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81
“우연히 단둘이 남으면 여전히 조금 긴장되지만, 은하 님이 곁에 있으면 전혀 문제없어요.”
“다행이네요.”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간 디나는 다음 날 키메라들이 사는 은성단에 향해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디나의 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의사들이 당장에 달려갔다. 디나는 하르펜이 남긴 부탁을 이루기 위해 머나먼 행성에 갔다 왔고, 그 증거라며 하르펜에게 받아 온 아이템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는 다른 의사들처럼 주기적으로 내 몸을 꼼꼼히 살펴주고 있다.
디나가 하르펜에게 받아온 아이템은 겉으로는 내 상태에 무척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여, 다른 의사들 모두 기뻐하고 있다. 그걸 핑계 삼아 하르펜과의 협력으로 육체의 감각을 조금 되살렸다.
……그래도 다른 초월자들처럼 오래 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상정한 것보다는 오래 살 수 있다. 예전만큼 절망적이지 않다. 당장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분명 의미가 있을 전생의 꿈은 여전히 의미가 없는 것처럼 반복되었고, 집필 중인 의 스토리가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아무래도 올해 안에 완결까지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전쟁을 계기로 내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지고 만 ‘초아’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낼지는 조금……생각 중이다. 일단 어떤 필명으로 연재하든지 연재를 시작하면 다시 소설을 쓸 활력을 심어 준 리브리의 로카에게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스토리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글을 쓰는데 가속도가 붙었다. 약해졌던 체력도 최근에는 조금 완화되어, 학생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하루에 제법 괜찮은 분량의 페이지를 썼다.
글을 쓰고, 성류족에게 건네기 위한 진화석을 비롯해 여러 마법석을 꾸준히 만들고, 성진이와 신들을 통해 신과 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치료를 받는 나날. 더해 가끔 꿈에 대해 고찰하는 나날.
소설에 집중하다가 잠깐 쉬려고 침대에 누운 사이 또 꿈을 꿨다.
전생……아니, 전전생의 꿈이었다.
낯선 방의 풍경이 흐릿하게 시야에 비쳤다. 책이 잔뜩 꽂힌 책꽂이와 수첩, 노트, 일상 용품이 쌓인 책상. ‘나’는 문서가 켜진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쳤다. 이번 꿈도 소설을 쓸 때의 꿈인가 보다.
나는 첫 번째 삶의 어릴 때부터 거의 매일 적게나마 글을 썼다. 그래서 전생의 꿈을 꾸면 글을 쓸 때의 시점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컵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대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키보드에 다시 손을 올렸다. 쓰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썼다. 그런데 문득 눈가가 뜨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과 함께 신음을 한 번 떨어뜨리고, 조금씩 글을 잇다가, 눈물을 닦고 숨을 들이켰다.
‘아…….’
같은 작가였지만 전전생의 나와 전생 및 현생의 내 작품은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전전생의 나는 좀 더……우울한 작품을 많이 썼다. 우울한 소재만 쓴 것도, 배드엔딩을 즐겨 쓴 것도 아니다. 으음, 그렇다고 배드엔딩을 쓰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스토리보다는 소설의 설정을 짜는 걸 더 즐기는 성격이었고, 그 설정을 위해 스토리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쓰다 보면 꽤나 다양한 엔딩이 났다. 확연한 데드엔딩이나 배드엔딩은 쓰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배드엔딩으로 느낄 법하게 끝난 작품이 제법 있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이 많이 굴렀다. 작품 속에 나온 등장인물이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식으로 원하는 설정을 원하는 대로 쓰다가도 또 어느 땐 트렌드에 맞춰 클리셰 작품이나 마냥 밝은 분위기의 작품도 썼다.
하지만 작가 생활이 길어질수록 가볍고 밝은 분위기의 작품을 쓰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거운 작품을 쓰면 내 마음도 무거워진다.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걸 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죽기까지 많은 작품을 썼다. 설정만 해두고 쓰지 않은 걸 제외해도 40 작품쯤 됐던 것 같다.
하지만 환생한 후부터는 달랐다. 주인공이 구르기는 하지만 등장인물을 죽게 하는 일은 없었다. 정말로 열심히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글만을 썼다. 그게 더 쓰면서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품 성향이 정착했다.
지금도 배드엔딩은 별로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을 쓰며 우는 ‘내’가 그냥 조금 그립고, 애틋했다. 아닌가? 조금 괴로웠다. 가슴이 무겁고 아팠다.
“…….”
그래서 나는 울면서 눈을 떴다. 과거의 일에 이상하리만큼 깊게 감정 이입을 한 것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습관적으로 문이를 열고 꿈을 기록했다.
원하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주인공을 굴리거나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을 쓰곤 했지만, 쓰면서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스토리가 원하는 대로 이어졌다는 만족감은 있었을지언정 방금 꾼 꿈처럼 감정 이입을 하며 운 적이 많았다.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성진이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눈가에 남은 눈물이 보였나 보다.
가까이 다가온 성진이가 간식이 담긴 쟁반을 부유마법과 함께 허공에 던지고 다급히 나를 끌어안았다.
“왜 그래?”
나는 눈을 깜빡여 잔여 눈물을 떨어뜨렸다.
“전생의 꿈을 꿨는데, 왠지 슬펐어.”
위로하듯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성진이가 석연찮은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역시 네 전생에 뭔가 있긴 있었나 봐. 최근 전생의 꿈만 보는 것도 그렇고, 지워진 기억이 있다고 하기도 했고, 에쉬리안나 님의 이름을 알고, 만난 것도 그렇고.”
내 영혼의 격이 올라간 결정적인 분기점은 여신님을 만난 것이겠지만, 여신님이나 첫 번째 세계에 관한 다양한 정보는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닐 것 같다. 설령 루키아의 기록서처럼 세계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면서 여신님은 나에게 ‘자격’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발견한 세계의 정보를 몇 번의 삶을 거치더라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증거로 나는 내 미래를 깊게 알았고, 그럼에도 환생하면서 미래의 기억과 함께 세계의 많은 정보를 잊어버렸다. 그게 누락된 기억이다. 그렇게 누락된 정보에 관한 것은 아공간에 기록으로 남아 있더라도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전생의 꿈을 계속 꾸는 것은 잊어버린 정보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와 성진이는 최근에 그렇게 추리했다.
그렇다는 건 전생의 무언가는 내 칭호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거겠지.
나는 성진이의 맞은편에 서서 꿈 일기를 다시 한번 돌이켰다.
“역시 꿈이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
따로따로 보면 알기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꿈의 시점을 확인하면 그런 경향이 있다.
두 전생을 오가며 꿈을 꾼다. 가장 오래된 과거를 1, 가장 가까운 과거를 10이라 하자. 전생의 꿈은 10, 8, 9, 9, 8, 7……이런 식으로 조금씩 애매하게 과거를 거슬러 가고 있다. 다만 전전생의 꿈은 전생의 꿈에 비교했기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느껴질 뿐이지, 훨씬 규칙이 없고 애매하다.
“아직 에쉬리안나 님의 정보를 언제 알았는지 기억나지 않아?”
눈을 감고 고민했으나, 여전히 머릿속은 깜깜하기만 했다.
“꽤 젊을 때부터 알았던 건 확실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에쉬리안나 님이 사실 첫 번째 창조신이라는 건 성진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건 본래 2계급 신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피의 맹약에 의거하여 전생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마법 등의 특별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 두 번의 삶을 거쳤다고만 말해 두었다.
위의 이유들로 마음이 무거워서 나는 성진이에게 전생의 기억이 담긴 이 꿈 일기를 보여준 적이 없고, 성진이도 보려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일단 여느 때처럼 조급해 하지 않고 그 정도에서 대화를 끊었다. 전생의 꿈과 기억들이 실로 내 칭호와 관련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생각날 테니까.
실제로 나는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엔 전생의 꿈이었다. 기껏해야 6 정도의 과거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좀 더 과거의 일이었다.
중학생……무렵의 내가 홀로 방에서 타자를 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눈을 부릅뜨고 글을 쓰고, 쓰고, 썼다. 열린 문서의 제목은…….
전전생과 전생의 작풍은 많이 달랐다. 전생의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과거에 불행한 일을 겪었을지언정, 힘든 일을 경험할지언정 다들 결말에서 행복해졌다. 그런데도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괴롭게, 아프게, 울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울면서 깨어났다. 어두운 천장을 보며 꿈에서 적었던 문서의, 소설의 제목을 떠올렸다.
그 제목은 오늘 오후에 낮잠을 잘 때 꿨던 꿈에서 전전생의 내가 쓰고 있던 소설과 제목이 같았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전생의 나는 곧잘 전전생의 내가 썼던 소설을 리메이크했다. 애매한 결말이 났던 소설을 보다 즐거운 해피엔딩으로 바꾸거나, 리메이크 전에는 죽었던 등장인물을 리메이크판에선 죽지 않게끔 설정했다. 그러면서 꽤나 뿌듯해했다.
……울었던가?
울었었나?
‘기억나지……않아.’
나는 생각에 잠기며 인상을 썼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눈물이 마르고 새벽이 찾아왔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 나는 그냥 일어나 꿈 일기를 썼다. 그 기척을 느끼고 성진이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버렸다.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나는 반복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신경 쓰여.’
처음엔 그냥 과거를 꿈으로 보는구나 싶었는데 이어질수록 꿈들은 내 정신을 자극했다. 도저히 신경이 쓰여 참을 수 없었다. 전부 파헤쳐 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좀 더 본격적으로 전생의 나를 돌이켜 봐야겠어.’
오랜만에 차원 도서관에 향했다. 신이 된 이후로 차원 도서관으로 간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동안은 대개 성진이와 함께 세계 안에서 신계와 교류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신계에 향해 신계를 가꾸는 방법이나 신의 직무에 대해서 배웠다.
그렇게 배운 것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몇 번 도서관에 향하긴 했다. 하지만 직접 듣고 배울 것이 많고,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데 열중하다 보니 정말 몇 번밖에 가지 않았다.
거기다 갈 때마다 신들 전용 층에만 가는지라, 평소 도서관에서 자주 교류했던 레오날드를 만나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이다! 아는 신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만, 정말로 신으로 각성했군.”
“오랜만이에요. 여러 일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이렇게 보니 레오날드는……신은 아니었지만 한 세계 안에서 신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진 자였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신을 이기고 세계를 제패했다고 했다. 신은 아니지만, 그와 별개로 그는 세계를 관리할 자격을 지녔고, 그에 따라 관리하고 있다. 세계 역시 그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군.”
한 세계를 관리하는 자인만큼 그는 내가 칭호를 각성하지 못했다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
“답답할 시기지. 그대가 하루 빨리 진정한 자신을 찾기를 기원하겠다!”
“감사합니다.”
레오날드와 짧게 대화를 나눈 나는 이내 신들만이 들어설 자격이 있는 최상층의 자료실로 향했다.
오늘 혼자 이 자료실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용 열람실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건 신들만이 들를 수 있는 이 자료실만의 특전이었다. 사서에게 신청하면 전용 열람실을 만들 수 있으며, 한 번 만들면 원할 때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거기에는 내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들어올 수 없다.
처음 하르펜에게 초대받아 들어간 곳이 바로 하르펜 전용 열람실이었다.
전용 열람실은 두 번째로 이 자료실에 찾아왔을 때 성진이와 나지스의 권유로 신청하여 만들었다. 조용히 혼자서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 수 있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오늘 여기에 온 건 자료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서 차분히 있을 수 있는 밀폐된 공간이 필요해서였다.
나는 일단 열람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모든 출입을 금했다. 신청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전용 열람실 안은 기본으로 주어지는 책장만 있을 뿐 휑했다. 나는 적당한 곳에 책상과 의자를 만들어 세워둔 다음 아공간을 열었다.
오랜만에 여신님이 선물해 준 아공간을 열었다.
“여신님을 만나면 역시 제약을 풀어달라고 해야겠다.”
성진이는 칭호로 고민 중인 것도 있어 세계 안에서는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차분히 책을 읽고 싶다는 말에는 그러려니 하며 보내줬다.
아공간에 한한 제약 때문에 여전히 성진이 근처에서는 아공간을 생각하는 데 힘이 들고, 아공간을 열 수도 없다. 신이 되면서 그 제약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내가 에쉬리안나 님과 아는 사이라 밝혀진 지금도 여전히 성진이 근처에서는 아공간을 열 수 없다.
하지만 여기는 다르다. 이 열람실 바깥에서는 성진이도 여기를 자세히 감지할 수 없다. 아공간을 자유롭게 열고 전생을 조사할 장소로 여기는 아주 적절했다.
꿈속 세계에서 아공간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육체가 성진이와 함께 있는 이상 꿈속에서도 아공간을 떠올리는 데 어느 정도 정신력이 소모된다. 그러므로 일단은 현실에서 조사해보고자 한다.
반복해서 찾아오는 전생의 꿈. 거기에 얼핏얼핏 섞이는, 나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 과거의 감정들.
‘왜 나는 전전생에 쓴 소설을 보다 행복한 전개로 리메이크하면서 그렇게 울었을까?’
그 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오랜만에 아공간에 들어섰다. 아공간에 들어올 틈을 찾기 어려운 만큼 오늘은 육체가 지치지 않는 한 최대한 많은 것을 살펴보려 한다.
아공간에 들어선 나는 내부의 분위기가 이전과 사뭇 다르게 느껴져 조금 놀랐다.
이곳의 모든 물건은 전생의 물건. 그래서 현생의 힘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이 된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더불어 여신님이 내게 넘겨준 아공간의 법칙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설정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바꿀 엄두가 안 나네.’
바꿀 방법이 보인다 해도, 이 아공간을 이룬 기술과 나 사이에 힘의 차이가 엄청나다. 섣불리 건드린다고 해서 쉽게 열화되진 않겠지만, 이 대단한 공간에 어설픈 내 힘을 섞는다는 게 많이……망설여진다.
“일단 자료부터 확인해보자.”
아공간 안에는 컴퓨터가 두 대 있다. 하나는 첫 번째 삶에서 쓴 것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삶에서 쓴 것이다. 이동식 디스크를 포함해 백업을 잘 해 둔 만큼 컴퓨터로 썼던 모든 글들은 잘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자료는 컴퓨터의 자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노트와 스마트폰에도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적어 두었는데, 죽기 전에 그 모든 자료를 컴퓨터에 백업하지는 못했다. 환생한 이후에도 전생의 물건은 마법으로 건드리기 어려운 만큼 자료를 백업하거나 정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골치가 아파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보는 데도 골치가 아팠지만, 신이 된 지금은 좀 더 자유롭게 자료를 확인할 수 있어.’
이제는 키워드로 검색하는 것만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자료를 아공간 안에서라면 일부 마법과 동기화할 수 있다. 바깥에 나가면 동기화가 풀리겠지만, 이만해도 전보다 훨씬 자료를 살펴보기 편하다.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자료는……정해두었다.
두 대의 컴퓨터를 켜고 이동식 디스크를 연결한다. 나는 문자마법을 열어 키워드를 치고 검색했다. 두 컴퓨터에서 해당하는 제목의 원고 파일과 설정 파일이 열렸다. 무수히 많은 책들 사이에서 4권의 책이 빠져나왔다.
바로 최근에 꿈에서 나와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그 작품이었다.
전전생에 쓴 초판에서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죽거나 불행해졌다. 하지만 리메이크판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살았고, 작품 분위기도 훨씬 더 밝아졌다.
전전생의 이 작품은 열심히 썼지만 전자책 출간으로 그쳤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보다 많은 인기를 얻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리메이크하면서 더 탄탄히 스토리를 정리한 덕도 있겠지만, 시원시원하고 밝은 분위기의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문자마법이 숙련되면서 무시무시하게 빨라진 속독 기술로 4권의 책을 순식간에 읽었다. 전자책으로 출간한 전전생의 이 작품은 권수는 많아도 분량만으로 따지면 리메이크 작품보다 글자 수가 적었다.
“특별한 건 없는데…….”
하지만 내 마음은 울렸다. 전전생의 작품을 보면 슬펐고, 리메이크 작품을 보면 가슴이 약간 아릿하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내친 김에 나는 리메이크를 거쳤던 작품들을 전부 검색해 불러왔다. 기본적으로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터라 전전생이라고 해서 가슴 아픈 작품을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요 등장인물이 죽은 작품을 포함하면 열 작품 남짓 되었다. 이중 리메이크 한 작품은…….
그런 식으로 컴퓨터의 문서와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문득 나는 떠올렸다. 분명 내가 썼음에도 기억이 애매한 작품들이 몇 개 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설정과 스토리를 일부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기억이 누락된 탓이 좀 더 컸다.
그건…….
노이즈와 함께 나는 오랜만에 자각했다. 그건 내가 알게 된 세계의 이런저런 정보를 설정으로 바꾸어 책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정보는 소설 속 세계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랬던가?’
생각나지 않는 것과 생각나는 것. 나는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의 파도를 꾹 억누르고 냉정하게 많은 것을 읽고, 살펴보고, 고찰했다.
전전생의 자료와 원고, 전생의 자료와 원고를 문이와 함께 교차하듯 살펴보며 느낀 것은, 역시 전전생의 자료 중에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
그와 함께 누락된 기억도 전전생의 기억이 훨씬 많다는 것이 좀 더 확실히 다가왔다.
기억의 쇠락과 누락이 겹쳐져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했다.
전생의 기억과 추억은 크게 분류하자면 가족, 학교, 작품, 일상, 성진이 정도로 나뉜다.
전전생은 가족, 학교, 작품, 일상, 이 네 개 정도로 나뉜다.
성진이가 빠진 것뿐인데 기억나는 것의 양이 많이 차이 났다. 살아간 세월만 두고 보면 전전생이 두 배 이상 많은 데도 그랬다.
이 대분류의 기억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작품에 관한 기억이었다. 전생과 전전생 모두 작가였던 나는 매일매일 평균 10시간가량 글을 쓰는 게 일상이었다. 심할 땐 생명 활동을 위해 필요한 일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글을 쓰는 데만 쏟아부었다.
전생, 막 회귀에 가까운 첫 환생을 했을 때는 다시 태어났다는 걸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어가며 꾸는 꿈의 연장선이라고 마저 생각했다. 여신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환생이라는 걸 인지한 건 태어나고 몇 년은 지난 후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전생의 그 녀석을 만나고, 조금 외로운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도중에 이사로 인해 전학을 가고,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중학생……무렵이었나. 그전에도 뭔가 이것저것, 특히 아공간에서 쓰고 읽었던 것 같으나, 본격적으로 소설을 연재하진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전생의 성진이와 재회했다. 글을 쓰고,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장난스러운 친구 사이를 거쳐 나와 그 녀석은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진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없어졌다.
대학교에서 다시 성진이를 만났다.
사건 사고가 많았지만 다시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뭔가, 많이 부족해. 많이…….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전전생?
중학교까지는 비슷한 흐름이었던 것 같다. 전생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많이 잊어버리긴 했네, 진짜. 이건 어릴 때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작은 것들은 달랐다. 나 개인의 행동 같은 게 달랐다. 전전생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아마 중학생 때부터였던가? 그래그래, 분명 잘 쓴다고 칭찬을 받은 게 계기였다. 하지만 분명 초등학생 때도 단편적으로나마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곤 했었다.
교과서에 낙서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노트에 단편 설정이나 이야기를 썼다. 취미로 좋아하는 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 드림 소설이나 패러디 소설을 썼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오리지널 소설을 쓴 건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처음 출간한 소설은……뭐였더라?
읽을 수 없는 메모와 설정 중 신이 되면서 읽을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있는지부터 파악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나는 내가 예전에 썼던 소설들을 쉼 없이 들춰보고 있었다.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아도, 내용이 보이지 않아도, 어느 게 내가 쓴 작품인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글을 많이 썼을 때 꿈을 더 선명하게, 많이 꾸는 것 같습니다.’
문이가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소설을 쓰는 꿈을 꾸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말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문이도 ‘그런가?’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을 쓰는 건 전전생과 전생의 내가 가장 많이 했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최근에는 를 쓰는 속도가 빨라져, 거의 매일 소설을 썼다. 그래서 거기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읽을 수 없는 많은 종이책과 문서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잊었다. 그런데 잊은 것 중 태반은 작품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글과 함께 살아왔던 나에게, 그건 인생의 반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게 된 세계의 정보를 참고로 해서 소설 설정을 만들기도 했어.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전전생의 세계는 여신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허락되는 세계였어. 단지 수많은 공상 중의 하나로 취급되었을 뿐.”
「네.」
“나도 여신님이 정말로 있는지 반신반의했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신님을 좋아했어.”
「그랬습니다.」
“……정말로 그것뿐일까?”
나는 글자가 뭉그러진 책을 손으로 훑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 그러고 보니 여신님과 연관된 정보나 세계를 상상하며 쓴 소설도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일까? 그래서 이렇게 많은 기억이 지워졌나?”
「…….」
누락되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기억들이 지금은 이렇게 무겁게 다가온다. 누락된 이유는 분명 있었다. 전생의 나는 납득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납득할 수 없다.
집필한 소설들은 내 인생이었다. 인생의 증거였다.
빈 공백들이 오늘따라 너무 허망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 내용이 기억나는 날은 오늘이 아니다. 그런 확신이 강렬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조만간 모든 것이 기억날 것이다. 그런 예감에 나는 기대되는 한편으로, 불안해졌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공간 안에 있는 동안 바깥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전생의 소설들을 읽고, 빈 공백들을 둘러보고, 에쉬리안나 님과 관련된 자료를 찾고, 드문드문 적은 일기의 내용을 확인했다.
일기는 양이 정말 적었다. 전전생부터 이번 생을 통틀어 나는 일기를 쓰는 습관이 없다시피 했다. 초등학생 때 숙제로 매일매일 적은 적도 있었지만 졸업한 후에 버렸다.
문득 일기를 써보고 싶어져서 작심삼일로 적었다가, 인상적인 것을 보거나 경험했을 때 또다시 문득 생각나 적었다가, 그런 식이었다. 때문에 전전생과 전생의 것 전부를 합쳐도 일기의 분량은 채 한 권도 되지 않았다.
전전생의 일기에는 정말 드문드문 일상만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전생의 일기도 날짜가 띄엄띄엄 있었는데, 전생의 일기는 군데군데 흐려져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아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다지만 계속 움직이고 무언가를 본 만큼 약한 내 육체와 함께 정신은 지친다. 자고 일어나더라도 여기서는 그 피로가 잘 회복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격으로 도서관에 오면 되니까. 성진이랑 같이 도서관에 오더라도 열람실에 먼저 들어오는 식으로 기회를 잡으면 돼.’
공부하거나 글을 쓸 때 누가 옆에 있으면 내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알기에, 성진이는 그때마다 내 옆을 비워준다. 그렇다고 집을 비워 주진 않으니 여기에 온 거지만.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피로를 받아들여 아공간에서 나왔다.
“지쳤다…….”
한동안 멍하니 전용 열람실에 앉아 있다가, 다음에 올 때를 생각해 내부를 조금 더 꾸몄다. 그러고 보니 열람실에 기본으로 들어서 있는 저 책장에 이곳의 자료를 꽂아두면 해당 자료가 복사된다고 그랬다.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해당 자료를 빌려 가더라도 언제든지 여기에서 계속 읽을 수 있다.
또다시 멍하니 책상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도서관에서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었다. 처음부터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아공간을 둘러보다 보니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그게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낮잠이라도 잘까? 그런데 그러면 또 꿈을 꿀 것 같다.
‘지금은 꿈을 꾸고 싶지 않은데.’
그럼 를 이어 쓸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열람실을 나섰다. 문을 닫자 내 전용 열람실과 통하는 남색 문이 벽에서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그대로 성큼성큼 책장 사이를 걸어 출구로 향하던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신과 마주쳤다.
가끔 도서관의 복도에서 마주치던 신이었다. 발에 끌리는 긴 푸른색 예복을 입었고, 파도를 담은 어두운 푸른 머리카락을 진주로 장식했다. 가끔 이야기를 나누던 물의 기사, 코델리아가 모시는 심해의 여신이다.
루키아나 하르펜만큼은 아니지만 나지스와 비슷한 강함을 지녔다.
그녀는 시원시원한 미소와 함께 짧게 손을 흔들었고, 그에 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가끔 보던 얼굴이나 멀리서 얼핏 보았을 뿐 코앞에서 인사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그럴까?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 생각을 뒤로하며 나는 이 자료실을 관리하는 머리카락이 긴 사서에게 다가갔다. 이 자료실을 담당하는 사서는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 온 건 몇 번 되지 않는데 눈앞에 있는 사서만 3번을 봤다.
“인물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열람을 원하는 인물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이성진’, ‘유은하’.”
이성진의 이름을 들은 사서가 잠시 흠칫했으나, 곧 도서관의 단말을 건드려 열람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진심으로 읽고 싶은 건 ‘유은하’, 나에 대한 인물 자료였다. 그럼에도 이성진의 이름을 말한 건 단순히 확실히 하고 싶어서였다.
내게 2계급 신의 정보를 열람할 자격이 있는지. 자격이 있음에도 내 자료를 열람할 수 없다면, 그건…….
“‘이성진’ 님의 인물 자료는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은하’ 님의 인물 자료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
그건 내가 칭호를 찾고 있기 때문일까? 본디 내 영혼의 등급이 칭호가 없는 지금의 나보다 높아서 그런 걸까?
“‘이성진’ 님의 자료를 가져올까요?”
조금 읽어 보고픈 기분이 들지만, 오늘은 공부할 머리를 쓸 만큼 썼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열람 자격이 있는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거라, 괜찮아요.”
“그러시군요.”
사서는 별다른 질문 없이 수긍했다. 나는 사서에게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료실을 뒤로했다.
꿈속에서 전생과 전전생의 나는 여전히, 대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두 인생의 태반을 그렇게 살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건 알고 있지만 소설과 나, 칭호와 전생, 가슴에 자리 잡은 무언가 걸리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결국 3일 만에 다시 도서관에 방문했다. 다만 이번에는 성진이와 함께였다. 그래도 요즘에는 성진이와 함께 있어도 집중하면 아공간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지 않으니, 타이밍이 좋으면 아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참고로 성진이에게는 에 관한 아이디어 탐색을 위해 도서관에 가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자 성진이는 이참에 2계급 신 내지 신으로서 알아 두면 좋은 자료를 추천해 주겠다며 같이 왔다.
자료실에서는 안 되지만, 개인 열람실에는 간식이나 음식의 소지 및 섭취가 허용된다. 피곤을 빨리 회복하고자 오늘은 다양하게 간식을 챙겨왔다.
소설 자료 및 아이디어 탐색을 변명으로 삼은 만큼 최근 전개에 필요할 법한 자료를 몇 개 찾았다. 슬쩍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다음엔 성진이를 따라 신들 전용이라 할 수 있는 자료실에 들어갔다.
성진이는 나를 데리고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추천해 주었다. 나는 많은 추천 자료 중 오늘 읽고 싶다 싶은 것을 하나둘 골랐다.
자료를 고르는 데 집중하다가도 나는 문득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괜히 집중력이 끊기는 일이 잦았다. 이번에는 기척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가끔 만나던 갈색 머리카락의 여신과 눈이 마주쳐 무심코 고개를 숙여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는 사이야?”
“그건 아니고, 아니, 가끔 마주치기는 했는데. 그보다는 그냥……막 신이 되다 보니 신력이 좀 신경 쓰이더라고.”
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스스로 말했음에도 굉장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내 내심을 모르는 성진이는 납득했다.
“하긴. 넌 민감하니까.”
그래, 신력이 신경 쓰이는 것도 없지는 않다. 신력은 자연의 힘과는 달리 마력처럼 선명하고 생생하고 다양해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