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15
“…음?”
나는 넘어가려는 일지의 페이지를 붙잡고 하인리히를 마주보았다.
“전부 읽으셨나요?”
“그렇다만…….”
“관장님, 제가 가리킨 손가락의 위치를 보세요.”
내가 읽으라고 가리킨 부분은 지금 펼친 페이지에선 앞부분에 해당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네 문장 정도밖에 읽지 않았고, 중간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 말로 내뱉지 않았다.
“어쩌면 관장님은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관장님은 지금 세 문장밖에 읽지 않으셨어요. 중간에는 입술만 움직였고요.”
“정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인리히의 얼굴에 담긴 것은 놀라움과 호기심과 즐거움이었다. 연구를 삶의 즐거움으로 삼는 학자 단체의 관장다웠다.
“관장님, ‘회색 영역’을 기억하시나요?”
“지구로 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났던 벽 말인가.”
“네. 거기에 저와 성진이 외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걸 기억하시나요?”
“……아니.”
“유펠르시아의 기록은요?”
나는 조금 전 떠올린 유펠르시아의 기록을 읊었다. 하인리히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번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펠르시아가 비슷한 현상이 예전에 있었다고……언급했던 건 기억나네. 하지만 유은하 공이 말한 내용은, 특히 잘못된 기록인지 내가 잊은 것인지 고뇌하는 메모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네.”
나는 페이지를 넘겨 ‘회색 영역’에 관한 하인리히의 마지막 고찰을 읽었다.
“‘과연 유펠르시아의 기록처럼 이 영역에 관한 기억이 지워질 것인가.’”
하인리히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지워졌군. 하지만 기억하는 자도 있다, 라.”
우리는 서로가 회색 영역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한 번 하인리히의 기록을 쭉 읊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일지의 내용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고, 때때로 이명과 노이즈 같은 소리가 공간에 찾아들었다.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관장님, 아무래도 이건 세계의 제한에 걸리는 내용 같아요. 무슨 뜻이냐면…….”
“아니, 단어를 해설하지 않아도 괜찮네. 세계의 제한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네. 루키아 님께 전해들은 적이 있으니.”
“…그분은 세계의 제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셨나요?”
“한 생물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는 한정되어 있다. 깨달음에 따라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도 있으나, 자격이 없는 자가 진리의 정보를 접했을 경우 세계가 그걸 기억하고, 듣고, 이해하는 걸 막는다……. 본래라면 세계의 축도 인간의 의지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이었겠지. 세계가 살고자 하는 우리 인류에게 협력을 요청했을 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계를 바꾼 트라베리아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즉 세계는 나에게는 회색 영역의 정보를 제한했고, 그대에게는 공개했다는 것이로군. 회색 영역에 접근이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가 나뉘었던 것도 세계의 허가에 따른 결과인가.”
“그럼 성진이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네요.”
“그렇군. 흐음……어디 확인해 볼까.”
하인리히는 앤서니와 라이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잠깐이라면 시간을 뺄 수 있다는 모양이다.
‘키메라는 그 영역에 조금도 다가가지 못했어. 조금이라도 접근하면 생존 본능에 경종이 울릴 정도였어.’
나는 찾아온 두 사람에게 일지를 보여주며 회색 영역을 기억하느냐 물었다. 앤서니는 하인리히와 비슷한 수준으로 기억했고, 라이라는 두 사람보다 명백히 기억하는 것도 들을 수 있는 것도 적었다. 심지어 그 차이를 하인리히와 앤서니는 인식하지 못했다.
문득 나는 로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운명……. 이 차이는 세계에 새겨진 운명의 크기와 관련이 있을까?’
키메라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탄생한 자연적이지 않은 존재다. 세계에 제한을 받는 정보라면, 그 점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일하는 중이었던 두 사람을 돌려보내고 나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의 손에 조정되는 지금의 우주는 시간선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곧 친구들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성진이는 자세히 기억했다. 판단하고 해석했던 만큼 나보다 더 잘 알았다. 인하, 소영이, 인성이는 드문드문 설명이 애매하긴 했으나 하인리히보다는 많이 기억했다.
“재미있군.”
하인리히의 미소에 무심코 동의했다.
나와 성진이는 세계의 제약을 이 몸에 지고 있다. 환생자인 것부터 시작해서 전생의 일들, 여신님. 환생해서도 영혼을 엮는 피의 맹약도 틀림없이 세계에 제한당하는 정보들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제한되는 회색 영역은 제법 조사할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아쉽다네. 어쩌면 이 순간마저 기억과 기록 속에서 왜곡될지 모른다는 것이.”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당시에 유펠르시아의 기록은 찾아냈었나?”
“아니요. 찾아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다른 이들은 읽지 못했던 걸 수도 있겠어요.”
대답하며 나는 인하와 아르델에게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메시지에는 잠깐 찾아가도 괜찮냐는 내용을 담았다.
“관심이 생긴 모양이군.”
“네. 조사해 보고 싶네요.”
즐거이 웃은 하인리히가 내가 쥔 일지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그 일지를 빌려주겠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반응을 확인해 주게.”
나는 놀란 눈으로 일지와 하인리히를 번갈아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정말 빌려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그 대신 혹시 내가 잊었다 할지라도, 혹은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알아낸 것을 내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네.”
“그럴게요.”
그 후로도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나야말로 유익한 시간이었네. 가끔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기쁘겠군.”
“네. 저도요.”
정말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보다 세계의 깊은 곳에 접근할 단서를 얻었다.
하인리히에 이어 라이라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리브리를 뒤로한 나는 인하랑 아르델한테서 답문이 온 걸 확인하고 유펠르시아에 이동했다.
유펠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인하가 관리하는 천공섬이었다. 내가 찾아가고자 했던 두 인물, 인하와 아르델은 같이 있었다. 같이 있던 와중 내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와……전에 왔을 때보다 더 짙어졌네.”
나는 섬을 뒤덮은 녹음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자연의 힘과 온화한 마력으로 가득한 이 풍경은 한수가 남긴 마지막 마법을 인하가 가꾸어 만들어 냈다. 한빛 정원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이젠 정원보다 숲이라는 단어가 더 알맞아 보인다.
가장 눈에 띠는 건 정원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저것이야말로 한수가 남긴 씨앗에서 첫 번째로 싹튼 식물이자 이 숲의 모태였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나무는 신검의 신성과 인하의 빛을 듬뿍 삼키고 세계의 가호를 받아 ‘세계수’로 변했다.
세계수란 칭호는 아스트랄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일컬어졌다. 우리는 세계수가 어떤 뜻인지, 어떤 역할을 지니고 있는지 아직 자세히 모른다. 아는 건 실제로 세계수 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계수는 생명력, 마력, 자연의 힘이 넘쳐흐르며, 흘러나오는 힘을 받은 토지는 기름져지고, 씨앗 없이도 다양한 식물을 탄생 시키며 키워낸다. 학자들의 조사 결과 세계수 옆에서 태어난 신종 식물은 10000종을 넘었다.
세계수의 곁에 가면 힘이 소모된 성물과 신물은 미약하게나마 다시 힘을 얻고, 다친 이의 회복력은 빨라진다. 세계의 모든 정령과, 심지어는 인성이와 계약한 세계의 핵심마저 세계수에 눈을 두고 있다.
틀림없는 건, 한수가 아니었으면 씨앗은 생겨나지 못했고, 인하가 빛을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수는 자라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스트랄은 인하를 마음에 들어 한다. 최근 아스트랄은 자신의 하위 정령과 계약한 하미아, 세계수를 키우는 인하 앞에서만 현신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세계수 아래에 내려서자 미리 연락을 나눴던 인하와 아르델이 손을 흔들었다.
“은하야!”
“어서와.”
예쁜 원피스를 입은 아르델과 과거에 비해 짧아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인하. 인하가 머리를 짧게 자른 건 나와 떨어진 직후의 일로, 기분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잘랐던 머리카락이 이제 한 뼘 정도 자랐다.
나는 웃으며 친구들을 향해 다가섰다.
“점점 커지네, 여기는.”
“한빛이의 생명력이 워낙 대단하거든.”
‘한빛’은 인하가 지은 세계수의 이름이다. 한수의 이름과 인하의 마법에서 따온 이름을 인하의 입에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간질간질 거린다.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최근엔 정원을 인공 행성으로 이전시키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왔어.”
“와…….”
“거절했지만. 그 고생을 해서 되찾았잖아. 난 역시 지구가 좋아.”
“참고로 제안한 건 우주의 정령 알파와 세계님이시란다.”
제안자가 너무 의외라 나는 깜짝 놀랐다. 인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야외 테이블 위에 과일과 꽃차, 베리파이를 올렸다.
“그렇다기보다 알파가 세계의 의견을 대신 전달한 거지. ‘세계수’가 뭔지 몰라도 제법 중요한가봐. 이 정원을 생물의 눈이 닿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대.”
“그래? 아스트랄도 그렇대?”
「아니오. 전 찬성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힘과 함께 옆의 공간이 쭉 열리며 안에서 나비 모습의 아스트랄과 하미아가 나왔다. 어딘지 쭈볏거리던 하미아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늘 오는 날이었나 보네요?”
“그…….”
하미아는 아스트랄과 세계의 권유로 세계수를 향한 호기심을 품으며 주기적으로 한빛 정원에 찾아온다. 참고로 별의 도시의 관리자 중 주기적으로 바깥에 나올 수 있는 건 하미아 밖에 없다.
『계약이 끝나기 전에 최인성이 관제 도시에서 나갔을 시, 최인성의 힘은 관제 도시와의 거리만큼 약해진다. 관제 도시의 시간으로 24시간이 지나도 귀환하지 않을시, 페널티와 함께 강제 소환된다.』
인성이와 세계의 계약서 초본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지만, 이건 관리자가 바깥으로 나가도 된다고 허가하는 조약이 아니다. 피치 못하게 바깥에 나갔을 때를 대비한 경고문이다. 긴급 상황 시의 매뉴얼에 가깝다.
계약서 내용은 여러 번 가필을 걸쳐 수정 되었고, 하미아 외의 관리자들은 정말 피치 못할 상황에만 우주에 내려서고 있다.
“어라? 오늘 온다고 했었던가?”
“아니. 세계님이, 신경 쓰이는 흐름이 있다고 여기 가라 하셔서.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통로가 열려서……. 미안.”
“사과할 것까지야. 너한테는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걸. 한적한 곳에 이렇게 찾아와줘서 기쁠 따름이지.”
“…고마워.”
아무래도 오늘은 불시에 오게 된 모양이다. 누구나 제멋대로인 면이 있기 마련이지만,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세계 옆에서 관리자들도 참 고생이다. 아스트랄이 한숨과 함께 아까의 화제를 이었다.
「세계수가 여기 있는 건 지구에도 좋은 일입니다. 거기다 이 아이는 아직 어려요. 이동하는 건 섬이 좀 더 커진 후……그러네요, 한 100년 정도 후가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도 이동하는 것엔 찬성하는 거야?”
「언젠간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질 테니까요.」
“헉.”
아르델이 숨을 삼켰다. 나는 잠시 그게 어느 정도 크기일지 상상해보았다.
“트라던트 정도로 커지나?”
「네. 별의 크기 정도는 가볍게 뛰어 넘을 겁니다. 당신들이 보았던 다운피스처럼 행성계 규모로 자라날지도 모르겠군요.」
“……괜히 세계수라 이름 붙은 게 아니네.”
상상한 것보다 스케일이 컸던지 인하가 침음을 삼켰다.
「뭐어, 그렇게 되려면 수억 년은 걸릴 테지만요.」
아르델이 입을 떡 벌렸다.
“미친…….”
「별보다도 오래 살 겁니다. 세계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네.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어.”
인하는 손을 뻗어 세계수의 잔가지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곧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과일과 꽃차는 인하가 정원에서 따거나 만들었고, 파이는 아르델이 왕성의 요리사한테서 받아왔다고 한다. 숲의 과일이 마음에 들었던지 아스트랄은 이번엔 개로 변하여 하미아의 다리 위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약간 담소를 나눈 후 나는 여기에 온 용건을 꺼냈다. 정령까지 피험자로 삼을 수 있으니 오늘은 타이밍이 좋다. 아스트랄은 회색 영역을 본 적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일지를 읽을 수 있는지 없는 지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아, 아까 보낸 그거? 확인할 게 있다고 하더니, 직접 물어보러 올 정도로 특이한 일이야?”
“응. 아무래도 ‘세계의 제한’에 걸릴 정도로 고급 정보인 것 같아.”
“흐음.”
나는 필요한 정보를 자세히 설명했다. 세계의 제한이 어떤 것인지 부터 하인리히가 느낀 위화감과 회색 영역에 대한 기억의 애매함까지. 이어 일지를 펼쳐 회색 영역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하미아는 키메라인 것치고는 기억하는 것도 읽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그래도 아르델과 하미아 둘 다 하인리히만큼은 인식하지 못했다. 더불어 하미아와 아르델은 서로가 기억하는 것의 차이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인하는 인식했다. 인하는 일지를 전부 읽어냈으며, 일지를 통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해 냈다.
“신기하네.”
안타깝게도 하미아와 아르델은 우리가 회색 영역에 보이는 관심과 의문을 반도 공감하지 못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우리의 대화마저 드문드문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내 나는 아스트랄에게 눈을 맞췄다.
“당신은 어떤가요?”
아스트랄은 흥미 없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 성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말을 걸면 곧잘 무시한다. 아니, 애초에 그런 자의 앞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스트랄은 나를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아스트랄은 순순히 대답했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제한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글을 입에 담는 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의 정체와 역할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가요.”
「다만……당신에게 자격이 없다면 당신은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저는 그에 관해 어떠한 말도 입에 담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한 말조차도 말입니다.」
“세계의 제한에 닿아 있는 정보인 건 확실한 것 같네요.”
자연의 화신이 이렇게 말할 정도니 틀림없었다.
아스트랄이 드물게도 흥미로운 눈으로 내게 질문했다.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네.”
「그것의 어떤 부분이 당신의 흥미를 끌었습니까?」
“세계의 제한에 걸린다는 점이요. 세계에 제한된 정보 전반에 흥미가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건투를 빌지요.」
재미있다는 기색으로 미소를 그린 아스트랄이 손을 움직여 과일을 하나 더 가져왔다. 이 이상 말할 게 없다는 태도에 나는 이번엔 아르델을 돌아보며 다음 용건을 꺼냈다.
“아르델, 사실 전에 회색 영역을 연상시키는 기록이 프로제 가문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혹시 프로제 가문에 선조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어? 아, 그리고 웬만하면 내가 직접 기록을 찾고 싶어. 너희가 이 일지를 읽지 못했듯이, 다른 사람은 기록을 못 찾을지도 몰라.”
“알았어. 한 번 물어볼게.”
아르델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는 프로제의 차기 가주이기도 한 세필리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동안 테이블 위의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의 화제는 내일 만날 소영이와 인성이에 관한 반가움과 기대감으로 흘러갔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아르델이 내일 우리와 함께 별의 도시로 가겠다고 말을 꺼냈다.
“나도 오랜만에 소영이랑 인성이를 만나고 싶어.”
“그래, 같이 가자.”
유펠르시아는 인간에게 마법을 전파하는 동안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현대의 마법에 익숙해지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것에 소원해졌지만, 선대 마법사들의 지도를 통해 다시 자연과 교감하기 시작했다. 아르델은 혈족마법의 계승자인 만큼 자연과 교감하는 것에 빠르게 익숙해졌고, 그로 인해 최근에 별의 도시에 진입할 자격을 손에 얻었다.
도시락 만들기를 도울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쯤 성진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도시락 재료를 다 사왔고, 7시부터 만들 거란다. 내가 메시지를 공개하자 아르델은 눈을 가늘게 떴고,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안. 그놈의 내숭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꼴이 시려서. 그래도, 뭐, 이렇게 된 이상 너한테 잘하는 거에 의의를 둬야지.”
아르델은 인상을 잠깐 찡그렸으나 곧 웃었다. 하긴, 아르델은 학생 시절 성진이랑 많이 다퉜다. 비슷한 수준으로 성진이랑 다퉜던 인하는 좀 더 성진이의 많은 면을 봤던 만큼 이제는 그런 모습에도 익숙해진 모양이지만.
“요리는 아예 전담, 집안일은 대부분 네가 손대기도 전에 해치워 놓는다고 그랬지?”
“으응……. 역시 너무 맡기나?”
무기력증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온 후부터는 나도 조금씩 집안일을 하려고 마음먹었고, 그렇기에 몇 가지 일은 솔선해서 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성진이가 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리, 청소와 정리정돈, 인테리어 꾸미기까지, 집안일은 뭐든지 성진이가 나보다 훨씬 잘 한다.
“너랑 사귀는 데 그 정도는 하라고 그래.”
“맞아. 하라고 그래!”
아르델이 어딘지 분한 표정으로 책상을 쳤다. 인하가 피식 웃었다.
“도시락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줘. 요리는 정말 웬만한 전문가보다 잘한다니까. 레퍼토리도 많고.”
“응. 그렇지.”
아직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조금밖에 되찾지 못한 나는 인하를 보며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밥을 먹을 때의 분위기는 즐겁지만, 맛은 아직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성진이의 요리가 아주 맛있다는 건 느끼고 있지만, 그뿐이다. 거기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일은 적다.
마지막 파이 조각을 와구와구 먹어치운 아르델이 문득 들린 알림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 기록을 찾아봐도 된대. 다만 만일을 위해 세필리오랑 시드 할아버지가 동행할 거래. 언제 갈래?”
지금 시간은 5시 20분, 웬만하면 유펠르시아에 온 김에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지금은 안 될까?”
“음……6시 30분에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 전까지는 끝내 준다면 괜찮대.”
“그럼 지금 가겠다고 전해줘.”
“OK. 프로제 본가에 가본 적 없지? 내가 배웅해 줄게.”
“고마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하와 하미아, 아스트랄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조사에 협력해 줘서 고마워. 하미아 씨도 아스트랄 씨도 오늘 감사해요. 내일 별의 도시에서, 아스트랄 씨는 또 언젠가, 만나요.”
“잘 가.”
“내일 만나.”
「언제 또 뵙시다.」
아르델은 아이템을 사용해 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 했다. 프로제 본가 정문 앞에 세필리오와 시드가 나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다. 아르델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인하에게 돌아갔고, 나는 세필리오와 시드를 따라 저택 안에 들어갔다.
“아르델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세계에 의해 제한되는 정보가 적힌 기록이라니, 흥미롭더군. 혹시 모르니 어떤 기록인지 말해주겠니?”
나는 한때 시드 프로제의 입에서 전해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아아, 그 기록이라면 확실히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다.”
“참고로 이런 기록이 있다는 걸 알려주신 건 시드 할아버님이세요.”
“……그건 기억에 없구나.”
나는 그에게 이전에 회색 영역과 마주치면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두 사람 다 회색 벽이 우주를 가로막았던 것 정도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혹시 몰라 보여준 하인리히의 일지도 가리킨 페이지의 일부분밖에 읽지 못했다.
“그게 어느 선조의 기록이었더라…….”
두 사람은 나를 서고로 안내했다. 책꽂이에 꽂아두지 않은 옛날 책이나 선조의 일지, 낱장 자료 등을 모아둔 곳이었다.
나는 문이를 불러 글자를 검색했다. 머지않아 아주 낡은 서책이 손에 잡혔다.
“예전에도 낡고 바라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적었지. 세월이 지난만큼 그때보다 더 낡았군.”
끈으로 묶인 서책은 확인해 보니 종이마저 마법으로 만든 일기였다. 혈족 이외에는 읽을 수 없도록 잠겨 있다.
책에는 은은히 자연의 힘이 감돌았다. 하긴, 이 기록을 남긴 주인의 시대에는 자연에게 빌어 마법을 쓰는 게 보통이었다.
일기에는 주인의 마음이 깊게 남아 있다. 나는 능숙하게 자연과 교감하여 일기에 묻어 있는 감정을 통해 책에 걸린 마법을 읽어냈다.
“이 일기, 복원하는 건 좀 어렵겠네…….”
“왜?”
“일기는 원래 자기 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물건이 아니잖아.”
“응? 그렇긴 하지.”
“아들의 부탁으로 남기긴 했지만, 후대의 후대까지 자신의 속마음이 읽힌다고 생각하면 부끄럽잖아? 제발 가족 외에는 읽지 않기를, 100년 후에는 낡아 없어졌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 가호를 넣었어. 그래서 보존마법을 써도 닳는 거고, 복구하기도 힘들어. 자연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법인 만큼 억지로 건드리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앗……. 마음은 이해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필요한 부분만 볼게요……. 그래서 말인데, 열어줄래?”
“아하하하……응.”
곧 세필리오의 손에 일기가 펼쳐졌다. 그러나 죄책감 때문인지 손이 미끄러져 세필리오는 마지막 장을 펼쳤고, 마지막 장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100년 쯤 지나 이 글을 보는 자에게. 낡아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슬슬 파기해 주십시오.』
“……하하하.”
분명 이 마지막 문장을 보았음에도 몇 백 년 전부터 파기하지 않았을 시드부터 시작해 우리 세 사람은 잠깐 일기장에서 시선을 피했다.
“……세필리오, 잠깐 네 목소리 좀 빌릴게.”
“아, 응.”
시작한 이상 일기의 주인을 위해서라도 빨리 볼일을 끝내는 게 좋겠다. 내 마법을 받아들인 세필리오가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입에 담았고, 일기장이 넘어갔다.
『마을의 두 봉오리 너머 산에 회색 안개가 내렸다.
처음엔 평범한 안개인 줄 알았는데, 1시간 후에 이상함을 깨달았다. 저 안개에서는 자연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다.』
안개에 관한 이야기는 5일에 걸쳐 적혀 있었다. 당시 시드가 말했던 대로 낡아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중간중간 있었지만, 결코 그가 말했던 분량만큼 내용이 적지는 않았다.
안개는 일기의 주인을 포함해 세 명 정도밖에는 보지 못했고, 안개가 있는 동안 누구도 산에 들어서지 않았다. 그 현상은 보이는 자에게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조사해야하지 않나 싶다가도 금방 마음이 꺾였다.
일기의 주인만이 용기와 호기심을 한계까지 쥐어짜 안개에 손을 가져갔다. 가까이서 본 안개는 생기가 빠져나가 회색으로 변한 것처럼 삭막했고, 거부감을 뒤로하며 손을 뻗었으나, 무언가에 막혀 안개에 닿지 못했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불안에 떨며 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얀 머리칼을 지닌 여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어?”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당황하고 있는데 혈족으로써 일기를 대신 펼쳐주던 세필리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내용이 없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