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32
그래서인지 백한 선생님이 가리킨 키는 매우 낮았다. 내 허리춤 언저리다.
“그게 몇 년 전인데요. 벌써 20년 전이잖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계획서를 조금 더 짜다가 예약 시간에 맞춰 호텔로 향했다. 내 이름으로 대관한 게 알려졌는지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적당히 인사하고 뷔페에 들어섰다. 호텔 측의 인사, 접대 등 여러 인사치레가 있었지만 그것도 서준 오빠가 적당히 물렸다.
이후엔 자유롭게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여기에 지인이랑 몇 번 왔다던 서준 오빠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여긴 고기가 맛있어.”
그 말을 참고삼아 진열되어 있는 것을 고르고, 주문해야 하는 건 주문했다. 반 제외 육류를 좋아하는 키메라들이 살판났다. 성진이는 내 옆을 따라다니며 음식을 고르고는, 와인을 한 병 가져왔다.
슈카는 와인이랑 초콜릿을 좋아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이후엔 와인과 초콜릿 계열 디저트를 몇 병에 수십 조각 먹었다.
나는 디저트와 술을 제외한 모든 음식을 한 번씩 건드려 봤다. 확실히 고기가 제일 맛있었다. 와인도 몇 잔 마셨다.
“여전히 엄청난 양이 들어가네.”
“잘 먹으니 보기 좋다.”
대관 시간은 3시간으로 식사하기에 넉넉한 시간이다. 이것저것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장님은 한국의 안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주기적으로 대현 및 대현의 자매교에 들른다.
시하는 최근에 연애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나 출장이 많은 일정 상 반쯤 포기했다.
슈카가 최근에 학생한테 고백 받았다. 데미안이랑 사귀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다며 러브레터를 건넸단다. 데미안은 상대가 어린애인지라 코웃음만 치고 말았다.
최근 대현과 연결이 있는 보육원이나 유치원에 소액 후원이 늘었다. 돈을 벌기 시작한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의 후원이 대다수다. 후원보다는 자립한 학생이 늘어난 게 느껴져 기뻤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사람이 적었다. 경제는 안정되지 않았고, 화폐의 도입과 순환이 불안정했으며, 도시 재건 등으로 단발적인 일자리는 많았지만 혼란한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도 그런 직업으로 돈을 벌기도 어려웠다.
특히 전투 마법사의 입지가 좁아졌다. 작은 전쟁이 많았던 이전까지는 힘과 전투능력이 중요시 되었지만, 너무도 커다란 전쟁이 끝난 지금은 작은 싸움조차 기피 당한다.
하지만 최근에 새로이 회사가 설립되고, 손에 놓았던 문화를 다시 쥐며, 조금씩 일상이 넓어지고 있다.
아직 전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한 한 걸음씩 좋아질 것이다.
성후 오빠는 조금씩 교사로써의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다. 인호 오빠는 최근 반이랑 백한 선생님이랑 협력해서 학교랑 한국을 지킬 개별적인 방위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세계 연맹의 이름으로 세계의 평화를 조율하고는 있지만, 통합된 나라에 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조약을 어기고 싸움을 일으키려는 놈은 꼭 있다.
현재 한국의 방위는 나, 성진이, 세계 연맹의 마법으로 지켜지고 있지만, 개인이 아닌 나라의 이름을 건 방위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끔 키메라 건으로 대현에 싸움을 거는 사람도 있어, 세 사람은 여러 목적과 마음을 모아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성년자의 보호는 전 세계적으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어도 이제 한국에는 보호자 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가 없단다. 그래서 요즘은 구조팀의 일이 많이 줄었다.
“새블레의 기록 덕이 컸지.”
세계 수호 연방국 새블레는 만일을 위해 새블레에 자리를 잡은 모든 이의 신분을 기록했다. 빠른 안정을 위해 유클라프의 숨겨진 공간에서 구출된 이들의 신분도 기록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활발하게 구조 정책을 펼치는 중이고.”
“어린아이는 나라의 미래인걸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진짜 문제는…….”
백한 선생님이 불쾌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안 먹히는 나라야. 나라 간의 문화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아이를 노예로 쓰는 부류는 진짜……. 법을 건드리지 않고 빼내 오기가 힘들단 말이지.”
“썩을 놈들.”
“어휴. 그런 놈들은 세계가 이 꼴이 돼도 사라지질 않는다니까.”
“알려주면 조사할게.”
반이 주먹을 쥐며 의욕을 보였다. 반도 이제 어느 정도 꿈길을 볼 수 있다. 반만 한 실력자는 많지 않으니, 맡기면 한 나라의 정보를 통째로 털어 오리라.
“그래그래, 필요하면 말하마.”
하지만 인구수가 확 준 지금 이민을 범법으로 정해 둔 나라가 많다. 이건 잘못 건드리면 전쟁 금지법에도 걸리게 된다.
세계 연맹을 통해 인구 보호를 위한 권고가 내려와 있다지만, 국경이 갈린 지금 다른 나라의 일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것은 무척 어렵고 골치 아프다. 어찌되었건 그 나라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어린아이를 구하는 건 요원하다는 것이니, 대현이 고민이 많을 만하다.
“저희한테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신경 써줘서 고맙다. 그래도 방위부나 경찰이랑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으니까 다들 너무 고민하진 말고.”
“그럼 다행이고요.”
그래, 그런 일은 연합을 이뤄 해결하는 게 더 낫다. 특히 경찰은 다른 나라와 법을 조율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다.
슈카 일행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이 대현에서 잘 적응하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직접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봤고, 주기적으로 사건 보고를 듣고 있고, 만날 때마다 물어보는 거지만, 모두 새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학생들과의 사이는 전체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경계하는 학생들이 상당 수 있다. 무서워서 차마 도망만 치다가 음습한 괴롭힘으로 태도를 전향한 학생과 직원이 몇 명 있었으나, 슈카가 단칼에 해결했다.
그로 인해 일어난 2차 소란은 대현에서 해결했고, 필요하다면 내 이름도 쓴다. 물론 소란이 일어날 경우엔 나한테 보고가 온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일하는 키메라는 대개 전쟁의 공로자다. 전쟁이 끝나고 아직 고작 3년. 전쟁 때 합류했던 시기를 포함하더라도, 아직 키메라들에 대한 인식을 뒤바꾸기엔 이른가보다.
이들이 그럴진대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어떻겠나. 짧은 감시 기간이 지나고 무죄방면 된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모두 방위부, 경찰, SR, 리브리 등 큰 조직을 통해 정체를 꽁꽁 숨기며 행동하고 있다.
트라베리아의 뱀들은 뭐, 무르시엘을 포함해 죄다 감옥행이다. 무르시엘은 전쟁에서의 공로를 감안해 평균 20년으로 감형됐지만, 나머지 놈들은 정말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곤 사형 혹은 무기징역이었다.
그래도 전쟁 때 우리를 자주 찾아와주며 키메라들과 접했던 이들만은 그들을 잘 받아들여준 것 같다.
“너희는 어때?”
“저희야 뭐, 가게를 열거나 의뢰 해결하면서 느슨하게 지내……다가 요즘 좀 바빠졌어요. 조사하고 싶은 것도 있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생겼고요.”
백한 선생님이 장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좋지.”
“그렇다고 너무 힘쓰진 말고.”
“성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주겠느냐마는.”
일찌감치 디저트로 표적을 전향한 유정 언니가 와인 때문에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게 어깨를 붙였다.
“다음엔 좀 더 많이 모이자. 인하도, 소영이도, 인성이도, 시하랑 준영이랑 아르델이랑, 다른 선배들이랑, 잔뜩 모여서 떠들썩하게 놀고 싶다…….”
“그럼 은하 강연 끝난 후에 회식하면 되지 않나? 네가 말한 사람은 다들 보러올 것 같은데.”
“그거다!”
무의식적으로 서준 오빠를 손가락질한 유정 언니가 곧 민망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나는 접시에 마지막 남은 스테이크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들 올 것 같긴 하다. 예슬이가 격하게 동의하며 박수를 쳤다.
“그럼 그렇게 해요. 다들 거절할 것 같지 않은걸요. 시하랑 아르델이 거절할리 없어요! 소영이랑 인성이는 오늘 우리끼리만 식사 나눴단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섭섭해 할지도 몰라요.”
“그러게…….”
하지만 오늘의 식사는 강연 준비를 하는 우리 셋을 주인공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비는 시간이 있을 법한 인하한텐 일단 이야기해 보았으나, 약간 아쉬워하면서도 일부러 오지 않았다.
유정 언니가 풀린 눈을 애써 치켜떴다.
“좋아, 정했어. 알았지? 정해진 거야.”
“그 전에 강연 일정부터 정해야겠지만.”
대관 시간이 끝난 후에도 오랜만에 만났다는 이유로 고급 술집의 방 하나를 빌려 마시고 먹고 놀았다.
오랜만의 해후는 새로운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됐다.
수업 계획과 자료 준비와 훈련과 신력 감지와 아이템 제작 등등을 교차적으로 실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키메라들의 상태와 환경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감찰 날이 왔다. 오늘의 결과에 따라 케르베로스, 노체, 앨리스, 소비토의 목줄은 좀 더 엄중해질 수도, 가벼워질 수도 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노체의 구속은 슬슬 단계를 내려도 될 것 같다. 희망적인 생각과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며 나갈 준비를 마쳤다.
때마침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인물이 들어왔다.
“왔어?”
오늘 키메라들을 감찰하기 위해 키메라들의 본가에 갈 별무리의 멤버는 4명. 나, 성진이, 인하, 예리였다. 원래 형일 아저씨도 올 예정이었는데, 경과를 살펴봐야 하는 입원 환자가 생겨 예리 대신 빠지게 되었다.
나랑 예리는 감찰에 반드시 필요한 고정 멤버였다. 나는 리더였고, 예리는 키메라 일행의 목표를 위해서 키메라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먼저 찾아온 것은 예리였다.
“네. 잘 지냈어요?”
예리는 인사와 동시에 눈동자를 굴려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열쇠는요?”
“완성됐지만 아직 안 썼어. 알다시피 별의 도시가 폐쇄 시기라…….”
“아, 그렇죠. 하반기 들어서 유독 많네요.”
“그러게나.”
“관리자에게 자유 시간이 생긴 반동이 아니면 좋겠어요.”
“그랬으면 세계가 자유 시간을 허가할리 없지. 우연일 거야.”
성진이가 슥 지나가며 한 말에 예리가 안도한 미소를 보였다.
예리와 1분 정도 차이로 인하도 우리 집에 도착했다.
“하미아랑 라스를 같이 못 보는 건 아쉽네. 이번에야말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응.”
키메라들의 본가에 가기 전 나는 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지막 정비 시간을 줄 겸 5분 기다렸다 이동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키메라들 상태가 어땠어?”
“저번이랑 비슷해요. 다들 지능이 높아졌고, 자아는……싹틀 가능성이 보이는 건 여전히 8명 정도예요.”
“그렇구나.”
“언니가 이번에 정신세계를 정리해 주면 올해 안에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럼 좋겠네.”
키메라들에게는 목표가 있다.
거기에 케르베로스 일행을 포함하기는 애매하지만, 첸을 비롯해 인마 대전 때 우리와 함께 싸웠던 키메라들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그건 라스가 별의 도시에서 풀려나기 전에 케르베로스를 제외한 모든 키메라를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를 위해 자아가 없는 키메라 몇을 경찰, SR, 방위부 등 통제할 실력이 있는 조직에 파견 보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여러 마법사들의 협력과 수감된 뱀들을 노동력을 통해 자아가 없는 키메라들이 진화할 수 있게끔 연구하고 있다. 디나는 이 연구를 성공시킨 적 있는 핵심 인물이다. 디나의 말에 따르면 모든 키메라에게서 자아를 끌어내는 건 어려운 모양이다.
비록 디나는 할 일이 생겨 모습을 감췄지만 당장 큰 문제는 없다. 이제 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예리가 대신할 수 있다. 키메라 진화 작전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키메라들의 입장에서 이 목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금이다.
키메라 한 명을 진화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전쟁 기간 동안 디나가 자아를 깨운 키메라의 숫자는 고작해야 7명이다.
키메라들이 목표를 정하고 2년 남짓. 키메라를 진화시키는 연구는 슬슬 성과를 보이기 시작해, 예리의 전언에 의하면 반년 안에 8명 정도가 자아가 정착할 것 같단다.
2년에 고작 8명이다. 1차 목표 기간은 라스가 나오기 전까지로 잡았지만, 슬슬 다들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 그런데 키메라들은 현재 자금을 새벽별무리의 마법사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키메라인 그들이 인간인 나를 후견인이자 보증인으로 삼는 건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전적으로 내게 기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라이라, 슈카, 데미안, 반이 일찍 본가에서 나간 것은 결국 자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루니라 같은 경우에는 디나와 함께 키메라를 진화시키기 위한 재료를 모았었다.
“그럼 새로운 고생 시작이겠네. 자아를 깨우친 애들이 지금처럼 얌전하지만은 않을 테니.”
갓 태어난 아기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무서워하며 우는 자, 주위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를 치는 자, 과거의 기억과 높아진 지능, 지성에 금세 적응하는 자 등 다양하다고 들었다.
지능과 지성에 적응하더라도 그들이 지난 기억을 돌이켜 어떤 사고를 할지는 알 수 없다. 케르베로스처럼 트라베리아에게 각인된 충성심이 되살아 날 수도 있고, 하미아 처럼 지금 그들을 돌보고 있는 우리를 거부할 수도 있다.
‘할 일이 정말 많아지긴 했네. 책임을 진다는 게 참 쉽지가 않구나…….’
시간을 확인하는 와중 인하가 캣타워 위의 라라를 쓰다듬으며 걱정을 드러냈다.
“라라는?”
성진이가 문제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루 안에 돌아올 거니까 괜찮아. 그릇에도 자율 급식이 되도록 전송마법을 걸어놨어.”
“미안, 라라야.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인하 다음으로 뻗어진 내 손에 머리를 비비며 라라가 작게 울었다. 나는 작은 걱정을 뒤로 하고 모두에게 손짓했다.
“가자.”
키메라들의 본가는 일부 키메라에게 있어선 감옥이고 많은 키메라들에게 있어서 집이며 사람들로부터 몸을 지키는 요새이기도 하다. 나는 첸의 영혼이 담긴 열쇠를 사용해 키메라들의 본가로 이동했다.
“어서 오십시오, 별무리 여러분.”
키메라들은 옛 중국 대륙에 본가를 지었다.
자아가 없는 자를 포함해 본가에 사는 키메라는 700명 남짓이다. 그 숫자만큼 그들의 것으로 주어진 땅은 상당히 넓었다.
앞으로 인구가 얼마나 늘든 사람들이 크게 아쉽게 여기지 않을 만한 넓은 땅의 한편을 차지했다. 사람에게 서서히 익숙해 질 수 있게끔, 짐승 울음소리가 나도 사람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너무 크지 않은 도시와 울창한 산의 경계선 즈음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자리가 정해진 긴 돌담 안쪽에는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세워졌다. 중국풍의 대문과 성벽, 고풍스러운 한옥과 차이나타워, 유럽 풍 고딕 저택, 심지어는 음산한 폐가, 짐승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키메라들이 마구 뛰어다닐 정원.
이렇게 다양한 양식의 건물과 장식을 둔 건 키메라들의 모델이 다양하고, 그만큼 키메라 개개인의 습성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금은 기이한 마을의 대문을 뒤에 두고 19명의 장군 시리즈가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사했다. 문 옆의 작은 석상에는 『은성단(銀星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들이 1년 전쯤 지은 본가의 이름이다. 최근에는 나보다 주변 사람이 ‘새벽별무리’라는 이름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구미호 첸, 거울 요괴 라이라, 뿔 여우 쟈넷, 고양이 수인 루니라, 블랙 드래곤 데미안, 흡혈귀 슈카, 좀비 반, 매 노체, 동화 속 주인공 앨리스, 외계인 그레이 소비토,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 케이, 루이, 베이.
마지막으로 최근에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게 된 디나와 루니라의 동물 친구들, 뫼비우스 뱀 루피, 솔개 바인, 호랑이 하울, 스핑크스 퀴리, 늑대 밀, 여우 루지.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언니들! 오빠!”
첸, 루니라, 라이라를 시작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사람형으로 우릴 맞았던 루니라의 동물 친구들과 쟈넷은 금방 동물, 그것도 소동물 크기로 변해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우리는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사이가 소원할 수밖에 없는 노체, 앨리스, 소비토, 케르베로스 형제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네에…….”
“안녕.”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 않나?”
날카롭게 대꾸한 막내의 머리를 케이와 루이가 쥐어박았다. 그들은 나를 향한 적의와는 별개로 나를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철없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아파!”
“…죄송합니다. 변명해도 괜찮습니까?”
“변명할 것까지야…….”
“당신, 보지 않은 사이 더 위협적으로 변했어. 그래서 날을 세운 거야.”
“위협적이요?”
“우린……명계의 문지기니까. 당신은 안 그래도 상극이니까…….”
루이는 명백히 긴장한 얼굴로 베이의 뒷목을 쥐고 몇 걸음 물러났다.
“생명의 힘이 강해지면 바로 알 수 있어. 하물며 그게 명계의 죽음과 반대되는 힘이라면……. 원래도 무서웠는데 지금은 더 찬란해.”
인하가 흘끔 나를 돌아봤다.
“확실히. 빛의 마력이 깊어지긴 했어.”
“문장을 발현하기 위한 훈련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구나.”
중얼거린 말에 베이가 몸을 웅크렸다.
“문장? 그 문장? 아니, 거기서 더 강해져서 뭐하게?”
“그러게요. 뭔가를 알기 위해선 힘이 따라야 하더라고요.”
겁이 많은 앨리스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슈카가 한숨을 내쉬며 앨리스와 루이의 등을 밀어 더 물러나지 않게끔 했다.
“자, 똑바로 서. 이제 알잖아? 이분들이 너흴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풀려난 뒷목을 쓰다듬은 베이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봐야 언제든지 우리를 죽일 수도 있잖아…….”
“야! 너희가 앞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 그럴 일 없다고! 알잖아. 나 바깥에서 몇 번 사람 팼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유가 있더라도 전부 우리 탓이라 욕하지만, 이분들은 절대 안 그래. 비호해주고 변호해주고 같이 화내주셔. 알았으면 좀 협조적으로 굴어!”
“끄으응…….”
나는 모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모두의 마력과 꿈을 자세히 관측했다. 예리도 핵의 안정 상태와 생명력의 균형을 살폈다.
“케르베로스는 알다시피……좀 느긋하게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감찰은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첸이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몇 십 년 간 머릿속에 박힌 세뇌와 인식이 쉽게 풀릴 리 없지.
“오늘은 여러분들이 몸에 습득한 생활 능력을 확인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문답을 작성해 상식이 어느 정도 갖춰졌는지 검토하고, 자아가 없는 분들의 진화 상태를 관찰하고, 자아가 있는 분들과 개인 면담을 가질 거예요. 면담 결과에 따라 활동 제한이 느슨해질 수도 있어요. 경찰과 방위부에도 보고할 예정이에요.”
세계를 대표하는 조직은 몇 있지만 범죄자를 제압하거나 관리하는 건 방위부와 경찰의 역할이다. 키메라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방위부 및 경찰과 의견을 조율할 필요성이 있다.
“개인…….”
“면담?!”
베이와 앨리스가 서로를 껴안으며 오들오들 떨었다. 저 두 사람, 안보는 사이 많이 친해졌네.
불안한 얼굴로 고민하던 케르베로스의 첫째 케이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셋이 같이 받으면……안 되겠습니까? 알다시피 저희는 셋이서 하나나 마찬가지라…….”
“세 개의 영혼을 가졌고, 세 개의 정신을 가졌는데요? 안 됩니다. 개인 면담이에요.”
“후으으으…….”
베이가 우는 소리를 냈다.
이럴 때 보면 케르베로스가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이자는 트라베리아의 명령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했을 정도로 충성심과 악의가 깊었으며, 무지했다. 그 잔학성을 이만큼 옅게 만들고 이들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대화가 필요했다.
“방금 저희가 말한 감찰을 어떤 순서로 행할지는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방위부와 경찰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니 사진을 많이 찍을 거예요.”
나는 손으로 성진이를 가리켰다. 성진이가 손에 쥔 디지털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베이가 눈썹과 어깨를 늘어뜨리며 속삭였다.
“차라리 경찰한테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케이와 루이와 첸이 베이를 꼬집거나 쥐어박았으나,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돼요.”
“……정말?”
“네. 특수한 상황이니 만큼 계속 가둬둘 수도 없으니 적응을 위해서 다른 조직에 파견해 사회성을 기르게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요. 원한다면 추천서를 써 줄게요. 하지만 그래도 동족 분들이랑은 교류를 계속 해 주시면 좋겠네요.”
“어, 어…….”
설마 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못했는지 베이가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 차마 추천하지 못하겠네요. 그러면 여길 떠나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될 텐데……. 만일에 대비해 구역을 나눠서 생활한다 쳐도 말이죠, 거긴 조직이라 더 딱딱하게 규칙에 맞춰 움직여야 할 텐데.”
예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까지 저희만 상대해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언니 오빠들만큼 당신들을 비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없어요. 네,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잘 부탁해도, 경찰과 방위부의 서장 분들이 당신들을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보더라도, 그분들은 조직의 수장이고, 조직원들을 보다 우선시해야 할 입장이란 말이죠.”
“거기다 잊었어? 우리가 경찰, 방위부, SR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얼마나 거기를 무너뜨렸는지.”
케르베로스는 에리카의 측근이었고, 경찰과 SR은 에리카의 손에 의해 세력이 절반 이상 날아갔다.
슈카가 베이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우리가 죄를 지은 건 인정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살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주박에서 벗어날 방법이 많지 않았기에, 죄를 지었어. 그래도, 그렇기에 평범하게 살아갈 기회가 찾아왔다면 붙잡아야지. 우린 솔직히 사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았어.”
“알지만…….”
베이가 작게 목소리를 짜냈다.
“알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너무, 달라서. 해야 하는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하는 것도 많고, 그래서, 그냥 가만히 갇혀 있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아…….”
“베이…….”
슈카에 이어 케르베로스 맏이 케이가 애틋한 눈으로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진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모든 이들이 흠칫했지만, 성진이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어……?”
“지금이 전보다 훨씬 낫다고. 혼란스럽다는 건 결국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니까.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 타인의 태도, 해야 하는 것. 주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타인이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왜 갇혀 있는지…….”
“…….”
나는 케르베로스 및 소비토와 처음 정식으로 인사했을 때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동의했다. 그때 그들은 살기등등한 동시에 무기력했다. 트라베리아가 패배했다는 것에 모든 걸 잃은 듯했고, 그들을 죽인 우리를 향해 무작정 적의를 드러냈다.
죽음이 어떤 건지 알려 주고 스스로 살아갈 마음을 먹게 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스스로의 생활이나 미래를 그리게 하기까지 또 1년이 걸렸다.
“지금보다 더 고민하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살아가기 힘들 거다.”
베이가 주먹을 꽉 쥔 채 시선을 내렸다. 이내 성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저 정도면 슬슬 다른 곳에 파견을 시도해도 괜찮겠어. 무작정 타인의 적의에 반응하진 않을 거야.”
“OK.”
“일단 방위부랑 이야기를 해 보죠. 아! 저한테도 한 명 보내 주면 좋고요. 가끔 보조가 필요할 때가 있어서요.”
“고려할게.”
“흐음. 그러네. 첫 번째 파견인 만큼 관리하기 편하도록 친구들을 비롯해 이전 팀원이 있는 곳부터 파견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 캘리번에 보내서 모험을 시키는 것도 괜찮고, 대현에는 키메라들이 많으니 적응하기 편할 테고, 나한테 보내도 돼.”
인하는 주기적으로 화원을 가꿀 보조를 구한다. 연구와 구매를 위해 인하의 인가를 받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으니, 조금씩 사람과 익숙해지는 데는 좋은 파견 장소일 듯하다.
“의사 보조, 캘리번, 한빛 정원, 대현과 유란, 리브리…….”
“어, 리브리도요? 저희는 사고 칠 가능성이 있는 앤 좀 그런데요……. 절대! 아무것도! 부수면 안 되니까요!”
“고려할게. 흠, 그리고……우리 가게에 종업원 자리를 하나 만들어 볼까. 무하……는 만일의 경우 제압할 인원이 없으니 안 되겠다.”
“경찰, SR, 방위부에는 키메라한테 적대적인 사람이 너무 많으니 협력 관계라곤 하지만 좀 더 나중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장군 시리즈 몇 명의 개인 파견도 오늘의 감찰 결과가 좋게 나왔을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동족들과 의견을 나눈 첸은 이내 자아가 없는 키메라들의 상태 확인부터 부탁했다.
“아이들을 모으겠습니다.”
부지의 넓은 공터에서 첸, 슈카, 데미안이 키메라용 초음파 피리를 불었다. 700 남짓 되는 다양한 키메라들이 공간 이동 혹은 발을 사용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날개 달린 이, 땅을 기는 이, 헤엄치는 이, 작은 이, 큰 이, 생물의 형태조차 아닌 이……. 언제 봐도 참 많긴 많다.
예리가 생명의 지도를 펼쳤고, 나는 꿈길과 현실 사이에 발을 걸쳤다.
키메라들은 대부분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 높은 지능에 고위의 마법을 지녔으며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음에도 사람처럼 개별의 자아를 지니고 지능에 걸맞은 사고를 하지 못하는 건 그들이 금기를 통해 ‘만들어진’ 생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