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52
그 영향으로 중력이며 마력이며 시간이며 전부 엉망으로 변했다. 엉망으로 변한 시간을 그림자 영역과 탑의 영역이 강제로 중화시키고 있다. 아르델이 숨을 골랐다.
“진짜, 쉽지 않네.”
에리카는 한동안 마법사의 트라던트를 이용한 기술만 쓰고 있다. 레일리와 윌리엄의 힘이 마법사의 트라던트에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즐기고 있다.
“마음만은 지지 않겠다고 했던가? 너희가 쌓아 온 마음은 고작 그 정도야?”
에리카는 레일리와 윌리엄이 숨을 고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아르델이 두 사람에게 소망을 덮어씌우며 에리카를 향해 뛰어 올랐다.
정수까지 불러내 무수히 많이 에리카와 부딪치며 아르델은 아직 자신이 에리카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싸움 속에서 재능만큼, 마법을 계승받은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지금의 아르델은 에리카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젠장.’
그러나 역시 지금 상황을 가장 분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레일리였다. 윌리엄은 그나마 무게마법의 트라던트와 대등하게 겨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일리는…….
유은하에게 받은 아이템은 레일리의 마법과 합쳐져 기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마법의 지배권을 다투는 것에는 그럭저럭 익숙해져 이제 레일리는 규율마법의 트라던트가 발하는 마법의 강제력에 이전만큼 휩쓸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밀린다. 밀린다.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레일리는 쏟아지는 공격을 막으며, 안토니오의 마법과 겨루는 윌리엄을 보며,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달려드는 아르델을 보며 재능의 차이를 절감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르델이나, 유은하나, 강인하였더라면 이미 탑을 부수고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무게마법의 트라던트를 부수지 못한 윌리엄도 레일리만큼은 아니지만 초조함과 함께 비슷한 감정을 안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재능 역시 특출함이란 말로는 부족할 정도란 것을 알면서도 아르델을 보며 박탈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에리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레일리와 윌리엄은 흔들리진 않았다. 어린 천재들의 몇 배가 되는 시간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마법을 믿고, 그들을 거기까지 키운 재능을 믿고, 지금까지 지나온 죽음을 딛고……다시 한번 도전했다. 계속해서 최선을 다했다.
꺾일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마법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마법을 되찾고 에리카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뿐임을 느끼고 있었다. 빼앗길 수 없다. 빼앗길 수…….
‘하지만 슬슬 방법을 달리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레일리는 아르델이 에리카를 막고 있는 틈을 타 온몸으로 ‘규율의 트라던트’에 부딪쳤다.
‘엄마의 재능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부딪치는 것만으로는……부족해!’
거기다 유은하가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다는 초조함도 있었다. 유은하는 뛰어나지만 고작 두셋이서 언제까지고 유클라프의 힘을 덧씌울 수는 없다.
“윌.”
레일리는 아주 오래 전에 불렀던 윌리엄의 애칭을 입에 담으며 귀엽게 웃었다. 윌리엄이 소름 돋은 얼굴로 레일리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갑자기 어릴 때나 썼던 호칭을 부르고 그래?”
레일리와 윌리엄은 나이차가 꽤 난다. 윌리엄이 어엿이 경찰의 간부일 때 레일리는 어린아이였다. 방위부, SR, 경찰은 100년 전부터 좋은 관계를 이어 온 동맹이다.
레일리와 윌리엄은 레일리가 어렸을 때는 큰오빠와 막냇동생처럼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레일리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만나는 일이 줄어 사이가 소원해졌고, 그 이후로도 공적인 일로만 만났기에 사무적인 관계로 변했다. 최근에는 전쟁 때문에 자주 부딪치며 다시 친해졌으나, 사이와는 상관없이 레일리는 때때로 윌리엄을 애칭으로 부를 때가 있었다.
“……네가 그 호칭을 쓸 때는 억지를 쓸 때인데…….”
“히히, 잘 아네. …나 잠깐 시험하고 올게. 그동안 에리카를 좀 막아 줘!”
“뭐? 야!”
레일리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붉은 마력을 억지로 파고들며 지팡이 끄트머리로 트라던트를 내리쳤다. 트라던트에 지팡이가 박히면서 주위에 부스럼이 생겼다.
레일리가 규율마법을 통해 규율의 탑에 말을 걸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처럼, 너도 가지고 싶지? 그렇잖아. 완전하지 않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샐레나의 힘이지만, 레일리는 여기에 있는 것을, 규율마법의 트라던트를 움직이는 의지를 샐레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샐레나 리카르트는 죽었으니까.
여기에 있는 의지는 마법의 본능과 트라던트에 섞인 망자의 본능이다.
“완전하지 않다면 보충해서라도 완전해지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건 마법의 법칙이고, 본능이야.”
레일리가 규율 창에서 무르시엘의 사령관, 레녹이 준 트럼프 카드 뭉치를 꺼내 한 장 뽑았다. 첫 번째로 뽑은 카드는 스페이드 에이스. 트럼프의 핵심 카드이며, 레녹의 설정에 의하면 죽음조차 물리치는 강력한 호운의 상징이다.
“자! 나를 삼켜!”
“재미있는 방법이군.”
“저게 진짜!”
윌리엄이 성을 내며 에리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조금 전보다 짙은 공간이 에리카를 덮쳤다. 무게마법과 겨루며 이룩한 성과였다.
윌리엄의 공간은 무게마법을 얻으며 깊어졌고, 최인성을 통해 유클라프의 경지를 엿보며 깨달음과 함께 더 무거워졌다.
하물며 윌리엄은 레일리와 달리 무게마법을 얻기 이전에도 커븐 로드를 견제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게마법을 얻으며, 지난 전쟁에서 무게마법의 의미를 경험하며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반쯤 피의 힘에 기대 성장해 온 레일리와는 마법의 결속력이 달랐다.
그런 윌리엄에게 온갖 공간이 섞여 있는 이 화성은 대단히 뛰어난 훈련장인 셈이다. 묵중하게 빛나며 추락하는 공간에는 에리카도 제법 애를 먹었다. 유클라프의 공간이 파괴력과 이해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윌리엄의 공간은 무겁고 단단하다. 매우 밀도 있게 얽혀 있어 파헤치기 쉽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공간마저 부숴버릴 정도의 파괴력도 겸비하고 있다.
“레일리 씨!”
윌리엄이 에리카의 움직임을 막는 사이 아르델이 레일리에게 작은 새를 날렸다. 정수를 닮은 불꽃은 레일리가 쥔 스페이드 에이스에 또 한 번 행운을 부여했다.
그와 동시에 레일리의 몸이 탑에 삼켜졌다. 이것은 마법의 본능에 기인한 일이니 에리카도 완전히 제어할 수 없다.
애초에 제어할 생각도 없다. 에리카는 규율의 트라던트 위에서 윌리엄을 마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레일리는 자신의 몸이 규율마법에 이끌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공간마법으로 이루어진 트라던트 탑은 안에 이공간이 존재하지만, 마법사의 트라던트 안은 마법사의 생명과 영혼이 채워져 있을 뿐이다. 트라던트의 힘에 물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익숙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에 레일리는 신음했다.
‘엄마…….’
레일리의 가슴이 뜨겁게 빛났다. 그녀의 근원이 탑의 근원, 샐레나의 근원에 이끌렸다. 원초적인 이끌림에 레일리의 머리가 몽롱해졌다.
‘…정신 차리자. 좀 더,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그때는…….’
그러나 어쩔 도리 없이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마법이 녹으며 지팡이의 모습까지 희미해졌다.
규율의 트라던트가 지닌 마법 본연의 본능 때문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지닌 힘을 자신의 안에 녹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이끌림이 아니었으면 레일리는 이렇게 산 채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레일리는 지팡이를, 지팡이에 달린 환각 아이템을 꽉 끌어안았다. 현실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자신을 무사히 샐레나의 근원에 데려다줄 것이다.
‘……아.’
갑자기 발에 바닥이 닿았다. 레일리는 약간 주춤하고는 걸어갔다. 레일리가 지나가는 길마다, 아니, 온갖 곳에서 규율마법을 상징하는 회로가 일직선으로 뻗어지며 레일리를 스쳐 지나갔다.
곳곳에 눈에 익은 붉은 보석이 나타나고, 하늘이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된 것처럼 붉다.
어느새 선명해진 지팡이에 장식된 환각 아이템이 은하수 같은 빛을 뿌리며 신호를 보냈다.
레일리는 문득 깨달았다.
“설마, 꿈속에 들어온 건가?”
평소보다 많이 흐릿한 규율 창이 레일리에게 그 감이 진실임을 알렸다.
물론 트라던트 중심 탑과 연결된 마법사의 탑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꿈의 힘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꿈속세계는 정신마법에 깊이 파고든 자만이 인식할 수 있는 이세계였다.
레일리는 놀란 눈으로 환각 아이템과 금홍빛으로 빛나는 스페이스 에이스 트럼프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행운’의 힘이구나.”
레녹과 아르델, 유은하의 힘이 레일리를 죽은 마법의 심연으로 이끌었다. 레일리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규율마법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결국 레일리의 역량에 달렸지만, 그래도 실력적 부담이 훨씬 큰 현실보다는 마음의 힘이 더 중요한 꿈속이 유리하다.
레일리는 걸음을 옮기며 손을 움직였다. 규율의 지팡이는 이제 환각의 힘으로 뚜렷하지만, 시스템 창은 평소보다 흐리다. 마력의 움직임도 둔하다. 눈앞에 있는 무수한 힘의 흐름에, 같은 종류의 마법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그 탓에 이 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도 불발로 돌아갔다.
‘괜찮아. 마음과 감정은 선명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레일리는 발을 멈췄다. 수채화 같은 붉은색이 점점 진해졌다. 드문드문 붉은 색이 다양한 색에 물들었다. 검은색, 갈색, 녹색, 코럴색, 검청색…….
유은하에게 들었던 마력색 정보를 통해 레일리는 색깔의 주인을 유추했다. 머지않아 그녀는 그 무엇보다도 선명한 붉은 보석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엄마……일 줄 알았는데.”
마법사의 탑 안에 있던 규율마법의 반쪼가리 근원은 아주 커다랬다.
질감은 불꽃과 보석과 액체가 적당히 섞인 것 같다. 피부부터 옷까지 온통 붉게 타오르는 천사가 날개 달린 하트 모양 보석을 끌어안고 있었다. 샐레나 리카르트가 구현한 규율마법의 지배자이자 규율마법의 가장 강대한 기술인 ‘규율의 심판자’다.
“심판자…….”
규율마법의 계승자는 모두 자신만의 심판자를 가진다.
심판자는 계승자가 쌓은 규율과 법칙을 먹고 자라난다. 다만 레일리의 심판자는 샐레나의 마법을 계승받으며 샐레나의 심판자를 닮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천사는 완벽하지 않았다. 몸의 반이 비어 있고 깨져 있다.
레일리가 지팡이를 굳게 쥐고 한 발 내디딘 순간 천사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빛이 퍼졌다. 심장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천사가 눈을 떴다.
「내……것.」
“아니야, 반대야.”
레일리는 자신보다 한없이 크고 강대해 보이는 천사를 향해, 익숙한 규율의 심판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천사는 그들의 수족이며, 레일리는 규율의 지배자이자 관리자.
“네가 나의 것이야. 완벽히 물려받지 못한 나의 것.”
「파장……확인……. 규율과 다르게 움직이는……것이 있다…….」
“규율은 나야. 나, 4대째 리카르트야!”
심판자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레일리는 온 마음을 담아 외쳤다.
레일리의 의지를 따라 레일리의 규율마법이 빛났다. 샐레나에게 받았어도, 같은 혈족마법이어도, 마법이 쌓인 육체와 마법이 쌓아 온 시간은 다르다. 가슴 안에 있는 근원의 중심은 틀림없이 레일리 한 사람이 만들어 온 것이었다.
「규율의 의지와는, 달리…….」
그 순간 레일리의 지팡이와 손에 쥐고 있던 스페이드 에이스가 빛났다. 레일리의 가슴과 천사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빛이 연결되며 가운데에 ‘계약서’가 떠올랐다.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던 천사가 고개를 들었다.
「4대째……레일리…?」
그 순간 레녹의 카드가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행운의 효과가 끝난 것이다. 아르델의 불꽃도 함께 흩어졌다.
“와, 미쳤다. 행운이라는 거 진짜 사기 같아…….”
「규율마법은……정당한……계승자에게…….」
레일리는 초조한 심정으로 반쪽짜리 심판자의 다음 의지를 기다렸다. 이 트라던트는 현재 에리카의 명령에 조종당하고 있다. 결코 레일리의 의지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계승자는……둘……. 내가 있는 이곳과……나의 반쪽…….」
“반쪽이라. 반쪽 취급은 해 주는 구나.”
「힘을 온전히 계승받고 싶다면…….」
웅크리고 있던 천사가 몸을 폈다. 천사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색이 주위를 신비롭게 물들였다. 멈춰 있던 날개 심장이 가동되고, 천사가 조각이 빠지고 금이 간 팔다리로 곧게 섰다.
「나를 복종시켜라.」
천사의 손에 ‘단죄의 검’이 쥐였다. 주위의 힘이 천사에게 이끌렸다. 천사의 의지를 따라 주위에 붉고 가는 회로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마법진이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복종, 복종이라.”
레일리는 자신의 힘마저 천사를 향해 이끌리는 것을 느끼며 지팡이를 꽉 쥐었다.
“계속 그러려고 했어. 힘으로, 마음으로, 규율마법을 받아 내고, 이겨 내고, 짓누르고……그래야만 한다고. 그것만이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난 은하와는……별무리와는 달라서, 아직 계승받은 힘조차 최대한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어. 그럴수록 엄마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걸 실감해. 존경하는 선대의 힘은 너무 높고 높아서, 그런 엄마조차 이기지 못한 트라베리아가……그 이름이……무거워.”
가슴 속에 묻어둔 심정을 토로하며 레일리는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므로 레일리는 이번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곳이 규율마법의 심층세계, 꿈속 세계이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레일리의 걸음을 막기 위해 단죄의 검이 레일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일리는 지팡이로 단죄의 검을 막아 내며 속삭였다.
“단죄의 검은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는 검이야. 마법에 맹세코, 나는 내가 정한 규율에 어긋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규율의 시작은 사람과 사람의 약속이다. 리카르트의 경우는 마법과 계승자 사이의 약속이다.
“무고한 자를 죽인 적이 없고, 동료를 배신한 적은 더더욱 없어. 내 무력함에 치를 떨었을지언정 내가 해야 할 일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어.”
레일리의 입에서 나온 규율마법의 법칙이 천사의 단죄를 상쇄시켰다.
“규율마법의 규율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 규율마법의 주인은 혈족의 피를 이은 자.”
레일리가 생각한 규율마법을 복종시킬 방법, 그것은 레일리와 샐레나 사이에 존재하는 ‘약속’이었다.
“네가 지금 따르는 사람은 누구지?”
이것은 규율마법의 법칙을 건드리는 질문이기에 레일리가 퍼트린 ‘마법’을 통해 샐레나의 천사에게 닿았다.
「나의 주인은 리카르트의 계승자. 내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 것은 샐레나 리카르트.」
“네가 따르는 것은 우리 어머니, 샐레나 리카르트야, 아니면 에리카 필링이야? 그것도 아니면 유클라프 데임인가?”
레일리의 질문이 규율마법 곳곳에 퍼져 답을 구했다. 동시에 이 질문은 지금의 심판자에게 보내는 공격이기도 했다.
「내 의지는 샐레나 리카르트의 곁에.」
“샐레나 리카르트는……죽었어. 그 분은 더 이상 너에게 명령할 수 없어.”
「죽었……다. 마법은 계승……되었다.」
“누구에게?”
「…….」
천사의 입이 다물렸다.
“너의 반절은 어머니의 의지로 나에게 계승되었어. 하지만 반절은 트라베리아에게 붙잡혔지! 혈족마법은 혈족이 아닌 자에게도 계승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혈족이 모두 죽었을 경우야!”
「…….」
이제야 겨우 레일리의 목소리가 규율마법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 너의 주인은 누구지?”
「나……의 주인…….」
여전히 규율마법에 대한 강제력이나 마법의 레벨은 천사가 훨씬 강했다. 레일리는 이를 악물고 천사가 퍼트린 붉은 마력의 파도를 파고들었다. 이곳이 꿈길이고 유은하의 환각 아이템을 지니고 있기에 레일리는 정신력을 무기로 삼아 나아갈 수 있었다.
상처 입으면서도 붉은 파도를 비집고 들어간 레일리는 천사가 지키는 거대한 날개 심장을 향해 규율의 지팡이를 박아 넣었다.
지팡이는 박히는 것이 아니라 스르륵 심장에 스며들었다. 심장에 반쯤 가라앉은 지팡이를 멈춰 세우며 레일리는 숨을 들이켰다. 자칫하면 이대로 심장에 지팡이와 함께 흡수당하게 생겼다.
‘그것도 좋지.’
그러나 그 전에 규율의 확인을 끝마쳐야 한다.
“우리 리카르트의 의지와 약속은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야! 그런데 넌 동료를 배신하고 지금 동료를 공격하고 있잖아!”
「나……는…….」
그 순간 세상이 확 일변했다.
붉었던 세상 속에 검은 색이 덧칠되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이 구름처럼 퍼지고, 은색과 코럴색 링이 지평선처럼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너는 우리의 규율을 배반했어!”
「아……아……아아아아……!」
“혈족마법의 첫 번째 법칙! 혈족마법은 혈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같은 혈족에게 계승된다. 그러나 지금 규율마법은 적에게 붙잡혔다. 하물며 너는 규율을 위반하고 동료가 죽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실이었다. 모두 진실이었기 때문에 레일리의 언령은 규율마법의 심판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최우선 선언은 적의 지배를 뿌리치는 것이다!”
「지……배…….」
규율 마법 이외의 것이 몇 개 규율마법 속에서 구분되어 보석으로 변했다. 붉은 회로가 침입한 마법들을 표시했다. 레일리의 몸은 어느새 반절 가까이 심장에 삼켜지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서 협력해. ‘규율의 심판자’!”
레일리의 언령이 강하게 규율의 심장을 얽매었다. 그런데 심판자가 무어라 대답하려고 한 순간, 규율마법의 심장에서 적의 어린 마력이 튀어나왔다.
‘보라색이 섞인 코럴색……에리카와 트라던트의 마력.’
그 순간 레일리의 마법에 쌓여 있는 정보가 의혹을 탐지했다. 규율마법이 색을 해석한다.
같은 계열의 색이라도 마법사마다 마력의 색과 질감이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유클라프와 벨라의 색은 비슷한 검정이지만 벨라의 마력은 피처럼 움직이고, 유클라프의 마력은 벽처럼 단단하다.
보라색 마력을 가진 사람은 레일리가 아는 것만도 꽤 있다. 별무리에는 비앙카, 한재일, 가연이 있다. 트라베리아만 해도 시카와 엘리시아가 보라색 계열…….
『보라색 마력의 주인은 엘리시아 루미드로 판명. 91% 이상 색 정보가 동일.』
레일리는 입을 벌렸다.
그래, 마법사의 트라던트는 죽은 마법사의 근원과 영혼을 이용해 만든 장치다. 그리고 트라던트는 죽은 자들의 영혼과 마력을 끌어들이는 무기다.
연맹 굴지의 정보계열 마법사들이 해석한 결과 형태를 다듬어 트라던트의 모체를 만들어 낸 것은 시카지만, 트라던트가 지닌 능력의 근원은 엘리시아의 사령마법으로 확인되었다.
마법사의 트라던트는 잘 생각해 보면 사령마법의 결정체다. 죽으면서 파괴되었을 근원을 복구함은 물론이고 마법의 힘을 끌어내 생전보다 강하게 만들어 놨다. 죽고 계승하면서 불완전해진 샐레나의 마법을 이렇게 불완전함까지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런 건 엘리시아의 마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트라던트의 힘이 엘리시아의 마법을 근원으로 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마법사의 트라던트는 다른 것에 비해 사령마법이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깊어. 마법 레벨도 높고. 규율마법의 근원과 접촉한 탓에 트라던트 안에 있는 근원의 힘이 빠져나온 건가. …아니, 아니면 혹시, 설마.’
예기치 않은 섬뜩함이 레일리의 가슴을 스쳤다. 그러나 레일리는 그 생각을 묻고 일단 당장의 변화에 집중했다. 트라베리아의 힘이 샐레나의 규율마법을 물들이고 있다. 천사가 레일리의 마법을 밀어냈다.
「나의, 약속……약속은……. 샐레나의 곁에 있는 것……. 샐레나는 아직……사라지지 않았다…….」
“너의 약속은 규율마법의 3대째 계승자 샐레나 리카르트의 의지를 따르는 것. 어머니의 의지는 이제 거기 없어.”
레일리의 가슴이 다시금 빛났다. 레일리와 지팡이를 반쯤 삼킨 심장에서 흘러나온 규율마법의 강제력이 레일리의 몸을 휘감자, 근원만이 아니라 레일리의 온몸이 빛났다. 머리카락, 지팡이, 눈동자, 마법, 마지막으로 전투복.
레일리가 지금 입고 있는 전투복 역시 유은하가 만든 ‘성장하는 무기’이다. 전투복은 같은 종류의 힘이 레일리의 힘을 빼앗으려는 이 상황에 적응하여 레일리의 마법과 레일리의 마법이 아닌 것을 구분했다. 이 타이밍에 전투복이 적응을 마친 것은 어쩌면 행운이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같은 혈족마법이라 한들 마법사 개개인의 마력은 애초에 완벽히 같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샐레나의 탑과 레일리의 마법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규율마법의 특성 탓도 있었지만 레일리가 ‘죽음의 계승’을 통해 샐레나의 마법을 계승받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계승은 레일리를 단시간에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대신 레일리의 마력은 샐레나의 마력에 짙게 물들고 말았다.
혈족마법의 정통적인 계승 방식은 아르델과 라시아가 사용한 방식이다. 마법을 후대에게 계승했을 때, 계승한 자는 약해진다. 계승받은 자는 몸이 허락하는 만큼 강해지고, 남은 마법은 근원에 봉인되어, 계승자의 역량에 따라 봉인된 힘이 조금씩 풀려난다. 당연히 마력은 계승자의 색으로 물든다.
‘강해지고 싶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내 힘으로 강해지고 싶어. 내 재능으로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엄마의 힘을 여기 계속 두는 것보단 훨씬 나아.’
레일리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샐레나의 의지는 여기에 있어!”
레일리는 규율마법의 ‘계약서’를 꺼냈다.
선대와 후대를 잇는 계약서. 계약서의 내용은 단순히 힘을 계승한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끝나지만, 짧은 문장에는 아주 많은 감정과 기억이 담겨 있다. 레일리는 계약서의 규율 안에서 샐레나의 의지를 이끌어 냈다.
「반쪽짜리 힘밖에 줄 수 없어서 미안하구나. 그러니 언젠가는 탑을, 에리카를 전부 쓰러뜨리고 네 것이었어야 했을 힘을 되찾으렴. 미안하다. 너에게 힘든 짐을 얹고 마는구나. 하지만 리리, 내 딸,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오래오래 살아, 내 딸.」
그건 바로 샐레나가 레일리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좋아. 조금뿐이라도 좋으니까,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나에게 돌아와 줘!”
「사랑해, 리리.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단다. 그러니 부디 너는 이기렴.」
“돌아와! 아니……되찾을 거야. 같이 힘내자.”
레일리는 샐레나의 의지에 이끌리기 시작하는 규율마법의 법칙을 끌어 모으며 규율의 지팡이에 굳게 마음을 담았다.
“……항상 사랑해요, 엄마. 그러니 이제 엄마를 되찾을 게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림자의 영역이 가속도를 붙은 것처럼 빠르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하미아의 공이 컸다.
하미아와 최인성은 무서울 정도로 상성이 잘 맞았으며, 새로이 정령과 계약한 것으로 하미아의 힘은 전보다 더 안정되었고, 강해졌다. 심장이란 대지에서 많은 에너지가 하미아에게 쏟아진다. 뻗어지는 숲이 순식간에 주위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하미아의 마법은 타인의 마법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이해하는 것에도 특화되어 있었다. 즉 에리카가 주로 다루는 심안의 힘과도 잘 맞는다는 소리이며, 트라던트의 정보를 보다 쉬이 흐트러트릴 수 있다는 뜻도 된다. 하미아가 방출한 숲이 라이라의 거울과 정예리의 증폭을 받아 빠르게 증식했다.
또한 하미아는 유은하에게 『책』을 한 권 받았다. 하미아는 유은하에게 트라던트의 마력을 보내기 위한 통로인 책에 숲의 힘을 집어넣어 자신의 그림자에 담긴 꿈의 힘을 강화했다.
처음에는 탑의 영역이 지닌 지배력이 훨씬 강했지만, 어느 순간 그림자의 영역이 트라던트의 영역을 확 따라잡았다. 하미아가 심안의 힘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정령에 익숙해지고, 라이라와 최인성의 힘에 익숙해질수록 그림자의 힘은 짙어졌다.
현재 트라던트의 힘을 조정하는 것은 에리카만이 아니다. 에리카의 부하들이 트라던트의 내부에서 장치를 움직여 트라던트의 힘을 세세하게 조종하고 있다.
하미아는 중심 탑의 힘을 견고히 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트라던트 몇 개를 선별했다. 그 중 몇 개의 지배권을 빼앗아 힘의 흐름을 비틀고, 몇 개는 사람과 함께 통째로 삼켜 부쉈다. 숲에 생명이 흡수되는 것을 느끼며 하미아가 조금 떨었다.
“왜 그래? 하미아.”
“죽이는 건……무서워. 레일리가……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랬다.”
“무서우면 적이라도 죽이지 않아도 돼.”
“……정말?”
하미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적을 죽이는 건 세뇌처럼 가슴속에 박혀 있는,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라이라는 단호하게 대답을 돌려줬다.
“그럼, 탑만 부숴도 돼. 그래도 반격하면 성가시니까, 리더님처럼 마법의 근원을 부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응.”
“적을 어떻게 쓰러뜨릴지는 힘 있는 자의 자유야. 그래도 우리가 누구의 편을 들었는지, 누가 우리의 적인지는 잘 구분하자, 알았지?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으니까.”
“응. 죽고 싶지 않으니까 죽인다. 전처럼, 지금도.”
“머지않아 분명 죽이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시대가 올 거야. 다들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랬어.”
“믿어.”
그림자의 영역이 급격히 강해지고 에리카가 만든 영역이 밀리기 시작한 것은 레일리가 마법사의 탑에 흡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림자 숲의 힘이 강해져 서포터로 하미아와 라이라 두 명이면 충분하다 결론 내렸을 때, 정예리는 마법사의 트라던트 공략 팀에 끼어들었다.
윌리엄과 아르델은 에리카가 규율마법 트라던트에 들어간 레일리를 신경 쓰지 못하게끔 에리카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공간의 무게로 에리카의 공간을 비틀고 짓누른다. 소망의 불꽃으로 에리카의 마법을 태우고 또 태운다.
“큭!”
에리카는 그들의 소망대로 규율마법 안에 들어간 레일리를 건드리진 않았지만, 대신 측근들에게 지원을 보냈다. 탑의 힘을 다루는 에리카에겐 그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정예리가 에리카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생명의 열기, 영혼의 파동.”
정예리가 축복의 서를 향해 속삭인 순간 주위에 순백의 빛 덩어리가 가득 찼다.
“생명의 팔찌.”
나뭇가지와 이파리, 열매가 엮인 나선 문양이 아르델과 윌리엄의 손목에 새겨졌다.
“근원의 나무! 힘의 수호자, 아리엘!”
축복의 서 안에서 실처럼 얇고 많은 가지를 지닌 하얀 나무가 자라났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난 나무 위에 길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었으며 나뭇가지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장식을 머리, 손목, 허리, 발목에 두르고 있는 천사가 나타났다.
“대상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라!”
나뭇가지의 범위 안에서 가시처럼 가는 빛이 수천 개 솟아올라 아르델과 윌리엄을 감쌌다. 두 사람의 근원과 안토니오가 새긴 죽은 자의 각인이 빛났다. 다만 에리카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의 트라던트가 마력을 흡수하는 인력도 좀 더 강해졌다.
“천검의 기사!”
힘의 수호자를 복수 다루는 건 어렵기 때문에, 아리엘을 수호자로 진화시키는 대신 정예리는 신시아를 기사로 되돌렸다. 마침 아리엘과 신시아는 상성이 아주 좋았다.
“유성검! 힘의 축복!”
떨어지는 검기 위에 힘의 수호자 아리엘의 축복이 서렸다. 아리엘의 능력은 모든 힘을 조정하고 강화하는 것. 이어 정예리가 지팡이 위에 진실의 검을 덮어씌우며 달려갔다.
“흐트러뜨려!”
정예리가 떨어뜨린 검기와 휘두른 검이 적의 공간과 마력을 흐트러뜨리고, 아군의 마력과 힘은 더 끌어낸다.
인근 마력이 흐트러진 것을 확인한 정예리가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정예리의 목표는 에리카가 든 지팡이였다. 에리카의 제어력, 즉 에리카와 마법사의 트라던트 사이의 연결을 흐트러뜨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