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595
점술과 행운은 간헐적으로밖에 힘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성진의 힘과 관찰력은 행운들을 연결해 단서로 짜 맞췄다.
이성진은 포츈의 질문에 진실만으로 대답했고, 질문이 없을 때도 룰렛과 카드를 따르든 자신의 눈을 따르든 별 망설임 없이 금방 길을 선택했다.
포츈의 세계는 공간이 금방 뒤섞였다. 어느 차원의 봉오리가 필 때마다, 길을 고를 때마다, 차원의 공전을 따라. 그때마다 자연의 흐름도 오시언의 점에 나타나는 운명의 법칙도 변했다. 하물며 존재하는 길 외에는 온통 안개 같은 에너지뿐이고, 에너지 역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기에 풍경으로 길을 구분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지만……이성진은 자연의 가호로 온통 둘러싸인 지금도 영역 바깥의 흐름이 보인다고 한다. 자연의 가호로 가려진 포츈의 영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포츈의 영역인 차원의 교차로 내부의 풍경이 아니라, 바깥의 변화를 통한 교차로의 반응과 공명을 통해, 교차로의 중심인 포츈 주위의 흐름을 통해 교차로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했다. 그를 통해 단편적으로 길을 찾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성진은 갈림길에 설 때 드문드문 오시언에게 어떤 것을 점칠지 지시했다. 때로는 마법석이나 자신의 마력을 점술의 대가로 내놓았고, 힘이 흐트러져도 괜찮다 생각되는 곳에서는 종말의 힘을 꺼내 가호를 내리는 자연을 협박하듯 물리는 것으로 공간을 이동했다.
“있잖아, 이성진.”
오시언의 부름에 이성진은 눈짓만으로 반응했다.
“너, 혹시……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아? 어쩌면 교감할 수도 있고.”
“자연의 가호를 꿰뚫어보는 게 이상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라면, 글쎄. 어느 순간부터 죽음과 관계된 건 꿰뚫어볼 수 있게 됐어. 영혼이 가장 뚜렷한 예고.”
“그냥 보이게 됐다는 거야?”
“그래, 그냥.”
“…….”
카드를 매만지던 오시언이 머뭇머뭇 이성진을 올려다봤다.
“있잖아, 넌, 정말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야. 자연은 죽음과 관련된 힘이라 해도 보통 겁먹지 않아. 죽음도 자연의 일부인걸….”
“그거 길을 찾는 데 필요한 질문인가?”
“…아, 방해해서 미안. 내가 혹시나 했던 건 점술에 대해, 운명을 읽는 방법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그래서야.”
“대가에 대해서는 잘 알아. 저주가 특기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성진 대장은 점을 볼 줄 안다고 들었다만. 사람에게 붙은 인위적인 흉을 볼 수 있다던가?”
“죽음의 위험에 관해서만 드문드문. 유은하의 예지몽처럼 조절할 순 없어.”
“감지능력자 중엔 운명에 닿는 감지능력을 얻는 경우가 간혹 있지. 응, 납득했어.”
오시언과 레녹이 이성진의 지시에 따라 점술과 행운을 발동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안개뿐이던 공간에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오시언은 카드를 쥔 채 바짝 긴장했다.
“방금 뭔가 섬뜩했어. 음…무거웠어.”
“세계의 축이야.”
“아……. 근데 그거, 사실 나는 감이 안 와.”
“나도. 감지할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이동한다.”
이성진은 몇 걸음 걷지도 않고 검을 뽑았다. 이성진의 파도에 이끌려 레녹과 오시언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포츈 앞에 섰다.
“…생각보다 더 빨리들 왔구나.”
“음.”
이성진에게서 흘러내리는 차갑고 섬뜩한 마력에 오시언과 레녹은 반사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오랜만이오, 잔잔한 바다여.”
얼굴과 팔다리에 문신을 하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맨 갈색 피부의 남자가 공손하게 오시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인 트라베리아의 마법사, 칼리엔테스는 친근한 상대를 자연에 빗대어 부른다.
그러나 오시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우선 주위를 확인했다.
복잡한 초원 바깥과 달리 초원 내부는 잔잔하고 풍경에 변함이 없었다. 교차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 초원에 있는 작은 숲이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동물형 키메라와 동물형 시체 인형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만. 지켜보러 왔어. 그게 같은 일족이었던 마녀로써 예의라고 생각했거든. 선생님한텐 많이……배웠고.”
“옛 제자에게 끔찍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안타깝구나.”
“너희, 물러나려면 더 물러나.”
“마지막 인사만 조금 더. 괜찮을까?”
“어어, 키메라랑 측근은 내가 맡을까?”
“아니. 적당히 물러나기나 해. 여기에서 너흰 저것들을 못 이겨.”
“…….”
무표정을 가장하면서도 레녹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무르시엘은 트라베리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결성 되었던 조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트라베리아를 알면 알수록, 그들의 힘으로는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무력감이 뼈아팠다.
“어차피 한 번에 베어 버릴 수 있는 거, 상대하는 데 방해돼.”
거기다 사람들은 한 번 인도를 져버린 무르시엘을 용서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레녹은 이성진이 상대가 무르시엘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칼리엔테스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무례하군. 여기가 어떤 곳인지…….”
“뜨거운 바람아.”
“타오르는 생명력도 시간의 파도 앞에선 무의미해.”
포츈이 칼리엔테스를 제지한 순간 이성진의 몸에서 노을빛 마력이 퍼졌다.
“운명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지.”
평소와 달리 노을빛을 띤 물결은 뾰족한 파형을 그리며 퍼졌다. 그뿐이건만 잔잔히 흐르던 수풀의 소리가 멈추고, 곳곳의 기운이 끊겼다.
숨죽이는 자연의 기척에 오시언, 칼리엔테스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의 힘에 누구보다 민감한 포츈은 이성진이 본 세계의 축과 닮은 금속 링 의자에 앉은 채 태연히 미소 지었다.
“선생님…….”
“뜨거운 바람아, 오기 전에 말했잖니. 오는 상대가 이성진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고정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그렇소. 하지만 당신을 혼자 보낼 수는 없기에 내가 따라온 것이었지.”
“그렇다면 이제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렴.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단다.”
칼리엔테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포츈은 말을 건 오시언을 돌아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니, 션?”
“…….”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은 과거 포츈이 그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때와 꼭 닮아 있어서, 오시언은 입술을 열고 잠시 고민했다.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지, 자신들을 봉인하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운명을 보아 왔는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인 걸 느끼고 있지 않는지…….
그러나 서로 머나먼 강을 건넌 지금 그런 걸 물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민한 끝에 오시언은 입술을 움직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죄질이 낮은 국민들은 우리가 감시하기로 했어.”
“하하, 이번 세대의 인간들은 참 상냥하구나. 하지만 그 상냥함이 몇 년이나 갈지…….”
“새벽별무리는 약속을 지켜줄 거야.”
“너는 이들의 승리를 확신하는구나.”
“선생님이 이기지 못할 건, 알아.”
포츈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이성진이 그만 물러나라는 눈짓을 보냈으나 오시언은 오히려 한 발 나서며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뭘 점쳤어?”
“후후.”
“이성진이 올 거라고 확신했어? 길에 놓아 둔 질문들로 그의 무얼 확인하려 한 거야?”
“션, 그의 심기를 건드릴지도 모르니 그만하려무나. 우리는 몰라도 너흰 그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했잖니?”
오시언은 눈동자를 굴려 이성진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이성진은 오시언을 한 번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성진은 스스로 벼려 만든 검을 바로 앞에 가볍게 박아 넣었다. 그건 전투 개시가 아닌 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원하는 답은 얻었나?”
“…….”
“내게서 무얼 봤지?”
포츈은 손에 쥔 수정 구슬을 한동안 내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0장의 카드가 포츈이 있던 자리를 지켰다. 오시언과 칼리엔테스는 포츈의 몸짓에서 포츈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탐색 하는 건 심기에 거슬리고, 다른 이들이 듣는 건 심기에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야?”
“‘너희’ 정도가 아니면 상관없어.”
포츈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 아이는 그냥 둬. 아직 얕아.”
“그건 전쟁의 승패가 결정하겠지.”
“그것도 그런가.”
오시언과 칼리엔테스는 포츈의 말투에서 또 한 번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 포츈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로 대했다. 그럴 만도 했다. 살아있는 마녀 중 포츈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없었다.
포츈은 이전까지 이성진 역시 어린아이를 다루듯 대했다. 그러나 세계의 마지막에 나타난 최후의 대적자이기 때문인지 포츈은 이성진을 대등 이상의 존재로 대우했다.
“어쨌거나 이야기할 기회를 주다니 고맙네.”
“그래서 죽일 상대로 널 선택한 거니까.”
“그거 영광인걸. 모처럼 시간이 생겼으니 서론을 좀 곁들여도 되겠지? 내 생에 최후의 이야기이자 내가 보게 된 가장 초월적인 진리에 관한 이야기가 될 테니. 어쩌면 내 뒤를 따를지도 모르는 제자도 여기 있고.”
“…….”
예상과 다른 분위기와 진행을 따라잡을 수 없어 칼리엔테스도, 오시언과 레녹도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싸움의 주체들이 그러고 있으니 가만히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션의 질문에 먼저 대답해 보도록 할까? 당신이 여기에 올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 그러나 육감이 위험을 속삭이더군. 그래서 점을 쳤어. 내 미래에 사신의 그림자가 얼핏 보였지.”
포츈은 주위에 카드를 늘어놓으며 피식 웃었다.
“하긴, 당신을 점칠 땐 그 위협적인 영혼과 마력 특성에 영향을 받아 항상 경고가 뜨지만.”
“…….”
“그런데 최근엔 경고 정도로 끝나지 않고 저주가 흘러 들어오더라고. 당신, 어느 순간부터 위치를 추적했을 때뿐만 아니라 관련된 점을 쳤을 때도 낌새를 눈치챘지?”
“그래.”
이성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주일에 한번 씩은 꼭 낌새가 와서 성가시더군.”
“본인만이 아니라 새블레 전체의 운명을 가려두다니. 덕분에 나도 꽤 곤혹스러웠어.”
오시언은 긴장한 눈으로 이성진을 흘끗거렸다. 오시언 역시 운명을 볼 수 있는 점술사이지만 포츈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의 운명을 엿보려 한다고 해서 바로 눈치채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성진의 운명을 보는 실력은……틀림없이 흉을 보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 쳐도 한 공간의 운명을 통째로 가렸다니…….
“성가셔하면서 결심했지. 넌 내가 처리해야겠다고.”
포츈은 가벼운 웃음으로 응답했다.
“그건 여지를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려나? 그래, 맞아. 최근에 당신을 계속 엿본 건 별무리 중 가장 이상한 게 당신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이상?”
오시언이 불안한 눈으로 포츈과 이성진을 살폈다.
“유은하의 운명은 읽을 수 없어. 하지만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지. 당신은 너무 섬뜩해서 읽으려고 한 순간 도구가 망가져버려. 그런데 그 현상은 벨라를 점칠 때도 나타나거든. 세계 곳곳에 예외가 드문드문 있어서 처음엔 당신의 이상함을 몰랐어.”
이성진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수십 수백 번 점을 치고, 역탐지에 걸려 저주에 걸리고, 그래도 몰랐어. 위화감을 눈치챈 건……우연이었어. 어쩌면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세계의 축과 교감하지 못했더라면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거야.”
“선생님도, 세계의 축이…….”
“운명의 흐름을 따라 도달할 수 있었단다. 세계의 축을 통해 읽으면 운명을 더 선명히 볼 수 있지. 다만 그걸 해석할 수 있는지는 본인의 역량에 달려 있고.”
포츈이 보석 하나를 꺼내 이성진의 상을 비췄다. 상이 선명해지기도 전에 보석이 산산 조각 나 흩어졌다.
“이래봬도 축의 힘을 받아 만든 보석인데 말이지.”
포츈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저것도 축의 법칙을 점쳐 만든 물건이야. 최후의 점을 치는데 저만한 도구는 없어. 덕분에 보다 확실히……아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을 제대로 볼 수 있었어.”
“…….”
“당신은 있지, 그토록 강대한 영혼을 가지고 운명의 중심에 가까운 이들과 함께하면서도 빛나지 않아. 이래봬도 당신의 운명은 많이 신경 쓰고 있었는데, 위화감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란…….”
포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빛나고 있는 줄 알았지. 세계의 축과 접촉해 세계에 존재하는 ‘운명의 갈래’를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에서라면 당신들의 영혼을 읽을 수 있을 줄 알고 조사했어. 그럼에도 당신들의 운명을 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어. 가장 먼저 눈에 띤 건 강인하의 운명이었어. 강인하도 요즘 운명을 읽는 게 많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당신들만큼은 아니니까. 그다음엔 최인성, 그다음엔 레일리와 이소영…….”
당사자인 이성진이 대꾸해주지 않는데도 포츈은 어딘지 즐거운 얼굴이었다. 항상 점잖았던 포츈의 생기 어린 눈빛에 오시언은 가슴이 죄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을 번갈아 느꼈다.
“처음엔 만져서 읽어 보려 했는데, 세계의 인력이 거부하더라. 대신 카드로 읽었지. 그것도 새블레의 방범마법과 당신의 가호 때문에 곧잘 끊겼지만.”
“…….”
“당신과 유은하의 운명을 본지는 한 반년 쯤 됐나? 반가워하며 카드를 썼다가 된통 당했었지. 당신 그때 눈치채고 되돌려준 거지?”
“모를리가.”
“그래, 그만한 저주를 돌려줬으면서 설마 몰랐을리가 없지. 하지만 모르는 게 보통이야. 호기심 삼아 션의 운명과 접촉해 봤을 때도 눈치챈 기색은 없었는걸.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새블레를 점칠 수 없게 돼서 곤란했어. 어떻게 하면 세계의 축에서 정보에 접근하는 걸 그렇게까지 막을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
“…….”
“그래도 운명의 갈래에 새겨진 운명이 사라지진 않으니까, 틈만 나면 운명의 갈래에 들어가 운명의 흐름을 지켜봤어. 유은하의 운명은 예상대로 갈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있었고, 당신은, 별무리와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길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더라. 의문스러웠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처음에는.”
한편 오시언은 포츈의 표현에서 기시감을 느꼈고, 곧 깨달았다.
오시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예지가 가능한 점술가로서 예언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별무리 일행이 로타에게 예언을 전해 들었음을 알고서 어떤 예언이었는지 알려 달라 부탁했다. 어째서인지 로타의 예언에 관한 기억은 마법으로 재생할 수 없을 뿐더러 유은하의 문자마법에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기억력이 좋은 이성진을 통해 오시언은 모든 대화를 답습할 수 있었다.
포츈이 말한 ‘운명의 갈래’는 로타의 입에서 나왔던 ‘천지의 흐름’, ‘길’과 닮은 부분이 많았다.
‘그 사람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구나.’
로타는 세계의 축을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몸 하나로, 예지몽을 조절할 수 없는 유은하와 달리 스스로의 의지로 세계의 진리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며 세계의 힘에 익숙해지니 감각이 좀 더 열리더라. 운명을 가늠하는 방법이 길과 가까운지 먼지만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됐어. 운명의 갈래에 있는 자잘한 길이 좀 더 잘 보이게 됐어. 그런데 중심 길은 항상 유은하의 운명이 닿아 있더라고. 그러다가……당신의 운명이 별로 크지 않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
점점 로타의 말과 같은 부분이 많아졌다. 그래서 오시언은 의아해졌다. 로타는 그런 사실들 전부를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이야기했다. 대사에서 그게 느껴졌다. 포츈이 느낀 이상함이란 대체 뭘까.
“의문이 조금 커졌지. 세계가 멸망하는 걸 막는 세계 수호 연맹의 중심 멤버인 당신의 운명이 크지도 않고, 하물며 중심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다고? 과장할 것 없이 우리는 이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있어. 당신은 우리를 막는 한 축이고, 별무리 중에서 가장 빨리, 가장 높이 올라갔잖아.”
‘확실히.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루키아, 하르펜, 로타처럼 차원이 다르게 강하면서도 운명의 큰 사건에는 멀리 떨어진 자들도 있으니까. 키메라처럼 운명을 부여 받았다기에는 애매한 생물도 만들어 냈으니까.”
‘맞아. 그럴 수도 있어. 준영이처럼, 약하더라도 큰 역할을 부여받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오시언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꺼풀을 일정하게 깜빡였다. 어쩐지 풍경이 조금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의문스러워서, 어차피 운명을 직접 읽지 못하는 만큼 요주의였으니까, 계속 지켜봤어. 시선이 짜증났는지 중간중간 존재감이 흐려지더라? 아예 안 보이는 날도 있었지. 그렇게 살피고, 둘러보고, 크기와 위치를 비교해보다가, 문득 알았어.”
포츈의 눈동자에 흥분을 참는 듯한 긴장감이 서렸다.
“사실 난 그때까지 당신의 운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걸.”
말을 하고 포츈은 한순간 오시언을 보았다. 오시언은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로 일정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포츈은 곧 다시 미소 지었고, 말을 이었다.
“내가, 혹은 우리가 보아온 당신의 운명은, 유은하, 최인성, 이소영, 강인하,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의 운명이 섞인 빛깔이 마치 당신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어.”
‘성진 님의 운명은 크지 않아요. 그렇다기보다는……여러분의 운명에 섞였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성진의 입에서 나왔던 로타의 대사와 비슷한 내용인데도 뉘앙스가 전혀 달랐다.
오시언은 습관적으로 카드를 매만졌다. 원래 사람의 운명은 인연과 만나고 이어지며 섞이기 마련이다. 이성진 앞에서 웃는 포츈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었다. 바람 소리가 커졌다.
“그걸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어. 수십 번 곱씹고서야 비로소 위화감이 이상함으로 내게 와 닿았지. 그러고 나서야 당신의 운명이, 얼핏, 보였는데…….”
처음으로 이성진이 반응했다.
“결국 보았나.”
포츈은 비로소 흥분을 태도에 드러내며 양손을 모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축에 감겨 있는 사슬, 제약……끝없이 깊은……영혼……서약……. 하하! 드디어 기억났다. 드디어 말로 나왔어. 이해할 수 없어서 단편적인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드디어……. 몇 번을 반복해도 세계의 축에서 빠져나오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그래도 했던 생각은 잊히지 않았기 때문에 되짚을 수 있었는데, 동료들에게 말이 닿지 않더라고.”
“…….”
“운명의 중심과 가까이 있음에도 세계에 제한당하고 있는 운명이라니, 대체 어떤 경로를 거치면 그럴 수 있는 거지? 생각해 보면 당신은 기이한 부분이 참 많아. 점술로 운명이 읽히는 걸 눈치채고, 반격하고, 세계의 축에도 그 영향이 더해지고, 영혼의 자각을 통해 발현된다는 ‘문장의 가호’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질 않나.”
포츈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애당초 ‘종말’이라는 힘의 성질부터 이상해. 자연마저 겁을 먹다니. 거기다, 제아무리 대단한 특수속성이라 할지라도 보통 마법과 함께 성장하는 법이야. 특수능력, 특수속성, 유은하는 단계적으로 성장한 기록이 있어. 하지만 당신은 어릴 때부터 거의 완전했어. 그런 것 같더라. 문장의 가호도 초월자가 되자마자 썼다지? 아니, 애초에, 당신이 극복이란 표현이 쓰일 만한 전투를 치른 적이 몇 번이나 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당신은 강해져 있어.”
“…….”
“당신의 한계는 어디지? 어떻게 강해지는 거지?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눠도 알 수 없는 그 미지에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 무엇보다 얼핏 느낀 그 운명…….”
“…….”
“있잖아, 당신은 정말로…….”
포츈이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야?”
바람소리가, 세계의 진동이 그들의 대화를 먹었다. 포츈이 흠칫하여 어딘가를 보았다. 포츈의 옆으로 카드가 한 장 떠올랐다. 오시언 역시 다급히 카드를 한 장 꺼내 뒤집었다.
“왜 그래?”
“시카……!”
“너는 아직 시카를 점칠 수 있구나.”
“…….”
“그래, 너와 아멜리아는 시카와 특별한 사이었으니까. 가족이나 매한가지였지.”
처음 안 사실에 레녹은 오시언을 내려다보았다. 오시언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들어 확인한 사실을 말했다.
“시카와 싸우러 간 팀의 상태가 이상해. 시카랑 섞였어.”
“명계 쪽은?”
“무슨 일 있어? 명계는 또 왜?”
“시카의 영역은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으면 나도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아. 조금 전 명계에서 시간이 멈춘 자가 생겼어. 김미영,”
답지 않게 돌려하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녹과 오시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오시언은 이성진이 부르는 이름에 해당하는 이들의 흔적을 카드로 열었다.
“─레일리, 시온, 시몬.”
“엘리시아랑 강인하는?”
“아직 숨 쉬고 있어.”
“명계에 많이도 갔구나. 시체를 견제할 생각이었겠지만, 명계에 살아있는 이가 몰려가는 건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수 없어. 하긴, 너희에게 선택지가 많진 않았겠지만.”
동료의 죽음을 안 이성진의 기세가 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포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부러 시간을 끈 건 아니야. 나답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을 뿐. 대답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알게 된 걸 가슴에 묻은 채 죽는 건 아쉽잖아? 설마 우릴 상대로 희생 없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누가 이길지 죽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전쟁터라고?”
“…….”
“미안……내 힘으로는 명계를 점칠 수 없어.”
이어진 오시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성진은 바닥에 꽂아 두었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어라, 답지 않게 친절하네?”
“나는 필요하다면 살인을 서슴지 않지만,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진 않아.”
“고결하기도 하지.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당신의 정체가 어느 것이든……그 고결함이 재수 없기도 하고, 차라리 기쁘기도 해.”
기력을 다 내보내기라도 한듯 피곤한 얼굴로 포츈이 잠시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하다못해 감상을 들려주겠어?”
“네가 안 건 ‘거기까지’인 거군. 상정 범위 내다.”
“후후……하긴, 내가 안 진리는 절반짜리였지. 추측이 맞기나 했을지…….”
“0점부터 가산한다 치면 네 진실의 점수는 10점 정도다.”
“일단 맞았다는 건가? 그렇다 쳐도 짜네. 그 정도 진실에 심기가 상해 날 죽이러 온 건가?”
“알아내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올바른 절차를 거치느냐다. 아는 자는 내 앞에서 말을 제한하지. 하지만 너는 거치지 않았기에 말을 하고 제재를 받았어.”
“확실히 세계가 원래의 형태였다면 나는 세계의 축에 접촉하지 못했을지도…….”
“네가 어떤 금기를 저질렀는지도 염두에 둬야지.”
“그런 건가.”
포츈은 안타까움을 담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웃어보였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중 가장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라고 생각해?”
“시카와 베로니카. 베로니카도 금기를 몇 번 저질렀으니 완전하진 않아. 베로니카에게 그 이야기를 했나?”
“안타깝게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이성진의 검에 섬뜩한 살기가 서렸다.
이 세계는 포츈과 칼리엔테스의 의지를 따라 운명이 조작된다. 칼리엔테스의 마법은 생물교감. 살아있는 것들과 감각을 교감하며 그들을 강화하는 능력이다. 포츈과 칼리엔테스의 손이 미친 생물들의 운명은 끊기지 않고, 그 외의 힘은 비틀어진다.
허나 이성진의 말대로 운명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고, 나타난다. 이성진의 힘이 폭사된 순간 세상의 모든 운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단 하나, 포츈이 앉아 있던 세계의 축을 이용해 만들어진 의자를 제외하고.
“그러니 알아둬. 내가 너와 베로니카를 고른 건 단순히 너희가 나를 짐작했을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에 더해서 너희가 트라베리아이기 때문이다.”
살기 어린 이성진의 눈빛을 마주해 중압감에 짓눌리면서도 포츈은 기쁜 듯이 웃었다. 비틀어진 미소였다.
“심연에서 꿈쩍도 하지 않기에 기계 같은 자들인가 했더니……마지막 순간에 재미있는 걸 알았네.”
“죽인다면 자신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똑똑히 아는 놈을 죽이고 싶었다. 내 말이 닿는 놈을 죽이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을 뿐이야.”
“당신이 있는 한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거야? 힘으로 부술 수 있으니까? 하하, 당신이 그러는 동안 당신의 동료는 죽었어. 목숨은 그렇게 덧없는 거야.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고, 난 지금도 당신이 무섭지 않아.”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아. 세상이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정했다.”
“…….”
“하지만…….”
칼리엔테스, 레녹, 오시언은 세상의 진실에 닿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어진 이성진의 말은 똑똑히 귓가에 와 닿았다.
“하……하하하.”
포츈의 눈가에서 허망함을 담은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