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9
『정강이를 찬다. “미친 거 아냐?”←선택』
『나는 그 녀석의 정강이를 발을 힘껏 휘둘러 차 버렸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상당히 아픈가 보다.
“너 미친 거 아냐?”
“야, 이……!”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어?!”』
아오……!
근데 친구들은 재밌는 모양이다. 나만이 아니라 제현 오빠랑 천호 오빠, 어느새 들어온 은희 언니랑 성후 오빠까지 게임에 쏙 빠졌다. 친구들은 결국 그 루트로 엔딩까지 봤다. 안타깝게도 새드 엔딩이었다.
『“너 진짜 너무한다. 어떻게 그래? 내가 너랑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내가 너에게 한 말, 행동……그게 다 무의미한 거였어?”
“내가 널 어떻게 믿는데?”
우는 내 앞에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저 표정을 안다. 울음을 꾹 눌러 참고 있는 눈빛이다.
“나는 아무도 못 믿어. 알잖아. 그래도 널……좋아하긴 했다.”』
남자가 돌아서고, 여자와 헤어지고, 마지막에 여자가 그 남자를 서서히 잊어 가는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나는 감수성이 많은 편이라 새드 엔딩을 보면 우는 일이 허다한데, 그래도 내가 만든 거라서 그다지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게임을 주도하고 있는 인하와 민희는 담담한데 말이다, 참……. 한수가 몰래 고개를 돌린 채 훌쩍이고 현호가 울망울망한 눈에서 눈물을 잔뜩 쏟았다. 뒤에서도, 은희 언니와 천호 오빠가 눈가를 훔쳤다. ……난 봤다. 아닌 척하면서 성후 오빠가 눈가를 손가락으로 슥 닦는 걸. 어라라라, 결국 남자는 제현 오빠를 제외하곤 전멸인가.
반면, 민희는 해맑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굉장하다! 이거 이야기는 전부 은하가 만든 거랬지? 재밌었어! 그렇구나~. 연애는 이런 거구나…….”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어, 저기, 연애가 꼭 저렇게 복잡하고 가슴 아프고 그런 건 아니니까……. 저건 게임이라서 좀 과장한 거야.”
“그래?”
“그럼.”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를 거의 처음으로 접하는 아이들에게 이상한 인식을 심어 줄 수는 없지.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은희 언니가 푸후훗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은하도 참. 마치 해 본 것처럼 말하네.”
나는 그 순간 잠시 표정을 흐렸지만, 이내 배시시 웃었다.
“요즘 인터넷이든 드라마든 버라이어티 방송이든 뭐든 현실 연애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참 많잖아요. 게다가 전 책을 좋아하니까…….”
“하긴, 그런가?”
“네. 그러니까 저런 이야기를 쓰죠.”
“와……하지만 생각해 보니 대단하네. 저 시나리오를 네가 썼다고? 엄청 재미있던데……. 너 글쓰기 대회에서 단편 소설로 전국 대회 금상을 받았다며? 상금이 30만 원이라고 했던가?”
아, 그거…….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스승님과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시 대회에 이어 전국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고, 문학잡지에 이름이 실렸다. 방학하기 전까지 학교가 떠들썩할 정도였다. 타이밍 좋게 방학을 해서 참 다행이다. 상금 30만 원은 통장에다 고이 저금해 놨다. 가끔 깨서 용돈으로 쓸 생각이었다. 아마 책을 사는 용도로 쓰이지 않을까?
“글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하네……. 넌 이 길로 나가도 분명 성공할 거야.”
천호 오빠가 감탄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때때로 괴로웠지만 놀랄 정도로 충실하고 가슴이 꽉 차오르던 나날들. 나는 이미……소설가로서 성공했었다.
그 말은 무척 기뻤다. 마법이 지금의 내게 특별한 것이라면, 소설은 전생에도 지금에도 매우 특별한 것이니까. 나는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나를 보던 은희 언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모두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라졌다. 오빠들이나 언니는 왠지 놀란 표정이었고, 인하는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으며, 민희와 현호는 왠지 기뻐했고, 한수는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당황했다. 뭐지? 갑자기 왜 저러지?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슬금슬금 몸을 뺐다.
“저기,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나는 작게 말하고는 후다닥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방에서 어쩐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터졌다. 고개를 갸웃하며 복도를 걸어가던 나는 우연히 스승님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은하구나.”
스승님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잠시 이쪽으로 와 주겠느냐? 너와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말한 건 그냥 방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였으니까.
스승님을 따라 도착한 곳은 몇 번인가 들어가 보았던 스승님의 방이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던 왁자지껄한 목소리는 스승님의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자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바닥에 마주 보며 앉았다. 스승님이 손짓하자 아무것도 없던 방 안에 작은 반상이 나타났다. 그 위로 안줏거리로 보이는 음식이 얹혔다. 내가 눈치를 보며 안줏거리를 하나 집어 먹는데, 스승님이 말을 걸었다.
“네게 들통났다면서?”
나는 흠칫했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아, 스승님도 알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준휘 선생님과 스승님은 남매니까, 아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피식 웃었다.
“꼬맹이한테 들통날 정도로……그 녀석들, 티가 나나 보구나.”
그 말에 양심이 찔렸다. 아뇨. 알고 지낸 지 3년짼데 3년째 막바지가 되어서야 겨우 눈치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고 나니 이건 진짜 심하다. 친구들은 아직 연애 방면으로 생각할 나이가 아니니까 당연하다 쳐도……난 아니잖아, 진짜.
“그,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어색하게 중얼거리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스승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드니 스승님이 다정하게 웃었다.
“고맙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석들의 사이는 손가락질받기 쉽지만……그래도 무조건 숨겨야 하는 일인 건 아냐. 그 녀석들은 너무 고민했어. 너무 숨겼지. 아무렴, 나한테조차 말하지 않으려 했으니.”
이유는 알고 있지만…….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래, 이 세계의 편견은 내가 원래 살던 21세기보다 적다. 없는 건 아니지만, 마법이 발달한 이 세계에서 가장 절대적인 기준은 바로 ‘마법 실력’이다. 강한 마법사가 무엇을 한들 사람들은 범죄가 아닌 이상 받아들인다. 범죄조차 떠받들어질 때가 있는데 말 다했지. 마법사 중에는 공공연히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그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주위를 경계했으며 스스로 고립됐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런데 마침 네가 위로해 줬다지 않느냐. 덕분에 그 녀석들, 마음의 짐을 조금 던 것 같더구나. 그 녀석들이 그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웃는 것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나는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고맙다.”
“…….”
“네가 그 녀석의, 나의 제자라 다행이야.”
그렇게 기쁜 말이 또 있을까. 나는, 나는…….
이전의 나였다면, 이 세계에 태어나기 전의 나였다면 나는 그 두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어 두 사람의 트라우마와 마음의 상처를 똑바로 마주 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변했다.
소심한 성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는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인하를 만나서,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을……선생님과 스승님을 만나서, 천천히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바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입을 꾹 닫았다. 겨우 입을 열었으나…….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시간이 늦었다. 나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러 돌아가지 않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여기 다락방은 창문이 큼지막한 데다 하늘을 향해 달려 있어서 별을 보기에 참 좋다. 방 한편에 플라네타륨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면 원래 그런 용도인 건지도 모른다.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내 이름이 ‘은하’이기 때문은 아니다. 전생부터 자주 데이트 코스로 천문대를 고를 정도로 별을 좋아했다. 그 별을 볼 수 있는 하늘도 좋아한다. 노을 하늘, 푸른 하늘, 은하수가 반짝이는 하늘, 전부 좋아한다. 그건 하늘을 닮은 동경하는 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조금 심란했다. 갑자기 알게 된 선생님들의 사정, 가끔 아련한 눈빛을 하며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를 보는 제현 오빠. 정말, 제현 오빠는 순애보라니까. 차인 지 몇 년짼데 계속 그러고 있는 건지.
“……나도 똑같지만.”
나는 작게 속삭이며 품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목걸이 줄에 걸린 반지가 달빛과 별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였다. 백금으로 다시 사 주겠다는 걸 거절했었지. 싸구려 은반지였지만 나는 이걸로 충분했다. 물건은 오래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애착이 생긴다고, 이건 내 애착의 결정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다락방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낮은 천장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별을 계속 바라보았다. 달깍, 어느 순간 손잡이가 돌아가며 방문이 열렸다.
“어, 은하……! 너 여기 있었냐?”
한수였다. 나는 고개만 돌려 한수와 마주했다. 겨울인 데다 다락방인데도 집 전체에 걸린 보온마법으로 인해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수가 나에게로 다가오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나는 그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나 찾고 있었어?”
한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어와 별빛이 비치는 창가 아래, 내 바로 옆에 주저앉았다.
“……어. 벌써 9시가 넘었잖아. 돌아가야지. 근데 네가 안 돌아오잖아. 그래서 찾고 있었지.”
“그랬구나…….”
“넌 뭐 하고 있었는데?”
“응? 아, 스승님이랑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래에 내려가서 선배들한테 끌려가서 안주 먹다가, 그리고 여기 올라온 거지.”
“그으래…….”
한수가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나는 웃으며 한수를 돌아보았다.
“예쁘지 않아?”
“뭐, 뭐, 뭐가?!”
어, 당황했다. 달빛 아래 창백해야 할 얼굴이 어쩐지 불그스름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한수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천장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말이야. 예쁘지 않아?”
한수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한수가 내게 물었다.
“너……좋아하냐? 저런 거.”
나는 생긋 웃었다.
“응. 좋아하는데.”
“흐응…….”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한수였다.
“저기…….”
한수가 입을 열었을 때는 나도 사실 약간 긴장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한수를 돌아보았다. 한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환상적인 장면이었다. 별빛이 쏟아지는 창가, 그 아래에 서 있는 잘생긴 남자아이. 그 남자아이가 얼굴을 붉힌 채 나에게 뭐라 말하려 한다. 나는 내심 초조함을 삼키며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한수가 말을 이었다.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때였다.
달깍.
아까와 똑같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다락방 문이 열렸다. 한수가 화들짝 놀라 방문을 돌아보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 상대를 맞았다.
“인하야!”
후다닥 달려가 앞에 서자 인하가 마주 웃더니 이내 내 뒤에 있는 한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고 있었어?”
“마침 잘됐다. 지금 인하 네가 보고 싶었어! 자, 인하야. 여기 서 봐.”
나는 그저 활기차게 웃으며 인하의 손을 잡고 끌었다. 창가 아래에 서 있는 한수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인하를 창가 아래, 한수보다 조금 뒤에 세웠다. 한수가 잠시 후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진짜……. 그래서? 넌 뭐 하는 건데?”
“이리 와 봐.”
나는 한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한수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인하를 돌아보았다.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봐! 예쁘지?”
별빛이 쏟아지는 창가 아래,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녀가 한 명. 그 누구도 홀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정말 환상적인 광경 아닌가. 나는 핸드폰을 들어 인하를 찍었다. 내가 눈으로 본 장면이 그대로 사진에 담겼다.
그러나 한수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한수는 내 말에 반응해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인하를 한 번 노려보았다.
“……글쎄다.”
나는 창백해져 천천히 한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어떻게 지금 인하를 보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눈이 삔 거 아냐? 미안하지만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나는 그만 멍해졌다.
“난, 아까 전에 네가 저기 앉아 있을 때가 더……예뻐……예뻐 보이던데……. 아 진짜……!”
한수가 새빨개진 얼굴로 제 이마를 짚었다. 어? 어어? 어어어어?
“어쨌거나!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 너희들 빨리 나와! 빨랑!”
한수가 거의 뛰어가다시피 다락방을 나갔다. 나는 허탈하게 한수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난 명백하게 보이는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고, 또 바보도 아니다. 왠지 만화 같은 상황이네. 저렇게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다니, 설마 그런 장면을 실제로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렇네. 인하야, 가자.”
나는 인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인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잡았다.
아래로 내려가자 이미 한수와 민희, 현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 너 다락방에 있었다며?”
“응. 거기 누워 있으면 편하거든.”
“그럼 우리랑 같이 가지!”
“그냥 돌아다니다가 잠깐 들른 거였어.”
“그래?”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현 오빠가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천호 오빠가 남는 걸 보니, 제현 오빠도 우리를 데려다주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제현 오빠의 옆모습을 흘끔 보았다. 또다시 어둠이 우리를 삼켰다.
이번엔 좀 더 긴 시간 동안 어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제현 오빠는 한수를 먼저 바래다주었고, 그다음에 가까운 곳에 사는 현호를 바래다줬다. 그다음이 나랑 인하였다.
“잘 자라.”
“안녕히 가세요.”
“그래.”
민희와 제현 오빠의 모습이 어둠에 덮여 사라졌다. 우리 집도 선아 아줌마네 집도 텅 비었으니, 오늘은 인하와 같이 자기로 했다.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선아 아줌마와 정민 아저씨는 물론이고 엄마랑 아빠도 꽤 드물지 않게 출장을 간다. 네 사람이 다 같이 집을 비우는 일도 가끔 있다. 특히 엄마는 유능한 마법사라 아빠보다 자주 출장을 간다. 맞벌이하는 집이 다 그렇지 뭐. 게다가 엄마는 범죄자 관련 일을 많이 맡는다. 도망가는 범인을 쫓기 시작하면 하는 수 없이 나를 아빠나 선아 아줌마에게 맡기거나, 혹은 나 혼자 집에 남는다.
방범 시스템도 있고, 비전투 구역이니 웬만해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엄마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자주 출장을 나가거나 철야를 한다. 혼자 남는 일은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있었던가? 뭐, 오늘 엄마와 아빠는 자정이 지나기 전에 돌아올 거다.
인하는 오늘 내 방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우리는 조용한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같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잠시 웃었다.
“우리 조금만 더 크면 이렇게 같이 자지도 못하겠지?”
“왜?”
“침대가 좁잖아. 좁으면 자다가 상대를 누를 수도 있고, 밀려서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고…….”
“난 그래도 같이 자고 싶은데.”
“하여간…….”
물론 이렇게 계속 같이 잘 수 있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긴 하다. 인하는 보드랍고 따뜻하다.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조금만 더 크면……이라.’
머릿속에 한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대로 있고 싶었다.
나는 인하를 끌어안은 채 잠을 청했다.
##14. 테러
나는 다가오는 기계 병기를 향해 마법을 내질렀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환이 날아가 기계 병기를 꿰뚫었다. 기계 병기에는 환각이 통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든, 가상에서든 마찬가지다. 실체화를 하지 않으면 환각마법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
가상훈련의 대단한 점은 거기에 있다. 가상훈련 시스템은 가상 공간 안에서 기계 병기나 가상의 적과 싸울 때 현실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외에도 서로를 초청하여 대련을 할 수도 있었다. 팀전도 가능했다. 다만 나는 그런 기능을 쓰지 않지만.
기계라면 이 기술을 써도 되겠지. 나는 결계마법을 사용했다. 마력 탄환을 맞고도 일어났던 몇몇 기계 병기가 날카로운 결계에 정확하게 꿰뚫렸다. 막대기는 날아가 꽂힌 것이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
이제 뒤에서 기계 병기를 조종하고 있던 사람만 처리하면 된다. 나는 저 가상 마법사의 정보를 떠올렸다. 메인마법이 분명 덩굴 계열 식물마법이었던가.
“이런……!”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보며 씩 웃었다. 환각마법을 또 하나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나는 마법의 궤도에서 살짝 비켜섰다. 마력을 움직여 환각을 비췄다.
그의 눈에,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어서 나는 그가 내뻗은 마법을 그의 시야에서 지워 버렸다. 그가 깜짝 놀랐다.
“내, 내 마법이……어째서……?”
사실 마법은 방금 내가 있었던 자리를 지나갔지만……이 주변은 이미 내 환각마법의 영역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그가 나를 향해 계속해서 마법을 쏘았다. 하지만 도중에 ‘그 마법은 나에게 닿지 않고 사라진다.’, ‘맞지 않는다.’라는 암시와도 같은 환각을 심어 넣으면……그 마법은 내가 환각으로 지우지 않더라도 중간에 사라지고 만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진짜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실체가 없는 환각이 마력이 더 적게 든다. 이것도 환각의 숙련도가 어느 정도 올라간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지만…….
‘환상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교묘하게 가리는 것. 그게 환각마법의 묘미지.’
마지막으로 나는 환각으로 겉보기에만 거대해 보이는 마법을 만든 뒤, 그 안에 진짜 마력 탄을 심어 두었다. 그것이 마법사의 몸에 정확히 맞았다. 마법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가상훈련을 종료합니다. 수면 모드 해제. 현재 시간은 오전 7시입니다.]나는 머리에 쓴 기계를 벗으며 눈을 떴다. 가상 공간에서 계속 훈련을 하다 일어났는데 눈을 뜨니 상쾌하기 그지없다. 역시 수면 모드. 엄마한테 졸라서 산 보람이 있다.
나는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세수를 한 다음 머리를 빗고 아침을 먹었다. 그다음, 가방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후 와이셔츠에 리본을 매고 허벅지를 반쯤 가리는 짧은 주름치마를 입었다. 셔츠 위에 검은색 스웨터 조끼와 재킷을 입은 후, 나는 거울을 한 번 보았다.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은 후 거울 옆, 화장대 위에 있던 액세서리 함을 열었다. 다양한 피어스가 나를 반겼다.
나는 고민하다가 푸른 사과 모양 피어스를 귀에 꼈다. 작은 사과 모양 피어스는 은가루 같은 것이 박혀 있어 반짝반짝 빛났다.
그다음엔 머리를 만졌다. 묶을까 말까. 머리카락은 벌써 가슴에 닿는다. 나는 고민하다가 묶지 않고서 앞머리 옆에 파란 리본 모양 핀을 꽂았다.
가방을 챙긴 다음 밖으로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 인하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막 나왔어.”
우리는 손을 잡고서 학교로 텔레포트 했다. 아직 8시도 안 된 초등학교 부지에는 사람이 몇 명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한가롭게 학교 공원과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나는 잠시 놀랐지만 상대를 확인하고는 웃었다.
“안녕. 좋은 아침.”
“어.”
한수가 내 인사에 가볍게 대답하더니 약간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인하가 한수를 찌릿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내 맘이지.”
“모처럼 은하랑 단둘이서 걷고 있는데, 방해나 하고.”
“그래~. 네가 단둘이라고 은하를 귀찮게 할까 봐 일찍 왔다. 어쩔래?”
“……귀찮게 하는 건 너거든?”
“웃기고 있네.”
이내 두 사람은 평소처럼 양쪽에서 내 손을 붙잡으며 나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을 했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틱틱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전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좋아졌다니……하여간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사물함으로 향했다. 유독 두 사물함이 눈에 띈다. 두 사물함에는 편지가 몇 개나 꽂혀 있고 심지어 포장된 선물이 붙어 있었다. 와, 오늘도 대단하네!
“굉장하다. 우리 학년 학생 수가 100명을 안 넘는데, 거의 매일같이 러브 레터를 받다니.”
나는 감탄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은 우리 학년에서 최고로 인기인이었다. 까칠하지만 나름 다정한 데다 잘생긴 한수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도도함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인하. 내 말에 나름 내 눈치를 보고 있던 한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같은 학년한테서만 오는 게 아니라서.”
“와, 진짜?”
“응. 나도 5, 6학년 선배들한테서도 오고, 후배한테서도 와. 한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랬구나. 어쩐지.”
난 같은 학년에서만 오고 있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생이니까 연애에 그렇게 관심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설마 다른 학년한테서도 러브 레터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인하와 한수는 얼핏 보기엔 차가워 보여도 사실은 꽤 다정해서, 남의 선물을 매몰차게 버리지 못한다.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며 사물함 앞에 덕지덕지 붙은 편지며 선물 상자를 학생증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나는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냈다. 오늘은 체육 수업이 들어 있는 날이었다.
나는 문득 체육복을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4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전투 훈련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체육 시간이 늘었고 수업도 대개 6교시다. 방과 후 활동으로 전투 훈련이 있는데, 거기에 많은 아이들이 참여했다. 우리도 그 수업에 참석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기초 중의 기초지만 복습하는 건 중요하다.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교실로 향했다. 우리가 교실로 갔을 때 교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교실 안에 들어서자 맨 처음 보인 얼굴은……. 나는 일순 어색한 표정으로 멈춰 섰지만, 한수와 인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자리에 걸어가 앉았다. 그 아이도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이내 내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우리는 각자 행동하다가 다시 대화를 나눴다.
또다시 말다툼을 시작하는 인하와 한수를 보면서 나는 눈동자를 굴려 시하를 흘끔 바라보았다. 시하의 자주색 마력이 유난히 돋보이게 느껴졌다.
4학년이 되자, 고유마법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우리를 제외하고도 하나둘 늘었다. 작년 가을, 강예슬을 시작으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여러 명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개발하기 시작해, 결국 5명 정도가 고유마법을 만들어 냈다. 참고로 그 안에 시하……윤시하도 속해 있었다.
‘중력마법, 이랬던가.’
사실 그 외에도 아닌 척하고 고유마법을 개발한 애들이 한두 명 정도는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턱을 괴며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아이들이 꽉 들어차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언제나의 일이지만, 우리 학교 수업은 즐겁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속성마법과 전투 계열 마법, 고유마법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지 않나. 조금씩 고유마법을 만들어 내는 아이들이 생겨 선생님들이 더 신경 쓰고 있다.
하지만 기본 교과목에 충실히 하면서 마법 공부에도 충실한 시간표를 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학년부터는 마법 수업 비율이 확연하게 늘었다. 뭐……나쁘진 않았다. 딴 공부는 몰라도 마법 공부는 즐거우니까.
이제 마법을 연습할 땐 마법 실습실로 이동해야 한다. 교복이 방어복 대용이라 그런지 교복을 입는 아이도 많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