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67
“혹시 제 남친은 최종 병기인가요?”
“어……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좀 그래…….”
“성격 때문인가요, 힘 때문인가요?”
“음……둘 다.”
나를 배려해 예의상 망설였을 뿐이지 사실 유펠라의 대답에 망설임 따위의 감정은 없었다.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니 그나마 안심되네요.”
그래서 나도 장난스럽게 그런 말을 돌려주었다.
곧 나는 디나가 준비해 온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 이번에 디나가 준비해 온 옷은 아무래도 우리 세계 지금 시대에 맞는 양식은 아니었다. 발목까지 오는 하얀 원피스는 그렇다 치고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감싸는 길고 밝은 회색 장갑이나 목을 감싸는 하얀 케이프가 특히 그랬다.
“대개 검은 계열 옷을 입으셔서 하얀 계열 옷을 입으면 어떨지 궁금했는데, 생각대로 잘 어울리셔요!”
“그, 런가요? 잘 안 입는 스타일이라 조금 어색하지만, 음……움직이기 편해서 좋네요.”
그래, 빌린 옷이니 편하면 만족한다.
부적의 힘은 일단 환각마법으로 감싸 숨겼다. 성진이의 힘이고 계속 나를 지키고 있는 만큼 다른 것들처럼 완벽히 숨길 수는 없지만, 일단 타인의 시각이나 감각을 속일 수는 있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초판부터 눈에 띄고 싶지는 않다. 부적의 힘은 디나와 유펠라의 조언을 따라 소란이 일어났는데 싸우기 싫을 때 위협용으로 드러내자.
한차례 준비를 마치고 도서관을 나선 나는 드디어 유펠라와 디나의 안내를 받아 경계의 도시 ‘라크루마’로 향했다. 이동은 유펠라의 마법을 통해 했다. 공간마법을 쓰지 않고 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초록색 테리시의 영향을 받아 푸르게 물든 하늘 사이, 오색 빛을 품은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향해 시야를 집중하자 머지않아 허공에 뜬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몸은 어때?”
테리시에 다가갔을 때와 달리 한 번에 이동하든 천천히 이동하든 차원 이동이 몸에 미치는 부담의 정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감각을 한 번 기울이고는 이내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다.
“약간……정전기 같은 저항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어디가 아프거나 크게 불편하진 않아요.”
발병하고 한 달, 아직 감각은 크게 일그러지지 않았다. 육체의 오감도 힘을 느끼는 기감도 아직은 약해지지 않았다.
몇 초 지났을 무렵엔 정전기 같은 저항감조차 사라졌다. 성진이의 부적 덕분이었다.
“네. 제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여요. 성진 님의 부적은 물론이고, 하르펜 선생님의 마법도 적절하게 은하 님을 지켜주고 있어요.”
“다행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또 한 번 유펠라의 마법에 이끌려 이동했다.
일단은 은행에 가야 한다. 이 도시는 전용 화폐가 따로 있다. 은행에 가서 이곳의 통장이자 카드인 타원형 금속패를 발급받고, 마법석이나 물건 등을 은행 환전소에 건네면 걸맞은 가격이 금속패에 입금된다.
금속패는 순식간에 발급됐다. 성진이의 의견을 참고삼아 가져온 마법석과 아이템을 건네니 또다시 순식간에 대금이 금속패에 입금됐다. 반투명했던 금속패의 색이 은색으로 바뀌었다.
“좋아. 이 정도면 옷을 10세트는 살 수 있을 거야. 나도 한 세트 사줄게!”
“그러실 필요는…….”
“저는 두 세트 선물할게요! 괜찮아요. 한 세트는 하르펜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사는 거니까요! 은하 님한테 대신 선물해 달라면서 돈을 맡기셨어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물며 하르펜의 돈으로 나한테 옷을 선물한다고? 부담스럽다. 매우 부담스럽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에 담긴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거기다 세트? 상하의, 겉옷에 장식까지, 오늘 이 두 사람은 나한테 잔뜩 선물을 안겨주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유펠라는 첫 차원 이동이니 한 명의 장인만 만나고 오자는 말대로 곧바로 어느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 커다랗고 높은 빌딩이었다. 슬쩍 안내판을 살피니 층마다 다른 물건을 파는 것이, 백화점에 가까운 곳인 모양이었다. 마지막 층은 100층, 꽤 높다.
“80층에 있는 ‘레벤 의복점’에 갈 거야. 이 건물은 공간마법으로 이동해 다니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서, 좀 불편하지만 엘리베이터를 쓰자.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물건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 웬만한 물건은 가게 안에 있지만, 광고용으로 가게의 샘플들을 진열해 놓거든.”
“그런가요? 기대되네요.”
백화점 내부의 풍경은 화려하고도……익숙했다. 조명은 밝았고, 그 아래에 있는 진열대에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세계에 있는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샘플이라서 그럴까. 당연히 우리 세계의 평균 물품에 비해선 대단하지만, 감탄이 들 정도로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나와 성진이의 기술 안에서 어떻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정도의 힘이 담긴 물건들뿐이었다.
그래도 꽤나 다양한 종류의 기술과 힘이 담겨있어 참고가 됐다. 저런 형식의 기술도 아이템에 담는구나. 아, 저 아이템은 확실히 만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엘리베이터는 총 10개로 공간마법이 걸려 있었다. 원통형으로 유리로 된 기둥이 땅에서 천장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층을 누르면 순식간에 이동하는 형식인 것 같았다.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층을 누르고, 1초가 지나 알림음과 함께 다시 문이 열렸다.
“레벤 의복점은 저쪽이야.”
유펠라와 디나의 손을 잡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듯한 세심한 보호에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위험한 실력자가 많이 모이는 곳인 걸 다시 상기하고는 납득했다. 실제로 나보다 강한 실력자의 기척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머지않아 나무 간판이 달린 가게가 나타났다. 유리로 된 자동문을 넘어 우리는 목표로 했던 의복점에 들어섰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디나 님, 유펠라 님.”
가게에 진열된 옷을 둘러보기도 전에 세 명의 남녀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가운데에 서 있는 정장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셔츠에 장갑, 금테 안경, 검은 하이힐 구두, 금색 중심의 액세서리, 도도한 느낌의 화장까지, 무척 세련되게 꾸민 여자였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무릎과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하고는, 고개를 기울여 나를 돌아보았다.
“그분이 오늘 데려오신다던 신인인가요? 흐음…….”
여자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이 의복점은 디나와 유펠라가 자주 이용하는 가게다. 유펠라는 요즘 실력이 강해지면서 이 여자 장인과 연결된 다른 의복점을 이용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디나는 여전히 여기에서 옷을 구한단다.
힘을 보건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이분이 만들었다. 나를 훑어보던 여자가 문득 인상을 썼다.
“저기요? 오늘 옷을 사러 오신 건지 구경만 하러 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옷을 이용하시려면 어느 정도 힘을 보여주셔야겠어요. 그래야 맞는 옷을 안내해 드릴 수 있거든요. 제가 파악하기 어려운 걸 보니 두 분이 소개하실 만큼 강한 분인 건 틀림없는 것 같네요.”
어조는 날카로웠지만 유펠라와 디나가 경고한 것만큼 무례하진 않았다. …아마도?
고개를 끄덕인 나는 숨기고 있던 힘을 조금씩 조금씩 드러냈다.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상당히 희귀한 힘을 지니셨네요. 흐음. 뭐, 알겠어요. 입장을 허가할게요. 마음대로 구경하세요. 옷의 성능에 관해 궁금한 게 있거나 맞는 옷을 안내해 주길 바란다면 제 제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유펠라가 약간 인상을 썼다. 이곳의 주인은 인정한 상대에게는 맞춤옷을 의뢰 받는다. 적어도 유펠라와 디나는 그러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경계의 도시 첫 방문, 첫 장인과의 첫 만남에 맞춤옷을 의뢰하긴 좀 꺼려지고, 자유롭게 구경하는 게 오히려 성격에 맞는다.
나는 안내가 필요하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고개를 젓고서 디나와 유펠라를 데리고 가게를 돌아다녔다. 전부 내가 입고 다니던 옷보다 뛰어났기에 방어계열, 증폭계열, 마법과 조화가 잘 되는 것을 중심으로 내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몇 년간은 두문불출했던 나 대신 성진이가 이것저것 내 취향에 맞는 옷을 사 왔었는데. 성진이를 데려오면……음, 환각 아이템을 쓰면 괜찮으려나? 여기의 주인은 아직 부적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그래도 자칫하면 부적을 드러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란스러워질 것 같긴 하다.
“은하 님, 슬슬 여름이니까 이런 시원한 소재의 원피스는 어때요?”
“디나 넌 원피스를 좋아하더라. 난 바지가 더 좋아. 이 반바지는 어때?”
“음, 기왕이니 왕관이랑 잘 어울리는 걸 기준으로 찾으려고요.”
“괜찮아, 괜찮아. 현대에 액세서리로 왕관을 쓰는 경우가 드물어 미스매치로 보일 뿐이지, 색깔만 맞추면 뭐든 왕관이랑 잘 어울려!”
“그럼요!”
원피스, 카디건, 양말, 머리끈, 양산, 허리띠……. 디나는 정말로 세트를 맞추며 고르고 있었다. 유펠라도 그런 식으로 옷을 고르며 열의를 태웠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자기 취향대로 나를 꾸미기로 결심을 내린 듯하다.
‘음, 그래. 선물이니까……그냥 받자.’
하지만 확실히 유펠라와 디나가 소개할 만큼 이곳의 옷은 모두 대단했다.
가게 주인 레벤은 틀림없이 나보다 몇 수 위의 실력자다. 하지만 여기의 옷은 죄다 얼추 본 그녀의 실력을 상당 수준 뛰어넘는 힘과 기능을 지녔다.
자신의 통상적인 힘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든다. 그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프라이드가 높을 만하다.
어느새 안쪽 방에 들어간 레벤을 대신해 우리를 지켜보던 제자 한 명이 내가 카운터 근처에 다가왔을 때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지금 고르신 옷도 좋지만, 생명력과 재생력을 높이는 치료용 옷이 따로 있어요. 그 옷보다는 조금 더 가격이 있습니다만.”
제자조차 나보다 한 수 뒤처지는 정도의 실력자다. 그리고 눈이 좋았다. 내 몸의 정확한 상태까지는 몰라도, 내 몸이 안 좋다는 것은 알아보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료용 옷이 내 몸 상태에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뭐든지 시험해 봐서 나쁠 것은 없다.
필요와 취향을 따라 하나둘 고르다 보니 내가 고른 옷만 순식간에 열 벌을 넘겼다. 비싼 만큼 가격을 계산하면서 고르고 있다. 아직은 돈에 여유가 있다.
사실 성진이의 옷도 살까 조금 고민했는데, 유펠라가 말하길 성진이는 여기의 옷이 맞지 않을 거란다. 나중에 성진이가 이런 의복 전문점에 옷을 사러 갈 일이 생기거든 따라가서 구경해야지.
여기의 옷은 모두 사람의 체형에 맞춰 알아서 사이즈가 달라지지만,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자들의 허락을 받고 몇 개 입어 보았다. 두 사람은 즐거워하며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옷을 다 고르고 카운터로 향했다. 맞춤옷이 아닌 기성품을 고른다 해도 마지막에는 가게의 주인 레벤이 구매자에 맞춰 옷의 힘을 조정해 준다고 한다. 제자들의 부름에 다시 가게로 나온 레벤이 손에 가느다란 완드를 소환해 쥐었다.
내가 고른 옷들을 훑어본 레벤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눈이 좋으시네요.”
옷을 손으로 한 번씩 쓰다듬은 레벤이 내게 손을 펼쳤다.
“실례. 아가씨와 옷의 파장을 맞추려고 하니 잠시 손을 주시지요.”
반사적으로 내민 오른손이 레벤의 오른손 위에 안착했다. 내 마력이 레벤의 마력에 공명했고, 레벤이 내 오른 손등에 완드의 끝부분을 댔다.
그러자 피부를 타고 흐르던 내 마력이 일부 레벤의 완드에 빨려들었다.
“…….”
문득 나는 레벤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레벤의 지팡이는 부적을 조금 비켜나간 곳에 대어져 있다. 부적의 마력은 쓸모에 의해 계속 내 몸 안을 돌고 있고, 때문에 부적의 마력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려우니, 즉…….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레벤의 표정은 무척 창백했다. 창백한 안색으로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와 유펠라와 디나가 고른 옷에 힘을 뿌렸다. 제자 둘도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듯했으나 스승의 반응에 맞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포장했다.
우리는 시선을 나누며 쓴웃음을 짓거나 안타까운 감정을 삼켰다. 레벤은 옷을 내밀고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딴판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용 감사합니다. 다음에 찾아오셨을 때는 조금 더 손님께 맞는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확실히 좀 차가운 느낌은 있었지만 생각만큼 무례하지도 않고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감이 딱 좋았는데 말이다. 나는 그냥 웃으며 인사를 돌려줬다.
옷을 아공간에 넣고서 가게를 나선 후 유펠라가 충고해 주었다.
“아무래도 장인들 중엔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많아. 특히 내가 소개할 사람들은 다 그래.”
그건 우리 세계도 비슷하다. 하물며 맞춤 제작을 하려고 하면 감지능력과 사람 보는 눈은 필수다.
“그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좋게 생각해. 무례한 대접 받는 것보다는 정중하게 대접받는 게 그래도 더 좋잖아? 어디든지 실력에 따라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단 말이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우리는 곧 라크루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펠라의 공간마법을 통해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도서관 정원을 거닐며 디나와 유펠라는 차원 이동이 내 몸에 부담을 주지는 않았을까 내 몸을 면밀히 살폈다.
참고로 내가 영육 괴리 병에 걸린 걸 도서관의 사람들은 모른다. 환각마법으로 잘 가리고 다니고 있다. 몇 명과는 그럭저럭 대화를 할 정도로 친해지기는 했지만 지인들에게서 받는 걱정도 벅찬 판에 애매한 거리의 사람들과 부담을 주고받고 싶지는 않다.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 정도나 할 생각이다.
“오늘처럼 만날 때마다 한 곳씩 가게와 장인을 소개해 줄게.”
“잘 부탁드려요. 참고로 다음번엔 어떤 물건을 다루는 장인을 소개해 주실 건가요?”
“신발과 액세서리 중 어느 걸 먼저 살래?”
“음……액세서리요. 제가 액세서리 아이템을 많이 만들다 보니 그쪽에 더 흥미가 가네요.”
“좋아!”
나는 도서관 정원을 걸으며 두 사람에게 오늘 간 도시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그렇다 쳐도 경계의 도시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도서관이랑은 딴판이에요.”
“세계의 경계선은 초월자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힘과 조건이 갖춰지면 오갈 수 있으니까. 적어도 도서관보다는 훨씬 자격 조건이 느슨해. 우리 세계는 많이 폐쇄적이지만, 가까운 세계 중엔 아닌 곳도 있어. 특히 라크루마 주위는 개방적인 세계가 많아. 거기다 라크루마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도 있고, 세계의 경계선에서만 나고 자라는 종족도 있어. 테리시에 사는 애들도 많이 찾아가.”
몇 가지는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 라크루마 주위에 개방적인 세계가 많다는 건 몰랐다.
“확실히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 많아 보였어요.”
모습부터 인간이 아닌 사람도 많았고, 모습은 인간과 다름 없었지만 인간과 다른 느낌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
“응. 과반수는 인간이 아니야.”
예상대로 유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도서관에 도달하는 조건은 단순히 힘이 강한 것만으로는 안 되거든. 특히 세계 바깥, 하물며 세계의 경계선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도서관에 들어올 자격을 지극히 갖추기 어려워.”
그건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의 입장 조건을 자세히 확인해 본 적이 없다.
“묶음 세계마다 자격 조건이 조금씩 다르다고 듣긴 했는데, 이곳의 차원 도서관에 입장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세계를 관리하는 지위에 선 자 혹은 초월자야. 드물게 전혀 다른 자격을 갖춘 자가 들어서기도 하지만, 정말 극히 드물어.”
나는 유펠라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초월자는 한 세계 안에서 한 세계의 규격을 뛰어넘은 위대한 영혼이야. 세계 바깥은 강한 힘이 모이는 만큼 처음부터 힘이 강한 종족이 많지만, 그들을 가두는 세계의 규격은 하나가 아니고, 완전하지도 않고, 아득히 멀어. 초월하기 위해선 환경이 중요한데, 일단 그들에겐 그게 갖춰지지 못해.”
“환경…….”
“세계의 경계선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니, 그들이 탄생한 세계는 살아있다고 하기 어렵고, 그러므로 그들의 세계는 쉽게 바뀌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 있잖아, 세계의 흐름을 바꾸는 세계의 운명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단다.”
오랜만에 유펠라가 신의 보좌이며 세계의 흐름을 관리하는 상위 정령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언젠가 직접 체감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레벤도 세계 바깥에서 태어난 장인이야. 그녀는 강했지? 하지만 그건 은하와 달리 강하게 태어났기 때문이야. 많은 것을 알지만, 도서관에는 오지 못해.”
안타깝다는 어투였으나 유펠라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세계의 경계선인 만큼 당연히 상당한 실력자만이 오갈 수 있다. 하지만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는 건 그 안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그건 참……묘한 기분이었다.
곧 우리는 도서관에 들어서 이번엔 원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처음 라크루마에 간 날을 경계로 유펠라와 디나는 약속을 지켜 만날 때마다 한 명씩 장인과 그 장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소개해 주었다.
두 번째는 귀금속 액세서리 전문점에 갔다. 전투용부터 단순한 꾸미는 용까지, 아주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액세서리를 맘껏 구경했다. 유펠라와 디나에게 추천 받아 반지와 팔찌와 머리 장식을 몇 개 샀다.
세 번째로는 신발 전문점에 갔다. 이날은 드물게도 성진이와 함께 도서관에 향했었는데, 그렇다 보니 성진이도 함께 라크루마에 갔다. 성진이는 내 성격을 염려했는지 도서관에서도 경계의 도시에서도 계속 환각 아이템을 착용했다.
“이번에 소개할 장인은 성격이 조금 깐깐한데……괜찮으신가요?”
“쓸데없이 시비만 걸지 않는다면야. 은하가 스트레스 받을 만한 짓은 안 해.”
그 말대로 성진이는 나랑 친하게 지내면서, 특히 사귀게 되면서 내 성격에 맞춰 성격과 행동을 자제하고 있다.
“하긴 그렇죠. 괜한 걱정을 했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딱히. 항상 은하를 신경 써줘서 오히려 고맙지.”
유펠라만 해도 무언가를 오래 참고 감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크루마를 돌아다니며 다른 이들의 나에 대한 무례하다 싶은 행동을 그냥 넘긴 건 내가 소란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뇨, 당연한 일인 걸요.”
성진이의 대답에 유펠라가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는 기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신발 전문점의 주인은 진열된 물건을 멋대로 건드리는 걸 싫어하고, 말투가 꽤나 사나운 중년 남자였다. 조금 불친절하긴 하지만 깔끔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물건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있단다.
주인은 기척과 영혼을 완전히 숨긴 성진이의 정체를 꿰뚫어 보진 못했지만, 항상 힘을 발하는 부적의 기척만은 꿰뚫어 봤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한순간 창백해졌으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번엔 디나와 유펠라에 이어 성진이도 선물을 샀다. 디나와 유펠라는 한 가게를 소개해 줄 때마다 선물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디나와 유펠라는 저번에 산 옷과 어울릴 만한 구두를, 성진이는 내 취향과 마법에 딱 맞는 부츠와 자기 취향에 맞는 심플한 샌들을 골랐다.
네 번째로는 전문 무구점을 소개 받았다. 내 무기에 맞춰 소개 받은 곳은 보석과 귀금속 소재 지팡이를 전문으로 만드는 곳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맞춤 지팡이가 있긴 하지만, 호기심이 생겨 몇 개 따로 구매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의 주인은 내가 지팡이 하나를 살펴보기 위해 쥐자마자 눈치챘다.
“주 지팡이를 이미 가지고 있지?”
“네? 네, 그렇긴 한데요…….”
“보여줄 수 있을까?”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는 지팡이에 어울리는 장식품을 팔고, 또 지팡이를 개조해 주기도 한다. 순수하게 상상만으로 만들어 낸 지팡이지만 이곳의 기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허공에 손을 뻗은 순간 손안에 은색 금속과 남색 보석으로 이루어진 1m 남짓한 지팡이가 잡혔다. 주인이 진지한 눈으로 지팡이를 응시하며 물었다.
“잠시 만져도 될까?”
“네…….”
“아, 괜찮아. 놓지 않아도 돼.”
그녀는 지팡이를 유심히 둘러보며 장갑 낀 손으로 지팡이를 군데군데 건드렸다.
“흠, 순수하게 마법으로만 이루어진 지팡이인가. 디자인부터 마법석까지 전부 아가씨가 만들었군. 그런 것치고는 확실한 실체가 느껴져. 부서지면 재생하나?”
“항상은 아니지만, 대개는요.”
『은하의 지팡이』는 특수한 목적에 한해 복수 만들어 낸 적도 있고, 조각조각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러므로 부서진 지팡이와 재생한 지팡이가 동일한 개체인가 물으면 좀 애매하다. 다만 지팡이가 부서지고 미리 만들어 둔 예비 지팡이가 없을 경우 다시 지팡이를 소환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만한 힘과 마음을 담은 마법이다.
『은하의 지팡이』는 실체를 가진 물건이기 이전에 내 마법이고, 기술이고, 내 마법 안의 개념이다.
“이 지팡이는 아가씨가 생각하기엔 무기에 가까워, 능력에 가까워?”
그랬기에 나는 이어진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능력이요.”
“흐음…….”
한동안 바짝 고개를 가져다 대며 지팡이를 살피던 주인이 이내 아까처럼 몇 걸음 떨어졌다.
“당신이라면 모든 지팡이를 그럭저럭 사용해 낼 수 있겠지만, 전부 방금 꺼내 보인 주 지팡이만은 못해. 그러니 ‘대롱’을 사가는 걸 추천해.”
“‘대롱’이요?”
“당신처럼 능력으로 지팡이를 만드는 이들에게 딱 맞는 물건이야.”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가게 안쪽 방에서 검은 상자를 불러왔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손바닥 길이만 한 둥근 관(管)이 들어 있었다.
“‘실체’는 힘을 다루는 데 있어 무척 중요해. 괜히 많은 능력자가 지팡이를 손에 쥐고 기술에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지. 이 대롱은 능력의 그릇이야. 능력으로 만들어진 힘에 실체성을 더하는 것으로 능력의 힘을 몇 배고 증폭시키며 보조해 주지.”
지팡이를 보다 강하게 실체화하기 위한 그릇이라.
마음에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롱에 손을 뻗은 순간, 주인이 대롱을 내 손에 닿지 않게끔 옮겼다.
“이건 견본으로 보여준 거야. 당신의 지팡이에는 맞지 않아.”
“아, 그렇군요.”
“당신의 지팡이에 맞는 대롱을 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
“웬일이래?”
아무래도 이번 장인은 맞춤 제작을 해주려는 모양이다. 유펠라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지팡이가 마음에 들었어. 그릇 없이 그만큼 완벽한 실체를 지닌 지팡이는 처음 봐. 담긴 힘도 무척 아름다워. 무엇보다 당신들이 데려온 신인은 강해. 적어도 어울리는 무기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우러나올 정도로는 뛰어나.”
“흐음~.”
기쁜 듯이 웃는 유펠라와 디나를 두고, 이내 주인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칭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럼 질문할게. 일단, 당신의 지팡이는 변화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화 버전이 하나 있어요.”
“그래? 그럼 그것도 지금 보여줄 수 있어?”
『은하의 지팡이』의 진화 버전, 『천체의 지팡이』.
진화한 지팡이를 제대로 사용한 건 벨라와의 최종결전 때, 딱 한 번뿐이다. 다만 그 이후로 은하의 지팡이는 한 번도 부서지지 않은 채 힘을 쌓았다. 심지어는 성물과도 교감했다.
……가능하다. 나는 가지고 있던 진화석과 마법석 몇 개를 희생하여 천체의 지팡이를 불러냈다.
1m를 넘지 않았던 통상 지팡이와 다르게 천체의 지팡이는 내 키보다 길었다. 장식과 문양도 좀 더 많고 화려했다. 유펠라와 디나가 감탄의 탄성을 흘렸다.
“능력치 차이가 상당한데? 하지만 전의 지팡이와 달리 손에 익은 느낌이 덜해. 위험한 순간에만 드러내는 비장의 키인가?”
“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실전에서는 한 번 밖에 써 본 적이 없다.
“하나, 지팡이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 1시간씩 진화 전의 지팡이와 진화 후의 지팡이를 나한테 맡겨줘. 아, 그리고 두 지팡이의 일부를 대롱의 재료로써 내게 건네주었으면 해.”
“음…….”
은하 버전은 문제없지만, 천체 버전은 일부를 분리해 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고민하는 동안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둘, 지팡이에 문장을 쓴 흔적이 보였어. 당신의 문장을 보여줬으면 해.”
“…….”
확실히 문장을 다루는 게 익숙해진 이후로는 보통 지팡이에 문장을 새겨 마법을 사용했다.
“셋, 가격이 상당해. 예상으론……이 정도는 필요한데, 당신 신인이잖아? 낼 수 있겠어?”
괜한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주인이 적어 보인 가격은 상당했다. 그녀는 가격 메모 옆에 다양한 재료의 이름이 적힌 또 다른 종이를 펼쳐 보였다.
“혹시 여기에 적힌 재료 중 가지고 있는 게 있다면 깎아줄게.”
이곳의 돈 단위로 70억. 지금까지 샀던 물건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비싸다.
그래도 뭐, 낼 수 없는 가격은 아니었다. 뭣보다 나는 질 좋은 마법석을 끝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억 단위의 가치를 지닌 마법석을 만드는 데는 나라도 상당한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혹시 몰라 재료 목록을 확인했다.
50개쯤 되는 재료 중 아는 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고, 그중 가지고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겨울 하늘 조개의 오로라 진주다.
조개에게서 받은 진주는 10개. 그중 하나는 부적에 사용했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실 한때는 진주를 먹을지 고민했었다. 몸에 보양이 된다니 이 병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알고 보니 하르펜과 나지스가 내게 주기적으로 건네주는 약에 진주가 섞여 있었다.
진주는 생으로 먹는 것보다 가공하는 게 더 몸에 도움이 되고, 의사의 처방을 통해 먹고 있는 이상 거기에서 더 먹는다고 몸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말로 모두 내가 진주를 다른 데 쓰기를 권했다.
……내가 먹고 있던 약이 생각보다 훨씬 귀한 것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부담스러운 기분에 값을 치르겠다고 말해 봤지만, 내가 걸린 병에 책임감을 느끼는 신 분들은 거절했다.
오로라 진주를 건네 값을 깎아 볼까? 하지만 오로라 진주는 또 언제 손에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물건이다.
일단 유펠라와 디나랑 상담을 해봐야겠다.
내가 돈을 걱정한다고 느꼈던지 유펠라가 속삭였다.
“돈은 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가 선물해 줘도 되니까.”
“아뇨. 돈을 걱정한 게 아니에요. 성진이한테 빌려도 되는 거니까요. 저기 적힌 재료들이 조금 신경 쓰여서요.”
“그래?”
이번엔 디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럼 의뢰하실 건가요?”
“네.”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다시 가게 주인을 돌아보았다.
“재료는……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롱은 의뢰하겠습니다.”
“오케이. 재료 대리 조달 인하는 물건이 완성될 때까지 가져오면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걱정 말고.”
“네.”
고개를 끄덕인 주인이 설명을 이었다.
“거기다 방금 보여준 가격은 예상 가격이라 변동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 지팡이 관찰이 끝나고 재료가 정해지면 가격을 책정해서 알려줄게. 그래도 의뢰하겠다는 마음이 들면 계약서를 쓸 거야. 계약 후에는 선수금으로 원금의 10%를 결제해줘.”
“알겠습니다. 어떤 버전의 지팡이를 먼저 맡길까요?”
“그건 네가 편한 대로 해.”
“그럼 이대로 맡길게요.”
나는 아직 진화 상태를 유지 중인 천체의 지팡이를 내밀었다. 은하의 지팡이를 건네려면 진화를 풀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진화시켜 천체의 지팡이를 보여주는 건……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