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06
‘동료와 그림자를, 연결……할 수 있어.’
싸움을 끝내고 지쳐있을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네가 죽음을 건다면 나는 삶을 걸겠어.’
살아 생생하게 반짝이는 힘과 죽음을 건 힘. 어느 것이든 고귀하고 무거운 힘이다.
‘그리고 계약서에, 걸……대가는…….’
그러나 최인성이 대가를 떠올리는 것보다 먼저 유클라프가 알피스의 핵심에 다시 손을 올렸고, 최인성과 유클라프를 중심으로 탑의 힘이 흘러 넘쳤다. 최인성은 또 한 번 거센 심연의 격류에 휘말렸다.
최인성은 그림자의 핵심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정신이 몽롱해지지는 않았다. 이는 현실을 침식한 그림자가 단단히 제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인성은 격류에 휘말리면서도 유클라프의 몸에 연결되어 퍼지는 힘을, 그가 구성하는 세계를 직시했다.
그들은 언제고 과거에 사로잡힌 채 과거를 위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세계의 심연에 세워진 관제탑의 영역은 죽음의 힘을 기반으로 둔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은 바람을 토대로 세워져,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힘으로 바꾸고, 죽은 자의 궤적을 따라 세계를 연결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존재조차 바친다.
그건 최인성이 원하는 세계와는 정반대였다.
최인성이, 새벽별무리가, 인간이 원하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세계는 살아갈 수 있는 세계다.
그 모습마저 현실과 그림자의 대비 같았다. 그러니 삼킬 수 있다. 아직 가능하다.
‘모두들, 버텨줘.’
최인성은 각 층에서 커븐 로드의 존재로 이루어진 공간의 힘을 버티고 있을 그림자와 가디언을 격려하곤 유클라프가 구성한 세계 아래에 자신이 생각하는 생명의 세계를 이었다.
유클라프가 먼저 커븐 로드의 차원들과 길을 연결해 둔 덕에 그림자를 잇기 쉬워졌다. 처음엔 동료들의 그림자를 연결했다. 유은하, 이성진, 강인하…….
그림자를 연결하자마자 심연의 그림자 세계에 익숙한 힘이 밀려들어왔다. 우주의 꿈이 보다 깊고 광대해졌고, 시간의 바다가 넓어졌다. 몸을 무겁게 만드는 멀미를 심호흡과 함께 밀어내면서 최인성은 얼핏 보랏빛을 띠는 시간의 바다를 통해 이성진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읽었다.
시간은 모든 공간에 연결되어 있되, 현실의 축을 바로잡아 주는 힘이다. 꿈속에선 언제든지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지만, 그건 정신의 체감 시간이다. 얼마나 긴 꿈을 꾸든 생물의 육체는 살아 숨 쉬는 현실에 맞춰 눈을 뜬다.
결국 시간이 진정으로 유의미한 힘을 가진 장소는 생물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탄생하고, 성장하고, 경험하고, 늙어, 언젠가는 죽는다.
그렇기에 시간은 세상에 현실이라는 증거를 부여하는 힘이기도 했다. 때문에 시간을 하나로 연결한다면 죽은 자의 세계조차 자신의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고마워. 이 힘이 지금 필요해.’
그림자 한편에 소속마법의 실이 그물처럼 뻗어지더니, 그 위에 태양의 불씨가 타올라 퍼졌다. 그렇게 강인하는 죽음마저 삶으로 전환시키는 생명의 가호를 최인성의 그림자에 전했다.
‘소영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최인성은 시카의 영혼에 생긴 그림자를 따라 이소영을 불렀다. 이소영의 바람은 최인성이 탑 안에서 우주의 꿈길을 걷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러니 파편만이라도…….’
후우…….
얼음 결정을 닮은 반짝임과 함께 한숨처럼 약하지만 이소영의 것이 틀림없는 살아 있는 바람이 그림자에 밀려들었다. 바람은 우주의 꿈에 섞여들어 우주와의 교감이 활발해지게끔 도와주었다.
죽은 이의 마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 있는 힘에 최인성은 가슴에서 울컥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꾹 억눌러 삼켰다.
그렇게 전장에 있는 익숙한 그림자를 차례차례 연결했다. 그러면서 연결한 동료의 근처에 있는 그림자도 가져왔다.
김미영을 찾았을 때 최인성은 비로소 전쟁의 또 다른 사망자들을 눈치챘다. 모두가 살아남기는 어려운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잇따라 승리했다. 하지만 희생 없는 승리는 불가능했다…….
가슴에 쌓이는 울분을 힘을 증폭시키는 재료로 삼았다. 그러나 그때, 우주의 꿈을 통해 동료들의 기억이 하나의 정보로 모이며 전해졌다.
지금 이 세계의 이형적인 구조, 이성진의 말, 엘리시아의 사령과 싸우는 강인하, 그 뒤에서 치료마법을 퍼붓는 정예리, 디나, 라이라……이성진과 함께 제어장치의 앞에 서 있는 유은하.
‘내가 이기지 않으면, 이기지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야.’
이번엔 가슴에 밀려드는 벅찬 감정을 세계를 증폭시키는 재료로 삼았다.
삶을 향해 걸어가는 살아 있는 그림자는 결코 커븐 로드의 존재성으로 이루어진 차원의 힘에 뒤지지 않았다. 뒤지긴커녕, 마법사들이 그림자에 자신의 의지로 동조해 준 덕에 힘으로는 금방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클라프가 쥔 영혼들을 이겨 낸 마법사들의 그림자다.
그러나 그 모든 그림자를 아우르는 기둥인 최인성의 힘이, 제어력이, 유클라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반 년 이상 모든 세계를 바꾸고 지탱했던 경험이 다시금 역력한 차이로 다가왔다.
존재를 건 힘과 육체의 일부를 건 힘. 어찌 보면 이 차이는 소망을 향한 간절함의 차이이기도 했다.
‘나도 승리가 간절해. 하지만 간절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 순 없어.’
최인성은 깊어진 우주의 꿈을 걸어 그림자의 핵심에 연결된 세계의 핵, 혹은 핵의 그림자에 좀 더 깊게 동조했다.
‘이 간절함은 모두와 함께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니까.’
최인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감정을 그림자들과 가디언 모두 읽었다.
‘그렇다면…….’
최인성이 결심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전에 그림자와 가디언들 모두 동참 의지를 표했다.
「주인님, 효율적이게 가자. 여기서 트라던트를 제일 잘 아는 게 누구게? 그 안에서 제일 잘 움직일 수 있는 건 또 누구게? 그러니까 주인님이 컴퓨터 안에 들어가 갇혀 있겠다는 생각은 일단 접자, 응? 관리자는 전체를 보며 명령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지.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하지만 가연, 넌……갇혀 있는 게 싫어서 나한테 온 거잖아.’
「괜찮아. 이번엔 혼자가 아니잖아? 주인님이 곁에 있어줄 테고, 주인님과 함께 영이랑 유이도 곁에 있어줄 테고, 주인님이 여기 있는 이상 많은 사람들이 곁에 찾아와 줄 거고.」
「잠깐잠깐, 너희만 거는 건 옳지 않아. 여기에 온 이상 우리 모두 운명 공동체야. 건다면 함께 걸자고.」
「동의. 첸, 미안.」
「나도, 혼자가 아니라면 무섭지 않아.」
「하지만…….」
「가연이 말한 대로, 효율적으로 가자고. 한 명이랑 여러 명, 어떤 게 승산이 높은지 설마 모르지 않겠지? 그리고 이거 상당히 괜찮은 선의 대가라고 생각해. 전부를 거는 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존재를 거는 거고, 거기다 유클라프는 이 순간이 끝나면 죽지만, 우린 살아서 계속 돌봐주는 거잖아?」
잠깐의 대화를 통해 최인성은 의견을 조율했다.
최인성은 곧 결심을 내리고 그림자 계약서에 새로운 계약을 새겼다.
‘세계를 복구하기 위해 너희와 계약할게. 목숨을 걸 순 없지만, 대신 우리의 미래를 이 세계에 내어 줄게. 세계가 복구되더라도 세계가 안정될 때까지, 약 10년 간 이 관제 도시 안에서 세계를 관리할게. 약속의 증표로 내 사역수 중 한 명을 이 컴퓨터에 묶어둘게.’
이 말은 즉 10년간 관제 도시 안에만 있겠다는 뜻의 행동 제약이었다. 말 그대로 미래를 바치는 계약이었다.
최인성의 계약 갱신 제의에 축의 중심이 긍정적인 의지를 표했다.
「단! 1년마다 계약을 조정할 수 있게 해줄 것! 계약이 체결 된 후에 대가를 다른 대가와 뒤바꿀 수 있게 해줄 것. 우리 편엔 뛰어난 마법사가 많아. 새로운 대가로 인해 세계가 빨리 안정된다면 너희에게 나쁠 것 없잖아?」
캐시가 재빨리 계약에 유리한 조항을 몇 개 추가했다.
세계가 미래를 거는 최인성의 계약에 긍정적인 의지를 보인 것은, 설령 세계가 재구축된다고 해도 인위적으로 복원되고 재구축 된 세계가 완전할지 세계조차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불안정함이 적다면 굳이 인간의 힘을 빌릴 필요 없잖아? 어차피 완벽한 건 없는 데, 감정을 담은 인위적인 조작이 괜히 길어지면 세계의 균형엔 별로 좋지 않은 거 아닐까?」
‘대신 세계가 심하게 불안정해지면 죽기 전에 언제든 새로 계약할게.’
곧 최인성의 컴퓨터에 글자가 새겨졌다. 유클라프의 계약서에서 본 것과 같은 형식의 글자였으나, 이번에는 어쩐지 읽을 수 있었다.
『세계의 복구를 위해 본계 ────는 본계의 마법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하나, 계약자 최인성과 그 부하는 세계의 인위적인 복구로 인한 균열이 해결될 때까지 약 10년 간 관제 도시 안에서 세계를 관리한다. 그 증표로 최인성의 마법(오른 눈동자, 가연)을 관제 도시의 중심에 고정한다.
하나, 계약 기간은 1년마다 조정 가능하나, 기간을 줄이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세계의 균열이 줄어들지 않았을 시 대가 교환은 인정되지 않는다.
하나, 계약이 끝나기 전에 최인성이 관제 도시에서 나갔을 시, 최인성의 힘은 관제 도시와의 거리만큼 약해진다. 관제 도시의 시간으로 24시간이 지나도 귀환하지 않을시, 패널티와 함께 강제 소환된다.
이 계약의 대가로 본계는 최인성에게 본계를 일부 열람할 자격으로써 대체 눈동자(오른쪽)를 제공한다.』
“……어?”
본계 뒤의 글자는 어쩐지 읽을 수 없었다. 이어 보상을 확인한 최인성은 눈을 크게 떴다.
『단, 이 모든 계약은 최인성이 살아있음을 전제로 성립된다.
계약의 증인은 ─── ────, ─── ───, ───이다.』
증인의 이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뜻하는 글자를 썼지만, 진짜 사람일지, 애초에 생물이기나 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최인성 앞에 마지막이라는 듯 선명한 하얀 글자가 새겨졌다.
『계약하겠는가?』
곧 글자는 최인성의 눈앞에 모여 은색 눈동자로 변했다. 최인성은 눈앞에 나타난 눈동자를 오른손에 쥐고 그림자만 남은 오른 눈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로써 최인성과 세계의 계약은 체결되었다.
최인성은 평소 색깔과 정반대인 오른쪽 눈동자와 함께 세계를 주시했다. 새로 생겨난 눈동자를 중심으로 오른 뺨에 맑은 빛을 뿌리는 문양이 새겨졌다.
묘한 고양감이 최인성의 온몸을 휩쓸었다. 평소보다 훨씬 민감해진 감각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최인성의 의지를 따랐다. 세계의 축이, 세계의 그림자가 선명히 보였다. 세계가 전하는 의지가 눈동자를 통해 읽혔고, 우주의 꿈이 순식간에 깊어졌으며, 그림자끼리의 연결이 순식간에 강해졌다.
아, 이게 자연과 교감한다는 것이구나.
최인성은 온몸으로 그 사실을 실감했다.
빌린 눈동자를 통해서 라고는 하나 본인의 몸을 중심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인성은 이번엔 자신의 세계와 똑같은 형태로 우주의 꿈을 불러오며, 심연의 세계에 비친 그림자를 하나하나 선명하게 의식했다.
동료들의 그림자를 그림자 탑의 층에 연결했다. 19층, 18층, 17층……1층, 다시 20층.
모든 그림자를 자신의 시간에 합치고, 현실의 시간을 시간의 바다에 녹여 합치며, 최인성은 이번에야 말로 확신했다.
유클라프의 과거도 현실도 그림자로 삼킬 수 있다.
최인성은 심연의 수많은 공간과 연결되었고, 트라던트 탑을 통째로 삼켰으며, 이해했다.
유클라프의 마법을 보고, 기억했고, 또 삼켰다.
이 세계에서 최인성의 그림자가 담을 수 없는 것은 이제 없다.
거기다 과거와 죽음으로 이루어진 유클라프의 세계와 달리 그림자 세계는 살아 있는 이들의 마음과 기억으로 이루어졌다. 현실 보다 더 현실 같은 세계가 아닌가.
‘그러니 이제 너희를 삼키고 우리가 진짜가 될 차례야.’
한 존재의 죽음으로 완성된 세계가 그들을 물리쳤던 그림자에 덮어 씌워졌다. 탑 알피스의 꿈이 그림자 드림 웨폰에 의해 갈라지고, 현실 곳곳이 그림자에 물들었다. 최인성은 세계의 흐름을 선명히 느끼며 이번에야말로 유클라프의 근원을 향해 똑바로 심연의 검을 내질렀다.
콱!
똑바로 내질렀다고는 했으나, 감각이 좁아진 유클라프는 볼 수 없는 범위에서, 그것도 그림자를 통해 공간을 접어 날아온 공격이었다. 알피스의 힘이 잘려나가며 심연의 검이 유클라프의 가슴에 꽂혔다.
“후우…….”
지금 세계를 이끄는 것은 명백히 최인성이 이룩한 그림자 세계였다. 유클라프의 주위를 제외하면 모두 그림자로 가득했다.
그러나 트라베리아의 마녀는 죄다 미친놈들이라, 심장이 찔렸다고 포기하는 놈은 없다.
이를 악문 채 유클라프는 자신이 바꾼 세계에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형태를 계속 입력했다. 최인성의 새로운 오른 눈은 흘러넘치는 영혼의 흐름조차 선명히 포착했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걸었고, 아껴뒀던 마지막 힘까지 퍼부었으니, 유클라프가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드높이는 것뿐이었다.
우주의 꿈을 통해 흘러들어온 유은하의 악몽에 침식당하며 시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만은 최인성도 유클라프도 그 장면에 눈을 빼앗겼다.
흘러들어온 유은하의 악몽은 바로 바다였다. 현재 악몽 벨라 트리저의 서식지가 된 바다는 자연히 칼날 같은 성질을 띠게 되었다. 벨라의 의지와 관계없이, 소니아의 꿈과 시나의 몸이 날카롭게 갈렸다.
유클라프는 드물게도 동요하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벨라의 영혼이 연결되지 않더니…….”
“…….”
“우리의 왕은 결국 최후의 소원마저 이루지 못했나…….”
유클라프는 최인성을 마주보며 약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잔인한 구석이 있군, 너희도.”
“너희만 하겠어?”
날카롭게 대꾸한 최인성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별무리가 항상 그래왔듯이, 트라베리아는 심장을 찔렸다고 멈추는 놈들이 아니고, 고작 그걸로 쉽게 죽어주는 놈들도 아니다.
시나는 그 독기를 전 계약자였던 소니아에게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 상처를 감수하며 칼날 같은 악몽을 밀어냈다. 유은하의 악몽은 본디 자신보다 약한 정령의 조종이 먹힐 정도로 약하지 않다. 허나 한때 소니아는 벨라의 허락을 받고 벨라의 꿈을 수호했다.
유클라프의 마음이 시나에게 뒤질리 없다. 소중한 이의 목숨을 받고 싸워왔으며, 어쩌면 그 소중한 이까지 포함해 되살리려고 하는 자. 유클라프의 그림자인 최인성의 안에 유클라프의 소원이 흘러들어왔다.
유클라프가 이루고자 하는 소원 대부분은 결국 그의 손에 꿈이라는 힘을 쥐어준 소니아와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알피스의 현실은 그림자에 휩쓸리면서도 계속 유클라프의 소원에 마음을 실어준다.
‘힘만 따지고 보면 여전히 내가 뒤쳐져. 많이 유리해졌지만, 아직 한 발이……유클라프를 완전히 밀어 낼 한 발이 부족해.’
유클라프의 안에 그림자를 퍼부을수록 유클라프의 꿈과 유클라프가 보는 세계가 최인성의 안에서 선명해졌다.
명계를 초석으로 삼은 죽은 이를 살리기 위한 장치. 자신들의 죽음을 바쳐 죽었던 이들을 되살리고, 그들이 행복하기 위한 안전한 세계를 만든다.
유클라프의 세계에 새로운 힘이 더해졌다. 베로니카의 마법이다. 다만 베로니카는 이성진에게 제압된 상태이므로, 얽힌 것은 미리 설치된 장미꽃의 회로와 장치의 힘이었다.
이렇게 보니 베로니카의 마법 역시 세계의 축에 닿는다는 것을 알겠다. 어쩌면 유클라프처럼 세계의 축과 계약했을지도 모른다.
정비소의 힘에 대항하듯 그림자에서 전해지는 유은하와 이성진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와는 반대구나.’
최인성은 빠르게 자연과 교감하는 눈동자에 익숙해졌다. 우주의 꿈을 헤맸던 경험 덕이 컸다.
황혼을 품은 이성진의 그림자가 밀려든 순간 최인성은 클라인 남매와 싸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죽이기 위해, 복수를 갚기 위해 그림자를 넓혔다. 클라인 남매의 음악을 부수기 위한 구축한 황혼의 세계는 죽음의 살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어.’
그때와 달리 죽음의 힘을 품은 것은 유클라프의 세계고, 살고자 하는 희망을 품은 것은 최인성의 그림자 세계다.
‘죽이는 게 아닌 살기 위한 그림자.’
최인성은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필요한 힘이 갖춰졌는데도 밀어 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마법과 감정을 통해 보다 유클라프를 상대하기에 알맞은 답을 찾아 낼 수밖에 없다.
‘소망, 긴 시간, 세계.’
유클라프를 이렇게까지 버티게 하는 것은 소망이다. 그 소망은 유클라프에게 자신의 존재를 맡긴 트라베리아의 마녀 모두의 소원이기도 했다.
‘응. 그렇지. 살고자, 살리고자 하는 이 소원 역시 결코 나 혼자만의 소망이 아니야. 생각해 보면 내 힘도 살리는 데는 안 맞아.’
최인성은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이건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야.’
최인성의 그림자는 세계의 그림자이되,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소망을 담는 그릇이다.
유클라프를 지탱하는 소망을 확인하니, 유클라프가 구성한 소망의 세계 밑에 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를 인식하게 한 건 이번에도 유은하였다. 베로니카의 세계 밑에서 유은하의 꿈이 뚜렷하게 대비를 이뤘다.
‘맞아. 좀 더 넓게 봐야지. 이 세계의 크기에 맞게끔.’
지금 최인성과 부딪치고 있는 영역은 이제 공간의 심연만이 아니다. 마법 장치의 부품인 트라베리아의 모든 영역이다.
자각이 조금 늦었을 뿐 동료들의 힘은 그림자 세계를 통해 커븐 로드의 영역을 침식하는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그림자들이 본격적으로 트라베리아가 만든 모든 세계를 침식했다.
최인성의 세계에 연결된 그림자들의 소망이 별빛으로 변해 반짝였다. 그 소망들이 모이고 모여 심연의 검을 새로 벼렸다.
최인성은 심연의 검을 유클라프의 가슴에 꽂은 채로 한 발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너희에게 아주 많이, 죽었지만, 죽고 말았지만.”
최인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희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
최인성은 손목을 비틀고 손에 힘을 주어 심연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트라베리아의 손에 죽은 인간은 수십 억이고, 그 모든 죽음은 트라던트에 갇혀 트라베리아의 무기로 변했다. 하지만 그들의 소망이 그들을 파괴한 트라베리아의 소망과 같을 수는 없었다.
설령 지닌 힘의 크기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세계를 뒤튼 것은 고작해야 40명 남짓의 마녀였고, 삶을 원하는 인간은 수억 명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처음부터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콰과과과과곽!
심연의 검이 거칠게 현실을 베었다. 검에 담긴 그림자의 집념은 유클라프와 함께 심연의 공간 모두를 길게 베고 지나갔다.
“아…….”
검이 새긴 금을 따라 그림자가 터졌다. 흘러나온 사람들의 그림자가, 소망뿐이라곤 단정할 수 없는 눈물이, 외침이, 절규가, 트라베리아가 이룩한 세계를 모두 집어 삼켰다.
최인성은 유클라프의 모든 것이 그림자에 녹아 눌러 붙을 때까지 힘을 늦추지 않고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유클라프와 알피스의 핵심을 집어 삼킨 후에도 멈추지 않고 트라베리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림자와 세계의 축이 합쳐지고, 그림자의 핵심과 트라베리아의 꿈이 합쳐지며, 거대한 그림자 도시는 새롭게 공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베로니카의 정비소에 들어선 새벽별무리의 정예리, 경찰의 윌리엄, 리브리의 앤서니, 캐티아의 스테이, 네 마법사는 영역에 들어선 순간부터 난황을 겪었다.
베로니카의 세계는 아주 복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클라프와의 차원과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세계와 연결된 장소다. 유클라프의 영역이 모든 공간에 연결되어 세계의 움직임을 조정하고 있다면, 베로니카의 세계는 그 움직임의 균형을 조율하며 모든 세계의 정보를 모아왔다.
그러나 세계의 정보라면 연맹도 변화하는 세계를 떠돌며 상당수 모아두었다. 힘을 합치면 곧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였지만 쉽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영역에 쌓인 정보량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세계를 뒤엎고자 하는 트라베리아의 작전은 100여 년 전부터 시동이 걸렸다. 그들은 성물을 모으기 위해 지구를 뒤졌고, 트라던트를 알맞은 형태로 설치하기 위해 우주를 뒤졌고, 세계의 축과 접촉해 세계를 살폈으며, 세계를 뒤바꾸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측했다. 그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마법식을 정립했다.
하물며 세계의 정비소는 베로니카가 명령하면 몇 번이고 재구성된다.
정예리 일행이 한참 헤매고 있을 때쯤 싸움을 끝낸 마법사들이 정비소에 진입해 그들과 합류했다. 하무라, 데미안, 첸, 모두 일정 이상의 감지능력과 특수능력을 겸비한 마법사였으나, 그들의 힘이 더해져도 길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 후로도 일행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헤맸고, 어쩌면 베로니카에겐 싸울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긴 트라베리아에 있어 최후의 보루에 가까우니까요. 어쩌면 이곳이 이런 형식인 건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봤자 리더님 일행이 오면 무너질 보루이지만요.”
“……아뇨.”
천사의 힘을 사용화여 진화시킨 감정서를 확인한 정예리는 첸의 말을 부정했다.
“명계가 개방되고, 우주의 심연이 길로 변하고, 차원의 관제탑이 두 번째 기둥을 삼키면……은하 언니라도 여기에 접근할 수 없게 된대요. 아, 하지만, 성진 오빠라면 비집고 들어올 수 있지만, 파손을 감내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좋지 않네.”
하무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세계의 제어 장치인 정비소를 거닐고 있는 지금도 그들은 트라베리아가 만든 장치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제어 장치가 파손되면 세계를 되돌리는 데 손해가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세 사람이 다 지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군.”
다른 이들의 심정도 데미안과 같았다. 첸이 주위를 주시하며 제의했다.
“그분들이 패배한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이곳은 마녀들의 힘을 먹고 강해지는 듯하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안에서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두는 게 좋겠군요. 저희 힘으로 그게 가능할지마저 의문스럽지만서도요.”
다행히 베로니카에게 그들과 싸울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새롭게 공간이 조립되었을 때, 윌리엄은 자신들이 제어로의 일정 영역 안에 들어선 것을 느꼈다.
몇 번 재조립된 지금의 정비소는 바깥으로 갈수록 성벽이 견고하고, 안쪽으로 갈수록 중심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많아진다.
윌리엄은 마법으로 정비소의 형태를 재현하며 통로가 많아지는 정비소 내부 구역의 외곽을 가리켰다.
“저희는 여기쯤에 있습니다. 마주칠 생각이 아예 없다면 이 선 안으로 저희를 들여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조가 바뀌면서 느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희가 지나간 길을 저희 잔존 마력과 함께 장미꽃 근처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미꽃을 먼저 피우겠다는 건가? 어차피 우리랑 싸우다 보면 피어날 텐데?”
“그럼 역시 시간 벌기일 가능성이 높겠군.”
첸이 쯧 혀를 찼다.
“베로니카는 에리카와 닮은꼴이었지요. 이참에 저희 마력을 새로이 관찰해보려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들이 몇 번 차원의 벽을 넘고, 두어 번 더 세계가 재조립 되었을 때, 정예리의 책에 실린 지도가 좀 더 세세해 지며 기술의 해금을 알렸다. 앤서니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상황에 맞춰 기술이 해금 되는 때가 있다고 했지.”
기술 이름은 ‘생명의 지도’. 관측한 힘의 흐름을 마력으로 붙잡아 목적지로 이동하는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현재 있는 공간의 힘과 흐름을 일정 이상 파악할 필요가 있다.
“헤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왜 지금 와서 해금된 건지 잘 모르겠네요……. 마력량과 관련 있나? 이거, 그렇게 어려운 기술일까요?”
“일단 지금 딱 필요한 기술이긴 하지.”
마법의 소유자인 정예리가 모르는 데 다른 이들이라고 알 리 없었다. 정예리는 해금된 기술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을 중심으로 뻗어진 하얀 선이 나무 모양 그림을 그렸다.
“…아.”
정예리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 나무 같은 형태지만 사실 이건 주위를 떠다니는 힘의 흐름을 형상화 한 것이다. 몸통은 그들이 있는 곳이고, 꽃은 특수한 힘이 있는 곳이며, 갈라지는 가지는 힘의 통로다.
해금된 기술은 본능적으로 사용법을 알 수 있다. 정예리는 축복의 서를 넘겨 페이지를 하나 뜯어냈다. 스틸라에 새겨진 베로니카의 흔적을 보관해 둔 페이지였다.
페이지가 청보라색 보석으로 변했다. 정예리는 보석을 생명의 지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지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새하얀 나무 위에 반투명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 사이사이에 있는 텅 빈 도형이 빛을 뿌리며 점멸했다. 일행은 특수능력과 마법으로 떠오른 마법진을 해석했다.
“재료를 필요로 하는 건가? 생명력과 마력은 들어갔고…….”
“이건 영혼을 가리키고 있군요. 아무 영혼이나 넣으면 됩니까? 아니면 베로니카의 영혼만 받아들입니까.”
“어……베로니카랑 관련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흐음, 어쩌면 재료가 있기 때문에……기술을 쓸 조건이 갖춰졌기에 해금 됐을지도 모르겠군요.”
첸이 자신의 아공간 안에서 작은 방울을 꺼냈다. 한때 베로니카의 측근이었던 라이라의 도움을 받아 만든, 베로니카의 영혼의 힘이 깃든 방울이다.
또 하나의 공백은 윌리엄의 공간마법으로 채워졌다.
그러고 남은 네 개의 공백은 아무래도 특정 길에 들어서 지도에 힘의 흐름을 연결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모양이었다. 정예리는 윌리엄에게 지도를 보는 방법을 설명했고, 윌리엄은 곧바로 이동해 보였다.
베로니카가 세계를 몇 번 재구축해 마법의 완성을 방해했지만, 생명의 지도와 윌리엄의 마법은 필요한 힘이 있는 자리에 그들을 정확히 이동시켰다.
생명의 지도는 자리에 이동하자마자 필요한 힘을 흡수했고, 곧 축복의 서는 일행을 베로니카 앞에 이끌었다.
“와…….”
마녀들이 있는 정비소의 중심은 무척 넓었으며 전쟁 상황과 맞지 않게 온화했다. 다양한 트라던트와 마법석이 선, 문양, 건물 등 무수히 많은 형태를 이루며 연결되었고, 무수히 많은 마력이 작은 빛덩이로 변해 주위에 떠다녔다. 정비소 곳곳에 장치의 원동력으로써, 혹은 서브 조종자로써 뱀들과 키메라가 움직였다.
복잡한 장치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베로니카가 다루고 있는 중심 제어 장치였다. 거대한 모니터와 중심 장치를 감싸는 아카식 레코드의 나선 건반, 모니터 위에서 반짝이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인 아카샤.
장치를 조작하던 베로니카가 곤란한 표정으로 정예리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 벌써 와버렸네. 그 기술은 재미있지만, 지금 와도 난 못 싸워. 괜히 여기가 늦게 열린 게 아니야. 생각보다 별무리의 힘이 강해서, 응, 좀 더 정밀하게 조정할 필요가 생겼거든. 혹시 나 도와줄래? 아님 한 번 더 돌고 오지 않을래?”
적의 따윈 느껴지지 않는 어투에 일행은 한순간 맥이 빠졌다.
정예리가 입술을 깨문 순간 축복의 서가 무언가와 공명했다. 베로니카의 주위로 아카샤랑 꼭 닮은 거대한 링과 공이 움직이는 게 얼핏 정예리의 눈에 비쳤다 사라졌다. 베로니카가 흥미로운 눈으로 또 한 번 그들을 돌아보았다.
“방금 반응 한 거……아, 뭐였더라? 세계의 축과 관련된 건 자주 헷갈린단 말이야.”
「세계에 대한 정보 중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어! 이만큼 알게 된 것도 세계가 약해졌지 때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