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20
‘아카식 레코드───’가 정말로 세계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는 계속 꿈속을 돌아다녔다. 우주의 꿈을 통해 찾고 교감했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진 못했다.
‘쉽진 않겠지. 베로니카 수준의 마녀가 세계의 축과 접촉하면서도 끝끝내 진짜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오늘은 꿈속임을 자각하자마자 별의 도시를 확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리자들은 일하는 중이었다. 인성이한테 받은 일주일 스케줄을 확인하고 작업 시간이 아닐 때를 노려 접근한 것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아무래도 갑자기 일이 생겼나 보다.
“으음, 확실히 오늘 이후에 열흘 정도 폐쇄 기간이었지?”
기껏 열쇠를 완성했는데…….
그러나 작업 중일 때 도시는 사람의 진입을 거부한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도시의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아쉬움과 함께 오늘의 계획을 꿈속세계 탐색으로 변경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
나는 퍼뜩 별의 도시를 돌아보았다.
방금 세계의 핵심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접근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
긴장으로 침을 한 번 삼킨 나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관리자들이 일하는 중일 때 꿈에서 접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거기다 내가 오늘 세계와 나눌 대화가 관리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아직 모른다. 나는 관리자들의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도록 기척을 숨기고 세계의 핵심을 향해 의식을 뻗었다.
꿈길을 따라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별의 도시 중심부에 도달했다. 나는 내가 만든 꿈길에서 세계의 핵심과 마주했다. 문이가 세계의 핵심에 키보드를 하나 전달했다. 상대가 대화할 마음이 있다면, 이로써 세계의 의지는 글로 표현될 것이다.
『루키아 폴라리스의 기록서에 승인 받은 걸 축하드립니다.』
곧바로 대화 신청을 받아들인 세계는 놀랍게도 먼저 우리에게 말을 전달했다.
『이렇게 직접 ‘세계’와 대화를 나누고자 접근해 오신 건 처음이로군요.』
“……그러네요. 솔직히, 대화에 응해줄 거라는 생각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네, 보통은 나누지 못합니다.』
『보통은 저희에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자격을 겸비하지 못하고, 저희의 의지를 변환할 수 있을 만한 기술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 증거로 저희의 계약자도 저희와 ‘사람 같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합니다.』
『세계의 의지는 당신이 생각하신 대로 자연의 요소요소가 모여 생겨난 흐름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정령 같은 하나의 의지만 있다면 세계는 언제든지 생물의 의지에 좌지우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하나이되 하나가 아닙니다. 아스트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자연과 정령은 저희의 일부, 그 흐름을 하나로 통합하는 게 여기 있는 세계의 핵심입니다.』
『저희는 생물이면서 도구. 무수한 도구의 집합체이며 무수한 생명의 집합체.』
『루키아 폴라리스는 특별한 영혼이었고, 이 세계도 특이점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그 기록서는 존속이 승인되었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제 대화에 응한 건 제가 기록서를 얻었기 때문인가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대화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대답이 동시에 두 개 돌아왔다.
『계약자를 위해 대화를 오래 나눌 수 없습니다. 대화의 주제를 정해 주십시오.』
루키아가 화제에 오른 게 예상 외였을 뿐, 질문할 것은 정해 두었다.
“회색 영역은 세계에 있어 위험한 징조잖아요. 그렇게 위험한 징조를 왜 재현해도 된다고 허락했나요?”
『바깥에 회색 영역이 생성되는 건 저희가 붕괴하는 조짐입니다.』
『하지만 회색 영역의 본질은 세계의 시간. 시간의 집합소. 본질만 따지고 보면 19층도 같은 개념 속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허가한다면 당신이 회색 영역을 재현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시간의 본질을 엿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질문을 이었다.
“‘열쇠’로 직접 회색 영역의 근원지에 들어가도 되나요?”
『세계에는 문제없습니다. 당신에게 추천하진 않습니다. 몸에 막대한 부하가 걸립니다.』
『위험한 균열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은 앞으로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남은 질문 중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아카식 레코드’가 있는 ‘세계의 경계선’이 어디인가요?”
『…………─.』
문자 속에 노이즈가 섞였다. 한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답변이 허용되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곳은 진정한 ───만이 도달하는 곳. 당신이 직접 찾아야 합니다. 당신은 가장 기본적인 자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자격은 당신이 얻으셔야 합니다.』
『이상으로 문답을 마치겠습니다.』
『대화의 대가로 이번 균열 해결을 도울 것을 제안합니다. 거절하셔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럴게요.”
충분히 유용한 대화였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역시 관리자들과 인사하고 가고 싶다.
거기다 아직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은 시험해 보지 못했다. 일이 빨리 끝나면 폐쇄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수긍한 순간 의식을 가까이 하고 있던 별의 도시의 핵심 안에서 익숙한 마법이 빛났다.
베로니카가 이룩한 정비소는 이 별의 도시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형태가 남았다. 그렇게 남은 정비소의 힘은 이 도시가 흡수했다. 도시의 핵심 안에서 나온 것은 베로니카가 사용했던 공간의 보조 제어 장치였다.
정신만 빠져나온 유령 상태라지만 이 세계의 관리자이며 나 다음으로 꿈마법을 다루는 인성이 및 그 가디언들은 나를 볼 수 있다. 내가 숨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도시의 핵심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에 뒤를 돌아본 관리자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유은하?”
“은하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보조 장치를 통해 관리자들이 건드리고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양상이, 세계의 핵심을 통해서는 그것들이 그렇게 된 원인이 전달되었다.
“거기다 몸은 두고 왔네? 성진이한텐 말하고 왔지?”
“말하고 왔어. 사실 일하고 있는 거 보고 들어오는 걸 포기할까 했는데, 세계가 들어와도 된다고 하기에……. 일하는 중에 혼란스럽게 한 건 죄송해요.”
나는 핵심 앞에 나타난 키보드에 손을 올리며 익숙하게 마력을 퍼트렸다.
“온 김에 세계랑 대화를 좀 나눴어. 놀랍게도 대화가 가능하더라. 질문에 대답한 대가로 이번 흔들림을 보조해 달라기에, 동의하고 나선 거야.”
지구와 별의 도시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별의 도시가 어떻게 공간을 안정시키는지 관찰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나는 세계를 복구하기 위한 마법을 해석하고 체득했으며, 세계를 복원시킨 마법을 시동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버겁고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금방 감이 왔다.
“『균열, 복구』.”
『현몽(현실을 꿈으로)』 『몽현(꿈을 현실로)』
균열을 거짓으로 만들고, 그 위에 이상적인 우주의 모습을 덧씌운다.
주인보다 강한 마녀조차 잡아먹은 마법이다. 공간 한두 개 정도야 금방 뒤바꿀 수 있다.
균열을 일으킨 원인조차 내 상상에 잡아먹혀 빠르게 원래 보여야 할 모습을 되찾아갔다.
다만 나는 빠르게 흔들림을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공간을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조정하기는 어렵다. 세계의 계약자인 인성이만큼 세계를 넓고 세세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가 복구된 이후로 예전보다 공간을 보고 다루기 어려워졌다. 세계에 겹치는 이차원의 숫자는 확 줄어들었다. 이제 마법을 쓰지 않고서 이차원의 틈새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공간을 다루기 어려워진 건 인성이가 말하길 세계가 튼튼해졌다는 반증이란다.
달라진 세계가 처음엔 조금 답답해졌지만, 그와 별개로 실력이 늘어 어느새 예전만큼 공간을 보거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세계의 계약자처럼 공간 구석구석에 힘을 밀어 넣기는 어렵고, 공간의 변화에 맞춰 세계의 축을 조작하는 건 힘들다.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에서 성장을 느끼곤 하지.’
별의 도시에서 흘러간 마력에 맞춰 세계의 축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나는 환각 위주로 마법을 움직여 균열이 제압될 때까지 관리자들을 보조했다.
“후아, 오늘은 빨리 끝났다.”
인성이의 눈동자, 정비소의 잔해와 융합하며 중앙 빌딩 영휘의 20층은 컴퓨터 기능을 탑재한 현대식으로 싹 바뀌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주저앉은 캐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미아가 기지개를 피며 웃었다.
“예기치 못한 균열이 이렇게 빨리 정리된 건 처음이야.”
캐시와 마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성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세계의 핵심이랑 대화를 나눴다는 게 정말이야? 우리 질문에도 대답을 잘 안 하거든, 우리 계약자는. 웬만한 일은 방향만 가리키고 우리가 알아서 하게끔 놔둬.”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나는 다시 한 번 세계에 키보드를 전해보았다. 하지만 세계는 이번엔 키보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글로 사람에 맞춘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리자들은 이번엔 경악했다. 싸울 때를 제외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라스조차 눈을 부릅떴다.
“집합체라도 아스트랄과 달리 인간적인 감정은 없는 것 같았어. 다만 내가 세계가 반응을 보일만한 어떤 조건을 지니고 있었고, 내가 지닌 키에 걸맞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 느낌이랄까?”
“으음, 예상은 했지만…….”
나를 마주본 인성이가 어딘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랭크 시험 결과를 확인하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희랑 실력차가 많이 벌어졌나봐.”
“…갑자기 왜?”
안타깝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트라베리아와의 마지막 전쟁을 이겨낸 후로 또 한 번 훌쩍 성장했다. 성진이는 좀 예외지만, 나, 인하, 인성이, 소영이 모두 사투를 계기로 무시무시하게 도약했다.
우리 모두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재능의 소유자로, 재능의 정도만 따지만 같은 범주로 다뤄진다. 그러나 결국 그런 우리 사이에도 재능의 차이가 있었고, 강해진 정도는 모두 달랐다.
가장 비약적인 성장을 보인 것은 나와, 명계를 다룬 경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진이었다. 그것은 랭크 시험에서 루키아와 하르펜이 보인 기록을 뛰어넘은 것으로 증명 되었다. 랭크 시험 결과를 제외하더라도, 감지능력자인 나와 성진이는 우리 둘과 친구들 사이에 끼워 넣어진 벽을 가장 먼저 느꼈다.
이내 인성이가 얼굴에 쓴웃음을 그렸다.
“이 도시의 핵심인 내 눈동자는 컴퓨터야. 하지만 이 세계는 한 번도 그림자의 핵심을 통해 그런 식으로 말을 걸진 않았어.”
인성이는 내 옆에 다가와 정비소의 보조 장치를 제 몸에 집어넣는 그림자의 핵심을 쓰다듬었다.
“계약자인 나조차 세계를 담는 그릇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어.”
‘세계의 의지를 변환할 수 있을 만한 기술’. 세계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긴, 내 힘은 세계와의 계약에 의해 끌어올려진 경향이 강하지. 랭크 시험은 참 정확해.”
인성이는 한숨과 함께 내 옆에 의자를 만들고는 앉았다.
“조금 분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강해지겠다고 필사적으로 단련하기엔 좀……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하고 싶은 건 웬만해선 다 할 수 있으니, 강해질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 이 이상 가면 말 그대로 인간을 벗어날 것 같아.”
“와.”
“캐시, 그 표정은 뭐야?”
캐시가 미묘한 눈빛으로 입을 벌렸다. 마치 애가 다 컸다는 걸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냥, 뭐랄까, 너희 말야, 너희가 얼마나 괴물인지를 인지하고는 있구나? 끼리끼리 뭉쳐 있는 데다, 자기 우물 안에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으니까, 멈추는 법조차 모를 줄 알았어. 아니, 그래도, 아직 성장 가능성이 있다면 멈추지 않는 게 더 좋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야 뭐…….”
어색하게 웃는 인성이의 옆에서 라스가 자신의 배를 살짝 두드렸다.
“배고파.”
“아, 그러네. 일 끝났으니 밥 먹자. 한나절 후에 폐쇄 기간에 돌입하는 만큼 많이 먹어두자.”
“하아, 폐쇄 기간 진짜 싫어……. 난 중간중간 간식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안고파서 좀 이따 먹을래.”
캐시가 고개를 저으며 키보드 위에 엎드렸다. 그때 누가 팔을 톡톡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정신이 아니라 현실 쪽 감촉이었다.
“어……생각보다 시간이 지났나? 지금 한국 시간으로 몇 시야?”
“응? 아침 7시야.”
“일 시작한지는?”
“5시간 지났지?”
“와……. 그럼 나, 세계랑 대화한다고 3시간을 쓴 거네? 정말 장난 아니다. 시간 감각이 이렇게 어긋난 건 오랜만이야. 아, 성진이가 아침이랑 오늘 만든 간식 나눠 준다는데 먹을래?”
“먹을래!”
조금 전까지 의욕이 없던 캐시가 번쩍 손을 들었다. 인성이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아침밥을? 간식을?”
“간식!”
“아침밥도 먹자.”
하미아가 진지한 얼굴로 캐시를 토닥였다. 인성이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여러 사람들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어서 난 내가 정말 불성실한 식습관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즘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옆에서 습관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습관적으로 지키게 되는 게 있지.”
“하긴. 성진이라든가, 예리라든가, 미영 할머니……케일……캘리번의 의사들……선생님…….”
새삼스럽지만 우리의 불규칙한 식습관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참 많았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어느 정도 올바른 식습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관리자들에게 성진이의 요리를 건네 준 나는 빌딩을 나섰다. 나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열쇠를 끼워 공간을 연결할 만한 건물을 찾았다. 중심 빌딩들만큼은 아니라도 공간의 힘이 어느 정도 갖춰진 건물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살피는 와중 눈에 들어온 빛에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전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중심 빌딩, 영휘가 태양을 반사하듯 반짝반짝 빛났다. 한자로 뜻을 유추해 보면 영휘는 ‘빛나는 그림자’ 혹은 ‘그림자의 빛’이다. 인성이는 ‘영휘(影輝)’라는 이름에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
하나는 실체가 된 그림자다. 이건 사투에서의 승리를 증명한다. 또 하나는 거대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인성이는 그들이 있는 빌딩이 우주에서 길을 이끄는 등대가 되기를 바랐다. 높게 솟아올라 빛을 뿌리는 빌딩은 확실히 그 이름에 꼭 들어맞았다.
도시 곳곳을 둘러보던 나는 곧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발견했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별하늘의 열쇠』
문자와 함께 열쇠가 두 자루 소환되었다.
‘몸에 부담이 간다고 했지. 그럼 일단 연결만 해보자. 안에 들어가는 건 힘을 살펴 본 다음에 하자.’
더 이상 강해질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했지. 피의 맹약만 없었다면 나와 성진이도 그랬을 수 있겠다. 어쩌면 우리가 강해진 건 여전히 강해질 이유를 하나 이상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로 쥔 열쇠는 회색 영역의 근원지를 열기 위한 열쇠였다. 이 열쇠는 신성을 지닌 『란스의 성배』의 성수와 『멘델의 시계』의 시간을 메인으로 만들었다.
“『회색 영역에 연결』.”
나는 열쇠를 문에 꽂고 언령과 함께 돌렸다. 과거에 보았던 회색 영역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것이 흘러나온 근원과 이 문이 연결될 것을 바랐다.
카……각!
돌아가던 열쇠가 사슬에 붙잡힌 것처럼 제동이 걸렸다.
“……!”
그러나 나는 한동안 손에 힘을 주지 못하고 신음을 삼켰다.
열쇠에 무시무시한 힘이 몰렸다. 알 수 있다. 이대로 열쇠를 완전히 돌리면 필시 이 건물은 시간의 틈새의 근원인 시간의 중심부와 연결된다.
‘회색 영역의 시간은 세계의 중심부……에서 흘러나온 거라 그랬지. 그래서 그런가. 응, 세계의 핵심과 대화를 나눌 때랑 비슷한 느낌이, 나.’
나는 잠깐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설마 바로 연결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별의 도시라는 장소의 특수성 덕분인가? 아니면 세계의 핵심이 허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
육체의 버릇대로 숨을 들이키며 열쇠를 쥔 손에 천천히 힘을 가했다. 열쇠가 듣기 힘든 소음을 내며 느릿느릿 돌아갔다. 내 마력과 정신력이 무식할 정도로 많이 빠져나갔다.
칵! 칵!
그러나 열쇠는 도중에 힘을 잃고 멈췄다. 나는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숙여 열쇠를 살폈다.
열쇠는 본체와 손에 쥔 주인의 힘까지 합쳐서 하나다. 반동으로 튕겨나가거나 마법에 상쇄된다면 모를까, 멀쩡히 손에 쥐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능이 정지되는 건 처음 본다.
‘신력이 비었어. 여길 여는 데는 반드시 신력이 필요한 건가?’
열쇠에 채워 넣었던 성배의 힘이 비었다. 지금의 나로써도 신력을 흉내 낼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스로의 마법으로 만든 신물, 『란스의 성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마법이 정말로 신력을 띠게 된 것조차 의외였다. 신력은 신 혹은 신과 관련된 상징물이 지닌 고유한 힘이었다. 신물을 관찰해본 바 마법사의 마력처럼 신력도 신마다 다양한 성질을 띠는 모양이었다.
란스의 성배는 내가 쓴 첫 장편 소설인 에 나오는 성물이다. 차원이동 물로, 주인공이 이동한 세계는 판타지 소설 배경으로 흔히 쓰이는 가상 중세~근대 유럽 세계관이었다.
용, 엘프, 정령, 마족, 몬스터, 등의 이종족과 이곳과는 사뭇 다른 마법, 검술 등의 힘이 있는 세계관.
란스의 성배는 주인공이 이동한 세계의 신인 풍요의 신전의 성물이다. 오랜 기간 행방이 요원했으나 주인공 일행이 모험 도중에 찾게 되는 이 성물은 주인공 일행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외에는 란스의 성배처럼 신물을 상상해 구현하는 것과, 이 세계에 있는 신물의 힘을 흉내 내는 것, 에쉬리안나 님의 힘을 흉내 내는 것, 내 마력을 신력과 엇비슷하게 바꾸는 방법 등이 있다. 뒤로 갈수록 어려우며, 실패했을 때 오는 반동이 상당하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성배의 힘을 불러왔다.
이렇게 강해졌음에도 『란스의 성배』는 언제나 부작용과 시간제한 등을 동반한다. 내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쓰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신의 힘’을 모방한 대가겠지.
성배의 보석 하나가 떨어져 열쇠 안에 들어갔다. 열쇠가 조금 돌아가나 싶은 순간……다시 힘이 끊겼다. 살펴보니 이번엔 신력만이 아니라 열쇠 내부의 힘이 전부 바닥났다.
“후우…….”
나는 숨을 내쉬며 열쇠를 도로 돌려 통로를 닫았다.
열쇠를 도로 돌려도 써버린 힘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열쇠는 아직 세계의 중심부를 열기엔 힘이 부족했나보다.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필요한 힘을 보충한 다음 다시 도전…….
빠직─…….
“욱…!”
가슴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통증은 몸 전체에 전기처럼 흘러 퍼진 후 가라앉았다. 다만 통증이 지나간 자리에 금 같은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정신체인 이 몸에 말이다.
“하아, 하아…….”
등골이 오싹하고 가슴 깊은 곳이 섬뜩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숨을 삼켰다. 내 그림자를 따라 또 한 번 꿈을 침범하는 악몽의 금이 자라나 있었다. 이번에는 제법 컸다.
기묘한 불안감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방금 그 고통은 육체에서 온 통증이기도 했다. 육체 쪽도 뭔가 이상이 있었는지 성진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문이를 통해 성진이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말했던 열쇠 중 하나를 썼어. 회색 영역에 연결하기 위한 거. 힘이 부족했는지 열진 못했어.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반동이 왔어. 맞아, 반동 때문이야. 열쇠 하나만 더 써보고 돌아갈게. 응, 무리는 하지 않을게. 온 김에 전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래. 응, 금방 일어날게.』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나를 침범하는 악몽과 내 몸에 새겨진 금을 환각마법으로 덮어 씌워 없앴다. 금이 사라지자 계속 가슴 한편을 쥐어짜던 섬뜩함도 가라앉았다.
“…그렇다 쳐도 느낌이 이상하네.”
「그렇다면 조금 일찍 검진을 받아보시는 건 어떤가요?」
우리는 1년에 한 번, 예리에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세계가 평온해진 만큼 우리가 새삼스럽게 부상을 입을 일은 없지만, 강대한 마법을 사용해 부작용을 끌어안을 때도 있고, 초월자라 해도 드물게 심각한 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병은 어느 것이든 빨리 조치하는 게 제일이다.
“그럴까? 예리랑 시간이 맞으면.”
프리랜서 의사라고는 하지만 예리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의사다. 두문불출한 디나나 트라베리아 출신인 셰린, 도로시, 리브리 소속이며 키메라인 라이라에 비해 예리는 다른 이들이 접근하기 비교적 편하다. 예리도 위중함을 위주로 따져 곧잘 의뢰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