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92
한 번 낫을 움직여 허공을 그은 것만으로 공격의 성질과 범위를 감 잡은 벨라가 곧바로 방어한 것이다.
곧이어 혼돈을 휘감은 칼날이 드래곤의 발을 군데군데 베었다. 공간이 일그러진 데다 『라크루리온』이 그림자를 통해 곧잘 형태와 위치를 바꾸는지라 벨라라도 한 번에 다 도려내진 못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파괴력 위주에 성진이와 인성이의 마법을 이용해 공격하고 있는 데도 곧잘 깊숙하게 베어 버린다. 이것으로 마법의 성질을 바꾸는 것 정도로는 ‘요령’에 대항하기 어려움을 알았다.
“……!”
이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거울이 비춘 듯한 분신칼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건 이전과 같았으나, 칼날에 의해 새겨진 날카로운 상처에서 금이 퍼졌다. 톱니처럼 변한 상처에서 덩굴과 장미꽃이 자라났다.
‘피의 상처와 칼날을 결합한 기술인가?’
마법사가 가진 기술을 결합해 사용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반에 칼날과 상처를 구분했던 건 힘을 비축하고 증강하기 위해서였겠지.
피의 상처가 눈앞의 대상을 완전히 절단하지 않는 대신 더 단단한 걸 더 날카롭게 벨 수 있게 해준다지만, 그 제약은 결국 자신이 베기 어려운 것을 향한 제약이다. 나는 벨라에게 그 정도의 대상은 아니다.
상처는 꽃을 피우며 자리에 고정됐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의 방향을 구분하는 지표로 삼을 생각인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가.
다만 저 기술은 척 보기에도 벨라 혼자만의 마법이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쓰는 자연적인 죽음이 섞여 있다.
‘…윽.’
상처에서 검붉은 장미꽃이 핏물 마냥 쏟아졌다. 기이할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진 이유를 곧 깨달았다. 저것들은 벨라의 살인을 통해 생겨난 죽음의 기운, 벨라가 삼킨 죽음의 광기였다.
수십 개의 상처가 빠르게 길어졌고, 쏟아진 장미꽃이 점점 더 큰 산을 이뤘다. 사악한 만큼 짙은 힘을 품고 있었다. 라크루리온의 손톱으로 헤집어 보려 했을 때였다.
촤르륵….
「마스터, 공명이…!」
“……!”
벨라의 마법은 하여튼 간에 빠르다. 어떤 기술이든 그녀 본인이 내지르는 칼날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장미꽃에서 검은 사슬이 솟아나고, 상처에서 쏟아진 죽음이 공명을 일으키자마자 꿈 조각 수백 개가 장미꽃에 이끌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검붉은 장미꽃 중 다섯 개가 푸른빛을 머금어 보라색으로 변하고, 벨라의 죽음에 이끌린 수백 개의 꿈 조각 안에서 벨라의 사슬이 튀어나오고, 장미꽃의 죽음을 흡수한 열쇠에 잠깐 붉은 빛이 돌았다 사라졌다.
“아하! 많기도 하지! 하지만 반짝이는 숫자에 비하면 잡힌 게 너무 적은걸~? 역시 유은하!”
즐거워하며 벨라가 낫을 휘두른 순간 내 꿈에 연결된 벨라의 사슬이 모두 터지듯이 칼날로 변했다.
수 백 개의 칼날이 지나간 방향을 향해 벨라가 교차하듯이 낫을 그었다.
“……!”
나는 이를 악물며 칼날이 가장 많이 몰린 장소에 라크루리온의 발톱을 휘둘렀다.
방어의 우선순위를 내린 나에게 최선의 방어는 벨라와 마찬가지로 공격하는 것. 베이면서도 완전히 베이기 전에 칼날을 환각으로 지워 잡아먹는 것.
쌍둥이자리의 그림자와 수많은 페이지가 어둠의 용 라크루리온의 전설을 읊었다. 고래의 외침이 환상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감각을 어지럽히는 빛, 소리, 냄새, 온도. 사슬과 칼날이 환상에 녹았다. 잔 칼날 역시 어떻게든 나에게는 닿지 않고 그쳤다.
“피 냄새가 안 나네~. 그럼 이쪽인가?”
벨라는 조금 전 날린 칼날이 닿지 않았던 방향으로 낫을 그었다. 칼날 몇 개가 정확히 나를 향해 날아왔다.
라크루리온의 어둠으로 공간은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벨라는 공간도 시간도 전부 베어 버리므로, 칼날은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나는 이번엔 막는 게 아니라 피했다. 칼날에 부딪친 물고기가 무수히 많은 빛의 안개를 퍼트려 최대한 벨라의 감각을 혼동 시켰다.
‘문이, 공명의 조건은 파악했어?’
벨라의 사슬은 표적을 지정하고 묶기 위한 것이라 들었다. 내가 열쇠를 통해 행하고 있는 공명을 역이용한 죽음의 공명. 그러나 감지계열이 아닌 벨라가 환각과 정화마법을 뚫고 연결을 더듬어 내 마법을 추적하는 건 웬만해선 불가능하다. 분명한 ‘매개’가 있지 않고서야.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마스터의 피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낫에 흡수된 피 말이야?’
「피……라기 보다 마스터의 마법을 죽였을 때 흡수했을 죽음의 기운……을 이용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군요.」
‘마법의 사기(死氣)…….’
저 장미 상처는 엘리시아의 힘을 섞은 마법이다. 벨라는 죽은 이의 피와 영혼을 흡수하고, 엘리시아는 제 눈으로 본 죽음을 손에 쥔다. 그게 설령 마법 등 본래는 생명체가 아닌 것의 죽음이라도 사령왕 엘리시아는 쥘 수 있다.
‘내 마법을 파괴한 것으로 생겨난 죽음을 통해 내 마법 일부와 공명한다는 건가……. 문이, 사슬에 당한 마법의 종류를 확인해 줘.’
「예상대로, 벨라에게 가장 많이 파괴당한 문장과 관련이 있거나 페이지가 가까운 마법입니다.」
그렇다면 저 죽음의 매개와의 공명을 근본적으로 끊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벨라에게 파괴된 문장을 책의 내용에서 삭제하는 것.
‘그건 제 목숨 깎기지.’
문이의 해석 결과 벨라의 칼날에 잘린 문장들과 관계있음에도 공명하지 않은 마법도 많았다. 섬세함이 부족한 벨라의 제어력으로는 내 환각을 뚫고 노리는 모든 마법을 공명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보다 견고해진 연결을 나도 역이용해 주겠어.’
엘리시아의 기술을 빌렸든 아니든, 벨라가 일으키는 죽음의 광기는 정화할 수 있는 힘이다.
‘정신은 꿈이라는 이차원의 힘. 죽음과 영혼 역시 이차원의 힘.’
『꿈은 영혼과 현실의 틈새에 존재하는 이차원. 사람은 물론 물건에도, 영혼에도, 영혼에 있으니 당연히 죽음에도 깃든다.』
촤륵, 촤륵…….
문장 하나를 잇는 사이에도 수 천 개의 칼날이 세계를 베었다. 그때마다 세계의 혼돈과 좀 더 먼 세계의 죽음이 칼날의 상처를 통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밀려 들어왔고, 장미꽃의 숫자는 점점 늘어 죽음의 공명에 이끌리는 꿈 조각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만큼 내 꿈 조각도 벨라의 혼돈을 잡아먹고 있었다. 문이의 경고에 맞춰 벨라의 칼날을 피한 나는 곧바로 공간을 넘어 이동했다. 그림자며 별자리며 죽음이며 온갖 마법이 섞여 주위가 질척질척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꿈의 마수여, 마음을 갉아먹어라.』”
지팡이에 온갖 힘이 섞였다. 악몽의 파편, 별자리의 그림자가 지닌 종말과 저주의 힘. 그것들이 거대한 괴수의 발톱으로 합쳐져 휘둘러졌다.
서걱!
그림자가 쏟아지자 곳곳에 생겨났던 벨라의 사슬 반절이 남청색으로 물들었다.
벨라가 만든 장미는 그녀가 저지른 살인에서 말미암은 죽음의 비탄과 광기다. 그들의 진짜 꿈과 마음은 내가 더 많이, 똑바로 보고 있다. 그녀가 만든 죽음을 흡수해 만든 것이 『악몽의 파편』이고 그것을 통해 만든 것이 『악몽의 검』아니던가.
나는 영혼과 죽음에 닿을 수 있고, 모든 꿈을 지배할 수 있다. 저따위 죽음은 내 마력으로 덮어씌우면 그만이다.
콰직, 콰직, 콰직!
죽음의 광기와 찬란한 꿈이 부딪쳐 폭발했다. 꿈이 공명을 덧씌우거나 거부할 때마다 장미꽃 색이 바뀌거나 부스러졌다. 수십 개의 광기가 라크루리온의 발톱에 베였고 고래의 뱃속에 삼켜졌다.
고래의 위장이 죽음의 공명을 좀 더 자세히 해석했다. 환각마법을 더듬어 내 마법을 구속할 만큼 저 장미꽃의 공명은 강하다. 그런 만큼 직접 삼켜보고 싶었지만 이 몸이 직접 구속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필요한 만큼 장미꽃을 잡아먹고 문장들을 제어했다.
‘여기까지. 내가 계속 악몽과 공명하려 드는 이상 죽음의 공명은 완벽하게 막지 못해.’
당장 장미꽃을 어느 정도 억제했으니 충분하다. 죽음을 향한 견제를 다시 문이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공격에 임했…….
화르륵….
갑자기 벨라의 낫에 핀 장미가 죄다 남색으로 물들고, 톱니 상처에서 떨어진 장미꽃이 피의 사슬로 변해 썩어 문드러졌다.
직후 지팡이의 열쇠에서 어렴풋이 불이 붙는 듯한 이명이 들렸다. 다급히 벨라의 마력을 좇았다. 벨라가 만들었던 장미 덩굴 상처 수십 개가 사라지고, 그걸 대신하는 것처럼 내 바로 근처에서 수 천 개의 사슬이 터졌다.
“윽…!”
벨라의 사슬에 의해 나를 감싼 라크루리온의 어둠이 뻥뻥 뚫렸다. 이어 거대한 칼날이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쾅!
라크루리온의 발톱과 페이지 스크린이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렇게 칼날 세, 네 개까지 피했다. 뜯겨지는 페이지 갑옷과 살갗을 보며 절감했다.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졌어…!’
장소를 이동하기 전에 이곳을 향해 수십 개의 칼날이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왔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찬 집중 공격이었다.
“『악몽…!”
카……가각!
언령이 완성되는 것보다 칼날이 닿는 게 더 빨랐다. 칼날은 지팡이를 둘러싼 오라나 별의 궤도, 페이지에 일단 막혔다.
“의 검…!』”
악몽을 베는 칼날이 뒤늦게 지팡이에 덧씌워졌다. 은색 사슬이 칼날을 휘감았으며 별자리의 그림자가 칼날을 씹어 부쉈고, 라크루리리온의 어둠이 칼날을 긁어먹었으며…….
진화의 조각이 시간을 조작했다. 겨우 지팡이에 닿은 칼날을 흘려보낸 나는 재빨리 칼날의 궤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하이~.”
벨라의 낫이 공간을 베며 내게로 떨어졌다. 벨라의 그림자가 주위를 베어 갈긴 탓에 한순간 나를 따르던 꿈과 어둠이 멀리 밀려났다.
“너 점점 찾기 힘들어진다.”
칼날을 품고 휘둘러진 낫은 별의 궤도에 장식된 『시간의 초침』에 걸려서야 겨우 멈췄다. 칼날의 여파로 몸 곳곳에 피가 튀고, 내가 몸에 두른 어둠과 별에 의해 벨라의 몸에도 삐죽빼죽한 상처가 났다.
“그런만큼 공격도 강해졌지만……꺄하하하!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아까보다 훨씬 잘 베이는 거 알겠니?”
칼날과 지팡이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검은 불똥은 날카로웠고, 남색 혹은 은색 불똥은 때때로 글자로 변했다. 서로의 마법이 상쇄 될 때마다 우리의 옷과 몸에 상처가 났다.
몸을 휘감은 악몽의 문장들이 벨라의 칼날에 공명하며 벨라의 마력을 탐욕스럽게 잡아먹었다. 벨라의 칼날에 담긴 의지가 가슴 깊이 전해져왔다.
『베겠다.』
『오로지 ‘유은하’를 베겠다.』
‘잘 베이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칼날이 날카로워진 것으로 끝이 아니다. 몸과 마법에 난 상처의 재생과 정화가 이전보다 더뎌졌다. 벨라의 칼날에서 솟아난 사슬이 내 몸을 둘러싼 마법을 하나둘 휘감아 조각내거나 짓눌렀다.
“…영광인걸.”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음 깊이 진심을 담아 웃었다. 내 표정을 보고 벨라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와, 뭐야. 웬일이야?”
“…….”
“괜히 기분 좋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이루는 문장을 되새겼다.
이 세계도, 저 낫에 담긴 의지도, 나와 공명하려 드는 죽음의 남색 장미꽃도, 그로 인해 점점 날카로워지는 칼날도, 최악 최흉이란 호칭이 붙은, 벨 수 없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벨라 트리저가 이 사투에 진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벨라가 쥔 남색 장미가 장식된 낫은 나만을 베기 위해 벼려졌다. 내가 그렇듯이 지금 벨라의 살의는 오롯이 나만을 향해 있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저 벨라가 안 그래도 날카로운 칼날을 제약까지 걸고 벼렸는데 그 위력이 어련할까!
모두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이며, 벨라가 나를 버거워하고 있다는 증명이다.
‘문이, 역시 방어는 죽지 않을 정도면 충분해. 벨라를 상대로는 그것조차 힘든 일인걸.’
나는 내 몸을 지키기보다 어둠에 더 깊이 발을 들이는 걸 선택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낫의 마력 일부를 이로 짓씹으며 속삭였다.
“『열어라.』”
“오?”
지팡이를 둘러싼 별의 궤도 몇 개가 파문을 그리는 것처럼 퍼지며 악몽과 새벽의 공명을 흔들었다. 나와 벨라의 그림자가 짙게 일렁거리며 넓어졌고, 보다 깊어진 꿈이 우리를 맞는다.
벨라의 꿈은 정말이지 어디까지고 새까맣고 사악했다. 트라베리아의 그 누구보다 생물을 많이 죽이고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엔 꿈속 세계에 드문드문 색다른 것이 나타났다. 어둠을 흡수한 다양한 색의 장미, 사슬과 곳곳에 새겨진 상처 자국.
“엇.”
꿈이 깊어지면 당연히 감각도 달라진다. 이곳은 벨라의 꿈이되 내가 조종하는 꿈이다.
가뜩이나 마력 제어가 서툰 벨라는 갑자기 무거워진 마력을 바로 수습하지 못했다.
결과 벨라의 마력은 흘러넘쳐 폭주했다.
벨라의 그림자에서 혼돈이 흘러넘치고 날카로운 칼날이 무작위로 주위를 덮쳤다. 기세가 무지막지했지만 마법이란 마법사의 의지와 하나일 때 가장 강한 법이다. 폭주하는 폭풍에 담긴 마력은 분명 강대했지만, 벨라가 직접 휘두르는 칼날에 비하면 무뎠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쇠의 인력을 이었다. 꿈이 깊어질수록 칼날의 형태는 엉망으로 엉클어졌다.
“하핫, 어지럽다 느낀 게 얼마만이람!”
벨라는 예상보다 빨리 마력을 수습했다. 수습한 방법은 실로 벨라다웠다. 한 발 물러나 내 지팡이에서 낫을 물린 다음 아직 마력이 폭주하고 있는 낫을 휘두른 것이다.
벨라의 의지에 마력이 곧바로 따라갔다. 따라오지 않는 마력은 벨라가 몸소 베어 버렸다. 감각이 일그러졌을 텐데도 이렇게 날카로운 칼날이라니, 과연 벨라였다.
나는 계속 열쇠를 통해 꿈을 불렀다. 내 주위를 둘러싼 페이지가 죄다 악몽을 부르는 문자를 새겼다. 벨라는 계속 칼날을 휘둘러 1초에도 몇 번씩 일그러지는 감각을 정리했다.
첫 번째 칼날은 무뎠다. 그러나 벨라는 10번의 휘두름 만에 본래의 날카로움을 되찾았고, 20번 휘둘렀을 때는 ‘나를 베기 위한’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아직 자신의 마력이 정돈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저 여자는 진짜……마력의 제어조차 육체 기술로 보충하네. 나랑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반대야.’
그래도 초반의 칼날이 무뎠기 때문에 코앞에서 다가온 공격임에도 어떻게든 피할 틈을 찾아 벨라와 간격을 벌릴 수 있었다.
벨라가 칼날을 잇는 동안 나는 최대한 벨라의 꿈에 깊게 파고들었다.
아니, 잡아먹었다. 장미를, 상처를, 혼돈을, 벨라의 꿈에 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물고기로, 사슬로, 박스로, 어둠으로 잡아 삼켰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감각을, 깊어지는 꿈의 인력을 막기 위해 벨라가 죽음의 공명을 사용했다.
영혼은 반쯤이라도 꿈에 속한 힘이다. 그러니 꿈의 지배가 강해진 지금 벨라는 죽음의 공명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어야 옳았다. 하지만 벨라의 칼날은 그런 모든 법칙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나 아무리 벨라의 칼날이 날카로워도 죽음의 공명은 내 중심과 가까운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새벽의 정화속성과 현실을 뭉그러뜨리는 꿈의 힘이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라크루리온의 날개가 나를 둘러싼 채 포식의 그림자를 퍼트렸다. 곳곳에서 일어난 검은 사슬이 꿈 조각에 부딪쳐 상쇄되고, 낫에서 솟아나 쏟아진 사슬은 내 악몽 및 별빛에 상쇄되었다.
칼날을 눈앞에 둔 채로 나는 계속해서 어둠을 잡아먹었다. 일정한 힘이 찼을 때 나는 열쇠에 키워드를 맞췄다.
“『진화의 기둥 발동.』”
『별하늘의 열쇠 진화』
“『은하의 열쇠』.”
나는 다가오는 칼날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살의와 살의가 부딪쳤다. 지팡이에 담긴 꿈이 칼날을 깨부숴 흡수했다. 그로 인해 무기와 몸에 생기는 상처는 『별의 물고기』와 『별의 고래』에 옮겨 갔다.
몽현(꿈을 현실로)에 의해 벨라의 명령이 왜곡되었다. 죽음의 공명 사슬이 그녀의 의도와는 다른 곳에 나타났다. 이제 벨라의 앞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칼날이 기어코 라크루리온의 날개를 베어 가르고 나에게 닿았으나, 새겨진 상처와는 별개로 힘은 닿는 순간 나를 둘러싼 악몽의 문양에 흡수되었다.
“『별자리의 그림자, 두 번째─악몽의 성좌.』”
별들이 벨라의 꿈에 있는 상징물을 잡아먹고 별자리를 그렸다. 커다란 또 하나의 별자리는 쌍둥이자리 위에 새겨졌다.
얼핏 삼각형을 닮은 별자리. 벨라의 별자리는 염소자리다.
내 마법의 피와 죽음에 공명하는 낫이 또 한 번 코앞까지 다가왔다.
“『연결』, 『공명』, 『상쇄』.”
별자리의 연결과 열쇠의 공명에 의해 벨라의 칼날이 일그러졌다. 칼날이 날아오기 전에 벨라의 마력에 간섭하여 칼날의 베는 힘을 약하게 만든다. 이제야 이게 가능해졌다. 꿈을 겹치고 또 겹쳐도 벨라가 낫을 휘두르면 결국 칼날은 완성되지만, 조금이라도 칼날을 방해할 수 있다면 승률은 올라간다.
몸에 수십 개의 상처가 새겨지더라도 신체가 완전히 잘리는 것보다는 낫다. 확산된 칼날의 반 정도는 내 몸을 둘러싼 라크루리온의 발톱이 상쇄시켜 준다. 나는 상처 입는 것을 개의치 않고 벨라의 칼날에 지팡이를 내리쳤다. 라크루리온의 어둠과 지팡이의 열쇠가 칼날을 삼켰다.
촤르륵!
벨라는 적의 몸을 구속해서 베는 건 재미없어 한다. 그럼에도 나를 상대로 계속 사슬을 펼치는 건 내가 어디 있는지 특정하기 위해서다. 눈앞에서 대면하고 있는 지금도 느껴지는 감각이 거짓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뒤로 물러난 대신 라크루리온을 앞으로 내보낸 나는 허공에 자라난 사슬을 쥐어뜯어 삼켰다. 혀에 난 상처가 덩굴 형태로 변하다 말고 정화마법과 진실을 뒤엎는 꿈의 힘에 녹았다.
카가각!
벨라의 낫이 수많은 문장과 페이지를 가르고 내 어깨 옆을 감싼 악몽의 문양에 꽂혔다. 뒤로 물러나기에는 늦었기에, 내 몸을 감싼 마력 갑옷이 갈라지기 전에 지팡이로 낫을 받았다.
콱!
어긋난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막기는 막았지만 ‘ㄱ’자로 굽어 있는 날과 자루의 경계가 어깨 선상에 있는 터라 날이 조금만 기울어도 몸이 꿰뚫릴 것이다.
이런 아슬아슬한 자세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힘으로는 밀리지 않지만 기술로는 밀리니까.
“꺄하하!”
칼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패여 피가 흘렀다. 위험이 상당 수위를 넘자 책의 커버가 현신하며 내 몸을 감쌌다. 나는 낫을 밀어내는 대신 내 심장을 찍으려 드는 낫의 손잡이에 입을 가져다 댔다.
콰득
“……!”
나는 벨라의 낫에 둘러진 장미꽃을 씹었다. 내 사정거리 안에 파고든 대신 벨라도 물러나기 어렵게 됐다. 물러나려면 낫을 물리고 자신을 쥐어뜯고 있는 어둠과 별자리를 베야 한다.
“『열어라』.”
한 번 정도는 심장이 베여도 된다. 책은 심장이 아니라 마법의 근원에 있으니까.
낫에 담긴 나를 베는 힘이 이보다 더 강해진다면 모험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심장을 찔려도 뇌를 찔려도 재생할 수 있다. 어차피 마지막 기술에 피를 섞을 생각이었고, 심장에서 흐르는 피는 사용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한다고 성진이가 말했다.
“오!”
지팡이의 열쇠로 벨라의 낫을 열었다. 열쇠로 마법을 열자 구멍에서 마법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쏟아졌다. 벨라의 마음, 내 마법이 죽은 잔해, 칼날과 죽은 이의 피…….
콸콸 흘러넘치는 마력에선 지독한 비린내가 났다. 낫 주위에서 장미꽃 덩굴이 채찍처럼 들썩이며 내게 상처를 새겼다. 첫 번째 장미가 입 안에서 완전히 녹는 순간 나의 생명력이 내 마법의 죽음을 정화시켰으며, 열쇠는 제가 연 통로를 통해 벨라의 마력을 무자비하게 흡수했다.
“날 상대로 오히려 다가서는 놈은 또 얼마만이람~!”
낫의 마력이 흘러내리는 이상 상황임에도 벨라는 태연하게 웃으며 낫의 방향을 바꾸었다.
“……!”
눈 깜짝할 사이 지팡이에서 떨어진 낫이 순식간에 내 어깨에서 가슴까지 베었다. 그와 함께 열쇠로 인해 낫에 열렸던 통로도 ‘잘려 나갔다.’
‘젠장.’
겨우 재생시켰던 왼팔이 다시 나갔다. 전투복의 수복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먹어 악몽을 이해하고 꿈이 깊어져도 벨라는 무기의 손맛만은 결코 착각하지 않는다.
벌써 바깥으로 내보낸 페이지의 8할이 부서졌다. 그렇다고 책의 페이지를 더 뜯어 내보낼 수는 없다. 그러면 마지막 기술을 정제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몸에 난 상처를 손으로 쥐어 팠다. 칼날의 상처와 내 피가 섞여 굳더니 둥근 덩어리로 변했다.
벨라는 내 실체가 어디 있는지 잃지 않기 위해 사슬을 퍼트리면서 시험하듯 다른 곳을 향해 낫을 몇 번 휘둘렀다.
“흠흠, 뭔가 많이 빠져나간 느낌이지만 상관없으려나. 살기로 채우면 되니까.”
열쇠에 의해 힘이 대량으로 줄줄 새어 나갔음에도 벨라는 다시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했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무슨 수를 써서 칼날을 약화시켜도 무기를 움직이는 순간 벨라의 칼날은 본래의 힘을 되찾고 날카로운 예기를 발한다.
‘이게 벨라의 진면목.’
무수히 많은 문장을 자아내는 나와 달리 벨라의 마법이 목표로 삼은 것은 결국 하나였다. 눈앞의 적을 벤다. 그리하여 죽인다.
‘수 백 년 간 살아남아 최흉의 마녀라 불리게 된 이유……. 사상 최악의 살인마다운 정신력과 집중력…….’
‘한 번 죽였던 놈에게는 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이유도 아주 잘 알겠다. 그건 죽인 누군가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자신의 마법을 향한 자부심이었다.
모든 것을 베고, 베지 못했던 것도 결국에는 베어버릴 것이라는 자부심. 한번 벤 것의 손맛은 기억하고 있다는 기술을 향한 자신감.
‘앞으로 몇 번이나 막을 수 있을까.’
다시 날아온 칼날을 향해 지팡이를 내리친 순간, 지팡이를 둘러싼 문장이 모두 베이고 지팡이의 부품인 별의 궤도 고리에 금이 갔다.
“후하핫! 그거 알아? 근 100년간 방어력으로 나와 대등하게 겨룬 건 네가 유일해! 그런데 그것도 슬슬 끝이 보이는 것 같지?”
쿠구궁…….
그때 혼돈의 차원에 또 한 번 죽음의 힘이 밀려들며 하늘에서 팔랑이는 마법 파편이 눈처럼 떨어졌다. 눈과 꽃잎 모양을 한 저것은 영혼의 조각들이다. 겉모습만 아름다운 더럽혀진 영혼의 에너지가 벨라의 그림자에 소복이 쌓여 스며들었다.
“하핫, 엘리의 차원이 가동됐나보네.”
“가동…….”
“필요한 만큼의 힘을 모은 차원은 완전한 부품으로써 대마법장치에 동화돼. 승패는 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