선의 방법으로 사용해도 결코 나 혼자 힘으로는 클라인 남매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명령받는 순간 너희가 한 번 음악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쉽게 시간 바깥으로 나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 힘을 너희가 위험해졌을 때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다.”
데미안이 으르렁 거리며 날개를 펼쳤다. 그의 손에 시꺼먼 어둠과 공간마법으로 이루어진 검이 나타났다. 최인성은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릴리와 지스를 유심히 노려보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저택 안에 있다. 저택 안은 여기보다 훨씬 작품이 많다. 래넌이 저택에 모이는 시간을 다듬어 릴리에게 악보로 보내고, 릴리와 지스가 그 선율을 연주해 한국 곳곳에 보낸다. 그로써 보다 완벽한 합주가 완성된다는 모양이다.”
이성진이 앨범을 침식한 데미안의 공간을 함께 유지하며 시간의 필름을 염력으로 걷었다.
“고맙다. 덕분에 힘을 낭비하지 않았어.”
데미안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반복해서 인사할 필요 없다.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했을 뿐이다. 내게 있어 최악은 너희가 저들의 시간에 갇히고, 이용당하고, 그로 인해 저들을 여기서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여기에서 죽이지 못하면…….”
최인성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최인성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처럼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와 증오를 내뱉어 표현할 생각이었다.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그 감정은 말과 행동에 섞여 쏟아졌다.
그런데 감정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끌어 모은 살의는 평소와 달리 작고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이 손으로 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최인성은 의식적으로 울분을 삼켰다. 울분조차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마냥 평온하게 가라앉는 이 감정 상태를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기분이 너무 더러운데, 그 기분조차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데미안과 이성진은 최인성의 변한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성가시군. 하긴, 그만한 실력자가 그만한 시간을, 스스로의 감정을 대가로 바쳤으니. 젠장, 종말의 힘이 계속 약해지고 있어.”
살의를 절감 당한 것은 같으나 두 사람의 특성에 따라 약해진 증상이 달랐다. 이성진은 마력의 고유 특성이 약해졌고, 최인성은 감정이 약해졌다.
데미안이 시간 너머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최소한 트라베리아는 적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들이 짓밟고 유린한 자들의 손에.”
그렇게 속삭이며 데미안은 검을 휘둘렀다. 베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움직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검 주위로 검은색 공간 공들이 떠오르고, 데미안이 필름 안에 만들어 둔 공간의 힘이 더 강해졌다. 데미안의 마법이 필름 한 칸을 넘어 주위의 다른 필름까지 일부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때 릴리의 옆으로 아피스가 내려섰다.
“많이 다쳤네.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클라렌스 경은…….”
“그래, 알고 있어.”
릴리의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다.
“웬만해서는 살아남기를 원했어. 이기진 못하더라도, 살아남기를. 하지만 별무리를 상대로는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간주곡은…….”
“괜찮아, 악장이랑 잘 연결됐어. 강인하답게 빼앗으려고 했지만…….”
릴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우리의 살의와 우리의 악보를 삼킨 클라렌스가 거기 있는 이상 무리지. 위험한 걸 알면서 왜 거기에 클라렌스를 보냈는데.”
“슈카는 정말 죽었나?”
데미안이 검을 휘둘러 시간을 밀어내며 물었다. 아피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데미안…….”
“배신자더라고.”
인상을 찌푸리던 아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수긍했다. 아피스는 슈카의 혈흔이 남은 손목을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슈카도 죽었다.”
“슈카도 배신자였니?”
“아니. 그 녀석은…….”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릿속에 장난스럽게 미소 짓던 슈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술궂고 변덕쟁이에 제멋대로였지만, 의외로 슈카는 그들의 큰 누나 같은 존재였다. 짓궂게 놀리면서도 데미안, 반, 오제 할 것 없이 잘 챙겨 줬다. 일이 생기면 솔선수범하여 나섰다.
“너희를, 따랐다…….”
흥미 위주에 자유로운 행동력을 보면 충성심 따윈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슈카는 누구보다 순순하게 클라인 남매를 따랐다. 슈카는 릴리와 래넌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예쁜 것을 주고, 부탁하면 아주 귀찮은 일이 아닌 이상에야 들어주고, 기본적인 명령에만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둔다.
자신의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자비로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슈카는 웃으며 클라인 남매를 따랐다.
언젠가 그녀는 클라인 남매의 입버릇처럼 화려하게 싸우다 죽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반은 울상을 지었던가.
릴리가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가 친하긴 친했구나. 네 그런 표정은 처음 봐.”
최인성은 표정을 흐렸다. 설령 뜻을 함께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모든 장군 시리즈가 동족이고 동료였다. 그 사실이 좀 더 실감나게 가슴에 와닿았다.
“……그래, 죽었나. 어떻게 죽었지?”
“날 감싸고 죽었어.”
“감싸고?”
눈을 크게 떴던 데미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 답지 않은 최후로군.”
강인하의 빛에 휘말려 죽었지만, 강인하와 싸우다 죽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슈카가 말하던 화려한 최후와는 거리가 멀었다.
데미안은 주먹을 꾹 쥐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뜬 데미안의 눈동자에서 동요는 비치지 않았다.
콰광!
그때 평화로웠던 저택 안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폭음에 집어 삼켜진 소리가 일부 소멸한다.
“저건…….”
“반?”
릴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아피스가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이 놀란 것은 반이 저택을 공격했다는 것, 즉 배신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뭐야, 저 힘은?”
“반의 힘이라기엔, 너무…….”
반은 아슬아슬하게 S랭크 상위에 발을 걸친 키메라다. 그런데 소리를 잡아먹는 검회색 마력은 반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했다. 데미안과 동급이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뭐?”
데미안이 검을 휘두른 순간 필름 안에서 시공간을 잡아먹으며 휘몰아치던 검은 폭풍이 그들을 휘감았다. 데미안은 아공간에서 액세서리 몇 개를 꺼내 손가락과 팔에 끼웠다. 반의 마력이 들어 있는 액세서리와 공명해, 데미안은 반의 옆으로 이동했다.
“반, 괜찮나?”
“응. 어서와.”
이성진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반은 기절한 뿔여우 쟈넷을 꽉 끌어안고 서 있었다. 평소 흐리멍텅했던 눈동자에 선명한 총기가 돌았다. 깨어져 불안정한 상태이던 영혼과 정신이 완전한 형태로 붙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던 형태가 흉터로 남아 핵에 선이 그어져 있긴 하지만 적어도 힘이 새어나오지는 않는다.
힘이 새어나갈 정도로 불완전한 반의 내부에는 항상 허무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핵이 완전해지자 갈 곳을 잃은 허무가 바깥으로 빠져나와 반의 주위를 차지했다.
수십 년간 반의 불완전함을 유지하고 있던 허무의 힘은 대단했다. 클라인 남매의 음악을 좀먹을 정도였다.
반의 공허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진과 최인성의 마법 안에서 ‘살의’가 조금 되살아났다.
“……!”
그제야 최인성은 데미안이 말했던 ‘운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잠깐뿐일지, 지속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반은 클라인 남매의 음악을 허무로 무효화해 살의의 힘을 조금이나마 되돌려 줄 수 있다. 최인성은 숨을 삼켰다.
“이 힘은 도대체…….”
“반! 데미안!”
오제가 크게 노호를 내질렀다. 오제는 부모에게 각인된 병아리처럼 진심으로 트라베리아를 따르는 부류였다.
데미안과 반은 오제의 외침을 무시했다. 래넌과 함께 저택의 시간을 오선보로 기록하거나 조정해 바깥으로 내보내던 제르간이 혀를 차며 그들을 향해 마법을 내질렀다. 반이 허무를 움직여 제르간의 공격을 막았고, 그 뒤를 이어 달려든 오제는 데미안이 공간마법으로 이루어진 ‘링’을 휘둘러 막아 냈다.
링에 부딪쳐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오제를 향해 이성진이 검격을 날렸다. 데미안이 최인성의 의문에 답했다.
“반이 불완전한 성공작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나?”
반은 바닥이 뚫린 항아리였다. 장군 시리즈 중 첫 번째 성공작이며, 불완전한 성공작.
반의 안에 있는 핵은 처음 만들어졌을 땐 완전했다. 그러나 계산이 잘못 되었던지 반이 탄생하며 불완전하게 금이 갔다.
그 탓에 반이라는 존재를 이루는 모든 힘은 계속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 그건 트라베리아가 핵을 보강하고 소니아가 반의 정신을 새로 만들어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트라베리아의 문장에 가려져 알아보기 어렵지만, 반의 핵은 그의 겉모습처럼 누덕누덕 기워져 있다.
“깨진 그릇 안에 고인 힘이 그만큼인데, 그릇이 붙어 완전해지면 어떨까.”
누구나 반이 금방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은 깨어진 그릇 위에 자신의 마력을 덧붙여 새어 나가는 힘을 통제하는 것으로 살아남았다.
그 후로도 깨진 그릇이 완전해지는 일은 없었고, 반은 계속 자신의 그릇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다.
불완전하게 태어난 반은 감정과 생각, 육체의 감각 등이 둔했다. 뛰어난 통제력으로 육체와 마력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생각만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도 느렸다. 고민하며 한 어절 한 어절 꺼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깨어졌던 반의 깨진 부분이 하나 둘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 기점은 바로 ‘유은하를 만난 날’이었다.
반의 그릇이 채워지고 완전해지는 계기를 만든 것은 아주 강렬한 감정이었다. 둔하고 조각조각 깨진 감정 속에서도 그는 사고를 했고, 그가 있는 환경 속에서는 충격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을 겪었다.
처음으로 인간에게 다정한 말을 받았다.
거기서 생긴 강렬한 감정을 계기로 반의 가슴에 찾아오는 감정이 다양해졌다.
처음으로 느낀 호기심, 호감. 그에 관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생긴 동료애.
순수한 감정은 이전과 달리 사라지지 않고 깨진 그릇 안에 뿌리를 박으며 다양한 이파리를 틔웠다.
다만 반은 트라베리아를 배신하기로 생각했던 무렵부터 자신의 변화를 숨기고 통제했다. 깨진 그릇 틈 사이에 생겨난 조각이 그릇 틈을 메우지 못하도록 분리해 가슴 깊숙한 곳에 가뒀다.
봉인한 그릇 조각을 디나가 또 한 번 숨겼다.
그렇게 계속 떨어져 있던 조각들을 반이 지금 처음으로 핵에 맞춰 완성시킨 것이다.
반은 사실 디나 도움 없이도 진화하고 있던 키메라였다.
현재 반의 그릇은 퍼즐 같은 상태다. 언제든지 완성시키고 분해할 수 있다.
최인성은 반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최인성은 반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정신까지는 보지 못했다. 유은하와 이성진은 처음부터 반의 영혼과 정신을 보았지만 큰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키메라 중에는 본래 비상식적인 영혼과 정신을 가진 자가 과반수였다.
음악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반의 그림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완전해 졌다는 것만은 잘 알겠다.
“반은 본래 이토록 강하고 특수한 녀석이었던 거다.”
“…….”
쿠…궁!
그때 무거운 음악이 반의 영역에 떨어졌다. 반이 허무로 음악을 막아 비껴 냈다. 래넌이 혀를 찼다.
“성가시다니까, 진짜. 제르간, 나 대신 조율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내 몸보다는 이 저택이 더 중요하지.”
래넌과 제르간의 역할은 시간의 기둥이 되는 것과 저택의 시간을 1차적으로 조율하고 바깥에 내보내 릴리가 보다 완벽하게 악장을 연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택 안에서 날뛰는 이들은 전부 방해였다.
래넌은 자신의 감정을 담은 음표를 다시 한번 반의 허무 위에 떨어뜨렸다.
이성진이 최인성의 그림자를 완충제로 삼아 반의 허무를 베지 않도록 조심하며 파도를 휘둘렀다.
삶의 역사로 가득한 음악과 죽음을 내리는 종말의 힘이 부딪쳤다.
콰과과과─!
최인성이 날카로운 눈으로 총구를 당겼다.
탕!
쏘아진 그림자가 반과 반의 품 안에서 기절해 있는 쟈넷의 문장을 깨부쉈다. 반의 그림자를 자세히 살폈던 건 신기한 마음도 있었지만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제거하기 위함이 컸다.
허무 때문에 문장의 저주가 약해진 상태였기에, 반과 쟈넷의 안에 새겨진 문장이 그들의 초기 실력에 맞춰 비교적 약했기에, 다행히 탄환 한 발로 처리가 가능했다.
두 사람의 핵에 심연과 심흑의 가호를 걸며 최인성은 기절해 있는 쟈넷의 상태를 살폈다.
“3명이나……괜찮아?”
“피곤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얘는 왜 기절했어요?”
“나랑 같이 있으니까……같이 배신한 줄 알고 문장이 발동돼서……. 어차피 같이 갈 거였지만….”
최인성은 수긍했다. 쟈넷은 문장의 저주를 이겨 내기엔 약했다.
가디언이 된 반이 주인인 최인성, 같은 가디언인 가연, 쟈넷, 데미안과 보다 깊게 교감했다. 이성진의 그림자도 그들 사이에 연결되었다.
이성진이 달려가 래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칫!”
수십 년의 시간이 담긴 반의 허무로도 이 세계의 주인인 래넌에게 직접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그러나 살의를 이끌어 낸 이성진과 최인성의 마법은 다르다. 종말의 힘을 담은 파도가 넘쳐흘렀다.
“윽! 진짜 미친 놈 아냐!”
살의가 지워진 것을 제외하더라도, 4악장의 음악 변환력은 3악장 때보다 훨씬 강하고, 이곳은 세계의 모든 음악을 한 번 정리하여 중심으로 내보내는 음악의 통로이자 탱크다.
허무의 도움을 받아 살의를 되찾았다 한들 지금 이성진의 힘은 본래보다 약할 터였다. 그러나 이성진의 파도는 드문드문 음악으로 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파괴력과 함께 주위의 음악을 반 이상 파괴했다.
총과 검 사이에서 고민하던 최인성은 손을 휘둘렀다. 검에서 와이어로 변한 심연의 무기가 넓게 휘둘러지며 마법을 해석하고 파고드는 심안의 전기를 퍼트렸다.
“심안의 파랑!”
평소 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인 와이어 형태로 변환시킨 것은 무기가 길기 때문이다. 살의를 일으킬 수 있는 공간에서 몸과 무기가 연결된 상태로 완전한 음악의 영역에 공격을 날릴 수 있다. 적어도 총과 검보다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