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08
정예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 여기에서 바로 명계에 보내줄 수 있어요?”
“여기에서라면 가능해. 마법을 어떻게 쓰면 되는지는 디나와 가디언 하리가 알려줄 거야. 첸, 라이라 혼자서는 힘드니 너도 가.”
“…알겠습니다.”
첸은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주도권이 베로니카에게 있는 만큼 불안 요소는 있지만, 이성진이 온 이상 승리는 확정적이다.
“…그런데 오빠, 왜 명계예요? 명계의 싸움은 인하 언니가 엘리시아를 죽이면서 일단락 된 거 아닌가요?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황인가요?”
“아하.”
다른 연맹의 마법사도 마찬가지로 느낀 의문에 대해 해답을 준 것은 이성진이 아니라 베로니카였다.
“어쩐지……. 왜 나만이 아니라 모두 다 살려두려는 건지 의아했는데, 그렇구나, 힘의 손실을 줄이려는 거구나. 보다 완벽하게 장치를 발동시키려는 거지? 당신……눈치챘구나?”
“…….”
“이 장치를 사용해 죽은 동료를……아니, 세계의 법칙이 뒤틀려 시간이 멈췄을 뿐 사망 명부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인간들을 부활시킬 생각인 거지?”
“……!”
연맹의 마법사, 트라베리아의 마녀 할 것 없이 경악했다. 눈을 부릅뜬 정예리는 곧바로 이성진의 낯을 확인했고, 동요 없는 표정을 본 순간 베로니카의 말이 정답임을 확신했다. 확신하고 첸의 옆에 걸어갔다.
“그렇군요……그렇군요……. 그건 진짜 저 없이는, 하르펜의 마법석 없이는 힘든 일이겠네요.”
하르펜은 인간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가 인간을 만든 목적은 죽은 루키아 폴라리스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정예리의 몸에 담긴 것은 하르펜의 근원이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생명을 창조했던 하르펜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힘을 한계까지 사용하면 분명, 죽은지 얼마 안 된 목숨이라면……!
모두가 싸워 다치는 전장에서 정예리는 대개 달려 나가 함께 싸웠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전사인지 의사인지 물어본다면 정예리는 언제든지 의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설령 그로 인해 직접 복수할 기회가 없어진다 할지라도, 생명을 이 손으로 살리는 것보다 귀중한 기회는 없다. 잃었기에 더 절실히 믿고 있는 신념이었다.
“오빠, 언제든지 보내주세요. 조심하시고요.”
“뭘?”
“마력 조절 잘 하고 애꿎은 거 부수지 말라고요. 음, 하긴, 오빠는 할 땐 하니까 괜한 걱정이려나?”
“알아. 장치가 부서지면 기회도 사라져.”
“기회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이 장치 뿐만은 아니지만.”
“웬만한 건 가지고 있어.”
“흐음, 그러네. 웬만한 건 가지고 있네.”
세상의 누구보다 많은 걸 보고 아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잠시 이어졌다.
“베로니카…!”
벨다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새로운 로드를 불렀다. 베로니카는 쓴웃음과 함께 그녀를 다독였다.
“어쩔 수 없어. 우리의 운명은 결국 유클라프 오빠한테 맡겨졌어. 그렇잖아. 장치를 발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유클라프 오빠밖에 없는걸. 영혼의 모습으로 힘을 쓰고는 있지만, 엘리시아 언니는 결국 죽었는걸. 결국 명계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둘 다 죽었고…….”
“…….”
“그런데 희망이 맡겨진 건 저쪽도 마찬가지야. 승률은 이미 기울었는데, 웃기지. 유클라프 오빠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세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당신들의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아.”
“네가 구축했음에도 너한테는 장치를 발동시킬 자격이 없다는 건가?”
“알면서 물어?”
베로니카의 손 위에 작은 구슬들이 생성되며 합쳐졌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로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엿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조에 불과해. 많은 걸 알고 많은 걸 사용할 수 있어. 많은 법칙을 이 손에 얽을 수 있어.”
구슬과 함께 베로니카의 손에 모인 실들이 합쳐졌다. 오색으로 빛나는 보석을 손에 쥐며 베로니카는 담담히 속삭였다.
“하지만 파고들어 내 것으로 만들진 못해. 무엇보다 나에게는 마음이 부족해.”
베로니카를 뒤에서 지켜보던 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의 복수에 찬성했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족들에게 그것밖에 없음을 알았으니까. 그대로 썩어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으니까. 죽는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쥐어 보고 싶었으니까.”
베로니카는 커븐 로드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었다.
교회를 적으로 생각하지만 전면적인 전쟁에서는 한 발 물러났을 무렵에 탄생한 차세대 마법사. 일족의 증오를 보고 들으면서도 실감하지 못한 마녀.
실비아는 태아일 적 교회의 공격에 당해 죽어가던 부모의 마지막 희망을 건 수호 마법에 의해 보석 상태로 봉인되었고, 오랫동안 교회의 전리품이자 장식품으로써 동족들의 참상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실제 나이는 어리지만 보고 겪은 세월은 더 길고, 다른 커븐 로드들에 뒤지지 않는 증오심을 가슴에 품고 있다.
반면 리피트와 베로니카는 마녀들의 이야기와 행동을 통해 증오를 대물림 받았으나, 그 증오에 깊게 물들지 않은 차세대 마녀였다.
리피트는 일족들을 가엽게 여겼고, 베로니카는 무수히 많이 쏟아지는 악의들을 소화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마음을 반쯤 닫았다. 사람 대신 책을 상대했고, 감정과 한 발 이상 거리가 있는 세상의 정보와 지식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린 시절의 버릇 때문에 베로니카는 지금도 감정이 둔했다.
증오를 토하며 자연사한 부모를 포함하여 트라베리아의 동포들을 사랑하고, 중요한 역할을 짊어졌기에 커븐 로드가 되었지만, 인간들에게 별다른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그들의 목숨을 중요히 여기지도 않는다.
베로니카는 커븐 로드 중에서 가장 간절함이 결여된 마법사다. 그녀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탐구심과 미래를 향한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은 사람들을 정보로밖에 몰라. 함께 걸어온 언니 오빠들이라면 모를까, 본 적도 없는 과거의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수 없어.”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베로니카 자신이었다.
“마법에 있어 중요한 건 올바른 마법식과 마법사의 마음이야. 나는 장치를 작동시킬 자격이 없어. 내가 할 일은 장치의 완성을 도와 세계를 재구축 하는 것과, 그렇게 재구축된 세계를 안정시키는 거야.”
이내 베로니카의 실이 정예리와 첸에게 향했다. 살기는 없었고, 심지어 이성진조차 막지 않았으나, 정예리와 첸은 경계하며 실의 범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실은 넓게 퍼져 그들을 강제로 범위에 끌어들였다. 막으려는 연맹의 마법사들을 이성진이 제지했다.
“괜찮아.”
베로니카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운명의 키는 너희가 쥐고 있지 않으니까.”
정예리와 첸은 이성진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베로니카의 마법을 받아들였다.
“너희 손에 발동되던, 우리 손에 발동되던, 나는 보고 싶어. 정말로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지. 하긴, 너희가 하려는 일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는 다른가.”
빛과 함께 정예리와 첸의 몸이 명계의 지하로 이동되었다. 베로니카는 이번엔 냉정한 표정으로 이성진을 주시했다. 조금 전과 달리 베로니카 주위를 맴도는 나선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너희의 시동자는 유은하야? 아님 강인하?”
“리더야.”
주위를 맴돌던 아지랑이 같은 실들이 주위의 힘을 제압하는 물꼬챙이를 감싸 조금씩 부쉈다.
“그래? 잘 어울리네. 하지만 모든 걸 손에 얻더라도 장치를 원하는 형태로 발동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 모두와 함께 최선을 다해 계산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어. 그나마 영혼을 불러오는 엘리시아 언니가 가장 가능성이 있었지만…….”
장치에서 흘러내린 마력이 베로니카의 손에서 별사탕을 닮은 보석으로 변했고, 새롭게 만들어진 직육면체들이 나선을 그리며 곳곳에 퍼졌다. 별사탕 보석과 연결된 실들에 연동하여 장치의 형상이 바뀌었다. 곳곳에 오색으로 반짝이는 연청보라색 문양과 마법석이 나타났다.
“어떻게 해도 마법을 발동시키는 마지막 조각을 맞출 수 없었어. 마지막 조각에 도달할 수 있는 키는 뭘까? 마음일까, 기술일까, 타고난 재능일까. 시동자마다 다르겠지?”
주위의 실들이 베로니카의 등 뒤에 모이더니 반투명한 날개가 생겨났다. 이윽고 베로니카는 수십 개의 직육면체 보석들이 모여 이루어진 고리를 던졌다.
늘어난 고리가 다시 직육면체로 해체되더니 세계 곳곳에 꽂혔다. 아지랑이 같은 실들이 직육면체 사이에 연결됐다.
이성진은 검을 세워 길게 베었다. 베로니카의 마법들이 번개를 일으켜 검격을 막아 냈다.
그래, 막아 냈다. 이성진의 공격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막아 내는 단단한 방어력에 연맹의 마법사들이 한순간 숨을 삼켰다. 마법과 특수능력을 통해 번개의 성질을 확인한 앤서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패턴이 유은하의 환각마법과 닮았군.”
“유은하의 마법은 그럭저럭 봤으니까. 그래봐야 흉내 내는 정도지만, 이성진 네 마법도 그럭저럭 봐서, 그래도 장치 옆에서는 그럭저럭 버틸 수, 으음, 있으면 좋겠지만.”
이어 베로니카는 그녀의 뒤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려 하던 측근들을 말렸다.
“거기 있어. 내 옆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제압당할 걸? 필요하면 내가 이동시킬 테니까.”
“……미안하다.”
“상대가 이성진이잖아. 어쩔 수 없지.”
측근들은 베로니카의 싸움을 돕기 위해 장치를 증폭시킬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제 자리에 멈춰 베로니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사실 난 그래서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선, 솔직히 믿지 않아. 장치를 설계하는 데 가담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카식 레코드의 주인이고, 그렇기에 세계에서 이끌어 낸 해답에, 아카식 레코드의 해답에 구애될 수밖에 없어. 세계의 대답은 항상 ‘NO’ 였어. 그보다 내가 사활을 거는 건 세계의 재구축이야.”
“…….”
“이 세계의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것에 대해선 들었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베로니카의 안색을 살피던 이성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데.”
“그래? 그럼 지금 알아둬. 그렇다 쳐도 처음 들은 것치고는 동요가 적네.”
“버릇이라.”
퍼진 실과 나선이 그물을 그렸다. 빛나는 그물은 마법부터 물건, 생명까지 모든 것을 분해했다. 내질러진 이성진의 검이 드물게도 그물을 전부 베지 못했다. 심지어 그물은 이성진의 파도를 흡수하여 보다 위험한 마법으로 변이했다.
“자세한 건 제압한 뒤에 들어도 되는 거고.”
“그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하다. 우리도 그러지 못했는데. …하여간 난 쇠한 세계의 복구에 사활을 걸고 있어. 세계를 구석구석 아는 게 아니면 해내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고, 으음, 난 트라베리아의 마녀 치곤 어리잖아.”
빛나는 그물의 원리에 공간의 일그러짐이 섞여 있는 걸 눈치채고 윌리엄은 수 십 발의 탄환을 날려 공간의 일그러짐을 제한했다. 찢긴 그물을 사이로 베로니카는 이성진의 마법을 일부 모아 만든 파괴마법을 터트렸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지식과 경험을 쌓잖아.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고, 하지 못한 일도 너무 많아. 그래서 웬만하면 살고 싶어.”
“사람을 죽여서라도?”
“세계의 존속이 결국엔 더 중요하지 않아?”
베로니카가 주위의 마력을 긁어모아 휘둘렀다. 아지랑이와 실이 모여 생긴 다발이 윌리엄의 공격을 일그러뜨렸다.
종말의 힘을 불완전하게나마 분해하는 다발을 뜯어내며 이성진은 베로니카의 뒤에 선 마녀들을 조롱했다.
“동족을 그토록 끔찍하게 아끼더니만.”
“……무슨 뜻이야?”
“그런 식으로 제 아이를 망치니 좋아? 아멜리아나 앰버가 괜히 말리려 들었던 게 아니군. 그 녀석들이라면 너한테도 말을 걸었을 것 같은데.”
“응, 제안하긴 했어. 나를 걱정하면서,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항상 나를 챙겨주기도 했고, 끌리지 않았던 건 아닌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엘리시아 언니들을 말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어. 봉인 당하기는 싫으니까, 손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야.”
연맹의 마법사들은 초연한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며 문득 이성진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소중하다 여기는 이의 재난을 가볍게 여기고, 살고 싶다는 진심에조차 감정이 깊게 담기지 않으며, 복수에 절실하지도 않은 마녀가 인간의 목숨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그녀의 가치관은 인간은 물론 마녀들과도 사뭇 다르다. 마녀들만큼 깊게 미치진 않았지만, 분명 마녀 중 누구보다 이질적이게 가치관이 일그러져 있다.
그것을 깨닫자 연맹의 마법사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베로니카를 가엾게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복수심은 결국 증오를 겪지 않은 차세대마저 망치는 독으로 변했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그들을 막아서려 했던 것이다.
이성진의 지적에서 보인 태도로 보아 트라베리아의 마녀들도 베로니카의 그런 면에 마음을 쓰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도 미쳤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결국 바로잡지도 못했다.
“아,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내 소원의 연장선인데,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기 위해서,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시카 오빠의 영역에서 죽은 마법사는 살릴 수 있는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비정상적으로 죽었으니까.”
이성진이 드물게도 적을 향해 웃었다. 섬뜩한 미소에 베로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포츈이…….”
“할머니가 왜?”
베로니카가 반색하며 관심을 보였다. 포츈이 이성진에게 어떤 해답을 원했다는 것은 전장에 선 트라베리아의 마녀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널 가리켜 ‘아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파고든 것 같군.”
“응? 음……? 그러네. 단순한 지식은 내가 더 많이 알지?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운명도 아카식 레코드로 상당 수준 도출해 낼 수 있어. 관조자의 입장인 만큼 거리가 있어서 포츈 할머니처럼 감각으로 느끼진 못하지만. 음,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이런 평가를 받는 건 또 처음이네. 상대가 별무리의 이성진이라 그런가? 예상 외로 기쁘다.”
이성진이 대답을 하지 않았기에 베로니카는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이었다.
“이소영, 루카 에밀라, 테온 랄프를 살리면 시카 오빠도 되살아나는 거 알고 있지?”
“……!”
“섞인 걸 전부 구분해서 분리하면 자연스럽게 오빠도 분리되잖아.”
“……아, 그러고 보니.”
“어라, 설마 몰랐어? 살릴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자연히 알 법도 한데?”
“아니, 눈치채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는 걸 깜빡했어.”
드물게 긴 대답이었으나 베로니카가 아니라 뒤에서 당황하고 있는 연맹의 마법사들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이성진의 눈길이 흘끗 윌리엄 일행을 향했다.
“그, 그런 큰일을 깜빡하지 말아 주십시오!”
윌리엄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베로니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 살리는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안중에 없었어.”
“아니, 그…….”
이성진의 드문 사과에 윌리엄은 할 말을 잃었다.
“─라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전해줘.”
이번엔 스테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심코 한숨을 내쉰 윌리엄이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쳐도 어떻게 그런 큰일을 깜빡할 수 있는 겁니까?”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
무심한 태도였으나 이성진의 말에는 동료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어차피 소영이가 시카를 죽일 테니까.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칠 녀석이 아니야.”
윌리엄은 무심코 침을 삼켰다. 그러나 곧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소중한 동료를 무시하는 대화임에도 베로니카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쨌거나 결국 이소영을 살리고 우주의 길을 원래 상태로 되돌릴 거란 말이지?”
베로니카는 손에 쥔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곳곳에 새롭게 나타난 아지랑이 같은 실이 베로니카가 쥔 보석에 연결되었고, 그들이 있는 영역이 베로니카의 마력에 물들어 일렁거렸다.
“그런 다음 시카 오빠를 죽일 거고?”
“그렇게 되겠지.”
“공멸 후의 부활은 계산해 두지 않아서……우주의 길이 좀 흔들릴 것 같은데. 너희야 우리만큼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힘이 아주 부족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시카 오빠가 괜히 공멸을 택한 건 아니란 말이지. 길이 장치에 의해 활성화 된 후에 복구, 다시 열린다라……이거야 원 너희가 장치를 사용하기 전에 조정이 끝나려나?”
중얼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베로니카는 준비해 두었던 영역마법을 착실히 발동했다. 유은하의 환상마법을 참고로 만들어진 마법은 신기루처럼 일렁거리면서도 강력한 빛으로 상대의 마법을 흔들며 분해했다.
흔들거리던 실 수십 개가 직선으로 곧게 뻗어졌다. 선이 면을 이루고, 면은 도형이나 면체를 이뤘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결계와 방패가 생겨났다.
탄환을 쏴 군데군데 베로니카의 마법을 약화시키던 윌리엄이 문득 물었다.
“적인 당신이 왜 그런 걸 신경 씁니까?”
진심어린 의문이 담긴 질문에 베로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했잖아. 두 번째보단 세 번째가 낫다고. 난 지금의 내 위치가 마음에 들어. 이른바 세계의 조율자라고나 할까. 우리는 여기에 세계를 되돌릴 수 있는 시스템을 준비해 놨다고 단언했어. 그런데 그게 거짓으로 끝난다? 그건 내 자존심, 긍지, 아니, 좀 더……. 그래, 그건 내가 살아온 시간이 무의미했다는 것과 똑같아.”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드물게도 짙은 감정을 담고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설령 우리가 지더라도 나는 이 장치가 완벽하게 발동되길 바라. 구조가 완전히 바뀌든, 복구되든, 세계가 진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볼 수 없다면 확신을 얻고 싶어. 거기다…….”
베로니카는 다시 초연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역시 어찌되었던 간에 너희 곁에 있는 언니들만이라도 살았으면 하거든.”
일렁이던 세계가 일순 가라앉았다. 그러나 연맹의 마법사에게는 파도치던 세계보다 각을 맞춰 힘이 정리된 지금의 영역이 훨씬 더 숨 막혔다.
윌리엄과 데미안이 준비하던 마법이 두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해지고 무효화되었다. 심지어는 혈류를 따라 몸 안을 돌고 도는 마력, 이어서는 근원의 마력마저 분해되고 있음을 깨닫고 윌리엄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본인조차 힘들 정도이니 앤서니, 스테이, 하무라에게 이 환경은 치명적이다.
다행히 마법의 성질을 미리 눈치챈 이성진이 파도로 세 사람을 보호했다. 베로니카는 눈을 접어 웃고는 속삭였다.
“디스트로이드.”
콰직!
눈부신 빛이 천지를 뒤덮었다. 빛은 닿는 모든 것을 철저히 분쇄하고 파괴했다.
곳곳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윌리엄과 데미안은 감각이 불완전한 와중에도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깨지는 소리는 나선을 그리는 육면체에서 났다.
베로니카가 퍼트렸던 육면체 수 십 개가 조각난 순간 그들의 몸 위에 엄청난 중압감이 내리꽂혔다. 주위의 모든 빛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큭…!”
그러나 몇 초 후, 중압감이 밀려나듯이 약해졌다. 그들의 위를 둘러싼 파도가 베로니카의 빛을 밀어낸 것이다. 베로니카는 이성진의 마법을 약화시킬 수는 있되 완벽히 막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베로니카의 기술은 이성진의 마법을 깊게 파고들지도 못한다.
“이걸로도 부족한가? 음, 그럼, 이건 어때?”
푸른색이 섞인 연보라 빛에 새로운 이펙트가 더해졌다. 폭발 소리와 함께 이성진의 방어벽 겉 부분이 자잘한 물방울로 깨져 흩어졌으나 공격은 여전히 파도를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건반을 몇 번 더 두드렸고, 그때마다 베로니카의 마법은 강해졌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점점 초조해졌다.
“……가늠하고 있는 거지?”
결국 베로니카가 그 말을 뱉었을 때 이성진은 움직였다.
“엔버린, 빌린다.”
“…네?”
그 순간 이성진의 파도에 보호받고 있음에도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던 마력이 윌리엄의 몸에서 쑥 빠져나와 이성진의 파도에 섞였다.
“좀 위험한 기술을 쓸 생각이라 완충재가 필요해.”
둥근 원을 그리던 방어막에서 마력이 뻗어나갔다. 수 백 갈래로 나뉘어 뻗어져 나간 물줄기에는 빠짐없이 윌리엄의 공간마법과 무게마법이 실려 있었다. 수 백 개의 선은 수십 개의 도형을 그렸다. 데미안과 윌리엄은 물줄기가 그리는 선이 이 영역을 이루는 공간의 이음새임을 곧 눈치챘다.
검보라색 물줄기가 이음새를 따라 퍼질 때마다 이음새 사이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이성진이 처음에 뿌렸던 물방울이었다.
“탄환을 쏴.”
“어디로요?”
“하늘에.”
윌리엄은 이성진의 지시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큭!”
수 백 장의 공간을 통째로 비트는 것만 같은 버거움, 힘이 어딘가로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느껴지는 기아감. 윌리엄은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마력을 계속 방출했다.
쿠궁…!
여기에 들어서며 이성진이 퍼트렸던 물은 베로니카의 마법에 의해 형태가 무너졌을 뿐 소멸되지 않고 주인과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그 연결에 공간마법과 무게마법이 더해졌다.
검보라색 선의 빛이 강해진 순간, 선의 일직선상 위에 있는 힘들이 종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검보라색 선은 점점 굵어졌는데, 그건 베로니카의 마법을 침식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베로니카의 정비소는 무수히 많은 공간들이 이어져 구성되어 있다. 이성진의 마법은 차원의 이음새를 강제로 벌렸다.
덕분에 이성진의 마법에 힘을 더하고 있는 윌리엄도 지금 이 영역에 어떤 조각이 맞춰져 있는지 선연히 알 수 있었다.
형태를 잃었던 물방울이 합쳐져 아까 이성진이 설치했던 송곳 기둥으로 변했다.
검보라색 선을 시작점으로 삼아, 검보라색 선이 없는 곳으로 이번엔 주황색 선이 뻗어졌다.
“……안 그래도 조금만 어긋나도 부작용이 생기는 기술이니.”
“……!”
주황색 선에 반응해 송곳 기둥이 힘이 강해졌다. 주황색 선이 이어지는 자리마다 베로니카의 빛이 속절없이 녹았다. 베로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늠한 이유를 알겠다. 여기서 잘못 쓰면 정말 위험한걸, 그거.”
구축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념. 이성진은 시간의 힘을 사용해 이미 한 번 흔들린 베로니카의 마법을 멈춰 세우거나, 정비소에 흐르는 시간을 조작해 황혼의 시간에 맞추는 것으로 종말의 힘을 강화했다.
그런 다음에야 이성진은 검을 그었다.
콰가각!
평소와 많이 다른 검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성진의 검을 따라 퍼진 것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이끄는 파도가 아니라 날카로운 얼음의 길이었다.
쩌저저정!
검격만이 아니다. 베로니카와 장치의 마법을 억제하던 송곳 기둥 역시 어느새 얼어붙었다.
연맹의 마법사는 놀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물은 온도에 따라 상태가 변화한다. 그러니 물을 다루는 마법사는 보통 얼음이나 안개 등 물의 파생속성마법을 일정 수준 이상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이성진은 항상 액체 상태로 마법을 썼다. 그들이 파도가 얼어붙은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아아악─
주황색 선과 얼음 송곳 역시 눈부신 주황빛을 뿌리며 일정 범위를 얼렸다. 베로니카의 마법이 공중에서 멈춰 굳었다.
색이 빠진 그 모습은 얼어붙었다기보다는 봉인된 것에 가까웠다.
‘얼음이라기보다 동결, 그것도 시간 동결. 종말의 힘에 시간이 붙잡혔다는 건, 즉, 얼어붙은 건…….’
연맹의 마법사를 지키던 물의 방어막은 투명한 얼음 기둥으로 변했고, 얼음 선과 송곳 기둥 사이로 드문드문 얼음 조각이 생겨났다. 베로니카가 숨을 삼키고 손에 쥔 보석을 휘두르려 했으나, 이성진은 어느새 베로니카의 코앞에 와 있었다.
“……!”
베로니카는 아직 이성진의 줄기에 침범되지 않은 도형 결계들을 움직여 최종 방어막을 펼쳤지만, 이성진의 검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냉기가 결계를 갉아먹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안위가 걸린 상황에서도, 아니, 그런 상황이기에 눈을 부릅뜨고 방금 느낀 것을 확인했다. 이성진의 마력과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베로니카의 아카식 레코드는 이성진의 마법으로 인해 생긴 현상을 보고 기록한다.
이성진의 얼음은 부딪친 타인의 마력 양에 비례해 크기와 위력이 달라졌다.
직육면체 보석들이 베로니카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베로니카는 문득 이성진이 동결을 일부 해제했음을 눈치챘다.
얼음에서 녹은 물은 평소 이성진이 쓰던 파도와 달리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이성진은 그 맑게 흐르는 물로 또 한 번 정비소의 시간을 조작하여 이 세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윽…!”
“베로니카─!”
결국 베로니카의 마지막 방패가 이성진의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곧바로 이어진 검격이 베로니카와 그녀가 지키고 있던 측근들까지 통째로 얼려버렸다.
“아……!”
마녀들은 찾아올 통증에 대비해 마음을 굳혔으나, 의외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숨을 골랐다. 내뱉은 베로니카의 숨결에 주황빛 얼음이 섞였다.
“그래, 당신도……엘리시아 언니처럼 죽음을 다루는 자였지…….”
“베로…….”
“이것, 이 얼음…….”
그들을 묶은 얼음을 가리키며 베로니카가 동요로 잘게 떨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 얼음은 우리의 목숨이지?”
이성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베로니카는 단어를 정정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수명’. 이 얼음은 현재와 종말 사이에 있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 지닌 존재 유지 시간이야. 맞지?”
이성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감싼 얼음을 몇 번 가공했다.
“우리를 묶은 얼음이 부서지면 우리는 죽어. 그래, 당신도……죽음을 쥐는 자였지.”
이성진은 손을 휘둘러 로봇의 얼음을 깼다. 그러자 로봇은 산산이 조각나 부스러졌다.
“결국 전부 유클라프 오빠한테 맡겨졌네…….”
한숨을 내쉰 베로니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본래라면 베로니카가 죽더라도 움직일 아카샤 마저 베로니카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목소리마저 묶여 입술을 뻐끔거릴 뿐 말을 내뱉지 못하는 동료들과 필요성에 따라 유지되거나 사라지는 이성진의 마법을 한 번 훑어 본 베로니카가 이성진에게 제안했다.
“구속을 바꿔줘. 아직 조정해야 할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