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701
‘귀엽다!’
일정 실력 이상의 마법사는 성인이 되면 노화가 오기 전까지 늙지 않는다. 노화가 와도 외모는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 소영이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어도 나는 소영이를 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귀엽다, 진짜 귀여워!’
그런 흥분을 깔끔하게 감추며 나는 평범하게 소영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성묘하러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그러는 당신도 성묘하러 오셨겠죠? 여기는 봉안당이니까요.”
소영이는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주었다. 요즘 여기에 성묘하러 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추세라, 모처럼 찾아온 내가 반갑게 느껴진단다.
나는 환희하며 대화를 받았다. 본심을 약간 변형하여 진심어린 기쁨을 쏟았다.
“만나 봬서 정말 영광이에요. 사실 예전에 소중한 사람이 새벽별무리 분들께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예전부터 여러분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언젠가 한 번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두 분이나 만날 줄이야! 아,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그럼……여기에 부탁드려요!”
나는 언젠가 성진이가 보내줬던 영웅들의 이야기와 인터뷰를 모은 잡지를 아공간에서 꺼내 첫 페이지를 열었다. 이 잡지의 메인 인터뷰이가 바로 소영이였다. 소영이는 꽤 익숙한 태도로 잡지에 사인을 해주었다. 성진이도 어이없다는 눈빛을 감추며 사인을 했다.
나와 소영이의 대화는 생각보다는 길었지만 객관적으로는 길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다운 적당한 거리감, 적당한 타이밍에 대화를 끝마쳤다.
나는 가지고 온 꽃과 선물을 하나 둘 아는 이름에 바쳤다. 내가 성묘를 하러 온 상대 대부분 소영이도 아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소영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끔,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세계의 이치에 의해 잊히겠지만, 성묘 상대를 전부 특정하진 못하게끔 이곳저곳 빙빙 돌아다니며 성묘를 했다.
소중한 사람 한 명은 대현 출신이라는 핑계로 소영이의 앞에서 새벽별무리와 대현의 유명한 인물에게 꽃을 바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두 번째 행운은 소영이와 성진이의 연락을 받고 이 봉안당에 인성이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눈치를 보며 인성이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사인도 받았다.
“아직 여기에 이렇게 와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쁘네.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꽃을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다들 대단한 분들이시잖아요.”
머나먼 타인으로 접해 본 소영이와 인성이는 전보다 성숙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상냥했다.
인성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봉안당의 다른 칸으로 향하며 나는 소영이와 인성이의 사인이 적힌 잡지를 끌어안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웃긴다. 다른 사람인 척하고 친구들한테 사인 받기. 인하한테 말하면……웃으려나? 부러워하려나?’
뜻밖의 행운 덕에 소영이, 인성이를 만날 수 있었지만, 성진이와의 데이트 일정은 날아갔다. 만난 김에 놀러가자는 소영이와 인성이의 제안과 바람을 성진이가 차마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일찍 끝나면 잠깐이나마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성진이는 말했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분명 성진이를 이끌고 함께 밤을 새며 놀다가 성진이 집에서 자고 갈 것이다.
그래도 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귀했기에 데이트가 취소된 게 그리 아쉽지 않았다.
성진이, 소영이, 인성이가 떠난 사이 나는 비교적 덜 유명한 사람들……참극 때 죽은 예전의 우리 부모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한수와 인하의 개인적인 지인에게도 꽃이나 작은 선물을 바쳤다.
성묘가 끝난 후에는 디나를 만나러 갔다. 원래는 성진이와 함께 만날 예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생명의 신 하르펜이 만든 인간, 디나는 일단은 인간이지만 신의 힘과 영혼이 미세하게 섞여 있다. 그래서 보통 초월자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500살이 넘은 지금도 노화가 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르펜의 힘을 지닌 예리도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살 거라 예상하고 있다.
디나는 내가 주신이 되었을 때 딱 한 번 나를 만나러 신계에 왔다. 그 이후로는 신계에 오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하르펜을 통해 자신과 지인들의 안부를 전했다. 하르펜의 딸인 그녀는 언제든지 하르펜과 염화를 나눌 수 있다.
오늘 이렇게 만날 약속을 잡은 것도 하르펜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디나가 하르펜을 통해 우리에게 만나고 싶다는 전언을 보내온 덕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어라? 성진 님은요?”
“성진이는 여기 오기 전에 우연히 만난 소영이와 소영이가 부른 인성이 손에 끌려갔어요. 덕분에 소영이랑 인성이와 인사를 나눠서 전 좋았어요!”
“어머. 특별한 날이 아니면 바깥으로 나오는 분들이 아닌데, 용케 만났네요!”
“운이 좋았어요.”
“정말 잘 됐어요!”
디나는 내 지인들과 고르게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신인 우리의 의무와 제한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덕분에 편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만 디나는 우리와 잠깐밖에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줄 알고 치료 스케줄을 잡아 놨었다. 잠깐의 담소 후 나와 디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디나와 함께하는 동물 키메라 두 명, 솔개 바인과 뫼비우스 루피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어 기뻤다.
사실은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거의 항상 디나와 함께하는 만큼 디나의 지인을 대부분 알고 있다. 때문에 디나와 친한 사이라며 뻔뻔하게 앞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 후엔……고민하다가 캐티아에 갔다. 성진이와 디나 말고도 나와 대화하며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일상을 알려줄 사람이 있었다. 연락을 하고 가니 어느 순간 우리 세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성류족 멜리크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그는 현재 뛰어난 장인으로서 많은 힘 있는 조직에 마법 보조 기구를 납품하고 있다. 멜리크 덕분에 우리 세계 아이템의 질이 상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리크는 장인이자 키메라인 앨리스를 통해 다른 키메라들과도 친해졌다. 앨리스와 케르베로스 셋째인 베이 사이에 난 막내아들도 장인의 길을 걸었는데, 멜리크의 정체는 모르지만 멜리크의 제자로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멜리크 덕분에 오늘은 그 막내아이와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외모는 앨리스를, 성격은 베이를 닮은 귀여운 아이였다.
아쉽게도 앨리스는 만날 수 없었다. 많이 유명해진 최근의 그녀는 소개장이 있는 회사 및 개인 의뢰만 받았다.
키메라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멜리크도 내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보니까 요즘 이 세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추세던데, 맞나요?”
맞다. 정령과 세계와 신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생물이 지닐 수 있는 힘의 한계치도 강해졌고, 덤으로 초월자의 기준치도 높아졌다.
하지만 세계 안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그건 다음에 저희를 직접 찾아와서 질문해 주세요.”
“하긴, 이 세계가 많이 빡빡하죠. 그런데 그러면서 원래 웬만한 초월자들보다 수명이 길었던 키메라들의 수명이 더 길어진 것 같은데, 맞나요?”
대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멜리크는 실실 웃으며 물어왔다. 이런 점이 참 얄미웠다.
참고로 멜리크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맞다’였다.
내가 죽고 4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자아가 안정되지 않은 키메라들은 모두 수명이 다해 죽었다. 그러나 자아가 안정된 키메라들은 현재에도 모두 건강히 살아서 자신만의 생활을 구가하고 있다.
그들의 수명이 긴 것은 누군가의 영혼과 생명을 이용해 탄생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만든 성물의 덕이 컸다. 원래 평균 수명만 해도 600년 정도였는데…….
“평균 700년, 잘 하면 1000년은 살겠네요. 이야……. 트라베리아는 인간의 도리를 던져버린 미친 집단이었지만, 기술만 두고 보면 참 대단하다 싶어요. 그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시켜 이렇게 이끈 실레인 님은 더 대단하고요.”
실레인 아우로리아.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인 듯한 외모와 여러 세계에 자유롭게 녹아들기 위해 생각해 낸 유럽식 이름이다. 설정과 현실 사이에서 꽤 고민했는데,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과거의 내가 설정했던 나의 두 번째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과연 나다, 내 취향을 잘 안다.
“주신이 처음 만든 성물을 관리하고 있는 만큼, 만약 키메라 분들이 주신의 신관이 된다면 그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겠죠.”
나는 그냥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 화제가 아니었다.
“좀 더 일찍 예고하고 찾아오시면 다음번엔 앨리스나 케르베로스 형제분들이랑 만날 수 있게끔 상황을 꾸며 볼게요.”
원래 오늘 멜리크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 제안에 나는 기쁘게 웃어보였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기대할게요.”
멜리크와 헤어진 후에는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멀리에서 둘러보았다. 이곳에서의 내 고향인 진주나, 모교인 대현의 외벽, 은성단 등. 은성단은 사람이 드문 곳에 지어졌고, 지금도 그건 변함없는지라 인근 마을에선 건물 그림자조차 보기 어려웠다.
세계는 정말 많이 번성하고 발전했다. 전쟁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사람이 적어 적적한 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제한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나는 성진이가 준비해 준 핸드폰을 꺼냈다. 여전히 소영이, 인성이와 함께 있는 성진이에게 문자로 안부 인사를 보낸 후 신계로 돌아왔다.
☆
주신의 활동도 2계급 신의 의무도 이제는 손에 익었다. 신인 딱지는 뗀지 오래였다.
인하와 한수가 세계수에 힘을 불어넣는 대가로 가끔 우리 세계 안에 내려설 수 있게 되었고, 제현 오빠도 몇 번 신계에서 우리 세계를 보는 걸 허락받았다. 나와 신들에 의해 세계와 신계의 교류가 점점 넓어지고 있으니, 제현 오빠도 머지않아 세계 안에 내려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세계에 내려섰다. 가끔은 성진이와 함께, 혹은 인하랑 한수와 함께, 또 가끔은 혼자서 세계 곳곳을 둘러보았다.
성진이, 자하, 디나, 멜리크를 통해 예전부터 알던 사람을 제법 조우했다.
소영이, 인성이, 아르델 등 친했던 친구들을 만났고, 자하를 통해 대현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내 첫 작품을 양분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멀리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디나와 멜리크를 통해 예리나 키메라들을 몇 번 만났다.
나는 과거의 인연들과 친해지거나, 가끔 인사만 하거나, 데면데면하지만 이름은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친해진 상대는 소영이와 인성이었다.
기쁜 한편으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세계에 내려서면 곧잘 성진이를 만났다. 그러다 보니 소영이, 인성이와 가장 마주칠 일이 많았다. 그들은 성진이가 관심을 가지는 나에게 금방 호감을 표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내 친구라며 소개한 인하, 한수와도 친해졌다. 물론 인하와 한수도 외국식으로 만든 두 번째 이름을 썼다. 그들의 두 번째 이름은 그들이 전생에 부부로 살 때 썼던 이름인 ‘라니스 체르넬리언’과 ‘레이먼 체르넬리언’이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한수는 데릴사위였다.
신들끼리는 결혼한다고 해서 다른 쪽의 성을 따르는 일이 별로 없기에 같은 성을 쓰는 게 제법 새롭게 느껴졌다.
성진이는 노화가 찾아온 상태이지만, 최근 생물들의 평균 수명이 늘었기 때문인지 몇 십 년이 지나도 제법 건강했다. 슬슬 세계에서 신관을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가 나와, 나는 성물을 통해 키메라들에게 말을 전할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나지스가 이전에 신관을 만들었던 건 어떻게든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지, 본래 그 당시의 세계와 신계는 그 정도로 교류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신관을 만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세계와 신계의 교류가 깊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트라베리아가 저지른 일과 함께 교회가 저지른 일을 잊지 않았어. 키메라들은 그 일의 직접적인 피해자고.’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소영이가 초월자가 되었다. 세계의 규격을 뛰어넘은 마법사가.
우리 세계에선 초월자가 되었다고 해서 당사자에게 신호가 가거나 갑작스럽게 육체가 크게 변화하는 둥의 일은 없다. 때문에 계급이 높은 정령들이 소영이에게 초월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차원 도서관의 정보를 흘렸다.
폐쇄적인 우리 세계가 인정하는 도서관에 들어갈 자격은 초월자일 것과 주신의 이름을 아는 것. 머지않아 인성이도 초월자가 되어, 두 사람은 함께 세계 곳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혹시. 그런 기대감과 함께 몇 달.
신호가 왔다. 두 사람이 차원 도서관에 진입할 자격을 얻었다는 신호가. 하지만 두 사람은 차원 도서관에 향하지 않았다.
‘차원 도서관에서는 본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는데. 우리 모두 보다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는데.’
내 신명은 유은하 혹은 실레인 아우로리아. 두 사람은 이 중 어떤 이름을 주신의 이름으로 꼽았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 후.
성진이의 50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나는 인하, 한수와 함께 성진이의 집에 방문했다. 우리 세계 신들과 첫 번째 세계 신들이 맡긴 선물도 들고 왔다.
우리 말고도 간헐적으로 성진이의 집을 알 정도로 성진이와 친한 사람 일부가 선물과 함께 들렀다. 택배로도 선물이 계속 전송됐다. 성진이는 정말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몇 명 없지만, 성진이에게 도움을 받은 조직이나 사람은 상당 수였다.
멜리크도 세계의 규격을 넘는 특별한 아이템을 성진이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도 깝치다가 금방 성진이에게 쫓겨났다. 성진이는 멜리크의 선물을 다른 선물 사이에 대충 던져 놓았다.
“아버지, 생일 축하드려요. 아, 선배님들 오랜만이에요.”
성진이는 아르델, 슈카 등 친한 사람에게서 온 선물은 따로 분리되도록 택배 전송 시스템을 설정해 놨다. 선물과 생일 축하 인사를 성진이에게 전하고 성진이와 친한 이들에게서 온 선물 몇 개를 구경하던 와중 독립한 유자하가 선물과 함께 찾아왔다.
자하는 이 세계에서 A랭크 중위 마법사로, 직업은 경찰이었다. 한국 지부의 간부 자리까지 올라갔다. 힘을 묶인 채로 사는 인간의 생활에 완벽히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자하와 함께 우리가 만든 것이나 전문점의 디저트로 다과상을 차렸다. 내가 만든 케이크를 방긋 방긋 웃으며 먹는 성진이를 한수도 이제 태연하게 대했다.
처음 그 가식적이면서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진 상냥한 태도를 눈앞에서 봤을 때는 한수도 제현 오빠도 깜짝 놀랐었다. 그나마 성진이랑 마주친 횟수가 적어 놀라는 수준에 그쳤던 제현 오빠와 달리 한수는 오랫동안 질겁하며 현실을 의심했다.
‘사람은 시간과 함께 변하지만, 그래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지만 이놈이?’
성진이는 사귄 이후로 지금까지 다정히 웃으며 극진하게 나를 대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어느새, 어느 정도 성진이의 성격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한수랑 인하에게도 굉장히 유하게 대했다. 한수는 까칠했던 예전의 성진이와 잘 웃는 지금의 성진이의 대비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한수도 이제는 성진이의 바뀐 성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온화하게 디저트 타임을 보내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소영이와 인성이가 나타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좀 긴장했다. 다만 우리가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성진이만은 유유자적했다.
“헐, 우리 빼고 벌써 생일파티 하고 있었어?”
“그냥 간식 먹는 중이야. 파티는 저녁에 할 거야.”
“아, 그럼 됐어.”
그렇게 늘어난 인원으로 다시금 간식을 즐겼다. 유심히 두 사람을 보던 나는 이내 소영이와 인성이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눈치챘다. 행동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 눈에만 보이는 감정의 색으로 드러났다.
“오늘은 우리 친구 성진이의 생일이지.”
성진이가 의아한 눈으로 소영이를 흘끔 보았다.
“그렇지?”
“그래서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
소영이는 긴장감을 진정시키듯 에이드를 한 모금 삼키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유은하지?”
갑작스러운, 심지어 핵심을 찌르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눈만 깜빡거렸다.
두 사람이 주신의 이름을, 내 이름을 알아낸다면 그 이름은 유은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생각만 했지 갑자기 내 위장된 모습인 실레인 아우로리아의 가장 중요한 정체를 꿰뚫어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인하도 한수도 눈만 크게 떴다. 자하는 눈동자를 굴리며 우리의 눈치를 봤다. 소영이의 말에 바로 반응한 것은 성진이 뿐이었다.
“눈치챘어?”
상대가 눈치 챘음에도 굳이 감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영이와 인성이는 이제 초월자다. 무슨 이유로든 내 어떤 정체든 눈치채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성진이의 대꾸에 소영이가 인상을 썼다.
“그럼 언제까지 모를 줄 알았어?”
“경우에 따라선 평생 모를 수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 컸어.”
이번에는 인성이가 불만을 표했다.
“그럼 알려줬어야지.”
“안 되니까 못 알려줬지. 너희도 세계의 제약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을 텐데?”
“…….”
소영이와 인성이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말이 끊긴 타이밍에 입을 열려는데, 나보다 먼저 인하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소영이의 표정이 한층 찌푸려졌다.
“넌 인하지? 맞지?”
“응.”
“그럴 줄 알았어! 은하랑 그으렇게 친한데 그럼 누구겠어.”
소영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짜증난 기색으로 중얼중얼거렸다. 우리는 슬슬 소영이와 인성이의 눈치를 봤다.
소영이는 에이드를 쭉 빨아 마시고는 큰 소리 나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인하의 질문에 답했다.
“어떻게 실레인이 은하인 줄 알았냐고? 일단 성진이의 태도가 이상했어. 성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좀 유해지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실레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유별났어. 심지어 그 태도가 은하를 대할 때랑 아주 닮았더라고.”
“그래서 처음엔 성진이가 새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줄 알았어.”
“아하하.”
어색하게 웃자 인성이가 웃을 일이 아니라는 듯 새초롬한 눈으로 나를 흘겼다.
“처음엔 그냥 그렇게 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위화감이 들더라. 일단 너희, 우리한테 정체를 완벽히 감출 생각이 없었지?”
“응.”
실제로 그러했기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본연의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세계의 제약이 있는 한 평범한 인간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 두 사람은 이제 평범한 인간이 아닌 초월자다. 지난 일들을 돌이키며 위화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래, 그래서야. 일단 너희가 은하랑 인하를 닮았고……아냐, 성격은 많이 달라졌어. 그런데 우리랑 같이 있을 때의 태도라든지,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게 점점 마음에 걸렸어. 자꾸 은하랑 인하가, 너희가 생각났어.”
나와 인하는 납득했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억지로 숨길 생각이 없었고, 예전의 기억과 습관대로 친구들을 대했다.
“그 외에도 힘이라던가, 분위기라던가, 걸리는 점이 좀 많았어. 세계의 제약 때문에 그걸 자세히 파악할 수 없었다는 걸 언제부터인가 인지했어.”
자신이 느낀 것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지 소영이가 또 한 번 인상을 썼다. 인성이가 교대하듯 나섰다.
“사실 우리는 최근 신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어.”
또 한 번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과를 알기에 우리도 오늘 두 사람을 만난 순간 긴장했다.
“응, 알아. 차원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였지?”
이번엔 소영이와 인성이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알아?”
“너희가 초월자가 되었다는 것, 정령에게 차원 도서관에 관한 정보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중 하나인 주신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까지 알아. 사실 우리는 그래서 조금 의아했어. 왜 차원 도서관에 들르지 않았어?”
“정말 아는 구나.”
인성이가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렸다. 대답은 소영이에게서 나왔다.
“일단 너랑, 잘 하면 너희랑 대화를 나누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런 다음에 가려고 했어.”
“그랬어?”
소영이가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그런 걸 아는 걸 보니……역시 네가 주신이었구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맞아. 내가 이 세계의 주신이야.”
소영이와 인성이의 시선에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잠시의 침묵 후, 나는 이어서 물었다.
“나는 너희 행동을 얼핏 지켜보긴 했지만 전부 아는 건 아니야. 주신의 이름에는 어떤 경로로 도달한 거야?”
“음…….”
충격적인 예상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져서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일까. 탈력감에 잠겨 의자에 몸을 기댄 소영이를 흘끔 바라본 인성이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정령에게서, 네네르나(세계수의 가디언)에게서 차원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시작이었어.”
그러나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니 소영이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랬지. 그래서 거길 목표로 삼으려 했더니 초월자임이 틀림없는 성진이 놈은 규칙 상 알려줄 수 없다고 하지 뭐야? 답답해서 진짜.”
소영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성진이를 향한 분노인지 세계의 법칙을 향한 분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하다보니 세계의 축에 시선이 가더라고. 예전에 세계랑 계약해서 신의 것인 듯한 힘을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응응. 그래서 한동안 데미안에게서 별의 열쇠를 빌려서 인성이랑 같이 별의 도시를 돌아다녔어.”
인성이는 별의 도시 열쇠를 데미안에게 맡겼지만, 그래도 열쇠는 여전히 인성이를 더 잘 따른다.
“그러다 보니 감이 오더라. 세계의 핵심에는 여전히 네 힘이 있어. 심지어 넌 이미 죽었는데도 그 힘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지.”
“이븐의 힌트가 결정타였어. 신들 중엔 처음부터 신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평범한 생물에서 신으로 진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확신했어.”
인성이의 말로 경위는 끝을 맺었다. 어느새 활기를 되찾은 소영이가 나를 노려보다시피 마주보았다.
“그래서? 완벽하게 친구를 알아본 우리한테 할 말 없어?”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편 소영이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럼……차원 도서관에 진입할 자격을 갖춘 걸 축하드려요.”
“…뭐?”
소영이와 인성이의 표정이 단숨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한수도 비슷한 표정이었고, 인하와 성진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자하는 주신이기에 나온 습관으로 판단했는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나는 당당했다. 소영이와 인성이의 분노가 약간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너희가 차원 도서관에 오면 전부 설명해 주려고 했단 말이야. 거기서는 세계의 제약도 약해져서, 여기에 비해서 정말 많은 걸 말해줄 수 있거든.”
“어…….”
“그랬어?”
“그랬어. 참고로 방금 한 말은 그때 너희들한테 하려고 했던 인사말이었어.”
이윽고 모두의 얼굴이 웃음에 물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실은 성진이도 신이고, 성진이의 양녀로만 알았던 자하 역시 신이라는 것과 인하의 남편이 박한수라는 걸 알고 소영이와 인성이의 표정이 급변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
이렇게 한 번은 끊어졌던 인연 두 개가 다시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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