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59
그 말 한 마디에 모두의 표정이 조금 전처럼 활기차졌다. 항상 표정 변화가 없다시피 했던 소비토의 얼굴에도 드물게 열망이 어렸다.
“오늘은 왕관을 사용해 최대한 많은 인원으로 함께 별의 도시에 가보도록 해요. 여러분의 의지로 귀걸이를 사용해 별의 도시에 가는 데는 제법 연습이 필요할 테니까요.”
비로소 나는 왕관을 꺼냈다. 별의 왕관을 머리에 쓰자 순식간에 주위가 별의 힘으로 가득 찼다.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될까 싶어 빛은 환각마법으로 지웠다. 왕관의 출현에 반응하여 귀걸이의 힘이 자동적으로 한층 강해졌다.
첸은 별의 귀걸이를 몇 번 매만지고는 즐거이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자연 교감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은하 님의 힘이 있으면 금방 성과를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길 바라요.”
나는 활기차게 웃는 키메라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왕관의 축복을 발휘했다.
“빛의 축복.”
왕관의 축복은 아직 귀걸이에 비해 축복의 종류가 적다. 힘이 강한 만큼 하나의 기술로 복합적인 힘을 단번에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왕관에서 쏟아진 빛이 키메라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귀걸이는 물론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마법석도 공명하며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우주를 품은 자연의 힘이 그들의 육체와 마력에 듬뿍 퍼졌다.
“이동.”
왕관을 사용하면 우주 어디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 별의 도시로 바로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물로 은성단의 키메라들에게 축복을 부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일단은 별의 도시가 보이는 우주 공간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것마냥 기대로 두근두근 들뜬 표정이었고, 이날을 고대했던 몇 명은 기도하듯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오지 못해 조금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별의 도시는 만들어진 생물의 순수한 힘과 마음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별의 도시에 들어갈 수 없는 자는 일단 별의 도시를 보지 못하고, 그 힘을 느끼지 못하며, 마지막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세계의 제한에 걸렸을 때와 비슷하게 무의식중에 그 장소에 접근하지 않으며, 그 사실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다.
인성이가 긴장한 눈으로 물었다.
“어때? 별의 도시가 보여?”
별의 도시는 카메라에는 비치지 않지만 염사가 가능하다. 그를 통해 키메라들은 별의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
“보입……니다.”
흘러나온 첸의 대답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도시를 응시하던 슈카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활기차게 동족들을 돌아보았다.
“자! 도시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손을 들어줘!”
다행히 모두 도시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미아와 라스가 몸을 들썩이며 흥분했다. 예리와 형일 아저씨도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이번엔 내가 물어보았다.
“다음으로 도시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은 있나요?”
이번에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다가가는 게 무섭거나 거부감이 드는 사람은요?”
그러자 이번에는 많은 키메라들이 손을 들었다. 곤란하게도 아이들은 모두 손을 들었고, 앨리스, 노체, 쟈넷, 케르베로스 형제, 데미안도 손을 들었다.
잠깐 고민하던 라이라가 내 질문에 설명을 덧붙였다.
“단순히 힘이 강해서 무섭다, 그런 거면 해당이 안 돼. 다가가면 안 될 것 같다, 거부당하는 느낌이다, 닿으면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다. 일단 그런 사람만 손을 들어줘.”
손이 몇 개 내려갔지만, 여전히 손을 들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아이들은 검 도깨비와 리치를 빼면 모두 손을 내리지 않았다. 앨리스, 노체, 쟈넷, 동물 친구들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다행히 소비토는 그런 거부감은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감정으로 보아 허세는 아니었다.
인성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물이 있어도 마력이 부족하거나 상성이 안 맞으면 못 오는 모양이야.”
확실히 어린아이들은 모두 다른 키메라들에 비해 힘이 약하다. 앨리스, 노체, 쟈넷도 별의 도시에 올 수 있는 마법사의 실력을 기준으로 따지면 힘이 부족한 감이 있다.
별의 도시에 바로 이동하지 않기를 잘했다. 인성이의 말에 손을 든 이들이 모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인하도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준영이도 그것 때문에 못 가니까.”
“어어, 근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약해요. 전 어쩌면 왕관의 힘이 있으면 갈 수 있을지도……모르겠어요.”
“너도 정말 특수 케이스긴 하다.”
인성이가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차례차례 준영이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네 몸엔 부담이 클 수도 있어. A랭크 마법사는 안 돼. 참도록 하자.”
“맞아. 위험을 감수하고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준영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섭섭하네요.”
앨리스가 풀이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다. 자연의 흐름은, 특히 우주의 흐름은 강력해 우리의 힘으로도 그 사이를 억지로 비집을 수는 없다.
“갔다 와서 자세히 설명해 줄게!”
“한동안 아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격려, 위로, 걱정의 인사를 나누고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사실 은성단에 돌려보낼까 했는데,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사람 중에서도 막상 별의 도시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고, 앨리스 일행이 동족들이 도시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라스, 손을 잡아줄 수 있나요?”
긴장으로 떠는 첸의 손을 라스가 굳게 잡아 주었다. 그걸 보고 슈카, 데미안, 반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케르베로스 형제도 서로에게 몸을 기댔다.
라이라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은하 언니 옆에 붙어 있으면 뭐든지 다 잘 될 것 같아서요.”
말은 활기차게 했지만 많이 긴장한 게 감정의 색을 통해 뻔히 보였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그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거부감을 느끼거나 몸이 알 수 없는 의지에 막히면 말해 주세요.”
“특히 도은이랑 타타라.”
“네!”
아이 둘은 도시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강대함에 약간 무서워하면서도 활기차게 대답했다.
천천히 별의 도시가 가까워졌다. 별의 도시가 왕관의 힘에 공명했다. 다행히 함께 한 이들 중 별의 도시에 막히거나 거부당하는 이는 없었다. 우리는 입구를 넘어 무사히 별의 도시에 도착했다.
“이…….”
키메라들이 멍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특히 첸과 소비토가 감정의 흔들림이 강했다.
슈카, 라이라, 루니라, 반은 조금 놀라워하다가 호기심과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고, 케르베로스 형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으며, 데미안은 안심한 듯 웃었다.
꽤 오랫동안 멍한 눈빛이던 첸도 이내 안심한 듯 웃었고, 소비토만은 계속 아무런 표정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다만 감정으로 보아……눈물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키메라들이 진정하길 기다리던 인성이가 다른 가디언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자, 지금부터 우리가 별의 도시를 안내해 줄게.”
관리자들은 도시에 난 큰길을 앞장서 걸으며 특별한 구역이나 중요한 건물을 알려 주었고, 그 구역과 건물이 어떠한 힘을 지녔으며, 어떤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했다. 중앙 빌딩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빌딩은 다 같이 이동해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루니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깥에서 볼 때는 위압감이 굉장했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 않네?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야.”
“흠, 그 이유로 예상가는 게 두 가지 정도 있는데.”
앞서 걸으며 인성이가 검지와 중지를 세워 보였다.
“일단 이 도시는 은하의 성물을 아주 좋아해. 그 성물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와.”
슈카와 라이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감지능력이 있으면 제 몸을 은은하게 감싸는 별빛, 축복의 마력을 볼 수 있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게 되면 좀 더 이해가 갈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인성이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이 도시는 세계의 중심이야. 웬만해서는 이 공간의 힘을 이해할 수 없어.”
“바깥에서는 이 공간이 가진 방문을 거절하는 성향 때문에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걸 지나쳐 내부로 들어오면 수준이 너무 다른 힘이라 느낄 수 없다?”
슈카는 인성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꽤나 정확히 잡아냈다. 인성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 설명을 했다.
“응. 거기다 도시 내부의 순수한 공간의 힘과 바깥에 흘러나가 다른 것과 섞인 공간의 힘은 질이 완전히 달라. 그렇게 옅어지고 약해진 바깥의 힘은 비교적 쉽게 느낄 수 있어.”
“세계에 있어선 미약한 힘에 위압되었다 이거지? 좀 분하지만, 세계를 이루는 힘이니 그럴 만도 한가.”
납득한 슈카가 데미안과 반을 불렀다. 두 사람은 공간을 향한 이해력과 감지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너희는 어때?”
“음……흐름이 너무 강하고 깊어서 무섭긴 하지만 적의가 없어서 괜찮아. 이 도시는 안전해.”
“드문드문 보일 때마다 나락을 보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그건 최인성이 말한 대로 수준이 다른 힘을 대할 때 느끼는 경외일 뿐, 바깥에서 느낀 것과 같은 거부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간마법에 관한 재능이 뛰어난 라이라나 감지능력이 뛰어난 소비토, 케이, 첸도 비슷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키메라들은 경험상 자신보다 강한 미지의 힘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성이나 동료의 힘이 섞였기 때문인지, 성물 덕분인지, 다들 그런 의미로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관리자들이 작업을 하는 중앙 빌딩을 올랐다. 1층부터 계단을 따라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랐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와 도형. 층마다 바뀌는 풍경과 분위기. 중앙 빌딩에 연결된 공간의 힘을 이해할 수 있는 키메라는 기껏해야 데미안 정도고, 그조차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쉴 새 없이 변화하는 풍경이 색다른지 다들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관리자들이 평소 작업을 하는 20층에 도착했다. 20층은 커다란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스템 관리실과 비슷한 모양새다. 새까맣고, 커다란 모니터와 키보드, 조작 버튼이 복수 있고, 기계의 이음새를 따라 전자 회로가 빛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관리실 중앙에 있는 세계의 핵심이었다. 중앙에 떠오른 동그랗고 새까만 공을 향해 온갖 회로와 선이 연결되어 기둥을 이루고 있고, 그 주변을 과거 베로니카가 만들었던 정비소의 잔여물이 장식하고 있다.
핵심에 다가가면 별의 도시에 들어와 있어도 쉽게 볼 수 없는 세계의 중심축이 얼핏 보인다.
모니터를 향해 다가가면 바닥과 벽이 점점 투명해지며 별의 도시 전체를 선명히 둘러볼 수 있게 된다. 시스템 관리 장치에 손을 올리면 온갖 우주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건 세계의 계약자인 인성이와 그의 가디언인 캐시, 라스, 하미아, 네 사람뿐이다.
계단 반대편에 있는 문을 나서면 복도가 나온다. 복도에는 세 사람의 방문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세 사람의 방은 처음엔 살풍경했으나 우리를 포함한 관리자들의 지인이 다양한 물건을 대리 구매하거나 선물하면서 꽤나 사람이 사는 방다워졌다.방까지 전부 둘러본 후 많은 키메라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저희 힘으로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서 살펴보니까 조금 안심이 돼. 풍경만 두고 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기도 하고. 상상과 달리 주위가 그리 어둡지 않은데다, 식물도 생각보다 많아.”
슈카를 향해 인하가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웬만한 식물은 여기에서 자리 잡지도 자라나지도 못하지만, 세계수의 힘을 받고 생겨난 식물은 다르다. 평범한 대지보다 별의 도시에서 잘 적응하는 식물도 많았다.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 쉬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일해야 하는 폐쇄 기간에 대한 걱정은 커졌지만.”
라이라가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건 다들 동의하는 바였다.
“폐쇄 기간은 많이 겪은 우리도 아직 힘들고 피곤해.”
캐시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 피곤한 수준에 그쳐. 여기에서는 마력, 육체, 정신적 피로가 잘 쌓이지 않고, 쌓이더라도 금방 회복되니까.”
특히 특별한 눈을 계약의 증표로 받은 인성이는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들었다.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으니까…….”
하미아가 수줍게 웃으며 라이라의 손을 잡았다. 그건 그렇다며 라이라도 다른 키메라들도 기뻐하며 웃었다.
이내 라이라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물을 삼키고 있는지 눈가와 입꼬리가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은하 언니, 정말 감사해요.”
그 말에 다른 키메라들도 나를 돌아보았다. 첸이 귀걸이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숙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여기에 올 수 있게 될지 몰랐습니다.”
“난 솔직히 훈련하면서도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여기에 오기는 어려울 거라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
“저도요. 정말 감사드려요, 은하 님.”
“나, 나도…….”
첸, 루니라, 슈카 등 나와 신뢰 관계가 깊었던 키메라들에 이어 케르베로스 막내 베이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줄곧 주위를 감회 깊은 눈으로 돌아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소비토도 어딘지 허망한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넘치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드문드문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깊은 존중을 담아 나를 대한 건, 존대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소비토는 변할 수 있을까.
소비토만이 아니라 키메라들 모두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별의 귀걸이를 첸 일행에게 전한 다음 날, 나는 드디어 나지스 일행을 만났다.
드디어 부적의 마지막 재료를 모을 날이 찾아왔다!
“미안. 기다리게 했네. 일이 있어서 잠깐 멀리 갔다 왔거든.”
“이게 새로운 부적인가요?”
“예전부터 이쪽 솜씨가 탁월하다 듣긴 했지만, 용케 그 정도 재료로 이 정도의 물건을 만들어 냈네.”
‘그 정도?’
나는 나지스에게 부적이 내장된 오른손을 잡힌 채로 유펠라, 디나와 시선을 나누었다. ‘그 정도’ 라고 평가 절하할 만한 재료가 아니었을 텐데?
‘쓰인 재료보다 더 대단한 아이템을 완성해 냈다……는 뜻이라 해도.’
역시 신의 감각은 사람과는 많이 다른가 보다. 유펠라는 사람에서 정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우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 감각에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가요.”
의아한 표정으로 내 부적을 바라보며 유펠라가 물었다.
“혹시 그분은 그쪽 분야에서도 유명한가요?”
나지스가 내 손을 놓고는 피식 웃었다.
“이쪽 솜씨에 대해선 나도 루키아랑 하르펜한테 들은 거야. 그와 같은 세계를 살면서 접점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걸? 장인을 직업으로 삼더라도 친한 사람한테 주는 선물이 아니면 세계 바깥에 물건을 내놓지 않으니까. 세계 안에서도 개인적인 의뢰는 잘 안 받기도 하고.”
“하긴, 성진이가 그럴 성격이 아니죠.”
세계 안에서 돈을 벌기 위해 물건을 만들고 있지만, 나랑 비슷하게 그걸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세계 바깥에서 돈을 벌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물건을 내보이지 않으리라. 기껏해야 자기가 쓰는 정도겠지.
“두 분이 칭찬할 정도라는 건 대단하다는 건데……. 그렇다 해도 은하의 부적밖에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잘 안 가네요.”
“루키아랑 하르펜이 자주 쓰는 펜이랑 스틱, 그것도 성진이가 만든 거야.”
“헉! 그게요?”
경악하는 유펠라와 디나를 보며 나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떻게 생겼어요?”
“루키아 님이 가진 펜은 만년필이에요. 루키아 님이 쓰는 마법에 따라 펜 커버랑 촉에 달린 보석 색깔이 달라져요. 특수한 잉크랑 맞추면 더 좋은 효과를 내요.”
루키아는 기록자. 그 이명에 맞춰 무수히 많은 것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그에 맞춘 아이템인가.
“하르펜 선생님이 쓰는 지팡이는 손에 쥐면 여유가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짧아요. 전체적으로 하얗고 끝에 작은 녹색 보석이 붙어 있어요.”
디나가 엄지와 검지를 오므려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동전 정도의 크기인가.
나지스가 웃으며 첨언했다.
“그 지팡이는 형태가 두 가지야. 평소의 형태는 치료용이고, 두 번째 형태는 전투용이야. 두 번째 형태는 길이는 이 정도에, 끝이 휘어 있고, 소드 스틱이야.”
이어진 말에 디나와 유펠라가 또 한 번 놀랐다.
“하르펜 님은 싸울 때 검을 드시나요? 처음 알았어요.”
나지스가 애매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오래 배웠으니까 잘 쓰긴 쓰는데 주 무기는 아니야. 원거리 형이라 굳이 따지자면 활을 더 잘 써. 진심으로 싸울 땐 그런 무기를 쓰기보다 마법을 퍼부어.”
“그런데 왜 전투형이 검이에요?”
“루키아가 검술이 특기라 따라 하려고…….”
대답하며 나지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그만 납득하고 말았다.
“아…….”
“그리고 여차할 땐 소드 스틱에 자기 마법을 담아 루키아한테 넘겨주려고 그렇게 의뢰했다더라. 둘이 마법 상성이 잘 맞기도 하고.”
“으음…….”
우리 모두가 한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 신은 루키아한테 진심이구나. 그리고 루키아가 검을 잘 쓴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잡담은 그쯤 하고 우리는 슬슬 테리시에 향하기 위해 태세를 갖췄다. 디나는 가디언 하리의 가호를 몸에 둘둘 둘렀고, 나는 머리에 쓴 왕관을 확인하고는 부적을 발동해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세 사람이 태세를 정비하는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유펠라가 유심히 시선을 움직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 부적을 발동시키는 걸 보니까 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트로 장비를 맞춘 게 보고 싶어져서.”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딱히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와 성진이는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마력 내구성이 강한 것들로 갖추었으니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 부서져 남아나질 않는다.
도서관에 올 때는 평소보다 더 신경 쓴다. 특히 최근엔 테리시에 향할 것에 대비해 방어용 전투복을 갖춰 입고 다녔다. 하지만 확실히 왕관이나 부적에 비하면 힘이 부족하긴 하다.
그러고 보면 나지스, 유펠라, 디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특수한 장비를 갖춰 입고 있다. 적어도 우리 세계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장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다. 작은 장신구 하나마저 성진이가 만든 부적과 엇비슷한 힘을 지녔다.
“안타깝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저희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이에요.”
“원래 장비는 자기 실력보다 한 단계 높은 정도가 딱 좋다는데. 아는 장인을 소개시켜 줄까?”
“물건을 살 수 있을지는 둘째 쳐도 어떤 실력자실지 궁금하긴 하네요.”
신 혹은 신의 보좌관에게 물건을 납품하는 장인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진이는 아직 원래의 실력을 되찾지 못했고…….
‘그런데……이전의 실력을 되찾는 게 너무 늦지 않나? 벌써 28살인데. 으음, 환생자에 대한 건 읽을 수 없는 게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 세계가 너무 폐쇄적이라서 실력을 되찾는 데 제약이 있다거나?’
안 그래도 우리 세계는 강자가 너무 많아 빠르게 무너졌다는 가설이 있다.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옆에서 들려온 나지스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내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다들 준비가 된 것 같네. 그럼 슬슬 가보자.”
“네!”
유펠라가 나와 디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지스의 발밑으로 마력이 퍼지며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도서관의 정원과 연결된 어느 계단 한가운데로 이동되었다. 강처럼 보였던 빛무리가 끝없이 넓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나는 군데군데 푸른 별이 박힌 새하얀 빛의 바다에 시선을 빼앗겼다.
“테리시의 힘은 거칠어. 힘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테니,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내려가자.”
디나는 지금 하는 일 관계상 테리시에 잠수한 적은 없어도 몇 번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건 나를 위한 배려였다. 나는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앞장서 걷는 나지스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확실히 나를 배려할 만했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바다는 멀리서 볼 땐 아름답고 잔잔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힘의 변화가 빠르고 거칠었다.
하긴, 이것은 ‘바다’라 불린다. 지구의 바다도 멀리서 보면 온화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일어나는 파도와 바다를 움직이는 해류는 강대하고 강인하며 아주 많은 생물을 위협한다.
하물며 테리시를 이루는 건 세계의 경계선에 고이는 세계의 힘. 이 정도 위험은 상정 범위였다.
머지않아 계단이 끊겼다. 어딜 보아도 흰 빛으로 가득해 착각하기 쉬웠지만 바다까지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유펠라가 테리시 지도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자료를 얼마만큼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가는 건 처음일 테니 일단 생각나는 대로 상세히 설명해 줄게. 테리시가 연결된 여러 세계의 틈새를 메우는 바다인 건 당연히 알 테고, 지금 향하는 하얀 테리시는 우리 세계에 걸쳐 있는 바다야. 테리시의 색깔과 힘은 세계의 특징 혹은 주신의 힘에 의해 달라져.”
색은 루키아를 닮았지만 바다에 담긴 힘은……나지스를 더 닮았다. 유펠라가 하얀 바다의 지도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가리켰다.
“하늘 구역의 입구는 여기야. 이 좌표에서 1km 정도 내려가면 나와.”
하늘은 테리시에서 비교적 얕은 위치에 있다. 깊은 곳일수록 힘이 강하다고 들었다.
“여기 입구는 좀 거칠어서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아. 들어가기 전에 성물의 축복을 부르고, 몸에 문장의 가호를 새기도록 해.”
문장의 가호는 자신에게 쓰는 것이라면 비교적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 쳐도 가호를 펼쳐야 할 정도라니, 괜히 부적이 완성된 후에 가라고들 말한 게 아니었다.
“주황색 수정은 보통 붉은색 바다와의 경계선에서 생기는데, 찾기가 좀 어렵다고 하더라. 다른 수정에 비해 생성되는 숫자가 적대.”
“걱정 마. 내가 안내할 테니까.”
“네! 나지스 님이 따라와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활기차게 인사한 유펠라가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전대 주신이신 만큼 세계의 힘에 민감하셔. 설명하다 보니 찾기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나지스 님이 있으면 금방 찾을 수 있어.”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나지스는 내 적응 상태를 확인하며 드문드문 공간마법을 썼다. 그 결과 30분에 걸쳐 테리시가 손에 닿는 곳에 도착했다.
유펠라가 말한 대로 하늘 지점과 통하는 해수면은 척 보기에도 거칠었다. 파도는 날카로우며 높았고, 그만큼 힘의 유속이 무척 빨랐다. 나는 왕관이 품은 모든 축복을 발동시키고, 내 마법의 근원에 문장의 가호를 새겨 넣었다.
힘과 생명력을 강하게 증폭하며 굳건한 방어력으로 생명을 지키는 문장의 가호. 근원을 통해 퍼지는 마력 전부에 문장의 힘이 덧씌워졌다. 왕관에도, 부적에도 문장의 힘이 깊숙이 깃들었다.
“은하 님의 가호는 이런 느낌이로군요. 강하고 온화한 생명의 힘이 흘러넘쳐서 무척 아름다워요.”
디나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한편 유펠라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항상 활기차게 내게 무언가를 전했던 평소와 달리 경악한 눈으로, 놀라다 못해 긴장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유펠라가 떨리는 손으로 나지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유펠라 님?”
“아, 응, 응. 잠깐만, 그……. 나지스 님…….”
유펠라는 디나의 의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며 어딘지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지스를 불렀다. 나지스는 자신의 소매를 잡은 유펠라의 손을 감싸듯 쥐며 그녀를 달랬다.
“유펠라, 진정하렴.”
“하, 하지만…….”
“괜찮아. 알고 있어.”
그 말을 듣고서야 유펠라의 표정과 감정이 겨우 조금 가라앉았다.
나와 디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저기…….”
“미안하다. 네 문장이 우리가 느끼기엔 굉장히 ‘특별’하거든.”
나지스가 쓴웃음과 함께 그런 말을 했다. 동요하던 유펠라는 곧 완전히 진정된 표정으로 나지스의 말에 동조했다.
“미안, 깜짝 놀랐지? 나지스 님 말대로야. 네가 특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특별할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어.”
불안은 가라앉았지만 의문은 커졌다. 그러나 답을 아는 두 사람은 우리의 의문을 외면했다.
“미안하지만, 자세히 알려 줄 순 없어. 그게 ‘규칙’이거든.”
“우리가 언급한 ‘특별함’은 굉장히 프라이버시한 정보야. 타인한테는 더더욱 알려 줄 수 없고, 본인은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겨. 하긴, 말해도 소용없겠지만.”
유펠라는 자신의 입술 앞에 검지를 교차해 ‘X’자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