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90
첫 번째 세계의 새로운 신이 각성하고 칭호를 깨우치면, 그 칭호와 문장과 힘이 담긴 탄생석이 신계에서 ‘성지’라고 불리는 드넓고 광활한 장소에 세워진다. 탄생석의 크기는 신의 성질에 따라 다르나 평균적으로 높이가 2m를 넘는다고 들었다.
[당신이라면 신으로 각성할 줄 알았어요. 아무렴, 다른 신분들께 뒤지지 않는 빛을 간직하고 계신걸요. 그런데 이거 제자한테 알려 줘도 되나요?] [제자가 첫 번째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러세요.]“감사합니다.”
이번엔 육성으로 말한 멜리크가 송지나에게 나의 각성 사실을 알렸다. 또 한 번 축하 인사를 받고,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 인간일 때와 칭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만든 진화석 중 개인적으로 멜리크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을 하나 꺼냈다. 우주의 별빛이 담긴 진화석이었다.
“이게 당신이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판단한 진화석인가요?”
“네. 어떤가요?”
칭호를 얻은 내 기술이 향상되는 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멜리크는 전과 성능이 별로 달라지지 않은 진화석을 한 번 살펴보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척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걸로 어떤 걸 만들지 상상만 해도 즐거워요.”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는 경계 도시 기준으로 1000억을 얻었다. 앞으로 경계의 도시에 올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건만. 이렇게 된 이상 견문을 넓힐 겸 정기적으로 여기에서 쇼핑을 해야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새벽의 신인 당신이 만든 진화석도 의뢰하고 싶어요. 당장 거래할 만한 대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아쉬워요.”
“기회가 되면요.”
“네! 그리고 기회가 되면 합작도…….”
“가까이 붙지 마.”
흥분해서 내 손을 잡으려 한 멜리크를 성진이가 쑥 밀어냈다. 멜리크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참, 질투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내가 이러는 이유가 그것뿐일 것 같아?”
“너무하시네~.”
멜리크는 수정 클러스터 형상의 진화석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인사를 나누고 우리가 돌아갈 때까지 줄곧 진화석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조만간 한번 두 분의 가게를 찾아갈게요!”
“오지 마.”
가게를 나가기 직전 멜리크가 그런 말을 하여 성진이가 또 한 번 인상을 썼다.
주기적으로 차원 도서관에 향했다. 자료를 읽으며 신의 역할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도서관의 인물을 관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망설이긴 했지만, 어떻게 다시금 에피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내심 놀랐다. 전과 달리 나는 에피스의 시작점에 내 상상력이 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의 칭호를 짊어지면서 시작의 법칙을 다룰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 상상에서 비롯된 사람만 구분할 수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눠야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작의 감지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내 시작과 조금이라도 연결점이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라면 자연스럽게 구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한소진, 테일러 외에도 내가 만든 시작점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런 이들이 반드시 내 작품의 이름 있는 등장인물이진 않았다. 내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생겨난 세계에서 성장했거나, 그 등장인물들의 자손이거나, 아주 다양했다.
다만 나와의 연관성이 가장 강한 건 사람이 아니라 이 도서관이었다.
묶음 세계라는 명칭과 그 묶음 세계의 정보가 집합된 도서관. 차원 도서관의 설정도 내 글에서 비롯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따왔으며, 설정을 만들고는 마음에 들어 여러 작품에서 소재로 사용했다.
나는 이내 시작의 흔적이 느껴지는 모든 것의 배경을 확인하기 위해 더욱 자주 도서관에 들렀다. 이 도서관의 역사를 확인하고, 요정들에 대해서 확인하고, 많은 세계의 역사를 확인하고, 그 세계가 내가 쓴 글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았다.
아멜과 다른 신들이 말한 대로였다. 물론 내 작품을 양분으로 삼은 세계의 일부 역사는 내가 쓴 글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보였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른 점도 많이 보였다. 등장인물에 의해, 등장인물이 아니나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자에 의해, 신에 의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와 연관이 있는 많은 세계들은 나의 상상력을 태어나게 하기 위한 재료로 삼았을 뿐 내가 만들고 내가 상상한 나의 소설이 아니었다.
그걸 조금씩 느꼈다.
도서관의 인물들은, 특히 신들은 세계가 넓어지는 법칙을 모르는 경우는 있어도 작품을 바탕으로 탄생한 세계가 많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세계들이 반드시 작품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혹은 자신이 작품 속 등장인물임을 자각하는 인물도 있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내 작품에 나온 조연의 설정을 삼킨 드래곤 테일러였다. 한때 지식을 탐하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고를 치며 활기차게 돌아다니던 젊은이는 이제 없었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으나, 예전과 달리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를 몸에 익혔다.
테일러가 탄생한 세계의 주신은 자신의 세계가 어떤 작품을 양분으로 삼았음을 알았고, 그 내용도 완벽히는 아니지만 얼추 알았다. 그리고 테일러도 주신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에 대한 화제를 먼저 꺼낸 것은 테일러였고, 나는 조심조심 자신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처음엔 놀랐지. 하지만 이내 그보다는 흥미가 더 커졌다. 안타깝게도 원작인 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주신님을 통해 원작의 내용을 전해 듣고서 원작과 우리 세계의 차이점을 탐구했다. 그 후에는 작품과 그에서 비롯된 세계가 어떤 원리와 법칙을 지니고 있는지 조사했다.”
테일러다운 행동이었다.
내가 쓴 작품 속의 테일러다웠으며, 도서관에서 만난 알게 된 고룡 테일러다웠다.
“안타깝게도 나는 초월자이지 신이 아니라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 그것 외에도 신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가 많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로 나는 신이 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슬프게도 2000년간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테일러가 냉큼 나에게 대화를 청한 것은 알고 보니 내가 신이 된 과정과 그 감상을 전해 듣고 싶어서였다. 이것 역시 테일러다웠다.
나는 애틋한 마음을 감추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잇는 테일러를 응시했다. 등장인물과 실재하는 인물이 비슷할 뿐 엄연히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나와 시작이 닿아있는 상대를 이전과 같은 감정으로 대하는 건 어려웠다.
테일러는 내가 자신의 지식에 흥미를 가지는 게 기뻤는지 한동안 즐거운 미소와 함께 자신이 원작의 영향을 받은 인물인 것을 알고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물며 주신님마저 내가 작품 속의 등장인물로 태어났다는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지 모른다고 신경 썼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주신님이 그걸 신경 쓰는 분이라 원작과 다른 요소를 많이 만들었다. 거기다 공부하다 보니 신이나 세계가 필요에 의해 강제하지 않는 한, 바탕이 된 작품은 단순히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군요.”
“주신님께 원작의 내용을 들을 때도, 그 이야기에서 내 이름이 나왔을 때도, 나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의 내 성격을 잘 살렸군, 그런 감상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테일러 씨의 세계는 원작과는 다른 흐름을 거쳤나 보네요.”
“말했다시피 주신님이 그걸 신경 쓰시는 분이라서 말이다. 아주 많이 달라졌다.”
“원작의 흐름을 따르는 것과 달라지는 것, 당신은 어느 쪽이 좋았나요?”
테일러가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원작대로 가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재미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거친 나의 세계와 지금의 내가 좋다.”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사람다운 말이 무척 기쁘게 와닿았다.
테일러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나와 시작점이 닿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적은 사교성을 잔뜩 쥐어 짜냈으며, 그 외의 인물과도 연이 닿으면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려 애썼다.
심해의 신 에피스와는 테일러처럼 곧잘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친근한 성격 덕분에 말을 거는 게 쉬웠다.
“제가 요즘 환생이 얼마 안 남은지라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서 많은 분들께 견문을 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질문인데, 에피스 님의 세계는 어떤 분위기인가요?”
“그렇군요. 그러실 만하죠. 그런데 저희 세계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에피스가 인어로 살아 있던 시대는 중세 판타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천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우주의 크기와 배치가 바뀌었고, 행성의 모습이 바뀌었다. 대륙이나 바다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섬이 생겨나기도 했으며, 기온이나 날씨 등 대륙의 환경이 바뀌기도 했다.
다양한 도구가 발명되었고 옷의 유행이 바뀌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무기라는 모양이다. 무술이든 정령술이든 마법이든, 예전에는 희귀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최고의 재료를 잘 조합하는 걸 중요시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계공학과 결합되어, 사용자에게 맞춘 세밀한 커스텀이 중시된다고 한다.
재료 또한 무조건 좋은 걸 쓴다고 능사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좋은 재료는 그 값을 하지만, 주인과 상성이 맞지 않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다방면에서 전문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마물의 힘이 강해져서 무기가 더 발달한 감이 있어요.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끌어올리기보다 약한 사람도 싸울 수 있게 하자는 취지랄까요.”
에피스네 세계는 인근 세계와 교류가 활발하다.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여러 번 세계 안의 사람이 인근 세계를 오가며 세계 간의 연결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묶음 세계 안이라도 그런 식으로 교류가 쉬운 세계가 있고, 고위 신조차도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성이 안 맞고 먼 세계가 있다.
그래도 우리 묶음 세계는 경계의 도시가 있을 정도로는 세계 간의 길이 튼튼히 연결되어 있으며,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모든 세계와 종족 간의 사이가 좋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만은 없다. 우리 세계는 폐쇄적인 성향이었던 데다, 다른 세계나 신들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홀로 떨어져 있어 그럴 일이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루키아, 하르펜, 나지스 등 압도적으로 강한 신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에피스네 세계는 그렇지 못했다.
그쪽 세계의 창조신은 태생부터 신이었고, 고심 끝에 자신의 공간을 갈라 여러 세계를 만들었다. 정령계, 천계, 마계, 신계, 다양한 종족이 어울리는 여러 개의 세계.
이런 식으로 한 명의 신이 여러 세계를 만드는 일은 흔하다. 이 세계들은 모두 길이 견고히 연결되어 있고, 한 명의 신이 자신의 구역을 갈라 다른 세계로 만든 만큼 하나의 세계로 구분된다.
이런 세계를 어떤 신(이름 혹은 칭호)의 구역, 혹은 작은 묶음 세계라 부른다.
에피스네 세계는 여러 일이 있어 마신 측과 창조신 측으로 나뉘어 오랜 시간 동안 전쟁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위 종족들끼리 직접 부딪치기엔 세계가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하물며 정령계, 천계, 마계, 신계 등은 종족 간의 성질이 뚜렷해 영역을 차지한다고 해도 긴 시간 길들이지 않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지키고 빼앗으려 한 것은 고위 종족이 아닌 다양한 종족들끼리 살아가는 중간계(에피스네 세계의 명칭)였다.
내가 쓴 이야기에서는 마계와 마족을 변질시켰던 마신이 죽고 마계와 중간계의 길이 단절되면서 끝났다. 그러나 내 작품과 달리 에피스의 세계에서는 그 사건이 그리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다.
마신이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힘에 의해 세계의 어떤 중요한 시스템이 완전히 변질되었고, 이후로 에피스네 세계에는 어둠과 혼돈을 모태로 마물이라는 생물이 계속 솟아나게 되었다.
그것은 마신이 지배하던 마계와 그가 침공하던 인간계에 특히 자주 나타나며, 세계가 불안정할수록 힘이 강해진다.
이미 세계의 법칙으로 자리 잡아 바꾸고자 하면 인명, 세계의 균열 등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때문에 마물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 않도록 제한하는 정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에피스네 세계의 역사서는 내가 쓴 스토리와 에피스와 관계된 것만 보는 것에 그쳤다. 그래서 에피스의 입에서 듣는 이야기는 무척 새롭고 감회 깊었다.
에피스는 내가 장인이라는 것을 듣고는 자기 세계의 무기를 몇 개 보여주었다. 우리 세계에서 무기는 선택이지만, 에피스네 세계에서는 무기가 필수다.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렇다.
오러, 마나, 스피릿, 디바인 등 그쪽 세계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힘을 정제한 보석. 그 보석과 사람의 힘을 담아 증폭시키는 그릇. 주인의 기술을 보조하는 다양한 시스템.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저번에 저와는 다르지만 환생자 친구가 있다고 하셨죠?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좋은 인간이었어요.”
역시 에피스가 한 번 언급했던 환생자 친구, 내 작품 속에선 주인공이었던 자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개인사에 가까웠기에 조심조심 물어보았는데, 에피스는 이번에도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다만 에피스의 대답은 주인공의 친구 에피스 에스쿨라의 대답은 아니었다. 심해의 신인 에피스 라니움의 대답이었다.
그래도 친구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인어 시절의 감상이 섞이기도 했다. 좋은 인간. 정의로운 인간. 착하고 다정하면서 귀차니즘이 있었던 내 친구. 그런 주제에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온갖 무리를 했던 가련하고 약하면서 강한 친구.
개인적인 감상은 짧았다. 나를 생각하여 에피스는 그가 보인 환생자의 특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주인공은 소설 속 세계에 환생했다는 설정이었는데, 에피스와 주인공은 내 작품에서보다 훨씬 친했다. 그래서 에피스는 그가 환생자라는 것도,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 자신의 이야기가 같은 구역의 다른 세계, 주인공이 전생에 살았던 세계에 소설로 쓰였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소설 속에 나온 ‘원작’은 창조신과 함께 하는 다른 신이 마신과의 싸움을 위해 준비해 둔 안배였다. 에피스는 신이 되면서 그것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 에피스는 결국엔 자신의 존재가 작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인지했었고, 그에 대한 에피스의 감상은 심플하게 ‘그래서?’였다.
망설이며 원작에 대해 털어놓았던 주인공에게 전한 대답도 똑같았다.
자신이 소설에 등장했든 어쨌든, 종이 속 활자와 실체를 지닌 사람은 다르다. 그녀는 그녀답게 현실을 헤쳐 왔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라고 믿었다. 하물며 주인공이 말한 원작과 당시 에피스를 둘러싼 환경은 많이 달랐다.
인어일 때도, 신이 되어서도 그에 대한 에피스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내 작품 속의 에피스와 과거의 에피스, 눈앞의 에피스도 다르다. 주인공이 에피스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그것을 털어놓은 건 마신과의 싸움 전이었고, 나는 그런 장면을 작품에 쓴 적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하다 보니 환생과는 상관없는 것까지 이야기해버렸네요. 은하 님이 너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들어주시기에 조금 흥분했어요.”
“아니에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에피스는 기쁜 얼굴로 활짝 웃으며, 그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내 어떤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여신 한소진과도 짧긴 하지만 몇 번 대화를 나눴다.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 성격인지라 깊게 의견을 나누진 못했지만, 짧은 문답을 몇 번 나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세계의 환경과 능력을 조사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구실로 삼았던 환생을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했다.
역시 나는 차원 도서관이 마음에 들었다. 알고 싶은 무수히 많은 정보가 잔뜩 모여 있는 장소. 이 가능성만은 만들기를 정말 잘했다.
병이 깊어지면서 몸 상태가 오락가락했다.
어느 날은 몸에 힘이 없다가, 눈이 침침하다가, 기분이 심하게 안 좋았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괜찮아졌다. 그래도 서서히, 조금씩, 끊임없이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통각과 촉각이 많이 약해졌다. 촉각과 관련된 감각은 이제 살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력을 쓰지 않을 땐 육체를 보조해 주는 기구가 꼭 필요했고, 통각이 없어지다시피 해 피를 토해도 이젠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하르펜과 협력해 몸을 주기적으로 손보고 있기 때문인지 죽기 직전에 모든 감각이 없어진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주위는 조금씩 변화했다.
변화를 지켜보며 나는 나만의 일상을 이어갔다.
라라는 예전보다 잠을 자는 일이 많아졌고, 예전보다 체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지만, 그래도 큰 병을 앓는 일 없이 건강했다. 언제나처럼 때때로 폴짝 우리의 무릎에 뛰어올라 쓰다듬을 받으면서 고롱 고로롱 목을 울렸다.
가게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열었다. 전과 다름없이 생활이나 호신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팔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떻게 원고를 완결까지 썼다.
정말 무수히 많은 수정을 거듭했다. 그러고도 그 작품의 연재를 시작하기까지 또다시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다.
모든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의 탄생에 영향을 준다.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되더라도 세계는 처음 탄생할 때 여러 세계에서 떨어진 상상력의 파편을 받아먹어 양분으로 삼는다.
마치 소설의 클리셰를 따라 한 것처럼 비슷비슷한 세계관의 세계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새벽의 신인 내가 쓴 작품이 다른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나의 바람에 달려 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세계가 어딘가에 있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없기를 바란다면 이 작품에 담긴 상상력은 어떤 세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중간을 택했다. 탄생할 세계가 이 작품에 담긴 상상력과 세계관을 양분으로 삼는 것은 좋다. 그러나 온전히 이 작품만을 바탕으로 한 세계가 탄생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아주 많은 재료 속에 한두 스푼 정도 상상력이 섞이길 원했다.
많은 것의 시작점을 만든 첫 번째 세계의 인 동시에 많은 작품을 쓴 작가로서 그게 지금의 내 최선이었다.
여전히 운영 중이며 한국에서는 최대 장르 소설 연재 사이트인 블루버드에 예전과는 다른 아이디, 닉네임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처음엔 10편 정도를 연속으로 올렸고, 지인들에게만 비밀리에 연재 시작 소식을 전했다.
내가 아픈 것을 모른 채 소설을 연재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로카는 온갖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다. 동시에 ‘초아’의 팬인 만큼 내가 다른 필명을 사용해 비공식(?)적으로 연재하는 걸 아쉬워했다.
성진이는 내 고민을 알고 있는 만큼 내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걸 뿌듯하게 여기며 다행스러워했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다시 전쟁 이전의 열정을 되찾았다는 것에서 기뻐했다.
하루에 1~3편씩 올렸으며, 코멘트를 읽으며 연재 속도를 조절했다. 연재 편수가 30편을 넘겼을 때부터 여러 곳에서 출판 제의가 왔다.
연재를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꽤 긴 시간 고민했으나, 이내 가장 조건이 좋은 곳과 계약했다.
역시 작품을 쓰는 것은 즐겁다.
그걸 읽고 재미있어 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기뻤다.
기억하는 대부분의 삶을 글과 함께했다. 설령 작품을 쓰지 않는다고 한들 칭호와 힘 모두 글과 연관 깊다. 신이 되더라도 글로 세계를 관리하게 되겠지.
나는 분명 앞으로 평생 작가의 명함을 버릴 수 없고, 글 없이는 나도, 내 마법도 없다.
전생에 한 번 느꼈던 것을 다시 한번 명확히 느꼈다.
예전과는 다른 필명으로 계약을 했지만, 계약을 위해 출판사의 사람과 만나고 신원을 알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체가 들켰다.
출판사 측은 내가 이대로 정체를 숨긴 채 연재하는 걸 손해라 생각하고 나를 여러 번 설득했지만, 내 의견은 바뀌지 않았다. 예전 필명 그대로, 유은하의 명성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계약이 진행되었다.
유료 연재가 시작되었다. 꼼꼼히 다시 한번 작품을 퇴고하며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냈다.
케르베로스 형제가 우리 집에 빈번히 드나들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때쯤엔 우리와 키메라들의 사이는 전보다 훨씬 친밀해졌다. 특히 면죄자와 죄인의 중간입장이었던 앨리스와 노체가 본격적으로 사회 활동을 눈에 두면서 교류가 좀 더 많아졌다.
키메라들의 숫자는 많고,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한들 의식주 없이는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주의 대부분을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다.
전쟁 때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키메라 일행은 우리에게 은혜와 함께 부채감을 느꼈고, 은성단의 키메라들을 직접 보살필 첸과 쟈넷 정도를 제외하고는 빠르게 일을 시작했다.
라스와 하미아는 막 주어진 일이 끝난 데다 인성이와 함께 전 우주를 연결하는 통신 마법진을 설치하며 상당한 돈을 벌었으니 제법 여유가 있다. 하지만 노체와 앨리스는 바깥에서 일하는 키메라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일을 하기 위해 직업을 조사하고 공부하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후견인인 우리를 자주 찾게 되었다. 앨리스는 하고 싶은 일을 금방 찾았지만, 노체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이것저것 조사해 보며, 이따금 대현이나 우리가 소개해 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은 내가 불치병에 걸리며 다급해졌다. 소비토는 좀 애매하긴 하지만, 케르베로스 일행을 포함하여 다른 키메라들은 내게 상당히 정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죽기 전 내 가장 큰 고민거리가 그들을 향한 책임감임을 알고 있고, 그에 관해서 만큼이라도 안심시켜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앨리스가 드디어 장인으로 정식 등록을 하고 물건의 판매를 시작했다.
앨리스는 고민했으나 본명을 걸고 일을 시작했다.
“저 말고도 많은 동족들이 일을 찾아야 하잖아요. 동족들이 사회에 자리 잡는 걸 사람들이 보다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키메라라는 걸 숨기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게 그녀가 본명을 건 이유였다. 키메라들 모두 앨리스를 걱정하는 한편으로 기뻐했고 대견해했다.
판매하는 시계는 주로 회중시계와 손목시계. 전부 앨리스가 디자인했으며, 커스텀 의뢰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장인 조합 캐티아를 통해 물건을 팔며 의뢰를 받고 있다.
앨리스가 만드는 시계의 기능은 시간마법 계열이 많다.
어디에서든 지정한 장소의 시간을 알 수 있다. 시계에 원하는 풍경을 사진처럼 저장하여 언제든지 주위에 환상으로 비춰볼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일단 웬만한 시계의 공통 기능이다.
그 외에 아이템의 종류를 나누는 특수한 기능에는……
시계 일정 반경의 시간을 늦추거나 빠르게 만든다.
개인 의뢰에 한해 특정 장소를 시계에 연결해 준다. 그럼 사용자는 1시간에 1번, 30초 동안 그 장소 그 시간의 실제 풍경을 비춰볼 수 있다. 단 범죄에 쓰일 염려가 있으므로 앨리스가 의뢰인이 제시한 좌표가 어떤 장소인지 직접 확인하며, 거주지를 시계에 기록할 경우엔 도덕적인 이유와 증거 자료를 요구한다.
유명한 관광지의 시공간을 비춰볼 수 있는 시계는 의뢰와는 상관없이 주기적으로 하나씩 낼 예정이란다.
공간 이동, 방어마법 등 유용한 기능이 들어간 호신용 시계도 판매 중이다.
편의상 앨리스가 생각한 특수한 기능은 보통 한 시계당 한두 개씩 들어가 있다. 하지만 개인 의뢰에 추가금을 낸다면 원하는 기능을 다 맞출 수도 있다.
앨리스는 나, 성진이, 소영이, 인성이, 인하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모든 기능을 넣은 회중시계를 하나씩 선물해 왔다.
색깔부터 모양까지 우리의 분위기에 맞췄다. 그래서 내 시계는 청금석에 은을 사용했고, 성진이의 시계는 로즈골드와 주황색 보석을 사용했다.
듣기로 앨리스는 동족들에게도 하나씩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 힘들 것 같다며 동족들이 말려서 은성단에 커다란 괘종시계를 하나 세우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시계가 하나둘 팔리기 시작하면서 앨리스는 우리와 캐티아의 권유로 캐티아가 관리하는 섬에 공방을 마련했다. 그녀는 하루 중 10시간 이상을 공방에 있고, 며칠 동안 본가인 은성단에 돌아오지 않는 일도 곧잘 있다.
케르베로스 셋째, 베이는 형제들 다음으로 앨리스와 친했다. 앨리스가 자리를 비우면서부터 허전하고 외로운지 그나마 찾아오기 쉬운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직업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질문 및 상담을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처음엔 거의 베이만 찾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둘째 루이도 베이와 함께 곧잘 우리 집에 찾아왔다.
무기력증이 심했던 루이는 최근 그 상태에서 제법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그 이유가 내가 불치병에 걸리면서 생긴 불안감 때문이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루이는 무기력증 완화를 위해서 예전부터 주기적으로 나나 인하네 집에 들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동생과 함께 나를 찾아오면서 그 횟수가 좀 더 많아졌다.
그런 형제들을 따라 덩달아 첫째 케이도 우리 집을 자주 찾게 되었다.
사실 케르베로스 형제 중에서는 케이와 제일 사이가 소원하다. 베이는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루이는 무기력증을 완화시키고자 자주 부딪치고 자주 대화를 나눴다. 반면 첫째는 두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책임감에 의해 얌전히 지금의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기에 비교적 신경이 덜 갔다.
오늘도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성진이가 내온 차를 마셨다. 처음엔 나와 성진이를 무서워하더니 요즘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루이는 나른하게 몸을 핀 채 잠든 라라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최근 경찰에 봉사활동 하러 가서 겪은 일을 이야기 하던 베이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참 대단해. 금방 하고 싶은 일을 찾잖아. 아무 일이나 하라고 한다면 그야 할 수는 있지만……. 앨리스도 그렇고, 다른 애들을 보다 보면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
베이의 형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들과 비슷한 기분으로 웃었다. 나를 비롯해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길 가장 극렬히 거부했던 아이가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인간도 웬만해선 중학생은 되어서야 진심으로 진로를 고민하고 준비해. 사회에 어울린 연수로만 따지면 너흰 아직 초등학생이야.”
“하지만…….”
성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흘끔 나를 본 베이가 울컥한 감정을 꾹 눌러 삼켰다.
“앨리스는 벌써 일하기 시작했는걸…….”
그들에게 내가 생각보다 큰 존재가 된 듯싶어 기쁘면서도 안타까웠다. 책임지기로 했으면서 금방 두고 가는 것이 미안했다. 기왕이면 그들이 좀 더 자신을 위해서 일을 찾았으면 했는데.
베이가 조금 풀죽은 얼굴을 책상에 묻은 채 가까이에 있던 과자에 손을 가져갔다.
“걔가 없으니까 좀 외롭기도 하고…….”
“하긴, 두 분은 많이 친하니까요.”
“맞아. 절친이야.”
내 말이 기뻤는지 베이가 수줍게 웃었다.
과자를 쏙 입에 넣고 씹던 베이가 또 한 번, 이번엔 환하게 웃었다.
“성진 님이 만든 건 진짜 전부 맛있어!”
“그래, 고맙다.”
“어? 내가 더 고맙지?”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베이는 순순하고 순진해졌다. 예전에는 까칠한 사춘기 소년처럼 쉽게 사과하지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도 못했는데. 요즘 형들이 베이가 너무 순진해졌다며 걱정과 함께 나에게 상담해 올 정도였다.
한동안 베이는 말없이 과자만 먹었다. 그러다가 성진이가 새로 차를 타오겠다 하자 차를 타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다며 성진이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내려와 내 무릎 옆에 드러눕는 라라를 따라 루이가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제법 갑작스러운 화제를 꺼냈다.
“나 프로그래밍 공부하려고. 게임을 하다 보니까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
갑작스러워서 조금 놀랐지만 이내 기쁨이 더 커졌다.
“그래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이미 공부는 하고 있어. 그래서 쟤가 더 초조해하는 것 같아.”
“저도 최근 경찰이 되어 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어진 케이의 말에는 너무 의외라 당황했다.
“경찰이요?”
“네.”
무엇보다 걱정이 컸다. 경찰 대원들은 키메라에……는 아니어도 케르베로스 형제에게 특히 적대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전쟁을 거쳤다.
“경찰 일에 몇 번 참가해 경험해 보니 제 능력이 집행부에 잘 맞더군요.”
“그야 그렇겠지만…….”
키메라들은 무기로서 탄생했고 살았었다. 경찰의 집행부는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하는 역할이다. 전투 실력이 탁월한 케이가 그런 일에 적성이 맞는 건 당연하다.
“싸우는 건 변함없지만 전과 달리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면 좀……기분이 좋더군요. 거기다 저희는 사실 중범죄자입니다. 그런 이들은 노동력으로 죄를 대신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커요.”
“그렇게 말해주시고 대해주셔서 항상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케이가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들 이제 인사도 한국식으로 한다.
“하지만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별무리 여러분들께만 기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갚고 싶습니다. 제가 경찰에 들어가 앞에 나선다면 동족들의 이미지가 좀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윌리엄이나 캐시는 분명 케이의 입대를 환영할 것이다. 케이가 지금처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면 더더욱. 케이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트라베리아에, 에리카에게, 에리카의 측근이었던 케르베로스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경찰의 생존자들은 결코 케이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을 거다. 그걸 견디며 일을 하는 건 아주 힘든 일임이 틀림없다.
“동생들과는 이미 상담했습니다. 다른 동족들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당신께 미리 전해 두고 싶었습니다.”
그건 여러 번 경찰의 일에 참여하러 갔던 케이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책임지고 싶다는 케이의 결심은 무척 고무적이다. 하지만…….
나는 튀어나오려는 반론을 꾹 억눌렀다. 내가 이들의 곁에 함께해 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았다. 거기다 이들이 스스로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정한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군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데 케이가 문득 웃었다.
“저마저 하고 싶은 일을 정해서 막내가 더 저렇게 심통이 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 아이와 이렇게 자주 대화를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참견이거든?”
성진이와 함께 차를 가지고 주방에서 나온 베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자꾸 놀리지 좀 마! 난 심통이 난 게 아니라 그냥 좀……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