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87
“멋지네.”
작게 읊조리고는 시카는 무기를 바꾸었다. 우주(알파)로 이루어진 활 위에 형태 없는 안개 룬과 보석 아이지스가 스며들었다.
활이 긴 깃발을 두른 깃대로 변했다. 깃발의 바탕은 보라색이며, 검은 수실로 장식되어 있었고, 은색으로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시카의 무기인데도 엘리시아를 연상케 했다.
시카의 몸에 둘러져 있던 나뭇가지와 꽃덩굴이 깃발을 휘감았다.
“마녀의 영역을 선포한다.”
깃발을 중심으로 시카의 힘이 강해졌다. 우주의 어둠이 널리 퍼지고, 비현실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는 아이지스의 보석이 더 강한 빛을 뿌리고, 룬의 안개가 고루 퍼졌다.
안개가 눈으로는 좇을 수 없는 바람의 형태를 덧그렸다. 그로 인해 바람의 영역과 마녀의 영역이 일부 섞였다.
안개에 의해 윤곽이 드러난 바람의 흐름을 꽃과 나뭇잎이 감쌌으며, 바람은 세상의 인력과 자신에게 섞이는 자연물을 계속 뒤바꾸고, 분쇄하고, 멈추었다.
행성을 움직이는 중력이 흐름을 뒤바꾸려는 바람과 부딪치고, 생명력을 상징하는 파도와 나무와 꽃이 정체한 움직임 속에서 나타나는 멸망과 부딪쳤다.
‘넓어.’
시카는 서로를 갉아먹기 위해 부딪치며 생겨난 영역의 경계선을 통해 이소영의 바람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더듬었다. 시카는 영역의 선포를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식물들에게 맡기고 다시 알파의 활을 들었다. 빛을 터트리고 우주의 어둠을 보다 넓혔지만 바람은 밀려오고 또 밀려와 시카의 마력을 멈추고 분쇄했다.
‘예상보다 훨씬 광활해. 이 느낌…….’
시카는 손에 든 활의 본질을 의식하며 또 한 번 화살을 쏘았다.
‘마치 알파를 처음 만났을 때 같군.’
아스트랄은 행성인 만큼 한계선이 명확하다. 그러나 우주인 알파는 아니다.
우주의 경계선만큼 지금 이소영의 육체는 불분명했다. 세상의 모든 바람이, 바람을 담을 수 있는 허공이 이소영의 육체이며 의지였다. 다양한 흐름을 한 몸에 지닌 데다 중심마저 보이지 않으니, 정말로…….
“정령보다 더 자연 같은 인간이로구나.”
시카는 활을 쥔 채 바람의 흐름이 가장 뭉쳐 있는 장소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제 아스트랄에 속한, 그가 한때 계약했던 정령의 바람조차 말을 듣지 않았다.
“……!”
그러나 시카가 활을 당기는 것보다 먼저 바람의 흐름이 변했다. 지금 영역을 지정한 주체 중 하나이며, 형태 없는 존재이자 형태를 고정하고 뭉그러뜨리는 정령인 룬이 바람의 새로운 형태를 가장 빠르게 눈치챘다.
화악─!
보이지 않는 바람의 지배력이 강해지며 한순간 영역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쩌면 의식마저 멈췄던 건지도 모른다. 눈치챘을 땐 얼핏 사람의 형상을 드러낸 이소영이 손에 든 ‘멸망의 검’을 시카를 향해 찔러 넣고 있었다.
“──윽!”
가까스로 급소를 찔리는 건 피했으나, 멸망의 검은 시카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이것은 아까 부서진, 소환해서 불러낸 ‘멸망의 창’과 달리 평소 마법의 매개로 자주 쓰는 실체를 지닌 단검이었다.
그것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쓰기 위해 아껴둔 ‘종말의 가호’가 담긴 검이었다.
이성진의 종말이 내리는 가호는 두 가지. 하나는 죽음을 비껴나가게 하는 것. 또 하나는 생명의 위협을 가져오는 적 혹은 마법에 종말을 가져다 주는 것.
이성진의 종말과 이소영의 멸망은 다른 힘이지만, 무언가를 죽음에 다다르게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런 만큼 두 힘은 아주 잘 어울렸다.
자연의 근원적인 멸망과 닿는 모든 것을 죽음이란 시간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종말.
“멈춰라──!!!”
이소영은 이 드넓은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중심을 노렸다.
시카의 몸에 파고든 단검을 중심으로 멸망의 영역이 그려졌다. 마녀의 영역 위에 바람이 덧씌워지고, 덧씌워진 바람이 자연에 섞인 바람의 성분을 흡수하고, 바람의 존재성을 증명하는 움직임을 제어해, 세상의 움직임을 멈췄다.
멸망이 찾아왔다. 시카의 몸부터 색이 빠져나갔다.
종말이 찾아왔다. 멈추지 않은 것들이 죽음이라는 시간을 향해 노쇠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녹슨 것처럼 삐걱거렸다. 시카가, 혹은 자연의 심연이 지닌 우주의 에너지에 영향을 받아 세상의 색이 돌아오고, 이소영의 멸망에 의해 다시 색이 빠지는,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이 세상이 점멸하는 것처럼 반복됐다.
부숴라, 갉아먹어라, 멈춰라.
멸망에 저항하며 시카의 근원에서 강대한 마력이 흘러넘쳤다.
바람의 주인이 된 이소영의 지배력은 아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러나 시카의 에너지는 평소보다 조금 느릴 뿐 움직였다.
‘한 번 뿐인 기회야.’
검에서 흘러나오는 종말의 가호를 중심으로 이소영은 멸망의 영역을 반복해서 퍼트렸다. 닿는 모든 힘을 멈추고, 멈추고, 멈추고, 또 멈췄다.
시카의 힘이 완전히 멈추지 않기에 연속으로 영역을 펼치는 게 가능했다. 그러면서 이소영은 시카의 힘에 교감하고 공명했다. 시카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순간, 이소영도 완전히 멸망으로 변하리라.
멸망의 힘에 저항하는 시카의 마력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강력했다. 이성진의 마력은 어느 마법으로도 잴 수 없었지만, 이성진 다음으로 마력이 많은 유은하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별무리의 마력을 전부 합해도 시카 한 사람의 마력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 리 없어. 찾아온다 해도 지금까지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찾아올 거야.’
쿠구궁…!
이소영이 전에 없이 강대한 멸망을 퍼트리고 있을 때 자연의 심연과 가까이 있는 공간의 심연에서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보석을 지니고 있던 이소영은 소란의 근원이 최인성의 마법임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이소영은 소환마법을 사용했다.
“…소환, 멸망의 그림자.”
이소영이 손에 쥐고 있는 종말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는 최인성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성진과 함께하며 종말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겪었고, 그가 초월하고 가장 먼저 덮어 쓴 그림자 역시 이성진의 그림자였다.
최인성의 그림자는 존재하는 실체의 이면이며 정신이며 공간이다. 멸망에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은 본래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바람을 멈춰 생겨난 멸망에 실체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멸망에 실체가 생긴다는 것은 멸망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대신 이소영이 부상을 입거나 죽을 확률이 커지는 리스크를 짊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지금에 한해 이소영은 공격의 위력을 높이는 걸 택했다.
“윽…!”
실체를 얻은 멸망이 사나운 기세로 시카의 몸을 좀먹었다. 잿빛 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억죄고, 부수고, 붙잡고, 닿는 모든 것에 직접 죽음과 지독히 가까운 독을 주입했다.
요정과 이안이 허무의 괴물로 변해 다른 정령들을 막아서거나 공격했다. 세상에 퍼진 멸망 모두 이소영의 일부와 다름없었다. 끄트머리는 머리카락이나 손톱 따위의 부서져도 몸에 해가 가지 않는 일부지만, 시카의 몸에 가까울수록 팔, 몸통, 머리 등 중요한 신체 부위와 연관된다.
이소영이 단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시카의 다른 급소를 노렸으나 공격은 번번이 아스트랄과 시카가 지닌 자연의 생명력에 튕겨나갔다.
지구는 우주 전체에서 보면 강대한 에너지를 지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생명력 하나만 두고 보면 그 어떤 자연물보다 뛰어난 힘을 지니고 있다.
무수히 많은 생명이 나타나고 죽은 행성이다. 무수히 많은 초월자를 탄생시키고 그 죽음을 몸에 품은 행성이다.
“이소영……이 멸망을 오래 유지하긴 어려울 거야……. 세계는 멸망하고 싶지 않아하니, 너의 멸망은 세계가 정말 멸망으로 노쇠하기 전에 생명으로 순환될 수밖에 없어.”
이소영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몰라?”
“후…….”
시카의 입가에 문득 미소가 어렸다.
“그래, 네가 모를 리 없지. 그렇다면 나도 커븐 로드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겠지.”
자연의 강제력으로 인해 멸망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건 커븐 로드의 이름에 걸맞지 않다.
적의 명예 따위 알게 뭐냐고 생각하면서도, 이소영은 내심 시카의 말에 동의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인간 중 커븐 로드라는 칭호가 지닌 힘을 모르는 자가 있을 소냐. 절망의 현신인 그들의 이름은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역사상 최고의 강자로 꼽힐 것이다.
멸망 속에서 시카의 마력이 강대한 생명력을 품고 조형되었다.
멸망이 실체를 가졌음을 눈치챘을 텐데도 시카는 그 점을 파고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고대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로써 힘을 맞부딪쳤다.
탄생하려는 생명과 모든 것을 묻어 멈추려는 멸망.
멸망에 먹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무척 좁아졌음에도, 시카의 힘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이소영이 발하는 멸망에 맞부딪쳤다.
시카의 몸에서 풀과 가지가 돋아나고, 그 위에 이파리나 꽃이 피었다. 이어 시카의 핵에서 빛이 넘치더니 흘러내려 바닥에 고였다. 그것들은 이윽고 두 사람의 아래에서 빛무리를 이루며 퍼졌다. 고운 가루 입자 같은 빛들이 뭉쳐 결정이 된 순간…….
──콱!
결정이 길게 자라나 고정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보석들은 시카와 이소영의 주위를 감싸듯, 가로막듯, 격리하듯, 하나의 막대기로 변해 온갖 방향으로 자라나고, 꽂히고, 고정되었다.
수없이 가로질러진 선이 무언가 도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선의 중심에서 실체를 가진 이소영은 전체적인 형상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선은 때때로 시카의 몸에서 자라나 고정되거나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 선들만은 기이할 정도로 멸망에 파괴되지 않았다.
“……!”
그럴 만도 했다. 이소영은 필요한 힘을 소환하고 또 소환하며,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언령을 되뇌고 읊조리며 경악했다.
주위를 수놓은 선은 전부 시카와 아스트랄의 생명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것이 사라지는 때는 시카가 죽었을 때다.
생명의 선이 세계에 새로운 경계를 긋고, 어딘가에 있는 시카의 깃발이 멸망의 영역을 한순간 뒤흔들었다.
이소영의 멸망도 또 한 번 깊어졌다. 점점 강대해지는 최인성의 힘에 소환한 그림자가 공명한 덕이 컸다.
멸망과 마녀의 영역이 또 한 번 교차했다. 부딪친 여파로 분산된 힘들이 새로운 공간에 자신의 힘을 전염시켜 두 사람의 영역은 계속해서 넓어졌다.
이소영의 왼손은 어느새 시카의 오른손과 마주보고 있었다. 미는 만큼 밀려오는 힘이 이소영의 온몸을 상처 입혔다. 마찬가지로 시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망할…….”
이소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 기회는 놓친 걸까.’
시카가 멸망을 밀어냄에 따라 이소영의 근원을 붙잡던 멸망이 조금씩 생기에 융화되었다.
‘대체 얼마나 부딪쳐야 승패가 나는 거지? 이러다 제한 시간을 넘기는 게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던 불안감이 한순간 이소영의 가슴을 스쳤다. 직후 이소영은 마력이 부딪친 곳에서 느껴진 통증에 제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직이야. 아직 더 깊어질 수 있을 거야! 더, 더─!’
그런 이소영의 마음을 느꼈는지 시카가 또 한 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번엔 시카의 손에서 아스트랄의 일부와 시카의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선이 조형되었다. 생겨난 선과 선은 교차하면서 합쳐져 굽이 진 도형이 되기도 했는데, 이번 선은 지금까지보다 특수한지 완성되기 전부터 몇 번이나 굽어 있었다.
새로운 경계선이 길을 그리며 퍼졌다. 이소영이 그 선을 향해 움직임을 제어하는 기술을 썼을 때였다.
그들이 있는 자연의 심연에 누군가가 진입했다.
“…아!”
테온과 루카였다.
테온의 대지가 루카를 자연의 가호로 보조 및 보호했고, 루카는 자신들을 짓누르는 자연의 힘을 봉인하며 길을 억지로 열어 젖혔다.
“테온은 그럭저럭 자연이 몸에 익은 모양이지만, 루카는 꽤나 무리하고 있는 모양이네. 자연 감응력이 부족한 탓에 밀려드는 압박을 죄다 마법으로 밀어 내고 있으니. 저것도 나름대로 자연과 교감하는 거라면 하는 거지만…….”
“역시 루카 서장님이야! 멋있어!”
“미련한 게 아니라?”
“흥! 이 광대한 자연의 힘을 마력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는 마법사가 몇 명이나 된다고?”
“하긴……그녀의 신념은 높게 쳐줄만 해. 이번 세대의 인간들은 모두 고귀하게 피어났구나.”
시카의 눈빛이 한순간 회의적인 감정에 물들었다. 시카가 아는 인간은 저렇지 않았으니까.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게 인간이었다. 그러나 마녀들이 가한 절망은 모순적이게도 인간들의 희생적이고 상냥하고 고귀한 신념을 갈고 닦았다.
“아하하, 맞아. 루카 서장님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야.”
이소영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생기 있게 반짝였다. 시카가 발한 행성의 생명력과 이소영이 발한 멸망의 바람이 자연의 심연의 끄트머리까지 닿았다.
이소영은 몸을 좀 더 숙여 자신의 근원을 시카의 근원에 가까이하며 검에 더한 의지를 실었다. 테온이 심연에 진입한 덕에 주위의 힘을 자신의 환경으로 삼는 대지마법과 환경마법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시카가 만든 선 수십 개가 한순간 멸망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윽…….”
“이제…….”
멸망은 곧 시카의 생명에 닿을 것이다.
이소영을 지원하기 위해 동료가 무리하며 심연까지 밀고 들어왔다. 시카와 이소영이 발한 힘 때문에 합류하는 건 무리겠지만, 마법은 빌릴 수 있다.
─그런 생각에 이소영이 무심코 방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카가 감추고 또 감춘 마지막 한 수가 적중한 것일까.
「소영 님!」
푹!
시카와 보다 깊이 부딪치기 위해 이소영은 그림자에 이어 인간의 실체 역시 반쯤 되찾은 상태였다. 공격을 위해 손을 마주 부딪친 순간부터 이소영의 실체는 시카의 힘에 이끌려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소영과 마주보지 않은 시카의 왼손이 이소영의 등에 닿았고, 그 손에서 아스트랄과 시카의 근원으로 이루어진 자줏빛 창이 생겨나 이소영을 관통했다.
멸망조차 가볍게 꿰뚫는 그 창을 막을 시간은 없었고, 그렇기에 막을 방법도 없었다. 이소영의 가슴을 관통한 창은 순식간에 길어져 시카의 몸까지 관통했다.
“아……!”
시카의 근원과 우주의 광대한 힘, 정령들의 근원과 힘이 합쳐진 무시무시한 무기. 화살의 몇백 배나 되는 관통력은 그렇다 치고, 이 힘은 시카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무기였다. 자연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틀림없다.
“……─.”
시카에게 무언가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순식간에 의식이 멍해졌다.
실체를 가졌던 이소영의 몸이 서서히 흩어진다. 이소영만이 아니라 시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육체가 행성의 잔해처럼 변해 흩어졌다. 몸을 감싼 식물들이 떨어져나가고, 살갗은 흙으로 변해 흩어지고, 가슴 안에는 핵이…….
“나는 인간이 싫어. 하지만 어린 아이야, 다행히 네 힘은 함께하기 기껍더라.”
“이…….”
“어린만큼 순수한 것도 나쁘지 않아. 자, 순환할 시간이야.”
손가락부터 머리카락, 팔다리, 몸통, 머리……. 두 사람의 모든 것이 분해되는 것처럼 흩어져 우주에 녹아들었다. 두터운 대기와 생명력 넘치는 대지가 함께였기에 흩어지는 자연은 필연적으로 행성의 활기를 구현했다.
흩어지는 이소영과 시카의 가슴에서 핵이 장대하게 빛을 발했다. 창에 꿰뚫린 핵에서 곧……힘이 넘쳐흘렀다.
바람이, 행성의 자연이 폭발하듯 주위에 넘쳐흘렀다. 활기 넘치는 움직임에 이끌려 심연에 존재하는 모든 멸망이 순식간에 생명의 바람으로 순환했다.
이소영과 시카가 있는 곳은 자연의 심연이자, 시카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하나의 세계이며, 공간이며, 영역이다.
자연의 심연이 이소영과 시카의 힘으로 가득차자 시카가 구축한 세계가 입력된 시스템을 따라 움직였다. 자연의 힘과 마력이 세계 안에서 뒤섞였고…….
──닫혔다.
시카의 우주는 자연의 힘과 마력이 가득 찬 상태로 닫혀,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변했다.
대마법의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이 한데 녹아버린 세계 안에서 하나하나의 생명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이 순간 시카의 우주 안에 있는 존재는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시카의 영역은 트라베리아가 지배하는 어느 영역보다도 넓고 자유로웠다. 엘리시아가 만든 장미 세상 안에 선명하고 다채로운 길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공간마저 베어 가르는 벨라의 분별없는 칼날과 베어지고 나서도 정교함을 자랑하는 내 마법. 우리는 원하는 장소를 선택하지 못하고 우연의 결과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칼날이 한 번 날아갈 때마다,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마법을 방출할 때마다 장소가 달라졌다.
수십 번의 밀고 당기기 끝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처음에 벨라가 서 있던 혼돈의 중심에 내려섰다.
부유섬으로 이루어진 이 혼돈의 차원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장소. 바닥에는 새까만 늪이 늘러 붙어 있고, 사방은 뾰족한 돌산으로 틀어 막힌, 풀 한 포기 없는 황폐한 땅이다.
그래, 결국 여기에 도달하게 될 것은 알고 있었지. 벨라의 날카로운 마력이 감지능력을 방해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약간의 고통을 감수하면 읽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도 이곳이 쉽게 공간 이동을 할 수 없는 장소라는 건, 영역의 모든 마력이 이곳에 고이고 있다는 건 그냥 흘끗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부딪치며 여기까지 온 게 영 소용없는 일은 아니다. 영역 안에서 벨라의 마력 농도가 어떤지 시험해볼 수 있었던 데다, 별도 얼추 퍼트렸으니.
벨라가 마음을 담고 직접 세운 칼날이 아니라면 내 별은 이 혼돈의 세계에 쌓인 벨라의 질척질척하고 날카로운 마력을 먹을 수 있다. 정화할 수 있다.
“어서와, 내 정원에!”
“…….”
환영 인사 대신으로 날아온 공격을 지팡이로 튕겨내며 나는 벨라를 노려보았다. 벨라는 내게서 흘러나온 새벽의 이면이 자신에게 저주를 내리는 걸 느끼면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리낌 하나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드디어, 드디어 저 여자를 죽일 날이 왔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스터, 괜찮습니다.」
‘그럼…물론이지.’
「마스터는 이길 겁니다. 비로소 이길 확률을 붙잡았습니다.」
나는 지난 싸움을 되새기며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령 오늘 가장 증오스러운 자를 죽일 것이란 생각에 흥분했다 해도, 저 여자가 나의 세계를 파괴한 장면을 떠올렸다 해도, 설령, 주위에 깔린 힘들 속에 피로 젖어 일그러진 영혼들이 무수히 많이 스며들어 있다 할지라도…!
벨라를 갉아내기 위해 새벽의 이면에 힘껏 감정을 토해 내더라도, 이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 나는 언제든 그럴 수 있는 마법사다.
냉정하게 대처하지 않고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싸움이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였건만, 아직도 나는 그녀보다 한 수 아래다.
“이곳의 혼돈은…….”
“보시다시피.”
벨라가 낫 끄트머리로 새까만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바닥의 늪이 부글부글 끓었다. 벨라의 뒤에 세워진 거대한 역십자가 조각이 벨라의 마력에 공명했다.
“내 마력이랑 내가 흡수한 마력이랑 죽은 마법과 영혼의 찌꺼기랑……하여간 이것저것 섞인 거야! 난 세세한 건 몰라. 그런 건 네 눈으로 알아서 파악하라고!”
끓어 솟아오르는 늪을 낫에 두르며 벨라가 다시 한 번 낫을 휘둘렀다. 나는 날아오는 칼날에 지팡이를 부딪쳤다. 지팡이에 서린 나의 살의가 벨라의 칼날을 부식시키고,
콰득!
지팡이에서 나온 별뭉치가 벨라의 칼날을 잡아 삼켰다.
그러나 벨라가 노린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동안 칼날은 공간을 쭉 갈랐고, 공간의 틈새에서 바닥에 깔린 기분 나쁜 것들과 꼭 닮은 마력이 쏟아졌다. 그렇게 주위는 죽음의 마력에 뒤덮여 온통 새까매졌다.
나는 쯧 혀를 찼다.
“당신이 전장을 고를 때도 있군요.”
“꺄하하하! 당연하지. 나도 가끔은 분위기에 맞춘다고!”
벨라는 이번엔 달려왔다. 새까만 낫과 꿈의 오라를 두른 지팡이가 부딪쳤다.
“너, 무기로 공격하는 기술은 부족한데 막는 기술은 제법 뛰어나구나.”
벨라는 평소와 달리 낫을 깊게 짓누르지 않고 짧게 연속해서 휘두르는 전법을 취했다. 지팡이에 부딪치자마자 낫을 다시 뒤로 빼 휘두르는 것이 내 방어 실력을 시험해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우며 지팡이의 각도를 계속해서 바꿨다. 가슴에 품은 『책』덕에 벨라의 영역에서도 벨라의 공격이 제대로 보였다.
“분명 네 친구랑 많이 연습했겠지? 왜, 이성진의 싸우는 방식이 나랑 조금 닮았잖아!”
나는 다시 한 번 지팡이의 각도를 바꾸며 이면의 살기를 방출했다.
악몽을 끌어안은 새벽의 오라가 벨라의 마력과 몸을 집어삼켰다. 뒤로 조금 물러난 벨라는 별하늘을 담은 마력이 살을 파먹기 전에 몸에서 사슬과 칼날을 방출해 내 오라를 단숨에 잘라냈다.
“널 처음 봤던 건 우리 실험장에 남은 기록을 통해서였지.”
“…….”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어. 머리색이 많이 어두워졌네. 어둠에 물든 것처럼. 눈동자는 밝아졌어. 분노에 타오르는 것처럼. 그리고……처음 부딪쳤을 때와 비교해 머리카락이 자랐구나.”
“그게 왜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차림새를 많이 신경 쓴 것 같다? 특히 머리 모양. 네 나름대로 심기일전 한 거니?”
시답잖아 보여도 나름대로 의미를 담은 행동이었기에 그 말은 내 가슴을 찔렀다.
평소엔 풀거나 묶었던 머리카락을 조금 땋아 틀어 올려 반 머리로 묶었다. 이 머리 모양은 벨라에게 모든 것을 잃었을 때……참극 날 축제 때 했던 머리 모양이었다.
성진이는 옷을 갖춰 입는 게 집중력을 높이고 마력을 향상시키는 의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세트로 맞춘 옷차림도, 이 머리 모양도, 악몽을 되새기고 악몽을 끝내기 위한 나름의 의식이었다.
벨라가 낫으로 바닥을 찍었다. 바닥의 늪이 좀 더 피에 가까운 색으로 물들며 벨라의 낫에 흡수됐다.
“킥킥, 전부 네가 자랐다는 증거지. 하지만, 그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고작 머리카락이 조금 자랄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네.”
“…….”
“내 운명을 결정할 최후의 호적수야. 상냥함을 버리지 못한 채, 그러나 이전의 네가 취하기엔 더러운 수단까지 써서 내 앞에 섰으니, 나를 즐겁게 해준 너를 위해서도 나 역시 최강의 힘을 갖추고 대응해야 하지 않겠니?”
“…….”
“그런 나에게 너는 온 힘을 다해 부딪쳐 주겠지? 응~?”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질척거리는 늪을 발로 쿵 굴렀다.
나는 날카로운 힘에 상처 입으면서도 바닥에 고인 벨라의 혼돈을 내 별인 것처럼 주위에 둘렀다. 머리에 쓴 왕관이 핏물 같은 마력을 흡수하며 평소와 달리 스산한 빛을 뿌렸다.
“『악몽의 지배자』.”
『특수 기술─은하의 지배자
벨라 트리저가 눈앞에 있을 때 한하여 ‘지배자’의 이름을 바로 칭할 수 있다. 의 유일한 진화 버전. 가장 지독한 악몽과 대치했을 때에 한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상대를 죽일 때까지 지속된다.』
내가 지배자로 진화할 수 있는 건 본래 내게서 나온 별들이 어느 정도 주위를 장악한 후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지난 세월을, 를 통해 바로 지배자로 진화했다.
기술의 설명에 적혀 있는『악몽』은 벨라.
참극이 일어난 이후 우리의 삶은 말 그대로 악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의 원인이 지금 눈앞에 있다.
나는 비로소 꾹꾹 눌러 삼키던 모든 살의를 터트려 눈앞에 있는 『악몽』을 죽일 것이다. 그리하여『악몽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화르륵!
나는 책에 내 기술은 물론이고 내가 아는 벨라의 기술도 전부 썼다. 그게 지금 내가 벨라의 영역에서 그녀의 기술을 평소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살의로 넘치는 새벽의 오라가 나를 중심으로 퍼졌다. 퍼진 오라가 나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결코 손에 닿지 않을 것 같던 벨라의 마력에도 그 지배력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아하!”
주위의 마력이 내 마력에 동조하여 별빛으로 변했다. 우리를 둘러싼 늪은 벨라가 직접 죽여 흡수한 피에서 비롯됐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동료다. 늪에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의 피도 섞여 있을 것이다.
기나긴 밤이 끝나면, 악몽이 끝나면 아침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밤과 아침 사이에 생겨나는 새벽은 악몽을 정화한다. 산산조각 낸다.
악몽이 정화되며 만들어진 악몽의 파편이 내 지팡이와, 왕관과, 왕관 밑으로 흘러내린 별의 베일에 들러붙었다.
『별들의 잔치』
무리를 이룬 별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악몽을 정화하며 별의 영역을 넓혔다. 드문드문 내 꿈속세계가 구현되었다. 살의를 삼킨 어둡고 섬뜩한 바다, 검게 타오르는 꽃, 일그러진 하늘.
악몽의 파편 일부가 불꽃같은 오라를 두른 고래와 물고기 무리로 변했다.
『별의 고래』 『별의 물고기 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