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50
성진이가 주황색 마력을 살짝 일으켰다 꺼트렸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세계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베이스로 쓰는 힘이 달라져. 여긴 알다시피 시간에 관한 제한이 무척 강해. 그래서 빛의 힘을 제대로 못 쓰고 있어.”
나는 잠시 성진이의 말과 마법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원래는 빛의 힘이 좀 더 강하고, 시간의 힘을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거지? 지금까지 계속 첫 번째 특기를 봉쇄당한 상태였고?
‘원래는 나지스 님보다, 심지어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 중 가장 강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진짜 미쳤네.’
성진이 얘는 어째 알면 알수록 무시무시하다.
그건 그렇고 전성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는 건, 성진이는 여기보다 훨씬 거대한 힘을 지닌 세계에 태어난 적이 있다는 거겠지? 이 세계가 품은 힘도 강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들었는데, 역시 위에는 또 위가 있나 보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커다랗고 반투명한 구슬에는 계속 마법이 채워졌다.
“이거 말이야, 제대로 완성하면 세계가 단단해지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문장을 발현한 이후, 힘을 사용하는 훈련은 한동안 자제했지만 공부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내 정화마법이 시작점, 즉 어떤 존재가 태어나면서 지닌 고유 성질에 간섭하는 특징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된 후 보다 본격적으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뒤졌다.
그렇다면 내 힘은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지녔을까.
존재의 고유 성질 중 시작에 근원을 둔 건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정답은 ‘전부’.
존재하는 모든 개념에는 결국에는 시작이 있다.
또한 고민하고 공부할수록 이 시작에 닿는 힘이 환각마법과 함께 사용했을 때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능력임을 알 수 있었다.
환상을 현실에 실체화할 때는 보다 강력한 생명력과 존재성을 부여할 수 있고, 현실을 꿈으로 바꿀 때는 시작점을 건드려 보다 완벽하게 꿈속에 잘라 낼 수 있다.
생명에 닿아 종족의 성질을 바꾸고, 마법과 물건의 특성마저 쉽사리 뒤바꿀 수 있는 힘.
쉽게 비틀리고 위험해질 수 있는 그 기술은 ‘정화’라는 교정 장치 덕에 그런 걱정마저 잘라 내 준다.
그리고 이 힘은 갈고 닦으면 틀림없이 세계라는 보다 거대하고 위대한 개념에도 통한다.
인간이 쥐기에는 분에 넘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기술이다.
성진이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확답했다.
“그래.”
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럼 어쩌면 관리자들의 계약 기간이 반 이하로 줄어들거나, 잘하면 한 번에 계약이 끝날 수도 있으려나?”
“‘잘’하면.”
후자는 가능성이 높지 않나 보다. 하지만 내 재능은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어느 정도 잘하면 가능한데?”
“그러네. 인간의 몸으로 그걸 완벽하게 해내려면 세 번째 제어장치 정도는 해제해야 할걸?”
성진이가 또 한 번 내 옆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속삭였다.
“문장 쓸 건데, 혹시 모르니까 마력 딱 잡아둬.”
고개를 끄덕인 순간 성진이의 손에서 문장이 펼쳐졌다.
그런데 문장의 느낌이 평소와 달랐다. 마력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점점 깊어졌고, 익히 아는 문장 주위로 새로운 선과 문양이 생겨났다.
숨을 삼키면서도 나는 온전히 문장의 마력에 집중하지 못하고 온몸을 긴장시켰다.
왜 성진이가 미리 경고를 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 내 마력과 성진이의 마력은 상극. 성진이가 문장을 쓴 순간 몸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듯한 충동감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감각을 최대한 단단히 붙잡았다.
치지직…….
그러는 사이 성진이의 문장이 물에 번진 잉크처럼 흐려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세계로부터의 제한이다.
성진이는 주먹을 쥐어 문장을 지웠다. 그와 함께 치밀었던 충동도 가라앉았다.
다행히 그동안은 문이가 구슬로 향하는 마법과 마력을 대신 제어해줬다. 나는 벅차오른 숨을 몇 번 골랐다.
“새로운 제어 장치가 풀리면 문장도 진화하는 거야?”
성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문장이라기보다……영혼의 본래 힘이 드러나면서 문장에 실리는 힘도 달라지는 거지. 영혼마다 숨기고 있는 힘의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제어가 풀릴 때 생기는 변화는 영혼마다 천차만별이야. 문장으로 예를 들면 새로운 문양이나 장식이 추가되기도 하고, 색이 변하기도 하고, 혹은 영혼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해.”
“성진이 넌 몇 단계를 해제했어?”
“그건 알려 줄 수 없는 정보야. 너도……3단계 이후부터는 알려 주지 마.”
“어? 이거 혹시 개인 정보야?”
“응.”
애초에 이런 걸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몇 없긴 한데…….
“나지스 님이나 유펠라 씨, 디나 씨한테도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신쯤 되면 아예 묻지도 않아.”
생각보다 민감한 정보인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3단계를 해방하려면 어느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해?”
“글쎄다, 재능에다가 환경, 감정에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예상이 어려워. 하지만 빨라도 5년은 걸릴 거라고 봐. 재수 없으면 1000년이 지나도 해방되지 않을 수도 있고.”
“1000…!”
나는 무심코 악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오랜 못 살 것 같은데?!”
“우린 환생하잖아.”
“아, 어, 응, 그렇구나.”
이어진 대답에 순식간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애초에 넌 인간이고, 세계를 안정시키는 건 본래 신의 역할이야. 약간의 도움만 주면 나머지는 이 세계의 진짜 관리자들이 어떻게든 하겠지.”
나는 탈력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인성이네를 생각하면 그 약간의 도움을 최대한 빨리, 많이 주고 싶은 거고.”
“그 마법석으로 네가 상상한 것의 반만큼이라도 도움을 주려면……. 그러네, 일단 문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어야겠지?”
나는 구슬을 내려다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완성하는 데 몇 달, 처음에는 그 정도로 계획했다.
“완성까지 제법 오래 걸리겠네…….”
“그래도 남은 계약 기간인 7년보다는 훨씬 빨리 완성시키지 않겠어?”
“그건, 그래야지.”
나는 은백색 구슬을 꽉 쥐었다. 하르펜이 나에게 기대했던 이유가 이 힘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성물의 진화 작업을 진행하고, 나지스에게 부적의 재료를 몇 개 건네받았다. 이노키언은 그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지스에게 들어보니 이 도서관과 연결되지 않은 좀 먼 세계로 향했다고 한다. 내가 부탁한 재료를 구해 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따로 다른 용무가 있다는 모양이다. 어차피 머지않아 우리 세계에 올 예정이니, 얌전히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계획을 바꾸어 은성단에 주기적으로 들렀다. 몇 번 찾아가 본 바 아이들이 생각보다 나를 환영하기도 했고, 루이와 앨리스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앨리스는 내가 어떻게 장인이 되었는지, 장인이 되기까지 어떤 길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루이는 내가 무기력증이었을 때 어땠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궁금해했지만, 그보다는 어찌 되었건 나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내가 지금은 어떤 감각으로 주위를 보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자신의 일상, 내 일상, 좋아하는 작품. 케르베로스 형제들은 어찌 되었건 루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걸 반겼다. 다른 키메라들은 아이나 죄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반겼다.
세계수 이파리로 만든 차는 서로의 스케줄을 맞추느라 예정보다 조금 늦게 건넸다. 먹겠다고 한 아이 2명에게 장난감 같은 작은 컵에 따라 건넸다. 인하, 라이라, 예리, 준영이와 함께 24시간 정도 은성단에 대기했지만, 두 아이에게선 아무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키메라들은 세계수 열매나 차를 먹으려 한 순간부터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아직 모르겠다.
친구들을 따라 다른 2명도 차를 마시겠다고 나섰고, 그 중 곰인형이 차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었다. 올해의 랭크 시험을 제법 기대하고 있었지만, 문장을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선의 힘을 낼 수 없는 만큼 이번에는 시험을 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진이는 예정대로 쳤다. 죄인들은 의무 응시였다. 자아가 안정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키메라들은 좀 더 정신이 성숙하게 되면 응시시키기로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랭크 시험을 응시했고, 많은 이들이 기록을 갱신했다.
특히 성진이는 랭크 시험 시간 기록을 1시간 이상 단축했다.
이래저래 바빴지만 대현에서 하는 강연을 위한 준비도 틈틈이 해냈다. 나보다 한 발 일찍 끝낸 성진이가 많이 도와줬고, 첸과 미영 할머니도 경험을 말해주는 선에서 나를 격려했다. 성진이 앞에서 몇 번 연습해보기도 했다.
강연 전날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강연 일주일 전부터 조금씩 지인들에게 오는 연락이 많아졌고, 전날에는 시시때때로 메시지가 왔다. 키메라들,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아는 선배와 후배, 오랜만에 찾아오겠다고 하는 이사장님, 심지어는 내 특수한 정신마법에 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큰 조직의 간부들까지.
성진이의 강연에 이어 대현의 출입을 제한하는 와중에도 꽤 많은 외부인이 계약서를 쓰고 출입 허가를 받았다.
학생 수준에 맞춰 꿈에 관한 기초적인 부분만 논술한다고 알렸음에도 레일리와 윌리엄마저 오겠다며 손을 들었다.
덕분에 성진이가 준비했던 계약서가 순식간에 바닥났다고 전해 들었다.
친한 사람들을 통해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대다수 학교로 돌아오다 보니 유정 언니가 원한 파티의 크기는 확 커졌다가 키메라들과 선생님들의 불참으로 휙 줄어들었다.
“최근에 아이들이 사고를 많이 쳐서……. 활발한 건 어린아이답고 좋은 일입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우려가 드는군요. 사회 공부를 위해 수업만 보여주고 바로 돌아가려 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빠서 강연을 보면 금방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와서 뒷수습 때문에 바쁠 것 같다. 다음에 또 만나자.”
그런저런 이유로 중학교 무렵 자주 잡담을 나눌 정도로 나랑 친했던 사람들끼리만 모여 밥을 먹게 됐다. 그마저도 백한 선생님은 빠졌고, 인성이는 도중에 돌아가야 한다.
작은 긴장감을 안고 대현으로 향했다. 대현은 사람으로 북적북적했다. 일반인과 기자를 막론하고 카메라를 든 사람이 가볍게 세 자릿수에 달했다.
대현의 이번 특별 강연은 한국의 여러 학교에 방송하는 것이라 어느 정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물며 랭킹 1위와 2위의 위상은 보통이 아니다.
성진이 때도 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뭐, 성진이의 성격을 염려해 지금보다는 목소리가 작았지만.
인터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냥 공간 이동으로 학교 안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자리 안내나 강연용 자료를 스크린에 비출 프로젝터의 조정 등, 오늘 나를 보조하겠다고 나선 서준 오빠와 강연실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일찍 왔네!”
리허설을 위해 강연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보다 20분이나 일찍 와버렸다.
“긴장돼서요.”
“성진이는?”
“오늘은 따로 왔어요. 강연 시간 되면 특별 교실로 올 거예요.”
리허설이라고 해도 시연보다는 확인 작업 중심이다. 스크린에 비출 자료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컴퓨터와 프로젝터, 카메라 등에 문제가 없는지, 방송 송출이 순조로운지 등을 확인해 보면 된다.
서준 오빠가 컴퓨터와 프로젝터 빔을 조작해 자료를 스크린에 비췄다.
“보조의 특권으로 자료를 미리 읽어봤는데, 간결하고 묘하게……재미있더라. 부드럽고 막힘없다고 해야 하나. 역시 글에 관해선 내공이 달라.”
“중요한 건 글보다는 영상 쪽인데요…….”
“영상은 엄청 신비로웠어!”
“꿈이 좀 그렇긴 하죠. 신기하고, 특이하고, 복잡해서 좀 어지럽고.”
“감지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꿈에는 접근할 엄두도 못 내겠더라~.”
“그렇긴 하죠. 하지만 감지능력에 소양이 없다고 해서 꿈마법을 쓸 수 없는 건 아니에요. 구현계열이 특히 그렇죠. 성진이의 염력마법 같은 경우도 있고요.”
“그렇겠지? 마법의 가능성은 천차만별이니까. 그러고 보니 성진이도 꿈속 세계에는 잘 못 들어간다고 그랬던가?”
“네. 영혼을 보고 가끔 발을 걸치긴 하는데, 탐색은 못 해요. 본인 말로 상성이 굉장히 안 좋대요.”
꿈속 세계와 상성이 안 좋은 이유를 예전에 한 번 듣긴 했다. 꿈은 ‘시간’의 지배에서 미묘하게 빗겨난다고 한다.
“그렇지. 만능 같지만 만능이 아니지……. 하지만 그런데도 그 애한테선 곧잘 만능하다는 느낌을 받아. 참 특이한 후배야.”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순간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선을 움직여 창밖을 보았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고민하며 눈동자만 굴려 하늘을 둘러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공간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마침 창문을 통해 딱 보이는 위치였다. 높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니 어둠을 둘러 모습을 가린 인영이 떨어졌다. 로브의 후드를 푹 눌러쓴 남자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몸을 움츠리더니, 나를 돌아보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이노키언!’
나는 주먹에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 표정 변화를 막았다.
우리 세계에 오는 게 오늘이었나? 재료를 건네주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에 직접 찾아올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 치면 예정보다 상당히 빨랐다.
그보다 나는 이노키언의 기척에 놀랐다. 이 세계에서 이노키언의 기척은 말 그대로 랭킹 4위……아니, ‘랭킹 7위 이노키언’에 걸맞았다. 암울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등골이 오싹하지는 않았다.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평범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는 동안 내 평범함의 기준은 많이 이상해진 모양이다.
이노키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한 번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표시였다.
아직 강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가서 이노키언과 이야기를 나눌까 말까 고민하는데, 성진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성진: 이노키언한테는 내가 인사하러 갈 테니까 넌 강연에 집중해.』
하긴, 내가 눈치챘는데 성진이가 이노키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지.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기대도 했고, 오랜만에 긴장도 많이 했다.
생생한 감정이 조금 기뻤다. 되찾은 일상을 마음이 받아들였다는 실감이 들었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던 나날은 어느새 지나갔다.
“메시지? 누구한테서 온 거야?”
“성진이요. 격려해줘서 고마운데, 괜히 더 긴장되네요…….”
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몇 번 심호흡했다. 묘한 감회를 담은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서준 오빠가 무심코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아니,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에 긴장하는구나 싶어서. 표정은 전혀 안 그래 보였거든. 귀여워서 그래.”
그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저도 조금 전에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꿈을 주제로 책까지 썼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지 않나?”
“책을 내는 거랑 직접 만나는 건 다르죠. 책을 냈을 때도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사인회든 프로필 기입이든 다 거절했다고요.”
“그랬어? 그랬구나. 그런데 용케 강연을 받아들였네. 우리 은하, 많이 성장했는데?”
“뭐어, 저 말고도 꿈을 좋아하는 마법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이차원을 건드리는 게 예전보다 힘들어져서 꿈과 공간을 목표로 하는 마법사가 많이 줄었잖아요.”
긴장을 풀 겸 나는 한동안 서준 오빠랑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빠르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강연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이 강의실에 입장했다.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강연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참석하는 연령대가 참 다양했다. 많은 이들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나는 대기실에서 그 모습을 엿보며 마지막 심호흡을 했다.
이내 빔 프로젝터를 통해 준비한 자료가 스크린에 비치고, 무대의 조명이 조정되었다. 나는 서준 오빠의 격려를 받으며 천천히 무대의 가운데로 향했다.
내가 무대에 올라오자 웅성거림이 조금 더 커졌지만,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이번엔 주위가 쥐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안녕하세요. 이번 강연을 맡은 유은하입니다. 이렇게 많은 학생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한 호흡 쉬고 말을 덧붙였다.
“제 소개를 조금 하자면, 랭킹 2위의 S랭크 마법사이며, ‘꿈’을 이용한 마법을 메인으로 다룹니다. 오늘은 제가 다루는 ‘꿈’에 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꿈이란 무엇이고, 꿈을 다루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제가 어떤 식으로 꿈을 다루는지, 이런 종류의 마법은 어떻게 훈련하면 좋은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야기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적막이 잦아들며 조금씩 다양한 소리가 났다. 많은 이들이 숨을 들이켰고, 또 많은 이들이 노트에 펜을 가져가 사각거렸고, 키보드 자판과 마우스를 눌렀다.
“꿈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들면 찾아오는 꿈, 실현하고 싶은 이상……. 둘 다 제 마법 속에 녹아 있지만, 제 마법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바라는 형태를 현실에 실현하는 게 제 마법입니다.”
수많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긴장이 더해졌지만, 나는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구현계열 마법에 대해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잠들며 찾아오는 꿈, 사람의 정신세계와 그런 정신세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꿈속 세계’를 중점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강연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쉬는 시간을 넣어 1시간 20분 동안 이어졌다.
학생들을 위한 강연인 만큼 기초 위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람마다 고유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정신세계를 자각했는지. 그러한 정신세계와 잘 때 찾아오는 꿈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정신세계의 중심, 중요한 정보, 파편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것을 정신세계 안에서 어떻게 구분하는지.
이야기는 개인에서 물건으로, 이어서는 꿈속 세계로 넘어갔다.
무생물이 어떤 경위로 고유의 정신세계를 품으며, 그런 변화를 거치는 건 주로 어떤 물건인지.
그리고 꿈속 세계는 그런 개개인의 정신세계에서 흘러나간 꿈의 조각이 모이고 퍼져 만들어진 세계이며, 존재하는 수많은 꿈들을 연결하는 통로이다.
나는 그 세계로 통하는 출입구를 ‘문’으로 연상했다. 전형적인 만큼 연상하기 쉬운 형태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있던 질문 시간마다 꽤나 많은 학생이 질문을 해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정신세계는 무엇인가요?”
“개인의 정신세계는 아니고, 만들어진 세계였어요. 수수께끼를 풀거나 열쇠를 찾는 등 닫힌 곳을 열면서 탈출해야 하는 미로 형식이었어요.”
짜증나는 얼굴이 떠오를락 말락 했다. 당시에는 엄청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제법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 여전히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에 나오는 괴물이나 꿈들 중 직접 경험한 건 얼마나 되나요?”
“괴물의 설정은 우연히 꾼 평범한 꿈에서 몇 개 따왔어요. 꿈 중에는 경험한 것도 있고, 고민해서 만든 것도 있어서, 글쎄요. 정확한 숫자는 기억하지 못해요.”
다행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드문드문 긴장을 삼키며 몰래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는 동안 강연은 어느새 종반에 다다랐다.
“꿈속 세계는 여타 마법과 비교해도 상상력에 크게 좌우됩니다. 자신만의 꿈을 구축하고 싶고, 꿈을 통해 먼 곳까지 가고 싶다면, 상상력을 키우는 게 중요해요. 상상력도 공부와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어요. 자신이 상상한 무언가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설정을 더할수록, 꿈속에서 그 무언가의 힘은 강해져요. 품고 있는 마력보다, 재능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낼 수도 있답니다.”
상상력을 통해 상대방과 나 사이에 있는 어느 정도의 마력 차이를 깨부술 수 있다. 그게 내 환각마법의 장점이다. 나는 그렇게 이겨왔다.
“오늘 강연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참석해주시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준비해 온 것을 모두 시간 내에 이야기했다. 처음에 했을 때처럼 고개를 숙이니 많은 학생들이 웃으며 박수를 돌려주었다.
나는 무대 곳곳을 향해 여러 번 고개를 숙인 다음 무대 뒤편의 대기실로 돌아왔다. 프로젝터 조작을 마치고 나와 함께 무대에서 돌아온 서준 오빠가 나를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순서도 좋고, 내용도 좋고, 목소리도 명료하고 좋았어.”
“후우, 감사합니다. 말을 더듬을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히 실수는 없었던 것……같죠?”
“그럼. 정말 잘했어.”
객석은 아직 학생들이 남아 있어 소란스러웠다. 나는 강연을 돌이키며 가슴에 남은 긴장감을 안도감으로 바꿔 천천히 꺼트렸다. 응, 역시 큰 실수는 하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킬 겸 학생들이 퇴장하기를 기다리며 대기실을 정리했다. 꺼 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켠 순간 수십 개의 알림이 떴다. 지인들이 보낸 메시지 알림이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대부분은 강연 직전과 직후의 격려와 칭찬 메시지였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보다는 성진이랑 이노키언이 신경 쓰인다. 확인해 보니 성진이에게서도 몇 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성진: 미안. 교실에 좀 늦게 갈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첫 번째 메시지는 강연 전에, 그다음 메시지는 강연 시작하고 몇 분 후에 보냈다.
『성진: 이노키언이랑 이야기 나눴어. 내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어. 그쪽이 집 같은 타인의 개인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걸 꺼리는 모양이라, 우리 가게 아니면 개인실이 있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하는데.』
『성진: 강연 잘 봤어. 연습한 보람이 있네.』
답장을 보내 이야기 내용을 물어보니 이 세계에 온 용건, 앞으로 어디에서 기거할 건지, 언제 다시 만날지 등의 대화를 나눴단다. 상세한 내용은 집에 돌아간 뒤 대화를 통해 확인하기로 했다.
성진이에게 답장을 한 다음 다른 메시지에도 답장을 했다. 일 관계로 대현에 오지 못한 유란의 단체 메시지방에 먼저 답장을 했다.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자료나 자리를 정리한 뒤 모두가 모여 있는 교실로 향했다. 오늘은 소영이에 캘리번, SR에, 경찰에, 심지어는 무하의 대원도 왔다.
“은하야, 수고했어~!”
“누나, 아까 질답 때 말했던 미로, 내가 만든 거 맞지? 그거 재미있었어?”
“재미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람의 기억이 걸린 미로 탐색으로 한때 나에게 무서운 경험을 안겨 준 기억 수집가 서한울이 뻔뻔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그를 향해 정색하자 같이 온 무하의 대원이 서한울의 머리를 꽉 눌러 입을 막았다.
한동안 찾아와 준 모두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소영이와는 장난치듯 손을 마주 잡고 웃었고, 캘리번이나 윌리엄과는 악수를 했다. 죄인들과 아이들도 조금씩 내게 말을 걸었다.
레일리는 내가 랭크 시험을 갑자기 빠진 것에 대해 약간 투덜거렸다. 나랑 성진이의 시험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나.
인성이네는 첸이나 성진이 때처럼 강연이 끝나자마자 돌아갔기에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메시지는 왔다.
떠들썩한 대화가 조금 잦아들고, 무하, 윌리엄, 레일리 등, 바쁜 사람들이 차례차례 돌아갔다. 저녁에 같이 만나 놀기로 한 교사들의 일이 끝날 때까지 오랜만에 캘리번의 대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캘리번의 대원들은 너무 오래 봐서 지겹다고 하면서도 넓다는 장점 때문에 우리를 캘리번 함선으로 안내했다.
어린 키메라들이 우주 함선을 타보고 싶다며 이야기를 꺼내, 키메라들도 함께 갔다. 첸이나 루니라가 우려를 많이 했지만, 가는 장소가 옛 동료였던 이들의 튼튼한 함선이라는 점을 생각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랑 과자는 휴가를 간 요리사 케일을 대신해 여러 카페에서 배달시켰다.
사람이 많아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스리슬쩍 빠져나온 나는 성진이를 불러 이노키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재료 건도 있고, 앞으로 이노키언에게 협력해야 하는 만큼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
“여기에 온 건 세계를 되살릴 재료를 찾거나 만들어서 가져가기 위해서고, 얼마나 있을지는 모른대. 저번에만 해도 100년 이상 여기를 헤맸으니.”
이노키언이 언제 처음 이 세계에 나타나 떠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100년 이상 곳곳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었다.
“주거지는 뭐, 적당히 집을 구하거나 떠돌아다닐 거라네. 생활비는 마법석을 돈으로 바꿔 구하려는 모양이고, 핸드폰 사면 번호 알려 준다 그랬어.”
“그렇구나. 핸드폰은 있으면 편하지…….”
뭐랄까, 여러모로 익숙해 보였다. 적어도 처음 이노키언이 우리 세계에 왔을 때 핸드폰 같은 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고 익힌 거겠지? 아, 하지만 이노키언이 우리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게……25년 전쯤이었다. 우리 세계의 핸드폰을 어느 정도 알겠구나.
“재생의 파편은 나지스한테 건넸대.”
나는 그 말에 약간 안도했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던 마지막 재료, 재생의 파편이 손에 들어왔다. 이제 모페 꽃이 피어나고 테리시 바다에 뛰어들어 수정을 구해오기만 하면 모든 부적 재료가 모인다.
“그래? 다행히 구했네.”
“아주 희귀한 물건도 아니니까.”
성진이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