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91
쟁반을 놓고 자리에 앉으며 베이가 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흥분했는지 머리에 본래 모습인 마견(魔犬)의 검은 귀가 삐죽 솟았다. 케이와 루이가 귀엽다는 마냥 웃으며 베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세 사람은 여느 때처럼 대화를 즐기거나 우리에게서 조언을 얻고 돌아갔다. 세 사람을 배웅하고 소파에 앉았을 때 성진이가 넌지시 알려줬다.
“베이가 베이킹을 배우고 싶대. 나한테 몰래 부탁하더라.”
“그래? 요리에 관심을 가진 건가?”
“흥미가 있어서 일단 해보고 싶대. 형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더라.”
“그렇구나…….”
나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기뻤다, 기대되었다.
키메라들이 생각하는 대로다. 죽기 전에 키메라들을 자립시켜 주고 싶다. 그들이 나를 안심시키고 싶어 불안해하는 만큼 나도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어?”
“알겠다고 했지. 좋은 선생 구하기는 까다롭고, 웬만한 전문가보다 내 요리가 더 나으니까. 그 녀석의 형들이 걱정이 많아서 비밀이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다. 거기다 베이는 숨기는 걸 잘 못 한다.
“성진아, 잘 부탁해.”
“성심성의껏 가르칠 테니까 걱정 마.”
성진이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관해 성진이는 무척 믿을 만했다. 그래서 나는 깊은 안도감과 함께 성진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누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인성이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최근 인성이는 하미아, 라스와 곧잘 대화를 나눴는데, 그래서인지 두 키메라들은 인성이와 함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성이가 우릴 불러 모은 자리는 캘리번 함선이었다. 인성이는 두 사람 말고도 소영이, 에이온과 테온을 비롯한 캘리번의 선원들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은……리더님, 오랜만!”
다들 오랜만에 만난 나를 과할 정도로 반가워했다. 캘리번의 일원들은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처음 예상했던 여명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병이 고쳐지지 않은 채 내 몸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항상 나를 만나면 귀찮게 들러붙었던 한재일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 건 내가 불치병에 걸린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캘리번의 일행은 모두 우리 집에 자주 방문할 정도로 나와 격 없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끔 만나면 내 눈치를 보며 몰래몰래 조심조심 내 상태를 살폈다.
“네. 여러분 모두 오랜만이에요.”
인성이가 이번에 불러 모은 건 나, 성진이, 인하, 캘리번, 그리고 자아가 있으며 현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키메라들 전부였다. 참고로 아직 키메라들 모두가 지성과 자아를 가지지는 못했고, 끝내 자아가 싹트지 못할 것 같다고 판별된 키메라만 20명은 되었다.
짧은 인사 후 인성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 2년간 곰곰이 고민해 봤는데, 기업을 하려고 해.”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켜며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동요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표정을 조심했다. 인성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별의 도시 열쇠를 이용해 우주 전체에 길을 놓으려고 해. 고속도로를 생각하면 연상하기 쉬울 거야.”
내가 첫 작품에 적었던,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던 일 중 하나가 성큼 현실감을 가지고 다가왔다.
안타까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인성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떠올린 일일 테니까. 그래도 조금 착잡해졌다. 하지만 인성이가 새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건, 기뻤다. 나는 이내 인성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길?”
“그래.”
인성이는 모두에게 우주에 길을 놓으려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가 별의 도시 관리자일 때는 직접 우주 사이의 시간을 조정하고 길을 안내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자세히 관측할 수도, 우주 공간을 세밀하게 조정할 수도 없어.”
“그 탓에 고향에 돌아가진 않더라도 고향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보고 싶다고 하는 이들의 소원조차 들어주기 어려운 실정이다.”
캘리번을 비롯한 우주에서 활동하는 조직들이 요즘 우주를 비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었다. 확실히 별의 도시에서 관리자들이 우주 공간을 관리할 때와 지금이 같을 리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외계인들과도 계속 교류를 잇고 싶은데, 이대로 가면 그것도 막힐지 몰라. 거기다 우주에는 천연 소재가 잔뜩 있지. 그걸 연구하고 싶어 하는 학자들도, 그걸 이용해 물건을 만들고 싶어 하는 개발자도 넘치고.”
“그렇지. 언젠가 세계수를 우주에 옮겨야 할 수도 있고.”
세계수는 내 작품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인하는 이 세계의 자연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세계수를 탄생시켰고, 그 나무는 언젠가 지금보다 훨씬 커져 우주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움직이기 답답해서 이대로는 못 살겠어.”
조금은 장난스럽게 한탄하는 인성이를 보고 몇 사람이 작게 웃었다.
“길을 설계하고 우주의 흐름을 안정시키는 건 나랑 소영이가 할 거야. 예전만큼 별의 도시를 움직이진 못하지만, 나에게는 열쇠가 있어. 별의 도시를 이용해 우주에 새로운 길을 구축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
인성이의 손등에서 반짝이는 동그란 은색 빛이 바로 별의 도시의 열쇠였다.
“처음엔 우주가 험해진 것 때문에 인성이한테 상담했었는데, 상담을 거듭하는 동안 우주에 길을 놓는 걸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뀌었어. 나는 자연과 교감해서 우주의 흐름을 직접 살피고 우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갈 수 있어. 그러니 아마 길을 안정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인성이보다 내가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 거야.”
관리자가 없는 지금 우주와 자연의 흐름을 우주에 길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소영이 아니면 준영이 정도다. 즉 인성이와 소영이의 협력은 필연적이었다.
“만일에 대비해 우주의 정령인 알파한테도 협력을 구했어.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어쩌면 알파와 계약해야 할지도 몰라.”
소영이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싫으면 내가 계약하지 뭐.”
“아냐, 됐어. 자연과 교감하는 건 내가 맡는 게 효율적이야.”
이내 인성이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전했다. 길을 놓는 것에 관해 여러 조직에 사전에 이야기하고 허가와 협력을 구할 예정이다. 별의 도시를 통해 우주의 흐름을 측정할 생각이고, 길을 어떤 방식으로 설치하고 놓을 것이며, 길이 깔린 후에는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 것이냐 하면…….
“고속도로처럼 우리가 만든 길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회사에는 구간마다 통행료를 요구할 거야.”
길의 효율성과 안전성은 캘리번이 직접 함선으로 항해하며 확인할 것이다. 소영이와 상담하던 기간 동안 그들에겐 미리 협력을 요청했다.
중요한 것은 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마법석과 마력이 필요하단 점이다. 마법석이나 필요한 경비는 나, 성진이, 인하가 후원해도 된다. 혹은 협력을 구한 다른 조직들의 투자를 받아도 되겠지.
하지만 그런 외부의 후원만으로는 길을 튼튼하게 만드는 데는 부족하다. 마력이 풍부한 실력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키메라들을 직원으로 차출하고 싶어. 라스와 하미아한테는 열쇠의 유용성을 생각해서 미리 상담했고, 협력하겠다고 응해줬어. 아, 캐시는 경찰 일에 집중해야 해서 어렵다고 하더라. 어쨌거나 오늘 모두를 부른 건 그걸 위해서야. 특히 소비토랑, 케르베로스 형제 중에서도 꼭 한 명 와줬으면 좋겠어.”
“우리?”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는지 소비토와 케르베로스 형제가 놀란 눈으로 인성이를 바라보았다. 베이가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가리켰다.
“응. 너희 형제는 마력이 강한 건 물론이고 서로의 기술을 빌려 쓸 수 있잖아?”
“아, 마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거기다 마법석도 만들 수 있고.”
“그야 그렇지?”
자신들을 지목한 이유를 이해하고 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르베로스 형제는 커븐 로드 에리카 필링이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에 둔 측근이었다. 그건 즉 그들이 강하고 타인의 보조에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소비토는 마법이 이 일에 잘 맞아. 별의 도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 봐줬으면 좋겠어.”
사실 소비토가 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가 인간 사회에 조금씩 감화되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속도가 무척 느렸다. 때문에 현재는 케르베로스 형제들보다 그가 더 중죄인이었다.
내가 없어진 이후에도 친구들과 성진이가 내 자리를 대신해 주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고 맡기기엔 마음이 편치 않다.
“…….”
소비토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미안이 손을 들었다.
“나는?”
……그렇구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나와 달리 다른 이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넌 이미 직장이 있잖아?”
“그렇긴 한데 그 일에 관심이 있다. 이직이 불가능한 처지인 것도 아니고.”
“음……그렇긴 하지.”
“대현에 취직한 건 친숙하고 그나마 자리 잡기 쉬운 곳이라 타협했던 것뿐이다. 친인들이 대현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그랬어?”
그런 대화를 들으면서 첫 번째 작품의 설정을 떠올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우주 전체를 편리하게 오갈 수 있는 길. 그 시스템의 창립자는 소영이와 인성이. 몇백 년 후의 관리자는 데미안.
그것까지 전부 맞아 들어갈지는 알 수 없었다. 먼 미래 주신이 되어 다시 이 세계에 돌아온다면 알 수 있겠지.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끌어안으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데미안의 말에 모두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직업이 있는 키메라들을 돌아보았다. 그에 관해서는 나도 걱정되었다. 혹시 데미안처럼 타협한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니야, 우리는 지금 일이 마음에 들어.”
“애들도 귀엽고.”
“저도요. 굳이 불만이랄까, 바라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사서보다는 물품 관리인 쪽으로 이전하고 싶다는 것 정도예요. 하지만 책도 좋아하기 때문에 역시 불만이라고 말할 정도의 일은 아니네요.”
슈카, 반, 라이라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차례로 이어진 대답에 모두, 특히 첸이 깊이 안심했다.
“나도 딱히 지금 일이 싫다는 건 아니다. 다만 최인성 네가 제안한 일이 더 하는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느낀 것뿐이다.”
“끄응……. 뭐, 좋아. 너만 한 능력자가 온다면 우리는 환영이야. 대현한텐 좀 미안하지만…….”
전력이 빠지는 건 아쉬울 수 있으나, 사실 데미안급의 실력자는 대현에는 과도한 전력이다. 슈카랑 반만 해도 전력이 이미 차고 넘친다.
반과 슈카 중 한 명만 남게 된다고 할지라도 대현에는 충분하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그들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다.
“당장 일을 시작하진 않을 거야. 우주에 길을 만드는 것에 관여되는 법적 문제를 확인하고, 다른 조직에 협력을 구하고, 우리가 생각한 길을 만들 방법이 얼마나 실현성이 있고 효율적인지 확인하는 등 아직 준비할 것들이 많아. 최소 반년 정도는 준비만 할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성진이의 반응에 인성이가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으로 동조했다.
“응. 우주 전체에 걸친 엄청난 대작업이다 보니 사전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 거기다 열쇠의 힘은 관리자 자리와 달리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가 낮아.”
인성이는 다시금 진지한 얼굴로 키메라들을 돌아보았다.
첸, 루니라, 반 일행 등 전쟁 도중부터 우리와 함께한 이들. 케르베로스 형제, 소비토 등 전쟁이 끝난 후부터 우리와 함께한 이들. 새로 자아가 싹튼 아직은 어린 키메라들.
“은성단에도 주기적으로 진척 상황을 보고할게. 그러니 함께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1년 안에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어.”
하나둘, 키메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자리를 고민하는 키메라들에게 이건 좋은 기회였다. 거기다 우주 전체의 길을 연결하는 것에 직접 협력할 수 있는 기회도, 그 책임을 함께할 수 있는 실력자도 그렇게 많지 않다.
큰 전쟁이 갑자기 터지지 않는 한 인구는 순조롭게 늘어날 테고, 우주의 길에 걸린 메리트도 점점 커지겠지. 거기에 협력하면 키메라들에 대한 인상도 분명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될 거야.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면 키메라는 드물더라도 불길한 상징은 아니게 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반드시 작품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달라지더라도 작품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하면 좋겠다.
키메라, 외계인 등 다른 종족과의 피가 섞인 자손이 흔한 시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런 시대는 분명 찾아올 것이다. 내가 없더라도 이곳의 모두가, 무엇보다 성진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다.
“첸, 은하야, 어쩌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성물을 빌려야 할 수도 있어. 대여비는 낼 테니 고려해 줘.”
“대여비는 됐어. 그냥 후원해 줄게.”
“고맙긴 하지만 그러면 너무 미안한데?”
“그냥 투자라고 생각해.”
다만…….
화제가 화제인지라 망설여졌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필요한 말이었다.
“그런데 귀걸이와 달리 왕관은 내가 죽으면 같이 사라질 거야.”
모두의 몸이나 표정이 한순간 동요로 떨렸다.
“『별의 왕관』이 아이템이기 이전에 내 마법이라서 그래. 귀걸이는 왕관이랑 연결은 되어 있어도 완전히 독립했으니까 그럴 일은 없어. 그러니 왕관보다는 귀걸이 위주로 사용하도록 해.”
“……그래, 그렇구나.”
인성이는 떨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인성이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도 많은 만큼 진지한 이야기 후에는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확인했다. 대화 중간중간 키메라들은 침묵하거나 동족들끼리 속닥이며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루니라 일행도 고민이 많이 보였다.
루니라와 동물 친구들은 여전히 디나와 함께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걸 자립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이 다시 여행을 시작한 건 그들이 동족보다는 디나를 더 친한 동료로 여기는 데다, 디나를 돕는 게 그나마 빨리 돈을 벌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두 명이 간호 보조 자격증을 땄고, 한 명은 열심히 공부해서 약학 자격증을 땄다. 그렇게 그들은 디나를 보조하거나 약초 및 소재를 채집하여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의료의 길을 정진하는 솔개 바인이나 약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약학 자격증을 딴 뫼비우스 루피를 제외하곤 다들 아직 진로를 헤매는 중이다.
키메라들이 걱정되지만, 모순적이게도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 친구들이 도와준다면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길을 찾을 이들이다.
불안과 행복과 기대와 상념 속에서 또 한 번 남은 수명을 속으로 꼽았다. 조금이라도 더 소중한 이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갈 수 있길 마음속 깊이 소망했다.
인성이의 개업 이야기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많은 키메라들이 그 일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다들 나를 통해 인성이에게 연락을 했기에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 참여하겠다고 손을 든 것은 의외로 케르베로스 둘째 루이였다. 그 뒤를 따르듯 베이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보람이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적성에는 맞을 것 같아서 한 번 해보려고. 지명도 받았고.”
“어떤 걸 하면 되는지 아직 감이 안 와서 불안하긴 하지만, 그것만 빼면 다 믿을 만하지. 적성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도전해 보고 생각할래.”
다만 케르베로스 첫째는 이전에 말했던 대로 경찰에 지원할 생각이란다.
그리고 디나의 일에 가장 많은 도움을 주던 뫼비우스 루피와 솔개 바인을 제외한 루니라와 동물 키메라들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사실 나는 직업으로 우주 탐험가나 소재 탐색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디나랑 함께 여행하면서 여행한다는 것이 즐거워졌거든.”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희귀한 소재를 모으려고 한 거야?”
“응. 근데 그러려면 우주를 오가면서 길을 찾을 필요가 있잖아. 나 혼자 힘으로 못 헤쳐 나가진 않겠지만, 너희가 만든 길을 지나는 것 이상으로 쉽게 멀리까지 오갈 순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혼자서 헤쳐 나가는 것도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편리한 길을 버리는 것도 웃기잖아. 거기다 길을 만드는 데 참여하면 이직하더라도 길을 이용할 때 쪼끔 할인해 달라는 교섭을 하기 쉽지 않겠어?”
“물론이지. 너희만 한 힘과 기술을 가진 직원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소재 탐색가라. 디나와 함께 온갖 곳을 여행 다닌 루니라에게 참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루니라가 인성이에게 가세하고 머지않아 데미안도 대현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필요는 없다니까? 아직은 준비 단계라고 했잖아.”
“준비 단계에도 참여하고 싶다.”
“으음, 생각보다 더 이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난 공간에 관해선 언제나 관심이 많다.”
“진짜 대현에게 미안한데…….”
하지만 인성이는 이내 기쁘게 데미안을 팀원으로 맞아들였다.
앨리스는 막 자리 잡은 자신의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지만, 새 출발을 하는 동족과 친구들을 돕고 싶어 했다. 얼마 후 인성이는 우주의 공간이나 시간을 고정할 도구 제작 관련으로 단체나 개인에게 협력을 구했고, 그 안에는 앨리스도 있었다. 앨리스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노체는 소영이와 인성이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다니며 아직 고민 중이다.
거기다 노체는 식물에 흥미가 많았고, 이 때문에 이전부터 곧잘 인하와 상담을 했었다. 정원이 넓어진 만큼 인하도 유펠르시아의 연구자 외에 정식 직원을 채용할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다. 노체가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키메라들 중 두 명은 한빛 정원에 취직하게 될 것 같다.
이어 전쟁이 끝난 이후로 따졌을 때 비교적 초기에 자아를 깨우고 안정된 키메라들 몇 명도 인성이의 일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소비토는……많은 망설임 끝에 이야기가 나오고 반년 후, 겨우 인성이에게 참석 의사를 밝혔다. 소비토도 다른 키메라들처럼 나에게 찾아와 인성이와의 연결을 부탁했다. 다른 동족들을 따랐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소비토도 조금은 직속 후견인인 나를 신뢰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키메라들에게 좋은 흐름이 찾아온 듯하여 기뻤다.
‘역시 키메라들은 어느 정도 시간과 환경이 갖춰진다면 얼마든지, 뭐든지 할 수 있는 이들이야. 분명 앞으로도 다들 잘 헤쳐 나가겠지.’
다만 첸은 키메라들을 대표하고 관리하고 양육하는 입장인 만큼 원하는 직업을 얻으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키메라들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문득 그들과 만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
키메라들이나 트라베리아의 사회적 위치는 아직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그들 개인의 생활은 상당히 안정되었다.
이제 키메라들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건……육체는 없고 핵만 있는 아이들이었다.
영혼이 깃든 핵들은 육체만 없다 뿐이지 생명을 품고 있다. 그 핵들은 언젠가 그들이 육체를 얻을 때를 대비하여 별의 귀걸이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많은 키메라가 여전히 번갈아 가며 별의 귀걸이를 끼고 다닌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자연과의 교감에 성공한 이들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귀걸이를 양보하며 이제는 끼지 않고 있다.
거기다 귀걸이의 힘은 어느새 상당히 진화하여, 이제는 귀걸이와 떨어져 있어도 일정 이상의 가호가 키메라들에게 계속 전달되었다.
그 무렵부터 별의 귀걸이는 은성단의 마련된 자리에 놓이는 일이 늘었다. 그때부터 키메라들은 그 옆에 영혼이 깃든 세 개의 핵을 두었다.
이제 핵들은 귀걸이의 가호에 듬뿍 물들었다. 나머지는 그들에게 어떻게 육체를 만들어 주느냐인데, 이건 여전히 연구 중인 과제다.
다만 슈카와 데미안은 자기들의 아이로 삼고자 결정한 인큐버스의 핵에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피와 마력을 주고 있다.
“이 아이는 이제 육체로 삼을 만한 유전자만 주어지면 금방 생물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오늘은 디나, 예리와 함께 오랜만에 귀걸이 및 자아가 정착하지 않은 키메라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은성단에 찾아왔다. 드물게도 슈카의 휴일과 맞아떨어져, 오늘은 첸, 쟈넷과 함께 슈카도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슈카와 데미안이 아이로 삼으려는 핵은 예전보다 힘과 생명력이 한층 충만해졌다.
디나와 예리의 말에 슈카는 기뻐하는 한편으로 기분이 복잡한 듯했다.
“그래? 다행이지만 좀 미안하네. 아직 품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거든.”
“아니에요.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맞아요.”
“아니, 그게 아냐. 육체를 주는 것에는 자신 있어. 피를 주면 줄수록 확신이 가. 이 아이는 품으면 금방 육체를 얻고 깨어나 줄 거야.”
디나를 향해 슈카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키메라들을 안정시키는 게 선결 과제라서 그래. 아직 신경 써야 하는 아이가 많은데 거기에서 애가 더 늘면 힘들 것 같아서.”
슈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 내 지위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어. 데미안도 막 새로운 직업을 구했고. 지금 애를 낳아 봐야 첸한테 맡기게 될걸? 안 그래도 지는 책임이 많은 첸한테 더 일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도 그걸 포함해서 말한 거였어요. 그걸 고려하는 건 보호자로서 당연한 거라고 봐요.”
“그럼요. 하물며 키메라 사이에선 처음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거잖아요.”
디나와 예리의 말은 옳았고 슈카 본인도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 같은데, 그녀는 여전히 감정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나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겠지.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핵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말이 맞아요. 아이를 키우는 건 큰일인걸요. 슈카 씨와 데미안 씨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니, 환경이 갖춰졌다 생각되었을 때 아이를 품으세요.”
“……네. 그렇죠.”
인큐버스라고 했지만, 기실 이 아이의 성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핵이 받아들이는 유전자 정보에 따라 여자도 될 수 있고, 남자도 될 수 있다.
다만 첫 번째 작품에서 데미안과 슈카의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외모는 슈카와 데미안을 반씩 닮았지만, 마법은 데미안의 마법을 더 많이 타고났다.
하지만 글과 현실은 다르다. 두 사람의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나는 내 상상이 여기 있는 핵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끔 조심하며 생명이 깃든 채 깨어나 움직일 날을 기다리고 있는 세 핵을 향해 축복을 속삭였다.
“언제 태어나든 이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네.”
슈카는 이번엔 조금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얼굴에 그려 보였다.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나도 안도와 함께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있는 미래가 머지않아 찾아올 거다.
한동안 깜깜무소식이던 나의 여신님은 어느 날 자신의 반려이자 두 번째 창조신인 셰히난과 함께 내 꿈에 찾아왔다. 적당히 짧은 은색 머리카락에는 검은빛이 돌았고, 눈동자는 쪽빛이었다.
새침한 인상의 셰히난은 오래전의 내가 설정한 단편적인 성격과는 달리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의 신 셰히난 크로무스입니다.”
하긴, 내가 쓴 설정 속 그는 항상 친한 이들과 함께 있었다. 셰히난은 친한 사람한텐 격 없이 틱틱 튕기다가도, 티 없이 맑게 웃어 보이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의 신 유은하입니다.”
셰히난은 묘한 감회에 젖은 눈으로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셰히난을 마주 보았다.
셰히난은 내가 두 번째로 만든 캐릭터였지만, 어디까지나 아멜의 반려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지라 세세히 설정을 만들지는 않았다. 머리 색, 눈 색, 칭호, 이름, 간략한 성격 정도만 설정했다.
성격을 제외하고는 한 번 만난 순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량이었다.
“…그렇군요. 정말 어머니가 있었네요.”
셰히난의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흠칫했지만 조금 붉어진 뺨을 보고 안도했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셰히난이 문득 아멜을 돌아보았다.
“잘됐네.”
“히힛, 응. 너도.”
“…응.”
두 사람이 나를 찾아온 건 딱히 대단한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셰히난은 단순히 내가 정말로 자신들의 어머니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아멜은 셰히난과 나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솔직히 죽기 전에 다시 아멜을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셰히난까지 만날 수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멜은 다망하고, 세계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각기 달랐다. 하물며 아래 계급 세계는 첫 번째 세계에 비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대화를 나눴다. 아멜은 부드러운 성격인데다 몇 번 만났기에 대화를 잇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셰히난은 아니었다. 셰히난 역시 처음 만난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최근의 일상, 취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마치 자기소개 시트를 쓰는 듯한 기분으로 서로에게 질문하거나 대답했다. 아멜은 그런 우리를 즐거운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어찌할 줄 몰랐을 뿐 셰히난과 만난 것 자체는 기뻤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물론 기뻤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잠시 끊겼다. 다음 화제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이내 아멜을 다시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무엇인가요?”
“알고 있는 것이라면 대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