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53
“그들…….”
예상이 맞았던지,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노키언은 머뭇머뭇 첸 일행을 언급하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으음……. 여기 와서 이야기는 들었는데, 어렵겠다.”
이노키언이 우리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입에 담는 게 처음이라 조금 놀라웠다.
“그래도, 사람이 만든 것치곤…….”
이노키언은 몇 번이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겨우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저번에 보여줬던 왕관은 그들을 위해 만든 거구나?”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아, 원래는 그런 용도가 아니었는데, 최근에 좀 다른 설정을 덧씌우고 있어요.”
“설정.”
이노키언이 어딘지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평소보다 생기 있는 표정이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나 이노키언의 표정은 이어진 내 질문에 다시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경험치……라고 하면 좋을까. 나침반과 적은 단서로 세계를 되살릴 재료를 찾기 위해 방랑하다 보니, 무언가에 얽힌 의지나, 유래나, 이유 같은 게, 어느 순간 읽히더라고.”
납득가는 이유였다. 거기다 재료는 찾아서 모아두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쓸모를 알아내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으로 성물을 만드는 건 처음 봐서, 기억에 남았어.”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기대감에 차 왕관을 꺼내 머리에 얹었다. 이노키언은 아주 많은 세계와 성물을 보아온 자다. 그런 사람이 내 왕관을 가리켜 ‘성물’이라 불렀다.
“제법 성물다워졌나요?”
잠시 왕관을 빤히 바라보던 이노키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성물이 될 거야. 왕관 가운데 있는 보석은 네가 원하는 대로 키메라들에게 무척 좋은 토대가 되어줄 거야.”
기쁜 마음으로 왕관을 쓰다듬던 나는 문득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토대’요?”
“응. 그들은 생물로서 불완전, 하잖아? 그런 사람이 세계에 정착하려면 계기가 필요해. 자연의 가호나, 신의 인정이나, 세계가 필요로 하는 업적이나…….”
나는 퍼뜩 성진이를 돌아보았고, 성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와 자연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생물은 웬만해선 그 세계에서 오래 못 살아.”
멍멍했던 귀가 탁 뚫리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알 수 없었던 심연의 정보가 또 하나 해금되었다.
성진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키메라들은 만들어진 생물치고는 안정되어 있어. 신의 아이인 디나의 도움을 받아 진화하기도 했고. 하지만 소수의 키메라가 몇십 년이고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왕관을 쥔 채 숨을 삼켰다. 심장에 얼음이 박힌 듯 차가웠다.
“엘리시아…….”
키메라들은 모두 영혼부터 육체까지 죄다 엘리시아의 손에 만들어졌고, 그들의 핵에는 트라베리아의 문장이 새겨졌다.
“엘리시아만이 아니라, 모든 커븐 로드가 비슷한 역할을 했겠지. 주인이 있는 그들은 세계에 있어선 마법사의 사역수로 판단돼. 설령 금기로 인해 탄생한 생물이더라도, 주인이 멀쩡한 한 안정된 사역수에게 바로 문제가 생기지 않아.”
“…….”
“하지만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증거는 사라졌어. 너희가 계속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지만, 연명 조치에 가까워. 세계와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필요해.”
“…….”
감정에 벅차 숨을 몇 번 고른 나는 신음하듯이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디나는…….”
“글쎄. 그건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겠는걸. 하르펜이나 하리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나는 한순간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혼란으로 어질어질했다.
“그럼, 너는…?”
항상, 언제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내 남친은 참 빌어먹게도 침착했다.
“고민하는 중이었지. 그렇다 해도 너와 디나와 예리의 힘이 있는 한 관리자들의 계약 기간보다는 오래 살 테니까. 아, 하미아랑 라스는 가호 없이도 멀쩡히 살 거야. 별의 도시의 관리자로서 세계에 인식되었으니까.”
이어진 말에 머리와 가슴의 격동이 진정한 의미로 잦아들었다.
“그럴 때 마침 네가 적재적소로 성물을 만들겠다고 한 거지.”
“…….”
“참고로 키메라의 지금 경우를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샐레나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느리게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돼.”
성진이가 가라앉은 눈으로 첨언했다.
죽기 얼마 전, 정령의 저주로 인해 자연에게 외면받아 신물 없이는 멀쩡히 활동할 수 없게 됐던 샐레나 리카르트. 그녀의 모습이 키메라에게 덧씌워지니 불안과 초조감에 다시금 머리가 아파 왔다.
우리의 대화에 쉽사리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를 보던 이노키언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연결 고리로써……네가 만드는 성물은 무척 좋아. 중심의 운명이 담겼고, 생명의 속성이 담겼고, 무엇보다, 성물은 자연의 인정을 받아야만 만들어질 수 있으니, 성물의 가호는 세계의 인정과 별 다를 바 없어.”
나는 왕관을 꽉 감싸 쥐었다.
위하는 목적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는 그런 어쩌면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성물.
내 계획에는 생각보다 아주 아주 무거운 목숨이 실려 있었다.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완벽하게 완성해야 한다.
“두 사람이 보기에, 성물이 역할을 다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나요?”
성진이와 이노키언의 대답이 갈렸다.
“1년.”
“5년…?”
대답하다 말고 이노키언은 동시에 울린 성진이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년이겠네.”
성진이가 무수히 많은 환생을 거쳐 왔다지만, 이노키언은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경험해 왔을 텐데, 그는 자신보다 성진이의 생각을 훨씬 신뢰하는 듯했다.
하긴, 성진이는 나를 잘 알고, 이노키언은 나를 단편적으로밖에 모른다.
“문장을 쓰면 반년.”
“그렇게 빨리? 대단해.”
그렇다면 성진이의 말을 믿어보자.
1년이든, 반년이든,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다면 키메라들은 불합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성진이가 걱정을 드러내지 않은 건 나를 믿었기 때문이었구나. 그걸 알자 초조함이 가라앉았다. 정말이지,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의욕이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중요한 할 일이 굉장히 많아졌다. 지나간 세월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왕관을 머리에 썼다. 한동안은 다른 건 제쳐두고 성물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겠다. 왕관에 흘러드는 마력을 바라보던 이노키언이 드물게도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살아남겠구나, 그 아이들.”
어떤 마음에서 우러난 표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의아해졌다.
“키메라 분들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이노키언은 여태껏 재료 이외에는 세계의 무엇에도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성진이에게는 흥미를 보였지만, 선을 넘어 접근하려 들지는 않았다.
“……응.”
이노키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끝내고, 가게에 온 본래의 용건을 꺼냈다.
“소재를, 혹시 따로 가지고 있는 게 있다면 그것까지 다 볼 수 있을까?”
오늘 이노키언이 키메라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만드는 성물의 중요성을 제법 오랜 시간동안 알지 못했으리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나는 가지고 있는 소재를 허공에 종류별로 꺼내 보였다. 아직 시험 중인 것부터 내가 나중에 쓰려고 생각했던 것까지 전부 꺼냈다.
다양한 특수속성 마법석과 금속, 꿈조각, 진화석, 특수 기술이자 제작용 마법인 만물상의 랜덤 융합 박스를 돌려 만든 우연의 산물들.
“예쁘네…….”
이노키언이 어딘지 부러운 눈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예쁜 힘은 오랜만에 봐.”
“감사합니다.”
내 마력은 내가 봐도 색도 느낌도 신비롭고 예쁘다. 어릴 때부터 내심 나의 자랑이었다.
고민하던 이노키언은 오로라의 힘이 담긴 금속과 조정의 힘이 담긴 『프리즈마 헥사그램』 수정, 우주의 꿈 구슬,『란스의 성배』에 담근 새벽의 시간석, 이렇게 4개를 골랐다.
고른 재료를 한동안 살펴보던 이노키언은 재료를 쥔 손을 제 몸에 두른 어둠 속에 집어넣더니 재료를 넣어 놓는 대신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우주를 여행하면서 발견한 거. 성물의 재료로 쓰면 도움이 될 거야.”
동그란 돌 몇 개와 어둠을 품은 이파리, 꽃. 그것들을 내 손에 올려놓은 이노키언은 아직 허공을 떠도는 마법석 중 가장 순도 높은 정화마법석을 가리켰다.
“몇 개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니까 꼭 저 힘이랑 섞어 써야 해.”
나는 이노키언이 전해준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돌조각 같은 경우는 마력과 꿈의 파편을 통해 어떤 것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행성의 파편, 별의 파편, 운석 같은 것. 돌들은 모두 우주가 지닌 자연의 힘을 듬뿍 품고 있었다.
반면 나뭇가지를 똑 부러뜨린 것 같은 이파리와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분홍색 꽃은 정체를 모르겠다. 아마 이 두 개가 다른 차원의 물건인 것 같다.
성진이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니 좋은 재료임은 확실하다. 나는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리고……‘한빛 정원’? 에서 나는 식물을 하나 가져가고 싶은데, 혹시 거래 가능할까? 거기 정원 주인이 당신이랑 친구라고 하던데…….”
한빛 정원의 꽃은 집에서 누구든지 가꿀 수 있는 극소수의 품종이 아니고서야 시장에 나돌지 않는다. 그조차 상당한 가격을 자랑한다.
“한정된 기간에만 자라는 종류가 아니라면 가능할 거예요. 어떤 품종이 필요한가요?”
“……이거.”
이노키언이 핸드폰을 조작하여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떠오른 건 한빛 정원에서만 자라는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태양의 튤립이었다.
“10송이 필요해. 꽃이 없으면 씨앗만이라도 부탁해.”
태양의 튤립은 한빛 정원에선 희귀한 꽃이 아니지만, 흔히 자라는 꽃도 아니다.
“…성진 님이 골라주면 더할 나위 없고.”
정원 바깥에서도 키울 수 있지만, 그 경우 태양을 꼭 닮은 빛과 자연의 힘이 약해진다.
“인하한테 한 번 물어볼게요.”
지금 한빛 정원은 몇 시더라? 항상 같은 좌표에 있는 게 아니라 일정 거리를 부유해 다니는 섬이기에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다.
일단은 인하에게 재료로 태양의 튤립을 쓰고 싶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봤다. 다행히 인하는 금방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변을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태양의 튤립은 피어 있지 않고, 씨앗만 가지고 있단다.
옆에서 같이 메시지를 확인한 성진이가 대신 대답했다.
“씨앗만 있다는데? 몇 개 필요해?”
“그럼 만일을 위해 20개……. 키우는 방법도 물어봐 주면 좋겠어요.”
“그러지.”
“감사합니다.”
원하는 대답을 받았는데도 이노키언은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용건이 끝났는지, 이노키언은 인사를 하고 가게를 떠났다.
“……죄인이 키메라에게 흥미를 가지는 건 언젠가 생명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야. 세계는 생명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까.”
불현듯 들려온 말에 흠칫했다.
“위해가 가는 관심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이 세계에 정착하지 못했더라도, 우리가 아끼는 것을 건드릴 정도로 겁 없는 놈은 아니야. 오히려 죄인은 다들 겁이 아주 많아.”
이노키언이 왜 키메라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그 이유를 왜 말하지 않았는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이유였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 재료가 모두 갖추어지면 그 세계에는 생명이 탄생할 것이다. 그걸 이루어내는 것은 결국 이노키언이다. 그렇게 전해 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모르는 게 나았나?”
확실히 좀 충격적이긴 한데……그렇게 탄생한 생물은 키메라들처럼 일그러진 생물은 아닐 것이다. 부활한 세계에 정당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라면 그냥 응원할 생각이다. 죄인이 결국엔 신이 되고야 마는 생리에는……여전히 마음이 많이 복잡하지만.
“아니. 괜찮아.”
나는 성진이가 건네준 수제 캔디를 입 안에서 굴리고는 가게의 문을 다시 아시아의 어딘가에 연결했다. 아직 가게 문을 닫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아카식 레코드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왕관을 쓴 채 우주를 오가는 시간을 늘렸다. 한빛 정원에 들러 성진이가 튤립의 씨앗을 고르고, 그 씨앗을 이노키언에게 건넨 날 나는 다시금 나지스와 만났다. 이번엔 유펠라도 디나도 없이 나지스 혼자였다.
나지스는 우리의 안부와 이노키언의 상황 등을 물어보고는 내게 신비로운 광채를 뿌리는 손바닥만 한 수정 클러스터를 건넸다. 클러스터는 아래는 까맣고 어두웠으나 위로 갈수록 하얀색에 투명했다.
“이게 재생의 흔적? 굉장히 예쁘네요.”
“눈부신 생명력은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기 마련이지.”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는 은은하게 타오르는 생명력의 파편이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재생의 흔적에서 루키아의 신력을 느끼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이거, 루키아 님의 힘이 느껴지는데요….”
“루키아가 일부를 가공했거든. 만난 적 없어서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모두 널 좋아해.”
가볍게 흘러나온 말에는 다정한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자애로운 시선에 나는 한순간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쑥스러움에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으, ‘우리’라 함은…….”
“물론 나랑 함께하는 동료들을 말하는 거야. 루키아도 하르펜도 널 마음에 들어 한단다.”
“…하르펜 님이요?”
루키아는 그렇다 쳐도,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꽤 싸한 인상인 그 하르펜이?
“하르펜이 루키아 외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긴 하지. 물론 그의 첫 번째는 언제고 루키아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건 아니야. 하르펜은 널 꽤 마음에 들어 해.”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한테 흥미를 가질 바엔 디나를 좀 더 신경 써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재생의 흔적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니 나지스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성물 제작 말인데, 꽤 순조로워 보이더라.”
“앗, 네.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상 그런 것 같아요…….”
“하긴, 인간의 눈으로는 알기 어려우려나. 순조로워. 세계가 인지했을 정도니까.”
생각도 하지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인지, 요?”
“성물은 세계에 있어서 특별해. 때로 그것은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니까. 이미 우리 모두 네가 만든 성물의 기척을 주시하고 있어.”
“…….”
“혹시 잠깐 꺼내서 보여줄 수 있니?”
당황스러운 말에 의미를 곱씹고 있을 때 나지스가 그런 제안을 했다. 대단한 부탁도 아니었기에 나는 왕관을 꺼내 머리에 얹었다.
우주의 어둠을 밝히는 별무리를 품은 별의 왕관. 성물로 진화시키겠다는 바람 때문인지 요즘 이펙트와 빛의 느낌이 보다 화려하고 신비로워졌다.
“어떤, 가요?”
세계가 어떤 식으로 성물을 인지하고 감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감지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게 다르다는 건 잘 안다. 나지스는 은은하다가도 찬란하게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감탄했다.
“아직 품은 세월이 부족하지만, 그게 없는 데도 훌륭하게 성물로서의 힘을 갖춰가고 있어. 분명 무척 강한 성물이 될 거야.”
나는 쑥스러운 기분으로 왕관의 보석을 매만졌다.
“왕관은 이대로 제 안에 연결해 둘 거고요, 가운데 있는 가장 큰 보석은 분리해서 세상에 내놓을 거예요.”
“그래도 되겠어? 그러면 왕관의 힘이 많이 약해질 텐데…….”
“새로운 보석을 만들어 채울 거니까 괜찮아요.”
나지스에겐 아직 성물을 만들고자 한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바빠서인지 규칙 때문인지, 그들은 우리 세계의 관리자임에도 우리의 대화나 생활에 사사로이 귀와 눈을 기울이지 않았다. 항상 직접 물어 나와 성진이의 안부를 확인한다.
디나에게만 말했던 이유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나지스가 내 왕관을, 왕관의 가운데 있는 보석에 손을 댔다.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다.”
“……!”
애틋한 감정이 가라앉은 눈을 본 순간, 나는 나지스가 이 성물의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계를 되살리기 위한 재료를 찾다 보니 물건의 유래나 목적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노키언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그 정도인데, 진짜 신은 당연히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웬만한 원리와 유래를 읽어낼 수 있겠지. 하물며 성물은 세계에 있어 특별하다고 했다.
“하지만 세계는 금기로 탄생한 생명을 명확한 이유 없이 인정해 줄 수 없어. 그건 세계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법칙이야. 규칙이 어긋나면 세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비틀리게 되고, 그건 종말을 일찍 당겨온다. 모든 물건이, 생명이, 세계마저 그래.”
“…….”
“하물며 금기는 있던 것을 더럽히고, 있던 것을 잘라 내고, 이치 자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벌리는 행위. 키메라들의 몸은 죽은 이의 시신으로 이루어졌고, 그 영혼은 죽은 이의 영혼을 깎아 내 생겨났지.”
나지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를 향한 미안한 감정을 제외하면 목소리는 당연한 일을 말하는 양 단조롭기만 했다.
“죽은 것은 세계에 녹아들어 언젠가 새로운 생명을 잇는 원천이 된다. 돌아와야 할 것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 순간 무언가가 불안정해지고 말아. 그들의 생명이 세계에 인정받는다는 건, 그 육체와 힘과 영혼이 세계의 이치를 따라 순환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그건. 하물며 우리 세계처럼 아직 안정되지 않은 세계에서는.”
보석을 쓰다듬는 나지스의 손에 어렴풋이 빛이 어렸다.
신력, 이다.
녹음이 느껴지는 녹빛과, 시간이 느껴지는 하얀색과 푸른색, 생명력이 느껴지는 연두색. 내가 아는 우리 세계의 모든 신의 힘이 나지스의 손에서 흘러나와 왕관의 보석 속에 스며들었다.
“너처럼 강하고 생물에게 다정한 자가 우리 세계의 중심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건…….”
나지스의 손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왕관을 벗어 살펴보았다. 세 종류의 신력은 내 새벽의 힘에 녹아들어 왕관의 힘과 광채를 더하는 비료가 되었다. 그렇게 내 마력과 바람 속에 삼켜져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흐름에 나는 눈을 떨었다.
“이야,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저기, 이건?”
당황하며 나지스를 돌아보니, 나지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성물은 말이야, 세계가 인정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돼. 그래서 네 마법이 성물로 완성되기 위한 이유를 더해줬어. 금기로 탄생한 아이들에게 당장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이 정도야.”
그러니까…….
원칙상 그들은 키메라들에게 직접 가호를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내심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있거나, 적어도 내 바람을 응원하고 있다.
그런 거겠지?
“감사, 합니다.”
“아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성물이 탄생하는 건 우리로서도 기꺼운 일이거든. 뭐, 우리의 인정이 있어도, 성물은 원래 역사가 필요한 물건이라……완성되려면 그래도 시간이 걸릴 거야.”
“네. 열심히 할게요.”
눈을 빛내는 나를 향해 나지스가 다시금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성물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지만, 그래도 왕관과 보석의 분리는 힘이 좀 더 안정된 이후에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나는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의 성물이기도 하고, 다양한 우주를 경험할수록 좋으니, 여기선 왕관을 계속 쓰고 다니면 어때? 여긴 차원 도서관이기 이전에 세계의 경계선이자 우주의 교차점이야. 그런 만큼 다양한 우주의 힘으로 가득하고.”
그 제안에 나는 그만 당황해버렸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힘이잖아요? 그걸 성물의 재료로 써도 괜찮은가요? 거기다 경계선의 힘은 다른 곳에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성물이랑 신물은 좀 예외거든. 환생자의 기술도 조금 예외. 거기다 네 빛의 마력은 다른 세계의 힘이든 뭐든 전부 한데 조화시킬 수 있으니까 문제없어.”
뭐 그렇다면야. 성물을 보다 빨리 완성할 수 있다면야?
하지만……왕관을 쓰고 도서관을 돌아 다닌다라. 막상 그 장면을 상상해 보니 조금 미묘해졌다. 음, 부끄러워졌다. 어딘지 코스프레 같은 느낌이라.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회원들의 옷차림은 고대 복장부터 SF식 복장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러니 왕관을 쓴다는 애매한 쑥스러움보다는 왕관과 옷차림의 부조화를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왕관이 잘 어울리는 옷차림은 대체 뭐가 있을까. 드레스, 는 너무 갔고. 세미 정장을 입으면 되려나?
“테리시에 갈 때도 쓰는 게 좋겠어. 성진이의 부적만큼은 아니더라도 네 몸을 지켜주겠지.”
“그럴게요.”
“아, 맞다. 모페 말인데.”
나지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꽃봉오리가 생겼으니까 앞으로 2주일 안에 세 송이 다 건넬 수 있을 것 같아. 한 송이는 일주일 안에 줄게.”
“앗, 네. 부탁드려요!”
“그래. 그리고 성진이가 미완성의 부적을 만들어 내면 같이 마지막 재료를 가지러 가자.”
“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나는 이내 방금 한 말에서 의문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라? 같이 가시나요?”
나랑 같이 바다에 잠수하기로 한 건 유펠라랑 디나 두 사람이었을 텐데?
“여럿일수록 즐겁잖아, 그런 건.”
나지스는 생각보다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같이 와주면 안심되니, 딱히 이론은 없다.
“아, 그리고 성물의 이름도 생각해 둬. 왕관 말고 그 보석. 뭐든지 이름이 있어야 진정으로 완전해지는 법이잖니.”
“음, 그렇죠.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요…….”
나지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나는 일단 오늘 하루 왕관을 쓰고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오늘 나는 일자바지에 폴라티를 입고 기장이 긴 검은 코트를 걸쳤다. 거기에 왕관을 쓰자니 위화감이 상당했다.
“오늘은 장비가 색다르군.”
드물게도 레오날드, 테일러, 두 사람과 친한 푸른 머리의 기사와 한꺼번에 마주쳤는데, 세 사람은 내가 머리에 쓴 왕관을 흥미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옷차림과 장비의 부조화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 성물인 것 같은데, 역사가 상당히 짧아 보여. 일단 신의 인정은 받은 것 같고.”
물의 기사, 코델리아의 의문에 대답하듯 테일러가 물었다.
“이 느낌, 색깔……. 혹여 이 성물은 그대가 직접 만든 건가?”
나는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긍정했다.
“어어, 네에.”
“뭐? 진짜?”
여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레오날드의 눈동자도 한층 깊은 흥미와 함께 반짝였다.
“어라? 으응? 너 인간이지? 인간이? 성물을? 신한테 허락을 구했어?”
“만들겠다고 사전에 이야기하긴 했죠? 성물을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