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85
교실에서 나오니 긴장이 풀렸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으아……진짜 엄청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어.”
“그랬어? 잘만 서 있는 것 같던데.”
그거야 애써 웃은 거다. 후배 앞에서 긴장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잖아.
긴장감을 털어 내며 푹 한숨을 쉬니 누군가의 손이 내 등을 두드렸다. 민희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성후 오빠였다.
“어…….”
“잘했다.”
가볍게 나를 격려한 성후 오빠는 이어서 민희와 다른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모두 잘했어.”
그러자 아이들의 굳었던 표정이 펴지며 웃음으로 변했다. 처음부터 긴장을 거의 하지 않던 민희는 예외다.
나는 기뻐하며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성후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나에게 해 줬던 말이 생각났다.
‘앞에 나서면, 웃어. 그럼 문제없어.’
은희 언니가 성후 오빠의 어떤 점에 반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무심한 얼굴과는 달리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차가웠기에 저렇게 아이를 잘 다룰 줄은 몰랐다. 제현 오빠가 어디가 부족해서 차였던 건지 많이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성후 오빠는 오빠만의 매력이 있었다. 뭣보다 성후 오빠는 청초함과 단정함에서 오는 섹시함이 있다!
‘풋. 섹시하대, 섹시.’
나는 킥킥 웃으며 옆에 있던 민희의 손을 잡았다.
“가자.”
“그래!”
새삼스럽지만, 성후 오빠는 참 괜찮은 선생님이다.
##18. 노력파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대현 초등학교에는 ‘편입생’이 있다.
대현 학교는 손꼽히는 명문 학교라 들어오기 위해서는 뛰어난 재능 혹은 실력이 요구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선 최소한 마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7, 8세는 재능이 개화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마법사의 재능이 가장 많이 개화하는 시기는 보통 10세~20세 사이다.
그래서 대현 초등학교는 편입생을 받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받지만 초등학교에 비해선 적은 숫자다. 초등학교에 편입생으로 들어오는 학생은 보통 위험 지역에서 발견되거나 일찍 재능을 개화한 탓에 유명해져 소문이 퍼진 어린 마법사다.
아르델 F 아델만은 그중 전자였다.
아르델은 뒷세계 어느 조직에 의해 암살 부대 소속 전투 마법사로 키워졌다. 대현은 거의 인형이나 다름없었던 아르델의 정신에 걸린 세뇌를 풀고 그녀를 보호했다.
아르델은 5학년 때 대현 초등학교에 편입되었다. 내리쬐는 햇살, 소란스럽게 떠들고 웃는 아이들, 조곤조곤한 선생님의 목소리. 어쩜 이렇게 평화로울까. 머릿속에 박힌 폭력성 때문에 어느 정도 금제가 걸리긴 했지만, 아르델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이게 평범한 일상이란 거구나.
그토록 평화로움에도 불구하고 대현의 사람들은 다들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다. 전장에서 구른 경험 때문인지 아르델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구분해 내는 것에 무척 민감했다. 아르델이 속한 5학년 교사들의 실력은 특히 대단했다. 그녀를 데려온 정민아도 무척 대단한 실력자였는데. 한 학교에 어떻게 이렇게 강자가 많을 수 있담. 그런데…….
아르델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르델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잘생긴 세 명의 선생님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자이의 친구들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로 보였다.
“쟨 대체 뭐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델은 비록 ‘그’ 사건 다음 해인 5학년 때 편입했지만, 학기 초부터 주목이란 주목은 다 받고 있던 대상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이름은 유은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은인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가장 강한 학생으로 유은하를 지목한다. 그 인기는 초등학교 내에서는 하늘을 찔러, 팬클럽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델이 보기에 그건 헛소리에 불과했다.
‘초등학교에서 제일 강하다고? 오히려 저 옆에 있는 강인하가 훨씬 강할걸?’
아르델도 유은하의 마법 실력이 제법 괜찮다는 건 인정하고 있다. 방어는 아르델이 무심코 감탄할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그것 외엔 별거 아니다. 유은하와 항상 같이 다니는 강인하나 주민희가 훨씬 대단하다. 무엇보다 유은하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조금 주눅 든 느긋하고 평화로운 공기뿐이었다.
아르델은 가만히 유은하를 주시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흑갈색 머리는 제법 고왔다. 수줍게 웃는 얼굴도 제법 예쁘장하다. 하지만 미인이란 단어를 붙이기에는 아쉬웠다. 곁에 서 있는 강인하와 박한수를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지 않아?”
아르델이 혼자 중얼거리던 말을 들었는지 박새롬이 아르델에게 말을 걸었다. 박새롬은 아르델과 달리 1학년 때부터 대현 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도 은하를 은인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어.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한 것 같아. 그 사건이 일어나고 1년이나 지났거든. 그런데 왜 아직도 저렇게 떠받드는 건지 모르겠어. 쟤는 우리가 도망칠 수 있게 조금 도와줬을 뿐이야. 적을 쓰러뜨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번엔 반대쪽에서 아르델과 같은 편입생인 김한성이 나섰다.
“난 쟤가 진짜 강한지도 모르겠어. 대련할 때도 항상 싸우는 걸 피하잖아. 그리고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엄청 재수 없더라. 애들이 은하 님 은하 님 하면서 존댓말 쓰니까 좋아서 실실 웃고. 난 쟤가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도 없다고. 대체 왜 저렇게 따르냐? 혹시 속고 있는 거 아냐?”
아르델은 속으로 동의했다. 그래, 자기 마법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재수 없게 여왕처럼 다른 학생들을 거느릴 건 뭔가. 아르델의 감으로 유은하는 분명 자신보다 아래였다. 방어는 잘하지만 공격은 어떨까? 할 줄은 아는 걸까?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다른 학생들은 대체 그런 아이의 어디가 좋다고 따르는 걸까?
아르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편입생, 김세주도 끼어들었다.
“맞아. 저거 여우 아냐, 여우? 잘생긴 사람한테만 붙는 거 정말 재수 없어. 어차피 우리랑 붙으면 꼴사납게 질걸?”
아르델은 유난 떤다고 말했던 박새롬과는 별로 이야기해 본 적 없지만 같은 편입생인 김한성, 김세주와는 친했다. 유은하를 바라보던 아르델의 눈빛이 심술궂게 변했다.
‘제일 짜증 나는 건 그 정도 재능 가지고 저렇게 사랑받는다는 거야.’
아르델의 머릿속으로 처참한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아르델은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참혹할 정도로 강해지기를 강요당했다. 그런데 저 아이는 그보다 부족한 재능으로 노력조차 없이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다. 배알이 꼴렸다. 자신은 재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던 세계에서 별짓을 다 했는데.
“너희 혹시 은하랑 겨뤄 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나도. 그래서 더 짜증 나는 거야.”
아르델은 특수한 처지인지라 학생과의 대련이 금지되어 있다. 다른 세 사람도 우연히 유은하와 겨뤄 본 적이 없다. 유은하라면 어차피 평소처럼 막기만 할 테지만.
“사실 그렇게 강하진 않을걸? 나는 그나마 ‘그 사건’ 때 본 게 있긴 한데……. 하아, 비밀 준수 교칙 땜에 자세히 말 못 하겠지만, 사용한 건 결계마법뿐이었거든? 공격 하나 막은 걸로 엄청 힘겨워했고.”
아르델은 그 이야기를 통해 머릿속에서 유은하의 이미지를 대충 완성시켰다. ‘재능만 믿고 노력 따윈 안 하고 전투도 잘 못하지만 방어 실력은 괜찮은 여자아이’.
아르델의 옆에서 투덜거리고 있던 김세주가 어떤 것을 떠올리고 씩 웃었다.
“조금 있으면 수련회잖아. 이 학교 수련회는 엄청 힘들다더라. 기대되네. 평소에 재능만 믿고 뻐기던 애는 금방 나가떨어질 테니까.”
“그럼 난 자유 시간 때 대련이나 신청해 볼까? 망신이라도 주게.”
“좋다, 그거.”
아르델 역시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맘 편하게 사랑만 받는 유은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마 평생 친해질 수 없겠지.
아르델은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나는 자연물을 매개로 한 특수속성마법을 먼저 배우기로 했다. 성후 오빠의 수업을 들은 뒤로 인터넷과 도서관을 뒤져 가며 공부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본래 특수속성마법은 매우 희귀한 마법이다. 사용하는 사람이 적은 만큼 자료를 찾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히든 스킬이다.
그래도 열심히 검색해서 알려진 마법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러나 연습하려고 말을 꺼낸 순간 선아 아줌마가 인상을 확 굳히며 강하게 반대했다.
“뭐? 특수속성마법? 별마법이랑 달마법? 안 돼, 그만둬, 위험해. 적어도 지금은 안 돼. 별마법과 달마법은 특수속성마법이자 속성융합마법이야. 그것도 초고급 속성 융합이라고. 봉인마법과 정화마법은 진짜 속성을 벗어났다는 느낌이니까, 차라리 이걸 배워. 적어도 이건 위험하진 않아.”
그러며 선아 아줌마는 내 훈련 노선을 반강제로 변경했다. 내 성향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역시 자연 계열 특수속성마법을 먼저 배우고 싶다. 그러나 선아 아줌마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자연 계열 특수속성마법은 대다수가 공격마법이니까, 배우겠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넌 공격 수단이 부족하잖니. 복사한 마법이 있긴 하지만 본래 네 마법이 아닌 만큼 공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고, 또 그 마법들은 위력이 엄청나게 강하거든. 위력이 강한 만큼 무척 어렵고 위험해. 마력 조절을 조금만 잘못해도 큰일이 날 거야. 어린 네가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워. 정말 배우고 싶다면 속성 융합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토대를 만드는 게 좋아.”
“토대요?”
“그래. 자연 계열 특수속성마법은 초고급 속성 융합이라고 말했잖니.”
“으음…….”
확실히 다른 훈련에 집중하느라 한동안 속성마법 훈련을 제대로 안 했다. 몇 년 전에는 속성 융합을 내 공격마법으로 삼겠다고 열을 냈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어떤 것이 생각나 흘끗 선아 아줌마를 올려다보았다. 선아 아줌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속성 융합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두도 내지 말라고 했었다. 그럼 이제는 해 볼 만하다는 걸까? 갑자기 가슴속에서 호기심과 호승심이 마구 샘솟았다.
훈련 스케줄을 다시 짜기로 했다. 먼저 속성 융합을 연습하면서 내가 아는 특수속성마법 중 기초를(기초마법이 없을 경우는 패스) 연습해 본다. 그러면서 마음에 든 속성을 먼저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나는 떠오른 것을 수첩에 적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사실 나는 이미 주로 삼고 싶은 특수속성마법을 정해 둔 상태였다. ‘별마법’과 ‘우주마법’이다.
아직 마법에 성공한 적이 없어 잘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끌렸다. 왜냐면 내가 별과 우주를 좋아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정한 거지만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무속성과 공간, 시간마법은 어렵고 위험해 보이니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나는 수첩에 적힌 글을 보며 후후 웃었다.
“좋았어.”
이렇게 시작하면 되겠지? 킥킥 웃고 있는데 수첩을 불시에 빼앗겼다.
“앗.”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선아 아줌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수첩 다음 장에 무언가를 적고서 내게 보여 줬다.
“자, 배우기 어렵고 위험한 순서야.”
나는 수첩을 돌려받은 후 선아 아줌마가 적어 준 글을 확인했다.
『달<대기<태양<<<별<<<<<<우주
무속성<<<<<공간<<<<<<<<<시간
봉인마법, 정화마법-논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종이 여백이 많은데도 문단을 나눈 걸 보면 계열이 다른 건가?
“결과적으로 너한테 상성이 맞는 걸로 배우겠지만, 우주마법이랑 공간마법, 시간마법은 최소한 C랭크 마법사가 되기 전엔 엄두도 내지 마.”
나는 흠칫하며 동요했다. 나, 난 별마법이랑 우주마법부터 배워 볼 생각이었는데……. 그리고 사실 제 마법 중 하나가 시공간마법인데 말이죠……. 슬슬 결계마법의 진실을 밝히긴 해야겠다.
“무속성은……으음, 타고난 사람한텐 쉽지. 안 타고난 사람한텐 기적을 바라야 할 정도로 어렵고. 무속성마법도 두 종류가 있는데, 무‘를’ 만드는가, 혹은 무‘로’ 만드는가. 후자면 난이도는 태양마법 정도지만…….”
“무슨 차이예요?”
“전자는……설명하기 난해한데. 일단 후자는, 말하자면 존재하는 물건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 버리는 마법이야. 그리고 전자는……없어지는 ‘영역’을 만든다고 해야 할까? 무(無)라는 것 자체를 실현한다고나 할까?”
으음? 후자는 알아듣겠지만 전자는 전혀 모르겠다. 그래도 대충 머릿속으로 후자와 다른 이미지를 그려 내는 데는 성공했다. 영역이라 하니 광역마법밖에 생각이 안 난다. 블랙홀이나 중력 공이 주변을 흔적도 없이 집어삼키는 거다.
“전자는 어둠과 빛의 속성 융합이야. 우주마법과 비슷할 정도로 어려워. 공간마법이랑 시간마법은……제일 높은 난이도는 S랭크 이상이지. 매우 어려워. 그러니 아직은 텔레포트나 워프, 아공간을 제외하고는 엄두도 내지 마.”
……어쩔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성 융합을 연습할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해. 그렇다고 아무나 옆에 세워 두고 있으면 된단 소리는 아니다? 꼭 나나 미래, 그이, 세 사람 중 한 명을 동반하고 할 것. 하려면 자연계 4대 속성부터 시작해. 물, 불, 바람, 땅. 알았지?”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또 할 때는 반드시 훈련실에서 해야 하고, 내구도를 최대 레벨로 올리고 시작하렴.”
“네.”
신중에 신중을 기한 후에야 나는 겨우 특수속성마법을 위한 속성 융합 훈련을 허락받았다.
나는 선아 아줌마와 헤어진 후 다시 한 번 인터넷으로 별마법이나 달마법 등 자연 계열 특수속성마법을 찾아보았다. 엄청 어려워서 지금 실력으론 엄두도 못 내겠더라. 평균 B랭크. 선아 아줌마가 어렵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그나마 달마법과 대기마법 중에 D랭크 마법이 하나 있었다. 나는 D랭크 달마법을 통해 앞으로 배워 갈 마법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운 좋게도 마법진이 딸려 있었다.
그래도 실망이다. 별마법이랑 우주마법은 꼭 배워 보고 싶었는데. 단순히 별과 우주가 좋다는 이유라고는 해도 나는 그 마법을 내 주 공격마법으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니 어쩔 수 있나. 나중으로 미뤄야지.
“음……마법진을 그려서 발동한 다음 마력 패턴을 외워서 직접 써 보자.”
마력 패턴으로 마법을 복사하는 방법은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발견한 마법진을 문자마법으로 복사해 종이에 찍어 냈다. 방 안에서 사용하면 위험할 테니 인하네 집 지하실로 텔레포트 했다.
“먼저 내구도를 최대로 맞추고…….”
나는 선아 아줌마가 했던 충고를 떠올리며 기계를 조작했다.
“달마법이니까, 달이 있는 배경이 좋겠지?”
배경으론 달밤의 들판을 선택했다. 훈련실 안에 들어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종이에 복사된 마법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속으로 타이밍을 잰 후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법진의 법칙을 따라 마력이 움직인다. 새하얀 빛이 눈앞에 퍼져 갔다.
쿵!
곧 마법진 위로 빛의 기둥이 내리꽂혔다. 달빛답게 눈부시다기보다는 은은했다. 나는 기둥의 내면을 샅샅이 훑었다. 마력의 움직임, 마력이 띠는 속성, 보이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기억했다.
“흠…….”
나는 흥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마력의 움직임만큼은 마치 눈으로 장면을 촬영해 둔 것처럼 속도도, 움직임도, 패턴도, 타이밍도,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아마 특수능력의 부가능력이 아닐까 한다.
‘……좋아. 기억했다.’
나는 고민하며 내 손을 보았다. 방금 그 마법, 여러 속성이 융합되어 있었다. 저게 ‘달의 마력’이라는 건가…….
나는 팔짱을 끼며 가짜 달을 올려다보았다.
‘특수속성. 달엔 달의 마력이, 태양엔 태양의 마력이, 별엔 별의 마력이 있다고 하지.’
나는 여태까지 딱히 달의 마력 같은 걸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모든 것에는 마력이 스며들어 있다. 대지도, 나무도, 하늘도, 하물며 콘크리트로 된 벽도 마찬가지다. 또한 그건 저마다 다른 성질을 띠고 있다. 속성에 ‘달’과 ‘별’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다. 마법과 실체는 분명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방금 본 마력을 속으로 몇 번 되짚은 후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한번 해 볼까?”
D랭크라고 하더니 D랭크 중에서도 최상위 마법이다. 그래도 분명 다른 것보다는 해 볼 만하다.
필요한 마력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속성 융합이 문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묘한 비율로 속성을 섞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속성을 비율로 계산해서 융합하려고 하면 큰일 난다. 100% 실패할 거다.
계산보다는 감이다. 내가 본 ‘달의 마력’ 본연의 느낌을 되살리는 거다.
“비춰라.”
손을 뻗은 채 시야를 열었다. 세계가 선명해졌다. 나는 감지능력을 백분 활용하여 팔 주위에 흐르는 마력을 아까 본 달의 마력과 최대한 비슷하게 조종했다.
“떨어져라.”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려웠다. 나는 마력 운용을 돕기 위해 주문을 읊었다.
“월섬(月閃)!”
눈앞에 빛줄기가 채워졌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마력을 조율했다. 아니, 이게 아니야. 좀 더 신비롭게, 좀 더 아름답게……!
상상력과 감, 재능이 부족한 경험을 채워 나간다. 빛이 불완전하게 아래위로 뻗어지며 내 앞에서 폭발했다.
콰광!
“윽…….”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팔을 붙잡았다. 한순간 제어에서 벗어난 마력이 몸을 바늘처럼 가늘고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갔다.
고통은 잠시 후 사라졌다. 나는 마법이 펼쳐졌던 곳을 주의 깊게 살폈다. 방금 눈앞으로 퍼졌던 빛줄기를 떠올렸다. 그건 너무나도……불완전했다.
“실패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한번 눈으로 복사했다고 생각한 마법을 실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금 분했다. 게다가 내가 원한 건 마법이 성공하는 것뿐이었는데 땅바닥이 크게 파여 있다.
선아 아줌마가 단단히 경고했던 이유가 있구나. 내구도를 최대로 높여 놔서 다행이다. 가상 공간 안이니 실제 지하실 바닥은 패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한 번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을 팔, 정확히는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에 축소해서 모은 후, 속성을 바꿨다. 여러 속성을 융합한다기보다는 아까 보았던 달의 마력을 흉내 낸다는 느낌으로…….
‘윽!’
팔이 찌릿찌릿 아파 왔다. 맴도는 마력도 ‘달’이라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마력 운용이나 제어보단 달의 마력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려나? 이따 달을 보러 가 봐야겠다.”
나는 마력을 닫고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아직 달이 떠 있을 시간은 아니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 대신 태양이라도 관찰하러 가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훈련실 문이 열리며 인하가 나타났다.
“은하야, 언제 왔어? 뭐 해?”
나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특수속성마법을 연습해 보려고.”
습관대로 술술 털어놓다가 흠칫했다.
“아차, 이거 선아 아줌마한텐 비밀이야. 위험하니까 혼자서 연습하지 말라고 했거든. 이번만, 진짜 이번만 시험 삼아 해 본 거니까 비밀로 해 줘.”
“엄마가 위험하다고 한 거면 정말로 위험한 거니까 혼자서 하면 안 돼.”
“이젠 안 그럴게.”
손을 모으며 부탁하니 인하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잘될 것 같아?”
“아니, 어려워. 선아 아줌마 말대로 속성 융합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아.”
단순히 속성을 융합하는 것만 해도 뛰어난 재능이 필요하다. 보통은 속성마법으로 그걸 하느니 차라리 마법을 하나 새로 만들고 만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 무작정 마법을 만들면 고유마법이 얼마나 많아질지.
“아니면……봉인마법이나 정화마법처럼 위험하지 않은 마법부터 하든가.”
위험하지 않을 뿐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어렵겠지만. 봉인마법과 정화마법 역시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봤는데, 유전되거나 혹은 대대로 넘겨받는 전승마법, 각인마법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전승마법과 각인마법은 계승자들한테만 전해지는 비밀 기술이다. 제대로 된 자료를 찾으려면 눈이 빠질 정도로 고생해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진마법이 몇 개 알려져 있더라. 스펠마법은 없다고 봐도 좋다. 마법사가 고유 마력만으로 쓸 수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다. 진마법마저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퍼뜩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특수속성마법도 결국에는 ‘속성’마법이다. 내가 달의 속성을 조합하려고 했듯이, 다른 특수속성마법도 일정한 마법으로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속성’으로 조합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마법이 된다! 속성마법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건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그래? 근데 은하야, 엄마랑 미래 아줌마가 슬슬 점심시간이라면서 너희 집 거실에…….”
“미안, 인하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청난 게 떠올랐어! 나 방에 돌아갈게!”
“어? 은하야, 잠깐…….”
“이따 봐!”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순식간에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염력마법으로 예전에 사 두었던 새 수첩을 꺼냈다. 표지에 문자마법을 사용해 커다랗게 『특수속성마법』이라고 적었다.
첫 장을 펼치고 목표를 적었다.
『자체 속성 변화 마스터!』
아래에는 설명을 적었다.
『특수속성마법을 스펠이나 마법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 변환을 통해 속성마법으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
『-그러기 위해서는 속성 융합부터 연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수첩에 쓰인 글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며 환희했다. 이런 감동은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그 아래로 계속 글을 써 가며 자문자답했다. 별, 달, 태양 등의 마력은 실물을 눈으로 보고 대충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봉인과 정화는 어떨까? 봉인마법은 어쩐지 마력이 무척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정화는……혹시 치료랑 비슷한 거 아냐? 그럼 곤란한데. 어쨌거나 이 두 마법도 특수속성마법이니 분명 ‘속성마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하며 문자로 연습하자. 흙탕물에 정화를 쓰고 작은 결정석에 ‘봉인’을 써 보는 거다.
다만 속성으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걸 형체화하거나 기술로 바꿀 경험이 부족하다. 책을 많이 읽고 인터넷으로 많은 자료를 찾자. 스펠마법도 진마법도 전부 동원해서 몸에 익히자.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이 특수속성마법을 스펠마법이나 진마법으로 새로이 기술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가능하더라도 분명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다. 나는 입가를 가리며 환하게 웃었다.
“은하야! 아래로 내려와서 점심 먹어! 인하도 왔어!”
“아, 네!”
나는 엄마의 부름에 대충 대답하며 수첩 페이지를 넘겼다. 맨 위에 검은 네임 펜으로 『속성융합마법』이라고 적고 글 주위에 반짝이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후 녹색 그러데이션 네임 펜으로 별표를 쳤다. 그 아래 줄에 『1+1(2 속성 융합)』이라 적었다. 그 밑에 또 『자연의 4대 속성』이라고 적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느 속성부터 시작할까? 물+바람이려나? 이 두 속성이 4대 속성 중에선 나랑 가장 상성이 잘 맞으니까. 다음에는 물+땅……아니, 잠깐.
‘물과 땅은 상성이 별로 안 좋잖아. 땅은 물을 흡수하니까.’
나무는 뿌리로 땅을 파헤치고 땅은 물을 흡수한다. 물은 불을 꺼트리고 불은 쇠를 녹인다. 마지막으로 쇠는 나무를 벤다.
나는 고민하다가 물+땅 옆에 보류라고 적었다. 또한 상극인 물+불은 제외했고, 바람+불, 바람+땅, 불+땅, 땅+바람을 차례로 적었다. 그 옆에는 4대 속성의 고급 속성 변화를…….
“적당히 하고 나오지 못해?”
“꺅!”
아래에서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 못한 엄마가 결국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 집중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나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엄마한테 끌려 나온 드문 유형의 딸이 되었다.
아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
나는 작정하고 속성마법 강화 훈련에 돌입했다. 평소 하던 훈련에 속성마법 강화 훈련까지 더하려니 매우 빡세겠더라. 그래서 다른 훈련을 조금씩 줄이긴 했는데, 어찌 바꾸건 빡세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역시 하고 싶으니까 우선순위를 바꾸고 평소보다 좀 더 보람찬 나날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잠깐 놀고먹으며 쉬면 되지 뭐.
이럴 때는 정말 가상훈련 시리즈를 모아 둔 것과 결계마법을 만든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가상 세계와 현실의 시간이 다른 거야 당연한 거고, 사실은 결계마법으로도 그게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게 결계는 ‘내 세계’니까. 이제 나는 결계 안의 시간과 바깥 시간을 어긋나게 만들 수 있다. 바깥의 1분을 내 결계 안에서 최대 10분으로 늘릴 수 있다. 훈련을 하기에 정말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이다. 다만 아직은 바깥 시간으로 1시간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몸이 결계의 시간을 따라 쑥쑥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계로 시간을 어긋나게 구축해도 몸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원래 시간을 따른다.
또한 속성 융합 훈련은 선아 아줌마가 말한 대로 혼자서 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훈련이었기 때문에, 나는 스승님과 선아 아줌마한테 훈련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스승님과는 하루에 세 시간, 선아 아줌마랑은 하루에 두 시간이다. 안타깝지만 두 사람 다 바쁘기 때문에 매일 훈련을 하지는 못한다.
“속성 융합이라. 또 어려운 것을 선택했구나.”
“결심했어요.”
“……?”
“저, 속성융합마법을 제 주 공격마법으로 삼을 거예요. 그러니까, 필살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