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89
…그 사실이 무섭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여 나는 결국 웃었다. 이를 악물며 웃었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악몽의 조각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순간, 소리 없이, 전조 없이 그어진 수십 수 백 개의 하얀 선이 악몽을 찢었다. 악몽의 꿈을 통해 벨라의 칼날을 재구성한 마법인 만큼 빨랐다.
“꺄핫, 웬일로 빠르잖아!”
하지만 속도의 주인인 벨라가 이 속도를 쫓지 못할 리는 없다. 벨라는 세계에 녹아 있는 어둠을 이끌며 낫을 휘둘렀다. 하얀 칼날과 검은 칼날이 부딪치며 상쇄 된다. 다만 이 기술은 벨라보다는 허공에 남겨진 피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발한 힘이었다.
하얀 칼날은 부딪치며, 깨부숴지며, 혹은 상쇄된 파편을 이용해 피의 상처를 녹였다. 문이는 악몽의 파편을 최대한 많이 흡수하여 ‘악몽의 두 번째 조각’을 조금씩 완성시켰다.
벨라가 낫을 그었다.
긋고 또 그었다.
어떤 칼날은 상처로 끝났고, 어떤 것은 전심전력으로 나를 베려 들었다.
나는 진화를 위한 서포트를 문이에게 맡기고서 벨라의 공격을 방어하고 느끼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벨라의 마법이 강한 이유는 벤다는 일념만으로 지새운 몇 백 년 간의 시간에 있다. 그걸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해 나는 몇 년 간 누구도 죽이지 않고 살의를 쌓아왔다. 살의는 꿈속에 가라앉아 『새벽의 이면』으로 변하여, 지금 나와 문이의 손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부딪치고 상쇄되는 수 천 개의 파편. 그 사이 문이는 상처와 혼돈을 잡아먹을 뿐 아니라 은하수와 물고기무리를 뿌려 별의 갯수를 늘리고, 스크린이나 페이지를 재배치해 방어선을 두텁게 만들었다.
“꺄하하하! 재미있네…. 이거 내 마법을 이용해 만든 칼날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대답할 틈이 없었다. 벨라의 마법은 너무 빨라 나 혼자서는 공격에 대응하는 데만도 벅차다. 마법을 정리하고 준비할 틈이 모자랐다. 문이에게서 『악몽의 파편』을 이용한 새로운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알람이 왔다.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문이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또 한 번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다.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엔 너무 쉽게 하얀 칼날이 베어졌다.
“그런데 설마 계속 내 칼날로 싸울 생각은 아니지?”
“…….”
“내 칼날을 네가 나보다 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거기다 이것들 내가 죽였던 놈들의 무언가가 섞여 있는 칼날이잖아? 킥, 둔한 주제에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야, 내가 마력에는 둔해도 손맛에는 민감하거든? 직접 벤 적 있는 건 바로 감이 와. 물건이든 사람이든 영혼이든 전~부 베는 맛이 다르거든.”
마력 감지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육체 기술과 관련된 감각은 민감하다 이건가. 무기술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답다면야 답지만.
“재미있긴 한데 조금 섭섭하다. 설마 내가 한 번 죽였던 놈한테 질 거라고 생각해?”
벨라의 마력과 그림자가 폭풍으로 변해 휘몰아쳤다.
“알아, 알아. 다양하게 시험해 보는 거겠지. 너는 나랑 달리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그건 좀 부럽네!”
칼날의 폭풍으로 내 하얀 칼날들을 부순 벨라가 나를 향해 달려오며 낫을 휘둘렀다.
『디멘션 박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겹겹이 내 주위를 둘러싼 스크린이 벨라의 낫을 막았다. 벨라의 낫 주위가 뭉그러지며 피의 상처가 새겨졌다.
“…『눈물』, 『피』, 『마음』.”
그러나 스크린을 베며 상처를 그리던 칼날은 허공에서 뚝 멈췄다. 준비한 기술을 외치면서도 마음속에는 울분이 가능했다. 부서진 하얀 칼날 파편이 악몽의 조각을 끌어 모으며 순식간에 팽창했다.
“『새벽의 비명!!!』”
벨라를 막은 모든 스크린이 살의를 드러내며 벨라를 덮쳤다. 악몽이 정화되며 자리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생겨났다.
“아하! 이번엔 제법 강한데?”
그러나 어떤 공격이든 벨라의 낫에 의해 결국 베이고 마는 것이다. 피의 상처가 기둥을 두껍게 도려냈다.
피의 상처의 요지는 평소처럼 완전히 절단 나 부러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벨라는 뒤로 갈수록 상처자국이 깊게 남도록 하고, 끝부분은 칼날을 완전히 관통시켜 버렸다. 그 탓에『새벽의 비명』은 물론 스크린 무리와 내 몸에 덮어씌워진 문이의 홀로그램에도 상처가 났다.
“아~, 아깝다. 네 몸에 새겨진 상처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나는 벨라의 마력 사이사이에 내려앉은 별 조각에 의식을 연결했다. 열쇠를 통해 그곳에 마력을 연결한 다음 얼음꽃을 피웠다. 곳곳에서 얼음이 줄기줄기 자라났다.
“『아르쿠벨리스』.”
“꺄하하! 용케 이렇게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단 말이야!”
“『성신의 검!』”
“난 하나 생각해 내는 데만도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하긴, 넌 네가 쓴 소설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했던가?”
“『허무의 괴물 레베티온!』”
“그런데, 은하야.”
떠오르는 대로 마법을 내질렀다. 어떤 힘은 피의 상처를 침식했고, 어떤 힘은 벨라의 마력을 둘러싸는 울타리가 되었으며, 어떤 힘은 날아가 벨라를 향해 꽂혔다. 벨라가 기이할 정도로 다정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화났어?”
“…….”
나는 말없이 마법을 이었다. 모든 것을 얼리는 얼음에 악몽을 베는 성신의 검, 무속성마법을 사용해 마법을 지워 없애는 허무의 레베티온, 세 마법은 벨라의 영역을 꽤나 잡아먹었다.
……그 순간 잠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직후 마법이 벨라의 상처에 뒤덮이고 칼날에 갈기갈기 잘려 그 감각마저 지워지고 말았지만.
“하하! 질문이 이상했네! 너는 언제나 나한테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부터 평소보다 공격에 울분이 담긴 느낌이다~? 감정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꿈장인이 웬일이래!”
──그래, 나는 분노하고 있다.
도발도 아닌 평범하게 건넨 벨라의 말에 분노하고 말았다.
‘설마 내가 한 번 죽였던 놈한테 질 거라고 생각해?’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았는지 벨라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하하! 역시 화났구나!”
“벨라 트리저, 당신은 실감하게 될 거예요.”
“뭘?”
“당신을 죽인 자들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아아~!”
벨라는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참 웃긴다. 내 성격을 알면서 뭘 갑자기 그런 거에 화내고 그래. 평소엔 차가운 얼굴로 감정의 티끌 하나 안 내줄 것처럼 굴더니. 마지막이란 생각에 솔직해 진 거야?”
“…….”
나는 말없이 마력을 움직였다. 반 정도 부서진 성신의 검 주위에 악몽을 베는 칼날을 일부 모았다. 허무, 얼음, 관리자의 검, 악몽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해 냈다.
문득 합동 기술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요정과 춤을』에서 설정만 해두고 나오지 않은 요정이 있다.
이야기가 내게 찾아오는 방식은 다양하다. 오랫동안 고뇌해 만든 설정에 한순간 찾아온 아이디어가 합쳐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떠오른 장면을 위해 디테일을 설정하며 달릴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언제나 같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의 ‘다음 순간’이 생각나면 나의 모든 의식은 새로운 이야기를 다듬기 위해 움직인다.
그 집중력이 꿈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별에 닿은 모든 악몽이 은하수로, 꿈의 안개로 변해 내 마법을 향해 몰려들었다.
“오! 신기한 기분이야…. 이상하게 기분이 들뜬다?”
벨라가 곳곳에 새긴 상처가 무수히 많은 별똥별에 부딪쳐 조각조각 났다. 방어를 문이에게 맡기고 나는 새로운 상상에 집중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 떠오른 말을 직접 적었다.
가장 높은 만년설에 사는 요정. 설산의 숨은 지배자이며 설산의 날씨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만년설에 사는 거신들과 친하다. 참고로 만년설에 사는 거신들의 왕이 바로 미영 할머니와 선아 아줌마의 마법을 상징하는『아르쿠벨리스』였다.
극지의 산에 사는 이 요정은 즐거울 때만 오로라를 펼친다. 오로라는 하늘의 자연 현상이며 하늘에 비치는 우주의 어둠은 허무와 가까운 힘이니…….
설산의 요정은 눈으로 만든 지팡이를 사용해 적을 지워 버린다.
『겨울의 수호자 폴라리스.』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 나의 상상을 보다 완벽하게 내 세계에 구현했다. 문장을 마치고 고개를 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거칠게 헤매던 마력들이 한순간에 선명해졌다. 지팡이를 쥔 새하얗고 커다란 요정이 만년설의 거신들을 거느리고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무시무시하게 팽창한 별무리가 벨라의 마력까지 잡아먹으며 요정의 주위에 설산과 눈보라를 구현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오랜만에 떠올랐어. 쓰고 싶은 게 있을 땐 항상 이랬지.’
쓰고 싶은 게 생각났을 때 나는 그 장면을 모두 담아 낼 때까지 글을 멈추지 못하고 몰두했다. 머릿속에만 있는 장면을 글로 묘사하는 게 즐겁고 그것에 사람들이 반응해 주는 게 기뻐서 소설을 쓰는 걸 좋아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엔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알고 있었지만, 내 마법의 본질은 언제고 상상이구나.
세계가 한 번 부서진 이후 나는 순수한 목적으로 글을 쓴 적이 없었다. 적 앞에서 구현한 상상은 대부분 미리 만들어 둔 마법이거나 그 응용이었다.
「──….」
고대얼음마법을 모태로 했기 때문에 요정의 얼굴은 선아 아줌마를 많이 닮아 있었다. 지팡이를 따라 흘러간 진홍색 불꽃은 스승님의 마력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오로라는 민희의 마력과 닮았다.
“─아, 깜짝이야.”
쏟아지는 눈사태와 오로라가 길게 베였다. 내 꿈을 고조시키던 고요함이 깨졌다.
날카로운 단면에서 평소보다 짙은 분노가 읽혔다. 벨라가 평소와는 달리 가라앉은 차분한 어조로 내뱉었다.
“알지 모르겠는데, 유은하, 난 설산은 별로야. 진짜……기분 나빠.”
이번엔 벨라의 힘이 강해졌다. 벨라의 발밑에서 일어난 늪이, 벨라를 둘러싼 마력이 폭풍을 이루며 나의 세계에 피보라를 퍼부었다.
“아하, 모르나? 모르려나? 쟤의 분위기가 좀 누구랑 닮았거든.”
“……?”
「폴리젠의 마녀를 떠올린 모양입니다.」
폴리젠, 설산에 사는 겨울의 마녀 일족.
트라베리아 입장에서 폴리젠은 배신자였다. 같은 마녀가 죽어가는 것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명목 하에 묵인했던 일족.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이제는 없는 폴리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영 할머니는 사랑의 도피를 한 부모님을 따라 폴리젠의 살기 어린 추적에서 오랜 시간 도망쳐 다녔으니까.
당연히 선아 아줌마도 폴리젠을 아주 싫어한다.
벨라의 낫과 폴라리스의 지팡이가 부딪치며 또 한 번 세계가 일그러졌다. 벨라는 내가 평소보다 감정에 솔직하다고 말했지만, 그러는 벨라 역시 평소보다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광기에 넘치는 미소나 대사 탓에 눈에 띄진 않지만 벨라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어느 정도 묻어두는 편이었다.
폴라리스의 몸이 갈기갈기 베였다. 조금 전의 집중력과는 별개로 폴라리스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마법이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함께 한 다른 마법과 달리 과거의 짧은 설정을 가지고 지금 막 구현한 마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폴라리스의 눈보라에 나의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담았다. 눈보라가 벨라의 칼날을 조금씩 얼렸고, 얼어붙어 정화된 악몽의 조각이 폴라리스의 지팡이에 채워졌다.
“얼음 거신! 그놈들 중에도 그런 걸 거느리는 놈이 있었어! 킥킥, 그래도 얼굴을 보니 누굴 위해 만든 힘인지 알겠다. 우연이든 일부로든, 말을 되로 갚은 셈이네! 웃긴다, 진짜!”
“시끄러워요.”
“너무한걸~?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당신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꺄하하하하!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데!”
벨라의 마력을 얼려 만든 조각에서 새로이 『악몽을 베는 검』이 생성되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얼음 검이 이전부터 묘비를 이루던 다른 검과 함께 세계 곳곳에 떨어져 내렸다.
“인간을 장난감처럼 보는 여자가 무슨…….”
“너는 그중에서 가장 신박한 장난감이잖니. 맘에 드는 장난감한텐 이름도 붙이고 그러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역시 저 여자와 말을 섞어봤자 내 정신 건강만 나빠진다.
짜증을 눌러 참으며 폴라리스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막 만들어 낸 기술이라고는 하나 본래 자주 생각하던 이들의 모습과 자주 사용하던 기술을 합친 합동 기술인만큼 위력이 상당하다. 『북극성(성신)의 지팡이』에 악몽이 다 차면 지배자의 기술을 한 단계 이상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쿵…!
그때 늪을 헤매는 것 같은 막막한 감각이 나를 둘러싸는 게 느껴져 가슴을 부여잡았다.
“오,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 네가 마력을 너무 정교하게 제어해서 그런가봐.”
나는 눈이 아픈 것을 무시하며 최대한 멀리까지 살폈다. 이 감각은 혼돈의 차원에 쌓인 힘이 강해짐에 따라 내 영역의 지배력이 약해져서 생겨난 반동이었다.
‘원인, 아니, 계기, 는….’
「확인하였습니다.」
스크린이 벨라의 마력으로부터 내 시력과 정신을 보호했다. 그럼에도 머리가 아픈 나대신 문이가 내가 본 마력 양상을 정리했다.
「내부와 외부의 마력에 연동하여 영역이 진화한 모양입니다.」
‘외부의 요인은…….’
「혼돈의 차원과 가까운, 다른 장미꽃에 비해 커다란 영혼의 장미꽃이 피면서 영역 안으로 명계의 마력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혼돈의 차원은 다른 차원보다 명계의 이치에 깊게 얽혀 있는 모양이다.
바깥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장미꽃보다는 훨씬 작지만 주위를 메운 여타 장미꽃보다는 커다란 어느 투명한 장미꽃이 혼돈의 검은색으로 피어난 순간, 벨라의 손등에도 장미꽃이 피어났다.
그러자 벨라의 마력이 영역 및 바깥의 장미꽃과 공명하며 증폭되었고, ‘피의 상처’의 제약과 장미꽃의 힘이 이 혼돈의 영역을 진화시켰다. 그와 함께 벨라의 마력이 다시 한 번 증폭됐다.
묵직하고 질척한 혼돈이 나의 영역을 억죄며 벨라의 마력을 통해 내 영역 안으로 침범했다. 풍경이 또 한 번 질척질척하게 섞였다.
벨라는 손에 핀 장미꽃을 자랑하듯 내게 보였다.
“꺄하하하, 예쁘게 피었네.”
“후…….”
오로라와 겨울의 냉기가 주위의 새벽에 섞여들어 온 혼돈을 허무로 이끌거나 동결시켰다. 벨라의 왼손에서 시작된 장미는 덩굴을 이루며 벨라의 어깨를 휘감고 낫을 장식했다. 엘리시아의 장미꽃 위에 키스하며 벨라는 내게 진득한 눈길을 보냈다.
“너무 치사하게 생각하진 마. 너를 진심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니까.”
명계의 힘이 가라앉자 이번엔 벨라의 가슴에서 ‘제약의 사슬’이 튀어나와 벨라의 몸을 휘감고 혼돈의 세계에 연결되었다.
그럼, 그렇고말고. 죽고 죽이는 이 싸움에 정정당당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는 쪽이 이기는 거다.
벨라도 나도 그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시절을 딛고 여기에 섰다.
“뭐, 그것 뿐만은 아니고, 엘리에겐 내 힘이, 내겐 엘리의 힘이 필요하거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어.”
나와 문이는 밀려드는 악몽과 혼돈의 힘을 얼리고 흡수하며 점점 가속하는 이 세계의 진화에 대응할 방법을 고심했다. 벨라는 피의 상처로 이미 필요한 만큼의 힘을 충전한 듯하다. 곧 저 사슬과 심장은 지금까지 쌓아둔 살기를 개방할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아직 부족하다. 악몽의 조각을 첫 단계밖에 모으지 못했으며, 만들어 낸 영역도 혼돈의 진화에 휩쓸렸다.
나는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은하의 지팡이』를 꽉 쥐었다. 팔락팔락 흩어졌던 페이지가 벨라의 마력에 젖어 내 안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쓸 만한 수는…….’
우우웅…….
……그런데 『별의 영역』을 불러내기 위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별무리를 의식한 순간, 겨울의 수호자가 쥔 성신의 지팡이가 주위의 혼돈에 공명했다. 그것도 한순간 주위가 투명하게 비쳐 보일 정도로 아주 깊게 공명했다.
‘악몽의 조각 때문…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이건…!’
공명으로 인해 성신의 지팡이 안에 빠르게 악몽이 차올랐다. 나는 손을 뻗어 『성신의 지팡이』를 쥐었다. 『겨울의 수호자』와 내 몸이 합쳐졌다.
시린 겨울 사이로 낯익은 죽음이 느껴졌다. 내가 가진 기억과 공명하는 죽음…….
내가 가졌던 모든 것과 공명하는 죽음…….
시린 얼음 조각이, 허무의 탄환 조각이, 그 힘들을 연결하는 열을 지닌 보석 조각이 꿈속에서 빛을 밝혔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한순간 시야가 번졌다.
──죽어도 잊을 소냐. 이 익숙한 죽음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최소한 그들의 영혼을 내 손으로 보내주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다.
“『기억을 열어젖혀라, 별의 영역!!!』”
영역의 진화는 일점을 넘어섰는지 조금 기세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밀려들어 거칠게 몰아치는 힘이 진정되어 영역이 최대의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혼돈의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겨울이 한데 모여 이차원의 출입구로 변했다. 혼돈이란 벽을 길게 깨트리듯 나타난 틈새 주위로 별가루가 입혀진 얼음 조각이 반짝거렸다. 길고 고요하게 춤추는 그 모습은 은하수를 꼭 닮았다.
영역을 이루는 별에 담긴 것은 나의 소중한 추억. 틈새에서 계속 별이 쏟아져 나오며, 흘러나온 별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발했다. 기억의 공명이 강해지며 혼돈 속에 묻혀 있던 그리운 죽음이 조금 더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운 죽음을 시작으로 다양한 죽음이, 악몽의 사념이 내게 공명해 빛을 보냈다. 벨라의 그림자 깊숙한 곳에 있는 꿈을 바로 내 꿈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공명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악몽을 조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팡이의 열쇠를 비틀어 단숨에 가까이 있는 사념들을 끌어 모았다. 얼음에 닿은 혼돈이 죄다 얼음으로 변했다. 깊고 질척한 수렁 속에서 은하수를 두른 은색 얼음 클러스터가 생겨났다.
빠직, 콱!
그러나 얼음은 곧 휘몰아치는 칼날에 깎여나갔다. 칼날이 주위를 베고 또 베고, 칼날들이 합쳐져 폭풍이 되고.
칼날로 인해 세계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새겨지고, 무수히 많은 피의 상처가 하나의 면으로 합쳐져 공간을 가두는 울퉁불퉁한 막(膜)을 이루고,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칼날의 폭풍과 합쳐져 혼돈이라는 수렁으로 변하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부딪쳤다. 무수히 많은 피의 상처와 별조각이 서로에게 저주를 내렸다. 벨라의 마법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고, 나의 꿈은 베여 나갔다가 악몽을 먹고 재생했다.
악몽에 의해 몇 번이고 밀려나면서도 나는 목표를 정확히 겨눴다. 이 혼돈의 죽음에 섞인 내 부서진 세계의 파편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이 내 꿈과 영혼을 이끌었다.
『여, 무수히 많은 꿈과 길을 연결해라.』
문이가 허공에 문장을 적었고, 그에 맞춰 나도 정리되지 않은 언령을 외쳤다.
“『기억』, 『꿈』, 『절망』, 『눈물』, 『빛』.”
『죽음에 파묻혀 잊힐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이곳에 있으니,』
“『…그래도 절망하지 않기를. 부디 나를 알아……보지 못하길.』”
『영혼이여, 새벽의 빛을 삼켜라.』
“『잠들어 있는 채로 괜찮아. 미안해요. 곧 끝낼 테니 잠깐만 내 목소리에 공명해 줘요. …고마워요.』”
이전 벨라가 제 그림자를 열어 보여 주었던 영혼의 뭉치는 벨라의 살의에 갈기갈기 찢기고 뒤섞여 도저히 분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죽어 상대에게 흡수되면 마력은 당연하고 영혼 역시 정체성을 잃는다. 상대의 힘에 섞여 순환하는 순간 그건 이미 상대의 힘이다.
그 상태를 풀어 원래의 이치로 되돌릴 수 있는 게 정화의 힘이다.
언젠가 성진이가 말했다. 영혼은 마력과 달리 하나의 힘으로 섞여들기 어렵다고. 물들고 더럽혀져도 계기만 있다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작은 파편조차 그 정도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영혼을 무작정 흡수한 벨라의 광기가 그토록 지독한 것이라고…….
그걸 이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 몰랐다. 그걸 이용해 악몽을 흡수했다 할지라도, 설마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벨라의 안에서 그리운 영혼의 파편을 이토록 선명하게 볼 수 있을 줄은…….
“──『악몽의 100가지 검!』”
『악몽의 조각 진화 버전
』
진화한 혼돈의 영역에서 악몽을 삼키려면 악몽의 두 번째 조각을 완성시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벨라의 공격을 막다 결국 부서진 『겨울의 지팡이』의 파편이 오로라로 변해 내 꿈에 빛을 더했다.
은하수를 뿌리는 『별의 영역』에 문이의 언령이 덧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