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8
“……?”
응? 그러나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가, 거실 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좌식 탁자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허리를 비스듬하게 쫙 편 매우 편한 모양새로. 나는 의문을 가지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거의 마지막으로 집 안으로 들어선 것이 성후 오빠와 성후 오빠의 절친인 요운 선배였다. 성후 오빠가 오자마자 그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은희 언니가 바로 달려갔다. 은희 언니는 성후 오빠한테 딱 붙어 기대며 성후 오빠의 가슴을 약하게 쳤다.
“성후 너, 너무 늦은 거 아냐?”
“미안.”
성후 오빠가 은희 언니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야말로 다정하고 달콤하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빛만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기분을 똑같이 느낀 사람이 있었던지, 대충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민희네 선생님이 나른한 투로 말했다.
“어~이, 거기 두 분, 내 바로 옆에서 닭살 떨지 마시고, 나간 후에 하시지요.”
“뭐 어때서요! 저희 맘이잖아요!”
그러니까, 오글거린다고. 한순간 너무 달달해서 오글거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오글거림의 주박에서 풀려나 다정하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의 모습을 가만히 감상했다.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이후로 매우 오랜만이다. 성후 오빠가 대학으로 올라간 이후 나는 그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가끔, 1년에 한두 번씩 만나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 정도면 그냥 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성후 오빠는 가끔 만날 때마다 꼭 나에게 인사를 해 줬다.
구경을 하는 느낌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멍하니 그리운 감각에 휩싸였다. 다정하게 웃는 성후 오빠, 수줍게 웃는 은희 언니.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달콤한 분위기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어쩐지 낯익었다. 가슴이 아련해졌다. 아…….
‘좋아해, 많이.’
‘응. 밖에서 말하지 마.’
‘내 여자 친구가 최고다.’
‘그만해! 부끄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입술을 꾹꾹 다물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내 주위만 조용히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으로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나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뭐 해? 이제 가야지.”
제현 오빠였다. ……아, 이제 보니 친구들은 이미 몸을 일으킨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핏 웃으며 제현 오빠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인하가 삐죽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손을 내밀 생각이었는데.”
“오냐, 꼬맹이들아. 너희들은 내 옆에 꼭 붙어서 따라와라.”
“헹!”
“한수야, 반항한답시고 떨어지면 안 된다?”
“알아, 알아.”
코웃음을 치던 한수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우리는 코트를 입고 한풍이 부는 바깥으로 나섰다. 나는 여전히 제현 오빠랑 손을 잡은 채였는데, 내가 몸을 부르르 떨자 인하가 반대쪽 손을 잡아 왔다. 요운 선배가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제현이 너, 그림 장난 아닌데? 어린애랑, 특히 여자아이랑은 절대 안 어울릴 것 같던 녀석이.”
“뭐, 꽤 친해졌으니까요.”
제현 오빠는 어깨를 으쓱하며 반대 손으로 민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갔다. 스승님 집 뒤편에 있는, 커다란 보석이 떠 있는 장소로.
그래, 스승님의 집에는 ‘포털’이 설치되어 있다. 마법진 사이를 둥둥 떠다니며 빛을 뿜어내는 보석, 게임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인 포털의 모습이다. 지극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다운 비주얼이었다.
우리는 포털을 통해 거리로 향했다. 포털을 지나자 한순간 새까만 길이 펼쳐졌다. 몇 걸음 걷자마자 그 어둠이 물러나며 이번엔 불빛과 마법으로 반짝이는 도시가 드러났다.
밤의 번화가를 걷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계속 성실한 어린아이로 지내 왔으니까. 친구랑 시내로 놀러 가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집에 돌아왔다.
“와!”
밤의 거리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가게에 둘러져 있는 색색의 전구와 마치 솜털 같은 불빛. 마법으로 만든 불빛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먹을 것을 잔뜩 팔고 있으니, 친구들의 눈이 돌아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꼬치 맛있겠다!”
“인하야, 은하야! 저거 예쁘지 않아?”
“거기 너희들! 제현이한테서 떨어지지 말라니까?”
“에이, 은희 언니, 그럼 같이 가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친구들을 제지하려던 은희 언니가 도리어 민희한테 붙잡혔다. 은희 언니의 뒤를 따라 이번엔 성후 오빠가 친구들을 이끈다. 민희가 친구들이랑 달려가다 말고 제현 오빠랑 손을 잡은 채 계속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은하는 안 가?”
“난 여기 있을게.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와!”
인하가 멈칫,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처음으로 엄마한테서 떨어지려는 아기 새를 보는 기분이라, 나는 웃으며 인하를 향해 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인하가 머뭇머뭇, 친구들과 은희 언니, 성후 오빠와 함께 거리의 빛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제현 오빠는 약간 어두운 골목에 서서 그것을 바라만 봤다. 이미 다른 선생님이나 선배들은 가게로 들어간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친구들이 멀어지자 우리의 주변만 침묵으로 젖어들었다. 나는 빛으로 가득한 도시를 시선만 굴려 둘러보았다. 분수대, 점포, 카페, 어디를 보나 커플 천지였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커플은 역시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다. 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물건을 고르는 두 사람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가족 같다.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무심코 제현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거리의 불빛을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 나는 저것을 안다. 나는 울컥한 기분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사랑을 하는 눈빛’……. 나도 모르게 옷깃 안에 있는 반지를 옷깃째 쥐었다. 천 너머로 반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가슴속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때, 말없이 있던 제현 오빠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특이하기는.”
나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뭐가요?”
“너 말이야, 설마 성후 선배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엥?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현 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더 특이하네. 너 말이야, 가끔, 가끔……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단 말이야.”
“…….”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하늘을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이번엔 옅게 웃으며 제현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보여요?”
“그래. 나아 참, 너 같은 어린애를 어른 같다고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헐.”
“얼씨구?”
내가 장난스럽게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나자 제현 오빠 역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때쯤 친구들이 돌아왔다.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가 어쩐지 놀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희들 사이 많이 좋아졌다?”
“뭐어.”
“제현이 네가……의외네.”
제현 오빠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였다. 단, 인하와 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내 팔을 한쪽씩 끌어안으며 제현 오빠에게서 떨어트렸다.
“은하는 제 거거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말지?”
말똥말똥,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풋, 곧이어 제현 오빠가 웃음을 터트렸다. 뒤이어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도 웃음을 터트리려다 말고 참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얘들 왜 이렇게 귀여워?! 정말 귀여워 죽겠네!
나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인하와 한수를 꽉 끌어안았다. 한수가 기겁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왁, 뭐야! 야, 떨어져!”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그 녀석이 없더라도, 그래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나는 눈앞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물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단체로 감자탕집이라……. 뭐, 좋아하는 음식이니 상관없나. 이 기회에 먹고 싶은 만큼 잔뜩 먹어야지. 모두 보기와는 다르다고 말하는데, 나는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다만……가끔 먹는 것조차 귀찮아할 때가 있을 뿐이지. 일단 먹기 시작하면 상당한 양을 먹는다.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몇 개의 테이블로 나뉘어서 앉았는데, 우리 맞은편에는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 은희 언니, 성후 오빠, 천호 오빠가 앉아 있고, 우리는 네 명이서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내 옆에 제현 오빠가 앉아 있다.
어쩐지 1학년 때가 생각나는 자리 배치였다. 와, 내가 좀 있으면 벌써 4학년이구나. 무심코 감탄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나는 의아한 눈으로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쩐지 신경 쓰인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끔거리고 있던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이 시침을 떼며 시선을 돌렸다. 왠지 두 사람은 나를 보고 동요하고 있었다. 더불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감정의 색이 비교적 선명히 보여서 나는 그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갑자기 왜 저러지?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대체 왜 저럴까. 아까 만났을 때만 해도 분명 평소와 똑같았었는데? 마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반복해서 나를 흘끔거린다. 평소에 비해 표정이 왠지 우울하기도 하고. 무엇 때문인지 엄청 신경 쓰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다 보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는 꺼려졌기 때문에, 나는 눈치 못 챈 척 계속 감자탕이 보글보글 끓는 것만 바라보았다. 은희 언니가 국자로 감자탕을 저으며 요리를 확인했다.
“자, 이제 먹자.”
은희 언니가 우리에게 감자탕을 한 그릇씩 챙겨 주었다. 한동안 떠들썩한 식사가 계속됐다. 감자탕만이 아니라 해물찜과 고기찜도 시켜 먹었다. 나는 깔끔하게 살을 발라 먹었다. 다른 어른들은 이미 술을 마시고 있다. 왠지 오래 눌러앉을 것 같은 분위기다. 준휘 선생님이랑 민 선생님도 이미 그 줄에 참가해 잔을 꺾고 있었다. 이런.
“이거 봐라? 3단 아이스크림이지롱!”
한편, 질리지 않고 감자탕 사리를 챙겨 먹고 있는 나와 달리 민희는 저~기 있는 무료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렸다. 셀프로 퍼서 콘에 얹어야 하는데 그게 의외로 어렵다. 민희는 그걸 크게 퍼서 3단이나 쌓은 것이다. 역시 민희다. 균형 감각이 좋다니까.
술을 곁들여서 그런지 식사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먹을 만큼 먹고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가는 김에 화장실에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해 점원에게 위치를 물어보았다. 코트를 여미고 밖을 거닐고 있는데, 화장실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는 골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아니……약간 심란해서. 꼬맹이니까, 괜찮겠지? 눈치챈 거 아니겠지?”
“그래……. 근데 밖에선 하지 마라.”
“아니, 그래도…….”
아, 준휘 선생님이랑 민 선생님 목소리다. 나는 그냥 두 사람이 있구나 싶어 골목을 돌아보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이내 눈에 비친 광경에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췄다.
민 선생님이 아이같이 밝게 갠 얼굴로 웃으며 준휘 선생님을 꽉 껴안고 있었다. 준휘 선생님과 얼굴을 가까이 하며 웃는 민 선생님의 모습이 미치도록 다정해 보여서, 서로를 마주 보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세상에!
너무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중대한 비밀을 알아 버렸다. 나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그 순간……준휘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거다.
“어, 은……하?”
“뭐?!”
민 선생님이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눈이 황망한 빛을 띠고 마주쳤다. 헉. 나는 두 사람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술을 움직이며 고개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휙 몸을 돌렸다.
“……어, 어이!”
그러자 선생님들이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아니, 곤란한 상황을 피해 주겠다는데 왜 막으려고 하는 거람! 나는 덩달아 당황해서 그만 소리를 질렀다.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던데 이어서 하세요!”
“얌마, 잠깐! 은하야!”
“야!”
그러나 두 사람은 더더욱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반쯤 벽에 몸을 기댄 상태에서 동시에 나한테 다가오려다 보니 다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두 사람은 부딪혀 넘어질 뻔한 상황을 겨우 넘긴 결과 더 밀착하게 됐다. 와, 완전히 덮치는 자세……아니, 난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들려.
그런데 그때였다.
“야, 은하! 너 거기서 뭐 하냐?”
한수? 나는 당황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한수가 식당에서 나와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아니, B랭크에 A랭크씩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왜 이리 돌발 상황에 대응을 못 해? 그러나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재빨리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일단, 떨어지세요.”
“앗……!”
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을 두고 앞으로 나섰다. 몸을 돌려, 한수에게 골목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골목을 막아서며 한수를 맞았다. 나는 뒤를 의식하며 물었다.
“넌 왜 나왔어?”
“아니, 네가 나가니까…….”
“너만?”
나는 흘끗 한수의 뒤를 살폈다. 그러자 한수가 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왜?”
“아니, 네가 나오면 인하도 나올 줄…….”
“걘 선배들이랑 게임 하고 있다. 그래서, 넌?”
“나야 화장실 가려고.”
“아…….”
한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수는 당황하더니 휙 뒤돌았다.
“그, 그럼, 갔다 와!”
“응.”
허둥지둥 뛰어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참 부끄럼을 많이 탄다니까. 뭐, 그럴 나이지.
약간 흐뭇하게 웃으며 뒤돌던 나는 어느새 골목에서 나온 두 사람과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쳤다. 입가가 저절로 싸늘하게 식었다.
“…….”
“…….”
솔직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몇 번 다른 사람보다 좀 둔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통은 된다. 그러니 방금 전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다.
머릿속에 아까 스승님의 집에서 있었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에게 ‘사귀냐’고 농담을 던졌을 때 두 사람이 당황했던 것. 두 사람이 흘끔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던 것. 나는 눈빛을 흐렸다.
미안한 짓을 했다. 내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걱정을 했을까. 나에게는 장난이었지만, 알고 보니 두 사람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동성애는 이 세계에서도 보편적이지 않다. 나는 그런 것에 편견이 없는 편이지만, 내가 그런 것에 편견이 없는 건, 소설이나 만화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며, 혹은 범죄가 아니고서야 웬만한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무심하게 넘기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도 그중 하나였다. 설령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내 지인이라도, 그래,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보편적인 예가 아니다. 나처럼 동성애 장르를 읽거나 보는 사람도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일이 많다.
두 사람은 아마 사귀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굉장히 신경 쓰며 지내 왔을 것이다. 그러니 아까도, 지금도……갑작스럽게 비밀을 들킨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
나는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볼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기야, 이상하긴 했어.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꺼낸 적이 없다. 같이 산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내가 섭섭하게 느낄 정도로 그들은 여태껏 우리 앞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겠지. 남자 둘이서 동거한다는 이야기든, 그들의 예전 추억담이든, 혹시라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이야기가 섞여 있지 않을까……하고.
나는 무심코 그들과 함께했던 수업 시간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 학교에 왔을 때 처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두 사람은 항상 함께였다.
사이가 매우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함께가 아닌 경우가 드물었다. 서로를 향해 귓속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남자치곤 잘 붙어 다니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서로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왜, 왜 나는 그들을 보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럼 좀 더 눈치껏 행동했을 텐데.
“은하야, 방금 전에 그건 말이지……그러니까, 내가……취해서…….”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머뭇머뭇 말을 이어 가는 민 선생님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감정의 색이 슬픔과 고통, 안타까움 같은 것으로 일그러졌다. 어린애니까 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어린애니까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커서 지금 있었던 일을 다시 되돌아보면 어떡하지? 그때 이 아이가 대체 뭐라 생각할까. 분명한 건 그들이 지금 속을 끓이고 있다는 거다.
“은하야.”
허둥지둥거리는 민 선생님의 말을 준휘 선생님이 끊었다. 그는 몸을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며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준휘 선생님이 표정을 흐렸다.
“……그래, 이미 너는, 눈치챘구나.”
“……!”
나는 흠칫했다. 설마 특수능력을 사용했나……?! 감정이 읽힌 거다……! 나는 손가락 끝에 힘을 줬다.
“너는 어른스러운 애니까……어쩌면 언젠가 눈치챌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우리 사이를, 말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이상하게 보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돼. 그럼 선생님이 상처 입을 거야. 선생님이 내 손을 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런 상황은 정말로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하지만 똑바로 준휘 선생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선생님들, 그러니까……사귀어요?”
아, 뒤에서 민 선생님이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준휘 선생님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답지 않게 흐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조심, 물어보았다.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거……맞죠?”
“……그래.”
“언제부터요……?”
“고등학생 때부터.”
“그렇구나…….”
정말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은 처음인데. 아니, 하지만…….
내가 망설이며 머뭇거리자 준휘 선생님이 흐린 눈빛으로 툭 내뱉었다.
“……이상하니?”
나는 숨을 삼켰다. 이어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괜찮아요. 저,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나는 말을 하면서 시선을 약간 피했다. ……아. 피하고 나서 후회했다.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이런 게 더 상처가 될까? 이상한 것처럼……선생님들이 이상한 것처럼……. 아닌데. 그건 싫은데.’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작게 웃었다. 준휘 선생님이 눈을 크게 떴다.
“서로 많이 좋아해요?”
나는 차라리 그냥 가벼운 척하기로 했다. 어디에나 있는 일인 것마냥, 이게 특별한 일이 아닌 것마냥, 그냥 평범한 커플에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해 보았다.
민 선생님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준휘 선생님이 약간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어.”
“사귀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우리 은하도 연애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가?”
“음, 그러니까…….”
사실 나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민 선생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질문을 던지는 내게 당황한 기색으로 이것저것 답했다. 그것이 좀 익숙해지자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단편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냥,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따뜻한 그 감각을 말로 표현한다든지……두 사람 첫 만남 이야기도 들었다. 중학생 때 만났다든가, 처음엔 사이가 안 좋았다든가,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되고, 그러다가 서로에게 끌려서……정말이지 어디에서나 흔하게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서 진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힘들었겠네요.”
그러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좋아하는데 말조차 못 하는 건……힘든 일이에요, 정말로…….”
그들의 상황은,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많이, 아니, 조금 특수한 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통을 분명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내가 그랬었기에 안다.
지금만 해도 어린애라는 것 때문에, 전생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나.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 녀석과, 내 남친과 한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나는 잊은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나는 나 자신을 속였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 반대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것을 둘 다……안다.
예를 들어 내가 불치병에 걸렸을 때, 내가 죽는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어떻게 그런 내가……너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어. 얼마나 많이 고민했고, 얼마나 많이 가슴을 앓았던가.
나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근데, 괜찮을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은 당당히 밝히는 사람도 많잖아요. 개중엔 지위 높은 사람도 있고, 그래서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요. 동성 결혼도 합법화됐고……. 그렇다고 꼭 말하고 다니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젠 그렇게 마음 졸이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살짝 들었다. 나를 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을 담고서 흔들렸다. 두 사람의 주변에 응어리진 감정이 마치 물시계처럼, 눈물처럼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남의 시선만 신경 쓰다 보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리고 나쁜 걸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진짜, 그냥……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
“그리고 준휘 선생님이랑 민 선생님, 엄청 잘 어울리는걸요. 이제 두 분이 함께가 아닌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요. 분명 두 분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잠시 망설였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맞아요.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게 어울려요. 꼭 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절친이나, 파트너로서나……응, 그 이상으로 역시 연인으로서……정말로 모든 의미로 두 사람은 같이 있는 게 어울려요. 맞아요. 정말 함께 있는 게 제일 잘 어울려요. 그러니까……!”
말을 잇다 말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준휘 선생님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민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아, 나는 그제야 준휘 선생님이 왜 나를 끌어안았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소리 없이 어깨가 젖어 간다. 고개 숙인 민 선생님의 얼굴 아래로 소리 없이 눈물만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눈동자가, 그 감정이, 분함을 내뱉으려는 것처럼 일렁이는 것 역시 보였다.
나는 그 감정에 동조되어 눈물을 참았다. 우리의 너무나도 소중한 선생님들. 나의 너무나도 소중한 선생님들.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게다가 소심한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이 서툰 내 말을 듣고 울고 있는 거라면, 그럼 내 말은 그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위로가 된 것일까.
“저, 아까, 선생님들에게 사귀냐고 물은 거, 그냥 장난친 거였어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어요. 하지만……하지만……진짜로 연인이라고 해도 위화감 없이 어울려서, 그래서 말한 거였어요. 저기, 그러니까……그러니까…….”
나는 준휘 선생님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설령 동성이랑 사귄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아. 그건 나쁜 게 아냐. 서로 사랑한다잖아. 억지로 얽매인 관계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힘든 길일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환생 후에도 그 녀석을 찾고 있는 내겐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끌어안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정말로……정말이에요.”
나는 하늘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이 보이기는커녕 하늘의 어둠조차 부옇게 보이지만, 그래도 저건 분명 하늘이다.
이건 습관이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할 땐, 꿈을 꿀 때는, 앞을 향하며 하늘을 본다. 뭐든지 용서받을 것 같고, 뭐든지 받아들여질 것 같고, 뭐든지 이루어질 것 같으니까.
잠시 후, 온기가 두 개로 겹쳐졌다. 나는 두 사람의 품에 끌어안긴 채 계속 하늘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우리는 7시가 되기 전에 스승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 같이 모여 선물 교환식을 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민희네 선생님에게 돌아갔다. 받은 선물을 풀어 보니 미니 눈사람 인형이었다. 생각보다 맘에 드는 선물이 나왔다.
이후 어른들은 술과 안주를 끼고 대화를 나눴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았다. 그러다가 제현 오빠랑 천호 오빠랑 같이 게임을 하러 2층에 올라갔다. 참고로 우리가 다 같이 하게 된 게임은 예전에 내가 시나리오를 적었던 막 완성된 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야 이 자식들아!
나는 친구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보며 몇 번이나 마른세수를 했다. 아, 쪽팔려……오글거려……. 아니, 스토리만 보자면 꽤 재밌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 게임을 눈앞에서 하고 있는 걸 보니 역시 오글거렸다! 말하자면 그거다. 내가 쓴 글을 누가 눈앞에서 읽고 있는 기분이다. 부끄럽다고!
“와, 선택지 좀 봐.”
『헐, 어이없어. 그걸 말이라고 해?
→뺨을 때린다. “야 이 개자식아!!”
→정강이를 찬다. “미친 거 아냐?”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대꾸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취향이 아니야.”
→운다.』
참고로 이 게임은 여성향 게임으로 남자 주인공이 여러 명이며 역하렘 루트도 있는데, 얘들이 30분 이상 게임을 하며 고른 루트가 하필이면 문제아랑 이어지는 루트다. 여자 주인공 성격은 내 취향대로 약간 새침하고 도도하고 당당한 여자……긴 한데, 사실 어떤 대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여자 주인공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역시 마법은 대단해.
여태까지 얘들은 참 성격에 맞게 게임을 진행해 왔다. 민희가 선택지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