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71
“아뇨. 다른 천사는 도서관에서 몇 번 만났는데, 우리 세계의 천사는 처음이라서요.”
도서관에서 아주 드물게 신의 사자인 천사와 악마를 보긴 했으나, 우리 세계의 천사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사와 함께 나타난 낯익은 인물은 디나와 유펠라였다. 디나는 균열의 끄트머리로 이동했고, 유펠라는 천사와 함께 균열의 한가운데에 섰다. 당초에는 처음 보는 천사에게 눈이 갔지만, 곧 디나에게 눈이 갔다.
디나는 가디언 하리의 가호에 감싸여 있었다. 생명의 신 하르펜이 만든 가디언 하리가 강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대한 힘에 조금 놀랐다.
평소와 달리 하리는 온전하고 거대한 그리핀 모습이었다. 하리의 가호는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디나의 온몸을 빛으로 감쌌다.
그리고 빛을 두르며 선 디나의 지팡이에서는 하르펜의 신력이, 몸에서는 루키아의 신력이 흘러넘쳤다.
“…….”
나는 숨을 삼켰다. 조화되는 두 개의 신력이 천사와 유펠라에게 힘을 더하고, 균열을 아우른다.
‘신의 아이, 라.’
디나는 신이 만들어 낸 아이.
하르펜이 루키아를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낸 생명. 더하여 하르펜이 신으로 각성한 계기.
그렇기에 디나는 하르펜의 마법을 가지고 있고, 하르펜과 루키아의 신력을 품을 수 있다.
‘저래서 하르펜이 디나에게 협력을 요청한 거구나.’
두 신의 힘을 품을 수 있는, 하물며 세계의 상처를 돌볼 수 있는 이가 지금 우리 세계에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 디나도 하르펜의 부탁을 받아들여 유펠라와 함께 행동했던 것이다.
곧 걸어갈 진로를 정한 이노키언이 나를 불렀다.
불길하거나 위험하다 느끼면 곧바로 알려달라는 염려의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노키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초반에는 도약해 빠르게 거리를 좁혔고, 원래 있던 거리에서의 반을 좁혔을 때쯤부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유펠라도, 디나도, 천사도, 우리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만큼 크고 위협적이란 거겠지. 하지만 가장 강한 정령인 이븐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하지만 천사가 함께 왔으니까……음…….
‘모르겠다.’
아직 균열이 지닌 위험도를 판단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세계의 축 안에서 균열을 본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였다.
그래서 그냥 검은 강의 범위와 힘을 최대한 자세히 감지하고 문이의 안에 기록했다. 검은 강의 경계선이 있는 장소와의 사이에 허공을 가르는 축의 길이나 링이 두 갈래 정도 남은 지점, 그래도 여전히 검은 강이 훤히 보이는 부근에서 이노키언은 걸음을 멈췄다.
“이 정도 농도면 충분히 균열의 정보를 담은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노키언은 검은 마력을 움직여 허공에 선을 그었다. 선은 이내 긴 직사각형으로 변해 우리를 둘러쌌다.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마.”
“알겠어요.”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기에 나도 딱히 무리할 생각은 없다. 거기다 벗어나지 말라고 했지만 직사각형의 범위는 매우 넓다. 달려도 괜찮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검은 강을 보았다. 별의 도시에서 작업을 시작한 관리자의 힘이 섞여들고, 강에 서 있는 세 사람의 힘이 점점 커진다.
‘그럼 균열의 정보를 모아볼까.’
정화마법석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지, 검은 강의 힘을 통해 얻은 소재를 어떻게 쓸지, 그동안 문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때때로 성진이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몇 번을 곱씹어 봤지만 상당히 괜찮았다. 문이와 성진이도 좋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긴장을 삼키며 왕관 중앙 홈에 끼워져 있던 정화마법석을 떼어 냈다. 원래 크기로 돌아온 정화마법석이 내 왼손에 안착했다.
왕관과의 연결은 유지했다. 그럼에도 왜 구태여 왕관에서 떼어 냈느냐면, 정화마법석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변화를 이루는지 가장 뛰어난 감각인 시력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팡이와 정화마법석을 쥔 채 주위를 좀 더 넓고 깊게 감지했다.
세계의 축에서는 우주에서만큼 넓게 감지할 수 없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감지 범위를 넓혀 문이와 함께 강이 지닌 모든 힘과 성질을 감각과 마법에 새겼다.
드문드문 신과 정령의 힘, 인성이를 비롯한 관리자들의 힘, 별의 도시의 힘이 느껴졌지만 나는 오롯이 검은 강의 힘에만 집중했다.
이내 지팡이를 휘둘러 검은 강에서 비롯된 잔여 에너지를 건드렸다. 수십 개, 수백 개, 강의 성질이 섞인 잔여 에너지가 내 마력과 함께 보석으로 변했다.
나는 그중 검은 강과 세계의 축의 힘을 보다 잘 담고 있는 보석을 30개 골라내 하나의 보석으로 응축했다. 한데 모인 조각들은 이내 합쳐지고 압축되어 작은 검은 보석으로 변했다.
검은 강의 잔여 에너지로 만든 보석은 결코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이 힘이 혹시라도 정화의 힘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건 ‘정보’다. 정화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에 관한 정보. 내가 인간이기에 균열에서 얻고 다룰 수 있는 정보는 잔여 에너지 수준으로 그치지만, 나의 상상과 의지와 마법에 쌓여갈 시간이 이 미약한 정보를 보충해 줄 것이다.
“『만물상─마법석 융합 마법진, 소환』.”
이로써 정화마법석을 변화시키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이제 언제고 정화마법석을 내가 생각한 형태로 진화시킬 수 있지만, 없애고자 마음먹은 검은 강이 있는 이 자리에서 진화시키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없애야 할 정보를, 저것을 없애는 이미지를 보다 확실하게 이 마법에 각인시킬 수 있다.
나는 마법진의 중앙에 둥근 구슬 형태의 정화마법석을 올리고, 그 주위에 정화마법석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모아왔던 재료를 소환했다. 세계의 축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든 잔여 보석. 별의 도시, 우주, 세계의 꿈 등 다양한 공간을 돌아다니며 만든 마법석. 십 수 개의 진화석과 진화 보조석.
나와는 별개로 필요한 재료를 모아 나침반에 흡수시키던 이노키언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긴장감과 기분 좋은 고양감을 삼키며 지팡이를 통해 문장을 개방했다. 그대로 지팡이를 마법진에 겨누며 내가 원하는 바를 속삭였다.
“『세계의 균열을 지우고, 세계의 불균형을 조정하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꿈의 씨앗을 여기에서 싹틔워라.』”
당장 완벽하게 진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기에는 바라는 바가 크니까.
완성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세계의 불균형을 완벽히 조정할 수 없다. 그건 본디 신의 역할이다.
그래도 답답하고 외로울 관리자들을 위해, 불완전한 세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인들을 위해, 조금은 내 소소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위해, 만족할만한 물건을 만들어 내야지.
그러기 위해 크게 꿈을 꾸려고 한다. 진화할 이 마법은 세계의 균열을 전부 지울 수 있다. 그런 상상을 담아 나는 기술명을 외쳤다.
“『우주의 정수!!!』”
본래는 내 모든 마력과 마음을 때려 붓는 필살기 용도로 만들어진 기술이지만, 내 마법인 만큼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특수 기술─우주의 정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모아 정제한 마법.
그 우주에서 가장 순수한 힘의 결정이며 근원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모든 것은 정수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영역을 만든다면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것이다. 물건에 집어넣으면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거나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생물에게 집어넣으면 진화할 것이다.
…………….(중략)
정수의 위력은 세계의 힘을 얼마나 삼켰는지, 세계의 힘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하여 세계에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근원이 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상상에는 한계가 없지만, 힘에는 한계가 있고 격차가 있다. 그러니 내가 안간힘을 써도 이 정수는 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주의 정수라는 마법에 담은 내 상상과 마음은 절실한 진심이다. 그러니 이 기술은 분명 이 정화마법석을 최대한 높은 곳까지 이끌어 줄 것이다. 이 기술을 통해서라면 세계의 가장 깊은 곳에도 분명 닿을 수 있다.
우주의 정수. 영역을 만든다면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고, 물건에 집어넣으면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세계에 집어넣으면…….
세계에 녹아 세계를 치유한다.
왕관이 반짝반짝 빛나며 세계와 교감했다. 방금 만든 검은 강의 잔여 보석과 늘어놓은 다른 보석들이 모두 정화마법석에 흡수되었다. 정화마법석과 마법진이 아까보다 환하게 빛났고, 그럴수록 소모되는 마력은 많아졌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생각보다 힘의 소모가 심했다. 문장으로 힘을 증폭했음에도 버거웠다.
몸의 부담을 생각해 마력의 소모 속도를 조금 늦췄다. 정화마법석이 원하는 대로 바로바로 힘을 건네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속도를 조금 늦춘다 해서 마법이 실패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는 건 오랜만이다. 즐거운 한편으로 조금은 불안했다.
숨이 가빠지고 마력이 빠르게 움직인다. 감정은 고조되고 감각은 점점 깊어진다. 내 마력의 움직임이 세밀하게 보이고, 문장이나 왕관의 공명, 자연의 힘이 점점 확연해진다.
……몸에 난 금이나 그걸 기운 하르펜의 마법, 부적의 힘도 선명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직 이렇게나 모든 감각이 멀쩡하다. 아직은……놀랍게도 아직은…….
하르펜의 마법과 성진이의 부적이 지닌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불안감에 다른 방향으로 향하려는 생각을 다시 되돌리며, 예리가 만들어 준 마력 회복약을 몇 개 들이켰다.
『우주의 정수(Lv 1. 정화의 씨앗)
정화마법을 중심으로 삼은 이 정수는 세계의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다.』
잠시 후 예상대로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바라는 형태의 힘을 숨긴 우주의 정수가 만들어졌다.
이 정수를 성장시킬 가장 빠른 방법은…….
‘그런데 그렇게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가장 빠른 방법은 정수로 경험을 쌓는 것이다. 즉 이 정수로 균열의 힘을 몇 번 지워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작업 중인 관리자들과 디나 일행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아직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며 미완성인 마법이다. 좋은 마음으로 나서더라도 작업하고 있는 이들에겐 오히려 혼란만 주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마법진을 없애고 정수로 진화한 구슬을 손에 쥐며 잠시 고민했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이노키언이 몇 발자국 다가왔다.
“완성한 거야?”
이노키언이 드물게 기대 어린 눈으로 구슬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내 마법은 이노키언이 원하는 5번째 재료의 단서였다. 정화마법석의 완성형을 원하는 건 아니라고 했으나, 이것도 단서의 일부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요. 아직 초석을 쌓은 정도예요. 음……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이 구슬을 강화하는 제일 빠른 길은 경험을 쌓는 것, 그러니까 이 검은 강을 조금이라도 지워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작업하는 사람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럴 수도 있긴 해. 천공의 정령이랑 신의 아이는 저걸 능숙하게 처리하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노키언이 검은 강을 쭉 훑어보았다.
“일단 균열에서 흘러나온 잔여 힘을 건드려 보는 게 어때? 그 정도는 건드려도 저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 거야. 한 이 정도 범위 안의 힘이면 문제없어.”
이노키언은 그어놓은 선 너머에 또 한 번 선을 그었다. 갈라진 검은 균열에서 튀어나와 흩어진 미약한 힘들. 확실히 저것들을 건드린다고 강의 기세에 영향이 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은 저들이나 신의 허락을 맡아야 해. 너라면 허락해줄 수도 있겠지만, 으음, 세계의 시스템에 인간이 직접 손을 대는 건 좋지 않거든. 별의 도시의 관리자처럼 세계와 계약을 맺어 세계의 힘을 이용해 접촉해 온다면 모를까.”
나는 문득 이노키언이 세계의 핵심 안으로 훅 스며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드넓은 공간을 헤맸을까. 아마 지금과는 달리 핵심적인 곳을 돌아다니거나, 세계의 핵심 내부만 탐색했을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성장을 고대하며 요동치는 하얀 수정 구슬을 왼손바닥에 올린 채 좀 더 위로 들어 올렸다. 내 의지를 감지한 순간 우주의 정수에서 마력이 벼락처럼 빠르게 쏟아져 이노키언이 가리킨 일대의 잔여 마력을 죄다 지워버렸다.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빨라!’
단순한 마력의 속도만이 아니라, 마법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 상상이 실현되기까지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하긴, 이 우주의 정수는 정화마법석의 모습으로 1년 이상 내 상상과 마법을 받아먹으며 힘을 쌓았다. 우주의 정수로 변화시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한 기간만 해도 그리 짧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지우고자 하는 대상에 한해 이 구슬의 영향력은 무척 막강했다.
“이런…….”
이노키언이 혀를 찼고, 다시 균열을 바라본 나는 흠칫하여 몸을 움츠렸다. 건드려도 아무 영향이 없으리라 예상한 잔여 마력을 지웠을 뿐인데 균열의 상태가 조금 달라졌다. 검은 강이 묵중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그를 따라 세 사람의 기술이 약간 흔들렸다.
“윽.”
나는 신음을 삼켰다. 이노키언의 말한 대로, 그리고 내가 납득한 대로 본래는 잔여 마력을 건드린 정도로 본체에 영향이 갈 리 없다. 하지만 이 정수에 쌓인 강력한 이미지는 잔여 마력을 통해 본체에도 영향을 주고 말았다.
다행히도 악영향은 아니었다. 강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기세가, 강의 크기가, 조금……작아졌다?
균열의 전체 규모에 비해서는 별것 아닌 수준이었지만, 직접 균열을 조율하는 입장에서는 확연한 변화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설령 달가운 변화더라도 조율하는 자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금방 기술을 수습하여 작업을 이어갔다. 별의 도시의 힘도 금방 아까처럼 안정되었다.
나는 검은 강을 수습하는 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슬쩍 우주의 정수를 내려다보았다. 정수의 힘은 검은 강의 잔여 힘을 지운 것으로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해졌다.
세계의 핵심에서 마법을 사용할 때를 대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수를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균열의 힘과 균열의 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며 머릿속으로 상상을 쌓아갈 수밖에는…….
“잠깐 저분들이 작업하는 걸 지켜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응?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탐색하자. 저 균열이 사라지는 데 못해도 8시간은 걸릴 거야. 저들이 균열을 지우는 작업에서 손을 떼는 데는 3시간~5시간 정도 걸리려나.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하지만 더 보고 싶더라도 4시간 후에는 돌아가자.”
조금 더 정수의 힘을 다듬기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싶어 꺼낸 말이었는데, 이노키언은 생각보다 더 내 의견에 협력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노키언은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나요?”
“급하게 움직인다고 금방 필요한 재료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검은 강의 변화에 집중했다. 우주의 정수를 다시 왕관의 홈에 끼우고, 조금씩 약해지며 틈이 좁아지는 검은 강을 보며 다양한 고찰을 했다.
신들의 작업은 내가 하는 상상들과는 꽤 달랐다. 그들은 세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파헤쳐진 공간을 메꾸고 꿰매며 복구했다. 하지만 나라면 저 흔적조차 죄다 지워버리겠지. 적어도 이 우주의 정수에는 그런 꿈이 담겨 있다.
강을 지우려는 방법이 저들과 너무 달라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설령 내 방법이 옳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다. 세계의 핵심을 통해 힘을 사용하기만 하면 세계나 신이 내 힘을 적당히 조율할 테니까.
균열의 삭제 작업을 시작하고 3시간이 지났을 때 세 사람은 균열에서 손을 뗐다. 그림자의 힘이 더 강해진 것이,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관리자들의 힘만으로 충분한 모양이다.
이내 세 사람이 우리 곁으로 이동했다. 나는 우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은하야~!”
“저기! 아까는 죄송합니다.”
“응? 아…….”
“저기 그건, 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라서……안 말렸어.”
이노키언도 슬쩍 눈치를 보며 나를 옹호했다. 유펠라가 이노키언을 돌아보았다.
유펠라와 이노키언이 대화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분홍색 머리카락의 천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잔여 마력을 없앤 것으로 본체에 영향이 올 줄 모르고, 막지 않았습니다.”
“맞아, 신경 쓰지 마. 이노키언 씨도 신경 쓰지 마세요.”
손을 내저은 유펠라와 지친 표정으로 지팡이를 쥐고 있던 디나가 이내 반가운 감정을 표정 가득히 드러내며 웃었다.
“겨우 여기에서 만나네! 여기서 만나니까 괜히 더 반갑다!”
“그러게요. 저도 여기서 은하 님을 만나니까 어쩐지, 안심돼요.”
“저도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디나를 살폈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괜찮나요?”
“신의 힘을 쓰는 게, 보기보다 좀 힘들긴 해요. 본래는 분에 넘치는 힘이어야 하는데, 신의 아이인 터라 신력이 잘 전도되는 체질이더라고요. 놀라셨죠?”
“네…….”
“결국 저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역시 인간으로 사는 게 더 즐거워요.”
쓸쓸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손에 쥔 지팡이를 내려다보던 디나가 이내 평소처럼 생긋 웃었다. 저건 평소에는 감추고 다니는 감정이다. 피곤함 때문에 드러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있어서 마음을 놓은 것일까.
“그런가요.”
“네.”
나는 잠시 이을 말을 고민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디나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았다.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좋아하겠네요.”
“후후, 그건 그렇겠네요.”
디나는 정상적이지 않은 운명이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목숨 등, 세계의 궤도를 벗어난 삶에 예전부터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평범한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신의 아이. 신의 아이인 만큼 ‘평범함’의 범위가 좀 광범위하긴 하지만 말이다.
디나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디나가 원하는 인간의 삶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르펜은 내게 말했듯이 그게 설령 의무감인 책임감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이루어주려 할 것이다.
“아, 은하야. 마주친 김에 소개할게. 이분은 나지스 님의 사자(使者)이자 신계의 천사인 로즈마리 님이셔.”
멀리서 볼 때는 분홍색으로 보였던 머리색은 가까이서 보니 연보라색에 좀 더 가까웠다. 하얀 날개를 지닌 긴 머리카락의 여자 천사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은하 님. 식물 성향의 천사, 로즈마리입니다. 이렇게 만나 뵈어 기쁩니다.”
“안녕하세요, 천사님. 저도 만나 뵈어 기쁩니다. 저희 신계의 천사가 어떤 분일지 궁금했어요.”
로즈마리……. 설마 성향 식물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인가?
문득 천사에게서 낯익은 향이 났다. 하지만 허브 향이라기보다 꽃향기에 가까웠다. 몇 번 맡았던 향인데, 분명…….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어떤 식물 성향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천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순한 눈매에 신비로운 분위기, 꽃향기가 더해져 무척 청초한 인상이었다.
“라일락이랍니다.”
이름과 전혀 다른 식물 성향이셨다. 나는 당황한 심정을 들키지 않게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시군요. 머리색이 무척 예쁘셔서 궁금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나지스 휘하의 천사는 꽃 성향과 나무 성향이 있다고 했는데, 라일락은 나무로 쳐야 할까, 꽃으로 쳐야할까? 꽃나무라서 헷갈린다.
내 최선을 다한 칭찬에 천사가 예쁘게 웃고는 접은 날개 끝을 퍼덕이며 칭찬을 돌려주었다.
“저야말로 그렇게 봐주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은하 님만 할까요. 멀리서 얼핏 봤을 때도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머리색도 마력색도 정말 아름다우셔요.”
“가, 감사합니다.”
술술 나온 칭찬에 퍽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유펠라와 디나는 옆에서 동의하는 의견을 밝혔다.
이내 천사가 내 왕관의 가운데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말했다.
“조금 전 일은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대단한 힘을 품은 마법이네요. 그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동될 날이 정말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누가 직접 제지하지 않는 한은 그 마법의 힘을 마음껏 쓰셔도 괜찮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한순간 입을 벌렸다.
“네? 하지만……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네요. 아까처럼 잠깐 힘이 흔들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금방 수습할 수 있는 범위입니다.”
“아…….”
“그 마법이 완성되었을 때의 이익이 훨씬 크기에 제안하는 것이니, 문제 상황에 관해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껏 마법을 시험해주세요.”
가슴이 조금 벅찼다. 나는 왕관의 가운데 보석을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몇 번을 해도 새로운 도전은 긴장되고 불안한 법이다.
“다행히 괜찮게 만들어지고 있나 보네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랍니다. 정말 기대하고 있어요. …세계 안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세계가 안정되었다면 그게 제일 좋았겠지만요.”
천사가 가라앉은 얼굴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았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천사, 유펠라, 디나와의 대화는 안타깝게도 짧게 끝났다. 그들은 다음 작업을 하기 위해 나와 이노키언에게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했고, 이노키언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는 웃으며 세 사람에게 마주 인사를 돌려주었다.
“…이제 돌아갈래?”
“아니요. 관리자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까보다 상당히 작아진 강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조금 더 다가가 볼까? 아까보다 범위가 좁아지기도 했고.”
“저야 좋지요.”
우리는 그 후로도 1시간 동안 검은 강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다 세계의 축 안에서 나왔다.
수정 구슬 모양인 우주의 정수를 시험 삼아 조금씩 써보면서 소소한 고민을 하나 했다. 이 마법을 최대한의 효과로 발동하기 위해 나는 옷을 차려입고 지팡이를 대롱에 소환하고 왕관을 쓸 거다. 그리고 우주의 정수는 세계의 핵심에 접촉시켜 사용할 것이다.
이번에 만든 우주의 정수, 정화의 씨앗은 나와 연결된 마법인 동시에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이 마법은 세계의 핵심에 넣는다고 다가 아니다. 이 마법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건 나. 그러니 정화의 씨앗이 균열을 조금이라도 많이 없애도록, 최소한 세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도록 내가 잘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아이템 형태의 마법을 그렇게 깊고 세세하게 제어하려면 접촉하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정말 소소한 고민을 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수정 구슬을 잡고 있을까? 혹은 구슬을 허공에 띄우고 지팡이로 겨누어 볼까?
역시 양손으로 꽉 잡는 게 안정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정화의 씨앗을 세계의 핵심에서 발동할 때는 지팡이의 형태를 바꾸기로 했다.
『은하의 팔찌』. 원래는 지팡이의 하위호환 버전이지만, 지팡이 본래의 힘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대롱을 쓴 채로 지팡이의 형태를 바꾸는 건 처음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대롱의 형태를 일시적으로 바꾸어도 되는지 대롱의 제작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오기도 했다.
그 결과 문제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지팡이 전용 형태 변화 액세서리를 구매했다.
마법의 발동 이미지에 대해서도 조금 고민했다. 단순히 균열을 환각마법으로 삼켜 지워버리는 것보다, 별의 고래, 별의 물고기, 별들의 잔치, 이런 것들로 먹거나 삼켜 균열을 지우는 게 좀 더 인상이 강하고 상상하기 쉽지 않을까?
거기다 별의 물고기와 고래는 현상을 해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고래를 불러 분수를 뿜는 것도 좋지. 고래의 분수는 자연과 꿈의 덩어리다. 신기루 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녹여 버린다.
다양한 고민을 거듭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동안 우주의 정수는 자잘한 균열을 파악하고 정화하며 강해졌다.
서서히 여름이 지나갔다.
가슴에서 시작했던 금이 몸 전체로 퍼졌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나는 오랜만에 다시 꿈속에 끌려 들어갔다.
“예쁘네…….”
악몽으로 변했던 진실이 다시 현실을 침범하고 나니, 꿈속 세계에 생긴 금은 점차 없어졌다. 왜냐면 본래 금이 침범했던 건 내 정신이 아니라 육체였으니까. 내 정신은 지금 육체보다 영혼과 가까이 붙어 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육체를 침식하는 금은 상당히 자세히 볼 수 있다. 육체의 병은 악몽으로써 모습을 드러냈고, 그렇기에 지금도 악몽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빠직……빠직…….
나는 시선을 내렸다. 평소에 비해 어딘지 투명해 보이는 바다에 내 모습이 점점 선명히 비쳤다. 정신체인 이 몸을 직접 보면 평소와 다름없이 깨끗하기만 한데, 바다에 비친 내 모습은 온통 검은 실금이 그어져 어두웠다.
가슴에 시작되었던 금이 온몸으로 퍼졌다. 머리, 손, 발, 이제 금이 없는 부위가 없어졌다. 이 육체의 자체 치유력은 현재 어느 정도일까. 손가락에 날카로운 게 스친 정도의 상처가 치료마법 없이는 일주일이 지나도 낫지 않는 게 아닐까.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지듯 실금이 두껍게 벌어졌다. 그것을 성진이의 부적과 하르펜, 예리의 마법이 막고 있었으나, 그들이 말했듯이 육체의 붕괴를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하나둘, 부스러기 같은 조각이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꿈이 왜 나를 불렀는지 눈치챘다. 이것은 경고다.
금이 몸 전체에 퍼지고, 금이 몸을 깊게 침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몸이 한두 군데 눈에 띄게 고장 날 거다. 그러니 각오하라는 본능의 경고였다.
어느새 병에 걸리고 반년이 지났구나 싶어 나는 한숨을 삼켰다.
‘길게 버틴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네.’
이내 수면이 평소처럼 다시 불투명해졌다. 별이 비치지 않는 거친 바다, 어느새 내 꿈속에선 이게 평범한 광경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