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68
친구의 연애 사정에 너무 끼어드는 감도 있고, 한수가 부끄러워하기도 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네 고백을 받았을 때는 그런 의미로 좋아하진 않았대. 하지만…….”
‘그렇지만, 답지 않게 필사적으로 눈을 반짝이며 고백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는 틀림없이 너를 좋아하게 되겠구나. 네가 고백해 오지 않아도 나는 분명 너를 좋아하게 되었겠구나.’ 그렇게 직감했대.”
“…….”
인하의 호흡이 한순간 멈췄다. 인하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온 마음으로 선명히 느끼며, 나는 과거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끝까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예상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그렇게 말했어, 한수가.”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을 한 상대는 죽었으며, 이후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인하에게만은 꼭 전해 두고 싶었다.
“……치사해.”
나는 인하의 손을 잡은 채로 인하의 앞에 섰다. 고개 숙인 인하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치사해, 치사해, 치사하다고!”
“…미안해.”
“아니, 네가 아니라, 한수가, 너무 치사해…! 이제 와서, 그런 말, 들으면……. 그런 말은, 직접……직접해 주지. 말할 시간은 많았는데.”
“한수는 부끄럼쟁이니까.”
“물어볼 시간도 많았었는데…….”
인하가 신음을 삼키며 나를 끌어안았다. 울음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나는 주위에 결계를 쳤다. 그러자마자 인하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인하를 꽉 끌어안은 채 한동안 인하의 감정을 받아 주었다.
인하와 헤어지고 방에 들어선 나는 아공간에서 언젠가 사 두고 남았던 편지지 세트를 꺼냈다.
유서를 쓰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는 유서를 쓰지 않았다. 벨라를 죽이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곧 그 벨라를 죽이러 간다.
……죽고 싶지 않다. 두고 가고 싶지 않다.
나마저 인하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나와 성진이 사이에 연결된 걸린 피의 맹약도 풀지 못했다.
하지만 벨라를 죽이지 못하고 힘이 다할 바에는 목숨을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벨라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각오, 목숨, 힘은 한계가 있다. 거기다 내가 죽이지 못한다면 벨라의 손에 또다시 아주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대상에는 분명 동료들도 포함된다.
그렇게 될 바에는 목숨을 바쳐 빼앗겠다. 죽은 자의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악령이 되어 엘리시아의 명계를 빼앗아서라도.
나는 아무런 불안도 남기지 않고 모든 마음을 벨라를 죽이는 데 쓸 것이다. 이 유서는 그러기 위한 유서다.
가장 남기고 싶은 말, 가장 남기고 싶은 감정.
『세상을 끝내러 가기 전,
사라져 버리고 말 나의 인간성을 담아.』
하지만……어쩌면 이건 유서라기보다는 변해 버릴 나를 위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나는 곧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다.
트라베리아와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지켜 왔던 나의 가장 소중한 인간성을 버린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미친 나에게 살인은 가장 깊고 무거운 죄이다. 그 죄를, 그 피를 동료들만 손에 묻히게 할 수 없다.
벨라를 죽인 후에는 더 많은 적을 죽일 것이다. 트라베리아의 주력은 남김없이 죽일 것이며, 아무도 죽이지 않은 자는……재판할 것이다.
죽이는 걸 망설이기에 우리가 쓰러뜨려야 할 적은 너무도 악독하고 강하다. 그러나 상상과 실제가 어떻게 같으랴.
부디 모두가 죽지 않기를.
부디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내가 ‘유은하’이기를.
부디, 부디,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서도 우리가 우리답게 있을 수 있기를.
부디…….
모두의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었다고 증명할 수 있기를.
‘모든 게 끝나면, 우리가 우리답게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분명 기나긴 시간을 되돌아보기 싫어질 거야. 그렇더라도…….’
나는 수많은 감정을 가슴속에 새기며 눈을 감았다 떴다. 편지지에 적힌 한 문장에서 나의 감정이 호수 위에 비치는 은하수처럼 아련하게 반짝였다.
“미야옹.”
감정에 푹 잠겨 있던 나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했다. 숨숨집에서 자고 있던 라라가 깨어나 내게 다가왔다. 나는 몸을 숙여 라라를 쓰다듬었다.
“배고파?”
“아우웅.”
“그래, 잠깐만 기다려.”
나는 라라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 넣었다. 라라가 울며 그릇에 얼굴을 박고 사료를 먹는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라라는 사료를 씹으며 울었다.
“먕냥냥.”
“착하다, 라라. 우리 귀여운 동생…….”
“미양.”
“착하다, 착해…….”
라라의 등을 몇 번 쓰다듬다 손을 내렸다. 나의 마음을 담고 빛나는 편지를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레일리의 말에서 시작된 교류회는 생각보다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졌다. 연맹의 대표를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임을 열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별무리와 대현 사이에서도 교류회가 열렸다. 나도 시간이 날 때 두어 번 참가했다. 한 번 이야기를 하고 나니 좀 더 많은 사람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흥미롭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백한 선생님이 스승님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쟁 지역에 있던 스승님과 준휘 선생님을 백한 선생님이 구해 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옆에서 지켜 주고, 피난소로 보내 주고, 대현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스승님과 백한 선생님의 사이가 틀어진 건 스승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이 사귀는 걸 알고 백한 선생님이 한 말에 스승님이 실망하면서다. 이 이야기는 한재일이 해 준 것과 비슷했다.
이어 한재일과 민 선생님, 준휘 선생님 간의 이야기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한재일에 대한 호감도가 좀 더 떨어졌다.
민 선생님과 한재일은 생각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병기로써 살았다.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라 평화와 법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해 사고를 많이 쳤단다. 그래도 민 선생님은 준휘 선생님과 스승님 덕분에 사람들과의 공존에 익숙해졌고, 한재일은 끝끝내 대현에 녹아들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과 멀어지고, 새로운 인연을 만든 후에야 한재일은 자신의 잘못을 실감했다.
그렇다곤 하나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가 준휘 선생님에게 한 폭력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우리가 모습을 숨기고 있던 사이 대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전해 들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아는 건 대현에서도 아주 일부뿐이었다. 적어도 김유라 선배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몰랐다.
성후 오빠의 이야기도……들었다. 죽고 싶어 하는 불나방처럼 날뛰었고, 자주 불안 증세를 보였지만, 나와 인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은 인간다운 감정을 되찾았다고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최근 겨우 좀 살아 있는 사람다워진 것도 우리 덕분이라고 한다.
아직 과거를 이야기하기엔 불안정한 성후 오빠를 대신하여 서준 오빠가 내게 제현 오빠, 성후 오빠, 은희 언니의 삼각관계 사이에 있던 사건들을 몇 개 말해 주었다.
이어서는 제현 오빠, 서준 오빠, 천호 오빠 3인방의 이야기도 많이 알려 주었다. 덕분에 제현 오빠가 생각보다 더 장난스럽고 사고뭉치였다는 걸 알게 됐다.
유란의 장유하는 인성이, 성진이, 소영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몇 개 들려주었다. 소영이가 사실 납치를 여러 번 당했다던가, 성진이가 그걸 구해준 걸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졌다던가, 인성이와 소영이가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는 자주 싸웠다던가…….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뿐이었다.
“대현 때의 이야기라고 하니…….”
오랜만에 같이 일하게 된 준영이가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 그, 그러니까, 멘토링 때! 제가 좀 퉁명스러웠죠? 죄송해요! 그땐 너무 긴장해서…!”
“응?”
나는 준영이와 처음 만났을 때를 되짚어보며 의문을 느꼈다. 퉁명……스러웠던가?
“제가요,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너무 긴장해서…! 친구들한테도 한소리 들었어요! 계속 후회했는데요, 그런데, 사과할 용기가 없어서…!”
“음……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퉁명……스러웠나?”
처음 만났을 때의 준영이는 평범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우리를 보고 감탄했고, 어린 마음으로 인하를 좋아했다.
“아, 그……몰랐다면 다행인데……. 원래 제 성격 치고는……퉁명스럽게 대한 편이었어요……. 그때, 선배들이 저희 멘토라는 걸 알고, 정말 너무 긴장했거든요.”
“아. 너 그땐 인하를 좋아했었으니까.”
“그…! 으윽, 그렇긴 했는데요. 눈치 챘었구나. 참, 선배도, 부끄러운 이야길 꺼내시네요.”
“아, 그러네. 미안.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너무 함부로 이야기 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건 또 없고요…….”
준영이가 양 손으로 붉어진 뺨을 감싸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깊은 감정은 아니었고요, 너무 예쁘고 멋있어서 무심코 동경했던 거였어요. 맞아요, 동경에 가까웠어요.”
“그랬구나.”
“하하. 사실 그때 저, 은하 선배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끝까지 말 못했지 뭐예요. 은하 선배가 죽은 줄 알았을 때, 그 말을 하지 못한 걸 엄청 후회했었는데……. 그러니까 이번엔 꼭 말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 뭔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준영이가 후다닥 몸을 움직여 내 앞에 마주보고 섰다.
“은하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있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뭐?”
“병문안 선물로 편지를 보내긴 했는데, 많은 사람이 보내서, 제 편지랑 선물 같은 건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꼭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
준영이가 쑥스러움을 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선배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있었던 ‘테러 사건’ 기억나세요? 아, 하긴, 기억하시겠죠. 주범인 렉스가 선배 부하로 있었잖아요.”
“응. 기억나.”
“저 그때……그 사람들한테 붙잡혔었어요.”
“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구속당하고 얻어맞으면서 이제 큰일 나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몸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거예요. 그랬더니 다들 이제 괜찮다고,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는 거예요. 헐떡이는 은하 선배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우릴 구해 줬다고…….”
……그래. 준영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현 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멘토링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 준영이는 어쩐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가끔 우리를 봤던 것 같다.
“그때부터 저는 은하 선배를 세상에서 제일 동경했어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만나보니까 정말 평범해 보여서 놀랐는데, 들은 대로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손을 뻗어 세상에서 나를 제일 동경한다는 후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끄러움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로 준영이는 말을 이었다.
“저랑은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달라서, 가끔……진짜 가끔 화가 나기도 했지만……그건 정말로 생각이 달라서니까요. 그것과는 별개로 선배를 항상 믿고 있어요. 선배는 언제나 제가, 저희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으니까. 아주 많이……우리를 구해 줬으니까. 이제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없어졌지만……그 사람들도 다들 선배를 믿고 있어요. 저도 믿어요.”
준영이의 눈동자에 울분 어린 물기가 서렸다.
“저는 옛날부터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한텐 솔직하게 말을 못했어요. 그래도 이번엔 솔직하게 잘 말한 것 같아요. 그렇죠? 선배.”
“응. 잘 말했어.”
“이번에도 믿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기다릴 테니까……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트라베리아의 영토도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 꼭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려 주세요.”
“그래.”
나는 한 번 더 준영이의 머리에서 손을 움직이고는 손을 내렸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왔어.”
“네……알아요. 믿어요.”
“걱정 마. 반드시 쓰러뜨릴 거야.”
“네…….”
준영이는 고개를 숙이고 몇 방울 눈물을 떨궜다. 그러나 곧 아직 울 때가 아니라는 것처럼 눈물을 닦고 굳건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후배를 향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하고 약간. 이 시간은 세계가 변하기에도, 마음을 정리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을 유의미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변해 가는 세계가 언제 완성될지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예상하지 못한다.
다만 세계의 마지막 변화가 시작된 이후 두 달 하고도 하루가 지났을 때, 오랜만에 예지몽을 꿨다.
예지몽의 첫 부분은 이전에 꿨던 예지몽과 같았다. 그래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날 일이기 때문인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졌다.
무시무시한 힘을 발하고 있는 지구의 파편, 느낄 수 있는 모든 차원이 ‘명계’를 중심으로 겹치듯이 융합되어 있다. 완전히 합쳐져 녹아든 게 아니라 여러 차원의 경계선이 서로에게 겹쳐져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융합된 지구의 파편과 행성 하나마다 각기 다른 차원의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당연히 생명과 시간, 유클라프는 공간과 꿈, 그밖에도 영혼, 자연(현실), 다양한 속성과 생명과 죽음……,
지구만이 아니다. 힘을 가진 대륙 혹은 행성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 모두가 특별한 힘 하나씩을 지녔다.
그 앞에 나타난 벨라가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말한다.
직후 갑자기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두 번째 장면이지만, 본능적으로 첫 번째 꿈보다 앞선 시간대에서 일어날 일임을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은 편지이며 결계였다.
엘리시아와 시카가 보낸 초대장이다.
편지가 열리고 마법석을 중심으로 일그러진 선이 그물처럼 펼쳐지는 것까지 본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허공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돌렸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라라가 내 턱과 어깨 사이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자고 있었다.
나는 라라를 두어 번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한 듯 눈을 꿈뻑이던 라라가 자세를 달리하고 다시 잠에 든다.
“…….”
예지몽의 느낌을 토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세 개가 접혔다.
“그래서 꿈에서 벨라를 마주보고 있었던 거구나. 그래서 세계가 열리는 모습이 그렇게 가까이서……보인 거고.”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마법으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동료들을 깨워 정보를 전달할까 했으나,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본부에 가서 깨어 있는 연맹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후 전할만한 이들에게 한 번에 정보를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전투복에 장비까지 전부 챙기고 새블레의 본부 엘디나에 향했다.
“은하?”
교류회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반말을 썼기 때문인지, 요즘 루카는 공적인 일로 마주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 이름을 그냥 부르는 일이 많다. 공대는 습관이라며 계속 쓰고 있다. 나도 나보다 몇 백 살은 많은 연장자에게 반말을 쓰긴 어려워 존대를 하고 있고.
루카, 방위부 부서장 빈센트, 방위부의 공격대장 레이시, 구 트라베리아 아멜리아, 경찰의 총 집행관 윌리엄, SR의 알리사, 캘리의 에이온. 오늘은 드물게도 방위부가 결계를 보강하는 날이었나 보다.
“알릴 게 있어서 왔어요.”
“새벽녘에 무슨 일이십니까?”
“심지어 무장까지 하고서.”
레이시가 나를 아래위로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실감이 나자 가슴이 차가워지며 온몸이 긴장되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그들의 의문에 대답했다.
“곧 트라베리아로부터 초대장이 올 거예요.”
“…초대장?”
“네. 대마법 장치의 완성을 알리는 초대장이에요.”
모두가 곧장 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나는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당장 오늘 완성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초대장에는 대마법이 언제 완성되고, 언제 세계가 진정되는지……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초대장에는 시카와 엘리시아의 마법석이 첨부되어 있어, 우리가 편지를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베리아의 결계가 새블레의 결계 주위를 둘러쌀 예정이에요.”
“예지몽입니까?”
“네. 초대장이 오기까지 약 3시간 정도 남았어요.”
“결계가 펼쳐지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겁니까?”
윌리엄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예지몽에서 본 모든 것을 솔직히 말했다. 그것은 즉 예지몽이 그대로 이루어져도 상관없다는 의미다.
“막으면 오히려 곤란해질 거예요. 세계의 규칙에 우리나라를 짜 넣기 위한 결계인데, 그게 없으면 세계에게 위협을 당하게 돼요. 그에 관련된 내용도 편지에 적혀 있었던 것……같아요.”
“3시간…….”
아멜리아의 눈빛이 흐려졌다. 루카가 내게 의문점을 확인했다.
“초대장은 어디로 옵니까?”
“결계 앞에서 초대장의 마법석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낼 거예요. 아, 도착하는 위치도 알고 있어요.”
“위험성은 없는 거지요?”
“네. 그래서 모두 다 함께 몰려가 맞이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초대장을 가지러 가는 건 소수면 충분할 거예요.”
“본 적 없는 결계가 주위를 둘러싸면 혼란이 일어날 테니, 그 전에 국민들에게 설명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일반 국민들은 내 예지몽에 대해서 모르니 사후 설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혼자 오셨는데 혹시 예지몽을 꾸자마자 바로 여기에 오신 겁니까?”
“중요한 일이지만 급하게 경보를 울릴 정도의 일은 아니니까요. 동료를 깨우고, 여러 번 설명하고 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테니, 여기에서 레미를 통해 한꺼번에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을 모으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도 그렇군요.”
“휴식하는 분들을 깨우는 건 본의가 아니지만요…….”
“어쩔 수 없지요.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예지몽을 꾸자마자 자기한테 바로 알리지 않았다고 친구들이 좀 섭섭해 하려나? 으음……공적인 일이니 이해해 주겠지.
레미가 곧바로 전쟁에 참가하는 선두자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소리 없는 연락이었지만, 예민한 초월자들은 마법이 펼쳐지는 기척과 레미에게서 흘러나온 빛만으로 바로 눈을 떴다.
마법사들은 연락을 보자마자 바로 엘디나에 달려왔다. 물론 동료들도 달려왔다.
“두 달이 지났으니 슬슬 때가 되긴 됐지.”
“그런데 설마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이곳의 마법사 전부가 초대장을 받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아무래도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지라, 제비뽑기로 나와 동행할 두 사람을 뽑기로 했다. 나는 맨 처음 초대장을 눈치챈 정보원의 자격으로 초대장을 살펴볼 권리를 가장 먼저 얻었다.
“날짜까진 확인하지 못한 거야?”
인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꿈이었기에 눈에 들어온 글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제비뽑기는 레미가 실행했다. 결과 나와 함께 초대장을 받을 마법사는 아멜리아와 윌리엄으로 정해졌다. 우연히도 가장 처음 내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이었다.
윌리엄은 호전적인 표정이었고, 아멜리아는……안심과 불안, 긴장 등이 섞인 얼굴로 바짝 굳었다.
내가 말한 3시간은 예상일 따름이다. 그러니 30분 정도의 오차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동안 모두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곧 윌리엄, 아멜리아와 함께 초대장이 도착할 하늘이 잘 보이는 바다에 이동하기로 했다.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갔다 와.”
성진이와 인하가 내 손을 한 번씩 쥐었다 놓았다. 소영이와 인성이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초대장을 받으면 바로 돌아올 테니, 모두 잠시 기다려 주세요.”
바다에 도착하고 한동안은 초대장의 기척을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3시간이 되기 10분 전, 결계 가까이에서 엘리시아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럼 가 보죠.”
“네.”
결계를 넘어 우주에 섰다. 그런 우리의 앞으로 정확히 초대장이 떨어져 내렸다.
하얀색 봉투에 검은 밀랍과 보라색 장미 펜던트로 밀봉되어 있고, 시카가 만든 팬지꽃 모양 마법석이 몇 개 장식되어 있다. 편지에 손을 가져가자마자 장식을 중심으로 그물을 닮은 마력이 편지 주위를 날개처럼 둘러쌌다.
“시카의 정령 결계…….”
아멜리아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를 밀봉한 장미 마법석을 건드리니, 봉투가 열리고 안에 들어 있던 초대장이 펼쳐졌다.
『이 세계의 마지막 순간에 새블레의 마법사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목숨을 밝혀 세계를 빛내 주세요.
세계를 개방하는 날은 편지가 도착하고 167:58:17 시간 후.
파티의 규칙은 세계가 개방되었을 때 벨라 트리저가 나타나 알려드립니다.
또한 안내가 끝나고 파티를 시작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초대장에 첨부된 마법석은 여러분의 대륙을 세계의 규칙에 짜 넣기 위한 결계입니다.
결계가 없을시 세계의 불리한 법칙이 새블레에 적용되니, 파티에 순조롭게 입장하기 위해 거부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결계는 편지 봉투가 열리고 5분 후에 펼쳐집니다.
그럼 다시 만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정중한 말투를 사용한 편지였다. 더불어 용건만 적은 초대장이었다.
새겨진 예정일은 날짜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하긴, 이렇게 된 우주에 날짜 따위는 소용없다. 새블레는 새블레만의 날짜를 새겨가고 있지만, 트라베리아도 트라베리아만의 날짜를 새겼을 것이다.
제한 시간은 초 단위로 줄어들었다.
“적은 건 시카인 모양이네. 익숙한 글씨야…….”
“쓸데없이 정중해서 기분 나쁘군요.”
“팬지꽃…….”
“봉투의 장식에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팬지꽃이 보여서요. 하하…….”
‘추억’을 상징하는 감정이 아멜리아의 가슴을 휘감았다.
“……있잖아요, 이 싸움이 끝나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열린 초대장을 다시 접었다. 그러자 마법석과 술식이 편지봉투에서 떨어져 허공에서 빛을 뿜었다.
“이 참혹한 작전에 참여하지 않은……교회와 싸웠던, 지금은 없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예를 들어 제 언니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