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78
허공을 향해 뻗어진 엘리시아의 손 위에 금홍색 알갱이가 무리를 지었다.
“……!”
강인하는 반사적으로 빛을 쏘았다.
저 현상을 본 적이 있다.
남극에서 엘리시아와 싸웠을 때, 엘리시아는 저런 식으로 키메라 듀크의 ‘죽음’을 만들고는 부쉈다. 무수히 많은 장미가 죽음을 거둬 간 장면은 자주 악몽에 나온다. 그 기억에 압도된 탓에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엘리시아가 모은 것은 아르델의 힘이었다. 국면은 최종전, 어쩌면 트라베리아는 유펠르시아 국민의 목숨까지 거둬 갈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옥좌로 이어진 계단에서 솟아난 보라색 가시덩굴이 강인하의 빛을 막아 냈다. 엘리시아는 빛이 들러붙은 가시덩굴을 치우며 인상을 썼다.
“내가 유펠라의 손녀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
“그럼 아니라고? 지금 만들려고 했던 거 아르델의 죽음 아냐?”
아르델이 손목에 그려진 ‘생명의 팔찌’를 감싸며 몸을 떨었다.
“뭐? 소름끼쳐!”
“너희는 죽음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구나.”
엘리시아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델 페일린이 여기에 올 거라는 생각은……하기는 했다만 아닐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실력만 보면 내 앞에 내보내긴 약하잖아.”
아르델이 이를 으득 갈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 더 열받았다. 그렇다기보다 엘리시아가 너무 강한 것이었지만.
“아마 내가 소환할 시체를 견제하는 역할로 온 것이겠지. 이곳은 명계, 주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만연해 있어. 명계의 가장 두려운 제약을 제외하더라도 이곳은 살아있는 자에게는 좋지 않은 곳이야. 하물며 상대는 강인하 너이니 손대중을 할 수 없을 때도 있겠지.”
엘리시아의 손에서 빛무리가 형태를 만들려다가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역시 페일린의 피. 죽음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네.”
엘리시아는 한 번에 완벽한 죽음을 구축하는 걸 포기하고 아르델의 마력 파편으로 금홍색 장미꽃을 만들어 둥근 유리공 안에 집어넣었다.
“……!”
강인하는 또 한 번 다급히 빛을 쏘았다. 엘리시아가 한 생명의 죽음을 만드는 방법은 직접 본 바에 의하면 두 가지. 손으로 직접 쥐어 보석으로 다듬거나 장미꽃으로 피워 내거나. 저 꽃봉오리는 머지않아 아르델의 죽음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글쎄 안 죽인다니까?”
엘리시아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채찍을 소환해 빛을 튕겨내고는 강인하에게 장미 덩굴을 보냈다.
“그래, 나는 살아있는 목숨에게 죽음을 부여해. 그런데 말이야, 만들어 낸 죽음을 절대 부술 수 없는 안전한 곳에 꽁꽁 봉인하면 어떻게 될까?”
“죽음의 주인도……봉인되나?”
고심 어린 대답에 엘리시아가 처음으로 강인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죽음의 주인도 봉인돼. 요컨대 뭐든지 다루기 나름이야. 내가 형상화한 죽음은 부서지기 전까지는 주인의 생명과 일맥상통하는 삶의 상징과 다름없어. 부여한 죽음이 깨지지 않으면 그 자는 결코 죽지 않아. 심장이 깨져도 근원이 부서져도 머리를 찔려도 목숨을 잃지 않아. 이전의 싸움에서 충분히 보지 않았니?”
남극에서의 전투 때, 엘리시아의 장미꽃에 휘감겨 죽음을 피워내는 도중이었던 이들은 몸이 몇 군데나 부서졌음에도 멀쩡히 숨을 잇고 있었다. 그러다 장미꽃이 활짝 죽음을 피워낸 순간 한꺼번에 스러졌다.
아르델은 소름이 돋는 기분에 팔을 쓸었다.
“너는 유펠라의 자손이잖니. 내 나름대로 지켜 주려는 거란다.”
“웃기지마! 난……「봉인되기 싫어!」”
아르델이 두려움을 삼키며 온몸으로 불꽃을 방출시켰다. 그러자 엘리시아가 수호병에 가둔 금홍색 장미에도 불꽃이 붙었고, 봉오리를 이루던 장미꽃잎 몇 개가 투명해지며 사라졌다.
엘리시아가 옥좌 옆에 있던 역십자가 지팡이를 쥐었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는 보라색과 은색 장미꽃에 휘감겨 있어 무척 아름다웠지만, 차갑고 섬뜩했다.
“그렇다고 하네.”
강인하와 융합한 에펠로나가 강인하의 등에 날개를 펼쳤고, 강인하는 태양의 팔찌를 검으로 바꾸었다. 태양의 검이 강인하의 의지에 맞춰 길어졌다.
“나도 내 소중한 친구를 네 손에 넘겨줄 생각은 없어.”
“소중한 친구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인데?”
“아르델은 오늘 싸우기 위해 여기 왔어. 친구이기 이전에 내 파트너이고 전사야.”
아르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금홍색 불꽃이 작은 새의 형태를 취하며 증식했다. 금색 빛과 금홍색 불꽃이 동시에 영역을 넓히니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강인하의 마법이고 아르델의 마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두 사람의 마력은 속성부터 색까지 많이 닮았다.
“너를 죽이기엔 약해도 나를 서포트할 만큼은 강해. 거기다 오늘 널 상대하는 건, 오늘, 너를 죽이는 건──나야.”
강인하는 꾹꾹 눌러 묻어두었던 증오심을 가슴에 풀었다.
별무리를 만난 모든 마법사가 말한 대로 그들은 어렸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스스로가 발 디딜 세상을 한 번 잃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소중한 모든 이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들의 죽음을 비웃은 벨라.
그런 벨라가 믿고 따르는 왕 엘리시아.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죽고, 또 죽고, 파괴되고.
얼마나 많이 잃었던가. 얼마나 많이 목숨을 걸었던가.
이성을 무기로 내세우고 가슴속의 칼을 갈고 또 갈아 강인하는 겨우 이 자리에 도달했다.
“무수히 많은 죽음으로 더러워진 네 목숨은 내가 심판한다.”
엘리시아는 옥좌를 등진 채 제 키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지팡이를 끌어안았다.
“그래, 전보다 더 강해졌구나. 지니고 있는 무기를 열심히 갈고 닦았어. 그렇다면 나도 전력을 다하마. 다만, 알지?”
엘리시아가 아르델에게 눈짓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봉인할 거야. 나의 죽음에 너무 파고들지 않게 조심하렴.”
아르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아무 대책도 없이 여기에 왔을까봐?”
엘리시아가 계단을 한 걸음 내려왔다. 그러자 고딕 드레스를 입은 거대한 시체 인형이 엘리시아 대신 옥좌에 앉았다.
엘리시아의 주위로 장미 덩굴과 사령의 불꽃이 흘러넘쳤다. 곳곳에 피어난 장미꽃잎들이 죽음의 힘을 받아 더 섬뜩한 불꽃을 뿜었다.
강인하는 엘리시아에게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엘리시아를 대신해 명계의 힘을 증폭하는 듯한 옥좌를 잠깐 돌아보았다.
“날 대신하고 있는 거야. 내 그림자 무사거든, 저 아이.”
“……오늘따라 설명을 많이 해 주네. 전에 봤을 땐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 같았는데.”
“맞아. 귀찮아. 하지만 네 옆에 유펠라의 자손이 있잖니.”
항상 차가운 표정만 짓던 엘리시아의 창백한 얼굴에 드물게도 생기가 돌았다. 거대한 사령의 불꽃이 엘리시아의 몸을 둘러쌌다. 불꽃은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과는 다른……어딘지 악마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유펠라를 꼭 닮았다 보니 그만 말이 많아지지 뭐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누구든 친절해지고 싶어지는 법이지.”
아르델이 표정으로 짜증을 드러냈다.
──강인하와 엘리시아가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빛을 쏟아 내는 검과 사령의 불꽃을 쏟아 내는 지팡이.
인간의 심장과 신의 무기가 합쳐져 생겨난 심판의 빛과 영혼을 죽음으로 이끄는 사령의 힘이 뒤섞였다.
콰과과과과과─!!!
심판은 자신만의 형상을 드러내며 엘리시아의 사령을 살라먹었다.
‘태양의 심판’이란 이름과 달리 심판의 기본 형상은 눈꽃 결정 모양이었다.
“「손에 쥔 힘은 과거의 절망에서 비롯되었다.」”
강인하의 ‘심판하는 힘’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심판의 근원은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 강인하가 가장 구하고 싶은 영혼은 마법마저 이용당하고 있는 김선아와 주제현이었다.
“「결코 꺼지지 않는 원념만큼 태양은 죽음을 살라먹는다.」”
그렇기에 같은 태양이라도 심판을 상징하는 다른 형태가 있었으면 했다. 거기다 엘리시아의 마법 안에선 태양의 모습을 한 번에 온전하게 완성시키기 어려웠다.
소속마법의 기본 형태는 실이다. 검을 그어 쉽게 만들 수 있는 선. 선으로 만들 수 있는 도형이며 강인하의 감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기에 강인하는 김선아가 자주 쓰던 눈꽃을 심판의 첫 번째 형태로 삼았다.
강인하는 눈꽃 결정의 중심부터 끄트머리까지 빛을 채워 태양을 만들었다. 채워지지 않은 선에서 고리가 만들어지고, 마법을 연결하는 고리를 따라 눈꽃 결정과 태양의 조각이 이어진다. 사령의 불꽃이 순식간에 빛에 잡아먹혔다.
“아름답네.”
엘리시아가 쥐고 있던 지팡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엘리시아를 감싸 안고 있는 사령체 역시 엘리시아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자라나라.”
태양빛에 타오르던 장미 덩굴이 줄기를 뻗고 새로운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강인하의 태양을 영양분 삼아 순식간에 활짝 피어난 장미꽃들이 금색 조각을 떨어뜨리고 시들었다.
금색 조각에서 새로운 장미가 자라났다. 태양의 죽음에서 비롯된 장미가 조금 전보다 훨씬 느릿한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자라났다.
그 순간 강인하는 자신의 몸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선이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유은하나 이성진처럼 뛰어난 감지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라 상세히 해석할 수는 없지만, 엘리시아의 마법을 어느 정도 경험한 만큼 몇 가지는 알겠다. 강인하의 마법이 많이 죽을수록 금색 장미 무리는 강해질 것이며, 그럴수록 강인하의 죽음은 명확해질 것이다.
‘태양의 시체……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쩐지 소속마법으로 연결이 가능할……하네? 본래는 내 일부였기 때문인가?’
강인하는 엘리시아에게 태양의 조각을 날리며 눈꽃과 태양을 그려냈다. 태양의 시체가 강인하에게 공명하여 그녀의 생명을 억누르려 했으나, 강인하는 공명을 역이용하여 시체에 생명의 불씨를 부여했다.
그러나 금색 장미꽃 중 다시 태양이 되어 타오른 건 몇 개뿐, 나머지는 생명의 불씨를 삼키고 좀 더 짙은 죽음의 기운을 흩뿌렸다.
“…쳇.”
어중간한 힘으로는 잡아 삼켜질 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당장 저 장미꽃들 전부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건 낭비가 클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커지면 소속마법을 통해 내 생명을 갉아먹을 텐데. 으음……한동안 지켜볼까.’
엘리시아는 보라색 역십자가를 만들어 자신에게 다가온 태양의 조각을 파괴했다. 지팡이를 든 채 영역의 힘을 고조시키며 엘리시아가 경고했다.
“아르델 페일린, 뒤로 물러나렴.”
언령을 외려던 아르델이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아르델과 연결된 페어링에 힘을 불어넣으며 이번엔 강인하가 경고했다.
“아르델, 가면을 사용해. 주위를 잘 보고 움직여.”
“아차! 고마워, 조심할게.”
아르델은 엘리시아가 가리킨 장소에 엘리시아의 마법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달렸다.
엘리시아는 아르델을 안전하게 가둬 두고 싶어 한다. 아르델의 손목에 별무리가 차고 있는 것과 같은 ‘연결’의 페어링이 나타났다. 아르델에게 지금 가장 안전한 장소는 강인하의 힘이 미치는 장소였다.
아르델은 물러나는 대신 강인하와 좀 더 가까워졌다. 아르델을 둘러싼 불꽃이 태양과 공명하는 것을 확인한 엘리시아가 미소 지었다.
“너와 함께라면 페일린의 아이가 쉽게 죽진 않겠구나. 괜히 우리가 계획을 앞당긴 게 아니야.”
쿠구구궁!
소리 없이 솟아난 역십자가 불꽃이 고리를 이으며 영역을 넓히던 강인하의 태양 수십 개를 꿰뚫었다. 그러나 태양의 영역은 그 상태로도 무너지지 않고 죽음에 충돌하며 저항했다.
“「죽은 마법이여, 재생하라!」”
아르델이 태양의 죽음을 상징하는 금색 장미에 불꽃을 쏟아 부었다. 장미꽃 몇 개가 아르델의 언령을 받고 타오르는 불씨로 변해 강인하의 곁에 돌아갔다.
“내게 닿을 정도의 기술을 손에 넣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용케 거기까지 빛을 키워냈구나. 참, 부러워. 용케 순수한 원념만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금기를 저지르지 않고, 올곧게, 우리와 같은 풍경을 겪고, 그럼에도 무너지지도, 죽음에 손을 뻗지도 않고…….”
강인하는 엘리시아에게 빛을 쏟아 부으며 이를 갈았다. 부럽다고? 자신들을 이 꼴로 만든 게 누구였던가. 구역질이 치미는 표현이다.
“──죽음의 기억.”
엘리시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발밑에서 온통 사령의 어둠이 솟아올랐다.
“윽…!”
낯익은 감각에 강인하는 숨을 삼켰다. 남극에서 엘리시아가 모든 생명을 거두어 가기 전, 강인하와 엘리시아가 마지막으로 부딪쳤을 때와 비슷한 밀도의 불꽃이었다.
솟아오른 사령의 불꽃이 천장까지 치달아 온 세계를 뒤덮었다. 불꽃 이외의 풍경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과 연결된 태양의 빛이 빠르게 부서져 간다. 에펠로나가 죽음을 태우는 소멸의 빛을 방출했고, 강인하는 페어링의 연결을 강화했다.
“아르델!”
「괜……찮아. 아직 네가 만든 영역이 없어지지 않았어. 아이템도 있고, 괜찮아.」
강인하는 온몸을 압박하는 불꽃을 노려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지난 두 달 간, 새로 발아한 심판의 빛을 갈고 닦았다. 그녀는 싸울수록 강해지며, 그녀를 상대해줬던 이성진의 종말은 결코 엘리시아의 죽음에 뒤지지 않는다. 강인하는 검을 치켜 올렸다. 검 주위로 태양의 조각과 빛을 연결하는 고리가 나타났다.
“……!”
그러나 강인하가 사령의 불꽃을 베어내기 전에 불꽃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불꽃은 약해지지 않았는데 압력이 약해졌다. 마치 불꽃이 그들의 손에는 닿지 않는 이차원에 건너가 버린 것처럼.
머지않아 세계를 뒤덮던 불꽃이 반투명해지더니 배경으로 변해 세계에 들러붙었다.
그러면서 홀의 풍경이 다시 드러났으나, 배경으로 스며든 불꽃 탓에 주위의 분위기는 더 어둡고 삭막해졌다.
풍경에 무늬처럼, 혹은 어둠처럼 들러붙은 건 불꽃만이 아니다. 홀에 깔려 있던 장미 대다수도 건조물에 그려진 문양으로 변했다. 강인하가 손을 뻗어도 보이기만 할 뿐 닿지 않았다. 제대로 닿는 건 태양의 시체뿐이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으니 너희 같은 이들도 있을 수 있는 거지. 아, 그리고 이번에 내가 너희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한 것은 친구의 자손을 향한 친절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야.”
거기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왕의 홀 곳곳에 무수히 많은 역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역십자가는 손에 닿는 모양이었다.
강인하와 아르델은 신중하게 주위를 훑었다. 불꽃이 잦아든 왕의 홀은 끝없이 드넓었다. 달려도 달려도 벽이 손에 닿지 않을 듯했다. 바닥에는 진득하고 짙은 색의 사령들이 들끓는다. 얼핏 사람을 닮은 형체들 사이로 드문드문 눈과 입으로 보이는 세 쌍의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20대부터 극히 최근까지 우리는 손에 꼽히는 강자를 이 손으로 죽이기 위해 강해졌다. 죽일 수 있는 마지막 원수를 죽이고 난 뒤 우리와 견줄만한 적은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강해진 너를 최후의 적으로 인정하여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하마.”
어느새 고딕 시체의 몸과 옥좌도 무시무시한 사령의 불꽃에 둘러싸였고, 고딕 시체의 머리 위에는 남극에서 싸울 때 보았던 잿빛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기뻐해야 할까?”
엘리시아의 차림새도 조금 변했다. 한쪽 어깨에 어깨에는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박힌 망토를 매달았고, 머리에는 장미가 장식된 검은 왕관을 썼다.
“절망해야지.”
태양의 시체로 이루어진 장미는 현재 역십자가의 그림자를 따라 자라나고 있다. 슬쩍 주위의 눈치를 본 아르델이 태양의 시체에 불꽃을 던졌으나, 불꽃은 태양의 시체에 닿기도 전에 역십자가에 잡아먹혔다.
“하나, 계약에 의거해 너희는 ‘산자는 명계에서 생명력을 잃어 간다’는 규칙을 벗어났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생자보다 죽은 자의 힘이 더 강하다.”
엘리시아가 적수에게 보인 대우는 싸우기 전의 경고였다.
“하나, 명계의 중심부인 성의 전황은 명계 전부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다루는 사령의 힘이 강해질수록 명계에 존재하는 죽은 자의 힘이 강해진다. 반대로 너희 산자의 생명이 빛날수록 산 자의 마력은 강해진다. 이 영향력은 바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희보다 더 약하고 죽음에 취약하니까.”
“……!”
“하나, 이곳의 특성상 너는 나와 꽤 오래 싸워야 할 거다. 그러나 사령에게 닿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행위. 사령을 없앨수록 너희는 필연적으로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 생명의 단말마를 짜내 빛나도록 하렴.”
엘리시아가 손에 든 지팡이가 좀 더 길어졌다. 경고를 끝낸 엘리시아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과과과과과!!
사령의 마력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인하가 퍼트렸던 태양은 조금 전 터진 사령의 불꽃에 당해 몇 개 남지 않았다. 강인하는 검을 둘러싼 작은 태양의 영역을 내질렀다.
그런데 허공에 배경이 되어 녹아 있던 사령의 불꽃이 일부 실체화하여 내지른 검을 막아 냈다. 엘리시아의 지팡이에서 내질러진 사령의 불꽃 중 반이 강인하의 검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찾아온 아주 그리운 느낌에 강인하는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강인하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다음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인하가 내지른 ‘심판의 눈꽃 금’과 대칭으로 나타난 눈꽃 결정이 강인하의 태양을 얼렸다.
“이건, 엄마의…!”
“아, 윽…!”
울먹임을 닮은 소리에 강인하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선명한 사령체들이 아르델을 둘러쌌다.
사령의 몸에서 폭발이 일었고, 아르델은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명백히 겁에 질린 태도였다.
콰르르르릉!
바닥에서 가시 덩굴이 일어나고, 사이사이로 새로운 장미꽃이 피었다. 아까와 달리 장미꽃 색이 다양했지만, 아르델의 금홍색과 강인하의 금색이 당연한 마냥 섞여 있었다.
머리 위에서 섬뜩한 기척이 나타났다. 강인하가 돌아보는 것보다 사령 불꽃으로 이루어진 역십자가의 비가 떨어져 내리는 게 빨랐다.
아르델을 도울 틈도 없이 강인하는 공격을 내질렀다. 검에서 자라난 정령의 날개가 소멸의 은청색 빛으로 심판의 힘을 강화했다.
강인하의 빛과 사령의 힘이 부딪치는 장소마다 다양한 마법이 나타났다. 자연의 4대속성은 기본이고, 무기에, 예술품에, 보기 드문 특수한 마법까지.
어딘지 눈에 익은 중력마법을 태워 부순 후에야 강인하는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시아의 마력에 뒤덮인 탓에 시야공유마법으로도 자세히 보이지 않았었는데, 저 모든 사령들은 각기 다른 색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격통이 강인하의 손과 팔을 뒤덮었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통증이 손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고, 그 사이 강인하의 몸에 직격할 뻔한 사령마법을 정령의 날개가 겨우 막아냈다.
“윽….”
“‘죽음의 기억’이 무엇인지는…….”
엘리시아가 서늘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너희가 직접 알아내 봐.”
강인하와 아르델이 성 안에 진입한 순간, 정원을 둘러싼 안개가 짙어지며 역십자가가 시체로 변했다.
모든 역십자가가 시체로 변한 것은 아니고, 생자가 지나다녔던 진로의 반경 5m 안에 있는 역십자가만 시체로 변했다.
사람 형체가 반, 인외 형체가 반, 아는 얼굴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소수, 영혼과 마법이 뒤섞여 만들어진 모르는 시체 키메라가 대부분.
한동안 사령과 싸우면서 레일리 일행은 명계의 두려움을 실감했다.
일단 시체 하나하나가 강하고 끈질기다. 시체는 핵을 부수는 게 아니면 행동을 멈추지 않으며,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시체는 무너져 바닥에 흡수되어서는 땅 아래에서 재생한다. 그러나 엘리시아의 마력으로 흘러넘치는 대지는 레일리가 상당한 힘으로 공격해도 흠집이 약간 나는 데 그친다.
죽음의 기운이 마법이 지닌 생명력을 잡아 삼키는 탓에 마법이 평소보다 들어 먹지 않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주위에 가득한 보라색 안개, 죽음의 마력은 생자의 생명력을 좀먹는다. 사령을 베면 그 정도가 극심하다.
그 힘에 일행은 도미니크가 만든 정화의 숲과 정예리가 마법사들의 손목에 새겨 준 생명의 팔찌, 유은하와 이성진이 함께 만든 아이템인 종말의 수호석을 규율마법에 짜 넣어 대응했다.
종말의 수호석은 총 20개로 강인하와 아르델은 하나씩, 나머지 마법사는 3개씩 목걸이 형태로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율, 우리의 몸은 죽음에 적응한다. 죽음의 방패로 생명의 팔찌를, 죽음을 베는 검으로 첫 번째 종말의 수호석을 제시한다. 단 종말의 수호석의 힘은 하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인간 시체를 상대할 때만 발휘된다.”
그러나 그것들 하나하나가 마법사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일행은 한동안 사령과의 접촉을 제한하며 명계의 법칙을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레일리는 관측되는 모든 현상을 규율마법으로 기록했다.
명계의 법칙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죽음의 힘이 가장 강한 부분은 시체를 회복시키는 대지라는 것이다.
“이래서야 바깥에서 시체를 상대하는 건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소용이 없다면 이렇게 넓은 무대를 꾸밀 필요가 없잖아. 시체가 계속 부활하고, 그래서 여기에서의 싸움이 소용없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뻔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으로 쳐들어가거나, 여기에서 빠져나가 다른 전쟁터를 돕거나. 둘 다 엘리시아가 원하는 바는 아닐 거야.”
엘리시아는 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을 두었으나, 그들이 다른 영역으로 가면 대마법 장치의 장미꽃을 피우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엘리시아의 동료가 위험해진다.
“그러니 쓸데없는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도 정원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해 놨을 거야.”
“아니라면 저흰 레일리 회장님이 규율마법을 되찾는 것만 도우고 빠져나가면 됩니다.”
일행은 레이시와 시온의 말에 공감하며 계속 움직였다. 그러는 중간중간 레일리는 아르델과 강인하의 연락에 답했다.
머지않아 일행은 첫 번째 목표인 샐레나의 시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런데 샐레나의 시체로 이루어진 역십자가는 레일리가 다가가도 변하지 않았다. 레일리가 애를 써봤으나 역십자가 상태일 때는 레일리의 마법에 공명조차 하지 않았다.
“젠장!”
고민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은근슬쩍 역십자가에 마법을 빙의시켰던 울비스의 시온이 큰 낭패를 봤다. 빙의시킨 마법은 순식간에 잡아 삼켰고, 죽음의 힘은 연결고리를 따라 탐욕스럽게 시온의 생명력을 삼켰다.
하마터면 통째로 잡아 삼켜질 뻔한 것을 레이시가 눈치 빠르게 마법을 써 구해냈다. 붉은 리본이 시온과 마법 사이의 연결고리를 억지로 끊었다.
“야, 이 미친놈아!”
본디 의사로서 유펠르시아에서 지원 나왔던 도미니크가 재빨리 시온의 근원에 유은하의 정화석과 정화의 나무를 박아 넣었다. 시온이 콜록콜록 기침하며 다급히 말을 토해냈다.
“아직…….”
“아직?”
레이시가 새까만 검으로 다가오는 시체를 파괴하며 물었다.
“아직 명계의 법칙이……열리지 않았다……. 윽, 그리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시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정보를 가진 시체를 부수는 것……. 인간형……그것도 하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시체만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가신 시스템이네.”
하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시체 중 움직이는 이는 아직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목표가 정해지자마자 레일리가 나섰다. 레일리는 가장 가까이 있던 엘다의 시체에 유은하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든 정화의 검을 박아 넣었다.
“명계의…….”
핵이 부서지는 순간, 옛 동료의 입이 열렸다. 시체가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육신은, 베면 벨수록 닳는다……. 마지막에는 부서져, 흙으로 돌아간다……. 베지 않으면…….”
시체의 말은 거기에서 끊겼고, 시체는 한 번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시체의 핵은 다시 땅 밑에서 복구가 재개되었다.
레일리가 차가운 눈으로 되물었다.
“베지 않으면?”
그때 또 한 번 아르델과 강인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연락의 요지는 의식의 설명서였다. 이름을 올리는 의식, 명계에 묶인 영혼, 명계의 가장 큰 제약의 무효화.
강인하와 아르델만이라도 죽음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행이었다. 죽은 이들을 성불시킬 단서를 얻었다는 것에 안심했다. 레일리는 긍정적인 대답을 보냈다.
그때 도미니크가 로일의 손을 붙잡았다. 로일은 이 안에서는 가장 약했다. 로일의 손가락 끝이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헉…!”
도미니크는 로일의 몸에 생명의 정화수를 집어넣었다. 피와 함께 한 바퀴 돈 정수의 물이 로일의 독과 함께 로일의 몸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적셨다.
“도미니크 씨의 숲에 팔찌, 종말석, 정화의 힘을 지닌 장비와 옷까지 착용하고 있는데도…….”
“미치겠네, 진짜. 명계는 진짜 어떻게 되먹은 거야?”
“도미니크 선대님은 최대한 싸우지 말고 마법을 온존해 주세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일을 바라보던 레일리는 규율마법에서 진동을 느끼고 진동의 원인인 거울을 열었다. 거울 안에서 라이라가 쏙 얼굴을 내밀었다.
“으악, 여기 공기 왜 이래요? 기분 나빠! 으악, 기분 나빠!”
반가운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라는 강할 뿐 아니라 이그니의 힘을 계승한 의사였다. 키메라 전문이지만 사람에게도 충분히 통한다.
인상을 쓰던 라이라가 몸 주위에 주황색 불꽃을 둘렀다. 이그니의 불꽃은 생명을 치유하는 불꽃임과 동시에 악령에게서 비롯된 사령의 불꽃이다.
“이러니까 괜찮네.”
그러니 이그니를 삼킨 현재의 라이라는 죽음에 속한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명계의 법칙이 약하게 적용됐다.
그 시점에서 강인하와 아르델이 명계에 이름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레일리를 제외한 모두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이건?”
더불어 그들의 손목에도 엘리시아의 문양이 새겨졌다.
“헉! 나한테도 생겼잖아. 아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손목에 팔찌처럼 새겨진 장미가시덩굴모양 문신을 보고 라이라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저만 없네요?”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것은 레일리뿐이었다.
강인하와 아르델을 통해 설명서를 보았기 때문에 레일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금세 짐작했다.
레일리에게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것은 레일리가 아직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중심 전력 세 사람이 계약하면 동료들에게도 그 계약이 미친다. 즉 명계의 가장 큰 저주에서 벗어나 다들 명계에 있는 것만으로 죽음에 잠식되지는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