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80
아마 나지스가 식물을 가장 잘 다루기 때문에 식물을 옮기는 걸 대신 부탁한 것 같다.
즐거워하는 남신 둘을 내버려 두고 루키아는 내게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롭게 풍경을 구현하게끔 권유했다. 몇 가지는 무얼 만들지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루키아의 말대로 은하수 모양의 강을 만들고, 꽃을 좀 더 다양하게 키우고, 가지런한 길을 텄다. 처음엔 그냥 환각을 구현할 때와 다름없는 감각이었는데, 무언가를 구현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손끝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올라왔다.
손끝에 있는 실을 팽팽하게 당겨 늘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루키아가 마지막으로 지시했다.
“당신의 신력을 깊게 불어넣어 보세요.”
나는 루키아의 말대로 내가 꾸민 정원에 신력을 깊게 불어넣었다. 깊게, 깊게……. 문장과 함께 별하늘을 닮은 힘이 흘러넘쳤다. 그러고 보니 내 신력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일단 여기 있는 다른 신들보다 적은 건 확실하다만.
정화의 힘은 흘러 내가 만든 작은 정원을 감쌌고……그 순간 내 주위에 세계가 비쳤다.
꿈속을 밟지도 않았는데 드넓은 우주가 우주의 꿈과 비슷한 느낌으로 비쳤다. 내가 퍼트리는 모든 힘에 우리 세계가 반응했다. 내 힘은 세계의 핵심에 스며들고, 세계의 축 곳곳에 흘러들었다.
툭.
어깨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내 손을 한 번 보고, 다시 정원을 봤다.
신계의 풍경이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게 세계를 관리하는 첫 단계예요.”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나를 적당한 때에 제지한 것은 루키아였다. 루키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당연하지만 신계와 세계는 연결되어 있어요. 신계에서 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에 영향을 미쳐요. 그 영향을 우리는 쉽게 인지할 수 있고요. 나지스가 신계를 꾸미는 일이 많다 보니 저희의 세계는 식물의 힘이 강하고 품종도 무척 다양해졌어요.”
확실히 전생과 달리 이번 세계의 식물은 정말 다양한 힘과 모습을 가졌다.
“신계가 안정되고 강해지고 넓어질수록 신계와 세계 사이의 연결은 끈끈해지고, 자연히 신계의 힘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도 커져요. 그러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 신계를 꾸미며 관리하고 있어요. 정원을 만들고, 건물을 세우고, 거기에 관리할 세계의 힘과 법칙을 적용시켜 예쁘게 꾸미는 거죠. 그것만으로 세계에 좋은 영향이 가요.”
“그렇군요.”
“아까 저희가 신계에 각자 자신만의 영역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했죠? 그것도 가진 칭호에 해당하는 법칙으로 효율 있게 세계를 관리하기 위해서예요. 특히 칭호에 해당하는 법칙은 영역이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거든요.”
“아…….”
“은하 님은 아직 자리를 결정하지 않으셨으니 저희처럼 본격적으로 영역을 꾸밀 필요는 없지만요. 그래도 연습은 필요하잖아요.”
“네.”
신계와 세계의 연결을 인지하고 나니 신계가 새롭게 보인다. 신계가 전체적으로 어떤 구조인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대략 알겠다. 접근하면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럼 다음엔 은하 님의 힘이 필요한 곳에 가볼까요. 이성진 당신도 온 김에 조금 도와주고 가세요. 그렇다고 직접 힘을 쓰라는 건 아니고…….”
“말 안 해도 알아. 자.”
루키아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성진이를 흘겼다. 하지만 성진이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나에게 직접 신계에서 힘을 쓰지 않은, 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해당 세계의 관리자가 아닌 신이 힘을 써봤자 상성이 안 좋아서 대부분 튕겨 나가. 내 경우 힘이 너무 강해서 세계에 독이 돼. 그래서 루키아가 적당히 중화할 수 있는 기술을 넘겼어.”
“어떤 기술인데?”
“죽음에 관한 법칙을 강화할 수 있는 기술이야. 여기 신 중엔 죽음의 힘을 가진 자가 없으니까. 그나마 루키아가 비슷하게 힘을 쓸 순 있지만, 부족해.”
나지스, 루키아, 하르펜, 나. 확실히 루키아를 빼면 생명과 관련된 법칙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지스의 칭호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다. 성향이나 이력을 아는 만큼 어느 정도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정확히 알기 위해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지스 님은 칭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응? 내 칭호는 ‘녹음’이야.”
가장 유력한 칭호로 내심 ‘식물’을 꼽고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거기다 생각해 보면 식물은 법칙이라기보다는 생물의 호칭이다.
녹음. 식물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의 활기가 느껴지는 단어다. 역시 죽음의 힘을 본격적으로 다룰 만한 칭호가 아니다.
루키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성진이가 건네준 기술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의 말대로 균형이 기울어져 있긴 해요. 그게 저희가 이 세계의 쇠락을 조금밖에 막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기도 하고, 세계를 새로 구축할 때 죽음의 힘을 필요로 한 이유기도 하지요. 하물며 은하 님의 힘도 죽음보다는 생명에 가깝죠.”
“괜찮은 후보는 없어?”
“지금 이 세계엔 없어요.”
“괜히 죄인을 들인 게 아니군.”
“그렇죠. 한 번 멸망했던 세계만큼 무거운 죽음의 힘을 가진 곳은 드물잖아요.”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세계에 있어 힘의 균형은 무척 중요한가 보다. 거기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균형은 신의 존재와 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이들은 겉보기엔 상극의 이치지만 서로가 있기에 그들의 존재감은 커지고, 개성을 인정받는다. 죽음이라는 종착지가 보이기에 생명이 찬란하고, 빛은 어둠을 밝히며, 어둠은 빛 속에서 선명해진다.
그게 균형이겠지?
곧 루키아는 나를 커다란 호숫가로 안내했다. 호숫가의 물결은 밤하늘의 은하수만 옮겨온 것처럼 하얗게 반짝거렸다.
“느끼셨겠지만 신계는 현재 평평해요.”
“아, 네.”
신계라고는 하지만 세계를 관리하는 특정한 이공간……에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평하다는 것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뭔가 있나 보다.
“아직 힘이 약하고 활동하는 거주민의 숫자가 적어서 그래요. 이 호수는 현재 신계의 중심이에요. 신계가 행성의 형태를 이루면 이곳은 바다로 바뀔 거예요.”
“그렇군요. 음……여기가 행성이 되면, 그, 위성이 생기고, 새로운 행성이 생기고, 그 행성에 각 신의 영역이 옮겨지고……그러나요?”
“감이 좋으시네요. 맞아요. 어쩌면 그때쯤엔 새로운 세계가 이 신계의 관리하에 들어와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이 신계나 우리 세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생기거나, 있던 세계가 우리 신계의 관리를 받아들이거나. 이유는 아마 다양하겠지. 어쨌거나 그 정도쯤 되면 하나의 세계만 관리하기엔 힘이 남아돌 정도로 신계가 강해진 것인가 보다.
“기본적으로는 세계가 신계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세계의 상태가 너무 나빠지면 신계도 그 영향을 받아요. 특히 이 호수는 세계의 영향을 바로바로 받아요. 세계에 문제가 생기면 파도치거나, 갈라지거나, 말라붙거나, 얼어붙거나, 더러워지거나, 잡초가 자라거나, 괴물이 생겨나거나, 위협적인 번개를 뿌리기도 해요.”
눈앞에 보이는 호수는 아름답고 반짝반짝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트라베리아에 의해 세계가 극변했을 때쯤엔 상당히 황폐해지지 않았을까. 이 호수도 그렇지만, 다른 장소들도.
“바다와 달리 아직은 순환이 잘 되지 않는지라 규칙적으로 매일매일 깨끗하게 청소해 주어야 해요. 오늘은 은하 님께 부탁할게요.”
“네.”
“신력을 호수 전체에 덮어 가볍게 정화해 주세요.”
선 채로 정화의 힘을 쓸 수도 있었지만, 호기심에 루키아의 허락을 받고 호수에 손을 넣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감각. 손등 위로 엷게 찰랑거리는 물은 투명하지만 빛의 알갱이를 품었다. 알갱이는 기본적으론 물체를 통과하는 성질이지만, 잡을 수 없는 건 아니다. 잡아보니 알갱이는 말랑말랑하거나 딱딱한 등 감촉이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지구에서 함께 했던 자연들과 비슷한 기척이 느껴졌다. 시간과 현실, 낮과 밤, 태양과 달, 나무와 길, 바위와 강.
나는 호수에 손을 넣은 상태로 정화의 힘을 퍼트렸다. 퍼트리면서 알게 된 것은, 보기보다 호수가 훨씬 깊다는 것이다. 정화의 힘이 퍼질수록 세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계가 나와 공명하며, 정화의 힘이 세계 곳곳의 ‘불순물’을 정화했다. 혹은 그럴 수 있는 이치의 흐름을 세계에 더해주었다.
호수에서 손을 뗀 뒤에도 정화의 힘은 한동안 호수를 맴돌았다.
“다음에 오셨을 땐 꿈의 힘을 사용해 청소해 보시면 어떨까요?”
“다음엔 그렇게 해볼게요.”
그 후에도 여러 장소를 향해 신력을 불어 넣었다. 꽃으로 이루어진 정원, 동산, 숲, 하늘에 뜬 아직은 인공적인 태양, 달, 별, 하늘.
호수는 세계의 축과 직접 통하는 것이었고, 태양, 달, 별은 빛을, 하늘은 어둠을, 식물들의 태반은 생명을 상징했다. 식물 하나하나가 어떤 생물의 생명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녹음이 짙을수록 보다 많은 자연과 생물이 건강을 유지한다.
어두운 숲 너머에 있는 거대한 탑을 신력으로 정화해 청소하며 문득 물어보았다.
“신계는 다 이런 느낌인가요? 뭐랄까, 좀 추상적인 느낌이랄까.”
신계의 정비 상태가 세계의 전체적인 안정에 영향을 준다. 중요한 이치는 신계 안에서도 눈에 띄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예쁘거나 커다랗다.
상상한 것과는 제법 다르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관리하기엔 좋은 방법이긴 하다.
“하나하나 일일이 관리하기엔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 많긴 하지만요.”
“아…….”
고개를 기울이던 루키아는 이어진 말에 내 말을 이해하고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신계에서 세계를 직접 내려다보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조정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셨나 보네요. 하하, 초반엔 그랬다고 들었어요. 나지스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나지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래도 그때는 신계와 세계의 연결이 약해서 관리할 수 있는 법칙이 적었겠지만요.”
“그렇다기보다 내 칭호와 관련된 것밖에는 관리할 수 없었어. 생명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고, 환경이나 생물의 존속에 도움이 되는 식물을 퍼트리고, 그로써 생명의 순환에 관여할 권리를 손에 넣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다른 법칙을 건드렸지.”
“그것만으로도 생물들에겐 상당한 도움이 되는걸요. 극단적인 예지만 공기만 충만해도 생물은 번식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생물은 식물을 섭취하고요.”
나지스와 루키아가 그리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다.
“제가 처음 신계에 들어섰을 때는 고작해야 정원 정도 크기였어요. 그렇다고 안 좋았다는 건 아니에요.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나지스는 저나 하르펜처럼 환생이라는 수습 기간이 없었던 것 치고는 신계를 굉장히 잘 관리했어요. 그리고 조금씩 신계의 환경이 세계의 전체적인 안정에 반영되도록 신계의 법칙을 조정하는 중이었죠.”
“다른 세계의 신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낫겠더라고. 어차피 내 힘으론 모든 법칙을 세세히 관리할 수 없어. 그럼 최소한의 안정이라도 꾀해야지. 참고로 그러면서 성진이한테 조언을 여러 번 받았어.”
“오…….”
나는 감탄하며 성진이를 보았다. 성진이가 생긋 웃으며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때 마침 이 묶음 세계 전체의 법칙에 문제가 생겼었거든. 선배의 의뢰로 1계급 신 몇 명이랑 같이 법칙을 정리하러 왔었어.”
“1계급 신이 내려왔다는 건……싸웠어?”
1계급 신은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신이다. 일그러진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본래는 있어선 안 되는 괴물을 처리한다.
괴물이라고 표현하면 그냥저냥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수십 개의 세계와 셀 수 없이 많은 생물의 일그러진 마음과 상상력이 합쳐져 생겨난 괴물이다. 한 번 생겨나면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숨을 삼키면서 한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어라? 1계급 신의 역할을 알고 있어?”
“응. 전투를 전제로 하는 자리잖아? 일그러진 마음이 모여 생긴 특수한 괴물을 없애는 신……맞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신들의 표정과 감정에 드러난 놀람이 한층 깊어졌다. 다만 아마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신들 뿐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은 들리지 않았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매만졌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는데 1계급 신의 역할을 안다고? 이 세계에 1계급 신에 관련된 자료는 없을 텐데……. 여러모로 규격 외이시네요. 에쉬리안나 님과 아는 사이이신 것도 그렇고요.”
성진이는 이번엔 눈을 부릅떴다.
“뭐?”
의외라는 얼굴로 루키아가 성진이를 돌아봤다.
“모르셨나요?”
“전혀.”
나는 성진이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미안. 제약이 걸려 있어서 말해 줄 수 없었어. 루키아 님은 에쉬리안나 님의 편지를 대신 전달해 주면서 아신 거야.”
섭섭한 눈으로 나를 보던 성진이가 곧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어쩔 수 없지. 그래도 지금은 말할 수 있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저번에 환생하기 전에 신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잖아. 그분이셔.”
“…아, 그, 네가 좋아한다던 신이…….”
‘에쉬리안나’라는 이름은 꺼내지 않았지만, 나지스 이전에도 신을 만났었다는 예전에 한 번 했었다. 성진이는 금방 그때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응. 에쉬리안나 님이야.”
나는 입속으로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확인했다. ‘소원’을 빈 것에 관해서는 역시 아직 말할 수 없는 듯했다.
내가 아직 학생일 때 꿈에 나타나 시련에 대해 물어본 것만 봐도 에쉬리안나 님은 내가 신이 될 걸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라 해도 당시 인간이었던 자의 소원을 사사로이 들어줬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겠지.
하물며 환생자는 잠금장치의 잠금쇠를 느슨하게 만드는 행위이니,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가 보다 빨리 신으로 각성하게끔 도왔다.
‘창조신이니 자신의 곁을 지킬 신을 고르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은 일인 것 같긴 한데. 나도 덜컥 그런 소원을 빈 게 좀 부끄럽긴……하니까. 반쯤 꿈이라고 여겼긴 했지만, 음……. 이건 나중에 말하자. 그러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성진이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고민에 잠겼다.
“에쉬리안나 님은 원래 교류를 좋아하는 분이시니 그렇다 쳐도, 그분의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인간이 그분을 알 방법은 없다시피 한데. 일단 네가 전생에 첫 번째 세계 혹은 첫 번째 세계와 아주 가까운 세계에 살았다는 건 알겠다.”
“그건……잘 설명하지 못하겠어. 어떻게 알았는지 자세히 기억이 안 나거든.”
“지금도?”
“…응. 지금도.”
성진이는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그냥 납득해 주었다.
“세상엔 오래 산 신들도 이해 못 하는 일들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에쉬리안나 님을 안다는 것부터 규격 외기도 하고.”
그러며 그는 내 머리를 여러 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루키아가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죠…? 아, 아직 질문에 대한 대답을 끝내지 않았네요. 신계의 법칙은 신들이 만들어 가는 거예요. 처음엔 은하 님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점차 지금의 방식으로 바꾸었어요. 신이 적은 만큼 그러는 편이 더 세계를 빨리 안정시킬 수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다만 칭호와 관련된 법칙은 은하 님이 연상하신 것처럼 직접 조정하는 경우도 꽤 많답니다. 그 외의 직접 조정할 필요가 있는 법칙 몇 개는 해당하는 칭호를 가진 정령 분들이나 신수님들이 조정을 도와주고 계셔요. 요정님들은 신계의 환경을 꾸미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외부에서 왔다 할 수 있는 루키아, 하르펜과 달리 정령, 신수, 요정은 세계에서 태어났다.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오히려 신들보다 넓다.
이내 루키아는 우리를 자신의 영역으로 데려갔다.
루키아의 칭호는 ‘기록’.
그녀는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지식을 찾고 그것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한 그녀의 기록은 세계의 모든 역사와 다름없다.
수많은 역사의 기록을 토대로 루키아는 세계의 미래에 새겨질 기록을 예측한다. 루키아는 그런 힘들로 세계를 이끈다.
루키아의 영역은 거대한 도서관이며 기록소였다. 세계의 모든 정보와 이치가 자동적으로 기록되어 책 형태로 보관된다. 그것들은 크게 세계의 향후에 있어 중요도가 높은 것과 낮은 것으로 분류된다.
루키아는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신계에서 그러한 정보의 보고를 만들어 냈다. 루키아의 영역을 전문으로 관리하는 요정만 20명이라고 한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다.
“와아…….”
기록의 본전(本殿)에 있는 루키아 전용 작업실은 별의 도시 중앙 빌딩 20층에 있는 관리자들의 작업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컴퓨터를 닮은 수많은 마법이 책으로 변한 정보들을 새로이 정리하고 분류한다. 모니터들이 세계의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 비춘다.
“저 장비는 쉽게 표현하자면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설치된 대량의 컴퓨터를 연결한 장치예요. 세계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만큼 기록의 양이 좀 많긴 한데, 웬만해선 세계의 균형에 필수불가결한 정보나 세계가 직접 알려 준 정보만 직접 읽고 정리해요.”
루키아는 만년필을 꺼내 보였다. 나와 대화를 나눌 때도 썼던, 성진이가 제작해주었다는 만년필이었다.
“물론 읽는 것에 그치지 않아요. 저는 신이니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현상 및 기록은 수정해서 바꿀 수 있어요. 필요하다면 이 만년필로 내용을 그어 지우거나, 덧붙이거나, 이어 쓰는 것으로 수정하고, 그러면서 불리한 예지를 비틀어요.”
나는 모니터에 비친 세계 곳곳의 풍경을 살피며 감탄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은하 님은 이 기록소가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글’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제 기술과 은하 님의 기술은 닮은 부분이 있으니까요.”
확실히 이 도서관은 내 마법과 기억과 꿈을 대신 관리해 주는 ‘문이’를 닮았다. 다만 루키아의 도서관은 실존하는 역사를 담았고, 문이의 도서관은 가상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루키아의 영역을 둘러보던 성진이가 화면의 한곳을 바라보고는 조금 놀랐다.
“뭐야. 벌써 천사의 알을 구상했어? 악마만으로도 꽤나 무리했을 텐데, 용케 그럴 틈을 만들었네.”
“영역을 둘러보고 짐작하셨다시피 보조가 절실하거든요. 제 사자, 소시언과 요정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본전의 전담 사자가 한 분 있으면 작업 속도가 많이 달라지니까요.”
아까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눈 이 세계의 유일한 악마(에레르티안 텔) 소시언은 루키아가 탄생시킨 사자였다.
루키아의 힘을 두고 생각해 보면 상생의 힘을 지닌 천사를 만드는 편이 더 쉬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악마부터 만든 건 아무래도 이 세계에는 죽음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참고로 천사와 악마는 반드시 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신계의 힘이 강하지 않다면 그렇게 만드는 게 효율이 좋다고 한다.
루키아의 영역에 이어 하르펜과 나지스의 영역에도 차례대로 들렀다. 하르펜의 영역은 도서관과 숲이 섞인 느낌이었다. 생명의 이치를 담은 다양한 책이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고, 건물 곳곳에 식물이 자라나 있다.
하르펜의 작업실 바닥은 물로 채워져 있고, 물 위에는 반쯤 보석으로 이루어진 수십 그루의 나무가 서 있으며, 주위에는 빛 덩어리가 가득 떠다녔다.
나무는 개체마다 색이며 모양이 달랐고, 이파리나 가지 등이 반 정도는 식물 촉감이고 반 정도는 보석 촉감이었다. 또한 색색의 빛을 가둔 보석 열매가 무수히 매달려 있었다.
“제 영역에 있는 모든 건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무는 각기 일정한 종족이나 자연의 개체, 혹은 생명의 어떤 이치를 상징하거나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깨끗하고 아름답도록 유지하며, 더러움이 생겨나거나 묻으면 바닥에 있는 물로 정화해 깨끗하게 닦아내는 게 제 일과입니다.”
하르펜의 휘하인 만큼 나지스의 영역은 하르펜의 영역과 가까운 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하르펜의 영역과 반쯤 연결되어 있었다.
나지스의 영역은 예상은 했지만 커다란 숲이었다. 드넓은 숲에 무수히 많은 종류의 식물이 때로는 무작위하게, 때로는 규칙성 있게 자라나 있다. 그 영역의 중심은 동산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은색 몸체에 연둣빛과 은빛이 섞인 이파리들. 나지스가 탄생한 행성에 있던, 아마도 나지스의 육신이었던 그 신성한 나무와 꼭 닮았다.
“내 이전 육체를 일부 잘라 와 심어 키운 거야. 원래는 세계 안에 있던 식물이라 그런지 세계와 교섭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
힘은 루키아나 하르펜보다 약해도 나지스는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신. 커다란 나무는 우리 세계와 안정감 있게 연결되어 있었다. 안정감만 두고 보면 루키아나 하르펜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렇게 신계의 중심부라 할 만한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신계의 첫 번째 탐방은 끝났다. 오래 움직이고 힘을 제법 썼는데 평소에 비해 지치지 않았다. 신계라서일까?
루키아는 다음번에는 오늘 보지 못한 정령, 신수, 요정의 영역과 역할을 둘러보자고 권유했고, 나는 수긍했다.
그 후 나는 하르펜과 협력해 내 육체와 영혼의 연결을 손봤다.
처음 해봤지만 하르펜의 신력과 공명하는 건 의외로 쉬웠다. 서로 생명에 닿는 힘을 지녀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나도 하르펜도 상대의 힘을 서포트 하고 여러 힘을 조화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
나는 육체의 시작점에 접촉해 육체를 조금이나마 수복했고, 하르펜은 내 허락하에 영혼의 생명력을 조금씩 조금씩 육체에 옮겼다.
하지만 나도 하르펜도 역시 병의 완치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육체는 시작점을 건드려도 내 영혼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약해졌고, 이미 육체가 지닌 근원적인 생명력이 너무 많이 새어나갔다.
“완치는 무리이겠군요. 그나마 자주 이렇게 조치를 취하는 게 가장 오래 지금의 삶을 지켜 낼 방법이라 봅니다.”
“네. 저도 그것 외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네요.”
약해진 육체는 내 정화의 힘도, 하르펜이 보낸 생명력도 조금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의논 후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르펜과 만나 이 육체의 수명을 이어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신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들르게 되었다.
참고로 신계의 시간은 신들이 상황에 맞게 흐름을 조절하는데,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기본적으로는 우리 세계보다 좀 더 빠르게 시간이 흐른단다.
약속한 한 달의 시간 기준은 내게 맞춰 지구의 시간으로 정해졌다.
나와 하르펜이 이 인간의 육체를 조정하고, 다른 이들이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사이, 루키아와 성진이는 잠깐 바깥으로 나가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하르펜과 성진이가 내 육체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루키아가 슬쩍 알려 주었다.
“맹약의 대상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대가와 벌이 섞인 결과임을 인지하고 있더라고요.”
“아…….”
솔직히 말하자면 의외였다. 나는 예전에 성진이의 꿈에서 그의 진심을 엿보았다. 어째서, 왜, 이렇게 오래. 꿈속의 그는 그렇게 한탄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 단편적인 기억과 감상이었으며, 태반은 아주 오랜 과거의 해묵은 꿈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본 만큼 성진이는 아직 벌의 대가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명확하게 인지한 건 최근 2년 사이인 것 같아요. 맹약의 대가와 업의 청산이 끝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당신이 강해져서이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루키아가 추측했던, 꼬인 인연의 끈을 풀어내기 위한 유력한 방법을 떠올리며 수긍했다.
그 후에는 한동안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잡담을 나눴다. 잡담이라고 해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여러 세계의 근황 같은 스케일 큰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칭호를 자각할만한 징조는 없나요?”
“최근에 전생의 꿈을 여러 번 꿨어요. 그게 징조랄지 단서인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무슨 일이 있으면 이성진에게 바로바로 전해주세요. 이런 건 우리보다 그가 더 잘 알아요.”
“그럴게요.”
신계의 면면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와 성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신력과 함께 영혼의 힘이 가라앉고 육체의 감각이 돌아온다.
영혼으로 움직일 때에 비해 감각이 많이 약한 육체가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안심되었다. 아직 나는 이 연약한 육체를 움직일 수 있다. 인간으로 이 세계에 살아 있다.
역시 나는 되도록 오래 이 세계에 있고 싶었다.
꿈을 꾸는 일이 많아졌다. 칭호를 신경 쓰고 있지만 않았다면 단순히 평범히 여겨지는 꿈들이었다.
하지만 꿈을 꾸는 횟수가 묘하게 많았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었다.
평범한 꿈을 꿀 수 있도록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꿈을 쉽게 자각하는 나는 학생 때부터 평범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물며 어른이 된 나는 여러 일을 거치면서 꿈을 꾸는 즐거움을 잊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 평범해 보이는 꿈은 상상과 과거를 넘나들며 반복적으로, 자주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 전생의 꿈을 꾸는 일이 늘었다.
이윽고 일정 기점부터는 전생의 꿈만 꾸게 됐다.
전생의 기억은 돌이켜 보면 많이 흐려져 있었다. 누락된 기억이 많은 게 가장 큰 원인일 거다. 나는 아마 전생부터 신이 될 가능성을 품은 영혼이었으니, 기억력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반면 전전생, 첫 번째 삶의 나는 여신님과 만나지 못한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누락된 기억이 많기 이전에 기억력부터 평범한 사람 수준이었다. 그래서 전생에 비해서도 무척 기억이 흐렸다. 약 80년간의 삶 중에서 기억나는 일이 더 적을 정도였다.
어릴 때 첫사랑을 거쳤고, 소설가였고, 성격은 지금보다 더 소심했고, 제대로 마음을 나눈 친구는 없었고, 3명의 동생이 있었고, 사이가 무척 좋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평범하게 살다가 적당한 나이에 죽었다.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니 정말로 전전생에 관해서는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런 두 삶의 기억이 짧게, 흐리게 꿈속에 나타났다. 많으면 하루 만에도 세 번, 적으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꿈을 꿨다. 다만 꿈의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무심코 전생의, 마법 없이 꿈을 꿨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꿈을 돌이키며 고민하는 동안 인성이와 세계의 계약이 정식으로 끝났다. 인성이와 가디언들은 별의 도시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받았다. 가디언들의 접근 레벨은 인성이보다는 두 단계 정도 아래였다. 또 인성이의 오른 눈동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날은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아는 사람끼리 다 모여 환성을 지르며 축하했다. 뉴스에도 그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우리는 특히 인성이의 눈동자가 돌아온 게 기뻤다.
“예전 눈동자도 예뻤지만, 역시 너는 검은색 눈이 제일 잘 어울려.”
소영이는 그렇게 말하며 인성이의 등을 거칠게 두드렸다.
별의 도시에서 돌아온 관리자들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나, 있을 곳을 찾았다.
캐시는 경찰 본부의 기숙사에 들어갔고, 하미아와 라스는 키메라들의 본가 은성단으로 향했다.
인성이는 이틀 정도 우리 집에서 지내고, 일주일 정도 유란의 직원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부산의 바다 경관이 보기 좋은 집을 샀다. 국가적 차원에서 집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왔으나 돈은 많다며 인성이가 거절했다.
인성이의 자금 출처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비중이 큰 건 전 우주에서 자유롭게 통신을 가능케 하는 마법진의 개발 및 설치다.
별의 도시에 깃든 힘을 이용해 만들어진 마법진은 세계와 관리자 간의 계약이 끝난 지금도 유효하다. 또한 계약이 끝난 지금 별의 도시를 통해 그만한 마법을 설치할 수 있는 건 별의 도시 고위 열쇠를 받은 인성이뿐이다.
인성이는 한동안 푹 쉬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전했다. 라스와 하미아는 첸을 도와 키메라를 관리하며 직업을 고민할 거라고 한다. 다만 하미아는 인하가 관리하는 한빛 정원에서 일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키메라들의 일이라고 하니 앨리스는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벌써 웬만한 시계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회중시계나 손목시계가 특히 만드는 재미가 있다며, 우리에게 샘플을 몇 개 보내왔다. 지금은 어떤 시계에 어떤 기능을 넣어 상품화를 할지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고민 중이다.
노체와 앨리스는 협력적인 만큼 2년 후에는 면죄가 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키메라인 만큼 특별 관리 대상일 테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라이라나 대현의 일행만큼은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인성이가 집을 구했을 때쯤에 디나가 돌아왔다. 이 세계에, 혹은 지구에 돌아온 날 디나는 가장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신의 아이에서 다시 인간이 된 디나는 도서관이나 세계의 축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것들만을 몸에 걸쳤다.
“신들께서 또다시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이 세계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생각이에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경계의 도시에도 동행할 수 없어요.”
성진이가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디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펠라 님도 한동안 도서관에 들르는 일이 뜸할 거예요. 균열이 없어진 만큼 신계와 세계 안에서 정령의 역할을 해내는 데 집중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앞으로는 세계 바깥에 나가실 때는 성진 님과 함께해 주세요.”
“그렇군요. 조금 아쉽지만 세계가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거냐고 물으니, 디나는 이전처럼 평범하게 지낼 거라고 했다. 키메라들이 이 세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의사답게 치료 활동을 하고, 예전처럼 여행을 다니고…….
“제 치료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의사분들과 함께 성심성의껏 은하 님의 몸을 치료할게요. 그걸 위한 도구를 하르펜 님께 받아 오기도 했고요.”
“잘 부탁드려요.”
일상적이었던 잡담의 화제는 이내 조금씩 ‘신’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아무래도 디나는 제법 최근까지 내가 신으로 각성할 후보였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유펠라 님도 은하 님의 문장을 보고 처음으로 짐작했대요. 신의 가능성은 다른 사람이 미리 말해주기엔 확증이 약한 애매한 부분이라서요. 그래서 다들 저한테 언급해 주긴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성진 님이 신이라는 건 하르펜 선생님께 미리 전해 들은 터라 한눈에 보고 알았지만요.”
디나는 성진이를 흘끔 보며 한 번 몸을 움츠리고는 내 귓가에 바싹 입술을 가져왔다.
“사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땐 좀 무서웠어요.”
무심코 예전의 일을 돌이켰다. 확실히 좀 긴장한 것 같긴 했지. 나는 조금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지금은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