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78
루키아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작은 편지를 꺼내 보였다. 거기에 얽힌 밤을 닮은 혼돈의 힘을 나는 금방 알아보았다. ……에쉬리안나님의 편지다.
“어쩐 일이신지 첫 번째 세계의 2번째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당신께서 칭호를 찾으시면 한 번 만나러 오겠다고 하시더군요.”
2번째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은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녀가 첫 번째 세계의 틀을 만든 진정한 창조신이라는 건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둘 깨어난 3명의 남매가 첫 번째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만들었다. 느지막이 깨어난 4번째 창조신은 세계를 만드는 걸 도왔으나 힘이 약했기에 금방 다시 잠들었고, 먼 미래에 기억을 잃은 채로 다시 첫 번째 세계에 찾아왔다. 그러다가 2번째 창조신의 도움으로 기억을 되찾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퍼져 있다. 심지어는 같은 신에게조차 그랬다. 에쉬리안나 님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루키아는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으나 딱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게 편지를 건넸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편지를 소중히 감싸 쥐었다.
“흠흠. 그럼 다시 한 번, 신으로 각성한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를 움직인 운명의 중심으로, 첫 번째 세계의 2계급 신이 될 자격을 갖췄으며, 이 세계 가 선택한 진정한 이 세계의 주신이십니다.”
“……네?”
깜짝 놀라 되물은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루키아는 일단 필요한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는 현재 이름이 없습니다. PSSC는 임시 이름입니다. 운명의 중심이자 이 세계가 선택한 주신인 당신은 유일하게 이 세계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으며, 그로써 이 세계는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생각지도 못한 직함들에 나는 머리를 돌로 내리친 듯한 충격에 빠졌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나를 향해 루키아가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막 신으로 각성하셨으니 운명의 중심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군요. 운명의 중심은 한 세계의 생사와 방향을 결정하는 일종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세대를 좌지우지하며 반복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세계의 단 하나뿐인 초신성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인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그러네요. 당신은 이 세계가 선택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그 단어는 아주 무겁고 깊게 내 가슴에 박혔다.
이야기에 있어 주인공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이야기의 배경은 오로지 주인공과 등장인물만을 위해 구성된다. 주인공은 많은 사건 사고를 해결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아주 많은 경우 이야기 속 세계의 명운이 주인공의 행동에 걸려 있다.
많은 세계를 움직이고 탄생시키는 원동력은 위 계급 세계의 상상력과 마음이기에, 많은 이야기 속 세계는 실존한다. 그렇다 해도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엄연한 하나의 세계이기에 실존한다기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양분으로 삼아 탄생한 세계가 많다고 설명하는 게 정확하겠다.
이 세계 역시 그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애초에 어렴풋한 기억상에 내가 환생할 예정인 세계 중에는 그런 이야기 속 세계가 상당수 있었다.
내가 만나는 많은 인물이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을 모델로 하여 탄생한 자일 수도 있다. 소설, 만화, 게임, 영화. 작가인 만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보았다. 어딘가에 그 이야기를 양분으로 한 세계가 탄생했을 수도 있다.
이 세계는 그런 세계였다.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묻혀있던 사실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그것과 닮은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를락 말락 했지만,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유은하라는 이름으로 환생한 이 세계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환생의 궤도…….
아, 그래. 한 가지 떠올랐다. 나는 분명 가고 싶은 세계를 선택했었다. ‘내 환생의 궤도’……. 이건 내가 원한 환생 궤도, 전부는 아니지만 그랬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세계에 가고 싶다고, 바랐었다.
그러니 여기가 내가 바란 이야기 속 세계 중 하나였다면……눈치챘을 것이다. 전생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마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세계의 이름은 당장 짓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운명의 중심인 당신이 신으로 각성하며 힘을 써 준 덕분에 이 세계는 이미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100년 안에는 이름을 짓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예의를 차린 말투로 설명을 잇는 루키아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하지만, 루키아 님이 이곳의 주신, 아니신가요?”
루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수롭잖은 투로 자신의 직위를 설명했다.
“주신이지만 당신이 나타나기까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리 잡은 임시 주신입니다. 그래도 당신의 힘과 정신이 한 명의 신으로서 안정되고 성장할 때까지는 이 자리를 지킬 생각입니다. 나지스는 원래부터 이 세계에서 탄생한 신이니 계속 자리를 지킬 거고, 하르펜은 그런 저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임시라니…….”
“저는 신이어도 이 세계의 중요한 운명을 쥐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꽤 중요한 자격요건입니다. 괜히 ‘주인공’이라 표현한 게 아니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에게 루키아는 예의를 차린 말투로 새로운 안내 사항을 전했다.
“첫 번째 세계의 2계급 신의 역할은 첫 번째 세계의 ‘법칙’을 관장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모든 세계의 안정을 꾀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세계의 역사를 들춰 볼 수 있으며, 어긋난 역사나 시간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르펜은 세계에 탄생하는 수많은 생명을 안정케 합니다. 이성진은 세계에 죽음이라는 이치를 부여하고, 그로써 세계의 많은 것을 순환케 합니다.”
이번에 루키아가 꺼낸 것은 신의 ‘칭호’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 칭호를 모른다.
“많은 신이 각성과 함께 칭호를 깨닫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힘을 둘러보며 머지않은 시간 안에 자신이 관장하는 법칙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네.”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당장 모른다고 해서 초조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괴로워하는 자도 있으니, 칭호를 깨달을 때까지 이성진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네.”
루키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진중했던 루키아의 눈동자가 한층 무겁고 엄해졌다.
“그리고,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요?”
“첫 번째 세계의 2계급 신으로 자리 잡을지, 그 자리를 거절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주신이 될지, 되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신이 되고 그 힘이 안정되면 조금씩 첫 번째 세계의 신으로 자리 잡기에 필요한 법칙들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올 겁니다. 당신이 어떤 자리에 서고 싶은지 신중히 고민하고 결정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물론 나는 신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세계에는 에쉬리안나 님도, 성진이도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결심했다 할지라도 내가 설 자리를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이 세계의 주신이 되는 것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세계의 신은 그곳의 신계를 통해 모든 세상의 법칙을 조율하더라도 특별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다른 세계의 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루키아와 하르펜도 그런 경우였다.
‘이 세계의 주신이 된다면…….’
그럼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을 지켜볼 수 있다. 비록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접촉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죽을 때까지, 환생하는 것도 지켜볼 수 있다. 특히 키메라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안정시켜 줄 수 있다.
“칭호를 얻고 직위를 당장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환생자인 당신에게는 환생을 계속한다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여행, 인가요.”
“그렇습니다. 여행에 대해 알고 계시나 보네요. 그래도 만일을 위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은 직위에 오르기 전에 다양한 세계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게 여행이며, 여행 방법은 다양한 세계에 환생해 그 세계의 법칙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업을 짊어지지 않은 한 여행은 원할 때 끝마칠 수 있습니다.”
환생…….
그래, 나는 여신님께 소원을 빌었다. 내 환생의 궤도대로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신으로 각성했어도 나는 여행을 떠나 여행을 끝마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환생을 하면, 어쩌면 지금 살아가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내가 세계를 통해 부여받은 인간의 육체를 벗고 완전한 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이전부터 무너지고 있었고, 이 몸으로는 신의 힘을 완벽히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결국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오래 버텨봐야 15년, 처음에 각오했던 시간보다는 많이 늘어났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
긴긴 여행이 될 것이다. 성진이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 동안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돌아오겠지. 그때의 나는 결코 이곳의 인연을 지금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빛바랜 추억처럼 손으로 어루만지게 되겠지.
하지만 여행을 하지 않는 건 더……힘들었다. 대부분의 신은 여행을 떠나는 걸 선택한다. 신이 되기 전의 여행은 신으로서의 경험과 힘을 쌓기 위한 방법 중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다. 어떤 훈련이든 역시 경험보다 못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시간의 속도는 각기 다르다. 위 계급 세계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전부가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여기보다 위 계급 세계에 환생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 것도, 이별할 것도, 조금씩 각오했는데, 참…….’
한동안 멍하니 찻잔 안에서 흔들리는 찻물을 응시했다.
“같은 신으로서 저는 여행을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네.”
느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을 잇기 위해 이번엔 보라색 파운드케이크를 작게 잘라 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다과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르펜? 아니면 요리를 좋아하는 요정이나 천사가 있나? 어쩌면 경계의 도시 같은 데서 사 왔을지도 모르지. 혹은 루키아 본인이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성진이가 만든 게 좀 더 입에 맞긴 하지만, 여기의 간식들도 꽤 맛있었다. 많이 달지도 않고.
“……제가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 있을까요?”
“아무래도 1, 2년 같은 짧은 시간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1억 년 같은 인간이 생각하기 힘든 긴 세월도 아닐 거예요.”
“정말로 그럴까요?”
한두 번 환생하고 돌아오는 게 아닐 텐데?
“네. 이 세계가 인정한 주신은 당신이니까요. 당신이 이 세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면, 이 세계는 당신의 영혼이 원하는 바를 따를 것입니다. 물론 저희도 그것을 따를 거고요.”
“…….”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를 테니, 몇백 년은 각오하시는 게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20년, 그런 짧고도 비현실적인 세월에 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200년……이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는 사람의 반 정도라도 떠나는 걸 지켜볼 수 있지 않겠나.
“다만 당신의 생각대로 시간의 흐름을 맞추려면 세계의 이름을 짓고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할 틈을 주려는 건지 루키아는 한동안 침묵하며 차를 마시거나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나는 그녀가 임시 주신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묻고 싶었던 것을 한 번 질문해 보았다.
“‘임시’에 머무는데도 어째서 루키아 님은 이 세계의 주신이 되셨나요?”
루키아는 평온히 웃었다. 그녀는 안내 사항을 전할 때와 달리 좀 더 풀어진 말투로 이유를 이야기했다.
“오히려 임시이기 때문에 선뜻 손을 뻗은 것 같아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이 세계의 커다란 흐름이 제가 멸망시킨 세계와 조금 닮았거든요. 그래서 살려보고 싶어졌어요. 슬슬 여행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고요.”
조금 전 들었던 루키아의 과거가 생각나 나는 무심코 혀끝을 깨물었다.
“그랬군요…….”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루키아가 입을 열었다.
“은하 님에게 아직 칭호가 없다 보니 같은 2계급 신으로서 당장 안내할 만한 건 이 정도인 것 같네요. 이어서 이 세계에 대해 조금 설명 드릴게요. 은하 님 덕분에 이 세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이 세계에 이름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주신이 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로 그런 것들 위주로 설명할 거예요.”
“네.”
운명의 중심인 내가 신으로 각성하며 힘을 쓴 것으로 이 세계는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80% 정도는 안정되었다. 그러니 이제 불안정함으로 인한 균열은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현재 주신인 루키아와 교류하는 것으로 세계는 루키아나 다른 관리자들의 힘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계를 움직이는 운명의 중심은 세계 안에서 그만한 힘과 상징성을 지녔다. 말하자면 내가 이 세계의 『우주의 정수』나 마찬가지였다. 세계의 정수가 힘의 정수를 만들어 세계에 힘과 의지를 퍼트렸기에, 세계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상성 문제였다. 루키아나 다른 신의 힘은 세계와 상성이 어긋나기에 세계에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고, 내 힘은 상성이 잘 맞기에 수십 배는 증폭되어 세계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세계와 신의 상성은 무척 중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키아의 힘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비교하는 게 무안해지는 수준이다.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별 하나를 두고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나는 루키아의 말을 꼼꼼히 머릿속에 새겼다.
“당장 주신이 되지 않더라도 가끔씩 여기에 와서 신의 일을 배워보시는 건 어떤가요? 다음 생에도 당신이 같은 첫 번째 세계의 신을 만날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 드리는 제안이에요. 2계급 신이 특히 숫자가 적긴 하지만, 다른 계급이라고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거든요. 음…….”
루키아는 찻잔을 만지고 잠시 고민하더니, 정정했다.
“아닌가. 단순히 한 세계를 관리하는 신의 숫자라 생각하면 많아요. 150명 정도였던가. 하지만 1계급 신은 첫 번째 세계에 머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서요. 다른 계급의 신도 곧잘 아래 계급 세계에 차출 나가고요. 무수히 많은 세계 곳곳을 둘러보기엔 적은 숫자죠.”
확실히 그렇다. 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세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러다 보니 다른 세계의 신을 만날 수는 있어도 당신의 영혼을 알아보는, 첫 번째 세계의 동지를 만나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곳은 첫 번째 세계와 연결이 있다 보니 이렇게 다들 모일 수 있었던 거고요. 그러니 배울 수 있을 때 배워두는 게 좋아요. 제 생각엔 그래요.”
나는 이내 루키아의 신의 일을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에 동의를 표했다.
관리자들과 세계의 계약은 앞으로 한 달 후에 끝난다. 유클라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한 계약이라지만 인성이, 라스, 하미아, 캐시 네 사람은 충분히 세계를 지탱해 주었다. 때문에 계약이 끊기고 인성이의 눈동자가 돌아온 후에도 관리자들은 별의 도시에 접속할 수 있는 자격을 완전히 잃지는 않을 거란다.
별의 도시의 핵심은 세계의 축의 핵심과 인성이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인성이의 눈동자가 빠져나간 자리는 인성이의 눈을 대신하고 있던 하얀 눈동자와 내가 만든 정화의 정수가 대신할 거란다.
내 힘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안정되었고, 안정되고 있지만, 아직은 지켜봐야 하는 단계다. 관리자들의 계약 기간이 더 늘어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기하고 싶다. 거기다 언젠가 나는 여기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한동안 그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신으로 각성했으니 성진이의 ‘도우미’ 역할은 완전히 끝났다. 그러니 이제 이 세계에서도 좀 더 힘을 쓸 수 있단다. 적어도 나에 맞춰 힘이 풀리지는 않을 거란다.
이노키언과 한 거래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들었다. 그는 우리 세계에서 필요한 재료를 모아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대신 그는 나와 협력해 재료를 모으는 것으로 내 영혼을 자극해 내 각성이 빨라지도록 돕기로 했다.
다만 나를 세계의 축 안에 들이는 건 원래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단다.
“사실 저희는 좀 더 느긋하게 당신의 각성을 유도할 생각이었어요. 그게 예상대로 될지 안 될지는 둘째치고요. 하지만……당신이 병에 걸리고 계획을 바꿨어요. 죽기 전에 신으로 각성하는 게 이 세계에도 당신에게도 좋을 테니까요.”
“그랬군요…….”
“무엇보다 잘하면 당신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완치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수명이 늘어난 것 같네요.”
“네. 아마 10년 정도는 어떻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병에 걸리고 1년이 되어가면서 감각이 많이 무너졌다. 그래도 신력을 조합해 영혼과 육체를 잘 건드리면 약해져 뭉그러진 육체의 오감들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이네요. 다음에 신계에 오거들랑 다시 하르펜에게 조치를 받으세요. 하르펜과 당신이 합심해서 육체를 건드리면 당신의 육체도 좀 더 안정될 테고, 신력을 다루는 연습도 될 거예요. 세계 안에선 신력을 맘껏 사용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문득 의아한 감정을 느꼈다. 기왕 신계에 왔으니 지금 하르펜에게 조치를 받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은 신계에 없나?
조금은 어색하게 영혼의, 신의 감각을 넓혀 주위를 확인한 나는 왜 루키아가 ‘다음에’라고 언급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신계의 시간은 우리 세계의 시간에 비해 빠르게 흐르고 있다. 아니, 반대인가. 루키아가 신의 권한을 사용해 우리 세계의 시간을 늦췄다.
세계를 휘감은 내 정화의 빛은 조금 전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완전히 꺼지지 않고 세계를 부드럽게 감쌀 것이다.
나는 신으로 각성한 순간 육체와 함께 여기에 왔다. 인성이는 내가 꿈속 세계에 들어선 것을 보았을 테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금은 자신이 감지할 수 없는 깊은 꿈속에 들어섰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다고는 하나 별의 도시에서 오래 모습을 감추는 건 별로 좋지 않다. 슬슬 인간인 유은하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루키아가 고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안내를 위해서라지만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 데리고 와버렸으니, 그분들이 걱정하기 전에 모습을 보이셔야죠.”
“네. 그래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루키아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이렇게 대화를 나눠 즐거웠어요.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즐거웠고, 항상 감사해요.”
루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내가 걸은 꿈길이 이어져 있는 곳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루키아의 키는 나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컸다.
“아 참, 이노키언이 이 세계에서 원하는 가장 귀중한 재료는 당신이 만든 정화의 정수가 세계를 수복한 이후에 생겨나는 ‘특별한 재생의 흔적’이에요. 당신의 힘이 연소하고 남는 숯 같은 것이랄까? 정수의 힘이 가라앉으면 이노키언이 일부를 가지고 가려 할 텐데, 넘겨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럴게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요.”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까요. 몇 개는 이노키언에게 넘겨주고, 반 정도는 세계가 가져가고, 남은 것은 당신께 돌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계단을 내려가 잔디밭을 조금 걸었다. 신계에서 처음 발을 디딘 장소에 연결된 꿈길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루키아를 돌아보았다. 루키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뵈어요.”
“네. 또 뵈어요.”
고개를 숙이며 꿈길을 밟은 순간.
훅…….
주위가 익숙한 정화의 빛으로 감싸이며, 나는 어느새 별의 도시에 있는 세계의 핵심 앞에 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정화의 정수에서 손을 떼고, 팔찌를 지팡이 모습으로 되돌렸다.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리니 감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두가 보였다. 다만 인성이는 정화의 힘과 계속 공명하는 하얀 오른쪽 눈동자가 신경 쓰이는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깜빡거렸다. 그리고 성진이는…….
성진이는 감정을 파악할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긋 웃는 얼굴보다는 성진이의 마력과 영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비록 지금도 그의 힘을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성진은 신이었다. 황혼이라는 형태의 종말의 힘을 가진 나와 같은 계급의 신이었다.
윌리엄이 여전히 별의 도시에 가득 넘치는 정화의 빛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대단하군요. 힘이 세계의 핵심에 흡수되는 데 그치지 않고 순식간에 세계 전체로 퍼지다니. 거기다 지금도 가라앉지 않고 힘을 발하고 있군요.”
“역시 은하는 대단해!”
세계의 균열은 인간 중에선 관리자들 외에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범위 안에서 나타나고 있고,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힘들로 수습되고 있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굴지의 마법사인 만큼 내가 펼친 마법이 대단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대부분은 저 힘이 어느 정도 수준의 기술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관리자들은 다르다. 세계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이게 세계 전체와 세계의 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겉핥기로나마 파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리자들의 반응은 다른 이들과 별다름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나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그냥 납득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좀 대단한 일을 많이……하긴 했지.’
성물이라던가, 키메라들의 체질마저 바꾸는 정화 아이템이라던가.
나는 모두의 감탄 어린 칭찬을 수줍게 받아들였다. 이내 소영이가 인성이를 돌아보았다.
“어때? 세계와의 계약에 변화가 있어?”
“음…….”
인성이는 내 힘에 공명하여 자꾸 힘을 뿌리는 은색 눈동자를 오른손으로 몇 번 꾹 눌렀다.
“세계가 이번 대가를 소화하고 방침을 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아마 한 달 정도? 그래도 덕분에 한 달 정도는 푹 쉴 수 있겠어.”
“잘 됐다!”
“다행입니다.”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아무래도 관리자들이 바쁘게 지내기는 하지. 다른 이들도 바쁘긴 하지만,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바쁘게 일하는 관리자들이 훨씬 더 걱정된다.
마주친 손바닥을 모아 쥔 레일리가 작게 속삭였다.
“한 달 후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확신이었지만 바람이기도 했다. 다들 떠들썩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래, 한 달 후에 관리자들은 막중한 책임감과 단단한 구속으로 이루어진 세계와의 계약을 끝낼 수 있다. 인성이의 눈동자는 원래대로 돌아오고, 관리자들은 모두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오갈 수 있다.
그 사실이 비로소 와 닿아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세계의 축을 감싼 정화의 힘도 한 달 후 가라앉는다. 하지만 세계의 핵심에 자리 잡은 정화의 힘은 이제 사라질 일이 없다. 세계가 선택한 나의 힘이 항상 함께 할 것이다.
성진이는 아마 그 모든 걸 눈치챘겠지. 이제 그의 힘을 억누르던, 내 실력에 맞춰 강해진다는 속박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단숨에 실력이 뛰어오르지는 않겠지만, 황혼의 신인 성진이는 분명 예전부터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파악하고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경험이 많은 신인만큼 작은 단서를 보더라도 나와 달리 아주 많은 것을 정확하게 짐작하고 추측했을 것이다.
그 후로는 한동안 모두와 함께 평소처럼 떠들었다. 다들 세계의 핵심에 건넬 대가를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에 걸쳐 만들었는지를 얘기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역시 내 정화의 정수였다.
관리자들조차 접근하지 못한 세계의 축 안쪽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냥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런저런 재료를 모으고 마법을 시험했다고만 전했다.
“애초에 제 기술 『우주의 정수』는 바꾸고자 하는 대상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기술이에요. 그래서 시간을 많이 들이고, 대상에 의미 있는 재료를 많이 모을수록 좋아요.”
대화하는 동안 모두 은연중에 걱정을 감춘 눈으로 나를 자주 살폈다. 그래도 의사인 예리와 라이라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푹 쉬어!”
“건강 잘 챙기세요.”
“밥 잘 먹고.”
“성진 오빠 말대로, 밥 꼭꼭 챙겨 드세요!”
“알았어, 알았어.”
인성이, 하미아, 라스, 캐시까지, 관리자들은 밥을 잘 챙겨 먹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그런 만큼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식생활을 걱정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생활하는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아, 그래도 하미아는 요즘엔 조금 먹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다만 식성이 인간과는 많이 달랐다. 식용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식물이나 꽃을 생으로 먹는 걸 즐겼다. 나무의 화신, 드라이어드가 모델이어서 그럴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좀……동족상잔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심심하면 놀러 와.”
“그럴게.”
별의 도시를 뒤로하며 다른 사람들과는 인사하고 헤어졌지만 소영이, 인하, 아르델, 예리는 오랜만에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성진이가 만든 간식과 함께 다양한 잡담을 나누었다. 몸이 더 나빠지진 않았는지, 착용하고 다니는 행동 교정기는 몸에 잘 맞는지. 예리는 기왕 집에 들른 김에 나와 라라를 한 번 검진해주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네요.”
“그래?”
“다행이다.”
신으로 각성해도 세계 안에서,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남발할 수는 없다. 그래도 육체의 시작점을 조금이나마 건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몸이 좋으면 좋아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라도 큰 문제는 없어요. 그래도 나이를 먹은 만큼 기력은 약해져 있고요, 오늘 보니 관절도 좀 약해졌네요. 기력을 조금 보충했고, 관절도 교정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놀이나 뜀박질은 예전보다 자제시키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고마워.”
라라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근에는 어떤 식물이 새롭게 늘어났다든지, 결혼 생활은 어떤지, 오랜만에 지구를 둘러보니 많이 번화해졌다느니, 골칫거리가 있는지, 이런 일이 있었다든지.
“성진이가 만든 건 왜 다 이렇게 맛있지?”
“단 걸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계속 먹게 돼.”
아르델은 어딘지 분한 표정으로 가까이 있는 접시에서 견과류 쿠키를 계속 가져갔다.
예리는 중간에 일이 있다면서 돌아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집에 남았다. 그 김에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우리 넷은 나랑 성진이가 평소에 사용하는 침실을 쓰고, 성진이는 개인 방에서 자게 되었다.
병에 걸린 지 꽤 시간이 지났고, 몸 상태는 나빠져만 간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제 꽤나 태연하게, 때로는 태연한 척 나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예리가 몸에 새겨준 다양한 마법들을 호기심만으로 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건 어떤 효과가 있어?”
나는 친구들의 의문에 하나하나 답변해 주었다. 다만 역시 예리의 마법과 함께 피부를 감싼 신들의 붕대나 마법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침대는 네 명이 한꺼번에 눕기엔 작았지만, 그 정도야 마법으로 공간을 살짝 확장하고 침대의 크기를 키우면 해결되는 일이다.
벽면을 기준으로 소영이, 나, 인하, 아르델 순으로 누웠다. 한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지만 학생 때처럼 새벽 늦게까지 떠들지는 않았다. 내 건강을 배려해 다들 11시쯤에는 말을 자제했고, 나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자의로 내 꿈속 세계에 내려섰다.
신이 되었다고 내 정신세계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았다. 들판 사이사이에 생겨난 검은 꽃은 그대로였다. 거칠어진 바다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전보다는 악몽의 기세가 조금 잠잠해진 것 같기도 했다.
바다 위에 올라서니 벨라가 보였다. 내 꿈에 묶여 악몽으로 존재하는 동안 나에게 물들어 예전의 자신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수많은 업을 짊어진 영혼이 보였다.
“할 말 있어?”
그렇게 물으니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앞으로 꿈을 꾸게 될 거야. 전생에 관한 꿈, 너에 관한 꿈이야.」
신으로 각성하면서 칭호를 찾기 위해서 꾸는 건가? 하지만 그걸 어째서 벨라가 눈치챘지?
내 악몽답게 벨라는 그런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었다.
「흘러들어왔거든. 아무래도 ‘악몽’이 많이 포함된 모양이야. 킥킥킥.」
장난스럽게 웃은 벨라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물었다.
「신이 된 기분이 어때?」
“…글쎄.”
아직은 이렇다 할 감상을 표현하기 어렵다. 이 육체는 아직 인간이고, 나는 아직 신에 대해 지식으로밖에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신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에쉬리안나 님과의 만남도 그렇지만…….
루키아의 말대로 성진이의 영혼이 나에 의해 등급이 끌어올려졌다고 한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피의 맹약은 맺어졌고, 성진이는 신이 되었다. 신의 반려인 나는 어찌 되었건 신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벨라에게서 등을 돌리고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부터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게 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자버릴까 했으나, 문득 아직 읽지 않고 아공간에 보관해 둔 에쉬리안나 님의 편지를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제 성진이에게 에쉬리안나 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스스로 에쉬리안나 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성진이가 먼저 눈치채고 물어본다면 만났다는 사실 정도는 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소원에 대해서는, 힘들겠는걸.’
에쉬리안나 님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건 신의 존재와 정체가 공공연하지 않은 첫 번째 세계의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자기 세계의 신이자 부하인 성진이에게도 여신님에 대한 걸 말할 수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에쉬리안나 님 본인이 전령인 루키아 이외의 제삼자에게 나와 자신의 인연을 전달하고 싶지 않을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