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700
그 후에도 천천히, 혹은 빠르게 시간이 지났고, 비로소 나와 성진이의 결혼식 날이 찾아왔다.
신들의 결혼식은 사랑에서 비롯된 계약이며 의식이었다. 그리고 의식은 당사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성진이도 전문가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을지언정 꾸미는 것 대부분을 직접 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결혼식 의복에서 중시할 점은 문양과 색상이다. 의복에는 결혼식에 필요한 의식용 무늬가 수놓아지고, 색깔은 결혼 당사자들의 영혼 색에 어느 정도 맞추는 게 좋다.
옷으로 쓰기에는 내 영혼 색이 더 보기 좋았기에 나와 성진이의 의복은 남색과 은색을 기초로 맞췄다. 그러면서 일부 장식은 성진이의 보라색과 주황색을 포인트로 사용했다.
남색 천에 겹겹의 자수 레이스가 돋보이는 종아리까지 오는 드레스. 손목까지만 감싸는 긴 팔 장갑. 옷 곳곳의 리본과 사이사이의 보라색, 주황색, 은색, 푸른색 보석들. 은색 금속이 기본으로 섞인 다양한 액세서리. 보라색이 섞인 자청색 구두.
손톱까지 비슷한 색으로 네일 아트를 해서 꾸몄다. 이렇게 많은 부분을 신경 쓰며 꾸미는 건 오랜만이라 힘들면서도 조금 재미있었다.
나는 목에 맨 레이스 리본을 매만지며 성진이와 나란히 앉아 의식의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내 드레스와 같은 남색인 성진이의 겉 옷단을 매만졌다.
성진이의 겉옷은 기장이 길어 무릎 아래 까지 왔다. 셔츠는 회색이고, 목에 맨 긴 리본 넥타이는 보라색에, 넥타이핀은 은, 가넷, 자수정을 썼다. 반지를 끼워야 하기에 성진이도 손을 감싸는 장갑은 끼우지 않았다. 대신 보라색 위주로 네일 아트를 했다.
옷에 수놓아진 수실의 감촉이 좋았다. 긴장된 마음을 완화시키기에 딱 좋았다.
“긴장 된다.”
반으로 묶은 나와 달리 하나로 내려 묶은 성진이의 긴 주황색 머리카락이 고개의 움직임을 따라 예쁘게 흘러내렸다. 나는 손가락에 닿는 옷단의 감촉으로 긴장을 흐트러뜨리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장을 보낸 신 말고도 동행으로 많이들 온 것 같더라.”
“우리가 워낙 유명하잖아.”
의식 당일의 식장 안내와 통제 등은 이번에 고용한 요정에게 맡겼다. 우리는 하객이 모이고 의식이 시작될 때까지 힘과 마음을 다스리고 있으면 된다.
“결혼을 하는 신이 적기도 하고. 특히 신과 신끼리의 결혼은 우리로 고작 16건째야.”
“그랬…지. 후우…….”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진이가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괜찮아. 은하 네 힘은 이런 의식에 잘 맞잖아.”
“그렇지. 내가 잘 해야지. 결국 성공은 내 힘에 달려있다 이거네……. 그렇게 생각하니까……망할, 더 긴장된다.”
“창조신 분들도 보러 오신 데다, 네 따님이 의식을 축복하는 주례자로 참석해 주셨잖아. 그러니 괜찮아.”
“그렇지. 응, 괜찮겠네.”
아멜을 떠올리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녀가 있고,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이 의식은 실패하지 않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식이나 힘을 움직이는 순서를 머릿속으로 되짚는 동안 의식의 시작 시간이 찾아왔다. 닫혀 있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자청색 융단이 깔린 저 어두운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하객이 모여 있는 식장에 도달하게 된다.
“가자.”
내가 긴장감을 다스리는 사이 먼저 일어선 성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나보다 커다란 성진이의 손을 의지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마주잡은 채 새까만 통로를 걸었다. 결혼식의 첫 번째 의례, 행진. 우리가 걷기 시작하자 융단의 문양이 빛나며 새까맸던 길이 밝아졌다. 생겨난 빛은 그렇게 식장 전체로 전달되었다.
그럴수록 우리의 영혼과 힘은 이 의식에 보다 걸맞은 형태로 다듬어졌다. 예쁘게 다듬어지고 느릿하게 가라앉으면서도 긴장 속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고요하게 타올랐다.
서로의 힘을 재료로 만든 복장 덕인지 평소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서로의 힘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렇게 깨끗하게 성진이의 영혼과 마력을 감지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조금 더 의식을 성공시킬 자신이 생겼다.
밝아진 길을 계속 걷자 머지않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식장의 문이었다. 우리는 손을 뻗어 한 사람 당 한 짝씩 문을 잡고, 동시에 문을 활짝 열었다.
복장만이 아니라 식장 역시 우리의 영혼 색을 기준으로 꾸몄다. 바닥에는 남색과 보라색 카펫이 깔렸으며, 우리가 나아갈 길은 아까에 이어 자청색이었다. 푸르스름하고 오돌토돌한 불투명 유리로 이루어진 벽을 문양을 그리는 은색 금속이 감쌌다. 예식장 사이사이 달린 꽃과 보석이 우리의 힘을 담고 우리의 영혼과 같은 빛을 냈다.
그런 빛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선 채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의식의 엄중함을 증명하는 고요함 속에서 미소 지으며 걸었다. 문득 눈이 마주친 지인들과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신부석 맨 앞자리에 선 인하, 한수, 제현 오빠는 기쁨과 응원과 걱정을 담은 눈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눈인사를 보냈다.
우리는 친한 이들을 향해 고마움의 의미를 담아 눈빛과 미소를 보내고는, 하객석 앞에 있는 의식의 제단으로 향했다.
반투명했던 제단은 우리가 식장의 길을 걸을수록 점점 불투명해져, 지금은 완전히 우리의 색으로 물들었다. 청자색 사이사이 별가루 같은 은빛이 총총히 빛나고, 주황색 보석과 문양이 곳곳에 장식되었다.
제단의 형태는 둥글고 윗면이 그릇처럼 움푹 들어가 있으며, 중앙에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탑 같은 장식이 층층이 세워져 있었다. 그 모습은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물을 채우지 않은 분수대 같았다.
그 제단 앞에 이번 의식의 증인이자 주례를 맡은 아멜이 지팡이를 쥔 채 서 있었다.
우리가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아멜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번에 신의 결혼 의식을 거행하실 유은하 님, 이성진 님.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네.”
“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아멜이 엄중한 얼굴로 선언했다.
“창조신 아스라리멜 엘 하르 로엔 에쉬리안나의 이름으로 이 의식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축복합니다. 유은하 님은 제단의 왼쪽에, 이성진님은 제단의 오른쪽에 서주시길 바랍니다.”
의식 시작 선언과 함께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도 짙은 긴장으로 떨렸다. 아멜은 우리 시점에 맞춰 위치를 지시했다. 우리는 아멜의 지팡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제단을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섰다.
긴장되었지만 몸의 움직임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위축되기엔 참 많은 경험을 쌓았다.
“예물을 꺼내 주세요.”
주례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아멜이 계속해서 의식의 순서를 알렸다.
우리는 각자가 품고 있던 반지를 꺼냈다. 디자인은 같지만 성진이에게 끼울 반지는 내가, 내가 낄 반지는 성진이가 만들었다.
이 예물의 핵심은 재료와 색상이다. 이 예물은 결혼 의식을 위한 가장 중요한 매개체. 때문에 재료는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의 피와 영혼과 신력과 권능이 담겼다. 그러므로 당연히 성진이에게 끼울 반지의 보석은 내 영혼색이었고, 내가 낄 반지는 성진이의 영혼색이었다.
내가 먼저 왼손을 내밀었다. 보라색과 주황색이 그러데이션 된 보석이 박힌 은빛 반지가 내 약지에 끼워졌다. 나도 내 영혼색이 담긴 반지를 성진이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의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에 긴장하면서도, 기대감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왼손을 제단에 올리고 신력을 방출해 주십시오.”
우리는 나란히 신력을 방출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방출했다. 바닥에 새겨진 진과 문양이 우리의 신력을 흡수하며 빛났고, 제단의 움푹한 부분에 우리의 신력이 물처럼 차오르며 섞였다.
그 타이밍에 아멜의 지팡이가 빛을 뿌렸다. 어둠의 축복이 제단과 바닥의 진에 흩뿌려지며 우리의 힘이 좀 더 오묘하게 깊어졌다.
아까 제단을 분수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구조도 분수와 많이 닮았다.
섞인 신력이 탑을 타고 올라가면서 정제되며 좀 더 깊게 섞였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물이 바깥 면을 따라 다시 아래로 낙하한다. 그렇게 방출한 신력이 제단의 구조를 따라 순환하며 몇 번 정제되었을 때, 아멜이 의식의 다음 순서를 짚었다.
“영혼의 문장을 개방해 주십시오.”
서로의 반지 위로 문장이 펼쳐졌다. 제단의 신력에 문장의 힘이 섞여들어 또다시 몇 차례 정제되었다.
“권능을 실어 주십시오.”
나는 제단에 권능을 실으며 언제나처럼 진심어린 마음을 담았다. 이 의식이 완벽하게 성공하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모든 것에 조화하는 시작의 힘 덕분인지 나와 성진이의 힘은 한 번의 충돌도 없이 이상적으로 섞였다. 다만 원래 상극이었던 힘이 섞인 만큼 폭풍 전 고요 같은 분위기를 떨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성대하게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느낌과는 별개로 힘은 무척 안정되어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매우 순조로웠다.
머지않아 제단에서 몇 번이고 정제된 힘이 우리가 낀 반지에 흡수되었다.
그와 함께 제단 중앙에 솟아올랐던 탑이 가라앉으며 제단 윗면이 평평해졌다. 우리는 그 위에 직접 작성한 결혼 서약서, 의식의 계약서를 올렸다. 그런 다음 양손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위치는 심장 가까이. 오른손과 왼손이, 왼손과 오른손이 깍지 낀 채 꽉 맞물렸다.
“결혼의 기본 서약문을 한 문장씩 읊어주십시오. 유은하 님부터 시작해주세요.”
아까보다 성진이의 얼굴이 더 잘 보여서 어쩐지 안심되었다.
결혼의 기본 서약문이란 이 의식의 완성을 꾀하는 주문이다. 글자를 읊는 순간 서로의 힘이 서로의 모든 것에 새겨지기 시작한다. 영혼과 육체가 개변하는 과정에서 웬만큼 힘의 상성이 좋지 않고서야 고통이 따른다. 그 고통은 어떤 신기(神技)를 쓰더라도 없앨 수 없다.
‘후우…….’
나는 성진이와 마주잡은 손에 꼭 힘을 주며 서약서의 첫 문장을 읊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 반려로써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한 자 한 자 틀리지 않게 글을 읊으며 반지를 통해 흘러나가는 힘에 집중했다. 내 힘은 흘러흘러 성진이의 심장을 적셨고, 그의 신력을 담는 신기의 근원을 채웠다.
“…….”
아직 고통스럽지는 않은지 성진이는 아무 동요 없이, 다만 긴장한 눈으로 다음 문장을 읊었다.
“이 사랑이 영원 영겁토록 사라지지 않는 마음임을 증명합니다.”
처음엔 낯간지럽게 시작하지만, 뒤로 가면 무거운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영원을 사는 신의 사랑은 그만큼 크고 깊다.
그것을 증명하듯 성진이의 신력 역시 내 육체를 파고들어 힘의 그릇을 채우고 영혼을 물들였다.
나는 퍼지는 힘들과 함께 나와 성진이가 여러 의미로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흐름에, 느낌에 단단히 집중했다. 확실히 아직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나 서로를 생각할 것이며, 서로의 의무를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마음을 나누고, 피와 영혼을 나누어, 심장을 나누겠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낭독이 이어질수록 서로의 몸에 흘러드는 신력의 양이 많아졌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신력은 빠져나가지 않고 서로의 몸에 자신이 머무를 새로운 자리를 새겼다.
성진이와 나를 잇는 인연의 끈이 점점 단단하고 두껍게 영혼에 얽히며 그것이 서로의 마음과 힘을 교환하기 위한 통로로 변한다. 그것이 육체에도, 문장에도, 영혼에도 끈끈히 연결된다.
상극의 힘이 온몸을 맴돌며 순환하기 위한 길을 낸다. 내 육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힘에 적응한다. 혹은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 육체와 영혼이 일부 변화한다.
이윽고 가슴에 그 인연을 상징하는 문양이 조금씩, 한 획씩 새겨졌다.
“윽…….”
예기했던 고통이 찾아왔다. 동시에 휘청 흔들린 우리 몸을 아멜이 힘을 써 부축해 주었다. 나만이 아니라 성진이도 상당히 고통스러워보였다.
가슴에 문양이 새겨지는 것과 함께 반지 위에 펼쳐진 영혼의 문장도 변화를 보였다. 선 몇 개가 서로의 색에 물들고, 각자의 문장에 그려진 문양 몇 개가 서로에게 새로 그려진다. 그럴수록 온몸의 혈관을 타고 새겨지는 듯한 통증이 심해졌다.
우리가 주문을 외는 사이 우리의 몸 사이에 있던 제단은 아래로 훅 내려앉아 바닥에 새겨진 그림처럼 변했다. 다만 둘레를 넓혀 우리의 발밑을 둥글게 감쌌다.
“두 분, 고통스러우시겠지만……의식의 안전성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제 서로의 가슴에 왼손을 올려주세요.”
“…….”
나는 숨을 고르고는 발로 몸을 단단히 지탱하고 성진이의 가슴을 반지를 낀 왼 손바닥으로 짚었다. 거의 동시에 성진이의 손이 내 가슴에 닿았다.
쿵! 심장소리와 함께 오가는 힘의 흐름이 빨라졌다. 아멜이 그런 우리의 위에 새로운 축복을 흩뿌렸다. 통증이 한순간 강해졌다가, 가라앉았다.
의식은 이제 막바지다. 통증은 잠깐 강해졌다가 점차 가라앉았고, 성진이의 한쪽 눈이 내 힘의 상징인 남색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영혼의 문장이 변화를 멈추고, 가슴의 문장도 완전히 새겨졌다. 육체의 문장은 나와 성진이의 문장을 일부 따온 형태였고, 검지와 엄지로 그리는 동그라미 정도 크기였다.
“하…….”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금 비틀거리는 우리의 몸을 또 한 번 아멜이 부축했다. 아멜은 우리를 빤히 살피고는 안도한 눈을 접어 웃으며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다시 반지를 낀 손을 마주잡고 의식의 마지막 문장을 읊어주세요.”
우리는 반쯤 포옹하고 있던 자세를 풀고 반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손을 꽉 깍지 껴 잡고, 허공에 떠올라 있는 서약서의 마지막 문장을 함께 읊었다.
“……이로써 서로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 순간 결혼 서약서가 투명해지며 그 안에 담긴 글자가 반씩 나뉘어 우리의 몸에 스며들었다. 가슴에 새겨진 의식의 증거가 환하게 빛났고, 서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반전되었다.
성진이의 머리카락은 남색으로, 내 머리카락은 주황색으로.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낯선 기분으로 내 뺨과 어깨를 간지럽히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본래의 색이 아니라서 그런지 사이사이에 본래 색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 색이 나한테 어울릴까? 이건 성진이라서 어울리는 색인 것 같은데…….
그러나 낯선 감정은 곧 설렘으로, 설렘은 이내 환희로 변했다. 의식 도중 아프긴 했지만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고통이었던 데다 금방 끝났다. 내 몸 구석구석 성진이의 신력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음이 느껴진다.
반려 의식이 성공했다!
이로써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곁에 이동할 수 있다. 서로의 힘과 권능을 빌려 쓸 수 있다.
물론 나눠받은 힘이고 빌려 쓰는 것이라 본인의 의지만으론 본인의 힘만큼 완벽하게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고, 반려와의 교감으로 조정할 수 있는 일이라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아플 땐 생명력을 나눠 치료해줄 수 있고, 힘이 부족하다면 힘을 전달해줄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의무를 같이 짊어질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함께 할 수 있다.
항상 함께, 언제나 손을 잡고. 그게 이 반려 의식의 가장 중요한 의의였다.
“…하핫!”
나는 의식이 성공했다는 실감에서 오는 벅찬 감정에 성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순서에 따르면 아직은 이른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쩍 객석 쪽을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모두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걱정이 많은 제현 오빠의 얼굴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성진이가 습관적으로 내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의식은 끝났지만, 나는 아직 결혼식이 전부 끝나지 않았음을 떠올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기다렸다는 듯 아멜이 다정한 미소와 함께 의식의 성공을 알렸다.
“두 분의 틀림없는 각오와 진심, 잘 지켜보았습니다. 그로 하여금 결혼 의식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두 분이 반려로 맺어졌다는 것이 신계의 성지에 새겨졌습니다.”
“와아아아아!”
이번에야말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를 치는 지인들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과 축하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유은하 님, 이성진 님. 정식으로 반려가 된 두 분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제 이름 아스라리멜 엘 디 로엔 에쉬리안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멜의 지팡이에서 여태까지 중 가장 짙은 어둠이 흩뿌려졌다. 육체와 영혼과 인연에 내려지는 축복. 그 축복은 의식을 체결함으로 우리의 몸에 얹힌 후유증과 부담감을 전부 날려버렸다.
반려 의식을 성공시킨 덕에 우리는 평소엔 알기 힘들었던 서로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생각도 눈빛만으로 금방 통했다. 아니, 생각은 예전부터 그렇기는 했다. 나는 남의 감정에 민감했고, 성진이는 나와 관련해선 특히 눈치가 빨랐다.
우리는 오늘 의식을 주관해 준 아멜에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 역시 결혼식의 한 순서였다.
“에쉬리안나 님, 오늘 이렇게 의식의 주례를 맡아 저희를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의식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의례의 일환이라고는 하나 진심을 담은 인사였다. 고통이 따를 정도로 위험을 동반하는 의식인 만큼 흐름을 확인해 줄 주례자가 필수불가결 했다. 우리보다 뛰어난 실력자일수록 좋았다.
그러자 아멜이 지팡이를 끌어안으며 우리와 비슷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니요. 저도 이렇게 두 분의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어서 기쁜 걸요. 의식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 안심도 되고요. 제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던 오빠의 기분을 알 수 있었어요.”
아멜이 나와 성진이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의식을 치르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우리의 새벽과 황혼, 두 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해요.”
그런 다음 아멜은 손을 펼쳐 객석을 가리켰다.
“피날레는 최대한 화려하게 부탁드려요. 신들의 결혼식은 신계에선 아주 드문 축제 거리잖아요.”
결혼 의식의 피날레는 의식이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축포다.
나와 성진이는 손을 잡으며 뒤돌았다. 우선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를 응원하며 마음의 힘을 보태 준 하객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은 이렇게 저희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보시는 대로 반려 의식은 무사히 성공하였습니다.”
나와 성진이는 번갈아 가며 미리 준비했던 인삿말을 전했다.인하, 한수, 제현 오빠를 비롯하여 신부석 맨 앞자리에 앉은 나와 친한 이들은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마다 끝없이 박수를 쳤다. 반면 신랑석에 앉은 성진이의 친구들은 박수를 치는 한편으로 존댓말이 안 어울린다는 둥 가끔 야유를 보냈다. 루키아가 거기에 동참하는 걸 보고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인사를 끝내고 우리는 마주 잡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리의 머리색은 여전히 교환된 그대로였다. 그 상태로 다시금 영혼의 문장을 열었다. 나와 성진이 사이로 우리의 문장을 반반 합친 듯한, 반려의 특권과 힘을 증명하는 문장이 떠올랐다.
의식의 성공을 증명하는 축포. 그건 우리가 서로의 힘을 사용해 광범위 협력기술을 펼치는 것이다.
나와 성진이의 상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역시 서로의 칭호며 힘이 하늘의 풍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식장 내의 풍경을, 더해서 신계의 하늘까지 바꾸어버렸다.
파노라마처럼 노을과 새벽이 연결된 하늘.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남색으로 넘어간 하늘은 끄트머리가 은색으로 바뀌며 마무리된다. 그렇게 환상적으로 펼쳐진 하늘에 끝없는 유성우가 쏟아졌다.
“와아아아아아!!!”
결혼식의 피날레는 결혼식의 끝과 피로연……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이기도 했다. 하객들이 우리의 신기에 뒤이어 곳곳에 축하의 의미를 담은 기술을 터트렸다. 하객뿐만이 아니라 의식이 무사히 성공했음을 깨달은 바깥의 사람들도 하늘을 향해 축하를 위한 기술을 쏘아 올렸다.
인하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은하야, 결혼 정말 축하해!”
“아하하, 고마워!”
활짝 웃는 인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수와 제현 오빠도 나랑 성진이의 어깨와 등을 두드렸다.
많은 이들의 축하 인사에 답하며 나는 아직 날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는 인하의 등을 두드렸다. 인하는 어느새 울음을 참고 있었다.
인하는 나와 성진이가 사귀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봤고, 성진이와 함께 나를 한 번 떠나보냈다. 그런 만큼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나는 인하를 마주 끌어안으며 나보다 키가 큰 몸에 기대다시피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워, 인하야.”
나를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은 인하가 천천히 나를 놓고 눈물을 닦았다.
“다시 한번 결혼 정말 축하해. 정말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 의식이 잘 될지 조금 걱정됐지만 너희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많이 걱정하진 않았어. 아, 그리고 주황색 머리도 정말 잘 어울려.”
“정말? 어울려?”
“응. 성진이의 주황색은 얼핏 금빛을 띠잖아. 그래서 나랑 세트인 것 같아서 기분 좋아.”
나와 인하는 서로의 머리색을 비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그 후 축하하러 와 준 하객들과 함께 식장을 나서 신계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꽃, 보석, 축복 등 다양한 축하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 후엔 피로연 파티 회장으로 향해 많은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먹고 놀고 떠들었다. 피로연 파티는 축하를 위해 찾아오는 하객의 물결과 신계의 전통에 의해 날을 새며 계속 되었다.
그동안 하늘은 계속 우리의 색인 채로 별을 떨어뜨렸다.
☆
직무와 고군분투하는 성실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인하와 한수 덕분에 최근엔 이전보다 훨씬 즐거웠다. 일하는 틈틈이 두 사람의 공부를 도와주었고, 때때로 자리를 만들어 즐겁게 놀았다.
1계급 신은 임무를 받는 만큼 여행 중에도 첫 번째 신계나 다른 세계를 드나드는 게 가능하다. 한 번은 인하, 한수, 성진이,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제현 오빠와 함께 죽은 소중한 사람들이 잘 환생했는지 여러 세계를 슬쩍 엿보고 왔다.
영혼이 같다고 동일인물일 순 없다는 확신이 더더욱 굳건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던 만큼 좋은 휴가 여행이었다.
여행 중인 제현 오빠와는 정말 가끔밖에 만나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인하와 한수는 신계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덕분에 기대했던 두 사람의 결혼식은 금방 찾아왔다. 두 사람은 나와 성진이처럼 세세하게 하나하나 따지며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금방 날짜를 잡았다.
두 사람은 원하는 분위기로 화려하게 꾸민 식장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두 사람답게 식장은 예쁘고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했다.
금실을 수놓은 하얀 드레스를 걸친 인하는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갈색 정장차림의 한수도 잘생겼고, 무엇보다 인하와 잘 어울렸다. 거기다 두 사람의 수줍어하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이로써 한이 하나 풀렸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계의 생활에 상당히 적응했을 무렵부터 인하와 한수는 우리 세계에 오고 싶어 했다. 가끔씩 마주하는 제현 오빠도 곧잘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도 나처럼 를 고향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안타깝게도 제현 오빠와 친했던 사람은 정령의 힘 덕에 S랭크로 올라간 성후 오빠나 인호 오빠 정도밖에 살아 있지 않았지만…….
하지만 우리 세계는 정말 아주아주 폐쇄적이었다. 자기 세계에서 각성한 것도 아닌, 자기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신을 안으로 들이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세계와 교섭한 결과 인하와 한수는 조금씩 우리 세계의 신계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세계수였다. 세계수는 자신을 탄생시킨 한수와 인하의 힘과 영혼을 기억했다. 지금은 소영이를 주인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역시 창조주는 특별한 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섭이 조금 늦어져 두 사람은 소영이와 테온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아쉬워하면서도 변한 고향과 과거의 제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제현 오빠는 아직까지 우리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다. 아마 제현 오빠가 방문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우리 신들이 세계에 내려갈 수 있는 날이 찾아오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세계의 법칙을 조율해 드디어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나지스와 유자하가 세계 안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자하는 어린 신의 특권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걸, 세계를 한 번 평범한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걸 허락받았다.
자하는 보다 즐거운 인생을 위해 여행을 시작할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조금 커다란 운명이 찾아왔을 때, 즉 내가 쓴 첫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태어났을 무렵에 세계로 내려갔다.
신은 세계의 운명에 크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하는 그들보다 한 살 아래의 나이로 인생을 구가했다.
아직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꽤 남아 있는 성진이가 자하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갑자기 딸을 맞이한 이성진의 행동에 놀라 경악하는 친구들을 보며 인하, 한수, 다른 신들과 함께 웃음을 삼켰다.
자하가 성진이를 ‘아빠’라고 부르는 걸 보면 가끔씩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이, 자식이라. 결혼을 했어도 신인 우리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신의 자식이 우리의 힘을 이어받고 신계의 일원이 될 걸 생각하면 더 그랬다. 신의 아이는 우리보다 선택권이 적은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자하가 세계에 내려선 걸 계기로 신계와 세계의 교류가 훨씬 빠르게 활발해졌다. 사자들에 이어 루키아와 하르펜도 아주 가끔씩 세계에 내려설 수 있게 되었다.
짊어진 직무가 무겁고 힘이 가장 강한 내가 세계에 내려서기까지 가장 오래 걸렸다. 세계에 내려서기 전날 나는 흥분해서 인하와 한수에게 내 심정을 보고했다.
“드디어 내일! 세계 안에 내려가게 되었어. 아직은 세계가 문제없다고 판단한 날, 정해진 시간동안만 내려갈 수 있지만 그게 어디야!”
“언젠간 우리도 세계에, 특히 지구에 내려설 수 있을까?”
“가능성은 보여. 세계수와 연관해서 시스템을 건드려보다 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잘 부탁해.”
“그러고 보니 제현 형은 어때? 신계에 들일 수 있겠냐?”
“죽음 계열의 힘이 아직 약하다는 것 위주로 공략해 보고 있어. 일단 조만간 어떻게든 한 번은 우리 신계에 들여보내려고. 그 후에는……너희처럼 정기적인 방문을 허락하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1, 2년에 한 번 정도는 어떻게 초대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며 제현 오빠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전생과 환생. 영혼이 같아도 다른 기억과 육체를 지닌 이 둘은 타인이다. 한수와 제현 오빠는 인하와 함께했던 삶에서 그 사실을 선명히 체험했다.
한수는 내가 말하기 전부터 현호의 환생과 어느 정도 친했고, 나와 만난 이후에는 상대와 성큼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한수는 머지않아 그가 현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것과는 상관없이 계속 친구로 지냈다.
민희의 환생과 제현 오빠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영혼의 전생을 알기 이전에 두 사람은 냉랭한 관계였다. 그러나 알고 난 이후 제현 오빠가 노력했어도 그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민희의 환생은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제현 오빠를 라이벌로 여기며 거리를 뒀다. 제현 오빠가 왕이 되고 그걸 인정하면서 사이가 조금쯤 나아졌으나, 끝내 사이좋은 남매는 되지 못했다.
그러니 아직 제현 오빠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에게 우리 세계를 보게 해주고 싶다.
“그럼 다행이고.”
세계 안에 내려선다고 해도 세계가 제한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적었다. 갑자기 큰 힘을 드러내 한빛 정원, 은성단, 성하, 대현 등 인간이었던 나와 밀접했던 장소에 들이닥치는 건 무리였다.
그걸 감안하여 나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어디를 갈지, 어디부터 들를지 미리 정해두었다.
바로 대현이 관리하는 봉안당이었다.
과거 내 소중한 사람의 이름과 유품이 있는 봉안당. 심지어는 인간이었던 나와 인하의 유골이 있는 장소.
대현이 관리하고는 있지만 방문 신청을 하면 범죄자가 아니고서야 누구든 접근할 수 있다. 봉안당의 보안은 뛰어난 키메라 반이 관리하고 있어 신뢰도가 높았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성진이는 미리 봉안당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한수와 인하는 자기들 몫까지 성묘를 부탁했다.
당일, 나는 공간을 열고 한국의 어느 한적한 땅을 밟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풍경과 공기는……인간일 때의 기억과 비교하면 아주 낯설었다. 자연의 느낌부터 마력의 성질까지 아주 많이 변했다. 그러나 주신으로 세계를 관리해 온 만큼 익숙했다.
오늘 내가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건 고작 10시간. 봉안당에 바칠 물건 몇 개는 성진이에게 가져와 달라 부탁했으나, 꽃은 눈에 띄는 꽃가게를 전전하며 직접 구했다. 이 모습으로는 한빛 정원의 꽃을 살 수도, 그렇다고 신계나 다른 세계의 꽃을 가지고 세계에 들어올 수도 없으니, 이게 지금의 최선이었다.
쓸 수 있는 힘도 극히 제한되었다. 거짓된 인간 모습으로는 최선을 다해도 B랭크 남짓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다.
그렇게 봉안당에 향했는데…….
‘아…….’
이 세계에서 체질에 가까운 기술인 감지능력은 다른 힘만큼 빡빡하게 묶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봉안당 안쪽의 기척을 확인한 나는, 숨을 삼키며 발을 멈췄다.
미리 만날 약속을 나눈 성진이의 옆에 아주 그립고 익숙한 기척이 서 있었다. 바로……소영이었다.
내 영혼의 기척을 알아본 성진이가 내게 염화를 날렸다. 소영이가 여기 온 건 단순히……우연이란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을 정도로 기쁜 우연이었다.
‘소영이랑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세상에, 바라던 날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이야.’
옛 지인들이 죽기 전에 그들 모두와 다시 한번 짧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기거하는 만큼 이루기 어려운 바람이었다. 특히 소영이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나는 표정과 태도를 가다듬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더 지체하지 않고 봉안당에 들어섰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가슴을 가득 채우는 긴장과 설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조심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성진이가 적당한 시점에서 나를 돌아보며 내게 눈인사를 했고, 소영이도 발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와.’
소영이는 마지막에 대화를 나눴을 때보다 약간 짧아진 머리카락을 일부 땋아 반으로 묶었다. 성묘하러 온 만큼 격식에 맞춘 검고 단정한 셔츠 원피스 차림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가까이서 마주하니까,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