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40
그 외에 접근하면 안 되는 인물 두 명을 적어놓았다. 하나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깔보며, 하나는 성격과 성향이 위험하다는 모양이다. 성진이가 언급한 또라이들이었다.
어쩌면 이노키언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직접적으로 위험하거나 성가시진 않기 때문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들 외에도 좀 위험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제법 있지만, 도서관의 분위기 상 선을 넘지만 않으면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란다.
다만 위의 문제아 두 명을 포함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트러블이 생기거나 시비가 붙었는데 싸움을 피하고 싶을 경우, 우리 세계의 신인 나지스, 루키아, 하르펜의 이름을 대라고 한다. 우리 세계의 신은 세계의 경계선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성진이의 이름을 대는 것도 무척 효과가 있지만, 도서관 회원들 사이에서 ‘상종하면 안 되는 인물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니 시선을 끄는 게 싫다면 최종 수단으로 남겨두라고 한다.
“우리 남친은 대체 여기서 뭘 한 걸까…?”
무심코 그런 말이 나왔지만 어쩐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 외엔 도서관의 유용한 시스템에 대해 적어 놓았다. 도서관의 검색 기능에는 마력을 통해 자료를 추천하는 기능이 있으며, 마법이나 지식에 대해 고찰하고 싶을 경우 요정과의 토론방을 예약하면 무척 도움이 된다.
편지는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하는 인사와 함께 끝났다. 나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볼일이 끝나면 두 사람에게 감사의 편지를 남겨 요정에게 맡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이동했다.
오늘도 찾고자 하는 자료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나’에 대한 자료다.
성진이만이 아니라 나도 피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나와 관련된 사례는 책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물론 정보를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는 없었고, 특별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 쳐도 내 정보를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설마 피의 맹약에 대해서도 누락된 기억이 있단 말인가?
지도를 살펴본 결과, 도서관에는 예상대로 인물 관련 자료실이 있었다. 총 7개로, 그 중 한 자료실은 12층을 통째로 차지했다.
이 중 어느 곳에 나에 대해 기록한 자료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1층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자료 안내실로 향했다. 자료 키워드를 컴퓨터에 검색하거나 대기하고 있는 직원에게 원하는 자료가 어느 자료실 어느 책꽂이에 있는지 물어보기 위한 장소다.
“…….”
자료 안내실 안에 들어가니 직원인 요정 외에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녔는데, 눈동자의 동공이 빛을 받자 세로로 갈라졌다. 어둠을 베이스로 정신계열 힘을 지녔고, 이노키언처럼 섬뜩하진 않지만 피의 힘을 지녔다. 어딘지 슈카랑 느낌이 비슷하다.
‘혹시 흡혈귀인가?’
우리 세계 사람 외의 초월자(?)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낯선 느낌의 힘에 조금 흠칫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약간 의아함도 느꼈다.
이노키언, 유펠라, 디나.
이곳에서 만난 초월자는 디나 외에는 모두 나보다 강했다. 그래, 유펠라도 신의 보좌급 정령으로 진화 했기 때문인지 내 능력으로는 실력을 잴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디나보다 약하다. 우리 세계에선 아마 랭킹 100위권에 들지 못할 것이다.
‘실력을 숨기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우리 세계의 마법사들이 너무 강한 걸까?’
그냥 예상이지만, 후자가 정답일 것 같다.
타인의 실력에 필요 이상으로 파고드는 것은 실례이니, 거기에서 그 생각을 접었다. 그보다 처음 만난 낯선 상대에게 인사만이라도 해야할지 고민 되었다.
‘그냥 같은 도서관의 방문자, 회원일 뿐이니 안면을 틀 필요는 없겠, 지?’
이런저런 생각 속에 발걸음이 느려졌다가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내가 방향을 틀어 도서관의 검색 장치에 다가서기 전에 남자 쪽에서 먼저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인인가요?”
“안녕하세요. 네, 도서관엔 어제 처음 들어왔어요.”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네요. 가끔 인사 나눠요.”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도서관의 특성이 특성인 만큼 새로운 유입이 잘 없다 보니 처음 보는 얼굴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안내실에서의 용무를 마쳤는지 그대로 날 지나치려던 남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다시 날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붉은 머리에 검은 갑옷, 망토를 두른 남자를 보면……쓸데없는 경고일 수도 있겠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아, 그, 처음 보는 사람한테 꼭 대결을 신청한다는 ‘레오날드’ 씨 이야기인가요?”
디나, 유펠라, 성진이에 이어 처음 보는 사람까지. 몇 번이나 경고를 받는 건지 모르겠다. 남자가 킥킥 웃었다.
“벌써 아시네요.”
“지인한테 들었어요.”
“하긴, 걔가 좀 유명하죠.”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말도 못할 전투광이에요. 매우 끈질기니 추후의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대결해 주는 게 나아요.”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남자는 예쁘게 웃고는 손을 흔들며 이곳을 나갔다.
나는 남자에게서 돌아서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사람과 인사하면서 이렇게 긴장한 건 오랜만이다. 이런저런 일로 담력을 다져 웬만한 일론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그건 그렇고 이쯤 되니 레오날드라는 남자한테 호기심이 인다. 다른 세계 사람과의 대결이라, 나쁘지 않지. 성진이 말대로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검색기로 향했다.
그러나 인물 자료는 이곳의 검색기로 검색할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대기 중인 요정을 불러 인물 자료를 찾는 방법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번 요정은 검은 잠자리 날개에 회색 피부, 긴 귀를 가졌다.
“인물 자료는 검색할 수 없어요. 신처럼 생물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지 않고서야 프라이버시 침해잖아요!”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네. 그래서 보통 아는 사람의 아는 정보 확인과 본인의 정보 확인만 가능해요. 예외로 정보를 구하고자 하는 상대가 그 자의 세계에 있어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될 경우 열람 허가가 떨어질 수도 있어요.”
어차피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정보다.
“제가 찾는 인물 정보는 저, ‘유은하’에 대해서예요.”
“회원님 본인의 정보시군요.”
요정이 본인의 정보 단말을 검색했다.
“어,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제 권한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예요.”
“…네?”
“도서관의 직원들도 회원님들처럼 계급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 되거든요. 이 등급은……대장님을 부를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요정은 허공에 나타난 버튼을 클릭해 누군가와 연락을 나눴다. 잠시 후 회색 요정 옆에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또 다른 요정이 나타났다.
‘…강하다.’
유펠라나 이노키언처럼 실력을 잴 수 없는 상대였다.
우아하게 미소 지은 금발의 요정은 손가락으로 치마를 살짝 드는 고풍스러운 자세로 내게 인사했다.
“유은하 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 도서관의 첫 번째 관리인인 노바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은하입니다.”
“원하시는 ‘유은하’ 님에 대한 자료입니다만, 유은하 님의 현재 등급으로는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네?”
나는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에 대한 정보인데요?”
“네. 설령 당사자라 할지라도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
설마 그런 경우가 있을 줄은 몰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만이 아니라 대기하던 다른 요정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식히며 다시 질문했다.
“열람이 불가능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나요?”
“자격이 부족합니다.”
“그럼 그 자격이란 것만 두고 따졌을 때, 이 도서관의 출입자 중 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나요?”
그녀는 어째선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불만으로 가득 찬 내 표정을 마주하곤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사는 세계의 주신, 루키아 폴라리스 님 외엔 없습니다.”
“……!”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물었다.
“자격만 따졌는데 그렇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신 정도가 아니면 보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웬만한 신분들도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곧 누락된 기억과 여신님을 떠올렸다.
‘에쉬리안나 님 때문인가. 하지만, 여신님이나 누락된 기억과 관련 있다 쳐도 본인조차 열람할 수 없다니…….’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른 이름을 꺼냈다.
“그럼 ‘이성진’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까요?”
굳이 성진이를 지목한 건 내가 아는 한 나와 그나마 대등한 영혼을 가진 게 성진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대화들을 돌이켜 볼 때 아무래도 내가 성진이보다 고위의 영혼을 가진 것 같지만…….
“‘이성진’…….”
순간 주위의 분위기가 휙 가라앉았다. 심지어 이곳의 첫 번째 관리인조차 얼굴이 창백해졌다.
일단 성진이가 누구인지 아는 건 틀림없는 것 같고. 도서관에서 유명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다녔기에 요정들마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심지어 요정들은 당장이라도 나와 성진이가 어떤 사이인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입까지 치밀어 오른 의문을 억누르며, 도서관의 관리인이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
복잡한 감정 속에서 고민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자격이 안 된다는데 뭘 어쩌겠나. 난리를 쳐봤자 이길 수도 없다.
다만 나는 조금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그런데 저기, 왜 그렇게 두려워하시는……건가요?”
흠칫한 첫 번째 관리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성진 님은 유명하십니다. 여러 의미로요.”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정보를 요청할 정도니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신 거겠죠. 하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만큼 유명하십니다.”
“그것도 듣긴 했는데…….”
“그 이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니 어쩔 수 없다. 성진이도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었으니까.
……거기다 저 반응들 때문에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굳건해졌다.
관리인과 헤어진 나는 우리 세계의 인물 정보가 기록된 자료실로 향했다. 아는 이의 아는 정보만이 보일 뿐이라지만, 자료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어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다음엔 별의 도시, 우리 세계에 새로 탄생한 세계수 한빛, 노화에 대비하기 위한 건강 관리법을 주제로 책을 한 권씩 읽었다. 별의 도시, 한빛이에 대한 자료는 안타깝게도 한 권뿐이었다.
도서관의 특성상 출입하는 사람이 적으니 회원과 마주치지 않을 법도 한데, 오늘은 3명이나 새로운 회원을 마주쳤다.
은색 머리의 예쁜 남자, 갈색 머리의 새침한 인상의 여자, 보라색 머리칼의 키 작은 남자. 한 명은 흡혈귀 같았고, 한 명은 신이었고, 마지막 한 명은 마법사였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느꼈다.
혹시 우리 세계의 힘은 정말 엄청난 건가?
신을 제외한 두 명은 디나보다 약했고, 여신조차 힘의 총량만 따지고 보면 내가 넘볼 수 없는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세계의 규격을 벗어났고, 자신의 세계와 통하는 어떤 진리를 깨달아 이곳에 왔다.
힘만으로 따지면 트라베리아의 마녀들이 훨씬 강한데. 만약 포츈이 우리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 태어났다면 진작 원하는 진리를 손에 넣지 않았을까.
‘아냐, 아니지. 내가 약해서 힘을 제대로 잴 수 없는 걸 수도 있어.’
자만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도 해봤지만……글쎄다. 나지스와 유펠라는 힘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걸 금방 인지 가능했다. 아니면 다른 세계의 힘이라 재는 방법이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에도 나는 할 일을 마치고 도서관에 찾아왔다. 세계와의 계약, 신과의 계약, 고위 계약의 해주 법을 한 권씩, 노화에 관한 책을 3권정도 읽었다.
그 다음 날에는 성진이에게 추천 받은 책을 읽었다. 정화와 관련된 특성 및 다양한 기술. 환생자가 읽으면 좋은, 영혼의 개성을 주시하기 위한 명상법과 관측법. 다양한 문양 발현 사례…….
10명 정도의 새로운 얼굴을 익히는 동안 도서관에 다닌지 5일이 지났다. 또 한 번 디나와 유펠라를 만나 반갑게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책을 찾기 위해 복도를 거닐고 있을 때, 나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던 남자를 만났다. 들은 대로 붉은 머리카락에 검은 갑주를 입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나를 주시하는 남자의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가득 찼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하비투스의 마황제, 레오날드라 한다. 아, 하비투스는 내가 통일한 세계의 이름이다!”
“그러시군요…….”
“그대의 소문은 즐겁게 들었다!”
“…소문이요?”
“은폐능력이 뛰어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나, 명계의 고위 가호를 받기에 접근하기 어려운 자가 있다고 하더군!”
“아…….”
나는 요즘 성진이가 준 부적을 항시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은신하는 게 아니고서야 차고 있는 아이템의 마력까지 가리려 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저에 대해서 소문이 도나요?”
“하하하.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육체의 한계를 깬 자. 이 몸만큼은 아니라도 다들 지위에 걸맞은 탐구심을 가지고 있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신인이 나타나니, 당연히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복도라곤 하나 목소리가 참 크다.
“크리스에게 들은 바, 내 이름과 성향 정도는 알고 있다지?”
“크리스…씨가 누군가요?”
“은발에 눈물점이 있는 흡혈귀다.”
나는 차원 도서관에 두 번째 들른 날 레오날드에 대해 이야기해 줬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 그 분…….”
“호기심이 많고 해석 능력이 뛰어난 재미있는 남자지!”
“친하신가요?”
“으음, 가끔 같이 밥을 먹고 만나면 곧잘 대화를 나눌 정도로는 친하다!”
“그렇군요.”
남자가 방긋 웃으며 비로소 내게 기다렸던 말을 했다.
“내 소문을 들었다니, 내가 그대에게 말을 거는 목적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음……네.”
“대결을 제안한다! 대결 종목은 대결이 성립된다면 뭐든지 좋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의 어조, 듣다 보니 좀 재미있다. 말미로 갈수록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진다.
“신인이니 만큼 다른 세계를 접한 적이 적겠지? 그대에게도 다른 세계의 능력을 접할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한다!”
이 사람은…….
강하다. 적어도 힘의 총량만으로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는 강하다.
마력은 나보다 조금 적다. 하지만 마력 외에 다른 막강한 힘이 느껴지고, 전투에 특화된 패도적인 힘과 꿈의 파편이 얼핏 엿보인다.
‘막상 이렇게 되니 좀 긴장되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주치면 어떻게 할지 조금 고민해 두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도 대결에 응할 생각이다.
긴장을 삼키며 입술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앞에서 웃고 있던 거대한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동자에 얼핏 두려움이 어렸다.
문득 등 뒤에서 오싹한 느낌이 났다. 그림자에서 가만히 가라앉아 있던 벨라가 일렁거렸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운 복도에서 한 남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이노키언이었다.
고민 어린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린 이노키언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머뭇머뭇 우리를 향해 몇 걸음 걸어왔다.
“좀 시끄러워서…….”
붉고 검은 남자가 경계심을 띤 눈으로 웃었다.
“미안하군! 주위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그대의 힘은 내 미력한 능력으로는 감지할 수 없으니.”
“그리고…….”
흘끔, 나를 보는 이노키언의 눈동자에는 이전과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고할게. 그 사람한텐 좀 더 정중하게 대해.”
“하하! 죽음의 사자가 하는 경고라니, 무섭기 그지없군! 걱정 마라! 과한 실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그래도 좀 더 조심해. 그 사람이 지닌 부적은 그만한 이가 만든 거야.”
“아, 이거요?”
나는 손목에 내건 팔찌를 매만졌다. 이노키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상반되는 태도다.
“……역린만은 건들지 마. 그럼.”
이노키언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발을 움직여 복도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날카로웠던 남자의 눈매가 조금 풀어지며, 눈동자에 아까보다 짙은 호기심이 어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
“유은하예요.”
“혹시 부적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나?”
호기심 어린 표정을 마주하며 나는 잠깐 고민했다.
유명하다고 말하며 나와 함께 도서관에 진입하지 않는 게 좋다고 추천하던 성진이. 성진이의 이름을 내미는 건 최종 수단으로 쓰라던 유펠라와 디나. 그 말을 증명하듯 도서관의 관리인은 성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굳었고, 이노키언은 오늘 나를 무척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본인이 별로 내켜하지 않거든요.”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남자가 아쉬운 기색으로 눈썹을 늘어뜨렸다. 막무가내인 태도와 별개로 선을 넘지 않을 정도의 예의는 겸비한 것 같다.
“그리고 대결 말인데요…….”
“음! 대결만은 꼭 받아 주길 바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강해지고 싶은 만큼, 새로운 세계의 기술을 경험하는 것엔 긍정적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세계의 경계선은 전력을 다해 싸우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다.
“기술을 겨뤄 보죠. 한 사람이 기술을 만들면 상대는 그 기술을 완전히 파괴하는 거예요. 역할을 번갈아 가며 먼저 3승하는 쪽이 승리. 승리 조건은 시간 안에 상대방의 기술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어떤가요?”
“재미있군! 그러나 승리 조건에는 이견이 있다! 실력이 대등할 경우 먼저 기술을 펼친 자가 불리해질 수도 있으니까! 기술이 파괴 당하지 않았을 시에도 승점을 주어, 먼저 5승을 하는 쪽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건 어떠한가!”
납득 가는 제안이었던지라 나는 금방 수긍했다.
“좋아요.”
“또한 제한 시간에도 이견이 있다! 시간이 아니라 기술의 숫자를 제한하면 좋겠다!”
“그럼……다섯 번은 어떤가요?”
“찬성한다!”
우리는 술술 대결의 규칙을 정해갔다.
“대결은 어디서 할까요?”
“도서관 안에서 힘을 겨뤄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정원에 대련이 허가되는 공터가 있다!”
“그럼 거기서 하도록 하죠.”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나는 쥐고 있던 책을 가까이 있던 요정에게 맡겼다. 남자는 내 허락을 구하고 요정들에게 메시지 카드 전달을 부탁해 지인들에게 대결 소식을 알렸다. 내 힘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이내 나도 디나, 유펠라, ……나지스에게 대결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작정을 마친 후 레오날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동하겠다. 힘의 접촉을 허락하길!”
“네.”
속전속결, 나는 남자의 힘을 받아들여 정원으로 이동했다.
소문을 듣고 사람이 모일 동안 나는 레오날드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정말 처음 보는 사람 모두에게 대결을 신청하시나요?”
“음, 물론이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내 강함의 비결이다! 다만 관리인과는 이곳의 규칙 탓에 힘을 겨루지 못했다!”
“그럼 신께도 대결을 신청했나요?”
“가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에서도 신을 이기고 세상을 제패했다! 신은 되지 못했지만, 신보다 강한 마인이 되었지!”
“어어, 그래도 괜찮나요?”
“이번 신인은 겁이 많군. 존경할 만한 신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 타락한 신도 있다! 그리고 타락하지 않은 많은 신은 대결을 신청했다고 해서 천벌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에서 신으로 진화한 자는 우리의 호승심을 이해하고 먼저 대응해 주기도 한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도서관을 오가는 분들 중 가장 강한 분은 누군가요?”
많은 이에게 대결을 신청한 레오날드라면 알 것 같았다. 레오날드가 즐거운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대도 호기심이 많군! 내가 아는 한 가장 강한 이는 세리오스 님이다! 그는 ────지!”
오랜만에 노이즈가 찾아왔다. 이 도서관에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알아선 안 되는 정보는 애초부터 접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세계의 제한이 일어났음을 눈치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던 남자가 곧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자네는 세리오스 님이 이번에 환생한 세계에서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