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65
“확인하였습니다. 이동하겠습니다.”
몸을 한 번 떤 요정이 이내 빛을 뿌려 이동마법을 발동했다. 몸이 훅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우리는 처음 보는 자료실 앞으로 이동했다.
내가 와본 적 없는 자료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래도 여기는 내게 출입 허가가 내려지지 않은, 신 정도의 인물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 같았다.
“원래 유은하 님은 이 자료실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이번엔 하르펜 라우드 님의 권한으로 특별히 한 번, 출입 허가가 내려졌습니다. 다만 자료는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네.”
나는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나는 이 세계의 인간이고, 하르펜은 우리 세계를 관리하는 나지스보다 한층 강한 신이자 마법 역사에 전설로 남은 의사. 아마 지금 내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하르펜 라우드일 것이다.
성진이가 나를 한 번 돌아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에 몸이 위축된 나를 대신해 성진이가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정은 성진이한테는 출입 허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성진이는 여기에 출입할 자격을 가지고 있나 보다.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우리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들어선 자료실은 무척 넓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정은 자료실 안을 슥 가로질러 우리를 계속 안내했다. 곧 우리는 자료실 안에 출입구가 있는 방으로 안내 되었다.
또 한 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와는 거리가 먼 기척이 피부에 와 닿았다. 내부는 책꽂이, 책상 등 도서관에 걸맞은 가구가 갖춰져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바닥, 천장, 벽 등에 식물이 자라나 있었다. 리브리의 특이한 자료실을 떠올리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 녹음으로 가득 찬 자료실의 풍경이 어딘지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나는 한순간 숨을 삼켰다.
책상 앞에 익숙한 인물과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굳은 얼굴로 나를 보는 유펠라와 디나,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지만 안타까운 감정만은 숨기지 못하는 나지스, 그리고…….
이내 나는 디나의 옆에 선 인물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내려 묶은 곧고 엷은 연두색 머리카락에 오로라 빛이 도는 은색 눈동자. 웃고 있는 표정이며 눈매가 무척 부드러웠다. 온화한 마력이 합쳐져 무척 상냥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대화를 통해 저자가 보이는 인상만큼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자가 아님을 안다. 하르펜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은하 님. 하르펜 라우드 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성진 님.”
“그래.”
이내 하르펜은 몇 걸음 우리에게 다가섰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을 텐데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진 님이 이미 간단히 설명하셨을 줄 알지만, 유은하 님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은하 님께서 응당 받으셔야 하는 권리입니다.”
대화를 하는 동안 하르펜의 얼굴에 새겨진 미소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곳곳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때문일까, 마치 정해진 행동을 수행하는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만, 은하 님과 나눌 대화와 성진 님과 나눌 대화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섞여 있는지라, 웬만하면 따로따로 나누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성진이는 인상을 한 번 쓴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성진이를 본 하르펜의 미소에 처음으로 생기라 할 만한 게 깃들었다.
“그럼 은하 님과 먼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마음대로. 단…….”
성진이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경고의 뜻을 읽은 하르펜이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당신이 타인에게 그토록 마음을 주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요. 저희에겐 그 정도의 감정은 나눠주지 않으셨잖습니까.”
“내 마음이니까. 이에 관해선 네가 더 잘 아는 거 아닌가?”
“그렇지요. 그래도 조금 섭섭하긴 합니다.”
전혀 섭섭해 보이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인 하르펜이 손을 뻗어 책상을 가리켰다.
“그럼 은하 님,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다른 분들은 죄송하지만 이야기를 나눌 동안 자리를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래.”
나지스와 성진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유펠라와 디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지나치는 순간 디나가 슬픔을 눌러 참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만 시선을 내렸고, 곧 이 열람실 안에는 나와 하르펜만 남게 되었다.
나는 하르펜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내 옆을 따라 걸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하르펜이 책상 위에 간식과 차를 소환했다. 그릇부터 찻물 색, 디저트의 모양까지, 하나같이 무척 예뻤다. 다만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서로의 지위와 사는 곳의 차이를 생각하면 어떤 재료를 썼는지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은하 님의 몸에 맞는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혹시 취향이 아니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요, 충분해요.”
관찰하는 것처럼 내 표정을 지긋이 바라보던 하르펜이 생긋 미소 지었다. 인상만은 정말이지 선량하기 그지없었다.
“이 세계에 찾아온 운명의 중심을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동시에 이런 일로 마주하게 되어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나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환생한 세계를 관리하는 생명의 신, 하르펜 라우드입니다.”
‘생명’의 신.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는 직함이었다.
“제 역할을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직함에서 어느 정도 예측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네.”
얌전히 대답하는 나를 다시금 가만히 바라보던 하르펜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은하 님이 병에 걸린 건, 안타깝지만 세계가 예측한 운명은 아닙니다.”
“예측한 운명……인가요.”
하르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가 운명을 어떻게 지정하는지는 세계에 따라 다릅니다만, 이 세계는 운명의 길을 정확히 그어놓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환생자나 초월자 등, 예외적인 인물의 운명이 나아갈 길은 그 세계의 주신조차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
“이 세계에서 운명은 태어난 생명이 지닌 가능성입니다. 중요한 운명은 그림을 그려 놓지만 세세하게 조종하지는 않습니다.”
“…….”
“이 세계는 그렇습니다.”
뭔가……애매한 말투였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며, 그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궁금하면 파헤쳐 보라는 것처럼.
하지만 신이 숨기는 이야기다. 나는 구태여 깊게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제 병은 뭔가 운명이 측정해낼 수 없는 병……같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걸린 ‘영육 괴리 병’은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강한 영혼이 육체를 침식하면서 생기는 병. 운명의 주인이 세계의 예측과 인지를 뛰어넘었을 때 생기는 병입니다.”
“…….”
“참고로 저희 세계에서 이 병에 걸린 건 당신을 포함해 3명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와 프라베리히 2세 외에도 5명 정도가 이 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르펜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명은 그렇습니다만, 다른 4명은 아닙니다. 전생의 업에 짓눌렸거나, 어떤 오류에 운 없이 걸렸거나, 타인에 의해 피해를 입었거나. 증상이 많이 닮았을 뿐 다른 병입니다. 누가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그들이라고 해서 과거의 인물이 걸린 병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시선을 내렸다.
“우선 은하 님께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병에 걸린 것과 무슨 관련이 있으신가요?”
하르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는……공교롭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바로 했다.
“영혼에 걸맞은 육체를 입었다면 걸리지 않았을 병이니까요.”
하르펜이 담담히 설명을 이었다.
“영혼은 세계에 새겨진 특정 시스템을 따라서 갈 길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모든 생명에게 일일이 영혼과 육체를 골라 붙여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명을 담당하고, 루키아는 세계의 모든 기록을 읽거나 새로 써갑니다.”
“…….”
“그러니 생명의 탄생은 저희의 관리하에 있습니다. 세계가 시스템을 운용하고, 제가 시스템을 조정하며 관리하고, 루키아는 그를 통해 세계를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합니다.”
“…….”
“하물며 중요한 생명은 탄생하기 전 확인 절차를 거칩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중요한 생명을 판가름하는 기준은……첫 번째는 영혼의 특수함입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특수함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이 탄생한 순간 만들어진 운명의 특수함이며, 네 번째는 예기치 못하게 분기점에 접촉하여 중요한 운명에 닿을 것이리라 관측된 이들입니다. 대개는 이 범주를 통해 중요한 생명이라 판단 내리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반드시 제 눈으로 한 번은 확인합니다.”
하르펜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감정이 옅어 어딘지 무미건조했다. 처음엔 그랬었는데, 이어질수록 목소리가 무뚝뚝하고 냉정해졌다. 그런 성격이라서라기보다는……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처럼 무미건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의 탄생은 물론 저희 모두가 확인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만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상성, 육체와 영혼의 재능, 모두 확인하고 문제없다는 판단하에 당신의 영혼을 현세에 보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먹에 꽉 힘을 줬다.
“문제, 없다고…….”
“……죄송합니다.”
하르펜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평가와 달리 상당히 진심으로 보였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째서, 그렇게 판단했나요?”
테이블 위에 올린 양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나는 그런 내 손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제 육체는, 약한 편이죠…? 그런데, 왜…….”
하르펜은 잠깐의 간격을 둔 뒤 입을 열었다.
“유은하 님의 육체는 객관적으로 약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마법적 재능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만, 신체 능력도 육체의 마법 적성도 평균보다 위입니다.”
“…그런가요.”
“저희가 간과한 것은……당신의 영혼입니다, 유은하 님.”
약간 시선을 내리고 있던 나는 그 말에 다시 하르펜을 마주 보았다.
“영혼을 육체로 이끄는 데 첫 번째로 우선시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상성입니다. 상성이라는 게 반드시 마법 속성과 연결되지 않는지라 가끔 강인하 님 같은 경우가 생기기는 하지만요.”
인하는 마법적 재능과 육체적 재능의 차이에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결국 무사히 벽을 돌파하고 강해졌다.
“영혼과 육체의 상성이 좋아야 영혼이 무사히 육체에 정착해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육체가 오래 건강할 수 있고, 사고를 빠르게 이어갈 수 있으며, 힘을 마음이 가는 대로 끌어낼 수 있습니다.”
“…….”
“그 육체는 은하 님의 영혼과 가장 상성이 좋은 육체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상정한 것보다, 확인한 것보다, 당신의 영혼은 더욱 특수하고 강했습니다.”
“…….”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것……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나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린 손을 이번엔 꽉……모아 쥐었다.
“신이라고 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나 보네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혹은 알아보더라도 타협해야 할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프라베리히 2세가 그러했다고 나지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조금 놀랐으나 그뿐이었다. 동정하기에 그자는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보다는 ‘만약에’, 또 한 번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만약 상성이 맞는 ‘유은하’의 육체에 비해 이 영혼이 너무 강하다는 걸 신들이 인식했더라면,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유은하가 아닌 다른 육체를 빌려 태어났을까? 상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니 유은하의 육체에 뭔가 좀 더 힘을 더하고 관리해줬을까?
영육 괴리 병은 희귀한 병이긴 해도 여러 차원에서 발생 중인 병이다. 즉 신들이 육체와 영혼이 가진 힘의 차이를, 괴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의 인지와 예상조차 뛰어넘어 성장하는 영혼이, 그만한 재능과 저력의 소유자가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최대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최근에, 예전에,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일단, 그다음을 생각할 때다.
“이 병에 대해, 치료법이 있는지,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생명의 신이라는 직무를 걸고, 유은하 님의 생명이 최대한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다면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만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하르펜 님도 고칠 수 없나 보네요, 이 병은…….”
고민하는 기색으로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던 하르펜이 곧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뭐랄까, 이쯤 되니 맥이 풀렸다. 이 세계를 관리하는, 생명을 관리하고 치료의 힘을 지닌 신조차 고칠 수 없다는 건 결국 누구도 내 몸을 고칠 수 없다는 거니까.
“차라리…….”
망설이는 기색으로 하르펜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토록 특별하지 않았더라면 손을 댈 방법이 있었습니다만.”
나는 애매한 감정을 삼켰다. 뭐랄까, 이야기로 전해 들었던 하르펜답지 않았다. 어쩌면 공정함을 기준으로 움직여야 하는 신답지 않았다. 어딘지 감정적이었다.
“저는 이 병을 운이 좋다면 고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지녔습니다. 영혼의 특수함을 육체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나눠주고, 다시 상성과 파장을 맞추고, 육체의 손상을 봉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영혼은 그게 가능할 정도로 손댈 수 없습니다.”
모아 쥔 하르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지스는 하르펜이 나를 아끼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었나 보다. 그렇다는 걸 알고 나니 참, 기분이, 미묘했다. 디나와 하르펜의 사이를 얼추 알기 때문에 더더욱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병의 진행을 약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기술은 디나 심포니와 정예리의 힘으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고자 당신을 여기에 불렀습니다.”
“…….”
신은……한 생명에게 사사로이 관여할 수 없다. 세계의 전체적인 양상을 보고 공정하고 균등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 누군가 한 명만을 편애해서는 안 되고, 편애하기엔 책임이 너무 막중하다.
그렇게 알고 있다.
신의 공정함은 세계의 멸망 직전에도 굳건히 지켜졌다. 그래서 병의 설명은 그렇다 치고 하르펜이 직접 치료하겠다는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육 괴리 병이 신의 관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석연찮았다. 불안했다.
“신은 사사로이 한 생명에게 관여할 수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은하 님은 제가 관여해도 문제없는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관여하고 싶습니다.”
“어떤 조건이었는데요?”
“첫 번째는 당신이 초월자라는 것, 두 번째는 당신이 세계의 경계선에 도달했다는 것, 세 번째는 제가 생명의 신이며 영혼을 올바른 육체에 이끄는 게 제 역할이라는 것. 그 외의 조건은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심연을 아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답답하다. 조금 알게 되었다 싶을 때 항상 제한이 걸린다.
그런 와중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모두 그렇게들 말한다.
“제가 당신께 취할 조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영혼과 육체의 사이를 조율해 영혼이 육체를 침식하는 걸 늦추고, 영혼이 지닌 재생능력을 육체에 끌어와 조화될 수 있게끔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 마력을 당신의 육체와 부적에 연결해 육체에 난 금을 최대한 막고 빠져나가는 생명력의 양을 줄일 것입니다.”
나는 조용히 하르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예리와 디나의 마법을 기준으로 삼아 하르펜이 말한 조치가 어떤 느낌일지 연상해보았다.
“그리고 당신의 운명에 죽음의 그림자를 반영하지 않고 이대로 이을 생각입니다. 다행히 세계도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확실히 내 수명을 운명에 반영해 봐야 빨리 죽을 뿐이다.
“또한 이 조치는 현재로선 이번을 포함해 두 번만 가능합니다. 유은하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은 지속해서 하나의 생명에 일일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영육 괴리 병은…….”
하르펜은 이번에도 설명을 망설이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세계의 운명과는 어긋나게 찾아온 병이고, 육체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잘못 알아본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특수한 영혼이 세계의 예측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성장했을 때 생기는 예기치 못한 병이기에, 책임이 있더라도 신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사안으로 판별되지 않습니다.”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과 말을 감추려고 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그래서 머리도 무거워졌다.
세계의 시스템이 답답했고, 신이 이제 와서 원망스러웠고, 그럼 전쟁이 끝난 후 그 이상 노력해서는 안 됐던 건가 하는 심정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나온 길에 후회도 한탄도 많았지만, 적어도 강해지기 위한 선택들을 돌이키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들지 않는다.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기 위해 했던 훈련과 싸움, 살의를 키우기 위해 선택했던 불살, 세계와의 계약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기 위해 했던 고민, 피의 맹약을 풀기 위해 했던 공부, 성물을 만든 것.
다만, 그래도……역시 조금은, 천천히 강해질 걸 그랬다. 조금 늦게 루키아의 기록서를 읽고, 조금 늦게 도서관에 발을 들여, 조금 늦게 성물을 떠올리고, 조금 느긋하게 문장을 발현했다면……이 육체는 버틸 수 있었을까.
거칠게 흔들리던 감정은 내 정신을 침식하지 못한 채 가라앉았다. 바다에 녹아든 악몽과 내 마법이 반사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습관적으로 냉정을 되찾은 머리가 다음 말을 찾아냈다.
“조치를 받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나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요?”
“말했다시피 당신의 영혼은 생명의 신인 제가 직접 관여하더라도 깊게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합니다.”
“…….”
“당신의 영혼에 언제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저희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시선을 내렸다. 어디를 밟아도 지뢰뿐인 길을 탐색하는 기분이었다.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삶과 죽음은 결코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삶은 성진이에 비하면 짧지만 그동안 그걸 절절히 느낄만한 경험이 아주 많이 찾아왔다.
“죽음을 늦추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성진이가 만든 부적도 하르펜의 마법도 내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재능과 노력으로 붙잡아왔다. 안심하기 위해, 실감하기 위해, 예측하기 위해. 이번에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하르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없습니다.”
어째서냐고, 몇 번이고 했던 질문을 하기 전에 하르펜이 말을 이었다.
“육체가 한계를 넘었기에 나타나는 병이 초월 후유증이자 영육 괴리 병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한계를 넘었기에 중심부터 붕괴가 시작되며, 중심이 부서진 육체는 생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은 강한 마력과 생명력과 영혼이 부서지는 육체를 실로 꿰매거나 붕대로 묶어 겨우겨우 정상 상태에 가깝게 유지시키고 있는 겁니다.”
병에 대해 새로이 설명하는 하르펜의 목소리에서 나는 조금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한계를 넘는다는 말은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한계. 그 단어를 듣고 떠올린 것은……인성이였다.
인성이는 에리카의 확인을 빙자한 실험으로 인해 강제로 한계를 넘었다. 한계를 넘은 게 마법이었는지, 육체였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 알 수 없다. 직접 봤어도 알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지금의 나와는 아주 다른 경우다. 다만 한계를 넘은 인성이는 어쩌면 지금의 나와 비슷하게, 하지만 훨씬 빠르게 붕괴되어 갔고, 그것을 되돌린 건 인성이와 상성이 맞는, 인성이에게 아주 소중한 아버지의 목숨이었다.
그 무게가 비로소 가슴에 와닿아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어 떨림을 가라앉혔다.
“육체는 이미 붕괴되고 있으니, 당신이 하는 아주 많은 행동이 당신의 육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저는 물론, 루키아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법이나 성장에 육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육체의 붕괴가 이유 없이 빨라지거나 느려질 수도 있고, 당신의 마법이 우연히 당신의 몸에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운에 달렸습니다.”
운이라. 우습게도 나는 그 말에 가장 먼저 행운 아이템을 떠올렸다. 그렇게 대단한 효과를 지닌 물건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너무 소소한 것을 떠올린 스스로가 우스웠다.
“다만 제가 할 조치는 그런 영향들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확률을 기울여 줄 것입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느꼈다. 참 무력하고, 허무하고……어딘지 외로웠다.
이 이상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감정을 곱씹고 있는데 하르펜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 은하 님께 필요한 치료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수긍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등 뒤에 서겠습니다. 등에 손을 올릴 텐데, 혹시 고통이 느껴진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네.”
하르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돌아 성큼성큼 내 뒤에 섰다. 등에 하르펜의 양손이 올라왔다.
“시간이 꽤 걸리니 병에 관해서나 저희에 관해서, 세계에 관해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질문해 주십시오. 가능한 내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서로 초면인 사이에 바로바로 묻고 싶은 게 떠오르지는…….
아니, 당장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했다. 디나에 관해서였다. 디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디나를 남겨 두고 갔는지, 디나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어서 예리에 대해, 예리에게 흡수된 하르펜의 마법석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 마법석을 하르펜은 무슨 용도로 세상에 남겼을까. 예리의 마법을 통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이전부터 예리를 통해 세계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한동안은 등에서 흘러들어온 힘에 집중했다. 신력, 자연의 힘, 마력, 하지만 가장 크게 느껴지는 힘은 ‘영혼의 힘’이었다. 하르펜의 힘은 가늘고 섬세하게 내 몸과 영혼 사이를 오갔다.
디나에 관한 것은 디나가 큰 혼란 없이 자신과 하르펜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있고, 그녀의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여 묻기 어려웠다.
병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며 여러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당장 궁금한 것도 없었다. 혹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이상 뭔가를 떠올리고 물어보기에는 마음이 조금 지쳤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예리의 마법석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하르펜 님이 세상에 마법석을 두고 간 것과 그게 예리에게 흡수된 것에는 이유가 있나요?”
하르펜이 작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것부터 물어볼 줄은 몰랐습니다.”
하르펜은 섬세한 작업을 흐트러짐 없이 이어가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아직 인간이었을 때 만든 것으로, 완전한 신이 되기 전에 한 차례 강화한 물건입니다. 그 마법석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날지 그때는 아직 도박이었습니다만, 도래할 세계의 운명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남겼습니다. 정예리 양이 그걸 흡수한 건 단지 그녀가 제 마법을 흡수할 만한 재능과 마법을 가졌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잠시 텀을 두고 하르펜은 내가 묻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디나를 만들 때 저는 죽을 각오를 했었습니다. 금기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까요. 하지만 생명은 다른 의미로 무사히 탄생했고, 저는 덕분에 신이 되어 루키아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디나가 소중하고,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군요,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딸로서 그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솔직하고 무미건조한 이야기에 나는 한탄을 삼켰다.
“그래도 만든 창조자로서 책임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가능한 선에서 이루어 주려 합니다. 다만 그녀가 세계 안에 남기를 원했고, 저는 이 세계의 몇 없는 신으로서 세계 위에 설 수밖에 없었기에, 그녀를 두고 떠났습니다.”
그래도 이어진 이야기에는 조금 안심했다. 루키아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 이유만으로 디나의 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하르펜은 디나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엔 나름대로 그 아이에게 부모다운 평범한 애정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쉽지 않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못하고, 저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째선지 저는 예전부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전엔 감정이 아예 없는 게 아닌가 고민을 했었습니다. 디나에게는 그래도 감정이 가는 편입니다.”
“그런……가요.”
이 이야기는 디나에게 어렴풋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하르펜은 자신의 모든 감정이 향하는 루키아에게 집착하노라고.
“그래서 당신을 접하고 조금 놀랐습니다. 어쩐 일인지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잔잔히, 평범하게 감정이 움직였거든요. 어쩌면 당신이 이 세계의 운명의 중심이고 제가 이 세계의 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감정이 움직이기도 하는구나 싶어 감탄했던 게 기억에 새롭군요.”
오늘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르펜은 여러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와는 다르게 꽤나 다양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내보였다. 다채롭게 감정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들은 것만큼 무감정하지는 않아 보였다.
“디나의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저는 평범한 애정을 디나에게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다른 분들이 디나를 아껴 주십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최소한 하르펜이 노력하고 있다면, 그들에 대해 단편적인 것밖에 모르는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다.
“또 당신이 궁금해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세계와의 계약에 관해선, 말할 수 있는 게 없군요. 다만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키메라들은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습니다. 인마 대전 때 죽은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환생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세계에 환생했습니다.”
“…….”
“저와 당신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앞으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질문해 주십시오.”
그렇긴 하다. 내가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료실에만 들르는 신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분명 하르펜에게 궁금한 게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감정의 무거움에 짓눌려 있던 의문들을 조금씩 떠올려 보았다.
일단은 하르펜과 관련 있는 것.
……그래, 축복의 서에 비쳤던 예리도 해석할 수 없는 반응들은 뭐였을까? 하물며 그 반응 중 몇 개는 몇 달 전, 내 몸에 큰 부담이 갔을 적 부작용의 일종으로 생겨났던 금을 재현했을 때 처음 나타났다.
그렇다면, 어쩌면, 하르펜은, 그때부터 이미 내가 이런 몸이 될 것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진이랑 나지스 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