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80
“왜냐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지키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알아 버렸거든. 아, 이런 게…….”
“‘동경이구나’?”
박한수가 강인하의 말을 가로챘다. 울분 비슷한 것이 섞인 목소리에 강인하는 약간 놀랐다. 박한수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인하의 눈에, 박한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하……하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허탈하게 웃는 박한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인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보았다.
“네 첫사랑이 은하랬지? 내 첫사랑도 마찬가지로 은하야.”
박한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어른스러운 마음씨가 좋아서, 그래서 반했다. 반했……었다. 강인하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는, 그냥, 그 녀석의 평범한 면이나, 다른 애들이랑은 다르게 어른스러운 면이 좋았어. 어린애처럼 활짝 웃을 때, 그게 너무 예뻐서, 그냥, 좋았어.”
“흥. 은하가 좀 예쁘긴 하지.”
박한수가 무심코 굳었던 표정을 풀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미소는 다시 괴롭게 일그러졌다. 박한수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난 은하랑 처음 만났을 땐 아무 생각 없었다? 비슷하게 마법을 쓰는 애가 있다는 게 기쁘긴 했지만.”
“…….”
“하지만…….”
박한수가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일들이 마치 사진 같은 장면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즐거운 추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그들을 포함한 다섯 명이 있었다.
“어른스러웠으니까, 그게 달라 보여서,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어. 정신을 차리면 계속 그 녀석을 보고 있었어. 가까이 오면 긴장되고, 두근대고, 웃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픈 거야. 다른 남자애랑 같이 있는 걸 보면 또 괜히 짜증 나고. 좋아한다는 걸 안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눈치채고 보니 좋아하고 있었다. 박한수는 그것을 어린 나이에 가슴으로 실감했다.
“은하는 예쁘니까.”
“맞아.”
“같이 있으면 편하니까.”
“그러게. 왜 그렇게 편하지?”
박한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엄청 긴장되더라.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뜨거워. 좋아한다는 거 알고 고백할까 고민한 적도 있는데, 거절하면 어쩌지 싶어서 못 하겠더라. 걔는, 우리를, 나를 친구로만 생각하는 데다, 또 다 같이 모여 노는 건 엄청 즐겁잖아.”
옆에 있으면 기쁘고, 다른 누군가와 친하게 있으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고백할 생각도 해 봤다. 단둘이 있으면 그 충동은 더 커졌다. 하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다섯이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했으니까.
“계속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했다’고……?”
“그래, 생각했어.”
강인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렇듯 박한수 역시 유독 유은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주 부딪쳤던 것 아닌가.
“나도 그때, 우리를 앞에서 지키는 은하를 보고 생각했다. 눈이 부시다고.”
“…….”
“난, 은하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알잖아, 걔 소심한 거. 그래서 난 내가 지켜 줘야 할 것 같았어. 너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래, 그랬다. 유은하는 어른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심약했다. 그래서 다들 유은하를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유은하가 심적으론 약해도 외부의 공격에 당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 실감하지는 못했다. 강해도, 재능이 있어도, 그게 설마 성인 마법사와 비견될 정도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에서 이런 표현을 봤어. ‘눈이 부신 뒷모습.’ 그게 바로 눈이 부신 뒷모습이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그걸 느낀 후로는 세상이 달라 보였다. 유은하가 무엇을 해도 빛나 보였다. 자신들을 지키던 뒷모습, 같은 학년의 아이들을 대피시킨 다음 학교에 남은 다른 아이들마저 모두 구하기 위해 마법을 썼을 때.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눈이 부시고, 또…….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거야.”
그래서 생각했다. ‘아, 이게 바로 동경이구나.’
“내가 은하를 동경한 건 그때부터야. 그 자리에 있던 녀석들도 모두 똑같겠지. 너도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눈부시다고 했겠지. 게다가 그 녀석은, 그냥 강한 게 아니잖아. 그 녀석은 우리를 지키려 했어. 그래서 앞으로 나선 거잖아. 그리고 걘 재능만 대단한 것도 아니야. 마법을 좋아하고, 노력하고, 항상 마법을 보며 즐거워하잖아. 그래서…….”
“응, 맞아. 은하는 그래.”
“그래, 그래서……마법을 쓰는 그 녀석이 눈부신 거잖아…….”
하지만 그들은 한편으론 자괴감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노력, 그리고 마법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가짐. 별것 없어 보이나 사실 가장 중요한 그 두 가지 때문에 유은하와 그들 사이에 그런 차이가 생겨났다.
그들도 마법을 좋아했다. 하지만 훈련을 좋아하진 않았다. 유은하는 달랐다. 마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만큼 훈련도 좋아했다. 힘들어도, 숨이 차올라도 매일매일 끊임없이 훈련했다. 하루라도 마법을 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을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 왔다.
그 차이는 지금에 와서는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유은하는 재능이 무색하리만치의 노력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아가고 있다.
“그 후에 은하가 한 노력을 되돌아봤어. 이유를 아는데도 차이가 많이 나는 게 분하더라고. 노력할 때마다, 마법 이야기를 하며 웃을 때마다, ‘아, 이래서 얘가 그렇게 강한 거구나’ 생각했는데.”
그런데……. 박한수의 목소리에 다시 울음이 섞였다.
“오늘 네 말을 듣고 깨달았어.”
“……뭘?”
“나는, 우리는 그 녀석을 동경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계속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고, 그, 짝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근데 난 지금……알아 버렸어.”
“……?”
“난 이제 그 녀석을 안 좋아해.”
“……뭐?”
“어느새 동경하는 마음이 좋아하는 마음보다 커져 있네.”
강인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박한수를 응시했다. 박한수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보다 훨씬 강해진 그 녀석을 따라잡으려 노력하다가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말아. 앞에 있는 그 녀석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그런데 그때 느끼는 건 설렘이 아냐. 요즘에는 예쁘거나 귀여운 게 아니라 멋있다는 생각부터 든다니까? 그래도 그 녀석을 볼 때마다 계속 두근거리니까, 난 아직도 내가 걜 좋아하는 줄…….”
박한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난 어느새 그 녀석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친구로서, 친한 친구로서, 동경하고 있었던 거야……!”
“……나쁜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박한수의 목소리가 흐려지며 이야기가 끊기고, 그것을 대신하듯 오열이 터져 나왔다. 강인하는 저도 모르게 박한수를 끌어안았다. 강인하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가만히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 잠깐 박한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닮았지만, 결국은 다른 성격을 지닌 타인이니까.
“그 녀석을 좋아할 때, 난 진짜 즐거웠어. 아프기도 했지만, 정말 기뻤단 말이야. 계속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마치, 배신한 것 같아서…….”
박한수가 강인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진 말에는 강인하도 진심으로 통감하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내 감정에만 빠져 있다가 결국, 그 녀석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그 녀석이라면 뭐든 괜찮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만 생각해서……!”
결국 동경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유은하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유은하를 걱정하면서도 유은하라면 뭐든지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강인하는 박한수를 꽉 끌어안았다. 꽉 다문 입술이 짓이겨지고 터져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강인하의 가슴 안을 맴돌았다.
그런 안이함 때문에 유은하는 지금 그런 상태다. 그들 중 아무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유은하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제대로 캐물어 볼 생각을 못 했다.
그들의 감정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
☆
유은하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갑자기 유은하의 방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풀렸다. 한미래와 김선아는 그 사실을 미리 걸어 둔 마법을 통해 바로 알아채고 다른 사람에게 전했다. 유은하의 방 앞에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벌컥 문을 열자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면에 들어 있던 유은하가 문 앞에 서서 동그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야!”
“은하야, 괜찮아?”
그들이 유은하를 보며 안도하거나 감격하는 사이 유은하는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유은하의 시선이 정준휘에게서 잠시 멎었다.
강인하가 울먹이며 유은하에게 달려들었다. 유은하는 당황하면서도 얌전히 포옹을 받는가 싶더니 갑자기 화들짝 놀라 강인하의 몸을 뿌리쳤다.
“……! 으, 은하야……?”
깨어나서까지 자신을 거부했다. 강인하는 이번엔 두려워졌다. 혹시 정말 내가 싫어졌나? 유은하는 불안한 눈으로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강인하와 다른 모두는 당황하던 것조차 잊고 유은하의 곁에 다가갔다.
“은하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괜찮은 거냐?”
“거의 한 달 만에 깨어났으니 어디가 아플 만도 하지. 뭐 먹을 거라도…….”
유은하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멎을 무렵 유은하가 겨우 고개를 들고 한미래를 돌아보았다.
“엄마……나 밥. 죽 해 줘……. 전복죽 먹고 싶어…….”
방금 보인 반응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범한 말에 그들은 또 한 번 당황했다. 한미래는 당황하다가도 밝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어? 그래! 알았어!”
“그리고…….”
유은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정준휘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한데……준휘 선생님만 빼고 모두 나가 주세요…….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 속에는 괴로움 같은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의지만은 단호했다.
“은하 너, 막 일어났으면서 갑자기 뭘…….”
“미안, 한수야. 나중에……말해 줄 수 있으면 말해 줄게. 인하한테도, 미안해. 내가 지금, 제어력에 문제가 있어서……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아, 알았어. 이번엔 반드시 말해 줘야 해. 예전에 약속했잖아. 중요한 건 꼭 말해 주기로. 알았지? 약속.”
강인하는 불안해하면서도 유은하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유은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유은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강인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도 잊고 걱정스럽게 유은하의 갈색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이가 이렇게 불안으로 떨고 있는 걸까.
“은하야, 조금 진정되면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줬으면 한다. 왜 폭주가 일어난 건지 알아봐야 하니까.”
“……네.”
정민아의 말에 유은하가 몸을 살짝 떨었다. 모두는 이 이상 채근해 봤자 유은하가 불안해질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걱정 어린 말 한마디씩을 남기고 유은하와 정준휘만 방 안에 남겨 둔 채 밖으로 나갔다. 강인하는 닫히는 문 너머로 계속 유은하를 바라보았다. 애처롭게 기울인 얼굴과,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끼익, 문이 닫혔다.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긴 시간을 꿈속에 있었다. 처음엔 어둠 속에 잠긴 채 쉬고 있었지만 곧 꿈속을 돌아다니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속 내 마력을 조율해 갔다. 그것을 마치고 나서는 지쳤던 심신을 다시 완전한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 평소와 다름없는 내 방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그동안 나를 지키며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 주던 마법을 전부 지워 버렸다. 마력이 매개체가 되었던 반지를 중심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자기 전 많이 지쳐 있었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꿈속의 일을 기억하고는 있으나 꿈속과 현실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던 나는 그만 경악했다.
『1월 7일 오후 1시 40분』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짜는 분명 12월 13일이었던가 그랬다. 근데 지금 며칠이라고?
“1월……?”
공허하게 퍼져 나간 목소리가 내게 현실감을 주었다.
‘자는 사이 해가 바뀌었다고?’
나는 표정을 흐리다 말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치겠네! 다들 날 얼마나 걱정했을까! 학교는? 시험은? 어떻게 됐지?
기겁해서 방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방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내 시야를 채웠다.
“은하야!”
“으, 은하야, 괜찮아?!”
엄마, 아빠, 선아 아줌마와 정민 아저씨, 친구들,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 스승님까지?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준휘 선생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잠들기 직전에 겪었던 상황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게 감정을 읽으라고 가르쳐 준 건 준휘 선생님이었지. 그리고 준휘 선생님은 감지 계열 마법사야. 분명 나처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을 가졌다고…….’
진지하게 생각을 이어 가는데 인하가 갑자기 내게 안겨 들었다.
“은하야!”
나는 당황하며 인하의 등에 손을 두르려 했다. 그래, 인하도 많이 걱정했겠지. 그런데 그 순간.
‘깨어나서 다행이다. 이제 날 거부하지 않아. 다행이다. 다행…….’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히 울렸다. 나는 동요하긴 했지만 일단 인하를 위로하려 했다. 따스한 감정이 가슴에 직접 전해졌다. 그러나……안타깝게도 내 감지력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식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기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생각이나 감정보다도 더 깊숙한 것, 바로 ‘기억’이었다.
“……! 아…….”
“으, 은하야……?”
나는 기겁해서 인하의 몸을 뿌리쳤다. 스스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인하가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마자 머릿속으로 여러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꼭 감으며 머리를 감쌌다.
“은하야, 왜 그러니? 어디 아파?”
“거의 한 달 만에 깨어났으니 어디가 아플 만도 하지. 뭐 먹을 거라도…….”
다행인 점은 그래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자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잠들어 있던 보람이 있어. 마력도 진정됐고…….’
그러나 능력 제어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타인과 접촉하면 이제 그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기억까지 읽으려 한다. 이런 것은 이제 참을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한 달이나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갔기 때문에 우선 먹을 것부터 부탁했다.
“엄마……나 밥. 죽 해 줘……. 전복죽 먹고 싶어…….”
“어? 그래! 알았어!”
엄마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기쁜 듯 입술을 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잠깐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준휘 선생님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안한데……준휘 선생님만 빼고 모두 나가 주세요…….”
뭐? 모두가 놀라거나 당황했지만 나는 괴로운 심정을 참으며 단호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의 시선이 특히 날카롭게 박혔다. 한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다가왔다.
“은하 너, 막 일어났으면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한수야, 미안. 나중에……말해 줄 수 있으면 말해 줄게. 인하한테도, 미안해. 내가 지금, 제어력에 문제가 있어서……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아, 알았어. 이번엔 반드시 말해 줘야 해. 예전에 약속했잖아. 중요한 건 꼭 말해 주기로. 알았지? 약속.”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던 인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인하가 내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사실 특수능력의 진화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겁부터 먹는 소심한 사람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면 움츠러들고 만다.
그 사실을 말하면 친구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친구들이 바로 나를 거부하지 않을 것임은 나도 안다. 그러나 처음엔 괜찮더라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이 마음이 읽히는 걸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나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걱정된다. 겁이 난다. 그나마 이 세계가 마법 세계라서 다행이었다.
내가 인하와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에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최소한 인하의 기억이 읽히지 않도록 마력을 극도로 예민하게 제어했다. 살짝 닿은 손가락을 바로 떨어뜨린 다음 모두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이윽고 방 안에는 나와 준휘 선생님만이 남았다.
소란스러웠던 방 안이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머릿속에 직접 속삭여 오는 마음의 목소리를 나는 애써 무시했다. 미간을 검지로 누르며 폭주하는 감지능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목소리가 점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아졌다. 그런 나를 보며 준휘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미간을 누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마력은 이미 진정되어 있어. 그런데 너는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이상한 점은 그게 아니라 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혼자서 폭주 상태를 진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렇게 컨트롤이 뛰어난 네가 왜 갑자기 폭주 상태에…….”
“선생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많이 고민됐다. 무섭기도 했다.
“선생님은 분명 감지계 마법사였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준휘 선생님은 의아해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래.”
“그걸로 마법을 하나 개발했을 정도고요. 원한다면 마음을 읽을 수도 있었죠?”
“그래. 다만 마법이 아니라 특수능력이다.”
“특수능력……?”
“그래.”
나는 순간 안심했다. 밝아진 내 표정을 보고 준휘 선생님이 더 의아함을 표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선생님, 마력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고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마력 자체는 몸 안에서 제대로 통제되고 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마법과 능력을 다양하게 써 왔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데 멋대로 힘을 발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준휘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잠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기억하세요?”
“뭘……아니, 그보다도 뭐가 제어가 안 된다는 거지?”
“저한테 처음 환각마법을 가르쳐 주셨을 때, 기억하세요? 환각은 사람의 정신에 밀접한 마법이니까, 사람의 감정에 민감해야 하고, 때론 기억과 생각마저 읽을 필요가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
“저는 선생님이 말했던 대로 감지능력을 갈고닦았어요. 처음엔 마력의 색이 보였죠. 이어서 마력의 흐름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어요. 지금은, 마력의 흐름이 그 세기에 따라서 음영조차 달라 보여요. 마법을 복사해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을 파악할 수 있어요. 그다음으로는 마력의 근원이 보였어요. 몸 안쪽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은 마력의 뭉치가요. 사람마다 조금씩 형태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모양은 다들 비슷했어요.”
나는 지금까지 이 눈으로 보아 왔던 것을 담담히 되짚었다. 의아해하던 준휘 선생님은 내 말이 이어질수록 놀라워했다.
“그다음에 보게 된 것은 감정의 흐름이었어요. 처음에는 마력의 흔들림으로 사람이 동요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됐어요. 점차 감정의 색이 보이게 됐어요. 손이 닿으면 그 감정이 어렴풋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감정은 사람마다 색이 다르고, 또 색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하지만 전 본능적으로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대충 알겠더라고요. 사람의 주위에 마치 뿌린 물감이나 스프레이, 구름이나 안개처럼 흐트러져 있는…….”
그때 준휘 선생님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런데 어느 날부터 노이즈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전 처음에, 제가 마력의 소리를 듣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소곤거리는 듯한 노이즈는 점점 커지더니 명확한 목소리가 되었어요. 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준휘 선생님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전 이제 사람의 마음을 읽어요.”
당장 손이나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딘가로 꽁꽁 숨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부담을 못 이기고 마력이 불안정해지기 전에 상담했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음을 읽는다는 죄책감에 혼자만의 비밀로 삼았으나, 알고 보니 준휘 선생님도 마음을 읽는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않나.
나는 고개를 들며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지금까지의 담담함은, 다 거짓이었다. 당연했다.
“선생님,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마음을 읽어요. 그런데 제어가 안 돼요. 듣고 싶지 않은데 자꾸 들려요. 마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더 잘 들려요.”
“은하야…….”
“알아요. 이 세계에 마음을 읽는 마법은 드물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이잖아요! 전, 전, 마법을 쓰지 않아도 사람 마음을 읽어요. 이번에, 접촉하면 기억까지 읽히는 걸 알았어요. 전, 저는……!”
“은하야, 진정해. 다시 아까처럼 천천히 말해 봐!”
나는 움찔움찔 떨리고 있는 눈을 짓누르듯 감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후우, 후……, 짧게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은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마음을 읽었을 때……친구들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줬는데,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 주는데……그런데 난 그 마음을 읽고 있다니, 자꾸 죄악감이 들어서……. 그런데 감지능력은 점점 강해져만 가고, 마음도 점점 더 선명하게만 들리고, 수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느껴지는 감정에 마음도 머리도 혼란스럽고……. 자꾸 초조해지니까 점점 몸 안에서 커져 가며 자리 잡던 마력도 불안해졌어요. 그래서, 전, 그냥 푹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어요. 결계를 친 채, 잠만 잘 생각으로요. 설마 한 달 가까이 자게 될 줄은 몰랐고요…….”
불안과 함께 가슴이 짓눌리며 위가 쓰려 왔다.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마음도……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지금은 최대한 듣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아니, 예전에도 그랬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도 소리가 작아지는 걸로 그쳐서…….”
그때 양 뺨에 온기가 닿았다. 얼굴이 강제로 휙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바짝 다가온 준휘 선생님의 눈이 안경 렌즈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해. 가끔 있는 일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말을 내뱉는 입술이 떨려왔다.
“가끔……있는 일이라고요……?”
“그래. 마력이 성장 중인 어린아이가 제 마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다. 마법이 아니라 재능의 성장으로 생긴 특수능력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것도 가끔 있는 일이지. 특히 정신적인 특수능력은 제어가 까다로워.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속상해할 필요는 없어.”
“하, 하지만……이런 건 불쾌하잖아요? 친구들도, 사실을 알면 많이 불편해할 거예요. 그게 마법이 아니라 특수능력이라는 걸 알면…….”
“그 녀석들이 그럴 것 같냐.”
나는 흠칫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알아요! 알지만……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문득 생겨나는 의심이란 게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너희는 서로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을 것 같던데 뭐. 특히 한수랑 인하는 네 말이라면 껌뻑 죽을 것 같고.”
“화, 확실히 한수랑 인하는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말하다 말고 기분이 이상해져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준휘 선생님이 킥킥 웃었다. 콩, 준휘 선생님의 이마가 내 이마에 살짝 부딪혔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네 능력을 제어하는 것에만 집중해. 일일이 스트레스받아서 어쩌려고. 정신 계열 특수능력은 제어하기가 까다로우니까 꾸준히 노력할 수밖에 없어. 네가 원해서 제어가 안 되는 게 아니잖아. 능력 제어하기 전에 네가 화병 나서 쓰러지겠다. 아니, 이미 쓰러졌나.”
준휘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내가 조금 진정했다고 생각했는지 준휘 선생님이 내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놨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행동에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민아 선생님이랑 준휘 선생님……확실히 남매네요.”
“뭐? 갑자기 왜?”
“민아 선생님도 전에 저한테 이렇게 해 준 적이 있었어요. 이런 점도 닮았구나 싶어서…….”
“뭐……아이들한테는 딱 먹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휘 선생님은 의외였는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귓가로 흘러드는 속마음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스승님한테도 준휘 선생님한테도 정말 항상 신세만 지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울듯이 웃었다. 머리에 다정한 손길이 내려왔다. 뚝,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날 이후 감지능력을 제어하기 위한 훈련이 시작됐다. 내가 마음을 읽는다는 사실은 결국 민 선생님과 부모님들, 스승님에게 알려졌다.
사실을 들은 엄마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걱정했고, 아빠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의아해했으며, 선아 아줌마는 화를 냈다.
“그런 거면 당장 말을 했어야지! 어디서 미련하게 꼬박꼬박 등교하고 있어! 특수능력 때문에 잘못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상황에서 무방비하게 아무 사람이나 만나고 있었다니……그러다가 이상한 거라도 접하면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는데!”
“네…….”
“하여간……. 은하 너 당분간 애들이랑 만나지 마! 네 엄마 아빠랑도 좀 거리를 두고 지내고. 당분간은 마음을 읽지 못하는 나랑, 너에게 감지능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그 선생님이랑……또 네 개인 선생님인 민아 씨랑만 만나야 돼! 알았지?”
“네…….”
스승님한테도 엄청나게 혼났다. 스승님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내 볼을 있는 대로 잡아당겼다. 내가 비명을 질러도 한동안 손가락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 후엔 있는 대로 호통을 쳤다.
“넌 내가 네 스승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게냐? 그 사실을 스승인 나한테 숨겨서 어쩌겠단 거야!”
“으…….”
“하여간 소심해서는……. 내일부터 준휘랑 번갈아서 수업을 할 테니 여기로 꼬박꼬박 오너라. 차라리 겨울 방학 동안 여기서 지내도 좋고.”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죠.”
“하긴, 너희 부모님도 걱정이 많겠지. 어린것이 속만 썩이기는…….”
“…….”
진짜 이번만큼은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