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63
“데미는 인간을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는걸. 그래서 그건 정말 싫었어.”
“…….”
우리는 또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득 인성이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인성이가 보았던 최상헌의 기억. 슈카는 알토와 함께 가려던 최상헌을 붙잡고 같이 가려고 했다. 아마 유일하게 최상헌의 죽음을 미리 방지하려고 했다.
“저는…….”
“응?”
슈카는 다시 흐른 눈물을 닦고 나를 돌아보았다.
“저는 고맙다고 말하게 해주세요.”
“……왜?”
“저희 동료의 아버지를……최상헌 씨의 위험을 눈치챈 것도, 구하려고 한 것도, 당신뿐이었어요. 감사…….”
“싫어요, 받지 않을래요.”
슈카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는데 무슨 소용이에요. 말뿐이었는데 뭐가 고마워요. 허무할 뿐이에요. 그만해 주세요.”
“…….”
어딘지 허망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슈카가 손등으로 아직 젖어 있는 눈가를 슥슥 문지르고 굳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누구보다 장난스럽고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슈카는 아주……아주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말은 해낸 게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자격이 있는 거예요. 고맙다는 인사는 저희가 해야죠. 저희를 인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저는요, 인간을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미래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복수와 다른 것을 저울질하는 날이 올 줄도 몰랐고요, 상황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도 몰랐어요. 다들 그랬을 거예요.”
“여러분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알고 받아들여 주셔서 고마워요. 당신의 인정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얼마 남지 않은 싸움이나마 최선을 다해 싸워 당신이 저희를 인정해 줄 가치가 있었음을 증명해 보이도록 할게요. 그게 저희가 인간들 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감사…….”
“아니요!”
슈카가 양손으로 내 말을 막았다. 하하, 레일리가 힘 빠진 얼굴로 웃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존중하기로 했다. ……저런 죄악감을 나도 느낀 적이 있으니까. 예지몽이 처음 예지몽이었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내 마음이 아마 지금의 슈카와 비슷했을 거다.
“그리고…….”
슈카가 우리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고마워, 레일리.”
슈카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일리가 곧 슈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잘 부탁해.”
두 사람이 손을 떼는 것을 확인하고, 이번엔 내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나를 돌아 본 슈카가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신의를 다해 받들겠습니다, 저희의 별이시여.”
“아니, 그럴 필요는…….”
그러나 슈카는 그저 웃을 뿐 말을 번복하지 않았고, 나와 마주 잡은 손을 크게 몇 번 흔들고 놓았다.
이야기가 끝난 후 레일리는 슈카를 내게 맡기고 걱정하며 찾아온 SR의 동료들과 함께 떠났다. 부상은 나았지만 흡수한 규율마법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라 레일리는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나는 정식으로 슈카를 새벽별무리의 휘하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녀에게 8각 별모양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건넸다. 이 키메라가 새벽별무리의 책임하에 있음을 증명하는 신분 증명표……라고 하면 듣기에 좋지만, 한마디로 말해 목줄이었다.
트라베리아가 적이고, 그들이 키메라를 부하로 쓰는 지금, 키메라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목줄에 든 기능은 그들이 사람에게 적의를 보였을 때 한하여 그들의 몸과 마법을 구속하는 것. 평생 자유를 얽매이고 산 키메라들에겐 불쾌한 물건이겠지만, 그래도 일반 시민들이 안심하기 위해, 종내에는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었다.
안타깝게도 키메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슈카는 기꺼이 목줄을 목에 찼다.
“이 목걸이 예쁘다. 마음에 들어.”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저희 동료가 디자인했어요.”
캘리의 오를레아가 디자인하고 내가 만들었다. 목걸이를 찼으니 이제 연맹에 이름만 올리면 슈카는 정식으로 첸 일행의 동료가 된다.
나는 반과 데미안에게도 목걸이를 줄 겸, 대현의 지인들과 이야기라도 나눌 겸 깨어 있는 한국의 마법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신의 동료들에게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슈카도 나를 따랐다.
깨어 있는 한국의 마법사는 다행히 환경이 변한다고 몸이 위험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국과의 공명 때문에 정신과 마력이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렇기에 가장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곳에서 쉬고 있다. 릴리와 래넌의 측근이었던 반과 데미안도 대상자다.
새벽별무리 본부 내부에 있는 ‘평온의 공원’은 정신 공격을 상쇄하기 위한 방공호로 내가 직접 만들었다. 원래는 플라네타리움이었지만 바깥이 온통 우주니 질린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공원으로 모습을 달리 했다. 하늘도 이젠 마법으로 만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지구의 하늘로 바꾸었다.
평온의 공원은 공간확장마법을 걸어 아주 넓으며, 꿈속 세계를 모티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에 반응한다. 예를 들어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 그곳에 들어갈 경우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게 된다.
정원에 들어가 보니 만나려고 한 사람이 모두 한데 모여 있었다. 한국에서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을 포함한 새블레의 키메라 팀, 정신을 잃지 않은 한국의 마법사들.
“리더님과 같이 왔군요.”
키메라들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첸에 이어 데미안도 걱정을 담은 말을 건넸다.
“레일리와 이야기는 잘 끝났나?”
“응, 잘 끝났어. 목걸이도 받았어.”
슈카가 자랑하듯이 목걸이를 보여 줬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라이라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걸로 우리 같은 팀이 됐네. 환영해!”
“새블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거든 반과 데미안도 지금 기회에 받아 두십시오.”
“응.”
“디자인이 별로 취향이 아니군….”
“왜? 예쁘잖아!”
“은하야!”
슈카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편, 대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유정 언니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곧고 가는 머리카락이 내 뺨에 흐트러졌다. 한국에선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시선이 가지 않았는데, 유정 언니는 얼굴을 보지 못한 2년 사이 머리색이 변했다. 한올의 머리카락 반이 은색, 반이 검은색인 식인데 상당히 특이해서 자꾸 눈이 갔다.
“치료받았어? 받은 거지? 커븐 로드 세 명이랑 싸웠다고 들었는데, 멀쩡한 거 맞지?”
유정 언니에 이어 인호 오빠, 서준 오빠, 오랜 기간 한국에 있던 동료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 성후 오빠와 백한 선생님, 김유라 선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정현 선생님, 김주한 선배 등……대현의 마법사들이 나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멀쩡해. 큰 부상은 안 입었고, 작은 상처는 다 나았어.”
유정 언니가 하나로 묶어 올린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유정 언니 머리색이 변한 것처럼, 내 머리색도 유정 언니와 만나지 못하는 사이 검은색에서 남색으로 변했다.
“우리 은하, 정말로 강해졌구나.”
유정 언니가 울먹이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유정 언니 뒤에 선 인호 오빠와 서준 오빠가 다정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가슴이 울컥 뜨거워졌다. 다정하고, 낯설고, 그러면서 익숙하고, ……그리웠다.
울음을 채 그치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던 손을 푼 유정 언니가 인호 오빠의 몸에 등을 기댔다.
그 뒤에 선 대현의 마법사들이 우리에게 흐뭇한 눈빛을 보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들은 손을 흔들거나 목례했고, 나 역시 목례를 돌려주었다.
김주한 선배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가족인 주연 선배가 죽은 걸 뒤늦게 들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멈칫했지만, 김주한 선배는 평소의 까칠한 표정을 지우고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를 열어 기척을 확인해 보니 인성이는 유란의 친구들과 함께 셰린의 집중 치료를 받고 있는 소영이의 병문안을 가 있었다.
그때 마침 슈카와 이야기를 끝낸 라이라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리더님~!”
안 그래도 아까부터 이어지던 시선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그쪽을 향해 다가가니 첸과 라이라가 데미안과 반을 내 앞으로 밀었다.
“읏차, 얘들이 리더님께 인사하겠대요!”
“밀지마라.”
“자, 자.”
라이라를 향해 한 번 인상을 쓴 데미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을 계속 상상해 왔지만, 막상 같은 편으로 만나니 낯설군. 나중에 다시 한 번 전력으로 겨뤄 주겠나?”
“그걸 인사라고 하는 거야? 어휴, 데미는 정말 싸우는 것 외엔 관심이 없다니까!”
트라베리아의 세계에 갇혀 데미안과 싸웠던 기억은 그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나는 떨떠름한 감정을 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을 해보는 건 서로의 실력을 재보기 위해서도 나쁘지 않으니까.
이어 나는 슈카와 데미안의 사이에 서 있는 반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반은 내가 여기에 온 순간부터 계속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만났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반을 재촉했다.
“반, 리더님께 인사해야지요.”
“……리더님.”
“네, 말했다시피 저희는 유은하를 리더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유은하…….”
반이 느릿느릿 내 이름을 불렀다. 유정 언니가 의아한 눈으로 인호 오빠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따라 쟤 평소보다 행동이 더 느리지 않아?”
“그러게…….”
그때 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보고 싶었어…….”
어머, 슈카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첸은 입술을 비틀더니 애써 웃음을 참으며 부채를 살짝 펼쳐 입가를 가렸다. 그 짓궂은 태도에 라이라가 첸의 옆구리를 찔렀다.
데미안이 말없이 옆으로 비켜서자, 반이 내게 몇 걸음 다가왔다.
“이렇게, 현실에서 보고 싶었어……. 적이 아니라 아군으로……. 음, 아직 아군……은 아닌가?”
“인사를 나누고 목걸이를 걸면 아군이 되겠죠. 아직 트라베리아와 싸우고 있는 이상 이건 어쩔 수 없는 절차라, 양해 부탁드려요.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응, 알아.”
반과 함께 데미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만나기 전에는……계기가 생기기 전에는……영원히 적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언제나,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반의 목소리는 떨리다가 차분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의 핵을 한 번 살폈다. 평소와 달리 핵이 균형을 찾았다. 감정을 평소보다 강하게 느낀다면 침착하게 행동하기 어렵겠지.
좀비 반은 언제나 느긋하고 무심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건 감정을 옅게 느끼기에 나온 태도로, 아마 지금 모습이 보통의 반일 것이다.
“고마워. 만나면,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이 말부터 하고 싶었어.”
그래도 지금 상태에 적응하고 있는지 느릿느릿 이어지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평소 반의 말이 느린 것은 허무로 채워진 마음으로는 생각을 잇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빨리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인지 반의 말은 중간중간 습관적으로 호흡이 끊겼다.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줬을 때부터, 내 안의 빈 부분이 채워졌어. 감정을 고민했고, 감정이 생겨났고, 채워졌어. 나만이 아니라 다들 네 말을 좋아했어. 그래서, 항상, 네가 보고 싶었어.”
나는 곤란한 심정을 삼켰다. 이거, 좀…….
‘진심으로 말해 오는 건데 멈출 수도 없고.’
반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생생하게 빛났다.
“저번에……한국에서도 질문에 대답해 줘서 고마워. 우리가 묻는다고, 대답해 주는 사람은 많이, 없거든. 그리스로마 신화도 여섯 권 읽었어. 같은 제목인데도 책 종류도 많고, 이야기도 많더라.”
반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런데, 신은……음……좀 이상하더라…….”
“네. 신화는 좀……이상한 게 많아요.”
이해가 되는 감상이었던지라 나는 동의의 답변을 돌려주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마주 보던 반이 이내 활짝 웃었다. 무심코 어깨를 들썩이며 동요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감정의 결여로 표정이 흐렸던, 트라베리아에게 붙잡혀 있던 시절의 반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다.
“그리고 난, 네 덕분에……또 깨달았어.”
나에게 한 발짝 더 다가온 반이 거침없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널 좋아해.”
“…….”
“네가 좋아.”
“……헐.”
곁에 있었기에 당연히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현 일행이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을 겨우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삼켰다. 슈카가 깜짝 놀라 데미안에게 귓속말을 했다.
“쟤 유은하를 좋아했어?”
그러나 대답한 것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쟈넷을 어르던 첸이었다.
“네. 오래 됐습니다.”
“헐…….”
이어 첸은 나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반은 감정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감정을 숨길 필요성을 잘 모르더군요. 그냥 천성이 둔한 것일 수도 있고요.”
감정이 비어 있던 반이 처음으로 감정을 향한 상대, 그게 바로 나다. 내 말에 의해 ‘사랑’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적이 아닌 상태에서 만나자마자 바로 고백해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죄송합니다. 전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으악.”
슈카는 이번엔 안타까운 기색으로 신음했다. 한편 대현 쪽에서는 작게 소란이 일었다. 은하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누구?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던 대현 사람들은 아직 그 이야기를 모르던가.
반의 미소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렇구나. 사귀는 사람이…….”
“…….”
“……아.”
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슈카와 라이라가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반은 왜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건지 이해 못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거, 왜…….”
동료가 우는 것을 보고 겨우 웃음을 삼킨 첸이 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반, 괜찮아?”
“아아아, 제일 연장자가 왜 울고 그래.”
“진정하십시오, 슈카.”
“그렇지만 원래 무덤덤하던 애가 이렇게 우니까…!”
동료의 눈물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지 슈카와 라이라가 두서없는 위로를 보냈다. 키메라 일행이 반을 위로하거나 방치하는 사이, 당황한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은하야…? 지금 막 백한 선생님한테 들은 건데, 너 진짜 성진이랑 사귀어? 언제부터?”
“말할 타이밍이 없었어. 사귀는 상대는 성진이고, 사귄지는 두 달 정도 됐어.”
“아, 얼마 안 됐구나. 어……분위기가 이래서 말하기 뭣하지만, 축하해!”
“언니랑 오빠도.”
유정 언니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인호 오빠가 어린 시절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내가 유정 언니와 대화를 마친 후에도 반은 눈물을 쉽사리 그치지 못했다. 양심이 찔렸지만 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 상황을 빌미로 꼭꼭 삼켜 두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진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낄 정도로 지금 반이 느끼는 감정은 다채로웠다.
“아이 참, 한 번 차인 게 무슨 대수라고! 아니, 대수인가……. 끄응, 그래도 상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어쩔 수 없지. 원래 마음이라는 게, 사람 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응.”
“경험은 우리 중에서 제일 많을 텐데, 감정을 다루는 법은 정말 서툴다니까.”
우는 반을 보며 잠시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슈카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경직된 얼굴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토해 냈다.
“데미안, 좋아해.”
……헐?
이번에는 슈카와 데미안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반 역시 눈물 아롱아롱 거리는 눈을 크게 벌리며 슈카를 바라보았다.
장군 시리즈는 다들 살아남는 데 필사적인 데다, 라이라처럼 무성일 경우도 있고, 종족이 제각각인 것도 있어,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단다. 그런데 반이 울고 있는데 뜬금없이 고백을 한다고…?
한순간 진짜 좋아하는 게 맞나 싶어 감정을 훑었다. 데미안을 바라보는 슈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슈카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데미안을 좋아한다.
“조, 좋아……으으윽, 좋아해! 나랑 사귀자!”
슈카가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한국에서 봤을 때는 흥미만 추구하고 변덕이 심하여 까다로운 성격으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순하고 귀여웠다.
라이라가 입가를 양손으로 막으며 흥분을 삼켰고, 첸이 놀라다 말고 흥미로운 듯 미소 지었으며, 하미아는 당황스러운 듯 주위의 눈치를 살폈고, 라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슈카가 초조한 얼굴로 재촉했다.
“대답, 빨리!”
슈카의 감정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데미안이 곧 대답했다.
“그래.”
슈카가 안심한 얼굴로 등 뒤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슥 넘겼다.
“이것 봐, 반. 너만 차이는 게 아니……아니, 잠깐. 뭐라고?”
“그래.”
“그거 내 고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맞다. 사귀도록 하지.”
언제부턴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흥분하고 있었다. 유정 언니가 눈을 반짝이며 내 어깨를 흔들었으며, 라이라가 결국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축하해, 슈카! 데미!”
한 사람을 차고 울린 입장에서 이런 말은 좀 그렇겠지만, 솔직히 나도 흥미진진했다. 그러나 정작 고백한 슈카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잠깐! 내 계획은 말이야, 이참에 은근슬쩍 고백하고 차여서 반이랑 같이 서로를 격려하면 어떨까……싶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받아들여? 왜?”
“좋아하니까.”
“데미안 네가? 날? 고백받고 눈 하나 깜빡 안 했으면서? 놀란 표정 정도는 짓길 바랐는데! 아니, 언제부터?”
“너야말로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지?”
“음……한 3년? 됐나? 좋아진 이유는 딱히 없어. 그냥 잘생겨서?”
“나는……언제부터 좋아했는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원래 널 좋아하는 편이었고, 네가 릴리를 죽이는 걸 보고 더 좋아졌다. 네게 고백 받고 보니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 걸 알겠더군.”
“…….”
슈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반이 마지막 눈물을 닦으며 슈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 됐다.”
“으윽……응원하면 어떡해!”
“잘 된 일이잖아?”
“응…….”
고백에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실망한 표정을 짓던 슈카가 안타까운 얼굴로 반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반.”
첸이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실연을 공유한다고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맞아. 반이 차인 건 안타깝지만, 좋은 일은 좋은 일이지!”
“그냥……이참에 나도 감정을 정리하면 좋겠다 싶었고……. 거기다, 어? 실패하고 바로 한쪽이 성공하면……. 이럴 줄 알았으면 나중에 고백할 걸…….”
“반은 모르겠다만 나는 기분이 나쁘군. 그리고 사귀기로 했으면 애인 아닌 상대를 끌어안지 마라.”
“앗, 네, 네…….”
슈카가 어색한 얼굴로 반을 놓고 데미안의 옆에 다가갔다. 그러자 데미안이 슈카의 손목을 잡아 휙 그녀를 끌어안았다. 슈카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키메라는 살아 있다. 종족은 우리와 다르지만, 하물며 인공 생명체이지만, 장군 시리즈는 자아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웃고, 울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사랑을 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인간적이구나.
“강해서 좋아하게 되었다니, 정말 데미답지 않아?”
“…….”
라이라의 말에 라스와 반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첸이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생각해 보니 저희 키메라 중에서 커플이 생긴 건 이게 처음이군요.”
“그러게! 누군가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게 된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데다, 다들 힘들어서 고백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으니까. 슈카! 이따가 축하 파티 하자!”
“뭐? 부끄러워!”
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정 언니가 어느 순간 가라앉은 눈으로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장군 시리즈는 생각보다……인간적이구나. 장군 시리즈 이야기를 듣고 놀랐는데, 너희가 키메라를 보호하기로 한 이유를 알 것 같아. 경계하느라 대화를 피하기만 했는데, 생각해 보면 다들 우리한테 별다른 적의를 보이지 않았어.”
“한국이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응. 적어도 한국의 키메라는 인간을 적대하진 않았어.”
키메라들은 부끄러워하고, 짓궂게 놀리기도 하며 다시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놀림과 축하와 위로의 대화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쯤에야 데미안과 반은 내게 목걸이를 받아 갔다.
나는 대현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깨어 있는 한국 사람들의 몸 상태를 한 번씩 살피고 필요할 법한 아이템과 마법 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머지않아 이곳으로 돌아온 인성이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아직 피를 되돌려 줄 사람이 남았다는 슈카와 함께 다시 생명의 호수 안쪽을 돌아다녔다.
슈카의 일은 금방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치료에 전념하는 란 리나, 예리, 셰린. 약한 봉인, 생명 공유, 종말의 가호로 위급한 사람들의 목숨을 유지하는 루카, 도로시, 성진이.
나는 의사들과 의논을 나누며 약해진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 만한 마법을 이것저것 설치했다. 급한 조치가 끝났을 즈음 나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일하고 있던, 일할 수밖에 없던 예리, 디나, 성진이와 함께 휴식을 강요받았다.
“상태가 안 좋아지면 부르겠습니다.”
“네. 푹 쉬고 회복하고 교대할게요!”
우리가 무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자주 지켜본 예리는 걱정을 삼키고 곧바로 휴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휴식의 효율을 강조하며 나, 성진, 디나가 밥을 먹고 한숨 자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라라를 돌봐 주고 있던 캘리의 동료 코린이 내게 라라를 안겨 주었다. 전쟁시 라라는 이성진의 아공간에 들어가지만, 이번엔 우리가 직접 전쟁터를 만든 만큼 라라는 새블레에 남았다. 다만 성진이는 만일을 위해 내 방에 라라 전용 아공간을 고정해 두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