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58
마법을 새기는 형식은 문자마법, 글로 정했다. 글이야말로 내가 마음을 가장 깊고 예쁘게 담을 수 있는 방법이며, ‘축복의 서’라는 책을 통해 마법을 쓰는 만큼 예리도 글 형식으로 마법을 새길 수 있다. 그게 어려운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엔 내가 예리의 마법을 글로 변환시키면 된다.
나는 우선 왕관을 썼다. 귀걸이는 상시 착용하고 있다.
왕관과 귀걸이로 나와 예리에게 축복을 부여해 우리의 마법 효율을 높였다. 아이템의 본체로 사용할 마법석을 꺼냈다. 내가 만든 정화석과 예리가 만든 천사의 보석이 책상 위에 놓였다. 그 보석들에 또 한 번 성물로 축복을 부여했다.
나는 『만물상』을 불러냈다. 『만물상』은 나만의 아이템 제작소다. 일단 장소부터가 아이템의 제작 효율을 높이며, 상상으로 만들어 낸 아이템 제작 도구가 곳곳에 정돈되어 있다.
이 마법은 처음엔 영역이 아닌 도구였다. 원하는 재료를 넣으면 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아이템을 완성시켜 주는 도구. 거기에 이런저런 설정을 덧붙이다 보니 방으로 진화했다.
나는 행운 효과가 붙는 마법석 융합 병을 꺼냈다. 별 조각이 들어 있는 각이 진 원통형 유리병에 준비해 온 마법석 두 개를 넣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이 병에서 융합된 마법석은 주인의 운을 올려주는 약간의 행운 효과가 붙으며, 랜덤으로 마법이 증폭되거나 진화한다.
마법석은 금방 딱 좋은 상태로 융합되었다. 우리는 서로 적어온 글을 꺼냈다. 누군가를 위하는, 하지만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날지 확신하기 어려운 아이템. 이건 책이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깝다.
적어온 글이 내가 연상한 형태로 바뀌었다. 편지지 위에서 나와 예리의 글이 섞였다. 나는 편지의 글을 일부 수정했다. 글을 통한 마법인 만큼 잘 다듬을수록 좋은 마법이 된다.
편지를 진화석으로 만든 염색약으로 곱게 물들였다. 융합된 마법석을 아이템 제작용 마법진 위에 올리고 봉투에 넣은 편지를 마법석 안에 집어넣었다. 물론 편지의 글에 해당하는 마법을 직접 마법석에 주입하며 집어넣었다.
그 모든 과정을 키메라들을 위해 만든 성물과 나의 문장이 지속적으로 축복했다.
“이제 이걸 쪼개서…….”
이번에는 마법석을 조형 병 안에 넣었다. 이 병은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마법석을 세공하거나 분리해 준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마법을 강화해 준다.
일단 이 아이템은 자아가 있는 키메라들에게만 건네주기로 했다. 그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조금씩 설정을 바꿔 갈 생각이다.
마법석이 세공되는 걸 지느러미를 흔들며 흥미롭게 지켜보는 알파를 미묘한 눈으로 보던 예리가 문득 물었다.
“역시 아직 가호는 쓸 수 없나요?”
“가호는 쓸 수 있게 됐는데, 복수의 아이템에 가호를 부여하지는 못하겠어. 성진이도 소수의 사람한테만 가호를 새겨줬잖아? 그 이유를 요즘 실감하게 됐어. 하나를 쪼갠다고 해도 두 자리 숫자의 무언가에 가호를 새기는 건……으음, 무리야. 도저히 안 되겠어.”
예리의 표정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확실히 성진 오빠도 자신의 힘이 제한된다면서 가호의 개수랑 가호에 담는 힘을 제한했었죠. 그렇게 힘들어요?”
“으응. 가호라는 건 뭐랄까, 영혼의 근원에 가까운 무언가를 이렇게, 도려내서 건네주는 느낌이더라고. 육체로 비유하자면 팔이나 다리?”
“윽.”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별로였는지 예리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걘 대체 어떻게 4개 이상 가호를 새겨주고 다녔는지 모르겠어.”
예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전쟁 때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 무리했었던 건…?”
“익숙해지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본인은 말하는데.”
“가호를 쓸 때마다 일시적으로 마력이 흐트러지긴 했었지만, 진단 결과는 괜찮았었는데. 이제 가호를 쓸 일이 별로 없으니 괜찮겠지만.”
예리가 어두운 얼굴로 이것저것 중얼거리는 사이 마법석의 분열 및 세공이 끝났다. 유리병에서 엄지 한마디 크기의 팔각별 무리가 흘러나왔다. 이걸 모두의 가슴께에 심을 생각이다. 예리와 성진이의 견해로는 심장과 가까운 곳에 심는 게 좋을 것 같단다.
“혹시 다음엔 언제 시간 돼? 너랑 같이 전해주러 가고 싶어.”
“저도 그러고 싶어서 내일 시간을 비워놨어요.”
“그래. 그럼 같이 가자.”
팔각별 주위를 맴돌던 알파가 대화에 슥 끼어들었다.
[키메라들에게 이걸 전해주러 가는 건가.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해도 되나?]분리한 보석의 성장을 지켜봐 온 만큼, 알파는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내가 키메라들에게 성물을 선보이리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알파라면 관리자 이외의 키메라와 두 번째 성물이 공명하는 걸 보고 싶어 할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알파는 시카와 계약한 정령이었고, 그랬기에 우리는 그를 경계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키메라들도 그렇다. 키메라들이 기뻐할 만한 자리에 그들의 감정을 흔들 대상을 데려가고 싶진 않다.
예리도 같은 기분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알파는 아쉬워했지만 곧 수긍했다.
은성단에 아이템을 들고 찾아가겠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라이라와 대현에 다니는 키메라들의 일정도 확인했다. 마침 내일은 주말. 모두 휴일을 맞아 은성단에 모이는 모양이었다.
딱 알맞게 성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무대가 갖춰졌다. 나는 왕관, 귀걸이, 준비한 아이템을 계속 지니고 다니며 하루 종일 긴장했다. 이번에 만든 것들은 모두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을지 확신이 모자란 것들뿐이다.
‘그래도 확신을 가져야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최대한 흔들림 없이 믿어야지. 그 마음이 일어날 기적의 비료가 되어줄 테니까.
친구들에게도 아이템의 완성 소식을 알렸다. 형일 아저씨, 인하, 알파와 비슷하게 내가 성물에 대한 것을 알리리라 예감한 관리자 일행도 내일 은성단에 오기로 했다.
소영이네는 다시 우주로 나갔기에 응원 메시지만 보냈다. 성물이나 자연의 힘을 깊게 감지할 수 있는 소영이가 빠진 건 아쉬웠지만, 다행히 준영이가 시간이 맞아 은성단에 찾아와 주기로 했다.
다음 날, 시간에 맞춰 모인 일행과 함께 은성단으로 이동했다.
귀걸이 고유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은 왕관 없이 귀걸이만 꼈다. 참고로 왕관은 자주 쓰고 다니며 계속 강화시킬 것이고, 귀걸이는 주기적으로 관리할 예정이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자아가 있는 키메라들 반수 정도가 우리를 마중하러 나왔다. 첸, 어린아이 2명, 대현의 키메라들, 앨리스.
키메라들을 앞에 두고 자동적으로 귀걸이의 힘이 짙어졌다. 민감한 반, 첸, 어린 키메라 도은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직 자연의 힘을 감지하지 못하는 만큼 기분 탓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가장 넓은 거실로 안내하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동족 모두가 모이는 게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느낀 이가 한 명 있었다. 키메라들을 따라 걸어가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준영이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점점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준영이의 말을 막으며 염화를 보냈다.
「잠시 후에 알려줄게.」
“…….”
거실에 도착한 후 적당한 타이밍에 관리자들을 불렀다. 나는 모두의 기대 어린 눈빛을 받으며 아이템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정해진 숫자에 맞춰 쪼개진 보석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떤 형식으로 만들지 고민했는데, 체질을 바꾸려면 생명과 가까운 곳에 힘을 두는 게 좋다는 조언을 받았어요. 그래서 몸에 끼워 넣는 반(半) 내장형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오른 손등에 박힌 부적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가슴 근처에 보석을 가져가면 이렇게 반만 돌출되도록 쏙 스며들 거예요.”
“그거 안 아파?”
아이들이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최대한 상냥히 웃었다.
“괜찮아요. 몸에 상처를 내고 파고드는 게 아니니, 아프지 않아요.”
라스와 하미아를 제외한 자아가 있는 모든 키메라들에게 보석을 나누어주었다. 정화마법이 키메라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고자 기감(氣感)을 높이며 대기하고 있던 준영이가 내게 물었다.
“혹시 왕관을, 성물을 빌릴 수 없을까요? 성물이 있으면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준영이의 시선이 문득 내 귀걸이로 향했다. 그래, 준영이가 이게 성물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따가 빌려줄게. 일단 아이템의 순수한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거든. 왕관은 있는 것만으로 내 마법을 증폭시켜서 말이야.”
준영이는 조금 아쉬워했으나 납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이 먼저 아이템을 착용했다. 쇄골 아래쪽에 보석을 대자 보석이 옷을 통과해 피부에 쏙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생명력으로 가득 찬 정화의 마력이 은은하게 그들의 몸에 퍼졌다. 감지능력을 지닌 마법사가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운 정도로, 딱 나랑 예리가 예상한 정도로 은밀했다.
“느낌이 어때요?”
키메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슴께를 보았다. 보석이 잘 박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옷깃을 들춰보던 슈카가 대답했다.
“뭐랄까, 그냥,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처음엔 조금 가슴이 시원한, 편안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도 금방 사라졌어. 그냥 평범해.”
“그런가요. 예리야, 준영아, 너희가 보기엔 어때?”
예리한 눈매로 감지능력을 전개하던 예리가 먼저 감상을 말했다.
“마법은 순조롭게 발동되고 있어요. 마법석의 마력도 문제없이 설계대로 재생되고 있고, 마력도 이상적인 느낌으로 육체에 스며들었어요. 아직 아이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체질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예리가 말을 마친 후에도 자연과 교감하며 한동안 고민하던 준영이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아직 특별한 영향력은 못 느끼겠어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어, 그리고 최근에 생각난 게 하나 있는데요.”
“응, 뭔데?”
“오시언 씨한테 점괘를 받는 것도 키메라 분들의 체질이 변화했는지 확인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오시언은 점술을 통해 세계에 새겨진 운명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준영이가 조심조심 키메라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오시언 씨가, 키메라 분들의 운명은……그, 인위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세계에 얽힌 데다, 세계에 인정되진 않아서……제대로 점을 칠 수 없다고, 했었어요.”
엘리시아의 이상에 찬성하지 않았던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들과는 드문드문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준영이는 그들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법을 배웠고, 지금은 그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주 의견을 구하고 다닌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세계에 받아들여진다는 뜻, 이잖아요? 그럼 제대로 된 점괘가 나오지 않을까요?”
“괜찮을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흘끔 성진이를 봤다.
그런 확인 방법을 성진이가 떠올리지 못했을 리 없다. 실제로 마찬가지로 나를 한순간 돌아본 성진이의 눈동자에는 어렴풋이 부정의 감정이 비쳤다.
점괘는 확인 방법으로는 알맞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성진이가 그걸 아는 건 전생의 경험 덕분일 테니, 이들에게 그것을 증명하긴 어렵다. 그래서 나도 적당히 찬동했다. 그렇다 해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찰해 보고 싶었다.
정화 아이템의 작동 상태 확인은 끝났다. 나는 긴장한 마음을 안고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께 하나 더 전해드릴 게 있어요.”
나는 계속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를 풀었다.
“알고 있겠지만 저는 『별의 왕관』을 성물로 진화시키는 시도를 했어요. 시도는 무사히 성공했고요.”
나는 천천히 걸어가 첸에게 귀걸이를 내밀었다.
“이건 그 우주의 성물에서 떼어 낸 거예요.”
힘을 불어넣자 귀걸이가 숨기고 있던 찬란한 별빛을 여념 없이 드러냈다.
눈부시게 퍼진 별빛이 주위의 온갖 것과 공명했다. 내 마력에, 세상을 이루는 자연의 요소에, 키메라들의 가슴에 새겨진 정화의 아이템에, 무엇보다 키메라들 본인의 핵에. 그들의 정신과 마력과 영혼에.
나와 비슷하게 조금 긴장한 표정이던 관리자들마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내 왕관이 관리자가 아닌 키메라들에게도 자연의 축복을 전해줄 수 있다는 걸, 그러기 위해 내가 성물을 만들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왕관에서 분리해 낸 ‘귀걸이’는, 키메라들만을 위해 만든 성물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엄연히 별의 왕관과는 다른 역할을 지닌 성물이에요. 막상 설명하려니 적절한 말을 고르기 어렵네요. 간단히 말하자면 키메라 여러분을 가호하기 위해 만든 성물, 네, 여러분을 위한 성물이에요. 이름은 아직 붙이지 않았어요.”
“……네?”
의아한 눈으로 성물에 손을 뻗던 첸의 몸이 굳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순수하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있다. 뜬금없고, 상상한 적 없고, 적어도 이전까지라면 있을 수 없던 일이라 그럴까. 그들은 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 그대로예요. 이 성물은 ‘키메라’를 축복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여러분을 가호하고, 축복하여, 자연의 힘과 교류하는 것을 도와줄, 여러분이 쓸 수 있는 별의 성물이에요.”
“으, 응?”
그 냉정하고 침착한 슈카마저 내 말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고 있다. 경악해 눈을 크게 뜨다가도 설명이 이어질수록 흥분감에 몸을 들썩거리던 하미아가 참지 못하고 라스의 등을 밀었다.
“라스, 보여줘.”
멍해져 있던 라스는 하미아에게 떠밀려 몇 걸음 걸어간 후에야 반응을 보였다.
“어? 내, 가?”
“난 정령이 있잖아. 네가 해야 더 받아들이기 쉬워.”
“…….”
고개를 끄덕인 라스가 이내 조금 들뜬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손의 방향을 바꿔 일단은 라스에게 귀걸이를 내밀었다.
라스는 인성이의 가디언으로서 별의 도시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 하지만 별의 도시와 떨어져 지구의 어딘가에 내려서면 자연의 힘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무언가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방법만은 그 민감한 감각으로 확실하게 붙잡고 있다.
귀걸이를 붙잡은 라스가 성물과 교감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집중하던 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응. 느껴져.”
그러더니 곧바로 그에게 익숙한 자연, 어둠 및 공간과 교감을 시작했다.
자연은 처음엔 그 부름에 쉽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새벽을 품은 별의 성물이 반짝반짝 빛을 뿌렸고, 그 빛에 이끌린 자연이 라스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평소보다 더욱 힘차게 자연과 교감하는 라스를 보며 준영이가 숨을 삼켰다.
성물의 힘 덕분일까. 평소라면 자연의 힘에 전혀 반응하지 못할 키메라들이 위화감을 느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껴져?”
중요한 일이기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라스는 문장으로 말을 했다.
“자연의 힘이야.”
“…….”
아직 지금 일어난 일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입술을 몇 번이나 벌리면서도 차마 아무 말도 못 하는 첸에게 다가간 라스가 첸의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걸어주었다.
나는 주위의 힘을 느끼며 무심코 감탄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 어렴풋이라고는 해도 키메라들이 바로 자연의 기척을 느낄 줄이야.”
키메라들에게 자연의 축복을 전해 주기 위해, 더하여 자연과의 교감을 도와주기 위해 성물을 만들었지만, 성물이 이렇게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줄 줄은 몰랐다.
한동안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예리가 내 중얼거림을 듣고 퍼뜩 내게 달려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으, 은하 언니! 이, 이게……. 아니, 성물을 만든 것만으로도 대단했는데, 키메라들을 축복할 수 있는 성물이라니!”
“꽤 좋은 선까지 간 것 같지?”
“…네.”
긍정을 돌려준 건 누구보다 자연의 힘에 민감한 준영이었다. 우리 중 누구보다 자연의 힘에 민감한 인물이 그렇게 확답해 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모두가 어렴풋이 자연의 힘을 느낄 정도면, 직접 끼면…? 저기, 첸 씨! 제가 성물의 힘을 유도해 줄 테니까 자연이랑 한 번 교감해 보지 않으실래요? 선배, 그래도 되죠?”
“물론이지. 잘 부탁해.”
성큼 달려간 준영이가 조금 낯선 얼굴로 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첸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조금 전에 비하면 각오를 다진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준영이는 그 손을 맞잡으며 귀걸이와 교감을 시작했다.
“성물의 사용법은 간단해요. 성물의 힘을 빌리겠다고 바라면 성물이 반응할 거예요. 힘을 좀 더 확실하고 강하게 이끌어 내고 싶다면 귀걸이에 마력을 집어넣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첸이 귀걸이에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었다.
“자연과의 교감은 쉽게 말하자면 자연과 소통하는 거예요. 자연에게 바라는 바를 말하고, 자연이 그에 응답하는 걸로 소통이 이어져요. 그 귀걸이는 우주의 성물이며 별을 상징해요. 그러니 말을 거는 상대로는 어둠, 하늘, 우주, 별이 좋아요.”
“별…….”
첸은 한순간 나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준영이를 마주보며 눈을 감았다.
귀걸이에서 흘러내린 찬란한 별빛이 우주의 의지를 불러냈다. 성물은 지팡이처럼 자연을 부르는 통로 역할을 겸한다. 별의 보석에서 흘러나온 빛의 반 정도는 내 고유의 힘이지만, 나머지 반은 우주에서 흘러나온 별빛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깊게 집중하던 첸이 무엇을 느꼈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첸만이 아니라 모든 키메라들의 힘이 성물과 준영이의 유도에 반응하고 있다. 별빛이 닿는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검의 도깨비 도은이 손을 뻗었다. 원래부터 민감했던 아이는 아무래도 어렴풋이나마 자연의 흐름을 느낀 것 같았다. 세계수 잎차를 마실 수 있는 리치, 곰 인형, 티라노 모두 다른 키메라들보다 민감하게 성물의 힘에 반응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인성이가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메라들을 위한 별의 성물이라. 본체에 뒤지지 않는 성능인걸?”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
“응. 저 귀걸이는 틀림없이 키메라들을 별의 도시에 이끌어 줄 거야. 아직은 한 명씩만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
“틀림없이 가능할 거야. 그건 언제 시험해 볼래? 모인 김에 오늘 바로 하는 게 어때?”
“어? 뭘?”
“응?”
나는 인성이가 뭘 시험해 보겠다는 건지 몰라 의문과 함께 인성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인성이도 마찬가지였다.
“뭐냐니? 키메라들을 별의 도시에 이끌기 위해 만든 성물이잖아? 귀걸이를 사용해 키메라들이 별의 도시에 갈 수 있는지 당장 시험해 보는 것 외에 뭐가 있어?”
“……어?”
당황한 나보다 소비토, 슈카 등 별의 도시에 갈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던 키메라들이 먼저 반응했다.
“진짜야? 정말로 저 귀걸이를 사용하면 자연과 교감할 수 있어? 별의 도시에 갈 수 있어?”
“성물의 힘을 잘 이끌어 내기만 하면 충분히……왜 그래?”
내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인성이가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키메라들이 좀 더 빨리, 능숙하게 자연과 교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만든 성물이었다. 즉 키메라들이 성물을 사용해 별의 도시까지 가는 데는 앞으로도 한동안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적어도 키메라들이 성물을 통해 혼자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할 줄 알았다.
“아니, 저 성물은 자연 교감을 보조하는 용도로 만든 건데……. 보통 성물을 쓰는 것만으로 별의 도시에는 못 가지 않아?”
나는 준영이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당황하던 준영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인성이도 방금 내가 한 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키메라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잖아. 그리고 네 별의 왕관이랑 저 귀걸이는 아무리 봐도 여타 성물과는 수준이 다르잖아.”
“수준…….”
“우리가 본 것 중에 가장 강한 성물이 준영이가 썼던 나무 상자와 목걸이였던가? 그거랑 네 성물의 힘을 한 번 머릿속에서 비교해 봐.”
“…….”
나는 지금은 준영이에게 없는 성물의 힘을 떠올렸다. 그 성물이 보여줬던 격노의 재해를 떠올렸다.
“사람이 만든 성물이 어느 정도 성물의 특성을 띨 수 있을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되면, 하물며 만들어 낸 사람이 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역사는 짧아도 지닌 내구성과 마력부터 차원이 달라. 거기에 성물에 담긴 힘은 우주의 힘이야. 별의 도시에 연결된 힘도 우주의 힘이고.”
하나하나 내 성물의 가능성을 꼽던 인성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못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근거들이었다.
“성진이 넌 왜 은하한테 안 알려줬어?”
이어진 인성이의 의문에 나도 성진이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성진이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래도 생각하고 있는 ‘도움’의 수준이 달랐나 봐.”
“아…….”
나는 그만 창피해져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확실히 내 성물이 지닌 힘은 다른 성물에 비해 차원이 달랐다. 내 성물에 비견될 만한 힘을 지닌 물건은 나지스가 만든 신물과 성물 정도다. 별의 왕관이 품고 있는 순수한 힘은 인하의 신검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이없는 감정을 삼키고 있던 성진이와 성물의 힘을 밝힌 순간부터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인하, 예리, 형일 아저씨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맞아요. 그럴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키메라들의 경우는 워낙 특수하잖아요.”
“어쨌거나 키메라들 모두 당장 별의 도시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됐지. 그보다 빨리 시험해 보자.”
“그으래……. 거기다, 인성이랑 성진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별의 왕관을 쓰면…….”
“모두 한꺼번에 별의 도시에 이동할 수도 있겠지.”
인성이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확답했다.
덕분에 부끄러움보다 기대감이 더 커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아직 내 어깨에 놓여 있는 성진이의 손을 투정을 담아 살짝 꼬집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성진이가 내게서 손을 뗀 후, 나는 우선 성물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일단 그 귀걸이는 힘을 쓰지 않더라도 하루 주기로 키메라 여러분끼리 교대해서 껴 주세요. 그리고 이성이 있는 모두가 하루씩 착용한 후에는 성물의 기능 확인과 성물 제작의 마무리를 위해 다시 잠깐 제가 가져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귀걸이 끼는 순서 어떻게 정할래? 추첨? 사다리 타기? 게임 대결?”
슈카가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아, 그리고 성물의 이름도 정해주면 좋겠어요.”
“리더님이 정하시지 않고요?”
“여러분이 사용할 성물이니만큼 여러분이 짓는 게 여러분께 유리할 것 같더라고요.”
제작자는 분명히 나지만 저것의 주인은 곧 키메라들로 바뀐다. 그런 상황에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꽤 큰 의미를 가진다.
귀걸이를 매만지던 첸이 물었다.
“이 귀걸이는 왕관의 보석을 떼어 내 만든 것이지요?”
“맞아요.”
“그럼 간단하게 ‘별의 귀걸이’라 부르도록 하지요.”
첸의 의지에 응답하듯 ‘별의 귀걸이’가 빛났다. 나는 조금 당황해 물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지어도 괜찮겠어요? 이름의 의미를 아시잖아요.”
슈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왕관과 세트라는 느낌이라 좋지 않나요? 거기다 은하 님의 기술과 무기도 단순한 이름이 많잖아요. 왕관이나, 지팡이나, 열쇠나…….”
“아하하……. 세트로 만들려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뭐예요.”
“아앗, 그렇다고 은하 님이 이름을 막 붙였다는 건 아니에요! 나쁜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슈카는 이번엔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후후. 은하 님이 주신 선물이니 은하 님의 마법과 세트로 맞춘 이름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이 이름으로 충분합니다. 부르기 쉽기도 하고요.”
귀걸이는 사실 저 성물의 확정 형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형상을 귀걸이 형식으로 고정했을 경우, 그리고 저 성물을 내가 사용하려고 했을 경우,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 같긴 하다.
“그런가요. 뭐, 마음에 드신다면야 문제없어요. 그럼 이제 성물의 기능을 설명할게요. 아직 성장할 여지가 있지만, 현재까지 성물에 깃든 힘을 알려 드릴게요.”
“네.”
모두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별의 귀걸이』는 왕관의 보석이었던 만큼 『별의 왕관』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일단 근처에 귀걸이가 있는 것만으로 키메라들은 우주와 정화마법의 축복을 받는다. 이 축복의 효능은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마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그 축복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왕관처럼 귀걸이에도 이름이 붙은 고위 축복 기능이 있다. 고위 축복은 일정 이상 마력을 불어넣고 일정 시간 이상 성물과 깊게 교감하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나, 새벽의 축복. 이건 육체의 기능과 마력을 크게 증폭하는 축복이다.
둘, 별의 축복. 마법에 자연의 힘이 섞이며, 마법의 정교도가 높아진다.
셋, 우주의 축복. 성물이 지닌 기본적인 기능인 자연의 축복과 자연과의 교감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다.
넷, 생명의 축복. 일정 시간 동안 주인의 생명을 지키고 방어한다.
“이건 축복은 아니지만, 귀걸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생명의 축복이 깨졌을 경우 본체인 왕관에 신호가 오게 되어 있어요.”
설명이 이어질수록 키메라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눈은 커지고, 입도 벌어졌다.
“귀걸이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끝이에요. 착용할 차례가 왔을 때 조금씩 시험해 보세요. 고위 축복은 성물과 깊게 교류할 필요가 있어서 아마 당장은 쓸 수 없을 거예요.”
“그렇구나. 아니, 그렇다 쳐도…….”
루니라가 질린 기색으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엄청나! 성진이랑 인성이가 왜 수준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아.”
“동감.”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큰 스케일 안에서도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후우우우우…….”
이내 키메라들은 어딘지 기쁨보다는 긴장감이 앞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럼 이제 별의 도시로 가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