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77
그 순간 나는 떠올렸다.
과거, 나는 딱 한 번 성진이의 정신세계에 들어갔고, 그의 과거를 보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 그가 했던 말. 그것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며 머릿속을 휩쓸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시간의 힘을 얻고 세계를 뒤져봐도 너는 없었어. 피의 맹약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생을 하면 곧바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믿었는데…….’
‘피의 맹약이 이루어졌다는 걸 깨달은 건 각성 후였어! 인간일 때의 기억은 흐려져.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피의 맹약의 내용이 뭐였지?’
시간의 힘, 각성, 세계를 뒤지다…….
나는 흠칫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굴렸다.
“설마…….”
불안으로 인해 몸이 떨렸다. 나는 가슴의 고통을 억누르며 겨우겨우 말을 짜냈다.
“나를 찾으려고…?”
루키아는 내가 그걸 예측해 낼 줄 몰랐던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끄덕였다. 수긍해 버렸다. 나는 숨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
“이성진은 황혼의 신이에요. 죽음, 시간, 모든 것이 언젠가는 맞이하는 종말의 법칙을 관장하죠. 드물게도 시련을 겪지 않고 각성하는 신이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단적이나마 자신의 힘과 관련된 사건을 겪고 각성해요.”
하르펜은 결과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것으로 ‘생명의 신’이 되었고, 나는……잘은 모르겠지만 세계를 복구하는 위업을 해내어 신으로 각성했다.
“이성진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각성했어요.”
“……!”
“종말의 힘을 다루는 신답죠?”
확실히…….
“어쩌면 반려인 당신이 죽은 것에 영향을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혹은 피의 맹약을 맺으면서 영혼의 등급이 확 끌어올려졌을지도 몰라요.”
“피의 맹약에 영향을 받았…다고요?”
루키아는 나를 몇 초간 바라보고는 확신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두 사람을 제가 주관하는 세계에 두고 보니까 알겠어요. 당신은 그놈보다 영혼의 등급이 높아요. 아시잖아요? 반려 계약은 동등해지기 위한 계약이에요. 힘이나 계급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십상인걸요.”
그래, 그랬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보고 그걸 확실히 알게 됐다. 장수종이 단명종과 계약하여 서로의 수명을 맞추거나 공유하고, 상위종이 하위종과 계약하여 힘을 나눠준다. 피의 맹약도 본래는 그런 반려 맹약이었다.
나는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의 힘을 받아 환생했고, 그 시점에서 영혼은 신이 될 가능성을 품었다.
“같은 계급이라고 영혼의 가능성이 동등하지는 않아요. 이성진이 저희 2계급 신 중 두 번째 실력자거든요? 참고로 첫 번째 실력자는 첫 번째로 탄생한 2계급 신이셔요. 어쨌거나 이성진이 저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주신의 권한을 써서 겨우 이성진의 영혼을 제대로 재어 냈는데, 그게 가능했는데, 당신의 영혼은 지금도 제대로 안 보여요.”
나는 문득 가슴에 손을 올렸다.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과 약속을 나누고, 그분의 힘을 통해 환생해서일까.
“이 표현은 좀 약하네요. 은하 님, 당신이 회색 영역이라 부르는 곳의 근원지인 ‘시간의 집합소’에 들어가서 봤던 것들을 한 번 돌이켜 봐주세요. 당신에 관한 시간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었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인 내가 보려고 했음에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저나 이성진의 시간은 세계가 보호해 가린 게 맞지만, 당신의 시간은 아니에요. 세계조차, 주신인 저조차 당신의 모든 것을 관측하고 기록할 수 없어요.”
그게 아공간을 포함한 에쉬리안나 님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루키아의 말대로 내 영혼의 등급이 높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계조차 나의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문이의 가설은 맞아떨어졌다.
“…그게 이성진이 시간을 헤집었던 원인이겠지요.”
이어진 말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신으로 각성하여 자신이 살던 세계의 시간을 뒤졌지만 그는 결국 과거의 시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해 내지 못했어요. 찾고 또 찾다가 도가 지나쳐 그 세계의 시간을 망가트릴 뻔했으나 이성진을 안내하러 찾아온 신이 그를 멈춰 세운 것으로 그건 면했다고 해요.”
모아 쥔 손끝이 차가웠다. 성진이라면……성진이라면 할 법하다. 전생의 그 녀석이라면 해버릴 것이다.
“그 후에 어떻게 수습을 했다지만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심지어 다른 차원에도 영향이 갔다더라고요. 세계의 외벽이 깨지거나, 법칙이 일그러지거나, 다른 세계의 법칙이 새어 들어오거나, 사건 사고가 많았다고 하네요. 천만다행으로 직접적인 생명 피해는 없었다더군요. 관여한 신들이 우수했던 덕이죠.”
“…….”
“이성진은 그때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신이었으니까요. 직접적인 수습은 다른 신이 대신해주었어요. 그래도 책임은 져야 하니까, 선배들에게 훈계 받고, 신의 힘과 책임에 대해 배우고, 피해가 미친 세계에 사죄하러 가고, 힘을 나눠주고……그러느라 새로이 환생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대요.”
직접적인 생명 피해가 없는 건 다행이지만 아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그 사건이 성진이와 당신의 맹약을 일그러뜨린 주범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네?”
뛰어난 통찰력과 예측능력을 지닌 기록의 신이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저희가 저지른 죄는 업으로 변해 영혼에 들러붙어요. 다루는 법칙에 따라 같은 죄라도 무게나 죄를 갚는 방법이 꽤 달라지긴 하지만요.”
나는 긴장과 함께 침을 삼켰다. 루키아는 어느새 비워진 자신의 찻잔에 또 한 번 차를 따랐다. 그걸 보고 나는 얼마 마시지 않은 찻물을 한 모금 삼켰다.
“저는 결과적으로 세계가 멸망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의 신으로서 저는 기록과 역사와 사고(思考)에 특화된 능력을 지녔죠. 때문에 환생을 하는 동안 커다란 사건을 예측하고 만나면서도 중요한 운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벌을 받았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눈앞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지요.”
“…….”
신음이 새어 나올 뻔해 나는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루키아의 첫 삶을 생각해도, 우리 세계를 보아도, 감정이 메마르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는 뻔했다.
“모든 삶이 그렇지는 않았어요. 세계마다 조금씩 달랐죠. 신으로 각성하면서 벌이 조금 약해지기도 했어요. 특히 이성진이나 하르펜, 다른 같은 계급의 신을 만나면 관여할 수 있는 게 많아졌어요.”
루키아의 얼굴에 그려진 조소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순간 원래대로 돌아왔다. 엄한 표정으로 루키아는 자신의 예상을 읊었다.
“이성진이 저지른 일은 수습되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수습하지는 못했지요. 거기다 저와는 달리 보다 확고한 자신의 의지로 죄를 저질렀고, 그 위협은 자칫하면 여러 세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건 무거운 죄이지요.”
“네…….”
아니라고,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저의 벌은 역사를 지켜보는 방관자였어요. 저의 칭호 및 능력과 관계가 있는 벌이지요. 그렇다면 이성진의 벌은 시간, 죽음, 종말과 관계된 것이겠죠. 맹약을 맺었는데 대가가 주어졌을 것이라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만나지 못하다니, 예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요. 죄가 얽혀서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까지 차이가 벌어진 게 아닐까요?”
나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보다 오랜 삶을 산 루키아와 성진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성진도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확신은 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저도 그랬거든요. 저는 이성진에게 그게 벌일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도 못했어요.”
신의 죄도 벌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법칙을 관리하는 신이기에 관장하는 법칙을 어겼을 때 그토록 무거운 벌이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루키아는 또 하나 과자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루키아는 먹는 것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그걸 따라 나도 이번엔 카스테라 한 조각을 나이프로 잘라 입에 넣었다.
“이참에 당신과 이성진의 맹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으시겠어요? 이성진에게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세를 많이 졌어요. 조금 정도는 빚을 돌려주고 싶어요.”
루키아의 눈가가 또 한 번 살풋 찌푸려졌다. 잠잠한 표정이 성진이를 언급할 때마다 찌푸려진다. 그러나 목소리와 태도에는 정이 담겨 있다. 하르펜이 말한 대로의 사이가 맞나 보다.
루키아의 제안은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였다.
“되도록 당신과 성진이가 맺은 맹약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이성진은 하필 인간일 때, 젊을 때 맹약을 맺어서 맹약의 내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전생의 일들을 설명했다.
“전생에 제가 불치병에 걸렸을 때…….”
전생에 이번 생과 같은 불치병에 걸렸던 것. 그 세계가 내가 알기로는 딱히 마법 같은 능력이 없는 세계였으며, 실제로 나에게도 그런 특별한 능력은 없었던 것.
맹약을 맺은 시기, 맹약을 맺은 방식, 맹약의 내용. 성진이가 맹세한 것과 내가 맹세한 것.
필요한 일이었지만 말을 이을수록 마음과 함께 몸까지 무거워졌다.
맹약이 꼬인 결정적인 이유는 내 말에 있다. ‘내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다시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마음속으로 몰래, 충동적으로 바란 그 생각 하나로 성진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맹약을 정당하게 끝맺음 짓지 못하게 됐다.
……나는 어쩌면 루키아가 말한 죄와 벌을 약소하게나마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성진이한테까지 미치는 게, 너무…….
루키아는 나에게 전해 들은 말을 만년필을 움직여 기록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성진이가 만들어주었다는 그 만년필인 것 같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루키아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피의 맹약을 어떻게, 어디서 알았나. 그 말에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밖에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어째서 피의 맹약을 떠올렸나. 그건 아마 환생 후 인연을 잇는 방법을 그것밖에 몰라서였다.
“흠…….”
이야기가 끝난 후 루키아는 한동안 자신이 기록한 글들을 들춰보며 고민에 잠겼다. 무심코 죄책감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제가…….”
“네?”
아차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나는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을 끝맺었다.
“제가 충동적으로 그런 걸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꼬이진 않았을 텐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충동적으로, 인가요.”
“네…….”
답답한 심정에 긴장감까지 더해져 나는 침을 여러 번 삼켰다.
잠시 침묵하던 루키아가 방금 적은 기록들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루키아의 주위로 하얗고 푸른 마력이 점멸했다.
힘이 가라앉은 후 루키아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 보았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려요. 덕분에 좀 알겠어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달려들고 싶은 감정을 삼키며 초조한 심정으로 루키아의 말을 기다렸다. 루키아가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겼다.
“일단 방금 당신이 한 말에 대한 제 견해를 전할게요. 당신이 조금……어긋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계신 것 같아서요.”
“어긋나게요?”
“네. 두 분의 상황이 꼬인 건 굳이 따지자면 맹약의 무거움을 알지 못하고 맹약을 맺은 것부터죠. 그 안에 포함된 조항 때문이 아니에요. 그건 그다음에 일어난 문제예요.”
“하지만……!”
반론하려는 내 말을 루키아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막았다.
“당신은 ‘환생 후 상대가 나임을 몰라보더라도 나를 다시 좋아하게 되면 좋겠다. 그래서 환생했을 때 나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충동적으로 뺐다.’ 그렇죠?”
죄책감으로 쓰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안으며 나는 빠르게, 거듭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피의 맹약을 맺겠다고 그날 바로 떠올려 실행했나요? 환생 후를 불안해하며 고민하고, 그런 끝에 피의 맹약을 떠올리고, 어떤 말로 맹약을 맺을지 정하고……. 긴 시간 고민하며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되는데요?”
“그건…….”
“당신은 맹약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했다면서요? 그런데 한순간의 충동으로 그런 불리한 조약을 바란다고요?”
치직……치지직…….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심장이 쿵쿵 두드려지는 불안한 기분을 어떻게든 참기 위해 귀를 매만졌다.
“제가 알기로 당신은 꽤 신중한 성격이에요. 만일의 경우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죠. 불안이 있다면 끝까지 신경 써요. 아닌가요?”
“그건……!”
무심코 눈을 꽉 감았다.
“그렇다면 충동적으로 맹약에 넣어야 할 조항을 빼는 건 무척 당신답지 않다고 생각되는데요.”
“…….”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맹약을 떠올리고 실행하겠다고 마음먹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요? 이성진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맹약 때 할 말을 전부 충동적으로 꺼냈었나요? 미리 생각해 둔 게 아니라?”
호흡이 점점 빨라졌다. 손이 떨리고, 머리의 두통이 강해졌다.
쩌저적……쨍!!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두통과 노이즈가 사라지고,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맹약을 맺던 때의 상황을 평소보다 선명히……떠올려 냈다.
맹약에 대해 떠올리고 맹약을 맺고자 전생의 성진이에게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확실히 나는 제법 긴 시간을 소요했다. 피의 맹약을 맺고자 하는 결심은 제법 확고했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많이 고민했다.
맹약이 이루어질 거라는 나의 확신과는 별개로 마법 같이 특수한 힘이 없는 세계에서, 그것도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가 내세의 약속을 꺼내다니. 아무리 날 좋아하는 남친을 상대로 하는 거라지만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꺼내고자 결론 내렸고, 전생의 남친은 생각보다 쉽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내가 장르 소설 작가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피의 맹약 말고도 가끔 판타지스럽거나 오컬트틱한 것을 사 모으거나 시험해 보곤 했으니.
확실히 나는 피의 맹약을 맺으며 할 말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그리고 실행했다. 본래는 ‘나를 알아보기를’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충동적으로 뺐다.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를 사랑하길 바라는 작은 욕심과 함께.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루키아의 말이 맞았다. 내 미래를 일부 알았던 과거의 내 입장에서, 피의 맹약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 알고 있었던 내 입장에서 그건 꽤나, 상당히,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나는 가끔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긴 한다. 하지만 환생 후의 만남을 기약하는 무거운 맹약에, 충동적으로? 심지어 맺은 다음 죽기 전까지 후회하지도, 다시 돌이키지도 않았다고?
“깨달으신 모양이네요.”
혼란스러워 머리를 짚는데 선명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되돌렸다. 루키아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맑은 눈빛에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맹약은 고위 종족, 그야말로 저희 같은 신이 사용하는 맹약이에요. 두 분은 맹약을 맺을 때 마법 등의 힘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고 했지요? 하지만 고위 계약을 맺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해요. 그건 은하 님도 인지하고 계실 거예요.”
“……네.”
성진이는 환생하여 만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는 성진이에게 그것을 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맺은 맹약의 흔적을 보지 못한다.
맹약이 꼬인 근원적인 이유가 맹약의 무거움을 모르고 맹약을 맺은 대가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루키아의 말대로 약간 어긋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분은 피의 맹약을 맺기에 적합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대신하기 쉬운 대가인 힘을 대가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두 분이 가진 다른 무언가가 대가로 대체 되었겠지요.”
사실 그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피의 맹약을 맺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피의 맹약이, 세계의 법칙이 우리에게 제시한 대가였다.
상대가 환생 후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피의 맹약을 맺겠느냐. 세계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환생 후에도 만날 수 있고 서로를 좋아하게 되게끔 인연을 연결하되, 상대방이 맹약자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상대방이 맹약자임을 알리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모른 채로 맹약의 증인인 세계에 긍정의 대답을 돌려줬다.
“당신은 충동적이고 어리석다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말하고자 했던 하나의 조항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그 대가를 받아들였어요. 적어도 맹약의 증인인 ‘세계’는 그렇게 인식했어요. 그뿐인 거예요.”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부, 루키아의 말 대로였다.
“그러니 이건 조항의 문제가 아니에요. 애초에 피의 맹약을 맺고자 의식을 치렀을 때부터 두 분의 관계는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흔들리는 호흡과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성진과 유은하의 관계는 전생에 맺은 피의 맹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가 만난 것도, 전생과 현생의 관계가 꼬인 것도, 피의 맹약이 원인이다. 하지만 인연을 맺지 않고 그냥 죽는다는 건……만날 기약 없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건……전생의 나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피의 맹약은 영혼을 동등하게 묶는 맹약이죠. 그러니 당신들이 대가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자연히 영혼의 등급이 보다 낮은 쪽이 더 무거운 대가를 지게 돼요.”
“…….”
나는 이번엔 왼손으로 입을 꾹, 눌러 가렸다.
전생의 나는 내 미래를 일부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맹약이 성립되어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피의 맹약도 그 미래를 통해 알았고, 그래서 피의 맹약을 맺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관계는…….
나는…….
“피의 맹약을 맺을 때 이성진에게 제시된 대가는 ‘시간’일 거예요. 전에 그와 맹약의 대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는 대가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맹약의 대가가 무엇이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떠올렸다고 해요.”
“…….”
무엇을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호흡을 고르는 게 벅차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의문에 대답하듯이 루키아의 말이 이어졌다.
“맹약을 맺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대요. ‘설령 맹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겠지.’”
“……. 그건…….”
목멘 소리를 침을 삼켜 되돌렸다. 무거운 마음에 시선을 내리던 나는 이내 어떤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럼 성진이가 짊어진 벌, 은요?”
루키아는 성진이가 받은 벌이 시간, 맹약의 대상인 나와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것이 피의 맹약이 꼬인 원인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사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시간의 차이가 본래부터 맹약의 대가였다? 심정이 복잡해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키아는 오히려 납득한 것처럼 손을 모았다.
“맞아요. 그래서 두 분의 맹약이 꼬인 게 아닌가, 그 ‘시간들’이 원인인 게 아닐까 추측한 거예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루키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설명해 드릴게요. 본래라면, 그 정도의……장수종으로 여러 번 환생을 거칠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면, 이성진의 능력과 성격이라면, 그냥 피의 맹약의 대가일 뿐이라면, 어떻게든 더듬어서 힘으로 대가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성진이는 신이 되었는걸요. 하물며 피의 맹약은 신들이 맺는 맹약이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나도 신이 됐지. ……확실히 이쯤 되면 대가를 억지로 힘으로 채워 풀어내는 게 가능하다. 보통이라면 그렇다.
“그런데 신조차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게 있어요. 그건 바로 업, 신으로서 저지른 죄와 벌이에요.”
“네…….”
“이성진의 본래 대가는 ‘맹약의 대상자를 만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그것뿐이라면 환생을 4, 5번 하는 것으로 끝났을 거예요. 아무리 당신의 영혼의 등급이 높더라도, 이성진도 신이 되었잖아요.”
“그런가요…….”
“그래서 이성진 본인도, 저희도 이렇게까지 못 만나는 걸 이상하게 여긴 거고요.”
루키아는 여러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 시간에 벌이 더해진 거예요. 맹약의 대가에 벌이 더해지면서 대가가 확 무거워지고, 그러면서 맹약이 확 꼬여버린 거죠.”
“…….”
“영혼을 묶는 인연의 실은 굉장히 복잡하고 섬세하거든요.”
“…….”
맹약에 벌에 영혼에 세계의 법칙에 의거한 대가. 알지 못하는 내용들이 줄줄 이어져 일단은 루키아의 말을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고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키아는 다시금 자신이 쓴 기록을 훑으며 만년필로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성진은 당신을 만났으니 여행을 끝내고 신으로 돌아가겠죠. 거기다 당신을 만났으니 어쨌거나 이성진이 짊어져야 할 벌도 맹약의 대가도 일단은 끝난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대가인데, 신이 되어 힘을 대신할 수 있는데도 맹약이 꼬인 탓에, 혹은 성진이의 업에 물들어 일그러지고 희미해진 탓에 그 맹약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문득 내 영혼을 확인했다. 신이 되었기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내 영혼이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역시 맹약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영혼을 잇는 인연의 끈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맹약의 법칙 속에 답을 찾자면……아무래도 영혼의 힘이 동등하지 않은 게 문제이지 않나 싶네요.”
“……하르펜 님도 그런 말을 했어요.”
돌이켜 보면 그도 나와 성진이가 보낸 시간이 너무 차이 나는 것과 그로 인해 힘의 차이가 너무 벌어진 점을 신경 썼다.
“하르펜도 각성이 늦었다 뿐이지 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으니까요. 다만 기술의 차이 때문에 무언가를 파악하는 능력은 제가 더 뛰어나요. 단순 이해력만이라면 그 녀석이 더 뛰어나지만요.”
이내 무엇을 떠올렸는지 루키아는 피식 웃었다.
“그래봐야 우리 둘 다 아직 햇병아리 신이지만요. 타인의 일이었다면 이성진도 바로 간파했을 텐데, 자신의 일인데다 하필 대가가 복잡하게 꼬인 탓에 인지능력이 저하되어서…….”
한숨을 삼킨 루키아가 곧 결론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이란 즉 맹약을 풀 유력한 방법이었다.
“은하 님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설명하긴 했지만, 결론은 지극히 간단하고 당연해요. 설명이 길어진 게 죄송할 정도로요. 다만 실천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나 할까요.”
시간에 대등하지 않은 힘. 이쯤 되니 그 결론이 무엇인지 감이 왔다.
보낸 시간과 힘이 대등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대등해지면 된다.
“은하 님이 이성진과 대등한 수준으로 강해지면 돼요.”
역시나. 나는 입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설령 일그러지고 꼬였다고 해도 피의 맹약은 남아 있고, 두 분은 반려예요. 계약을 새로 맺지 않더라도 신과 반려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 은하 님이 이성진과 대등해져 다시 확실하게 맹약의 주체를 잡는다면, 분명 영혼의 흔적과 일그러진 인연의 고리를 정화할 수 있겠죠.”
“…….”
한동안 멍하니 루키아를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앞에 있는 과자를 쥐어 입에 넣었다. 불안해지거나, 생각이 많거나, 감정이 진정되지 않을 때 무언가를 입에 넣는 게 요즘 습관이 되었다.
소설을 쓰면서 단 걸 찾게 되거나,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 먹거나, 고민에 잠긴 나를 보고 성진이가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거나. 그런 식으로 먹을 것을 찾거나 입에 넣는 이유가 점점 늘어났던 탓이다.
감각……그래, 감각.
육체의 금이 벌어지며 육체는 계속 약해지고 있다.
그런 와중 신이 되었다. 신이 되었기에 완벽하진 않지만 육체와 영혼을 스스로 연결해 묶을 수 있고, 내 생명을 건드릴 수 있다. 즉 지금의 나라면 이 육체의 수명을 스스로 늘릴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유은하로 탄생하며 부여받은 이 육체는 인간의 것. 부서진 상태에서 이 영혼이 진화했으니, 결국 오래 살기는 어려울 거다.
너무 급하게 강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또 강해질 이유가, 필요가 생겼다.
나는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모두에겐 조금, 많이 미안했지만, 강해진 것을 후회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 늘어서,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또 그만큼 많은 것이 불안해졌다.
“간단하다고 표현했지만, 그건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지, 실천하기가 쉽다는 뜻은 아니에요. 은하 님은 아직 실감이 안 나겠지만, 잠시 후 직접 내려가서 이성진의 영혼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놈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강하거든요.”
상황이나 상대의 심각한 표정과 다르게 또 한 번 웃음이 그려졌다.
“다들 성진이를 최종 병기처럼 말하긴 했는데, 주신님도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네요.”
“사실인걸요. 분하지만 저랑 하르펜이 전력을 다해도 상처 하나 못 입힐 거예요. 같은 계급이라도 그와 저희 사이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가요…….”
“네. 영혼의 등급이 높은 만큼 당신은 분명 이성진보다 강해지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이성진은 얼마나 긴 시간에 걸쳐 그렇게 강해졌을까. 억 단위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을까.
그걸 생각하면 나도 얼마든지 그 시간 동안 노력할 수 있다. 인간이었을 때라면 좀 힘들었겠지만, 신의 정신력은 그 정도 시간을 가볍게 버티고 지새운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안다.
“저는 괜찮아요. 힘을 개발하는 건 언제나 즐겁고, 전투도 요즘엔 할 만해졌거든요. 다만 성진이가 또다시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는 게 걱정 되네요…….”
루키아가 어딘지 안도한 얼굴로 다정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이성진이 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돌아갈 첫 번째 세계는 다른 세계보다 훨씬 천천히 세월이 흐르거든요. 그리고 저희도 당신이 맹약자라는 걸 이성진에게 전하기 위해……다른 동료들이랑 같이 노력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루키아가 고개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당신에게도 이성진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요. 저는 빚을 지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에요. 특히 이성진한테는……엄청, 많이,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런가요?”
“이성진은 성격은 좀 사납지만, 신답다고나 할까, 생각보다 주위를 많이 돕고 다녀요. 일상생활에선 도움이 안 되다 못해 열 받지만……. 아, 죄송합니다. 반려 앞에서 이런 말은 좀 그랬죠?”
인상을 찌푸리던 루키아가 흠칫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성진이의 성격은 잘 아는걸요.”
루키아는 다행이라며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아까와는 달리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흠흠, 하여간 그런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지만, 여차할 때는 곧잘 앞에 나서는 놈이라서요. 특히 목숨이 위험할 때, 신의 책무와 연관이 있을 때. 목숨을 구해주고, 때로는 살아갈 방법을 알려줘요. 신의 책무에 한해서는 저버린 적이 없고, 멸망한 세계를 보거든 돌봐주기도 하고, 죽은 목숨을 가련히 여겨 편안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기도 하고…….”
성진이의 성격만 생각하면 의아한 이야기였으나, 성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이들이라면 공감할 이야기였다. 성격은 날카롭지만, 나쁜 놈은 아니라고나 해야 할까.
“같은 계급의 신 중에 이성진에게 빚을 지지 않은 자가 더 드물 거예요. 저랑 하르펜도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 이 정도는 해야죠. 아니면 진 빚을 평생 가도 못 갚을 거예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듯 루키아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수긍했다. 루키아의 그런 모습에서 인하나 아르델이 성진이를 대할 때의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루키아는 쌉쌀한 모카 케이크를 한 입 삼키며 세 번째로 차를 따르고는, 마침 비워진 내 찻잔에도 두 번째 찻물을 따랐다. 나는 목례하며 또 한 번 차로 입을 축였다. 하르펜이 만든 약차는 사정상 매일 먹고 있는데, 제법 내 취향이다.
“그럼 슬슬 제가 당신을 신계에 초대한 본래 목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무심코 허리를 곧게 폈다.
“네. 안내하기 위해서, 라고 하셨죠?”
“신으로 막 각성했을 때는 혼란스럽기 마련이지요. 하물며 첫 번째 세계의 신위는 무거워요. 첫 번째 세계의 신이 각성하면 같은 첫 번째 세계의 신이 신입을 맞이하고 앞으로의 역할이나 선택에 관해 여러모로 설명해 주는 게 관례랍니다. 당신이 이 세계 운명의 중심이며 제가 이 세계의 주신이기에, 이번에는 제가 안내를 맡았습니다.”
타당한 관례이며 적합한 인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나는 문득 성진이를 떠올렸다. 어쩐지 성진이도 이 역할을 맡고 싶어 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 어쩌면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자신이 신인 것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안내 역할은 인기가 많았어요. 이성진도 하르펜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고, 하르펜은 대신하고 싶어 하진 않았지만, 같이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안내인이 복수일 경우 이야기가 산으로 갈 것 같아서 거절했지만요.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