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79
그런 생각에 나는 편지를 들고 조금 깊은 꿈속으로 향했다. 성진이는 내 영혼을 쫓을 수 있지만, 그래도 힘의 제약이 풀린지 얼마 안 된 지금은 아직 나만의 세계인 세계의 꿈속을 엿볼 수는 없다.
별빛으로 가득한 허공에 앉아 나는 밤하늘이 담긴 봉투를 열고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어린 샛별.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셨지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은 당신이 각성했음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약속대로 제 곁에 돌아올 준비를 갖춰 가는 당신의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워요. 당신의 시련이 부디 당신을 무너뜨리지 않았기를 바라요.
곧 당신은 자신의 칭호를 찾고 완전한 별이 되겠지요. 그때 발견한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부디 저에게도 알려주셨으면 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힘들다면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을 위한 길을 가세요.
그래도 당신이 완전한 별이 된 그때 약속대로 마중하러 갈게요.
머지않아 직접 다시 만날 날을 마음 깊이 기대하고 있어요.』
내가 아는 여신님의 성격과 감정이 듬뿍 묻어나는 글이었다. 그녀는 항상 외로워했고, 많은 것을 슬퍼했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강한 신이었기에 무너지지 않고 세계를 지탱한 신이었다.
에쉬리안나 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애틋함과 사랑스러움과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애정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마음이 벅찼다.
“저도 기대할게요, 에쉬리안나 님…….”
나는 편지를 봉투 안에 넣고 다시 아공간에 돌려놓았다. 애틋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시 내 육체에 가라앉았다.
벨라의 예고가 있었음에도 그날은 별다른 꿈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
친구들은 오후까지 느긋하게 있다가 돌아갔다. 즐거웠던 만큼 딱히 친구들이 빨리 돌아가길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제야 비로소 성진이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신으로 각성해 버렸네.”
“응. 넌 신이었고.”
“…….”
“……루키아 님한테 네 칭호를 들었어.”
“넌 아직 칭호를 모르는 모양이네.”
“응…….”
“…….”
이야기를 시작한 시점에서는 서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려워 애매한 침묵이 곧잘 생겨났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며 생각난 것을 물었다.
“넌 내가 신이 될 걸 알고 있었겠네, 그럼.”
“짐작했지, 아무래도. 힘이 많이 풀려난 덕에 이제는 시련을 맞았던 이들 중 신의 가능성을 품은 이들이 누구였는지도 대충 짐작이 가.”
“짐작?”
나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음부터 알았던 게 아니라?”
그 질문이 의외였던지 성진이도 마찬가지로 눈을 잠깐 크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루키아에게 이 세계가 신의 시련장으로 선정되었고 나를 그 도우미 역할로 선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신 후보가 누구인지는 전해 듣지 않았어. 도우미의 역할에 관해서도, 그냥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에 붙어 도움을 주라고만 설명받았어.”
“아…….”
“주신에 의해 따로 역할이 주어졌다고 해도 시련의 중심인물에 맞춰 힘이 제한된다는 걸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환생이었어. 아, 내 힘이 어떻게 제한되었는지는 들었어?”
“응. 루키아 님이 설명해 줬어.”
“그래……. 그래도 만일을 위해 신 후보자가 누구일지, 이 시련의 중심인물로 선택된 게 누구일지 추리하긴 했지. 그렇다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감지능력도 약했고, 내 힘의 성장 속도만이 단서였어.”
“그랬……구나.”
역시 타인에게 전해 듣는 것과 본인에게 듣는 것은 다르구나 싶었다.
나는 문득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돌이켜 보았다. 최악의 만남은 그렇다 치고……돌이켜 보니 하나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럼 혹시 처음에는 인성이를 신 후보로 생각했다거나?”
성진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어. 널 만나기 전까진 제일 가능성이 높았지.”
“그때는 우리 모두 실력이 비등비등했으니, 짐작하기 어려웠겠다.”
“아무래도. 너랑 인성이 외에도 소영이, 인하도 후보로 점찍고 있었어.”
“그럴 만하네.”
“실력도 그렇지만, 영혼이 크다는 것도 이유였어. 신이 될 가능성을 지닌 자는 각성과는 별개로 영혼이 크거든.”
“아…….”
확실히 성진이가 후보로 예상한 이들은 모두 영혼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당히 컸다. 영혼만 따지고 보면 이 중에선 인성이가 제일 작다.
나는 생생한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와 성진이는 사이가 아주 나빴다. 나는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봄 직한 성진이의 날카로운 성격이 싫었고, 성진이는 아마……내 우유부단한 성격을 싫어했다. 특히 방어를 고집하고 전투 훈련을 피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를 생각하면 사람의 개성을 무시하는 태도가 여전히 열 받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성진이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게, 성진이는 빠른 시일 내에 세상이 큰 전란에 휩싸인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싸워 살아남을 방법을 배울 환경이 갖춰진 상황에서 그걸 배우지 않는다는 게 상당히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물며 나는 제대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큰 전력이 될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장인으로 진로를 정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기술이야말로 전쟁 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시련의 중심이 나란 걸 확신한 건 언제야?”
“랭크 시험. 너랑 나만 A랭크였잖아. 확신이라기보다 확증을 확보한 심정이었지만.”
“아……그랬겠네.”
성진이가 후보로 예상한 이들 중 실질적으로 성진이와 대등한 실력자였던 것은 나뿐. 확실히 랭크 시험 때 그 사실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첫 번째 랭크 시험.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입학. 전쟁이 터진 이후…….
돌이켜 보면 볼수록 확실해졌다. 성진이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긴 환생의 경험 덕에 나보다는 한발 앞서 강해지고 있었다. 성진이의 힘이 감지하기 어려웠기에, 혹은 타인에 맞춰 힘이 강해진다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네가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너희가 좋았거든. 시련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어. 너희가 죽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어.”
“응…….”
“제한을 억지로 끊어 내는 것도 생각하긴 했는데, 그랬다간 이 세계에서 쫓겨났을 테지. 뭐, 그래도 아슬아슬한 범위 안에서 몇 번 힘을 쓰긴 했지만.”
성진이는……우리보다는 무심하며 냉정하다. 적을 죽이는 걸 주저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우리보다는 좀 더 쉽게 떠나보낸다.
하지만 결코 트라베리아처럼 생명을 경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성진이 덕에 살아남았다. 우리를 아주아주 소중히 지켜주고 단련시켜주었다. 그건 결코 주어진 역할을 따르기 위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다.
그걸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에서 클라인 남매한테서 도망칠 때 썼던 시간 도약이라던가?”
그때, 처음으로 클라인 남매가 지배하던 한국에 잠입하여 클라인 남매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
성진이는 클라인 남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나와 한재일을 데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10분 과거로 돌아갔었다. 한국의 시간이 멈춰있었던 순간에 저지른 일이라 실질적으로는 과거로 돌아갔다 하기 어렵지만, 클라인 남매가 조종하는 한국의 시간 안에서는 확실히 10분 전으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이후에 시간마법의 부작용으로 크게 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성진이의 몸에 새겨졌던 하얀색 시계 문양은 루키아의 색이었다. 루키아의 제지였다.
성진이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성진이가 리스크를 각오하고 힘을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성진이는 몰라도 나와 한재일은 죽었을 것이다.
“너도 참…….”
“부작용은 세계의 반사 작용이니 그렇다 쳐도, 잔소리 정도는 들을 각오를 하고 한 짓이었는데 생각보단 화를 내지 않더라. 결과적으로 너를 구해냈기 때문이겠지? 나름대로 정도를 지키기도 했고.”
“……혹시 그때 꿈에서 루키아 님을 만나기라도 했어?”
“목소리만 들었어.”
“그랬구나…….”
몸에 새겨졌던 시계 모양 부작용을 통해 교신했던 것일까.
나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진이의 손을 잡았다.
“이제 와서 네 진심을 의심하진 않아. 신조차도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는걸. 세계는……합리적인 법칙으로 돌아가면서도 아주 많이 불합리하고.”
“…….”
성진이는 아주 어릴 적에 트라베리아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
참극이 일어났을 땐 이미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전생의 나를 찾아 아주 많은 시간을 헤맸다.
그것만 봐도 세계가 신인 성진이가 유리하게끔 움직이진 않는다는 건 뻔했다. 자신의 영지로 삼은 세계에서조차 신은 법칙에 얽매인다. 인간보다는 많은 걸 알고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아는 신은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다.
성진이는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안심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음……그러네. 한 번 정도 환생한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기는 해. 가능하다면의 일이지만.”
“가능해. 나는 죽은 자들의 기록을 뒤져볼 수 있거든. 몰래 보러 가는 것뿐이라면 문제없어.”
나는 기쁘다기보다는 어쩐지 안도했다. 마냥 좋은 기분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기에 나는 한 발짝 늦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가능하구나.”
“인간인 지금의 우리 몸으로는 그렇게까지 멀리 가기 어렵지만, 언제 한 번 확인하러 가보자.”
약간 목이 메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조금 진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난……좀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걸 기쁘게 여기려고 해. 그 외엔 뭐, 조금씩 알아가려고. 루키아 님이 신의 직무에 관해서 조금 가르쳐준대. 너도 가끔 알려줘.”
“그럼. 궁금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응. 고마워.”
그렇다고는 하나 당장 질문할 만한 건……. 시간을 헤집었다는 것이나 그로 인해 짊어진 벌에 관한 것이 신경 쓰이긴 하나 그건 성진이에게 좀 민감한 화제다. 당장 묻기에는 여러모로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동안 침묵하고 있자니 성진이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신력의 상태는 어때?”
“아직은 설명하기 어렵네. 오늘 세계를 수복할 때 말고는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칭호는 어떻게 되려나…….”
“루키아 님 말로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던데.”
“아무래도 그렇지. 칭호는 신에게 있어 또 하나의 이름이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어. 문장이랑 좀 비슷한가?”
문장이 자연스럽게……나타났는지는 애매하나 내가 문장을 고집하며 노력하지 않았더라도 강해지다 보면 언젠가 발현했을 힘이기는 하다.
“칭호를 발견하는 방식은 신마다 달라서 설명하기 어려워. 개인적인 상황이 섞인 경우가 많아 다들 웬만해선 남한테 알려주지 않기도 하고. 거기다 나는 각성하자마자 칭호를 알았거든.”
“흐음…….”
“다만 너라면……꿈을 통해 단서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기는 해.”
하긴, 그렇다. 꿈은 아주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힘이다. 벨라나 성진이에게서 그런 말들을 듣기 전부터 나도 혹시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신의 각성과 관계된 것에 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진이는 내가 이 세계가 선택한 주신이라는 것 역시 미리 전해 듣지는 않았으나 세계의 움직임이나 루키아의 반응을 통해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계의 중심이 주신으로 받들어지는 경우는 흔하기도 하고.”
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금 배웠다. 기본적으로는 마력과 다름없이 사용해도 괜찮지만, 법칙을 관리하는 신의 권능을 담아 힘을 쓰기 위해서는 역시 칭호를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세계 안에서, 인간의 몸으로는 미력하게밖에 신력이 발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론을 전해 듣고 조금 써 보려고 했으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세계 안에서는 신력을 쓰지 않는 게 좋아. 쓰려면 신계에 가서 써. 조만간 나랑 같이 가보자.”
“응.”
그날 하루는 그렇게 성진이와 이야기를 하며 날을 보냈다.
최근에는 악몽 외에도, 꿈속 세계에 들어서는 것 외에도, 가끔이긴 하지만 평범한 꿈을 꾼다. 그런 평범한 꿈의 경우 일부러 자각하지 않고 계속 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생에 겪은 과거의 꿈. 꿀 때마다 그리운 기분에 잠긴다. 혹은 현재와 과거가 섞인 꿈. 어릴 때의 배경에 학교를 떠난 후에 만난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거나, 현재의 풍경에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꿈을 꾼다. 다만 마음이 식어서 금방 꿈을 자각하고 흩트려 빠져나오고 만다.
혹은 꿈답게 뜬금없거나 신기한 꿈. 이야기 속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마법을 써 탐험하거나, 싸우거나, 앞뒤 맥락이 이상해 일어나고 나면 황당해지는 꿈들이다.
신으로 각성하고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일어나거나 특수한 꿈을 꿀 것 같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전생과 관련된 꿈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 꿈들 속에 내 칭호에 관한 단서가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 나는 신으로 각성한 다음 날부터 꿈 일기를 만들어 꾼 꿈을 모두 기록했다.
이노키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각성하고 5일 정도가 지나서였다. 메시지 후에 찾아온 이노키언은 예전과는 달리 정중한 말투로 내게 인사했다.
이노키언이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조만간 생겨날 ‘특별한 재생의 흔적’을 가져갈 허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루키아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재료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약속한 일인걸요.”
이노키언의 나침반이 가리켰던 나와 관련된 재료는 ‘특별한 재생의 흔적’. 루키아는 뭉뚱그려 그렇게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생명의 힘을 지닌 신이 세계를 재생한 흔적’이다. 확실히 그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4번째의 재료도 꽤 모여서 앞으로는 당신이 동행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세계에는 당신의 힘이 계속 흐를 테니, 당신께 보석을 만들어 달라는 수고를 끼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노키언이 내게 동행을 부탁한 이유는 세계의 축이 내게 특별한 반응을 보이며, 내 힘이 섞인 세계의 잔여 에너지 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별의 도시의 핵심이자 세계의 핵심에는 내가 만든 정수가 자리를 잡았다.
“아마 1년 안에 이번에 필요로 한 모든 재료를 수집 및 완성하고 돌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연락은 지속적으로 보내겠습니다.”
“네.”
용건을 마친 이노키언은 정중히 인사하고 몸을 돌렸고, 나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돌려주었다.
상부상조이긴 하지만 이노키언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느꼈다.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앞으로 이노키언을 볼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조금 아쉽기도 했다.
비록 그가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지만, 루키아와 이성진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들을 떠올리면, 참…….
신으로 각성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전생과 관련한 꿈을 꾸었다. 어떤 특별함이나 자극을 느끼진 못했지만, 나는 좀 더 신중히 꿈을 일기에 기록했다.
두 번째로 신계에 간 건 루키아와 만나고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엔 신계에 아무 때나 가도 되는 걸까, 신들이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방 성진이가 해결해 주었다.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루키아가 알아서 초대장을 보내줄 거야. 도서관에서 정령이나 디나를 만나 물어봐도 되고.”
“하지만 두 사람이랑 항상 만날 수 있는 건 아닌걸. 그러고 보니 디나 씨는 언제 돌아올까?”
“그건 나도 신경 쓰이네. 아, 그리고 여기에서 신계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는데 배워볼래?”
“정말?”
“내친김에 세계 안에서 신이 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을 몇 개 배워보자. 신력이 없어도 되는 것들 위주로.”
성진이가 알려준 기술들은 진을 정확하게 그리거나 언령을 정확히 읊거나 문장을 통해 영혼의 힘을 잘 끌어내는 게 중요했다.
성진이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신계와 편지를 주고받은 결과, 다음에 신계에 들어설 날짜를 정했고, 디나가 인성이와 세계의 계약이 끝나고 일주일 후에 우리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신이고 주신이 출입 허가를 내린 이상, 신계에 들어서는 방법은 간단해. 그냥 바라기만 하면 돼.”
나는 성진이와 손을 잡고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바람이 내 몸을 이끄는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나는 어느새 드넓은 잔디밭을 딛고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유은하 님.”
그리고 앞에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인사한 루키아를 포함해 다양한 이들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선 루키아. 그녀의 양옆에 선 하르펜과 나지스. 하르펜의 한 걸음 뒤에 선 디나.
두 명의 식물 성향 천사와, 한 명의 시간의 힘을 지닌 악마. 유펠라, 이븐, 잘 모르는 상위 계급 정령 두 명. 천사나 악마와는 다른 것 같지만 그와 비슷한 힘을 지닌 커다란 동물들. 그 외에 다양한 형태의 요정 수 십 명.
“신계의 두 번째 방문을 환영합니다.”
아마 신계의 총 전력이 모인 것 같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되어 잠깐 머뭇거렸으나, 나는 이내 최대한 정중히 인사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또, 처음 뵙겠습니다. 유은하라고 합니다.”
안면이 있는 이들은 밝게 손을 흔들었고, 처음 만난 이들도 다들 반가워하며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서 와, 은하야!”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만나 뵈어 기쁩니다.”
동물처럼 보이는 이들도 모두 평범하게 말을 했다.
“신수야. 잘 크면 천사보다 간편하게 세계를 오가는 좋은 전령이 되어줘.”
내 의문을 느꼈는지 성진이가 내 귓가에 입술을 대며 작게 속삭였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성진이의 외형이 하나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뀐 외형은 바로 머리색이었다. 비단같이 고왔던 검은색이 석양을 그대로 담은 듯한 아름다운 주황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하나로 묶여 흔들리는 성진이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았다.
“왜?”
예쁘게 생긋 웃는 보라색 눈동자와 그에 어우러지는 주황색 머리카락. 햇빛을 받으면 금빛이 반사되어 더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그 모습에 무심코 홀렸다. 무엇보다 주황색과 보라색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색 조합이었다.
그런 내 정신을 되돌린 것은 루키아의 질색하는 목소리였다.
“우와…….”
나는 화들짝 다시 앞을 보았다. 무심코 흘린 목소리였는지 루키아는 일그러진 표정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저 표정, 낯이 익다. 아, 그래, 기억났다. 나와 사귀고 확 돌변한 성진이의 태도에 기겁하던 친구들의 표정과 아주 비슷하다.
언짢은 태도의 루키아와 달리 마찬가지로 성진이의 지인인 하르펜은 몹시 즐거운 기색으로 웃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하르펜이 물었다.
“성진 님의 저 머리색을 처음 보시나요?”
“네…….”
“저게 성진 님의 본래 머리색입니다. 신계에 들어선 영향으로 드러난 모양입니다.”
성진이의 마력 색과 꼭 닮은 색인지라 바로 납득되었다. 하르펜의 미소가 장난스럽게 변했다.
“놀라실 만도 합니다. 검은색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도 충분히 신비롭지만 본래의 색을 두른 성진 님은 한층 아름다우시니까요.”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외모와 이 색 조합은 정말이지 파괴력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나 곧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하르펜의 말이 조금 부끄러워져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르펜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루키아는 여러 번 성진이를 흘겨보았다.
“당신은 자기 행동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은하 님께 꽤 성격을 보여줬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와…….”
루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내 앞장선 루키아를 따라 걸었다. 루키아는 우리를 이끌며 신계의 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신계의 구성은 세계마다 다른데, 저희 신계가 이렇게 녹음이 많은 건 나지스가 첫 번째 신이라서 그래요.”
“신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요?”
“아니요. 신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었어요.”
확실히 처음 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신계는 아주 다양한 식물들로 넘쳤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지스를 보니 나지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하르펜이 마법을 쓰거나 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 저도 식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신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냥 나지스의 취향에 맡기고 있어요. 유용한 식물이 많이 나기도 하고요.”
“확실히.”
성진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머리색에 홀릴 뻔했다.
“이 환경이 이미 관리하는 세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고요.”
영향을 끼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신계의 것에서 파생된 식물이 우리 세계에 많이 자라났다거나, 혹은 우리 세계에 유독 다양한 종류의 강한 식물이 많이 자라난다거나?
그렇다면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인하가 키우는, 4계급 이하의 정령들이 ‘세계수’라 부르기 시작한 커다란 나무였다.
“그럼 세계수는…….”
나지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 세계수는 아니야. 내 영향이 있다고 해도 한……그러네. 식물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의미에서 10%? 그걸 키워낸 건 30%는 박한수의 마법과 영혼이고, 나머지는 강인하의 순수한 재량이야.”
“아…….”
“그녀는 태양의 힘을 지닌 마법사답게 생물을 키워내는 데 특화된 모양이더라.”
그래, 그렇다. 죽음조차 태워 생명으로 순환시키는 게 우리 인하였다. 나는 자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곳의 환경이 세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고 있긴 하지만, 환경을 아예 바꾸면 안 된다는 건 아니에요. 저희는 신계에서 각자 자기만의 영역을 소유하고 있고, 그 자리를 마음대로 꾸미고 다녀요. 필요한 게 생기면 나지스와 의논한 후 경관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이것저것 만들기도 하고요.”
루키아는 이내 잔디밭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온 김에 은하 님도 한 번 뭔가를 만들거나 바꿔 보시면 어떤가요? 방법은 간단해요. 신력을 움직이며 바라기만 하면 돼요.”
그러며 루키아는 펼친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 장소를 꾸며 보라는 뜻이겠지?
연녹빛 사이사이 작은 노란 꽃이 피어 있는 잔디밭을 보며 나는 고민에 잠겼다.
꾸미는 방법은 알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만들고 바꾸면 좋을까?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나는 이내 괜찮은 것을 떠올리고 문이를 열어 어떤 내용이 담긴 원고를 한 장 가져왔다.
완결까지 논스톱으로 연재하고자 공개하지 않고 계속 쓰고만 있는 의 최근 원고 중에 제법 공을 들여 묘사한 풍경이 있었다.
적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비틀렸으나 주인공 일행의 분투로 다시 이치가 돌아오기 시작한 정원. 그러나 공간이 일그러졌던 영향으로 그곳의 풍경은 예전과는 색달라졌다. 하지만 무척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보라색 하늘에 하늘색과 분홍색 잔디, 하얀색 나무, 은홍색의 커다란 초승달.
마침 이곳은 정원이다. 신경 써서 묘사했던 만큼 한번 직접 봐보고 싶은 기분에 완벽하게 구현해 보려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이곳의 분위기와 너무 안 어울려서 잔디와 나무만 구현했다.
일그러진 공간과 시간을 겪고 살아남았던 만큼 그 정원에는 다양한 일그러짐에 관한 내성이 생겼다는 설정이 있는데, 그것도 실현했다.
돌아보자 루키아가 방긋 웃었다.
“역시 금방 해내시네요.”
“마법 덕분에 상상하는 것에는 익숙해서 그런 것 같아요.”
신수와 요정들이 킁킁거리거나 잔디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는 게 아무래도 내가 만든 정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르펜이 허리를 숙여 풀과 꽃을 살폈다.
“약에 쓰면 좋을 것 같네요. 몇 개 뽑아 키워도 되나요?”
“네. 물론이죠.”
“나지스, 부탁드려요.”
“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