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60
“말할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을 거야.”
세계의 심연에 접근하면서 그런 일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랬기에 나도 디나도 납득하며 의문을 일단 가슴에 묻었다.
“어쨌거나 그 정도면 두 사람 다 바다에 들어가도 문제없겠다.”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며 나지스와 유펠라가 다시금 나와 디나를 살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두 사람 다 나랑 손을 잡고 가자.”
유펠라가 나와 디나 사이에 들어와 우리의 손을 잡았다. 유펠라의 힘이 우리를 감싼 걸 확인한 나지스가 손바닥에 훅 입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빛으로 이루어진 나무 덩굴이 우리 손목에 묶였다.
“자, 이제부턴 한눈팔지 말고 내 뒤를 따라오렴.”
나지스가 발로 수면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나무 덩굴이 우리 주위를 둥글게 감싸며 자라났다.
나지스의 덩굴과 함께 우리는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추락했다. 위에서 볼 땐 불투명하고 새하얬으나, 잠수하고 보니 물속처럼 반투명하여 꽤 멀리까지 잘 보였다.
문장과 가호를 정말로 쓸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유펠라의 바람과 나지스의 덩굴이 우리를 꼼꼼하게 지켰다.
“우선은 하늘 지점으로 잠수하자.”
테리시의 해류는 거칠고 복잡해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억지로 거스르기 어렵고, 세계의 안정을 위해 거슬러서도 안 된다. 때문에 단순히 아래로 잠수하는 것만으로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유펠라와 나지스는 하늘로 향하는 길을 안다. 나와 디나는 두 사람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강대한 바다의 기운에 한순간도 감각을 떼어 놓지 못했다. 기운의 흐름은 몇 초마다 크게 달라졌고, 너무도 복잡해서 도무지 원리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지스는 몇 초 앞의 변화를 읽어 내며 우리를 안내했다. 해류와 정면으로 부딪치면 나지스와 유펠라의 힘이라 해도 깎이고 깨졌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지스와 유펠라도 웬만해선 억지로 힘을 유지하려 들지 않았다.
내 힘은 저 해류를 막아 낼 수 있을까. 나 혼자서 이 바닷속을 얼마나 돌아다닐 수 있을까.
다양한 흐름과 충돌과 변화로 인해 위협적인 것과 별개로 테리시 안 경관은 무척 아름다웠다. 곳곳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 바다 안을 떠다니거나 해류 한가운데에 고정되어 있는 식물, 바다를 헤엄치는 생물들.
지구의 해양 생물과 닮은 것들 반, 본 적도 없는 생김새의 것들이 반이었다. 세계의 틈새에 사는 생물들인 만큼 하나하나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관련 자료에는 바다의 힘과 마찬가지로 깊은 곳에 사는 생물일수록 강하다고 적혀 있었다.
생물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긴커녕 길을 열며 피해 다녔다. 신인 나지스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조금 아쉬웠지만 저들의 성향이 어떤지 모르니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계속 긴장했으나 하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다행히 흐름이 그리 위험하지 않네.”
“그런가요…….”
디나는 표정이 조금 창백했다. 직접적인 충격을 받거나 한 건 아니지만, 강대한 힘에 질린 기색이었다. 디나에게 왕관의 축복을 나눠주자, 디나가 생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돌려줬다.
하늘 지점은 이전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하늘색 물결에 드문드문 하얀 물결이 구름처럼 모양을 바꾸며 섞였다.
자료에서 경관이 행성의 하늘을 닮아 이곳을 ‘하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확실히 닮긴 닮았다. 그 외에도 때때로 먹구름 같은 잿빛이 끼거나, 비 같은 하얀 점이 연속해서 생기거나, 번개 같이 노란 줄기가 자라나기도 한단다.
“주황색 수정은……이 근처에는 없네.”
나지스가 꽃과 이파리를 퍼트려 수정을 찾는 것을 보며 나는 읽었던 자료의 내용과 함께 이번에는 성진이가 했던 부가 설명도 떠올렸다.
테리시는 세계의 틈새를 메우며 세계를 끝없이 잇고 있다고는 하나, 어느 세계에 접했는지에 따라 ‘갈래’, 즉 색과 성향이 다르다. 성향마다 환경이 천차만별이고, 구할 수 있는 소재도 제각각이다. 그런 만큼 자료가 굉장히 방대했다.
그래서 테리시와 관련된 자료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우리 세계에 접한 갈래나 하늘 지점, 주황색 수정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럭저럭 읽었다. 특히 수정에 관해선 성진이에게 보다 자세한 정보를 구했다.
그에 의하면 주황색 수정은 낮과 저녁 사이에 해당하는 힘을 지녔다. 성진이의 힘과 조금 닮았으나, 저녁에 가까운 성진이의 힘과 달리, 보다 낮에 가까운 힘을 지녔단다. 가장 두드러지는 속성은 ‘불’.
‘성진이와 닮은 힘이라면 혹시 나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령과 신조차 다 헤아릴 수 없는 장소를 내가 얼마나 감지할 수 있을지 알고 싶다. 대상이 성진이와 비슷한 힘을 지녔다면 그나마 찾기 쉬울 것 같다. 상극인 만큼 본능을 자극당할 테니까.
내 의지에 반응하여 성물의 축복이 조금 강해졌다. 세계의 경계에 있는 힘이든 뭐든 결국 모든 것은 자연의 한 종류. 하물며 지금 우리가 있는 바다는 우리 세계와 통하는 바다. 나는 그 힘과 교감하며 의식을 퍼트렸다. 별 조각이 반짝반짝 빛나며 테리시의 물결에 녹았다.
‘이 바다에도 생물이 있어. 그렇다면 당연히 꿈도 있지. 테리시의 꿈이라…….’
감지를 한다면 현실보다는 꿈에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꿈에 남은 과거의 흔적을 통해. 현실보다 꿈에서 한층 강해지는 나에게 그건 이제 당연하고도 평범한 일이었다.
별 조각을 통해 바다의 꿈이 내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와 함께 점점 감지 영역이 넓어졌다. 낮의 힘이, 생명과 불의 힘이 조금 더 강한 황혼의 힘. 주황색. 주황색 수정…….
「───…….」
목소리가……들린 것 같았다.
나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별의 힘으로 가득 차서일까. 어쩐지 주위가 눈부시게 느껴졌다.
“하나 찾았다.”
그때 나지스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나지스가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바위에 있는지 다행히 움직이지 않아. 내가 불러오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건 은하 네가 직접 채석해야 의미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멍했던 정신을 되돌리며 나는 대답했다.
“앗, 네.”
“그래서? 두 번째 건 어디 있니?”
“어…….”
“찾은 것 아니었어?”
나는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떠올리며 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그럴듯한 걸 느끼긴 했어요.”
“움직이니?”
어째 나보다 나지스가 내 감각을 더 믿는 기색이었다. 나는 묘한 감정을 안으면서 다시 감각을 집중했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찾은 무언가도 움직이지 않고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
“그럼 우선 네가 찾은 것에부터 접근해보자. 은하 넌 익숙하지 않아서 자칫 기운의 흔적을 놓칠 수도 있으니.”
“네.”
한차례 주위를 둘러본 나지스가 손바닥에 꽃을 소환했다. 커다란 하얀 꽃에서 일어난 빛이 주위의 파도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문득 나지스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꽃과 빛을 통해 그의 의지가 전해진다.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통하는 해류. 그것들을 연결해 이은 지도가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장 빠르게 향할 수 있는 급속 해류가 여기로 다가오고 있다!
화악──.
우리를 감싼 덩굴이 좀 더 강한 힘을 발했고, 유펠라가 나와 디나의 손을 꽉 잡았다. 하리와 내 왕관의 가호도 한층 강해졌다.
나지스와 유펠라가 방어해 준 덕분에 충격은 없었다. 해류는 우리를 실은 채 빠르게 흘러갔고, 풍경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알려 준 지도의 어느 정도 지점에서 방향을 바꿔야 할지 알겠니?”
“음……문이!”
감으로 찍기엔 감각이 애매한 데다, 이런 분석은 문이가 잘한다. 곧 문이가 내 감각에 느껴진 수정의 거리감을 분석해 해류의 어느 지점에 표시를 새겼다. 나지스는 문이가 표시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덩굴을 움직여 다시 강한 해류가 없는 고요한 지점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다만 여기서부턴 내가 방향을 가리킬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한테도 느껴져. 가깝네.”
나지스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자 머지않아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 같은 바위에 박혀 있는 주황색 수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정 바위도 그렇지만 저 주황색 수정도 상당한 힘을 지녔다. 둘 다 내 왕관 이상의 자연의 힘과 마력을 갖췄다.
저 재료는 내가 직접 채석해야 의미가 있다. 긴장하며 수정을 향해 다가가는 내게 나지스가 조언했다.
“성물과 함께 자연과 교감하렴. 그럼 어떻게 채석해야 할지 느껴질 거야.”
“네. 감사합니다.”
나는 문이의 모니터에 손을 넣어 『만물상』에서 보석 채석용 칼을 꺼내 들었다.
성큼성큼 걸어 보석에 손을 가져갔다. 왕관의 가호와 함께 수정에 내 의지를 전했다.
주황색 보석이 약하게 빛을 발했다. 내 바람에 긍정하는 의지를 느꼈다. 나는 칼을 든 오른손 대신 장갑만 낀 왼손을 뻗어 주황색 수정의 뿌리 부분을 붙잡았다. 손에 힘을 쥔 순간 수정 클러스터가 저절로 바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엇…….”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서 놀랐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일행의 곁에 돌아갔다. 나지스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잘……한 건가요? 생각보다 쉬워서 다행이긴 하지만요.”
“잘한 거야! 테리시에서 재료를 구할 땐 처음이 아니더라도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아.”
유펠라도 박수를 쳐 내게 칭찬의 말을 보냈다.
다섯 개 정도의 길쭉한 기둥과 자잘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주황색 수정 클러스터가 내 손에서 온화하게 빛났다. 성취감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곧바로 다음 수정을 찾아 출발했다. 나지스가 감지한 수정은 여기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다른 해류를 타고 왔던 방향을 거슬렀다.
머지않아 수중 한가운데 쌓인 고운 모래 사이에 삐죽 솟아나 있는 주황색 수정을 찾아냈다. 조금 전 찾은 것보다 좀 더 붉은 빛이 짙었다. 이번 수정도 손을 대자 쉽게 빠져나왔다. 문이의 모니터 안에 두 개의 수정 원석이 쌓였다.
그 사이 주위를 둘러보던 나지스가 또다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찾았다.”
역시 신, 찾는 게 빨랐다. 이번엔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지만, 수정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탓에 나지스가 조금 힘을 썼다. 우리는 해류보다 빠른 속도로 수정을 따라잡았다.
“어…….”
문제는 수정이 사람의 몸통만 한 물고기 등 위에 자라나 있다는 점이었다. 당황해서 다른 걸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나지스가 꽃잎을 퍼트려 물고기를 불렀다.
“은하야, 성진이가 준 파란색 주머니에서 보석을 하나 꺼내렴.”
“앗, 네.”
나는 부적의 재료를 찾는 걸 도와주는 사람한테 주라며 성진이에게 받았던 주머니에서 보석을 하나 꺼냈다. 우연히도 물고기가 등에 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밝은 주황빛 보석이었다.
“등에 진 주황색 수정이 필요해서 그런데, 이 아이에게 넘겨줄 수 없겠니? 대신 이 아이가 손에 쥔 걸 줄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물고기에게 보석을 내보였다. 한동안 지느러미를 움직이던 물고기가 내게 등을 내보였다. 나지스가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다고 하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까와 같은 요령으로 물고기의 등에 달린 주황색 수정을 떼어 내고, 대신 성진이가 준 보석을 그 자리에 올렸다.
빛을 발한 주황색 보석이 떼어 내기 전의 수정처럼 물고기의 몸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나지스를 향해 눈을 끔뻑인 물고기가 다시 유유히 바닷속을 헤엄쳐 떠나갔다.
“…….”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에 쥔 세 번째 보석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요. 나지스 님 덕분이에요. 함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설마 주황색 수정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나지스 님이 같이 와주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게요. 바쁜 와중에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나에 이어 유펠라와 디나도 나지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뭘. 자, 이제 돌아가자.”
몇 걸음 움직였을 때였다. 왕관에 무언가가 공명했다. 그것은 반짝반짝 오로라 같은 빛을 뿌리며 나를 불렀다.
“음?”
왕관이 무언가에 공명하는 걸 느꼈는지 유펠라와 나지스도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빛을 가리키며 세 사람을 돌아보자, 그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원석과 식물이 가득 자라난 부유 바위에 다가갔다. 빛을 낸 것은 손바닥만 한 하늘색 조개와 조개 안에 든 오로라 빛 광택의 하얀 진주였다.
“와…….”
하늘과 오로라를 고스란히 옮겨 담은 듯한 조개와 진주는 무척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조개가 내게 인사하듯 껍질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내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개에서 진주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으악?”
진주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던 조개 안에서 10개의 진주알이 떨어져 내렸다. 이내 조개 안이 텅 비었다. 조개는 다시 한번 인사하듯 껍질을 여러 번 열었다 닫은 후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당황하며 조개와 진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굳건한 조개의 의지를 느끼고는 손을 뻗어 조개의 껍질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조개에서 오로라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가라앉았다. 잠시간 자리에 서서 조개가 완전히 반응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다 세 사람의 곁에 돌아왔다.
나는 얼떨떨하고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세 사람에게 진주를 내보였다.
“진주를……받았어요. 귀한 것 같은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네요.”
감탄한 눈으로 진주를 바라보던 유펠라가 손뼉을 쳤다.
“이야, 역시 은하야! 이거 진짜 귀한 건데. 역시 사랑받는구나~.”
“자연한테요?”
“자각이 있었구나?”
“음, 조금은요. 여러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기도 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세계의 인정을 받은 성물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유펠라가 어딘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이 진주는 어떻게 쓰면 되나요?”
턱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나지스가 제시했다.
“일단 하나는 성진이한테 줘. 부적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나머지는 네가 가공해서 액세서리로 써도 좋고, 아이템에 넣어도 좋고, 근원이나 마법에 넣어 마법을 진화시켜도 좋고, 영혼의 문장에 끼워 넣어 문장을 보다 능숙하게 다루는 걸 도와주는 보조 장치로 써도 좋고, 영혼에 장식해도 좋고, 씹어 먹으면 몸의 보양에 좋고.”
“음? 네?”
술술 흘러나오는 말의 내용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왕관의 가운데 보석이 빠진 자리를 대신해도 괜찮겠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대단한 물건인 건 알겠어요. 이거 이름이 뭔가요? 어, 그리고, 지닌 고유 힘부터 알고 싶어요.”
나지스가 다정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조개는 ‘겨울 하늘 조개’야. 그 진주는 ‘하늘의 총명’ 내지 ‘오로라 진주’라고 불려.”
“두 번째 이름은 보이는 그대로네요.”
하얀 진주는 각도를 바꿀 때마다 오로라를 닮은 광택이 은은히 표면에 나타난다.
“특징에서 이름을 따오는 경우는 흔하니까. 하물며 고유 이름도 아니고 개체명이잖아.”
“그렇긴 하죠. 생각해 보니 전 남 말할 처지가 아니네요.”
별의 왕관, 은하의 지팡이, 별의 귀걸이, 별하늘의 열쇠 등등…….
정말로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하늘의 총명’은 소재로서의 대단함을 표현하다 보니 붙은 이름이야. 대부분의 재료에 어울리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을 조화시키고, 온갖 힘이나 물건을 진화시켜 한층 강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고, 특수한 기술의 보조 장치나 제어 장치 역할을 해.”
이어진 이야기는 설명식으로 좀 더 풀어 말했지만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와 요지가 거의 같았다.
“하나의 물건이 그만큼 다양한 역할을 하나요?”
“이것도 유명한 특징만 요약해서 말한 거야. 자세한 건 자료를 찾아 확인해보렴.”
어쨌거나 무척 도움이 되는 소재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방금 만난 조개에게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진주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좋은 재료인 만큼 구하는 게 아주 힘든 희귀 재료야. 겨울 하늘 조개는 테리시에서만 사는 데다, 개체가 적고, 여러 구역을 이동해 다니고, 자기가 맘에 든 상대한테만 진주를 줘. 심지어 진주는 50년에 한 개밖에 생기지 않아.”
“헉.”
내가 오늘 운이 엄청 좋았구나. 심지어 10개? 500년분이다.
조개에게 조금 더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할 걸 그랬다. 소중히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침을 삼켰다.
“겨울 하늘 조개는 수명이 굉장히 긴가 보네요?”
“테리시에 사는 애들은 장수종이 많아. 겨울 하늘 조개는 평균 만 년을 살아.”
“엄청나네요.”
“그렇지도 않아.”
조개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나지스는 가볍게 대답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테리시의 수정 3개에 오로라 진주 10개. 아주 좋은 수확을 얻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나지스의 안내를 따라 테리시를 나왔다. 도서관에 돌아와 함께 수정을 찾아준 세 사람에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 유펠라와 디나에게 파란색 주머니의 보석을 하나씩 건네고, 나지스에게는 초록색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 안을 확인한 나지스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가 허공에서 작은 보석 조각을 몇 개 꺼내 내게 주었다.
“거스름돈이야. 성진이에게 건네주도록 해.”
모두 활력 있는 자연의 힘이 채워져 있었다. 몇 개에서는 나지스의 힘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유펠라가 어딘지 의아한 표정으로 나지스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뿐, 곧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만 일이 있어서 가볼게.”
“조만간 또 뵈어요!”
“또 만나! 그리고 조만간 아까 이야기 나눴던 대로 좋은 장인을 소개해 줄게!”
“감사합니다. 다음에 봬요.”
따로 할 일이 있다는 세 사람과 헤어진 나는 도서관의 자료 안내실에서 ‘겨울 하늘 조개’를 검색해 보았다.
결과로 뜬 여러 자료 중 가장 눈에 띈 건 라는 제목의 자료였다. 겨울 하늘 조개는 ‘하늘 조개’라는 부류의 한 종류였던 모양이다. 하늘 조개는 모두 귀한 소재가 되는 보석을 품는다고 한다.
그날은 그 자료만 읽고 성진이에게 부적의 마지막 재료를 전하고자 집으로 돌아갔다.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라를 쓰다듬고 있는 성진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들뜬 듯한 미소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무질서하게 넘쳐흐르는 것이, 성진이답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적어도 나쁜 일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말을 걸자 성진이는 놀라기라도 했는지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것도 잠시, 기쁜 얼굴로 한껏 미소 짓다가 갑자기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굴리고는 평소와 비슷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평소의 성진이답지 않았다.
“왜 그래?”
“…….”
성진이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곧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한테는 말하는 게 좋겠지.”
꽤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느낀 나는 마음을 한 번 다잡고 성진이의 옆에 앉았다.
“…조금 전에 어렴풋이 내 영혼에서 위화감을 느꼈어.”
“위화감?”
“뭔가 싶어 영혼을 살피는데 뿌옇고 반투명한 실이 보였어.”
성진이는 물을 얇고 길게 뽑아내 그가 본 현상을 재현했다. 실은 여전히 어렴풋하게밖에 보이지 않는 노을색 영혼의 근원을 동그랗게 둘둘 말고는 어딘가 먼 곳으로 뻗어졌다. 그리고는 마치 떠나가는 것처럼 근원에 말린 부분부터 점차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영혼을 구속하는,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힘이라니. 이에 관해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어.”
그건…….
“피의 맹약의 흔적.”
“…….”
“오늘 처음으로 봤어. 금방 다시 보이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확실히 보였어.”
나는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전해지는 목소리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성진이가 맹약의 흔적을 본 건 짐작건대 내가 테리시를 헤매고 있을 때다. 내가 테리시에 잠긴 것과 그 현상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성물? 내 마법이 강해져서? 문장을 다룰 수 있게 돼서?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몸에 가호를 써서?
“갑자기 한순간이나마 보인 이유는 모르겠어. 가능성이 있는 건, 피의 맹약의 효과가 약해졌거나, 맹약을 성립하기 위해 필요했던 대가가 끝나가거나, 혹은, 상대가 가까이에 환생했거나…….”
감정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본능적으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그제야 감정과 생각이 몸을 따라왔다. 눈을 뜨겁게 달구는 눈물을 겨우 삼켰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한순간이나마 보였다는 건 앞으로 다시 보일 수도 있다는 거다.
다행이야.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그래도 이 엉킨 운명을, 영혼을, 인연을, 다시 조금씩이라도 풀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이 생겼다.
‘정말, 다행…….’
진심 어린 안도와 함께 나는 손바닥으로 좀 더 깊게 얼굴을 가렸다. 글썽거리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익숙하게 감정을 덧칠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기쁜 마음만은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변화가, 가능성이 생겨서 다행이야. 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번 일로 뭔가 새로 할 수 있는 게 생겼을까?”
어딘지 걱정스럽고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성진이는 잠시 후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 상대를 찾을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생긴 건 아니야. 다만 흔적이 보인 만큼 그 사람은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 연결된 세계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말대로다. 나는 네 바로 옆에 있다.
“그걸 전제로 방법을 생각해 볼 생각이야.”
나는 벅찬 감정을 또 한 번 덧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도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상대가 우리 세계에 있으면 천운인 거고, 웬만해서는 세계를 넘나들어야 할 테니.”
“응.”
“어쩌면…….”
조용히 귀를 기울였으나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는지 성진이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민에 잠겼다. 성진이가 그러는 동안 나도 난잡하게 흐트러진 감정과 생각을 정리했다.
좋은 일이다. 해결법조차 보이지 않던 일에 가능성이 생겼다. 벌써부터 피의 맹약이 해결된 이후에 대한 상상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른다. 기뻐하겠지. 틀림없이 울겠지. 아마도 싸우게 되겠지. 아주 많은 감정이 부딪치겠지. 너도, 나도.
가슴 벅찬 상상이나 지금은 그보다 무엇이 피의 맹약에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할 때다. 짚이는 게 너무 많은 만큼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 가호나 성물은 계속해서 사용할 거고, 테리시에도 언젠가 날을 정해 다시 찾아가 볼까. 적어도 혼자 테리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해지고 싶다.
그래, 강해지는 게 모든 것에 도움이 되는 건 틀림없다.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계속, 강해져야지.
‘후우…….’
긴장 때문인지 가슴이 한순간 서늘해졌다. 그러나 긴장감은 곧 즐거움과 기대에 먹혀 지워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성진이는 제 무릎에 앉아 있던 라라가 소파를 내려와 소파 옆에 놓여 있는 숨숨집에 들어갔을 때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화제는 달랐다.
“보아하니 오늘은 테리시에 갔다 온 모양이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순서가 밀려나 묻혀 있던 화제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에 잠시 놀랐으나,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