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60
커다란 낫 밑에서 반짝이는 안개를 두른 왕관을 쓴 여자가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은하…!”
세 사람은 숨을 삼켰다. 그러나 숨을 삼키면서도 그들은 대현과 함께 새블레로 이동할 준비부터 했다. 한두 번 공격을 막는 것이라면 가능하지만 이성진도, 최인성도, 벨라로부터 대현을 방어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은 없다. 특히 이성진은 현재 자신의 마력과 생명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강인하가 소속마법을 통해 물었다.
「시카랑 포츈이 어디 있는지 알겠어?」
대답한 건 이성진이었다.
“화성 앞. 화성의 상태도 이상하군. 어두운 힘으로 뒤덮였어. 저건…사령마법인가?”
“하지만 저거 트라던트에서 흘러나온 힘이야. 아, 화성에 갔던 사람들은…!”
화성과 한국은 다른 행성들에 비하면 거리가 가깝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우주 규모의 거리를 두고 건너편의 기척을 평소처럼 꿰뚫는 건 무리다. 그래도 영혼 위주로 보는 이성진은 화성 팀의 기척을 금세 찾아냈다.
“무사히 빠져나왔어. 소영이가 포츈과 시카를 가로막고 있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지원은 그다음이야.”
피로가 쌓인 지금의 최인성은 그림자 도시가 있다고 해도 새블레까지 단 번에 이동할 수 없다. 몇 번에 걸쳐 이동하기로 하고 최인성이 소속마법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공간을 열었다.
그때 눈앞에 카드가 떨어졌다. 카드에서 나타난 띠가 주위를 휘감고 뫼비우스 모양으로 뒤틀린 순간, 최인성의 공간마법이 되감기듯 끊겼다.
“기다리렴.”
허공이 안개처럼 일렁거리며 포츈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는 마지막에 발동시켜야 하는 장치를 한발 먼저 발동하게끔 만들었으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보고 가야지?”
최인성, 이성진, 슈카, 한 명 한 명 확인하던 포츈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굳었다.
“아피스를 삼켰구나, 흡혈귀 슈카.”
“맞아~. 릴리도 내가 죽였어!”
슈카가 조롱하는 어조로 윙크했다.
진짜 심장을 가슴에 집어넣은 지금의 슈카는 커븐 로드 중상위 실력자와 대등하게 겨룰 만한 수준이다. 동료의 몸을 빼앗아 최인성과 함께 릴리를 삼켜 부수기는 했지만, 본래라면 한국에 얽매이지 않은 릴리 한 명을 겨우겨우 죽일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러니 슈카에게 포츈을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은 없다. 하지만 슈카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포츈을 도발했다.
그러나 포츈은 무심한 태도로 허공에서 카드를 몇 장 꺼내 들며 한국을 내려다보았다.
이성진과 최인성도 조금 전과 달라진 힘의 흐름을 느끼고 한국 혹은 우주를 바라보았다.
“곧 한 번 더 폭발하겠군.”
“이 흐름……한국을 우주에 새롭게, 전과 달리 아주 밀접하게 연결하려는 모양이네.”
이성진과 최인성은 지금 상황을 정확히 읽어 냈다.
최인성과 이성진에게나 겨우 보이는 세계의 축을 따라 유클라프의 마법과 베로니카의 마법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때? 제대로 작동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최인성과 슈카가 연이어 물었다. 포츈이 한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 앞에 나타난 수정 구슬 안에 금빛 안개가 맺혔다.
“조치를 취해야지. 마법이 발동한 이상 릴리와 래넌의 설계가 어긋났을 확률은 낮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너희가 많은 사람을 살려 데리고 나왔으니까. 만약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포츈이 지팡이로 자연 속에 숨은 대현을 가리켰다. 포츈의 어깨에서 시카의 정령 아이지스가 보석을 뿌렸다.
“여기에 있는 마력, 영혼, 생명, 너희의 모든 힘을 저곳에 떨어뜨려 주어야겠어.”
포츈의 손에서 카드가 무수히 증식하여 포츈을 에워싸고, 흩뿌린 보석이 자라나 하늘과 땅을 지그재그로 찔렀다. 보석창이 공간의 흐름을 왜곡시켰다.
“한국의 세례를 받은 한국인의 목숨을 바치겠느냐, 아니면 연약한 인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강대한 너희의 힘을 자의로 바치겠느냐. 그건 너희의 자유야. 하지만 우리가 나섰는데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거라.”
슈카가 긴장을 삼키며 입술을 핥았다. 이성진이 알 수 없는 섬뜩함이 서린 눈으로 수정 구슬을 노려보며 포츈을 향해 물었다.
“한국은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공간이 연결되는 순간, 솟아오른 힘이 진정된 순간……너희가 원하는 장치가 완성되나?”
“아주 올바른 질문이로군.”
포츈이 눈을 접어 웃었다.
“원하는 세계가 아닌, 원하는 장치라. 그래, 이미 다른 부품들도 가동을 시작했어. 모든 마법이 발동되고, 폭발한 힘이 진정되었을 때, 우리가 원하는 장치가 완성된단다.”
“그게…….”
최인성이 숨을 삼켰다.
‘은하가 본 예지몽의 풍경이 실현되는 순간.’
최인성이 무어라 더 질문하려 한 순간이었다. 만일의 참사를 대비해 벨라의 마력을 피해 공간을 빙 둘러 온 윌리엄, 라이라, 정예리, 아르델, 이소영이 겨우 그들의 곁에 도착했다.
“얘들아, 무사해?”
“소영아!”
“네가 제일 무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머나.”
반투명하며 반쯤 부스러진 이소영을 보고 이성진과 최인성은 인상을 찌푸렸고, 슈카는 눈을 크게 떴다. 포츈이 한국과 태양의 에너지를 받은 수정 구슬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였다.
멀리에서 부딪치고 있던 유은하와 벨라 사이로 시카의 힘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뿌리며 떨어졌다.
“……!”
우주의 영역이 베였다고 해서 내 진짜 세계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베인 부분만 정화하면 다시 쓸 수 있는 것을. 산산조각 나지 않는 한 나의 우주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배자』의 지배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 우주의 지배자다.
낫이 『이면』이라는 제목이 새겨진 책 등을 파고들었다. 『이면』은 평온했던 새벽에 찾아온 증오. 벨라를 향한 살의의 결정체다.
벨라와의 싸움은 누가 먼저 죽이느냐의 싸움이다. 벨라의 공격은 완벽히 막을 수 없고, 칼날은 결국 내 몸을 파고들고야 만다.
그렇다면 저 칼날이 내게 파고드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강대하고 무수히 많은 마법이 겹쳐 있는 방패를 사방에 세워 두고서.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벨라의 힘을 막기에는 『책』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세계관을 가르는 표지, 페이지마다 있는 마법, 문단, 문장, 심지어는 챕터까지. 모든 것이 벨라를 막는 방패가 되며, 베어진 모든 것은 벨라를 파먹는 칼날이 된다.
그걸 더 강대화하기 위해 나는 책의 모든 내용을 내 손으로 직접 적었다.
『책속의 세계』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은 길어봐야 20p 정도의 분량이다. 한 권의 책 안에 대부분의 영역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대적하기 위한 책은, 특히 지배자의 책은 500p가 넘는 한 권이 하나의 세계다. 책은 두껍고 설정이 많고 상세할수록, 즉 집필에 공을 들일수록 강해진다.
나를 둘러싼 새벽의 그림자와 살의는 벨라의 칼날을 막는 직접적인 방패인 동시에 벨라를 찢어발기기 위한 칼날이다.
찢어진 책등, 페이지, 페이지와 함께 갈라진 단어와 문장. 그에 해당하는 마법이 문의에 의해 강화되어 벨라에게 쏟아졌다.
“하……아아아앗!!!”
벨라의 낫을 튕겨 낸 나는 달리며 벨라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는 계속해서 새벽의 이면을 소환하고, 동시에 우리가 있는 공간을 더 깊은 차원으로 떨어뜨렸다.
벨라에게 직접 지팡이가 닿지 않아도, 내 시야에서 지팡이가 벨라의 앞을 그은 순간, 그 궤도 그대로 벨라의 몸에도 상처가 났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벨라는 몇 번 내 지팡이의 궤도에 맞춰 칼날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차피 이건 환각의 실현을 보다 강하게 하기 위한 움직임일 뿐이었다. 나는 이번엔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쳐 주위에 스며든 별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터트렸다. 별 조각은 번개, 덩굴, 점, 물고기, 보석 등 다양한 형태를 그리며 벨라의 몸과 마법을 잡아먹었다.
팔에 구멍이 뚫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벨라는 크게 웃으며 다시 낫을 휘둘렀다.
세계를 벨 때는 커다랬던 칼날이 나에게 닿은 순간 다시 작아졌다. 아니, 압축된 것이다. 힘은 그대로고 크기만 작아졌다. 나 한 명을 베기에 딱 좋은 크기다.
칼날에 계속해서 마력이 압축되었다. 벨라의 발밑으로 피 같은 마력이 떨어지며 검은 웅덩이가 점점 넓어졌다.
“많이……느려졌네.”
저것은 벨라의 영역이다. 피의 그림자는 닿는 것을 베고 파묻으며 잡아 삼킨다. 벨라의 영역에 닿은 별 조각이 휘감기는 그림자 속에서 빛을 발했다. 과연 피의 웅덩이는 살의를 띤 정화마법을 얼마나 잡아 삼킬 수 있을까?
물고기는 잡아먹고, 별은 폭발하고, 번개는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찢고, 찢고, 또 베고.
“벨 게 너무 많아! 즐거워…!”
그리고 벨라의 칼날이 내게 닿았다.
책이 나를 보호하고 있고, 내 주위를 둘러싼 별들이나 물고기가 내 상처를 대신하기도 했지만, 벨라의 칼날을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지팡이에서 소환된 유성우와 별의 파도를 벨라는 베어 넘겼다.
낫 밑에서 사슬이 잘그락잘그락 섬뜩한 소리를 냈다.
마구잡이로 베던 벨라가 어느 순간 타이밍을 가늠했다. 책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으며 나를 정확히 노린다. 자신의 상태와 내 마법을 가늠하고……벤다.
스걱!
문이가 물고기 몇 개를 움직여 막았으나 팔이 반 이상 잘려 나갔다. 직후에는 발목이 반 이상 잘려 나갔다.
“꺄하하하! 신중하게 해도 다 잘리지가 않네…? 네 영역이라서 그런가?”
문이가 내 반쯤 잘린 팔다리에 예리의 붕대를 감아 주었다.
우리는 점점 더 깊은 공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중력이 강해지고, 이면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별의 광채가 점점 눈부시게 선명해졌다.
책에서 쏟아져 나온 별이 고리를 그리고, 은하를 그렸다.
우주가 나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동조했다.
우주가 움직인다.
공간이…….
키잉……!
하늘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어둠이 깊어지고, 별빛이 빗금처럼 길어진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토록 깊은 세계까지 떨어져도……영역이 같은 편을 들어도……꿈 조각에 육체와 모든 마력에 구멍 뚫려도……그래도 벨라는…….
벨라의 낫 주위로 칼날이 수십 개 늘어섰다. 한꺼번에 쏟아진 칼날이 공간의 심연으로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주위를 장악한 무게를 베고, 낫이 아닌 몸을 도는 마력에서 일어난 칼날이 벨라를 붙잡은 별의 힘을 벤다.
『이면』의 설정에 의해 벨라는 내 마법을 벤 횟수만큼 느려지거나, 마력이 약해지거나, 공격당하는 등 제약이 걸린다. 지금 그 제약을 조금 베어 낸 것이다.
벤 순간 걸리는 제약이지만, 벨라의 ‘무엇이든 베는 칼날’은 당연히 표적만 제대로 잡는다면 그 ‘제약’도 베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살의와 마음을 갈고닦아 그게 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도 완전하지 않다. 반대로, 벨라도 제약을 완전히 베어 내지 못했다.
벨라는 조금 빨라지고, 조금 느려지고, 다시 더 빨라졌다.
“『성신의 기둥』!!”
『아멜다의 기둥+칼과 방패 시리즈』
하늘에서 거대한 검이 떨어지고, 검을 따라 솟아난 거대한 수정 클러스터가 벨라의 몸을 꿰뚫었다. 꿰뚫기 전에 베였으나, 클러스터 몇 개는 칼날의 마력을 좀먹고 벨라의 몸에서 자라났다.
‘『이면』의 책도 결국 시간 벌기에 그친다 이거야?’
나는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앞까지 다가온 낫이 내 지팡이가 휘둘러지는 걸 멈춰 세웠다. 낫과 지팡이가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빛이 튀었다.
나는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지팡이에서 마력을 방출했다. 긴장을 푼 순간 이 지팡이는 베어지고 만다. 그러니 그 전에 내가 이 검은 칼날을 기필코 정화시키리라.
“너 말이야, 다 좋은데 무기술은 조금 더 배우는 게 좋겠다! 최소한 봉술은 배워! 낌새 하나 보이지 않는 마법들과 달리, 지팡이를 휘두르는 움직임은 다 보인다고!”
“크윽!”
“물론 네가 몸을 쓰지 않는 타입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법 의식이 도중에 막히고 싶지 않다면 필요할걸? 그래도 힘이 세서 의외로 밀리지 않네. 음, 아니, 생각보다 더 센대? 내가 아니면 짓눌렸겠다~. 힘이 세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벨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서로의 마력이 서로를 갉아 낸다. 벨라의 몸이 일부 사라지고, 내 피부에서는 피가 튀었다.
마력을 방출하는데 집중하는 나 대신에 문이가 벨라의 몸에 붙은 문장을 통해 또 한 번 벨라를 부술 준비를 했다.
그때 내 몸에서 떨어진 피 몇 방울이 벨라의 낫에 스며드는 게 보였다. 벨라의 낫이 평소와 달리 기이한 빛을 띠었다. 한 점의 별을 향해 피 같이 진득한 마력이 굶주린 짐승 같은 기세로 덤벼들어 물어뜯었다. 놀랍게도 정화의 힘마저 그렇게 묻혀 버렸다. 별의 힘이 완전히 묻힌 순간 낫이 보다 어둡고 예리한 빛을 띠었다.
“네 피……역시 독특한 맛이야. 짜릿해!”
벨라가 흥분한 얼굴로 속삭였다. 심상찮은 기세에 나는 다급히 물러났다. 별의 물고기 무리가 내 앞을 가로막고, 불길한 기분에 고개를 숙인 순간, 머리 위로 서늘한 칼날이 지나갔다. 우주에 커다란 금이 생겨났다.
등골이 섬뜩했지만 나는 곧바로 문이가 미리 설치해 둔 마법을 발동했다. 벨라의 상처가 깊어지고, 이번엔 벨라의 피가 벨라의 낫에 떨어졌다.
피, 그래, 벨라의 낫은 피와 영혼과 죽음을 흡수해 강해진다. 심지어 자신의 피조차 마법을 강화하는 대상이다. 그녀가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는 걸 오히려 기꺼워하는 이유다.
나는 구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에게서 들은, 벨라가 우리 앞에서 한 번도 쓴 적 없는 기술을 떠올렸다.
키잉……!
그때 아까 울렸던 공간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그래, 공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간? 아니, 차원이! 이것은 내가 만든 소리가 아니다. 세계의 근원적인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깊은 차원에 떨어졌다.
우주와의 교감에 반응해 ‘그것들’이 나를 향해 이끌렸다. 손등에 무엇인가 닿았다. 공간 깊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금색의 커다랗고 휘어 있는…….
‘링? 울타리? 뼈대?’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움직이고 있는 테두리 같은 것을 더듬었다.
「마스터, 마스터와 교감하지 않으면 저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감해도 형체가 흐릿합니다.」
‘그럼 자연적인 무언가라는 거야? 이렇게 커다란 게?’
테두리는 아주 길었고, 아주 먼 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테두리 사이에 있는 커다란 기둥 같은 것이 만져졌다. 기둥 꼭대기에 별을 형상화한 조각이 움직이고 있다.
테두리가 나와 감응하며 더 눈부시게 빛났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꿈’이 ‘현실’로 바뀌는 감각이다.
‘세계의 축’이 내 꿈에 이끌려 『이면』의 꿈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헉…!”
“꺄하하하! 새로운 거네?”
그래, 이것은 세계를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축이다! 유클라프만이 움직일 수 있던 그것이다! 그게 내 인식에 걸맞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
그러나 벨라는 이미 공격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등 뒤까지 팔을 돌리더니 공간을 가르고 도약해 순식간에 나를 향해 다가왔다. 문이가 부른 물고기 무리를 몸에 두르며, 나는 다급히 책과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쾅!!!!
나는 낫에 책과 지팡이의 오라가 조금씩 베이는 걸 느끼며 안간힘을 썼다. 소름끼치게 웃는 여자를 소리쳐 불렀다.
“꺄하하하!”
“벨라!”
“으응?”
“벨라 트리저! 물러나!”
단순히 내 몸이 위험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말을 할 리 없다. 그걸 알고 있는 벨라의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가라앉았다.
“당신은 정말……눈이 있으면 좀 크게 뜨고 봐요! 아무거나 베면 다예요?”
“흐음~?”
“저건 베면 안 되는 겁니다! 제 마법도 아니고요!”
“하지만 너한테 힘을 실어 주고 있잖아. 무엇보다…….”
벨라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는 힘으로 벨라를 밀었다. 지팡이와 책이 베어지는 와중에도, 벨라는 생각보다 순순히……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낫에 가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저거……어쩐지 내 힘으로도 안 닿을 것 같다…?”
흥미에 가득 찬 눈과는 달리 벨라가 낫을 뒤로 빼려고 한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눈부시도록 깊고 선명한 자줏빛과 푸른 불꽃으로 너울거리는 우주가 떨어졌다.
나와 벨라는 다급히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자주색과 푸른 우주가 나의 우주에 섞이며 우리를 둘러 싼 차원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우리는 심연에서 수면 위로 돌아왔다.
“여기서 멈춰, 벨라! 유은하 너도!”
시카는 아스트랄로 이루어진 휘장 깃발을 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로만 들었던 시카의 최대 방어 무기 형태다.
두 갈래로 갈라진 시카의 불꽃과 알파의 불꽃이 내 우주를 살라 먹었다. 나는 혀를 차며 책과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반 이상 잘린 팔을 잇기 위해 억지로 묶은 붕대도 얼핏 눈에 들어왔다.
책은 사선으로 잘려 4분의 1이 저주가 되어 소모되었고, 지팡이도 너덜너덜했다.
‘또 다시 써야겠네.’
한국과 화성의 책은 한국과 화성의 모든 것을 담고 통제하기 위한 책이었다. 찢어져 봤자 평행 세계가 사라질 뿐이다. 심지어 기록은 문이의 안에 남아 있고, 그 힘을 다시 써야 할 일이 생길 가능성은 이제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직접 쓴, 벨라를 상대하기 위한 책. 고민하고 고뇌하며 문이의 기록과 지식에 도움을 받아 내가 직접 손가락을 움직여 쓴 책이다. 벨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했다.
책의 내용은 문이의 안에 남아 있지만, 베껴 쓰는 것으로는 이전만큼 감정을 담을 수 없다. 거기다 이 책으로도 벨라를 완벽히 막지는 못했다. 나의 영역에서 사용한, 영역을 지배하는 기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울분이 솟아 이를 악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모든 우주의 가호가 시카를 향해 집중되었다. 길이 차이가 큰 층 난 자줏빛 머리카락에 청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의 남자가 우주의 오라를 몸에 뒤집어쓰며 날카로운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싸움은 여기서 끝내줘야겠다. 너희는 목적을 이뤘잖아?”
“꺄하하하! 너희의 진짜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겠지만?”
그때 공간이 연결되는 일렁거림과 함께 내 앞으로 몇 사람이 내려섰다.
아마 멀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을……유펠르시아의 앰버와 도미니크, 구 트라베리아의 아멜리아와 셰린…….
내려서자마자 셰린은 내 상태를 확인하고 내게 빛의 마력을 뿌렸다. 붕대가 감긴 팔과 다리에 빛이 가장 많이 고였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과거 절친했던 같은 일족의 전우 혹은 소꿉친구의 얼굴을 본 벨라와 시카의 감정이 다정해졌다. 특히 시카의 감정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졌다.
“별무리를 데리러 왔나봐?”
“…그래.”
앰버가 착잡함을 냉정함으로 짓무른 채 수긍했다.
이어 한국으로 향했던 포츈이 돌아왔다. 포츈은 눈에 익은 일행을 흘끗 보고는 시카의 뒤에 섰다.
“어땠어요?”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어. 유클라프와 베로니카에게도 확인 받았으니 틀림없겠지.”
“그래…….”
벨라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최흉의 마법사다운 잔혹한 말을 지껄였다.
“하긴, 약한 인간 무리의 목숨보다 초월자들의 전력을 다한 마력이 훨씬 낫겠지. 최소한의 힘과 다양성은 이미 충족됐었고.”
나는 지팡이를 쥐며 이를 악물었다. 시카가 사나운 눈으로 벨라를 흘겼다.
“쓸데없이 도발하지 마.”
“빡빡하게 굴지 마. 뭐, 어차피…….”
벨라가 키득 웃었다.
“빠져나간 인간들도 이제 파리 목숨이겠지만?”
“…….”
“킥킥. 릴리랑 래넌의 음악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때마침이라고나 할까, 또 한 번 익숙한 기척이 내 주변으로 내려섰다. 한국에 갔을 터인 성진이, 인하의 가호와 예리의 마법을 몸에 지닌 슈카, 시카의 우주에 삼켜졌던 소영이와 화성으로 향했던 아르델, 윌리엄.
나는 다급히 성진이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상태는?”
“사람들은…….”
이성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수명의 반 이상은 잃었을 거다. 영혼, 생명, 근원을 통째로 뜯긴 거라 회복하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거야. 특히 계약자 6명은 상태가 심각해.”
“그런…….”
계약자 6명 중 3명은 아는 사람이다. 대현의 이사장님, 유란의 이사장님, 대현의 방위 책임자인 주창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때때로 마주치며 이름을 기억한 이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아끼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럴 수가…!”
셰린과 아멜리아도 초조한 표정으로 발을 굴렸다. 그들은 한국의 대현과는 만난 적이 없지만, 계속 대현에 몸을 두고 있으며, 새블레의 대현과 많이 친해지기도 했다.
“디나와 예리가 조치하고 있어.”
현재 새블레의 가장 뛰어난 의사 두 명이 조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릴리와 래넌은 그만한 인사들이고, 사람을 살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나도 인하랑 같이 계속 가호를 내리고 있고.”
“…너 괜찮아?”
표식을 사용한 가호가 얼마나 성진이의 몸과 마법에 부담을 주는지 알기에 걱정부터 들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우리 앞에 있는 건 커븐 로드들이다. 성진이의 표정이 한순간 다정하게 풀렸다.
“괜찮으니까 왔지.”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하긴, 성진이는 우리에게 이성을 방패로 세우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냉정한 판단하에 온 것일 터다.
“저도 본부에 돌아가면 바로……아니, 여러분을 치료하면 바로…….”
시카가 걱정을 금치 못하는 셰린과 아멜리아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인간들이랑 정말 많이 친해졌나 보다. 하긴, 새블레에서 지위가 있는 인간들은 공정하고 상냥한 놈이 과반수지.”
“맞아.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아. 싸움을 끝내라고 했던가? 우리는 이만 돌아가도 될까?”
아멜리아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공감하던 나는 공간 깊은 곳에서 힘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오늘에서야 생생하게 확인한, 세상의 뼈대가 되는 ‘세계의 축’. 그곳에서 흘러나온 힘으로 인해 공간이 움직이고, 구조가 바뀌고, 다시 연결된다. 직후 한국 쪽에서 또 한 번 무시무시한 힘이 방출되었다.
“윽….”
나는 손으로 귀를 쓰다듬었다. 소리……그래, 소리다……. 격렬하고 아름다운 소리가……공간을 아우른다.
태양을 아우른다.
황금빛 거대한 왕관이 태양을 둘러싼다. 모습이 왕관과 비슷하기에 왕관이라 표현했지만, 자세히 보면 길이가 다른 긴 막대 무리가 건반을 누르듯 규칙적으로 나선을 그리며 돌고 있다. 그 양옆에 트라던트가 상징처럼 장식되어 있고, 막대 무리의 가운데에 꼬아진 악보가 빙 둘러져 있다.
왕관 위에는 트라던트에서 비롯된 녹색 이파리와 금색 꽃잎이 가득 차 있고, 왕관의 뼈대를 이루는 막대 위아래 장식들은 자세히 보면 무언가의 작품이거나 클라인 남매의 작품에서 흘러나온 마법석 조각이었었다.
「…문.」
그때 손목에서 페어링이 옅게 공명했다. 인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왕관 중앙에 문이 있대.」
나는 속으로 불안을 삼켰다.
‘준영이랑 같이 있구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새블레로 한 번 돌아갔을 준영이와 인하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약한 몸으로 김준영은 결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변하는 순간을 온몸으로 감지하여 똑똑히 살펴볼 생각이다.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는데, 너무 깊어서……인성이의 눈을 빌리고 있어.」
조금 더 먼 곳에서는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사방으로 퍼지던 어두운 마력이 수그러들며 모든 죽음과 영혼이 한데 뭉친다. 암흑같이 까만 대지가 깔리고, 테두리부터 장미와 철 울타리로 채워진다. 허공에 달 같은 보라색 덩어리가 뭉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