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22
하긴, 레일리는 SR의 회장이다. 결혼 예식 생방송이 잡혀 있을 정도로 이번 결혼식은 주목도가 높았다.
나는 회장에 발을 들이며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레일리와 로일의 결혼식은 유명한 야외 공원을 통째로 빌려 진행됐는데, 장식된 꽃의 상당수가 한빛 정원의 꽃이었다. 인하에게 꽃을 결혼 선물로 부탁했던 건 이걸 위해서였나보다. 특히 레일리가 쥐고 있는 부케의 꽃은 전부 한빛 정원의 꽃이었다.
“은하야! 성진아!”
촬영을 잠시 멈춘 레일리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가까이서 본 레일리와 로일은 빛이 나게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미남 미녀인데다, 열심히 꾸민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결혼 축하해.”
“고마워!”
레일리는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나와 성진이에게 연달아 악수를 청했다. 크게 휘둘러지는 손의 힘에서 그녀의 기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즐거워 보인다.”
“으~음.”
레일리는 검지를 턱에 대며 고개를 한 번 기울이고는, 다시 웃었다.
“사실 엄마랑 아빠 같은 경우도 제법 있는 만큼 결혼에 큰 의미를 둔 적이 없었는데. 바쁜 와중에 식 준비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활짝 웃은 레일리가 어느 때보다 들뜬 얼굴로 뺨 옆에 손가락으로 V를 만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니 점점 즐거워지더라!”
“그랬구나.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오늘 표정이 정말 예뻐.”
“와아아. 뭐야, 부끄럽게.”
“즐거운 날엔 듣기 좋은 말을 들어야지. 아, 그렇다고 의례상 한 말은 아니야.”
“두 사람 잘 어울려.”
드문 성진이의 칭찬에 레일리와 로일은 나란히 수줍어했다.
“고마워.”
“고맙습니다.”
레일리가 우리를 부른 이유는 인사에 더해 같이 사진을 찍었으면 해서였다. 두 사람의 들러리와 때마침 도착한 인하까지 더해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레일리와 로일의 들러리는 3명씩 해서 총 6명이었는데, 제레미와 딜리엄 두 명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학교 동기이거나 우연히 의기투합했거나, 하여간 오랫동안 연락을 나눈 절친한 친구 혹은 후배라는 모양이다.
인하는 오늘 머리띠를 쓰고 베이지색 바지 정장을 입었다. 패션에 관심 없어 비슷한 스타일의 원피스만 입었던 예전과 달리 갈수록 옷의 레퍼토리가 많아진다. 기쁜 일이고말고.
인성이 일행은 결혼 예식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날 예정이고, 소영이는 예식 시간에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한다.
하객석으로 향하는데 기자가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칭호나 성격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은연중에 두려워한다. 실력의 차이에서 오는 경외감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혹시 기사를 위해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습니까?”
얼굴은 어차피 팔렸고, 좋은 날이니 그 정도는 괜찮으려나.
“네, 좋아요.”
“10장 이하로.”
“알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기자들이 우리 사진을 단독, 혹은 단체로 총 10장 정도씩 찍어 갔다. 우리는 하객석을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일이 바쁜 관계로 아직 오지 않은 사람도, 예식까지만 보고 가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었다.
대현에서는 성후 오빠, 시하, 예슬이, 반, 데미안, 슈카가 참가했다. 유펠르시아에서는 아르델과 세필리오가, 리브리에서는 란 리나와 라이라, 방위부에서는 아르피나가 왔다.
첸 일행도 왔다. 결혼식에 참가하는 건 처음이라며 인성이와 함께 있는 하미아를 제외하면 이성을 가진 키메라들은 다 모였다. 라이라와 반 일행은 곧 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입니다, 은하 님.”
새벽별무리를 해체한 지금 키메라들이 나를 리더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무나, 대부분 존중하는 호칭과 말을 붙인다.
첸, 반, 데미안, 슈카, 라이라, 쟈넷, 루니라와 동물 키메라 루피, 바인, 하울, 퀴리, 밀, 루지. 여기까지가 새벽별무리의 동료였던 면면들이었다.
첸의 옆으로 쉽게 친해질 수 없었던 이들이 4명 늘어섰다. 한 명의 성인 남자로 합쳐진 케르베로스 형제, 맹금류의 날개와 눈을 지닌 노체, 가공의 외계인 그레이가 모태인 소비토, 동화 속 주인공이 모태인 앨리스.
케르베로스를 제외한 3명은 대마법 장치의 예비 배터리로써 유클라프가 만든 깊숙한 공간 속에 잠들어 있던 장군 시리즈 생존자였다. 심지어 소비토는 한때 유클라프의 측근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노체를 제외하곤 어느 정도 우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지만, 조금씩 지금의 사회에 익숙해지고 있다. 적어도 이제 그들은 죽고 싶어하진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일리는 이들에게 청접장을 보내지 않았을 거고, 첸도 그들을 여기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의사들의 협력으로 확인해본 바 키메라의 수명은 장군 시리즈가 최소 200년, 자아가 없는 키메라는 실력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30년~100년 사이다. 아직까진 주인인 트라베리아가 우리로 교체된 느낌이나, 전쟁이 끝나고 이제 겨우 3년이다. 그들이 점차 자유로운 의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오랜만이에요.”
첸 일행의 인사에 하나하나 답한 다음 죄인으로 묶여 있는 그들에게도 한 명 한 명 인사를 보냈다.
노체는 빙긋 웃었고, 케르베로스, 소비토, 앨리스는 적의와 불안감을 감춘 표정으로 고개와 눈을 움직였다. 노체는 여유롭고 침착하며, 케르베로스와 소비토는 커븐 로드의 측근이었던 만큼 비교적 트라베리아를 향한 충성심이 깊고, 앨리스는 겁이 많다.
“안녕하세요.”
“…안녕.”
“네에…….”
책임자의 도리로 주기적으로 만나러 가지만 여전히 노체 이외의 이들과는 사이가 어색하다. 하물며 나와 성진이는 사교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반드시 친해질 필요는 없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시간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만큼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정도는 되고 싶다.
“첸 씨가 정장을 입은 건 처음 보네요.”
첸은 전쟁 시 항상 소매가 넓은 옛 중국식 한푸를 입고 다녔으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다양한 복식을 즐겼다. 한복 이외엔 티셔츠, 후드티 등 캐주얼하고 편한 옷을 많이 입었으므로 정장을 입은 걸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요. 내친 김에 부채도 새로 샀습니다.”
감색 정장을 입은 첸이 별하늘이 수놓아진 부채를 자랑스럽게 펴보였다. 슈카가 장난스럽게 부채 끝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옷도 부채도 잘 어울려요.”
“그렇지? 잘 어울리지? 얘들 옷이랑 장식 내가 골라줬다? 역시 나야.”
“잠깐! 액세서리는 내가 골라준 것도 많잖아.”
“역시 우리야.”
라이라와 슈카가 들뜬 얼굴로 손뼉을 마주쳤다. 들뜬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은 첸이 한발자국 다가와 우리에게 속삭였다.
“결혼식을 보는 게 처음이라 저럽니다. 특히 슈카는 데미랑 해보고 싶다는군요. 케르베로스와 소비토는 사실 오지 않으려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같이 온 겁니다.”
“아…….”
슈카와 데미안은 순조롭게 사귀고 있다. 사귄지 3년이니 결혼 생각이 날 만도 하지. 어쩐지 많이 들떴더라.
같은 ‘키메라’라는 선 안에 있어도 흡혈귀인 슈카와 드래곤인 데미안의 육체는 서로 많이 다르다. 그게 아니더라도 키메라들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결혼을 한다고 꼭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한다면 아이는 아주 중요한 논점이다.
그래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결혼하는 두 사람의 의지였다. 키메라 사이에서 탄생한 첫 번째 커플의 성장에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두 분은 커플 룩이시군요.”
슈카와 눈이 마주쳐 미소를 돌려주던 나는 다시 첸을 돌아보았다. 원피스와 정장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색깔과 포인트 장식은 같다.
“잘 어울리십니다.”
예리, 형일 아저씨, 미영 할머니, 캐티아의 장인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식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늦을 예정이라고 했던 캘리번 일행은 다행스럽게도 예식 예정 시간 3분 전에 다급히 도착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대기실에서 예식을 위한 준비에 한창인지라 그들을 반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기척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번보다 머리카락이 길어진 소영이가 주위 사람들과 손 인사만 나누고 캘리번의 마법사들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
“후아, 늦는 줄 알았다. 아, 인성이도 아직 안 왔네?”
캘리번의 마법사들은 우리에게 한 번 인사를 하곤 여기서 약간 떨어진 자신들의 지정석에 향했다. 우리 옆에, 키메라들 사이에, 캘리번 일행 직후에 온 윌리엄 옆에, 자리가 하나씩 비어 있었다.
예식 시간 1분 전, 성진이의 옆자리에 검은 공간이 이어지는 느낌이 났다. 결혼식을 위한 음악이 울려 퍼질 무렵 열쇠를 찰칵 돌리는 소리와 함께 인성이, 하미아, 캐시가 지정석에 정확히 이동했다. 반가운 모습을 확인하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와.”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도 조마조마했어.”
몇 번 본 적 있던 SR의 마법사가 주례를 섰다. 들러리 분들이 먼저 입장했고, 잠시 후 로일과 레일리가 손을 잡고 함께 입장했다. 버진로드에 가깝게 선 남녀 들러리 두 명이 축하의 의미로 반짝거리는 꽃잎을 뿌렸다.
하늘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 사이로 두 사람은 윌리엄, 캐시, 인성이, 하미아가 온 것을 확인하고는 기쁨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었다.
주례를 서신 분은 들어 보니 레일리의 첫 사수이며 로일이 SR에 들어올 때 도움을 주셨던 분이라고 한다. 마법 실력은 A랭크에서 머물렀지만, SR에서 오래 일한 고참 마법사였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 분은 레일리와 로일의 풋풋하면서도 본인들에게는 쑥스러운 과거 이야기를 몇 개 꺼내며 레일리와 로일의 행복을 빌었다.
직접 쓴 혼인 서약서를 한 문장씩 번갈아가며 읽으면서 로일과 레일리는 부끄러운지 몇 번 얼굴을 붉혔고, 한 번은 웃음을 참았다. 그때마다 옆에 함께 선 들러리 분들이 소리 없는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의 팔이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두 사람이지만, 결혼식 때 그런 식으로 냉정을 가장하는 건 미묘하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흘러넘치는 감정을 구태여 반 이상 흘려보냈다.
주례 분이 성혼선언문을 읽었고, 두 사람은 반지를 교환했다. 반지 상자는 제레미가 건넸다.
이 세계의 결혼반지는 나와 성진이의 커플링처럼 마법석이든 마력 결정석이든 서로의 마력을 사용하여 만드는 경우가 많다. 레일리와 로일의 반지에 세공된 메인 보석에도 두 사람의 마력이 담겨져 있었다.
레일리는 로일에게 붉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로일은 레일리에게 검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서로 끼워주었다.
이때 기자들의 사진 촬영은 절정에 달했다. 아까와 달리 결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셔터음과 플래시를 지웠지만, 그래도 드문드문 신경 쓰이긴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벅찬 눈으로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하더니, 곧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한 번 미소 짓고, 입술을 맞대는 정도의 키스를 나눴다.
“와아아아아!”
“축하드려요!!”
나는 감정을 담아 박수를 치면서 문득 여기와는 조금 떨어진 한 자리를 돌아보았다.
이곳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는 성후 오빠를.
성후 오빠는 아는 사람이 많고, 어쩌면 종전 이후 결혼식에 참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때와 이번 결혼은 많은 게 다르다. 그래도 내가 본 결혼식은 그리 많지 않아서, 10년도 지난 그날의 풍경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만 생각하자. 이런 좋은 날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실례야. 성후 오빠한테도…….’
분투하며 살아가는 동안 아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개중에는 연애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많다. 언젠가는 나도 성진이와 결혼식을 치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생각은 그때만의 기억으로 담아 둬야지.
회장에는 계속해서 꽃잎이 떨어졌고, 레일리와 로일 옆에서 몇 걸음 떨어진 두 사람의 들러리들이 하늘 위로 마법을 쏘았다. 무언가를 만드는 데 특화된 SR의 부회장 제레미의 축포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들러리 분들의 마법이 제레미의 마법에 의해 분해되고, 재조합되고, 섞였다. 축가, 축하 공연. 여러 사람들의 축복 사이에서 레일리와 로일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예식은 금방 끝났지만 아직 피로연이 남아 있었다.
미국의 피로연은 보통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레일리와 로일의 지인 중엔 바쁜 사람이 많은 관계로, 피로연에서는 사람 숫자가 휙 줄었다.
윌리엄은 경찰의 동료들과 함께 어찌어찌 웨딩 케이크 커팅까지는 보고 갔고, 방위부의 서장으로써 바쁜 루카도 피로연에 모습을 드러내 어떻게 한 번 레일리, 로일과 춤을 춘 다음 돌아갔다.
일주일에 3시간 정도밖에 나와 있지 못하는 관리자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축하하다 강제 귀환 당했다.
퍼스트 댄스 연습을 해온 주인공들 외에도 파티의 참가자 중에는 사교댄스를 비롯하여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많았다. 청첩장에 적힌 결혼 순서를 확인하고 춤을 몇 개 연습해 두길 잘 했다. 레일리와 로일, 성진이, 친구들 등,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춤을 췄다.
옛날도 지금도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하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이 정도 경지에 오르면 웬만한 움직임은 금방 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벨라가 내 그림자가 된 이후로 신체 모방 능력은 더 뛰어나졌다.
벨라는 나와는 정반대로 운동 신경이 뛰어났기에 춤도 특기였다. 춤을 연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는 걸 느꼈을 때는 기분이 좀 이상했지만, 좋은 건 좋은 거라 치자.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
지인들 사이를 돌고 돌다가 이번엔 소영이를 따라 캘리번의 마법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최근 성진이가 부적을 만들 광석 소재를 찾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테온이 마법에 보관하고 있던 광석을 몇 개 소개했다. 참고로 저번에 마음에 드는 소재의 파편을 확인하고 갔던 행성에선 결국 쓸 만한 힘을 지닌 것을 찾지 못했다.
잠깐 자리에 앉았을 때, 주위를 둘러보던 소영이가 문득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요즘 슬슬 안정되긴 했나봐.”
“응? 그렇지.”
“아니, 음, 그러니까…….”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소영이가 옆에 있는 테온을 가리켰다.
“얘네가 은근히 발이 넓거든. 주위에서 청첩장이 제법 와.”
“결혼 비율이 늘었다는 뜻이야?”
“응. 솔직히 예전엔 결혼을 할만한……누군가를 축하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어수선했고, 지금도 계속 정비가 이어지는 중이고.”
어느 정도 주위 환경이 정비되지 않았다면 주위의 분위기에 민감한 레일리와 로일이 결혼식을 열었을리 없다. 레일리는 바라지 않는 경위로 모친의 지위를 이은 만큼, 지금의 직위와 일을 아주 중요히 여긴다.
“거기다 결혼은 현실적인 문제가 많이 얽히잖아. 사랑 이전에 안정적인 생활 보장이 필요하단 말이지. 왜, 한동안 일자리가 안정되지 않았잖아. 지금도 이전에 비하면 불안정하고,”
전쟁이 끝나면서 바뀐 것이 아주 많았다. 어둠의 조직이 대거 사라지고, 전투 마법사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고,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축복하러 오고,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품을지 고민하고,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런 모습을 보니까 조금씩 실감이 나더라고. 세상이 많이 안정되었구나 싶어서 기뻐졌어.”
소영이는 한동안 아주 부드러운 눈으로 춤을 추는 레일리와 로일을 응시했다. 바라마지않았던 일상, 행복이 곳곳에 피어났다. 나는 소영이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응, 그러네.”
인하도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소영이가 이번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레일리만이 아니라, 요즘 주위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껴.”
테온이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를 고르던 캘리번의 오를레아가 소영이와 테온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야?”
“아, 우리 주위에 결혼을 생각할 법한 커플이 제법 있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
“하긴…….”
인하가 흘끔 나와 성진이를 돌아보곤 이해한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너희도 요즘 안정된 것 같고, 아르델이랑 세필리오가 요즘 분위기가 좀 그래. 조만간 누가 프러포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오호라!”
“거기에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도, 안 그래?”
나는 유정 언니를 흘끔거리며 인하의 말에 동의했다. 아르델도 유정 언니도 우리보다 오래 사귀었다. 거기다 나이도 이제 27, 28이니…….
“그러네. 사귄지 꽤 됐고, 다들 결혼을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네. 다음에 한 번 잘 봐야겠다. 슈카랑 데미안도 생각이 있나 보더라.”
키메라 중에서 리셉션에 남은 것은 라이라, 슈카, 데미안 세 명이었다. 세 사람은 레일리의 근처에서 여러 사람과 춤을 즐기고 있다.
이내 소영이가 그것 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거기다 커플이 많이 늘었어. 미림이도 그렇고, 오를레아도 그렇고.”
“우린 사귄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어라, 오를레아 씨도 연애 중이었나요?”
“아, 은하 님한텐 아직 말을 안 했었구나. 맞아, 하고 있어. 시작한진 반 년 밖에 안 됐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까지 빠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랑.”
“그런가요. 행복해 보여서 좋네요.”
“맞아. 지금 엄청 행복해. 원거리 연애인 게 조금 아쉽지만, 나도 그이도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아, 은하 님도 어쩌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녀는 취해 약간 풀린 눈을 반짝이며 애인 자랑을 늘어놨다.
들어 보니 오를레아의 애인은 지구에 남기로 한 외계인 분이셨다. 추운 행성에 살았으며, 키가 작고, 피부가 회색인 여성이다.
구태여 말할 이유도, 물을 이유도 없어 처음 안 사실인데, 오를레아는 레즈비언이었다. 여자밖에 좋아한 적 없고, 여자밖에 사귄 적 없단다.
나는 처음 안 오를레아의 성향보다는 그녀의 애인 분에게 흥미를 가졌다.
“아, 그 분이라면 기억해요.”
오를레아의 애인은 많은 외계인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이한 자였다.
그녀가 살았던 행성의 외계인들은 지구처럼 위력이 강하진 않아도 일상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트라베리아나 유펠르시아처럼 자연과 교감하는 마법을 썼다. 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마법을 썼다.
그래서인지 지구의 마법에도 금방 익숙해졌고, 첫 랭크 시험에서 B랭크를 땄으며, 지금은 학자가 되기 위해 대학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외계인 중에서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도 한 번은 캘리번에 올라타 고향을 확인했었다. 그때 인연이 생겼나 보다.
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극한의 상황이기에 오히려 꽃피는 사랑도 있다고 하나 마음 놓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하기에 지난 시대는 너무 각박했다. 나랑 성진이도 사귀긴 전쟁 때 사귀었다지만, 편하게 마음을 나누고 진도를 나간 것은 모든 싸움이 끝나고 1년이 지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서였다.
“…그러네. 많이 좋아졌다 싶다.”
“그렇지? 오늘 레일리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그게 확 마음에 와 닿더라고. 우리도, 주위도, 많이 좋아졌어.”
회장에 울리는 음색이 빠른 곡조에서 느린 곡조로, 다시 신나는 곡조로 바뀌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오래 이어가지 않았다. 레일리와 로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만큼, 곧 다시 박수를 치거나 끼어들어 춤을 췄다.
중간중간 들러리 주최의 축가와 공연이 있었다. 혹은 주인공들 주최로 간단한 이벤트와 웨딩 소품을 찾는 게임도 했다.
레일리 리카르트와 로일 리트너의 결혼식 피로연은 밤 11시가 되어 끝났다. 이제 며칠 후 혼인 신고서가 통과되면 로일은 로일 리카르트가 된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울림이었다.
피로연이 끝난 후 레일리, 로일, 두 사람의 들러리 6명은 결혼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인사하며 보내줬다. 곧 우리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축복을 담아 레일리, 로일과 악수 혹은 포옹을 했다. 레일리의 등을 두드리며 아르델이 물었다.
“혹시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요? 그런데, 가죠……?”
레일리가 바쁜 것을 떠올린 아르델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다행히 갈 수 있어요! 완전한 신혼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랭크 시험 스토리 업데이트 자료 조사 겸으로 몇 작가 분들과 미시스 은하에 갔다 오기로 했어요.”
아는 곳인지 캘리번의 에이온이 반응했다.
“미시스 은하라, 신비 현상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로군. 가까이 가면 위험하지만, 멀리서 보면 예쁘기에 길만 잘 숙지하면 관광하기 좋지.”
“네, 잘 아시네요. 인성이가 예쁜 곳을 몇 군데 추천해줬어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결혼 선물로 관리자들이 합심해서 미시스 은하의 지도를 쫙 뽑아줬답니다.”
레일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규율마법을 통해 지도를 슬쩍 펼쳐 보였다.
“즐거운 신혼여행 보내.”
“고마워.”
인사를 나누고 회장을 뒤로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공원을 거닐며 조금 대화를 나눴다.
“재밌었다.”
“즐거웠어요.”
“좋은 경험 했지?”
“응. 근데 상당히 길게 하네. 예식은 금방 끝났지만. 원래 피로연은 이렇게 길어?”
슈카가 기지개를 펴곤 고개를 기울였다. 성후 오빠가 손을 저었다.
“나라마다 달라. 한국은 밥 먹고 인사하는 걸로 마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일찍 끝나.”
“흐음…….”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슈카를 라이라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어요, 은하 님! 모두 대현에 자주 좀 놀러와! 다들 보고 싶어 하니까.”
“알았어. 조만간 찾아갈게.”
“꼭이에요! 은하 님!”
“알았으니까 예슬이 넌 그 ‘님’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
“헤헷!”
“캘리번에도 놀러와. 다들 보고 싶어 해. 오늘은 우리 대장들밖에 못 오기도 했고.”
“한재일, 은하한테 건들거리지 마라!”
“잠깐만, 잘 보라고! 손잡으려다 멈췄잖아!”
“애초에 접촉하려 들지를 말아!”
“너무해!”
헤어지기 전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성후 오빠는 나와 인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어른이 되어도 그에게 우리는 한참 어려보이는 모양이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아쉬움을 삼키며 헤어졌다. 이럴 때마다 서로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 섭섭하면서도 안심되고, 기뻤다.
“은하야, 여행 가자.”
“……어? 갑자기?”
루키아의 기록서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회색 영역의 근원지를 엿보기 위해 열쇠에 조금씩 힘을 저축하고 있고,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하기 위해 세계의 경계면……이라 할 법한 장소를 우주의 꿈을 헤매며 찾아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만 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성진이가 여행 이야기를 꺼낸 건 기록서의 오늘 분량을 읽고 아카식 레코드를 꿈에서 어떤 식으로 조사할지 문이와 의논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깥을 둘러보지 않은 것 같다.
“어디로? 생각해 둔 데 있어?”
성진이는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한 번 훑어 주고는 대답했다.
“풍경이 예쁜 행성. 모레 캘리번이 다시 우주로 나갈 거야. 우리도 같이 타자.”
“아, 놀러가는 게 아니구나.”
나는 며칠 전 성진이가 테온이 보여준 광석을 유심히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놀러가는 거 맞아. 겸사겸사 채굴도 하는 거고. 말했잖아, 풍경이 예쁜 곳이라고.”
그러면서 성진이는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하늘, 오색의 식물들, 보석을 매단 거대한 해양 생물. 확실히 장담할 정도로 예쁘고 신비로웠다.
“오…….”
“테온이 보여준 소재 중 마음에 드는 게 몇 개 있었는데, 그게 전부 여기에서 나온 모양이더라고.”
“흐음…….”
“거기다 여기가 태양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거든.”
“그래?”
“일석 삼조로 네 고민과 관련된 단서도 찾으면 좋잖아. 기왕 꿈을 헤맨다면 세계의 끝과 조금이라도 가까울 법한 곳에서 돌아다니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마침 캘리번이 이번에 여길 경유한다고 하니까, 타고 가자. 웬만한 함선보단 캘리번이 길을 잘 알고 있고, 그런 만큼 빠르잖아.”
제법 먼 은하에 있는 행성이라 캘리번이 아니고서야 가는데 일주일은 걸린다고 한다. 캘리번을 타고 가도 4일이 걸린다.
참고로 가는 건 오래 걸려도 돌아오는 건 금방이다. 성진이의 특별한 기술 때문이다.
내 마법 이상으로 성진이의 마법도 진화했다. 세계가 안정되면서 공간 이동이 어려워졌음에도 성진이의 사기적인 특수능력과 마법은 그 드넓은 거리를 단숨에 축소시킬 수 있다.
종말의 특수능력이 진화하면서 성진이의 영혼을 다루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성진이는 아는 자의 영혼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하물며 자신의 영혼을 잘못 볼 리 없다.
시간의 주홍빛을 품은 파도에 본인의 영혼 한 움큼. 성진이는 이것을 황혼의 물결이라 부른다. 이 황혼의 물결을 표식으로 설치해둘 시, 성진이는 언제 어디서든지 표식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야말로 우주의 끄트머리에서도 돌아올 수 있다.
“그럼 돌아오는 건 마법으로 할 거야?”
“그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일단 소형선을 빌릴 생각이긴 해.”
“만약 소형선을 타고 돌아올 경우엔, 왕복으로…….”
“캘리번이 알려준 길을 타도 열흘은 걸리지 않을까?”
마법을 써서 돌아온다 쳐도 필요한 광석을 찾고 채굴할 시간이 필요하니 최소 5일이다.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