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76
놀라는 머리와 별개로 본능은 금방 이 현상을 받아들였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밀려들던 세계의 모든 정보가 한꺼번에 이해가 되었다. 정화의 정수에 담아온 마음에 신력에서 비롯된 신의 ‘권능’이 섞였다.
진정으로 이 세계의 정수가 된 정화의 정수와 함께 나는 이 세계의 시작점을 붙잡았다.
“『──진화하라』.”
원하는 걸 현실로 만들고 바라지 않는 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꿈의 힘과 존재하는 것의 근원을 변화시키는 정화의 힘이 세계의 모든 것을 물들였다.
##53. 영혼의 무게
마른 대지를 적시는 샘처럼 겨우 터진 수원에서 흘러나온 신력은 영혼을 적시고 문장을 통해 온 마력에 스며들었다.
모든 영혼에는 여러 단계의 제어장치가 걸려 있으며, 보통 주어지는 육체에 맞춰 제어장치가 설정되고 힘이 새어 나온다. 제어장치에 걸린 잠금은 극히 드물게 풀리고, 그게 처음으로 풀려나면서 발현되는 것이 영혼의 문장이다.
영혼에 걸린 제어장치는 일종의 가능성이다. 모든 영혼에는 일정 이상의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의 크기나 종류는 각기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영혼이 쓰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힘이라 봉인되었고, 자격을 갖추면 봉인이 하나씩 풀린다.
환생자는 모종의 이유로 영혼의 잠금장치가 풀리거나 영혼의 잠금장치를 직접 풀어낼 정도로 강해진 이들이다. 하지만 영혼의 제어장치가 풀린다고 모든 이가 환생자가 되지는 않는다.
환생자가 된다 해도 영혼의 수명이 닳아버릴 때까지 단순하게 환생의 굴레를 반복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중간에 환생을 기억하는 굴레가 끊기기도 하고, 스스로 굴레를 끊어내 특수한 종족으로 한 세계에 정착해 긴긴 하나의 삶을 살다가 세계와 함께 스러지기도 한다.
그러한 환생자의 종착점 중 하나가 신으로 각성하여 자리 잡는 것이다.
신이란 영혼에 잠재된 가장 위대한 가능성으로, 신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지닌 영혼은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정보로만 기억해뒀던 것들이나 알고 있었지만 잊어버렸던 것들, 혹은 영혼에 각인된 정보가 영혼을 푹 적시고 채웠다. 그러자 여태까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 세계의 정보들이 머릿속에 자연히 떠올랐고 이해되었다.
아아…….
확신했다. 루키아의 힘에 하르펜의 힘, 거기에 더해 지금 또다시 몇 개의 잠금장치가 풀린 내 힘이라면 이 세계의 불안정함을 완벽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의 심연에 닿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건 세계를 관리할 자격을 지닌 신의 권능뿐이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나의 새로운 힘을, 신의 힘을 나는 본능적으로 받아들였고, 이해했다.
신으로 각성해 신력을 깨우치고 영혼의 권능을 해방했다고 해서 영혼이 지닌 개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는 꿈을 다루며,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고, 모든 것의 시작점을 건드릴 수 있다. 다만 신력은 그러한 나의 개성들을 보다 절대적인 위치에 끌어 올린다.
나는 세계의 시작점에 닿고, 균열의 시작점에 닿고, 세계의 역사에 닿고, 세계와 주신이 원하는 세계의 모습을 실체화했다. 정화의 힘이 무수히 많은 것을 조정했고, 루키아의 힘이 그 조정을 세계에 알맞은 방향으로 이끌었고, 하르펜의 힘이 세계 곳곳을 치유했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나는 세계에 잠겨 있었다. 아주 많은 힘과 정보를 보았고, 아주 많은 힘과 법칙을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체감한 시간은 꿈속의 시간이었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 길게 느껴지긴 했지만, 현실은 그다지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깊게 세계에 물들어 공명하고 있던 정신이 겨우 나라는 개인 속에 돌아왔다. 고개를 드는 내 몸을 익숙하면서도 낯선 누군가의 힘이 이끌었고, 나는 그 힘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나는 어느새 잔디를 밟고 서 있었다. 여러 위성이 반투명하게 겹쳐 보이는 낮과 밤이 섞인 하늘. 푸른빛 위주로 예쁘게 가꿔진 정원 한가운데 세워진 하얀 정자 안쪽으로 다과가 잔뜩 놓인 하얀 테이블이 보인다.
그리고 정자의 입구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하얀 원피스에 하늘색 숄을 두른 심플한 차림새로, 하얀색 머리카락에는 꽃핀을 하나 꽂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간 푸른 눈동자가 박힌 눈이 나를 향해 다정하게 휘어졌다.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나는 잔디밭을 걸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생김새는 사진으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진으로 본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비롭고 강대한 힘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공간 역시 강대한 신력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는 우리 세계와 연결된 신계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유은하 님.”
조금 멋쩍어졌다. 루키아도 그렇고 하르펜도 그렇고 나한테 무척 정중하다. 무엇보다 ‘님’이라는 극경칭을 붙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키아 님.”
루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처음 본 기분이 들지 않지만요. 하지만 확실히 직접 만나 뵙는 건 처음이네요. 이렇게 만나 뵈어 무척 기뻐요.”
“네, 저도요. 반갑습니다.”
“꼭 한 번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하지만 주신인지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더군요. 오늘도 웬만하면 초대장을 보내 예의를 갖춰 초대하고 싶었습니다만……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렇게 갑자기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실례를 끼쳐 죄송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앗. 네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루키아는 다행이라고 대답하고는 나를 정자 안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고, 우리는 마주 보며 앉았다.
생각보다 긴장되지 않았다. 나지스나 하르펜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그랬다. 그건 아마 나를 채운 모든 게 아직 얼떨떨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실감 날 증거들이 몸 안팎으로 가득한데도 쉽사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선 신으로 각성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법이라는 힘을 얻고 끊임없이 달려온 내가 결국에는 신으로 각성했다는 것이.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에쉬리안나 님을 떠올렸다.
…………….
생각할 것이, 마음 가는 것이, 새로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생각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축하……할 일인지 사실 애매하긴 하네요. 워낙 책임질 것이 많은 자리라서요. 다른 일이라면 축하만 하고 넘어가겠지만, 동업자가 된 당신께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좋겠지요. 제가 오늘 당신을 신계에 부른 건 당신을 안내하기 위해서니까요.”
루키아는 찻잔에 차를 따라 내게 내보였다. 색깔과 향으로 보아 저번에 하르펜과 만났을 때 내어준 것과 같은 약차였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루키아 폴라리스 크로니클. 크로니클은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삶에서 붙었던 성에서 따왔습니다. 이 세계 를 관리하는 주신이자, 첫 번째 세계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2계급 신으로, 칭호는 입니다.”
루키아에 맞춰 나도 자기소개를 했다. 주신 앞인지라 꽤 부끄러웠지만, 그녀와 비슷하게 소개를 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유은하입니다. 방금 막 각성해서 그런지 애매하긴 한데, 저도 아마 첫 번째 세계의 2계급 신입니다. 칭호는……아직 모르겠어요.”
내가 어느 세계의 신이고 무슨 계급인지, 이건 신으로 각성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보였다. 하지만 각성하고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직함들이 별로 와닿지가 않았다. 루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세계의 신은 대개 다양한 시련을 통해 신으로서 각성하고, 각성과 동시에 칭호를 깨닫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힘을 돌이켜 보며 자신의 칭호를 알게 되지요.”
“시련…….”
순간 떠오른 것은 언젠가 꾸었던 꿈이었다.
나는 딱 한 번 이 세계에서 에쉬리안나 님을 만났다. 꿈에서 만났다. 그때 그분은 ‘시련’을 언급했다.
영혼이 신으로 각성하게끔 이끄는 ‘시련’.
신의 자격을 품은 영혼은 언제든 그 영혼이 짊어진 자격에 걸맞은 시련을 가진 세계에 내려서고, 운명의 흐름에 이끌려 시련을 받으며, 이겨내거나, ─죽는다.
“이 세계는…….”
“네. 이 세계는 운명과 역사가 교차한 결과 신의 자격과 가능성을 품은 영혼이 시련을 받는 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신의 영혼이 내려섰기에 세상이 시련을 내리는 게 아니다. 영혼을 신으로 각성시킬 정도로 거친 운명을 품은 세계가 시련 장소로 선정된다.
“저희 외에도 신의 가능성을 품은 몇 영혼이 우리의 세계에 찾아왔습니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해서 기회가 끝나는 건 아니다. 다음 생에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시련을 이겨낸다 해서 모두가 신으로 각성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는 모든 세계의 근원, 첫 번째 세계를 만들어 낸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을 만났다. 그녀와 약속했다.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순간 내가 신으로 각성할 것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항상 그냥 넘겨버렸던, 세계의 법칙에 의해 넘기고 말았던, 혹은 잊어버렸던 정보가 새삼스럽게 내 가슴을 깊게 찔렀다.
“저랑 하르펜은 좀 예외지만요.”
“예외……요?”
“저희의 시련은 이 세계를 통해 주어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저희가 받은 시련은 은하 님과는 전혀 달랐어요. 무엇보다 저는 이전 삶에서 이미 신으로 각성했었답니다. 그래도 많은 걸 알기 위해서 여행을 계속했지요.”
‘여행’.
세계의 심연을 조사하다가 본 과거의 기억 속에서도 루키아는 그 단어를 언급했었다.
‘여행’이란 신으로 각성한 자가 완전한 신으로 자리 잡기 전에 하는 환생기를 일컫는 말이다. 신으로서의 힘과 경험을 쌓기 위한 수습 과정이기도 하다.
신으로 각성했지만 아직 나는 첫 번째 세계의 신이라고 하기엔 아주 많이 약하다.
“영혼의 개성에 따라 시련의 종류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어요. 같은 경험을 한다고 모든 가능성을 지닌 영혼이 각성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심지어 첫 번째 세계의 신으로 각성하는 경우는 더없이 드물죠. 보통은 그 세계만의 신으로 각성하는 것에 그쳐요.”
내가 알기로 첫 번째 세계의 신은 그 무거운 책임과 필요로 하는 힘 때문에 숫자가 매우 적었다. 첫 번째 신계의 경우 신의 계급은 0계급에서 5계급으로 나뉘고, 0계급은 실질적으로 첫 번째 세계의 창조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창조신 4명이 전부다.
“하르펜은 저와는 또 달랐어요. 그 녀석은 정말 예외 덩어리였어요. 신의 가능성이 넘치도록 보였는데도 오랫동안 자각하지도 각성하지도 못했어요. 나를 쫓는다고 주위를, 심지어는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했거든요. 어쩌면 그것도 그에게 내려진 시련이었을지 모르지요.”
루키아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하르펜은 결국 신의 권한을 인간의 몸으로 성공시켜 신으로 각성하고 말았어요.”
첫 번째 세계의 1계급 신은 힘과 전투 능력을 중시한다. 이 세상은 마음과 상상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일그러진 마음과 마음의 찌꺼기가 모여 만들어진 ‘존재할 리 없는 괴물’. 그것은 대개 물이나 안개처럼 형태 없이 흘러 흘러 세계를 파괴하고 다니나, 때로는 뭉쳐져 자아를 가진 무언가가 된다.
세계의 안정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넘나들며 그 괴물들과 싸우는 자들이 바로 1계급 신들이다.
1계급 신 혹은 그 신도들이 아니고서야 그 괴물을 쓰러뜨릴 수 없다. 그건 물리적인 강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1계급에게 허락된 특수한 힘이 아니고서야 괴물들을 소멸시키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토록 그 괴물은 위험했다.
우리 2계급 신은 그들만큼 강하지는 않으나,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관리하며 아주 많은 세계의 시스템을 안정시킨다.
“……2계급 신은 현재 몇 명인가요?”
“음……. 저도 한동안 안 가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루키아가 손가락을 꼽고는 확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저희를 포함해 10명이에요. 그중 셋은 아직도 여행 중이고요.”
나는 이내 방금 전 그런 질문을 한 이유를, 본론을 꺼냈다.
“성진이는요?”
그는 우리 세계의 주신인 루키아보다 강하며, 그의 영혼은 결코 나에게도, 그 어떤 신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많은 삶을 경험했다.
초월자이지만 아직 세계라는 범위에 얽매이고 있을 때는 미처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신의 영혼에 뒤지지 않는 영혼. 그건 신밖에 없다.
루키아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미묘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신 대로에요. 그는 저희보다 먼저 각성한 첫 번째 세계의 신이에요. 계급은 저희와 같아요.”
“여행……중인 건가요?”
“네. 그는 맹약자를 찾을 때까지 여행을 하겠다고 첫 번째 세계에 고했어요.”
“…….”
나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먹먹한 기분으로 주먹을 쥐었다.
역시 그랬구나. 역시 성진이도 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2계급 신 중에서는 3번째로 각성한, 2계급 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각성한 초기 신으로, 가진 권능은 세계의 존속을 좌지우지하는 ‘종말’이었어요. 때문에 여행 중간 중간 가끔씩 신의 역할을 짊어졌어요. 같은 계급이라도 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분이세요.”
칭찬을 하면서도 루키아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음, 자주 싸운다고 했지.
조금 망설였으나, 나는 이내 물어보았다.
“여행자는 다른 환생자에 비해 빨리……원래의 힘을 되찾는다고, 알고 있어요. 물론 세계관에 따라 많은 제한이 있겠지만…….”
루키아는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개는 그래요. 하지만 이 세계는 신의 시련 장소로 선택되었죠. 그리고 이성진은 맹약에 의거해 이 세계에 흘러들었어요.”
“네…….”
“하지만 이성진은 이미 각성한 신이기에 시련의 대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계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시련이라는 운명의 흐름을 모두 뒤엎어버릴 힘을 가진 이분자지요.”
“…….”
“때문에 저희와 세계는 그에게 적합한 역할을 주어 제한을 거는 것으로 세계에 들어오는 걸 허가했어요.”
불안감에 나는 눈꺼풀을 몇 번 빠르게 깜빡였다.
“역할이요?”
“네. 이성진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련의 도우미예요.”
이어진 단어에 좀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모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 명칭을 곱씹었다.
“도우미라고요…….”
“예상보다 시련이 너무 힘들어졌거든요. 그래서 필요했어요. 정말로 위험할 때 세상의 멸망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이끌어 줄 자가요.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역할이지만, 그는 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해결해 온 신이에요. 훌륭히 역할을 완수할 만한 인재였고, 맡겼어요.”
“…….”
“무엇보다 이번 시련의 중심인물이 맹약자인 당신이었기에 이성진이 도우미로 제격이라 판단했어요.”
내 질문은 성진이의 실력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이 역할이 성진이의 힘을 제한……했다는 거겠지.
“도우미이기에 그의 실력은 이 시련의 중심인물인 당신의 실력에 맞게 풀리도록 설정했어요.”
나는 모아 쥔 손에 꽉……힘을 줬다.
성진이는 언제나 우리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나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강해져도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 다만 뒤엎을 수 없는 차이가 난 적도 없었다.
문득 로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진이의 운명은 그리 크지 않고, 우리의 운명에 섞여 있다. 멸망을 물리치고 세계를 되살리는 우리의 운명에 섞여 있다. ……내 운명에 제한되고 있었다.
“…….”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성진이가 여행자의 법칙대로 힘을 보다 빨리 되찾았더라면 분명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감성과는 달리 신의 이성이 내게 현실을 고한다.
이 세계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딛고 복원되었다. 시련을 딛고 살아남아 찬란하게 빛나는 자들이 전력을 바쳤기에 복구에 성공했다.
신의 힘은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다. 수많은 세상을 유지시키는 다양한 법칙과 세계가 살아있기에 생겨나는 다양한 흐름을 뒤엎을 수 없다. 하물며 성진이의 권능은 ‘종말’. 세계의 죽음을 미룰 수는 있겠지만 세계를 소생시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니 발버둥을 잠시라도 멈출 만큼 기댈 수 있는 이가 있었다면 분명 이 세계는 멸망했겠지. 성진이 한 사람의 힘이 트라베리아보다 훨씬 강했더라면 세계의 멸망이 목전까지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며, 그를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성진이 외의 사람들은 지금만큼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세계와 운명을 함께하는 주신으로서 루키아는 공정한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까지 치달았어야만 했던 걸까요.”
그래도 차마 그렇게 묻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루키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운명의 흐름이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었을까요.”
공정함을 기하는 신의 눈동자가 깊은 세월을 품고 가라앉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이어진 의외의 말에 나는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충족된 삶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동시에 나태하게 만들어요. 온실에서 자라온 꽃은 사막으로 나가면 바로 시들고 말죠. 인간이었던 저는 그에 관한 가능성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신이 될 가능성을 품었던 만큼 그 세계에서 제일가는 실력자였어요.”
“…….”
“그래서 저는 그 세계의 어떤 위기를 미리 눈치챘어요. 아주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사전에 깨달았어요. 그래서 원인을 조기에 없애 버렸죠. 두 번째까지는 혼자 해결하는 게 가능했어요.”
수많은 삶을 거쳐 신이 된 루키아의 말은 무척 무거웠다.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겼다.
“하지만 세 번째 이후의 재앙은 제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반복해서 덮쳐온 파도로 인해 그 세계는 결국 멸망했어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저와 하르펜 둘 뿐이었고, 세계는 빠르게 빛을 잃었어요.”
“…….”
나는 창백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루키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특히 신이 없는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죠.”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천천히 숨을 삼켰다.
“자주……있다고요…….”
“사람이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계는 항상 움직이며 변화하는걸요. 세계를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루키아는 가까이 있던 작은 카스텔라 조각을 입에 넣었다. 카스텔라는 소리 없이 루키아의 입 안에서 녹았다.
“살아 있는 무언가에는 많은 굴곡이 찾아와요. 굴곡을 이기고 나아가거나, 패배해서 망가지거나, 죽거나……. 신이 있으면 그 굴곡이 세계와 세계 안의 생물이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조절되어요. 하지만 그 세계에는 신이 없었고, 결국 생물들은 이겨내지 못했지요.”
“…….”
“하지만 모든 사건 사고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법이에요. 패배의 그림자가 짙더라도 승리의 가능성은 반드시 있어요. 하물며 그게 세계의 명운을 거는 것이라면요. 신이 없다고 해도 세계가 멸망을 원할 리 없잖아요.”
우리 세계도 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서 트라베리아에게 힘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까지는 몰랐지만, 아직은 사람이 남아있었을 때, 아직은 세계와 고향 행성이 살아 있을 때 어떻게든 회생 가능성을 찾고자 많은 조사를 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그러다가 세계의 완전한 멸망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문득 알게 된 거예요. 몇십 몇백 년 전에 나타난 위기들이 멸망을 막기 위한 초석이었다는 것을.”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숨을 삼켰다. 세계의 멸망, 수많은 죽음.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그냥 혹시나 했던 거였어요. 그때 저의 기록을 이용한 예측은 이미 상당한 경지였거든요.”
좋은 기억이 아니기 때문인지 루키아도 말을 하면서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이었다.
“만약 내가 처음으로 막은 위기의 전조를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전란은 우리 행성을 덮었을 거고, 많은 사람이 죽었을 테지만, 그렇게 죽는 이들 중에 그때의 제 친구나 가족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주 많이 강해졌겠죠.”
“…….”
“두 번째 위기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위기는 우리가 살던 행성계를 어지럽혔겠지만, 그래도 또 한 번 위기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멸망의 파도에 대항할 만한 힘을 습득했을 거예요. 뿐만이 아니라 많은 연구가 성행하여 새로운 기술과 도구가 만들어졌을 테고, 세계도 더 큰 위험에 대비를 할 수 있었겠죠.”
“…….”
“그건 결국 저 혼자, 혹은 저와 하르펜 둘이서는 막을 수 없는 파도였던 거예요. 살아있기에 세계는 때로는 아파하고 병들지만, 그래도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에, 세계가 자아낸 역사의 흐름에, 운명에, 이유가 없을 리 없었어요.”
루키아의 호흡이 조금 빨라졌다. 내쉴 뻔한 한숨을 겨우 삼킨 것만 같은 소리였다.
“원래 그 위기는 예측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그래야 하는 흐름이었어요. 세계가 그렇게 정했어요. 하지만 그 세계에 차원 도서관이나 초월자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 저는 젊은 나이에 초월자의 힘을 갖췄고, 신으로 각성할 소질을 지녔죠. 읽어 내었고, 선택했고, 그 결과가 그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숨을 삼킨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숨과 함께 뛰쳐나올 것만 같은 감정을 억눌러 참았다.
“저는 결과적으로 온실에서 자란 꽃을 적응 기간도 없이 사막으로 내치고, 빙하 한가운데 떨어뜨린 거예요.”
루키아는 다시 침착해진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신이 되고 긴긴 여행을 하며 다양한 세계를 보아온 지금도 생각해요. 나의 첫 번째 세계는 왜 그렇게 극단적이어야만 했던 걸까요. 모든 것이 평화로울 수는 없더라도, 좀 더 안정감 있는 행복한 결말로 향해갈 수는 없었던 걸까요.”
아까와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무게로 그 말은 내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삶에는 항상 위기가 공존하는걸요. 그 풍파에 의해 죽기도 하지만, 그 풍파에 의해 강해지고 살아남는걸요.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대가를 바치고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은걸요. 우리 모두 안타깝지만 그렇게 강해졌잖아요.”
그래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키아도 나도 그렇게 강해졌다. 그렇게 이 자리에 섰다. 그래서 차마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럴 기력도 나지 않았다.
“당신이 그냥 세계 안의 사람이었다면 그냥 원망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게 세계든, 이성진이든, 저희든지요.”
“…….”
“하지만 당신은 저와 같은 신이 되어 여기 왔어요. 물론 당신은 책임이 무거운 첫 번째 세계의 신위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요. 그래도 당신의 영혼이 신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죠. 이건 그런 당신에게 보내는 충고이자 조언이랍니다. 달갑지는 않으시겠지만 마음에 담아주세요.”
“네…….”
가슴이 무겁고 막막하여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루키아는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의 법칙과 흐름이 항상 저의 첫 번째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경우처럼 극단적이지만은 않아요.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이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요.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건 사고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도, 절망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세계의 의도조차 뒤집어엎을 힘이 있지요.”
“……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정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알고 있던 것은 물론 알게 된 것 전부, 부디, 언제나, 그 무게를 곱씹으며 심사숙고하길 바라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루키아의 충고에 대한 대답이 아닌, 그녀가 하인리히에게 남겼던 나만이 읽을 수 있는 기록서의 내용이었다. 아카식 레코드 도서관에 도달한 무렵부터 꺼내어 읽지 않게 된 기록서.
그 기록서의 첫 장에는 읽는 이를 충고가 적혀 있었다.
『나 역시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세계를 좀 더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위한 지침서다.
기록을 읽는 자여, 새로 알게 된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 무게를 곱씹으며 수십 번 생각하고 고민하라. 쉽게 쥐고 비틀지 마라.』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과거의 루키아는 언젠가 세계를 휩쓸 시련을 뛰어넘어 신으로 각성할 누군가를 위해 기록서를 남겼다. 그 기록서는 명실상부 나를 위한 지침서였다.
그리고 첫 번째 장에 적혀 있던 루키아가 저지르고 만 실수란 방금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겠지.
어쩐지 의표를 찔린 기분에 나는 또 한 번 주먹을 꽉 모아 쥐었다. 원망이나 답답함, 슬픔이나 안타까움, 그런 무거운 감정들이 진득하게 녹아 가슴을 어지럽혔다.
루키아가 한 선택을 이해한다. 만약 나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더라면, 최소한 내 소중한 사람들만이라도……. 루키아도 그런 마음으로 선택한 거겠지. 하지만 결과는…….
‘우리는 다들 세계 하나 정도는 짊어질 수 있는 힘을 지녔어. 그래서 한 번의 실수에 세계가 휩쓸린다. 그래서 신은 쉽게 사람의 역사에 끼어들지 않아.’
간접적으로밖에 접하지 못했던 신의 역할에 담긴 위중함이 좀 더 깊고 무겁게 내 가슴에 다가왔다. 나지스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루키아 같은 예를 알았기 때문이겠지.
“각성하기 전부터, 각성한 직후에도 무지로 인해 죄를 저지르는 신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성진만 해도…….”
나는 흠칫 눈을 크게 떴다. 이 화제에서 성진이의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오해가 없게끔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성진의 이야기는 그에게 미리 허락을 맡고 하는 거예요. 당신에게라면 자신의 어떤 이야기라도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했어요.”
“저기, 성진이가, 무슨…….”
다급하게 묻는 나에게 루키아는 조금 전과는 달리 골칫덩이를 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삼켰다.
“죄의 무게만 따지면 저보다는 나아요. 하지만 저보다 더 확실하게 죄를 저질렀어요.”
“어째서…….”
“그는…….”
루키아는 성진이의 허락을 받았다 했음에도 한순간 내 눈치를 봤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세계의 시간을 뒤엎을 뻔했어요.”
“시간을…….”
“네. 의도적으로 헤집었어요. 중간에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느꼈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더군요.”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