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53
정예리가 쥐고 있던 진실의 검에 세상을 베어 버릴 것처럼 거대한 검기가 덧씌워졌다. 쏟아진 검들이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진을 그렸다. 이어 물리적인 힘을 전부 무시하고 원하는 것만 흐트러뜨리는 검이…….
“왜곡.”
채애앵─!
그러나 지팡이에서 솟아난 칼날은 에리카의 지팡이에 막혀 멈췄다. 하얀 빛이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며 흐드러졌지만 진실의 검은 원하던 것을 파괴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에리카의 지팡이에 깃든 지배력이 정예리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손에 전해지는 반탄력에 정예리가 신음했다.
“윽!”
에리카는 조합 창에서 ‘진실의 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진실의 검은 벨다가 직접 부딪친 바 있다.
“중심을 베는 검이라. 어떤 ‘중심’을 베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팡이를 파고들지 못한 걸 보면 대단한 것을 베려 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제대로 기억해 둬라. 다운피스가 시카와 엘리시아가 만든 물건이라는 것을. 엘리시아가 마법을 제공하고, 시카가 그 힘을 성장할 수 있는 물건으로 다듬었지. 그러니 우리에게 다운피스의 지배권을 준 자는 바로 우리의 왕 엘리시아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니, 너희는 다운피스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운피스는 죽음과 생의 경계를 일그러뜨리는 무기. 영혼을 가두는 저승의 입구이며 이승에 저승을 소환하는 기둥이지. 하물며 샐레나와 안토니오의 트라던트는 엘리시아가 직접 가공했어.”
에리카는 더 이상 지팡이를 파고들지 못하는 정예리의 검을 튕겨 냈다. 정예리는 검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며 에리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트라베리아가 만든 모든 무기의 중심은 결국 트라베리아의 왕 엘리시아다. 부하인 키메라의 육체와 영혼, 트라베리아의 영역을 긋는 트라던트, 전부가 엘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공간을 직접 비틀고 있는 것은 유클라프이고, 세계에 박힌 가시의 힘을 성장시키고 조율하는 것은 베로니카나 에리카지만, 일그러지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진짜 중심은 어디까지나 엘리시아라는 뜻이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도, 죽음을 이용해 강해지는 것도,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도, 죽음을 다루는 엘리시아 없이는 가능성도 없는 이야기겠지.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왕인 거야.’
라이라와 하미아가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림자 영역이 어느 정도 강해졌는지를 알리는 신호다. 그 순간 정예리는 결심했다.
‘다른 곳의 전력은 이제 충분해. 지금부터 나는 에리카와 싸우는 데 최선을 다하자.’
그림자 영역이 강해지는 것으로 동료들의 전황은 우세해졌고, 에리카가 직접 나서 탑의 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윌리엄도 다시 무게마법의 트라던트를 상대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자잘한 서포트는 라이라가 해 줄 것이다.
이제 정예리는 라이라와 하미아가 경고하지 않는 한 에리카를 막거나 쓰러뜨리는 것에 전념하면 된다.
에리카는 커븐 로드 사이에서 중상위에 해당하는 실력자다. 즉 래넌보다 강하고 릴리와 대등하다. 그림자 영역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정예리 혼자 힘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하다.
그러나 당장 에리카에게 집중하는 건 정예리 혼자일지 몰라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혼자 싸울 가능성은 0%다. 서포트를 맡고 있는 라이라와 아르델이, 전투를 끝낸 동료가, 선대의 마법을 돌려받은 윌리엄과 레일리가 머지않아 정예리의 싸움에 가세할 테니까.
“아리엘!”
아리엘이 하얀 나무 위에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방해장!”
아리엘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펼쳐진 커다란 손 사이로 실타래가 엉켜 생겨난 것 같은 공이 나타났다.
엉킨 상태로 빠져나온 실이 마력을 엉망으로 구기며 더 엉켰다. 물론, 적의 마력만 그렇게 만들었다.
“흐음, 네 마법은 형상이 참 재미있네. 추출, 조합, 계산.”
에리카는 조합 영역을 넓혀 마력이 일그러지는 범위를 제한했다. 정예리가 에리카를 전력으로 상대하는 사이 윌리엄은 안토니오의 탑을 공간으로 삼켰다.
아리엘의 마법 덕분에 윌리엄의 공간마법과 총에 새겨진 각인의 힘은 평소보다 더 묵직하고 강렬해진 상태다. 윌리엄은 안토니오의 힘을 돌려받는 방법으로 트라던트를 삼키는 것을 골랐다.
윌리엄의 마법은 공간마법이다. 공간에 삼켜진 파편 하나하나, 마력 하나하나, 영혼 하나하나……마법에 받아들여 녹여 낼 것이다.
삼켜질 땐 파편이더라도 연결해 이으면 새로운 형상이 나타난다. 무게마법의 각인이 이 파편을 윌리엄의 안에서 완성시켜 주겠지.
공간에 무게가 흡수될 때마다 손에 쥔 총은 무거워졌고, 마음은 술렁거리거나 굳어졌다. 안토니오가 무게마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게마법의 트라던트를 조금씩 돌려받았다.
마법에 영혼이 갇혀 있다면 유은하와 이성진 등 영혼을 보는 마법사들이 해방시켜 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되찾는 게 먼저다.
윌리엄의 주위로 어둠과 왜곡된 공간으로 이루어진 감옥이 형성되었다. 감옥이 흘러나간 무게마법의 마력마저 가둔다. 어둠이 들러붙어 무게마법에 무게를 더한다.
이렇게 홀로 본체를 상대하고 있자니 한 가지 사실이 점점 무겁게 와 닿았다. 이곳에 있는 무게마법은 생각보다……약했다. 윌리엄은 분노하며 이를 악물었다.
윌리엄이 강해진 것도 있지만, 그렇게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무게마법의 특성 때문이다. 무게마법의 위력은 마법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즉 마법사 개인의 의지가 실리지 않은 무게마법은……단순히 무거운 마법이다.
안토니오는 무게마법에 마음을 실었다. 적을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을, 사람을 구하고 싶은 책임감을. 개인의 책임감만큼 깊어지고, 적의 죄와 강함만큼 무거워진다. 무게마법이 강했던 건 안토니오가 사람을 수호하는 경찰 조직의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무게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은 이 트라던트를 다루고 있던 게 에리카였기 때문이었다.
에리카는 이전 경찰과 SR을 함께 상대했을 때 샐레나와 안토니오의 마법을 진득하게 해석했다. 에리카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정의를 이 죽은 자의 마법에 무게로 얹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했던 애틋함, 누군가를 지키고자 했던 열망, 지키지 못한 후회로 인한 복수심…….
안토니오의 정의에 걸맞은 무게였다. 하지만 트라베리아의 지키고자 했던 정의감은 이미 파괴욕구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이곳에 있는 무게는 과거의 무게였다.
‘죽은 자의 목숨을 장난감으로 삼는 놈에게 이 무게를 넘길까 보냐.’
죽은 자가 남긴 마음은 죽은 자리에 남아 변하지 않는다. 반면 살아 있는 자는 과거의 마음 위에 새로운 마음을 쌓을 수 있다.
윌리엄의 마법은 어느새 안토니오의 탑보다 무겁고 강해졌다. 그걸 깨닫자 평행선처럼 부딪치던 무게가 순식간에 윌리엄에게 쏠렸다. 소름끼칠 정도로 몸과 감정을 짓누르는 무게를 윌리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생명의 바늘.”
수호자 아리엘이 생명의 나무에 손을 뻗자 나뭇가지가 하늘로 좀 더 뻗어 올랐다.
실처럼 가느다랗고 긴 나뭇가지 끄트머리가 뚝뚝 부러졌다. 그렇게 생겨난 무수히 많은 바늘이 날카로운 비가 되어 떨어졌다. 떨어진 비가 마법의 근원적인 부분을 공격했다.
마법을 마비시키고 마법의 깊은 곳에 닿는 생명의 비. 마법을 방해하는 실타래. 에리카를 둘러싼 영역이 한순간 흔들렸다.
“「생명의 축복을 삼키고 타올라라.」”
“방어, 재구축.”
에리카는 흥미진진한 눈빛을 하면서도 신중하게 정예리와 아르델의 마법을 상대했다. 아르델은 정수를 여러 번 썼고, 그 탓에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상태로 정예리의 마법을 통해 어떻게든 소망을 끌어내고 있다.
다만 아르델은 싸울수록, 사용할수록, 정수의 힘을 이해하게 됐다. 가슴속에서 그치지 않는 바람을 말로 표현하며 온몸으로 에리카에게 적의를 내보냈다.
정예리와 아르델은 아직 전체적은 힘은 약할지언정 마법의 근원적인 경지는 에리카와 대등하다. 최소한 커븐 로드라 할지라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만한 수준은 아니다. 기술 대부분은 에리카의 저지에 소멸되었지만, 몇 개는 트라던트와 에리카의 마법을 꿰뚫어 파고들고 만다.
그리고 트라던트의 방어막을 파고든 아르델과 정예리의 마법이 우연히 맞부딪쳤다.
“분해.”
소망과 축복, 누군가의 마법에 활기를 불어넣는 두 마법이 합쳐지며 무시무시하게 힘이 증폭됐다. 에리카는 탑의 힘을 부딪쳐 백금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의 검을 막았다.
“베어라!”
“「태워라!」”
타오르는 검은 특수한 방어능력을 지닌 조합 영역마저 일그러뜨렸다. 에리카는 억지로 검을 막기보다 조합 영역과 함께 자리를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휘둘러진 검이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에리카의 밑에 있던 안토니오와 샐레나의 탑에 떨어졌다.
“쳇.”
“빌리겠습니다.”
“네! 맘껏 쓰세요!”
아르델과 정예리가 아래에 서 있는 윌리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윌리엄이 총으로 허공을 긋자 거인의 손에서 나온 납작한 원반이 불꽃을 삼켰다. 그러자 불꽃이 공간을 감싸며 윌리엄의 마법을 강화시켰다.
에리카가 총에 새로운 마법석을 장전하며 흘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꼼짝도 안하는군. 한국도 함께 가리고 있을 텐데.”
“우리 리더님의 실력을 얕보지 말라고. 너희 동료가 마법을 제대로 인식하고 정확히 공격하지 않는 한 은하가 덧씌운 꿈은 무너지지 않아.”
“인식부터 문제라는 건가. 유은하, 그녀의 실력은 어쩌면…….”
에리카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에리카의 등에 붙은 트라던트 날개가 더 커졌다. 에리카가 조합 영역의 스크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순간, 바닥에서 연옥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센 거 온다!”
“좀……많이 센대요?”
응축되는 마력량을 확인한 정예리가 숨을 삼켰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합쳐지며 하늘과 땅에 화성 절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두 마법진에 번개와 불꽃이 모였다.
“아리엘! 방해장!”
하늘에서 떨어진 검청의 번개가 아리엘의 실타래를 없앴다. 땅에서 솟아난 불꽃이 아르델의 불꽃에 담긴 감정(소망)까지 통틀어 집어삼켰다. 바닥에서 마력이 들끓고, 번개와 불꽃의 접합점에서 번개불꽃 공이 수백 개 생겨났다.
찰나 라이라의 거울에서 신호가 왔다. 거울의 통로가 연결되고, 거울에서 흘러나온 나무 덩굴이 거울의 주인들을 수호했다.
“실키의 방패!”
아리엘이 하늘을 향해 수호의 천사 실키의 방패를 펼쳤다. 그 위에 아르델이 소망의 힘을 덧씌웠다.
번개불꽃 공이 폭발했다. 세 가지 충격을 막아 내며 정예리가 거울을 향해 물었다.
“다른 곳의 방어마법은 충분한가요?”
[하미아가 강해서 문제없어요! 두 분 쪽의 마력이 가장 강해요! 조심하세요!]에리카가 지팡이로 천사의 방패를 때렸다. 소망마저 파괴하는 불꽃과 모든 것을 분해하는 번개가 아르델의 불꽃과 정예리의 방패를 살랐다.
“추락하라.”
무게의 힘을 실은 에리카의 언령이 떨어지자 모든 마법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중력이, 무게가, 모든 마법 기술이, 마력이, 불꽃이, 번개가…….
에리카는 모든 탑의 힘을 동시에 다루며 눈을 크게 떴다. 온 힘을 다해 마법을 버티는 적들 사이에서……추락하는 힘에 미동도 하지 않는 마법사가 있었다.
바로 윌리엄이다.
윌리엄의 공간 거인이 꺼낸 창이 어느새 안토니오의 탑을 꿰뚫고 있었다. 윌리엄의 공간이 지닌 무게에 분해되어……거울에서 흘러나온 심안의 트라던트에 이끌려……안토니오의 트라던트가 전부 윌리엄에게 흡수된다…….
“하하.”
에리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윌리엄 주위만 힘이 가라앉는 게 아니라 떠올랐다.
윌리엄의 눈동자에 섬뜩한 분노가 어렸다.
“당신의 맹세도 꽤나 무거울 테지요……. 하지만 무게를 드러내는 그 힘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윌리엄의 공간이 커지며 점점 탑의 힘이 무효화되는 구간이 넓어졌다.
쿠구궁….
무거운 진동과 함께 하늘 위로 연옥과 심연의 합동 마법이 구현되었다. 마치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윌리엄, 거울 길, 그림자의 숲을 따라 공간이 대거 일그러졌다.
합동 가디언을 본 딴 번개불꽃 새를 향해 모이던 마력이 갑자기 분산되었다. 하미아의 숲이 에리카와 샐레나의 트라던트 주위를 둘러싼 탓이다.
“귀신들의 연회!”
나무 사이사이로 서늘한 붉은색 불꽃 무리가 나타났다. 영혼을 태우는 지옥의 불꽃, 이그니한테서 물려받은 라이라의 마법이다.
“생명의 파동!”
정예리가 방패 사이로 지팡이를 내밀어 에리카의 마력을 직접 방해했다. 그러나 에리카는 탑의 힘 일부를 하미아에게 빼앗긴 상태에서도 제가 구현한 마법만큼은 제어해 보였다.
“규율마법의 규율 4번째, 규율마법을 손에 든 자는 내 명령을 따른다.”
──샐레나의 트라던트 안에서 레일리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그러했다. 윌리엄이 총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영혼을 가볍게 하여 죽음은 하늘로. 생명은 무겁게, 절망은 더 무겁게.”
“화성전의 규율 5번째를 교체한다. 이곳에서는 살아 있는 자의 마법만을 사용하고 공유하여라.”
붉은 트라던트가 일그러지며 불꽃같은 마력을 두른 레일리가 트라던트 안에서 빠져나왔다. 규율마법의 트라던트를 통해 레일리의 마법이 다른 트라던트에도 전해졌다. 전해진 힘이 하미아와 라이라의 그림자와 거울 길을 통해 심안과 연옥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담아 펼치는 마법만을 허용한다!”
탑의 마력이 대거 흐트러졌지만, 에리카는 결국 합동마법을 추락시켰다.
정예리와 아르델이 맨 앞에 나서 방어했다. 금이 간 방패 위로 소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뭇잎과 꽃잎이 흩날리며 탑의 마력을 흡수했고, 레일리의 규율이 에리카가 탑의 힘을 끌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증폭, 조합, 추가.”
레일리와 윌리엄의 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트라던트의 마법이 더 무거워졌다. 윌리엄이 공간의 무게를 이끌며 에리카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하늘로 도약한 레일리가 규율의 심판자를 소환하며 외쳤다.
“단죄의 검! 혈육의 피를 묻힌 자를, 단죄하라!”
방패 위로 거울이 끼어들었다. 깨진 거울 조각들이 정예리와 아르델의 마법을 반사했다.
심안과 연옥의 마력이 다시 한 번 하미아의 의지에 이끌렸다. 하미아에게 힘을 흡수당해 탑이 몇 개 무너졌다. 하나, 둘……하미아의 예측이 맞아들어 에리카를 향해 흘러들던 에너지가 갑자기 확 줄었다.
그리고 막 김형일과 로일, 에이온과 레녹의 전투가 끝났다.
“흑조, 출력 최대.”
“파괴의 악마.”
김형일의 활에 로일의 파괴마법이 실렸다. 에이온의 구름이 그림자 영역의 힘을 증폭시키고, 레녹이 거울을 통해 진동과 행운을 실은 다트를 에리카에게 겨누었다.
아르델과 정예리의 방패는 결국 추락하는 새를 완벽히 막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방패와 불꽃의 남은 잔흔으로 시간을 벌며 다음 기술을 준비했다.
“아리엘, 방해장, 생명의 열매.”
에리카의 주위로 무수히 많은 실타래가 생겨나고, 생명의 나무에서 맺힌 열매 십수 개가 정예리의 지팡이 안으로 흡수되었다.
“「무수히 많은 생명을 앗아 온 자여, 원한을 그 몸에 쌓아온 자여. 우리의 비명은 그대의 심장을 꿰뚫을지어다.」”
정예리와 아르델의 마법이 에리카의 발목을 잡고, 하나의 전투를 끝낸 마법사들의 지원이 심안과 연옥의 마법을 불사르고, 윌리엄의 마법이 에리카의 공간을 태우고, 레일리의 검이…….
에리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법을 향해 끝까지 신중하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조금 전 하미아의 힘에 의해 무너진 탑들은 에리카에게 상당한 마력을 전해 주던 탑들이었다.
에리카는 정예리와 아르델의 마법을 신중하게 막고 피했으나, 탑의 불꽃과 거울에 밀려난 두 사람의 마법이 또 한 번 우연히 부딪쳤다. 이어 에리카의 마법과 마력이 실타래에 의해 크게 꼬였다.
수습할 틈 없이 윌리엄의 공간이 에리카의 조합 영역을 산산조각 냈고, 레일리의 검이…….
단죄의 검이 에리카의 몸을 꿰뚫었다. 레일리의 소중한 혈육을 죽인 자의 몸과 마법에 죄에 걸맞은 심판이 내려졌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신음하던 에리카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리카에게는 혼자서도 여기 있는 모든 마법사를 상대할 만한 기술과, 힘과, 경험과, 역량이 있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한순간 교차한 행운과 불운이 에리카의 목숨을 갈랐다.
본디 전투란 그런 법이다. 전체적인 역량이 아주 크게 차이 나지만 않는다면, 때때로 실력이 전부가 되지 않는 때도 있다.
에리카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합동마법이 터지며 일대에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아닥쳤다. 폭풍의 근원지는 번개불꽃 새와 에리카의 조합 영역이었다. 그러나 레일리는 폭풍을 견디며 끝까지 에리카의 몸에 ‘심판의 저주’를 새겨 넣었다.
쿠과과과과광!!!!
정예리는 한 발 늦게 준비했던 마법, ‘생명의 파동’을 발동시켰다. 지팡이를 중심으로 별을 닮은 에너지 공이 생겨나 주위의 마력을 전부 끌어당기고 태웠다.
그러나 그 힘은 번개불꽃 새가 어느 정도 약해질 때까지 에리카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레일리!”
새의 힘이 약해지자마자 방어를 그만두고 폭풍을 헤치며 윌리엄이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마법사의 마법이 계속해서 트라던트의 힘을 해체하기 위해 발휘됐다. 정예리, 아르델도 윌리엄을 따라 폭풍을 헤집었다.
“헉……윽…….”
아직도 휘몰아치는 심연의 번개와 연옥의 불꽃, 깨진 트라던트 조각 사이로 레일리와 에리카의 모습이 보였다. 레일리는 에리카에게 검을 꽂아 땅에 쓰러뜨린 채 에리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에리카는 천천히 호흡하며 레일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레일리는 검을 쥔 채 울고 있었다. 드디어 원수를 쓰러트렸다는 것에서 나오는 비탄의 눈물이었다.
“에리카…!”
“너…….”
그때 아직 멀쩡한 심안과 연옥의 탑에서 포격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에리카가 아니라 탑 내부에 있는 뱀들이 조작한 공격이었다. 윌리엄이 다급히 레일리를 감쌌다.
에리카는 단죄의 검이 꽂힌 채로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레일리, 너…….”
에리카가 반 이상 파괴되어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며 속삭였다.
“아직 규율마법을 전부 흡수하지 못했군……. 그래…, 지금의 네 역량으로는 그게 한계인가…?”
“닥쳐!”
“후후……하하. 그래, 그래도 좋아. 충분해…….”
에리카는 가슴에 박힌 단죄의 검을 한 번 쓸었다. 혈족마법의 일원을 살해하고 이용한 죄를 묻는 이 저주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에리카는 심장을 꿰뚫렸고, 근원의 일부가 파괴됐다.
“그래도 승패는 났군. 너희의 승리다.”
“정말, 너희는…….”
레일리는 규율마법과 공명하고 에리카를 단죄하느라 마력과 체력을 거의 소모한 상태였다. 레일리가 태연히 그들을 마주하는 에리카를 눈물 젖은 눈으로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자기 목숨마저도…!”
“500살, 400살, 300살, 200살……. 실비아조차 150살….”
에리카가 그 충격 속에서도 멀쩡한 총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우리에게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미래가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러기엔 너무 오래 살았어.”
“윽…!”
“뭐, 그래도 실비아, 리피트, 베로니카는 죽기엔 이른가. 동기도 작고, 스스로도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 하니. 그런 만큼 어린놈들에게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지만, 나는 아니야. 정말, 오래도…….”
에리카가 쿨럭 피를 토했다. 규율마법은 에리카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마법이다. 단죄의 저주를, 그것도 혈족마법에 근거한 최상의 저주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에리카는 이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치료를 한다 쳐도 규율마법의 저주를 없앨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의사가 필요하다.
현재 트라베리아에 그런 치유능력을 지닌 마법사는 둘이다. 제라드 겔브와 센티아 하이리크.
“레일리.”
에리카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하늘에서 또 한 번 마법이 쏟아졌다.
윌리엄, 정예리, 아르델, 멀리 있는 김형일, 로일, 레녹. 연맹의 마법사들이 에리카의 숨통을 끊으려 한 것이다.
커븐 로드를 처치할 생각이라면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정도로는 안 된다. 마법사의 트라던트를 부수기 위해서도 상대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완벽하게 목숨을 끊고 그 거대한 마력과 영혼을 트라던트에 집어넣어 우주의 흐름을 대체할 에너지로 만들어야 한다.
살아남은 에리카의 측근들이 아직 움직이는 탑의 공간을 따라 이동해 에리카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을 따라 연맹의 다른 마법사들도 도착했다.
살아남은 에리카의 측근은 벨다와 케르베로스 3형제 뿐. 레카, 오리아, 그레텔, 릴리아나는 연맹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예비 목숨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뱀들도 아직 움직이는 탑을 조종해 에리카의 주위에 방어벽을 쳤다.
“에리카, 괜찮아?”
“아니. 난 여기까지다.”
다급히 부축해오는 벨다에게 담담히 대답하며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이만한 기회는 이제 찾아오지 않아. 나는 여기에서 엘리시아의 힘을 해방시키고 명계의 토대를 완성할 거다. 인간을 포함해 여기서 죽기 싫은 놈은 마음대로 나가. 자기가 죽고 싶은 곳에서 죽도록 해.”
“에리카…….”
“벨다, 넌 나가라. 상처 핑계 대지 말고 여기서 벗어나 안나와 실비아의 곁에 가.”
“에리…!”
에리카 일행을 향해 소망의 불꽃을 입은 검은 불꽃 화살 비가 쏟아졌다.
“엘리시아의 힘? 그런 걸…….”
이어 공간마법을 담은 탄환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번에도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트라던트의 방어벽이었다. 다만 트라던트의 방어벽에 꽂히고도 화살과 탄환은 살아 있었다. 윌리엄이 이를 갈았다.
“해방하게 둘 것 같습니까?”
그림자 숲의 가지가 방어벽을 둘러쌌다. 첸과 정예리가 나무에 영혼을 녹이는 불꽃과 아리엘의 실타래를 던졌다.
트라던트 방어벽이 무너지고 화살과 탄환이 다시 에리카를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러나 케르베로스 형제와 벨다가 앞을 막아선 사이 탑을 조종하는 뱀들이 방어벽을 재구축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에리카의 조합마법을 이용하여 벽에 접촉한 마법 전부를 일부 녹였다.
이어 방어벽이 발한 파괴마법에 공격이 산산조각 났다.
강력한 탑 몇 개가 하미아에게 삼켜졌다고는 하나 아직 에리카의 지배를 받는 탑이 훨씬 많았다.
[에리카 님의 실험, 전원은 아니지만 이곳에 남은 저희만은 끝까지 지켜보게 해주십시오.]“…마음대로 해.”
“아리엘! 수호자의 심장!”
정예리가 다급히 축복의 서를 넘기며 주위를 살폈다. 지금까지 에리카가 했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엘리시아의 힘을 해방하겠다는 건 트라던트를 통해 엘리시아의 마법을 펼치거나……설치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느 것부터? 어디서부터…….’
트라던트와 측근들의 방어 때문에 에리카에게 공격이 닿지 않았다. 에리카가 방어막 안에서 손잡이를 잡아당겨 단죄의 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뽑히지 않았다.
라이라의 거울과 하미아의 숲이 트라던트의 공격을 막아섰다. 윌리엄의 탄환이 케르베로스 형제를 밀어내고, 겨우 닿은 아르델의 공격을……벨다가 가로막았다.
그러나 에리카는 순식간에 벨다를 밀어내고는 손에 든 총으로 아르델의 공격을 막았다.
총에 부딪쳐 부서진 아르델의 불꽃이 에리카의 가슴에 꽂힌 단죄의 검에 흡수되었고, 단죄의 검을 중심으로 에리카를 뒤덮은 붉은 회로가 더 짙어졌다.
“윽…….”
“에리카!”
신음하며 에리카는 가슴에 꽂힌 단죄의 검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레일리가 가져온 마법석을 깨뜨려 조금이나마 마력을 회복했다. 그녀가 규율 영역을 강화하며 속삭였다.
“그 검은 당신의 죄를, 생명을 멸하기 전까지는 뽑히지 않아요.”
“확실히 단단하긴 해.”
에리카가 아직 규율마법이 남아 있는 지팡이를 가슴의 검에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레일리, 네가 규율마법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다면…….”
그때 세상이 진동했다.
세계를 뒤덮은 유은하의 환각이 깨지는 소리였다.
“안 돼……!”
하미아가 가슴을 쥐며 신음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라이라가 거울을 사용해 하미아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전했다.
[큰일이에요! 리더님 일행이 트라베리아의 공격을 받고 있어요! 상대는……뭐, 뭐라고? 진짜야?]“왜? 누군데 그래?”
[포츈, 시카, 벨라! 세 명이 나섰대요! 어떡해…!」“헉!”
“커븐 로드가 세 명이나? 거기다 하필이면 벨라와 시카가 같이 나서다니…….”
모두가 경악을 삼켰다. 이를 악문 정예리가 천사의 심장을 사용해 마저 천사를 소환했다.
“생명의 대천사 아리아!”
파지지직!
정예리, 천사, 축복의 서, 세 매체 사이에 얽힌 사슬 몇 개가 하얗게 물들며 끊어졌다.
지금 정예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 생명의 대천사 아리아. 모든 것의 근원적인 힘을 끌어내고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천사다. 여전히 사용하는 동안 통증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하지만, 제물의 숫자도 줄었고, 소환 중에 아리아의 힘 외엔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사라졌다.
“봉인을 풀어라! 제한 해제, 해제!”
정예리와 축복의 서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사슬이 몇 개 더 끊겼다. 평소보다 길고 화려해진 정예리의 지팡이가 에리카를 노렸다.
“─대천사의 권능.”
아리아 옆으로 하얗고 작은 구슬이 몇 개 나타났다. 순수한 생명의 힘. 이 힘은 지정해 접촉한 대상의 생명을 ‘없앤다’. 이성진의 마법마저 없앤 전적이 있는 강대한 마법이다. 다만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이었다.
고작 5분뿐이었으나 엘리시아의 힘이 해방되는 걸 경계하기 위해 정예리는 망설임 없이 봉인을 열어젖혔다.
엘리시아의 전력을 알고 있는 정예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4강은, 트라베리아의 왕 엘리시아는 말 그대로 격이 다르다. 그래서 눈앞의 적에 집중하는 한편으로 우주에 있는 유은하와 이소영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