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71
본격적으로 방학이 시작된 첫날, 나는 인하네 부모님이 무언가를 수사하기 위해 서울로 아예 출장을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2, 3주간 거기에서 지낼 예정이란다. 그리고 이번엔 인하도 부모님을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장기 출장이고 방학인데 계속 우리 집에 맡기긴 조금 그랬단다. 하긴, 그럴 만하다. 또, 전파가 차단되는 장소라 인하는 괜찮지만 자신들의 핸드폰은 당분간 연락이 안 된다고 한다. 아예 꺼 놓을 생각이라 했다.
‘전파가 차단되는 장소라. 닿지 않는 게 아니라 차단된다고? 어떤 데지? ……방공호? 으음……전투 기지?’
그 말을 듣고 스승님과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냥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무슨 일이래?”
“글쎄, 모르겠어. 극비라는 것 같아. 하지만 전부터 뭔가 평소랑은 다른 일로 돌아다녔었어.”
인하는 나와 떨어진다는 생각에 풀이 죽었는지 기운 없이 대답했다. 나는 인하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라, 인하가 좀 더 침울해졌다.
“근데 서울로 가는 거니까, 혹시 한수를 만나게 되면 신기하겠다. 그치?”
“…….”
인하가 고민하는 기색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인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인지도 모르겠는데, 요즘 한수와 인하가 싸우는 일이 좀 줄어든 것 같다. 좀 자랐다고 그러는 걸까? 좋은 일이지만 약간 아쉽다. 두 사람은 투닥거리는 게 묘미인데.
그러나 곧 인하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아무래도 아직은 으르렁거리는 면이 남아 있나 보다. 다행일까, 그 반대일까?
“어쨌거나, 잘 다녀와.”
인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쉬운 기색으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인하가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출발한 것은 인사를 한 그날 저녁이었다. 또한 나는 그다음 날 민희에게서 의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실은 나도 방학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기로 했어.]“뭐? 어쩌다가?”
[오빠가, 일이 있어서 집에 한동안 못 들어오는 일이 많을 거래. 근데 그동안에, 방학인데 나만 혼자서 집에 있는 게 걱정된대서. 그러니까 잠시만 기숙사에서 지내기로 한 거야.]“아아…….”
그런 거구나. 나는 납득했다.
“하긴, 오빠 입장에선 걱정되겠지.”
지금은 시하네 집에 맡기기도 껄끄러울 테니까.
[응. 그래서 나도 알았다 그랬지. 그래도 덕분에 한수네 집에 놀러 가기 편해졌어! 여기서 한수네 집까지 걸어서 15분밖에 안 걸린다?]“그래도 서울 길 복잡하니까 조심하고, 혼자 나가지 말고, 엉뚱한 짓 하다가 헤매지 말고. 나갈 일 있으면 한수한테 길 안내 부탁해야 된다?”
[알았어, 알았대두! 오빠한테도 기숙사에서 걸어서 밖으로 나가는 건 좀 위험하니까 그만두라고 설교 들었단 말이야!]이것 역시 그럴 만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조금 심심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새까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선아 아줌마가, 자기가 나가 있는 동안에는 집 안에 방범 장치를 좀 세게 틀어 놨다고 지하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고, 인하도 멀리 갔고.
‘아니, 심심하기보다는 섭섭한 거지……? 하고 싶은 훈련은 많고, 할 훈련도 많으니까.’
그럼 비는 시간에 책을 좀 더 읽고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기로 할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소설을 올리기로 약속한 날이다. 나는 소설을 완결까지 쓴 다음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훈련 때문에 도중에 바빠서 연재를 중단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요즘 소설이 상승세에 오르고 있다. 댓글도 추천도 별점도 확확 늘고 있어서 많이 즐겁다.
이 사실은 친구들이나 스승님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하고 있다. 들키면 반드시 읽으려고 할 테니까! 그리고 스승님이라면 이것도 게임으로 만들겠다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독자님들은 내가 어느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인 걸 알 테고, 내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은 내가 모 사이트의 인기 작가인 걸 알 테고……. 으으으! 이중생활이 얼마나 재밌는데!
약속한 연재일은 내일이지만, 피곤하니 예약해 두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틀었다. 전원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바탕 화면이 떴다. 나는 소설을 올리기 전 잠시 웹 서핑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 한쪽에서 바이러스 알림이 떴다.
“아, 뭐야. 나 이상한 데 안 들어갔는데?”
나는 툴툴거리며 바이러스를 삭제한 후 곧바로 연재 사이트로 들어갔다. 로그인을 하고 보니, 웬일로 쪽지가 와 있었다.
“호오?”
누구한테서 온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쪽지를 클릭했다. 이제 보니 독자님한테서 온 것이었다.
『보낸사람: bjfb0504
안녕하세요. 작가님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보아서 쪽지 합니다. 작가님 작품을 보고 궁금한 게 많아서요. 메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글이 이어질수록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 이야기에 관심이 생겨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니, 영광스러운 일이다. 요즘 인터넷에 이상한 사람이 많아 조금 걱정됐지만, 이상한 사람이라면 차단하면 되니까.
나는 답장 버튼을 눌러 긍정의 뜻이 담긴 글을 적었다. 글 맨 밑에 소설 전용 메일 주소를 적고 쪽지를 송신했다.
“약간 부담스럽지만, 가끔은 괜찮겠지…….”
그 이후로 나는 한동안 아주 평범한 방학 생활을 보냈다. 매일 같이 놀던 인하가 없고 선아 아줌마의 지하실도 못 가게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히 제한되었다. 가상 시스템으로 환각 구현력을 기르거나, 방에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마법을 연습했다. 제어력이 뛰어나서 이제 웬만하면 주위에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그 대신 조금만 맘을 놓으면 벽을 통과하곤 한다. 방이 좁기도 하고 만일을 위해 공격용 마법 훈련은 피했다.
그 대신 체력 훈련 시간을 늘렸다.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그러고 보니 민 선생님에게 낯선 사람이 자꾸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 후부터는 그런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과는 가끔 마주쳤다. 내가 체력 훈련을 하고 있으면 그 주변 벤치나 담벼락에 우연히 서 있곤 했다. 아! 또 그 사람도 가끔 조깅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체력 훈련을 보통 저녁, 혹은 아침쯤에 하는데, 그러다가 몇 번 달리고 있는 상태로 마주쳤다. 매일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지 신경 쓰여서 코스를 바꾸면 또 마주치지 않는다.
저 사람을 처음 본 게 언제더라. 방학이 되기 얼마 전이었던가? 낯선 사람이 많이 보였을 무렵인 것 같다. 방학식 날에도 봤던가? 그래, 그 이상한 꿈을 꾸었던 날에도 만났다.
‘으음…….’
그 후부터 집 밖에 나가면 가끔씩 마주친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억에 남지 않았겠지만 그는 강한 마법사였다. 적어도 C랭크는 되어 보였다.
최근에 가끔 보게 되었다는 건……혹시 그건가?
‘이사 온 건가?’
그 생각은 머지않아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가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보다도 요즘 내 마음을 끄는 건 인터넷상에서의 일이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소설 연재 사이트와 메일을 확인하다가 얼핏 웃었다.
“어? 또 메일 왔네.”
내 팬이라며 나에게 메일 주소를 물어 온 사람은 다음 날이 되기도 전에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조금 긴장하며 메일을 열어 보니 평범한 질문이었다. 나는 메일을 열심히 읽은 후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시 답장이 왔다. 한 팬만 신경 쓰고 편애하는 건 기분이 좀 껄끄럽지만, 아무래도 내 팬이라며 용기를 낸 사람을 냉정하게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이 메일을 쓴 사람은 내 소설을 꽤 심도 깊게 읽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엔……아무래도 남자인 것 같다.
『작가님은 특이한 세계관을 만드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게 인상적입니다. 혹시 유펠르시아랑 라비언트의 마정석에서 힌트를 얻었나요? 그리고 남주가…..』
나는 메일을 읽은 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한 답문을 떠올렸다. 한동안 타자만 두드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 인하다.”
그것도 단체 통화였다. 나는 답장을 쓰다 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허공에 화상 영상이 떠올랐다.
이내 나는 조금 놀랐다. 막 전화를 받은 현호와 민희도 인하와 한수를 바라보더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따로따로 모습이 떠오른 우리와 달리 인하와 한수가 둘이서 나란히 선 채 약간 찌푸린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나는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어,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야? 놀러 간 거야?”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우리 엄마랑 얘네 엄마가 아무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나, 당분간 한수네 집에서 지내게 됐어.]어머나 세상에. 나는 묘한 우연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무심코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수라도 만나게 되면 신기하겠다.’
그건 그냥 한수가 서울에 살고 인하도 서울에 간다니까, 또 한수네 엄마랑 선아 아줌마는 아는 사이잖아? 그래서 한번 말해 본 거였는데, 설마 그게 진짜로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한수가 골치 아픈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 우리 엄마가 요즘 일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그게 얘네 엄마랑 같이 하는 일일 줄 누가 알았겠냐.]“오호……하지만 같은 일을 한다고는 해도 어쩌다가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된 거야?”
[얘네 부모님이 일하는 동안 얘는 혼자잖아. 걱정된다고 우리 집에 맡겼어. 우리 집은 아빠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방학 동안 이 녀석이랑 계속 단둘이야.]하긴,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한수네 아버지는 강하고, 집에는 A랭크 방범 장치가 있는 데다, 전투 로봇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뭐야. 그럼 빨리 말하지! 나도 한수네 집에 놀러 갈래!] [그럼 나도 그럴래! 나도 오빠한테 말해서 한수네 집에서 지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그럼……은하도 이쪽으로 올래……?]나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고민했다. 음……친구들이 다 모인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안 된다.]그때, 뒤에서 나타난 한수의 어머니가 우리의 계획을 단칼에 잘라 냈다.
[너희들은 안 돼. 현호 너도 당분간은 우리 집에 놀러 오지 마.] [에엑? 아주머니, 왜요?] [안 된다면 안 돼. 명이한테 이야기해 놨으니 넌 절대 못 온다.] [에엑~? 엄마한테?]이어서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특히 은하, 넌 절대 안 된다.]그녀는 일방적으로 말하더니 성큼성큼 다시 그 장소에서 떠나갔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민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아주머니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체엣, 기숙사는 혼자라 심심한데.] [그래도 인하는 잘됐네. 안 심심하겠다.]현호의 말에 인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잘된 일 아냐.] [너희들은 진짜 말만 그런다니까~.] [아, 뭐가!]장난스럽게 말하는 민희를 향해 한수가 역정을 냈다. 우리는 다시금 웃었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그래서 연락한 거야. 우리 엄마랑 얘네 엄마가 지금 하는 일 끝나면 나중에 같이 다 못 깬 게임이나 깨자.]“자, 잠깐, 그거 계속 할 생각이야? 그럼 내가 없는 데서 해 줘. 나 부끄럽단 말이야!”
[부끄러운데 왜 게임을 만들어?]“그거랑 이건 다르지! 눈앞에서 하는 걸 보는 부끄러움이랑, 막연히 누군가가 내 게임을 좋아해 준다는 걸 알았을 때의 설렘은, 전혀 다르단 말이야!”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역정을 냈다.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숙이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지만 다들 웃기만 할 뿐 번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인하가 돌아오기 전에 놀러 가고 싶다. 인하랑 한수가 단둘이 으르렁거리는 모습도 볼 겸!]민희의 말에 한수가 또 한 번 이를 드러냈다.
[우리가 짐승이냐? 왜 으르렁이야.] [어허. 비유법을 모르는 한수가 아닐 텐데?] [저놈은 은하 옆에 있다 보니 나날이 어휘가 늘어 가서…….] [너도 마찬가지임.]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민희가 기억력에 비해 아는 단어가 적은 건 글을 잘 읽지 않아서다. 신문이든지, 책이든지. 하지만 내가 소설에서 쓰는 단어를 일상 대화에서도 쓰다 보니 제법 어려운 어휘도 익혔다.
우리는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키득키득 웃다가 의자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창가에 턱을 괴려다가, 멈칫했다.
‘어, 저 사람.’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 최근 이사 온 그 사람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웃었다. 그것이 마치 지금까지 계속 날 보고 있으면서 내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기다린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야, 왜 남의 집 창문을 올려다봐.”
나는 흥 콧소리를 냈다.
“기분 나빠.”
나는 기본적으로 인도어파지만, 간식을 사러 주기적으로 시내로 나간다. 그러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면 꼭 사람들의 마력을 관찰하며 즐긴다. 평소처럼 시내를 거닐던 나는 우연히 낯이 익은 마력이 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최근 우리 동네에 이사 온 남자다. 그는 평소 셔츠를 주로 입고 조금 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닌다. 어쩐지 안경이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다.
나는 그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나는 이 사람이 조금 불편하다. 눈이 마주치면 사람 좋게 웃는데, 그럴 때마다 어색했다. 저번엔 또 괜히 내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지를 않나.
그러다가 실수로 들고 있던 봉지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린 봉지에서 주먹밥이 튀어나왔다.
“으악!”
나는 당황하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앞에서 걸어오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내가 떨어뜨린 물건을 봉지에 넣어 내게 건네주었다.
“앗……감사합니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너 동네에서 자주 조깅하던 아이 맞지?”
남자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소심하게 봉지를 꽉 쥐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위축되었다. 이제 보니 이 사람, 외국인이구나.
“네. 맞아요.”
“이름이 뭐니?”
“유은하요…….”
“그래……. 유은하…….”
목소리가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가 손을 뻗더니 내 뻗친 머리카락을 아주 살짝, 매만졌다.
“이런 데서 마주치니 반가워서.”
“아, 네…….”
남자는 내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더니 잠시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러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만 지나치려고 하는데,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뭘 하고 있었니?”
“네? 그냥 간식을 사고, 문구점에 들러서 노트랑……그런 걸 사러 왔어요.”
“혼자서?”
“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갈까.”
“네? 왜요?”
나는 당황했다. 아니 왜? 몇 번 얼굴을 마주쳤을 뿐인 꼬맹이의 쇼핑에 왜 따라오겠다는 거지?
“막상 시내에 나왔는데……길을 잘 모르겠더라고.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리고 마침 나도 문구점에 볼일이 있어.”
“아……그렇군요.”
그런 거라면야. 나는 어색해하면서도 길을 안내했다. 문구점은 여기에서 멀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문구점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그럼 전 이만…….”
“음? 너도 물건을 사러 온 거 아니었나?”
“저는 아까 샀어요. 그럼…….”
사실 거짓말이다. 간식을 산 뒤 문방구를 둘러볼 생각이었지만, 저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아무래도 어색했다. 나는 재빨리 발을 옮겼다. 남자의 시선이 잠시 따라붙었다 떨어졌다.
나는 그 후 차가운 물만두와 종이컵 빙수를 샀다. 종이컵 빙수를 먹으며 크게 달지 않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들고 있던 봉지에 하나씩 넣었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일을 나갔을 터인 엄마가 돌아와 있었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지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래? 다행이다. 응. 본 적 없어. 너희가 간 이후엔 전혀 없어. 다른 애들도? 그럼 확실한가 보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가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약간 열린 방문 안쪽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나는 봉지에서 종이컵 빙수를 꺼내 냉동실에 넣고 다시 안방으로 다가갔다.
“……그래, 알았어. 응, 응. 뭐어? 폭탄?! 미친 거 아냐?”
저, 정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흠칫 굳었다. 뭔가 엄청 위험천만한 일이 있는 것 같다.
“눈에 띄려고 작정한 거야? 아, 위장? 그럼……세상에, 왜 그런대? 어휴, 알았어.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서야지. 응, 응.”
아무래도 심각한 이야기인가 보다. 나는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물만두와 주먹밥을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의자에 앉으며 절전으로 돌렸던 컴퓨터를 켜니 메일이 와 있었다. ‘렉스 님’에게서였다.
알파벳과 숫자가 섞인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을 ‘렉스’라 불러 달라고 했다. 그 배열이 어떻게 하면 렉스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설마 본명은 아니겠지?
요즘 렉스 님이 보내는 메일에 왠지 사담이 늘어난 것 같다. 좋아하는 색은 왜 물어보지? 고개를 갸웃하며 답장을 보낸 다음 소설을 쓰고 있자니 엄마가 방으로 올라왔다.
“미안, 은하야. 엄마 출장 가야 돼.”
“출장?”
나는 만두를 먹다가 눈을 크게 떴다. 엄마가 말을 하다 말고 내 손에 들린 만두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너어, 또 그런 거나 사 먹고!”
“엄마 것도 사 왔어. 냉동실에 엄마가 좋아하는 종이컵 빙수 있어.”
“정말? 역시 우리 딸이 최고……가 아니라!”
“추, 출장 간댔지? 이번엔 며칠이야?”
엄마와 아빠, 그중에도 엄마의 출장은 제법 자주 있다. 엄마는 유능하고, 범죄 관련 일을 맡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잔소리를 듣기 전에 다급하게 엄마의 용건을 가로챘다. 다행히 엄마는 그 화제를 물었다.
“일주일이라는데……잘못하면 그보다 길어질지도 모르겠어. 어휴, 일단 반찬 잔뜩 만들어 놓고 갈게. 돈도 두고 갈 테니까 밥 잘 챙겨 먹고. 당분간 아빠도 일찍 들어올 거야.”
“일주일?”
나는 조금 놀랐다.
“그렇게 오래 출장 가는 건 또 처음이네. 혹시 아까 그 폭탄……이랑 관련 있어?”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들었어?!”
“음……조금만.”
걱정스럽게 묻자 엄마는 당황하는가 싶더니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 그 일 때문이야. 서울에서 폭탄 테러를 하고 있는 놈이 있는데……그 녀석이 폭탄을 어떻게 만드냐면, 아이템이랑 기계 있지? 그걸 해킹으로 시스템을 조작해 가지고, 가열해서 폭발시키는 거야.”
“해킹으로? 그게 가능해?”
헐, 그게 무슨 미친 짓이람. 나는 당황하며 엄마를 보았다. 나라면 그런 재능 있으면 게임이라도 만들겠다.
“가능한 놈이 있어. 선아가 지금 그 범인을 쫓고 있거든? 근데 지금 기지랑 통신기가 그놈의 해킹에 한 차례 당했대. 통신 불능이 된 거야. 통신이랑 해킹 하면 이 엄마가 알아주는 실력자거든. 이래 봬도 이 엄마가 해커로서는 B랭크 수준이란다. 당연히 엄마는 보안 일만 맡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 불려 가는 거야.”
오오, 우리 엄마는 생각보다 유능했나 보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어라? 선아 아줌마랑 같은 일 하는 거야? 선아 아줌마는 분명 연락을 못 한다고…….”
“응. 그 녀석의 해킹을 피하기 위해서야. 거기가 바깥이랑은 통신이 안 된다더라. 밖에 나가서도 핸드폰이 아니라 특수한 통신기만 써 왔대. 근데 그 통신기 전파를 해킹당한 거고. 기분 나쁜 놈이야, 하여간. 조금 전엔 잠깐 공중전화를 썼대. 그러니까 거기 가면 엄마랑도 연락이 안 될 거야.”
어라,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전혀 안 되는 거야?”
“아냐. 쉬는 시간에 밖에 나와서 연락하면 돼. 아무리 그래도 딸한테 연락 한 번을 못 하겠니.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할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알려 줘야 한다?”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괜찮겠지.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건 처음이지만, 엄마가 없다고 울 나이도 아니잖아. 엄마 아빠 둘 다 없을 때도 있었잖아.
“그런데 아빠가 일찍 돌아온다고?”
“응. 회사에 이야기해서 당분간 6시쯤에 돌아온대.”
“그래?”
아빠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빠른 날은 7시, 늦는 날은 10시에 돌아온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엄마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은하도 학교 기숙사에 갈래?”
“기숙사?”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민희도 거기 있잖아.”
나는 흘끔 컴퓨터를 보았다. 학교라…….
‘그래. 친구들 없는 동안 소설이나 실컷 쓰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이제 그렇게 안 어려.”
“……그래?”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참 나, 뭘 그렇게 걱정한담. 이 마을은 평화로운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소동이 일어난 적이 없고, 전투 구역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알고 보면 학교보다 안전한 장소다. 선아 아줌마의 영역이라고 알려져 있어 음심을 품은 자들은 절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세상에 절대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3개월 전에 일어난 테러 사건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아빠는 회사도 못 가지. 몸은 어릴지언정 능력만으로 보면 내가 아빠보다 더 강하다. 그리고 비마법사는 최대 A랭크 호위 아이템을 소지할 수 있는데, 나와 아빠는 C랭크 호위 아이템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엄마가 이내 웃었다.
“그래……. 그럼 준비해야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수호 양과 수호 군을 작동시켜 놔.”
수호 양은 지킴이 로봇이다. 지킴이 시리즈는 기준 이하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한 로봇으로, 우리 집에는 두 개가 있다. 두 로봇 다 C랭크로 엄마가 장기 출장을 갈 때 방범용으로 작동시키고는 한다.
“엄마 갔다 올게. 잘 지내, 은하야.”
“응. 일주일 후에 봐.”
나는 엄마를 향해 선뜻 손을 흔들었다. 조금 허전하네. 보통 선아 아줌마네와 부모님이 둘 다 집을 비우는 날엔 인하와 같이 침대에서 뒹굴었는데, 이번엔 인하조차 없구나.
‘조금 외롭겠는걸.’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엄마가 출장을 가고 하루의 반은 혼자인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훈련을 한 뒤 소설을 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엄마는 정말 일주일을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요리를 만들어 두고 갔다. 나와 같이 요리를 하겠다던 아빠의 의지는 파스스 식어 버렸다.
나와 아빠는 엄마가 말한 대로 수호 군과 수호 양을 작동시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두 로봇의 마법석이 달라졌다. 원래 C랭크였는데 B랭크 마법석을 지니고 있다. 업그레이드한 건가? 우리 엄마는 C랭크이니 C랭크 아이템까지밖에 못 가지는 게 아니었던가? 어쩌면 아빠가 비마법사라 허용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저번에 이사 온 남자와 괜히 자주 마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