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64
나는 깨끗하게 씻고 라라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러는 동안 세계의 변화가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갔다.
##40. 삶과 죽음을 위하여
새블레에 현존하는 육체와 한국으로 떨어져 나간 반신이 서로 공명하는 한, 한국 사람들의 몸이 갑자기 약해질 일은 없다. 위험한 건 본래부터 몸이 약했던 데다 힘까지 많이 빼앗겨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고 대마법 장치를 빼앗으러 갈 것이다. 그때 새블레에는 필연적으로 최소한의 전력만 남는다. 의사가 줄어들고 가호가 없어지더라도 한국 사람들의 목숨에 큰 위험이 없도록 대비해야 한다.
의사들 모두 힘을 합쳐 쇠약해진 사람들의 목숨을 붙들 수 있을만한 약을 제조했다. 이후 한국 사람들의 몸은 특수한 가호 없이도 큰 위험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트라베리아가 준비한 대마법의 최종 형태는 예지몽을 통해 가늠해 본 바 우주 안에 필요한 힘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한꺼번에 발동시키는……느낌이었던 것 같다. 우주 전부를 사용하는 마법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대마법의 중심은 아마 예지몽 안에서 가장 선명했던 커다란 꽃봉오리일 것이다.
마법 장치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두 달 남짓.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은 3억 가량의 생존자들도 이후 트라베리아의 손에 죽을 것이다.
완전한 멸망까지의 유예 기간을 우리는 허투루 쓰지 않았다. 우선 우주를 탐색할 계획을 짜고, 다음으로는 최종 결전에 나설 전투원을 고민했다.
트라베리아의 최대 전력은 불확실 전력인 키메라를 제외하고 마녀만 셌을 때 16명.
트라베리아의 왕 엘리시아 루미드.
커븐 로드 벨라 트리저, 시카 리디언, 유클라프 데임, 포츈 베어, 카인, 베로니카 위즈덤.
왕과 커븐 로드의 측근인 리피트 오닉스, 라리마 유디프, 벨다 클로젠, 알토 마이라, 안나 브루테아, 델핀 로즈베르크, 제라드 겔브, 칼리엔테스, 센티아 하이리크.
한편 새블레의 최대 전력은 32명.
방위부의 루카 에밀라, 레이시 마테.
리브리의 하인리히 셀링턴, 앤서니 지니어스.
SR의 레일리 리카르트, 로일 리트너.
경찰의 윌리엄 엔버린, 캐시 로더릭.
사막의 수호자 시몬, 캐티아의 스테이 레기우스, 용병조합 울비스의 시온 빈즈.
무르시엘의 레녹 브란데, 하무라 뎀.
장군 시리즈 첸, 라스, 라이라, 반, 데미안, 슈카, 루니라, 하미아.
마지막으로 새벽별무리의 유은하(나), 이성진, 강인하, 최인성, 이소영, 아르델 페일린, 정예리, 김형일, 김미영, 테온 랄프. 일단 우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디나 심포니.
여기에서 최대 전력이라 함은 S랭크 상위 마법사를 뜻한다. 그러나 트라베리아와 전심전력으로 싸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기에 유펠르시아와 구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제외했다.
이렇게 보면 인외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연맹에는 S랭크 상위 마법사가 놀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머릿수보다는 마법사 개개인의 실력이 훨씬 중요하다. 16명과 32명이라고 해도, 4강의 진심을 발휘한 공격 몇 번이면 새블레의 최대 전력 반 이상이 죽어 버릴 것이다.
더하여 트라베리아는 장군 시리즈도 있으며, 엘리시아는 무수히 많은 시체를 다룬다. 그것까지 합하면 18명 정도의 차이는 별 것 아니다.
트라베리아의 전력을 상대로 최고 전력을 아낄 수는 없다. 적어도 나를 포함한 별무리는 전원 전장에 나설 것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우리가 마법 장치를 빼앗으러 나가는 사이 트라베리아가 새블레를 치러 오는 상황이다. 전장이 어떨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한국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디나는 새블레에 남을 예정이다. 유펠르시아와 구트라베리아도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를 데려가 봤자 마지막 순간에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즉 최소한의 방어 전력은 갖춰질 것이라는 이야기지만 말 그대로 최소한이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특수한 통신과 이동 기술을 지닌 라이라는 새블레에 남기는 편이 좋을까?
쉽게 결론 낼 수 있는 논제가 아니다. 마지막 전쟁을 모두 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고민할 수밖에.
한국의 공명이 언제까지 한국 사람들을 지키는 방어선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일까? 세계의 구조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변할까?
세계 수호 연맹에 가입하기 전 우리가 싸웠던 방식대로 누가 누구를 상대할지 정해 보았다.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전장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4강만은 겨루기에 걸맞은 자가 맞설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벨라는 내가, 엘리시아는 인하가, 유클라프는 인성이와 윌리엄이……. 사력을 다해 강해졌지만 여전히 우리가 4강을 이길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우리 외의 다른 마법사는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이길 전망조차 없으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선택은 존중받았다.
문제는 시카다. 시카를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는 극소수다. 지구의 인간인 한 그가 지닌 자연의 지배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나마 벗어날 수 있는 상대는 소영이, 성진이, 나, 세 사람 뿐.
‘사실……상성과 승률만 두고 보면 성진이가 벨라를, 내가 시카를 맡는 게 맞겠지만……. 하긴, 성진이는 상대가 누구라 한들 이길 테지.’
허나 어느 쪽이든 아슬아슬한 싸움이다. 성진이 역시 4강을 상대로는, 특히 벨라를 상대로는 100%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이 갈구하는 이를 상대하는 게 맞다.
마음은 모든 마법의 원천이니까. 정말로 죽이고 싶은 상대를 눈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모든 힘을 토해 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성진이가 쓰러뜨리고 싶은 상대는 포츈과 베로니카라고 했다.
레일리는 인하를 지원하고 싶어 했다. 아직 샐레나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않은 것도 있으니, 인하가 엘리시아와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체 인형을 견제하겠단다.
탐색, 훈련, 회의를 교대로 하며 필요한 것을 하나씩 채우고 있을 때 구 트라베리아 마법사 일동과 유펠르시아의 왕족, 초대 가주들, 앰버가 하나의 논제를 가지고 찾아왔다. 대표로 말을 꺼내는 아멜리아는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목소리는 침착하고 냉정했다.
“마지막 싸움에 앞서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미리 정해 두는 편이 여러분도 혼란을 피하기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트라베리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찾아온 이들의 구성을 본 순간 짐작할 수 있다.
“저희가 봉인된 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때문에 저희조차 옛 동료들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서서 싸우는 이들을 제외하고도 트라베리아 국지에는 200명 전후의 국민들이 있을 겁니다.”
200명은 한 나라의 국민치고는 너무 적은 숫자다. 트라베리아는 본래 마녀 사냥으로부터 도망친 마녀들이 만든 나라. 그들은 대부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명이 길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고, 소수가 노쇠하여 죽었고, 소수는 아이를 낳았다.
“그 국민들은 모두 사형입니까?”
냉정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나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어찌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서도 약한 술렁거림이 일었다.
“여왕 엘리시아, 커븐 로드, 측근……. 세계의 멸망에 직접 가담하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그들을 살려 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여러분이 손대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압니다.”
그렇다. 손대중했다가는 이쪽이 죽고 만다.
그리고 손대중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죽인 목숨이 대체 얼마지?
시대가 평화로울 때, 지구의 인구수는 약 100억 명이었다.
그 중 새블레에 모여 살아남은 목숨이 2억을 넘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약 7000만 명 남짓.
유클라프의 공간 안에 살아남은 인구수는 셀 수 없다. 외계 생물도 많다. 그러나 트라베리아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지구인이 새블레의 총 인구수를 넘긴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국민들이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때 엘리시아를 직접 찾아간 대표일 뿐, 저희 외에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역시 증오를 불태우는 사람에 비하면 소수지만요.”
“…….”
“그리고……직접 손을 쓰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트라베리아에는 나선 이보다 나서지 않은 이가 훨씬 많습니다. 직접적인 가담 없이, 마음만 찬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
“그들을 어떻게 처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멜리아의 떨림이 심해지자 교대로 셰린이 나섰다.
“직접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특히 지금의 일에 반대하는 입장이나 차마 의견을 꺼내지 못한 사람들에 한해서 선처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트라베리아에는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보다 노쇠한 마법사의 비율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100년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트라베리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을 것이라 예상되는 마법사는 제라드 겔브다. 사실 이 남자가 살아 있는지 지금껏 확실하지 않았지만, 에리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하니 살아있는 것은 틀림없나 보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트라베리아 출신의 최고 전력들은 대부분 400살을 넘겼다. 또한 초월자의 평균 수명은 500살 정도다.
“저희는 봉인당해 100년 정도 동결되어 있었으니, 그래도 200년 정도는 살 수 있을까요. ……사실 모르는 일이지요. 수명은 개인마다 차이가 크니까요.”
같은 초월자라 해도, 비슷한 강함을 지니고 있어도, 수명은 개개인에 따라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까지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래도 저희와 비슷한 연대의 마녀들보다는 오래 살 확률이 큽니다. 그러니…….”
“직접 가담하지 않은 트라베리아의 국민들을, 저희가 맡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아멜리아가 말을 받았다. 두려움을 삼키고 또 삼킨 눈동자를 빛내며 아멜리아는 똑바로 말을 이었다.
“바깥에서 직접 싸우지 않았더라도, 마법 장치의 제작 등에 자의로 가담한 자도 있겠죠? 저희는 지금 세대의 형벌이 어느 정도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디 전원을 사형시키는 것만은 선처해 주십시오. 사형을 피한 동료들이 마법을 잃고 감옥에 갇히든, 평생 감시를 받든……저희가 직접 감시하고 싶습니다. 그게 동료들을 막지 못한 저희의 마지막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였다.
인간을 죽이는 무자비한 학살자, 그것을 막고 싶어 했던 정의로우면서도 우유부단한 탈주자, 상태조차 알 수 없이 숨어 있는 200명 전후의 국민들.
증오, 그들을 죽일 이유, 그들의 죄.
증오하여 100억의 인간을 죽이는 것과, 같은 증오를 돌려주기 위하여, 혹은 전쟁을 멈추기 위하여 직접 가담하지 않은 200명의 마녀를 전부 죽이는 것은 그들과 똑같은 짓일까?
‘그래서, 트라베리아처럼 되기 싫어서, 나는 복수의 범위를 정했어. 내 목표는 벨라, 인하는 엘리시아, 소영이와 인성이는 트라베리아……. 그런데 그 범위는 커븐 로드와 측근까지 일까, 아니면 모든 국민일까.’
나라와 나라끼리의 전쟁에 있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대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의 사람들이다. 학살자들의 밑에 감춰진 싸우지 않는 국민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건……그 사람들을 직접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굳건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대답을 돌려 준 것은 레일리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일리의 표정에 잠시 미소가 어렸다.
“바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요. 다만, 저는 나름대로 많은 전쟁을 겪어 보았고, 이번 전쟁에서도 적이라 여겼던 자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였지요. 어떤 전쟁일지라도 그 밑에 있는 국민들을 죄다 학살하진 않습니다. 보통 수가 많고, 인력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지만…….”
레일리의 시선을 마주한 윌리엄과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저희의 역할은 죄의 무게를 재고 올바른 처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확인해 볼 필요성은 있겠지요.”
가담했든 하지 않았든 트라베리아의 국민들도 ‘트라베리아’다. 많은 국민들이 그들까지 원망한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온 것은 본래 트라베리아였으면서 현재 새블레에서 사람들을 지켜 주고 있는 아멜리아 일행이다.
우리는 본래 트라베리아가 많은 마녀를 비호한 정의로운 마법사 집단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트라베리아처럼 변하고 싶지 않다.
그걸 마음 깊이 새기고, 국민들의 정체를 확인한 이후에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싶다.
구 트라베리아와 유펠르시아 일동이 우리에게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회의 결과, 시카는 소영이와 루카가 함께 상대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는 루카 본인의 의견을 크게 반응한 것이었다.
“소영 씨가 만드는 자연의 죽음은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제 봉인마법과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루카의 봉인 역시 근본적으로는 멈추는 힘이다.
“무엇보다 저 역시 시카를 쓰러뜨리고 싶습니다.”
항상 냉정했던 루카의 눈동자가 드물게 격정을 품고 빛났다.
“그 남자에게……갚아 주고 싶습니다.”
빠르게 성장했지만 소영이는 아직 혼자 힘으로 시카를 이기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루카는 나이가 많은 만큼 성장이 정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라베리아를 향한 분노를 품고 참극 이후 꾸준히 성장해 왔다.
두 사람이 잘 맞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루카는 믿을 수 있는 마법사였다.
소영이의 의견을 더해 두 사람의 서포트로 테온이 붙기로 했다.
그에 따라 성진이는 포츈을 노리기로 했다. 포츈은 4강만큼 차원이 다르지는 않지만 연맹 내에서 포츈을 이길 수 있는 마법사는 손가락에 꼽혔다. 그래도 아마 성진이가 가장 빨리 적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강한 것과는 별개로 특수하게 다뤄야 할 마녀도 있다. 바로 모든 세계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세계의 서브 시스템, 베로니카 위즈덤이다.
…….
하인리히가 상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고심 끝에 하인리히는 새블레를 지키기 위해 남기로 했다. 그가 나라를 지키기에 아주 걸맞은 마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펠르시아와 구 트라베리아가 남겠지만, 만일의 경우가 정말로 발생했을 때는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했다.
베로니카는 예리와……공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윌리엄이 맡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인성이의 보조는 하미아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그런 식으로 상대를 얼추 정해 보았으나, 결국 완성된 세계를 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다. 애초에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다.
다만 벨라는 혼자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자리에서 혼자 내가 오기를 기다릴 것 같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로써 새블레에 남을 마법사는 정해졌다. 새블레에 남는 것은 유펠르시아, 구 트라베리아, 디나와 디나의 파트너 키메라, 리브리의 하인리히다.
라이라도 새블레에 남길까 고민했지만, 모두가 거울을 지니고 있다면야 라이라는 새블레 바깥에서도 연락책 역할을 할 수 있다. 새블레 안에서 하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다만 라이라는 싸우고 싶어 했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여러 가지가 정해졌고, 나는 틈틈이 글을 썼다.
‘이번 책에 내가 품은 살의를 전부 담는다.’
『책 속의 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책에 얼마나 마음을 담느냐다. 하지만 양은 질을 뒷받침해 주니, 못해도 500페이지 이상은 쓸 예정이다.
자, 어떻게 하면 책에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짙게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책속의 세계』는 원래 내가 전부 직접 쓰지는 않았다. 환각 영역을 구현하면 그 모습을 문이가 글자로 변환하여 한 권의 책으로 변환시키는 식이었다.
그렇게 나타난『책』은 영역을 보다 견고한 세계관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하나의 구별이자 시스템에 가까웠다. 단순히 나랑 문이에게 잘 맞는 형태라 책이란 외견을 취한 것에 불과했다.
마법 설정의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메모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강해지는 데도 급한 때 100장이고 1000장이고 태평하게 글을 쓸 시간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유용한 영역만 퇴고하여 설정을 추가할 뿐 만들어진 책들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마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벨라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는 새롭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벨라의 칼날을 막으려면 하나의 장벽으로는 안 된다. 수십 개의 마법을 겹친 후에야 겨우 닿는 모든 것을 베는 벨라의 칼날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내가 가진 기술 중 한 번에 수십 수 백 개의 기술을 담을 수 있는 마법은 『책』이었다. 단순히 환각세계를 문자로 변환한 책과, 세계에 관련된 기술과 설정을 직접 글로 쓴 책은 안에 담긴 꿈의 힘과 정확성, 위력의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 마음을 표현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야말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강대한 마법이다. 글을 손에서 놓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저번 전쟁에서 대치했을 때 이상으로 벨라를 깎아 내려면 내 살의를 모두 쏟아 부을 수 있을 정도로 책에 마음을 담아야 한다.
고민 끝에 나는 ‘새벽별무리’를 이루는 모든 일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엮기로 했다. 18살, 모든 것을 잃었던 봄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
시간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쓰되, 중간 중간 막간 챕터를 만들어 당시 만들어 냈던 기술을 새겨 넣었다.
새벽별무리의 리더, 유은하의 일대기를 쓰는 과정은 솔직히 아주 힘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것이고,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그때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떠올린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 죽은 방법, 적이 했던 말, 그때 느꼈던 감정…….
오로지 벨라를 죽이기 위한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한 날, 나는 한 문단을 짜낼 때마다 눈물을 터트렸다. 몇 시간에 걸쳐 겨우 겨우 1000자를 적었다.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단, 정말 조금씩 글을 이어 갔다.
겨우 글로 5페이지를 채웠을 때,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공간 결계에서 나와 휴식을 취했다. 내 작업실은 만일을 위해 의무실 옆에 만들어졌다. 예리와 성진이가 그렇게 권고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의무실의 문을 열었다.
“어라, 리더님~?”
“헉! 너 왜 그래? 얼굴이 엉망이야!”
훈련을 하다 다쳤는지 레비에게 치료받고 있던 소영이, 테온, 방위부의 루카와 레이시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책』을 쓰느라…….”
“책? 벨라를 상대하기 위한 책이니 고심이 많겠지만,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이 얼굴은?”
“정신력이 많이 소모됐네요~.”
“벨라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보통 방법으로 안 되니까…….”
나는 레비가 주는 회복 약을 고맙게 받았다.
“마지막 싸움이니까 더더욱 깊게 마음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가장 마음을 담아 쓸 수 있는 글은 이야기 형식이니까.”
아직도 가슴이 괴로웠다. 나는 위로받고픈 심정으로 소영이를 끌어안았다.
“수필을 쓰기로 했어. 『새벽의 이면』에 담긴 내 모든 감정과 마법을 글로 토해 내기로 했어.”
소영이가 슬픈 감정을 흘리며 내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보니까 울었구나.”
“응……. 감정을 전부 담으려면 조절하면 안 되니까…….”
“…….”
잠시 침묵하던 소영이가 물었다.
“오늘 글을 얼마나 더 쓸 거야?”
“계속 붙잡고 있으려고. 세계가 완성되기 전에 다 써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인 소영이가 통신 창을 열었다.
“레비, 한동안 인하를 여기 대기시키자.”
“인하 님을요?”
“응. 은하의 감정에 제일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인하거든.”
“인하도 바쁠 텐데….”
“그래도 지금 너한텐 인하가 필요해. 네 고통을 나눠 주고 교감해 줄 사람이.”
“……응.”
확실히 이래서야 글을 오래 붙잡고 있기 어렵다. 마법 없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성진이는 은하가 글을 쓴 직후엔 은하 옆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 줘. 걔는 지금의 은하랑 가장 공감할 수 없는 놈이니까.”
“네~? 성진 님을……음……좀 무섭지만, 알겠습니다~. 그래도 소영 님이 미리 말을 전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럴게.”
소영이는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훈련 중이라 받는 게 조금 느리네? 아, 받았다. 성진이한테 순번 교대하고 온대.”
곧 빛무리와 함께 인하가 나타났다. 인하는 여전히 공간이동이 서툴지만 에펠로나는 아니다.
“무슨 일이야? 은하야, 얼굴이 왜 이래?”
인하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걱정부터 했다. 어릴 적부터 익히 보아왔던 찬란한 얼굴에 나는 무심코 웃었다. 그러자 인하는 약간 안도했다.
“이번 책은 쓰는 데 감정 소모가 심한가봐. 그러니까 여기에서……아니다, 방에서 은하 이야기 좀 들어 줘. 한동안 네가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아. 우린 치료도 다 받았고 이만 갈게.”
“알았어.”
부하인 레이시와 함께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던 루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힘내시길.”
루카의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나를 한동안 응시했다. 은색에 푸른빛과 보랏빛이 도는, 햇살을 반사시키는 보석 같은 신기한 빛깔이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처럼 루카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지키기 위해 나서서 싸우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꾹꾹 눌러 참았다.
“감사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마음을 꾹꾹 눌러 담기 위해서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극심한 감정 소모는 체력 소모로 이어지는 데다, 『책속의 세계』를 만드는 것에는 상당한 마력과 정신력, 영혼이 소모된다. 그래서 감정에 짓눌리는 상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부터 나는 계획을 짰다.
작업실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들어가 있을지를 정하고, 쉬는 시간, 가벼운 운동 시간, 점심시간 등을 끼워 넣었다. 많이 먹었고, 작업실에 들어갈 때는 꼭 간식을 챙겼다.
성진이는 책을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메시지를 몇 번 보냈을 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내가 꾹꾹 누른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슬렀을 무렵에 나를 한 번 찾아왔다.
“케일한테서 간식 받아 왔어.”
“아, 고마워…….”
“요즘 얼굴을 안 보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네가 얼마나……담고 있는지도……다들 모를 수 없으니까…….”
“으음…….”
막 감정을 쏟아 붓고 온 참이었기에 피곤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괜찮아. 벨라를 쓰러뜨리면…….”
“…….”
나는 잠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여자를 쓰러뜨린다 해도 원하는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죽어간 자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나는 벨라를 죽일 것이다.
“벨라를……죽이기 위해서라면……내 감정쯤은 감당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대등하게 싸우기도 어려우니까.”
“…….”
“이제 누군가가 죽는 건 싫어. 모든 게 바뀌어 버린 이 세계에서…….”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며 재구성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별이 몰려오고, 그 위에 죽음의 힘이 겹쳐진다. 생과 사가 합쳐진 생명과 영혼의 세계. 죽은 자를 되살리기 위한 명계.
“덧칠되어 버린 추억이나마 되돌려 받아야지.”
성진이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무심코 성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감정을 토해내는 건 좀 힘들지만 글을 쓰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 뭐랄까, 익숙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는데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홀린 것처럼 빠르게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가 있다. 울면서도 습관적으로 내가 쓰는 이야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아주……익숙한 감각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하지. 초등학생 때부터 글을 썼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괴로운 감정과는 별개로 손과 가슴 한편이 즐거워한다. 나는 무릎 위에 내린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성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반쯤 끌어안았다.
“네가 쓴 소설은 최근에도 가끔 봐.”
“어……그건 조금 부끄럽네.”
“나만 보는 건 아니지만.”
“아……그러게 말이야.”
“은하 넌 소설을 쓴 계기가 뭐였어?”
나는 피식 웃었다.
“학교 숙제로 짧게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칭찬을 받았어.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 좋더라고.”
“다들 비슷한가봐. 모두 그런 건 아닌데, 칭찬을 계기로 시작하는 사람이 많더라고.”
맞다. 글이든, 그림이든, 공예든, 어떤 마법이든, 설령 당시에 만들 때는 재미가 없었다고 해도,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칭찬을 재능이라 믿고 시작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실제로 은하 넌 재능이 있어. 초등학생 때 연재한 데뷔작으로 남녀노소를 푹 빠뜨렸잖아. 특히 나를.”
그때 성진이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로카도 그렇고. 저번에 이야기를 나눴는데.”
리브리는 ‘도서관’이라는 특성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은 연구서에서 만화까지 아주 다양한 책을 즐겨 읽는다. 로카는 그중에서도 소설이나 만화 등 이야기책 종류를 즐겨 읽는 편인데, 우연히 도서관에 넘어 온 내 소설을 읽고 전권 구매한 뒤 블로그를 구독하여 장인 사이트에 찾아왔을 정도로 나의 팬이다.
내가 ‘초아’인 걸 안 이후로 로카는 만날 때마다 내게 반짝이는 눈을 보낸다. 부담스럽게 무언가를 밀어붙인 적은 없지만 짧게 감상을 말하거나 사인을 두어 번 요구했다.
참고로 로카가 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내가 소설 집필을 접었을 무렵이라고 한다. 그리고 로카 때문에 리브리의 대원중에는 내가 초아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부터 내 소설을 접한 사람이 많았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그쪽이야. 내가 네 책을 좋아하는 걸 알고 말을 걸어왔어. 네 소설을 정말 좋아하더라고. 네가 낸 책이랑 스토리 북은 전부 두 권 이상씩 가지고 있대. 원래 10권씩 샀고, 남는 책은 친구들한테 나눠 줬다나봐. 좋아하는 장르가 비슷해서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통했어.”
“좋은 일이네. 너랑 평범하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걱정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성진이가 장난스럽게 내 뺨을 꼬집었다. 다정하게 웃는 표정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뻗어 성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원해 주러 온 거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