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86
훈련하면서 느낀 건데 속성 융합은 참 재미있다.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껴야 하며, 1mm의 오차로도 엄청난 차이가 생겨난다. 그러니 한 번 연습하는 데만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한순간도 몸에서 힘을 빼선 안 된다. 그 ‘집중한다’는 행위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나한테 딱 맞는다. 나에겐 즐거운 마법이 최고니까.
나는 가장 상성이 맞는 속성부터 융합을 연습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물과 바람부터 시작했다. 복사한 마법이 따로 있더라도 속성마법만 사용해 섞었다.
물과 바람은 본래 잘 맞는 속성이기 때문에 섞는 것만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비율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더라. 절묘하게 조합되었을 때는 파괴력이 폭발적으로 증폭하는데, 한동안 그 갑작스러운 증폭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시간쯤 훈련하자 익숙해졌다.
처음 시작한 속성 융합을 속성과 속성의 어울림이 어색하지 않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훈련했다. 그래도 나는 원래부터 마법을 섞어 쓰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좀 빨리 익숙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속성마법을 쓸 때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다음 속성 융합 연습으로 넘어가기 전에 운이 없게도 학교 행사가 찾아와 버렸다. 바로 ‘수련회’였다.
“좀 아쉽다. 다른 반끼리는 같은 방을 못 쓴다니.”
“그러게.”
수련회 숙소는 4인 1실이다. 어쩌면 평소 별로 친하지 않았던 아이와 함께 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민희가 있으니 괜찮겠지. 누구랑 조를 짜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 한 아이가 말을 걸었다.
“은하야, 민희야, 있잖아.”
지금 반 아이들은 친한 사람이랑 조를 짜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얘는 우리 조에 들어와야 한다느니, 나는 누구랑 하고 싶다느니, 하여간 시끄러웠다.
고개를 돌린 나는 무심코 감탄했다.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 학기에 들어온 외국인 편입생이었다. 끄트머리만 곱슬거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 어찌 보면 전형적인 조합이다. 아르델 아델만은 해맑게 웃으며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사실 나, 같이 방을 쓸 정도로 친한 애가 없어. 그래서 그런데 혹시 너희랑 같이 조를 짜면 안 될까?”
하긴, 올해 편입했으니까. 게다가 아델만은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리곤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괜찮아.”
어차피 룸메이트도 부족하니까. 그러자 그 애가 활짝 웃더니 우리 곁에서 멀어져 제 무리로 돌아갔다. 어라, 생각보다 여자애들이랑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데 민희가 아델만을 흘끔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 쟤 별로야.”
“뭐?”
나는 조금 놀랐다. 반을 오가며 많은 아이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민희가 저런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갑자기 왜? 설마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는 건 아닐 테고.”
“설마. 그냥 촉이 안 좋아. 방금 웃는 얼굴도 가짜 같아서 불편했어.”
가짜라. 나는 문득 그 애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 가짜 미소를 보인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잖아.
“맞다. 네 특수능력으로 좀 보면 안 돼?”
“나 그거 훈련할 때 외엔 잘 안 써. 실례잖아.”
“그래두~. 색만 잠깐 보는 건 괜찮지 않아?”
“가끔 보긴 하는데, 그래도 미안하니까 웬만하면 안 보려고 자제하고 있어.”
“그래애…….”
민희는 잠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 애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웃으며 다른 룸메이트를 찾으러 갔다. 민희가 자기랑 친한 애 한 명을 끌어들여, 우리 조는 완성되었다.
한창 탄력을 받아 열심히 집중하고 있던 속성 융합 훈련을 당분간 못 하게 되어 수련회에 조금 불만을 가지기도 했지만, 반면 기대도 되었다. 대현의 수련회는 말 그대로 마법을 훈련하기 위한 행사이다. 우리는 마력이 넘쳐나는 곳에 가서 빡세게 훈련하다 돌아와야 한다. 기간은 4박 5일이다.
과연 수련회에서는 어떤 훈련을 하게 될까? 지금까지 나는 몇 가지 규칙을 제외하고는 맘 내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연습해 왔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그것도 단체로 한다니, 훈련 내용이 굉장히 궁금했다.
“은하야, 5학년이랑 6학년은 보통 같은 수련원으로 간대.”
“그럼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를 만날 수 있겠네?”
“같이 훈련하는 거 오랜만이다. 기대돼!”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실력을 잘 숨기고 있잖아. 메인마법만 밝히지 않았어? 그러니까 조심하자.”
“아, 맞다~.”
수업을 마친 후 우리 반으로 달려온 인하가 같은 방을 쓸 수 없는 것을 매우 슬퍼했다. 나는 심심하면 방으로 놀러 오라고 위로했다. 나와 민희도 시간이 나면 놀러 갈 생각이다.
그날 저녁 나는 수련회에 가지고 갈 옷가지나 물건을 꼼꼼하게 챙겼다. 도중에 스승님께 연락이 와서 화상 통화를 했다.
[내일부터 수련회라면서?]“네. 그래서 당분간은 속성마법 훈련도 못 할 것 같아요. 간 김에 훈련 스케줄이나 열심히 따라갈래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고유마법 훈련도 할까? 비밀 준수 교칙이 있지만 수련회니까 또 모르지. 평소에는 수준별 수업 때만 했지만…….
‘그래도 환각마법 훈련을 할 수 없겠지만. 아직 숨기고 싶기도 하고.’
환각마법은 이제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체화도 꽤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실체화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 그야 반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셈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 정말 대단한 사람은 한번 만든 게 아예 진짜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던데, 거기까지 가려면 최소 B랭크는 되어야 할 거다. 언젠가 나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구조를 보지 않고 형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완전 사기잖아!
“하지만 속성마법 훈련을 못 하게 된 게 아쉬워요. 한창 탄력받았었는데.”
[그럼 계속 훈련하면 되지.]“네? 하지만 아직 혼자서는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수련회 때는 혼자서 훈련할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없긴 왜 없어. 다음은 물이랑 번개로 하려무나. 가까운 속성은 아니지만 연계하기 좋은 속성이니 융합하기 편할 거다. 처음부터 현실에서 하지는 말고. 네가 이번에 가는 곳은 가상 시스템이 딸린 개별 훈련실이 많단다. 그렇군, 기왕이니 좀 찾기 힘든 훈련실을 하나 알려 줄까?]“정말요?!”
나는 짐을 챙기던 것도 까맣게 잊고서 집중해서 스승님의 말을 들었다. 네, 네, 그렇게 구석에요? 지도를 주의 깊게 보면 알 거란 말이죠? 나는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전언 철회. 수련회가 마냥 기대되기 시작했다.
대현의 수련회는 첫날부터 본격적이었다.
하늘길과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 이동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수련원까지는 채 1시간도 안 걸렸다. 옛날 S랭크 마법사들이 벌인 전투의 여파로 만들어진 고돌섬이 바로 학교의 목적지였다.
수련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무렵. 도착한 학생들은 배정된 방에 짐을 두고 한 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가진 뒤 훈련을 위해 밖으로 뛰어나왔다. 30분가량의 명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내법 명상 후 1시간 30분 안에 완주해야 하는 체력 훈련이 이어졌다.
“헉……헉…….”
마법사에게 체력은 무척 중요하다. 마력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육체가 튼튼해야 한다. 마력이 강해짐에 따라 자연히 육체가 튼튼해지긴 하지만,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선 그걸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지병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마법사에게 체력 훈련은 필수다. 때문에 마법 학교에서 체육 수업은 마법 수업만큼이나 중요했다. 대현은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체육 수업이 있고, 그 시간에는 충실하게 운동을 시킨다.
수련회 첫날 체력 훈련 내용은 섬을 일주하는 것이다. 다만 혼자만의 힘으로 일주하는 것은 아니다. 고돌섬은 작은 섬이나 고작 초등학생이 1시간 반 만에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지는 않다. 그러므로 부분부분 마법이나 도구를 이용한다.
아르델은 5학년 학생들 중에서 체력이 무척 뛰어나다. 전장에서만 몇 년을 굴렀다.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망신이다.
‘이건 예상외인데.’
아르델은 복잡한 눈으로 자신의 앞을 달리는 유은하를 보았다. 유은하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있었다.
평소 대련을 보며 전투 센스도 무술 실력도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체력은 제법이다. 지금도 제법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는데 그다지 헐떡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르델은 그 옆을 달리는 주민희를 향해서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유은하와 달리 주민희는 강하다는 느낌이 왔었다. 지켜본바 무술 실력도 상당하다. 달리는 자세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주민희 역시 예상보다 더 체력이 강했다. 이렇게나 달렸는데 지치기는커녕 유은하와 즐겁게 떠들며 달리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미 줄 같은 건 없잖아. 걔들 기다렸다 같이 갈까?”
“글쎄. 한수랑 인하라면 분명 전부 제치고 올걸? 현호는 다른 애들이랑 놀면서 오다가 좀 늦을 수도 있겠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먼저 가 있자.”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는 못 따라잡겠지?”
“두 사람은 6학년이라 우리 학년 애들이 다 출발한 다음에 출발했을 테니까.”
“으음, 애들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기다릴지 말지.”
“아까 선생님이 핸드폰은 쓰지 말라고 했었잖아.”
“에헷.”
그래도 역시 가장 의외인 건 유은하다. 웃고 있는 유은하를 보며 아르델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출발한 순서는 5학년 1, 2, 3반, 6학년 1, 2, 3반 순이다. 지금까지 선두를 지키며 달리고 있는 것은 유은하, 주민희, 아르델, 이렇게 셋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와 같이 유은하를 헐뜯었던 아이들은 이미 뒤처진 지 오래라니, 역시 기분이 별로였다.
“아르델, 우리는 좀 더 빨리 가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할래?”
그때 주민희가 아르델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그걸 왜 물어? 설마 내가 못 따라갈까 봐? 아르델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싱긋 웃었다.
“걱정 마. 따라갈 수 있는 만큼 따라갈 테니까.”
“그래?”
경로는 학생증 내비게이션에 표시된다. 학생들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가파른 절벽이 아이들을 맞았다. 까마득히 아래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길은 어디지? 세 아이는 어리둥절해 주변을 살폈다. 심지어 내비게이션에는 절벽 앞 일직선으로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정면을 자세히 보니 저 멀리 그들의 맞은편에 또 하나 절벽이 있었다. 마침 내비게이션이 지시했다.
[건너편의 절벽으로 넘어가십시오.]“흠, 날아서 가야겠네.”
“뭐? 윽, 싫은데……. 너무 높잖아…….”
유은하가 우는 소리를 했다. 아르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담력이 저렇게 약해서야…….
“은하 넌 참 겁이 많다니까. 하면 잘하면서. 그런 눈으로 봐도 이거 도와주기 금지니까 난 안 도와줄 거지롱. 자, 빨리 가자.”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그래도 벌벌 떨며 주저앉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그건 조금 마음에 드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유은하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찰나 아르델은 유은하가 있던 자리에서 희미한 검은 선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선도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아르델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렀다.
‘어라?’
“어딜 봐? 가자.”
“어? 은하는…….”
“저기서 손 흔들고 있잖아. 봐, 보이지?”
주민희가 아득히 앞에 있는 절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쭉 앞을 보던 아르델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언제 간 것인지 유은하는 옅게 깔린 안개 너머에 있는 절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르델은 주민희가 그 사실을 바로 눈치챈 것보다 유은하가 전조 하나 없이 저 멀리로 이동한 것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뭐, 뭐야. 마법? 무슨 마법을 썼길래 저기까지…….’
공간마법인가. 하지만 저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를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는 또래는 무척 드물다. 아르델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다가 아마 공간마법과 상성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을 달리했다.
“빨리 가자.”
“……응.”
주민희와 아르델은 빠르게 절벽 맞은편으로 날아갔다. 착지한 다음 길게 뻗은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유은하가 내려가며 신음했다.
“윽, 높다, 높아. 여긴 마법 써서 이동하면 안 되겠지……?”
“안 됩니당. 그렇게 무서우면 뛰자! 내가 손잡아 줄게.”
“으, 응.”
아르델은 손을 잡고 뛰는 주민희와 유은하를 보며 남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소중한 친구, 둘도 없는 우정, 자신은 가져 본 적 없는 관계가 부럽고 질투 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는 유은하의 심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은하는 어느 정도 재능 있고 실력 있는 마법사다. 조금만 더 당당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다른 학생들은 저런 여자애를 믿고 따르는 거지?
‘짜증 나.’
강하면 강자다워야 할 것 아닌가. 그랬다면 이렇게 짜증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능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게 싫었다. 저렇게 마음이 약한데 재능만으로 강해졌고, 사랑받고 있다.
‘재능이 있어도 이렇게까지 괴로울 수도 있는데.’
어째서 나만 그토록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지? 저 아이는 저렇게 행복하잖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겠지. 마음속의 어둠이 술렁거린다. 아르델은 북받치는 감정을 꼭 눌러 참았다.
그 후로도 그들은 호수를 넘거나, 절벽을 타고 올라가거나, 하늘 자전거를 타거나, 아래로 뛰어내리는 등 달리고 또 달려 골에 도착했다. 마법의 여파로 만들어진 섬답게 지형이 뒤죽박죽이었다.
“결국 다른 애들은 못 따라왔네.”
1, 2, 3등은 주민희, 유은하, 아르델이 차례로 차지했다. 아르델과 주민희는 그토록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멀쩡했다. 반면 유은하는 가쁘게 숨을 골랐다.
“곧 오겠지.”
골에는 8명의 선생님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선생님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얏호! 선생님! 저 일등이에요!”
주민희가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유민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주민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오, 1등으로 출발한 만큼은 했구나.”
“당연하죠!”
“은하 너 때문에 늦을 줄 알았다.”
“아 씨, 선생님!”
유은하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유민의 장난스러운 손길을 뿌리쳤다. 아르델은 한순간 놀랐다. 항상 조용하고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 주는 아이라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유은하의 투정을 유민은 귀엽다는 얼굴로 받아 줬다. 유은하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른 땀을 소매로 닦았다.
“선생님, 이다음엔…….”
“민 쌤! 쉬어도 되죠? 아, 아니다. 우리 담임은 성후 오빠니까, 오빠! 우리 1등이니까 다른 애들 올 동안 쉬어도 되지?”
“민희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괜찮아. 어차피 여기엔 저 애랑 선생님들밖에 없잖아.”
“그래라.”
“와! 은하야, 이리 와!”
아르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정리했다. 주민희에게 붙잡혀 선생님 앞으로 끌려간 유은하가 유민의 손에 이끌려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유은하는 빨개진 얼굴로 버둥거렸다.
‘짜증 나.’
이상하게 섭섭했다. 서툴게 질투하며 덩그러니 서 있던 아르델을 한성후가 불렀다.
“아르델, 이리로 오렴.”
“넷? 아, 네!”
항상 무뚝뚝한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아르델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성후가 무뚝뚝한 얼굴로 아르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1등이구나. 잘했다.”
화끈. 아르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3등인데. 일부러 두 사람보다 늦게 골인했는데.’
따지고 보면 공동 1등이긴 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1등 할 걸 그랬나.’
아르델은 어린 나이부터 피폐한 삶을 겪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심 없는 다정함에 약했다.
‘이런 사람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니, 좀 아깝다…….’
아르델은 붉어진 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며 유은하를 흘끔 노려보았다. 질투도 났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쟤가 뭐라고 잘난 사람들이 자꾸 모여드는 건지…….
“이제 내려놔요. 전 바닥에 앉을 거예요.”
“바닥에? 흙 있는데?”
“괜찮아요.”
버둥거리던 유은하는 결국 유민의 무릎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양반다리로 앉은 채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감았다. 뭐 하는 거지?
‘저 자세로 자려는 건가? 바위에라도 기댈 것이지 불편하게 자네.’
“아, 진짜. 은하 얘는…….”
주민희가 투덜거리는 이유를 아르델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분 정도가 지나자 다른 아이들도 속속 도착했다. 사실 세 사람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주민희, 유은하, 아르델 세 사람은 보통 1시간 30분은 걸리는 길을 출발한 지 약 40분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해 냈던 것이다.
세 사람 다음으로 온 것이 강인하, 박한수, 김현호였고, 그다음은 6학년 몇 명이 골인했다. 6학년 선두는 청인호와 한유정이었다. 그다음부터는 6학년이랑 5학년이 함께 섞여 우르르 도착했다.
12시가 되자 선생님들은 뒤처진 아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훈련 장소로 이동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아이는 추가 훈련을 받아야 하며, 수련원의 선생 중 한 명이 전부 데리고 돌아올 예정이다.
5학년과 6학년은 그 시점에서 갈라졌다. 5학년 학생들은 머지않아 커다란 호수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호수 위에 정렬했다. 5학년 담임 세 명이 맨 앞에 서서 훈련 내용을 알렸다.
“지금부터 회피 훈련을 할 거다. 호수 위에 선 채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하면 된다.”
“우리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거야. 쓰는 무기는 오로지 이 쇼크 건. 맞아도 다치진 않을 테지만 꽤 아프니까 잘 피해야 할걸?”
유민이 짓궂게 웃자 아이들이 야유를 토해 냈다.
“계측기로 공격에 당한 횟수를 셀 거다. 마법으로 방어해도 10포인트 이상 데미지를 받으면 적중으로 친다. 가장 많은 포인트가 쌓인 10명은 벌칙을 받을 테니 조심하도록! 점심시간 후에 이 섬 한 번 더 돌게 해 주지.”
“아, 하지만 꼴찌가 70포인트 이하면 용서해 줄게~.”
번갈아 아이들에게 훈련 내용을 설명한 세 선생은 각각 쇼크 건을 들었다. 아이들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호수 속으로 들어가서 피해도 되나요?”
“돼! 하지만 10초 이상 있으면 아웃. 계측기로 잴 거다?”
“친구랑 협력하는 건요?”
“하다가 들키면 혼난다~!”
2반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의 미소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곧 아이들이 거리를 벌리며 흩어졌다.
아르델은 유은하 무리 주변에 자리를 잡고 섰다. 아르델만이 아니라 평소 유은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은 다들 유은하의 근처에 서서 유은하를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은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건 비단 아르델과 험담을 했던 그 몇 명만이 아니다. 모든 학생이 한마음 한뜻으로 한 학생을 동경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팬클럽에 밀려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는 학생은 못해도 두 자릿수다.
아르델은 집중하며 앞을 보았다. 호수 위에서 공격을 피하는 것은 땅에서 공격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다. 물 위에 서는 것조차 못 하는 덜떨어진 마법사는 여기에 없지만, 문제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마법이든 마력 응용이든 간에 유지하는 건 힘이 든다. 심지어 공격까지 피해야 한다. 아르델은 문득 유은하의 발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굉장히……안정되어 있네.’
다른 아이들의 발밑에서 일어나는 파문이 불안정하거나 일그러져 있는 것에 비해 유은하가 물을 밟을 때 일어나는 파문은 매우 깨끗하고 예뻤다. 게다가 철없이 꼭 붙어 있는 게 아닐까 했던 다섯 명은 적당히 틈을 벌려 떨어져 있었다. 호수는 100여 명의 아이들을 넉넉히 수용할 정도로 컸다.
“자, 그럼 시작한다!”
아르델이 흠칫 유은하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제 정말로 집중해야 한다.
아르델은 이번 훈련만큼은 매우 자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델은 이제껏 목숨이 걸린 전쟁터에서 살아왔다.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면 아르델은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아르델은 또래 아이들 중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마법사 사회 전체에서 보면 중하위권에나 겨우 속하는 마법사였다. 아직 마력을 담는 그릇이 작은 아이의 한계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기술을 익혔다. 그러니 자신 있다.
공격이 날아왔다. 처음엔 세 개였던 탄환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불었다. 세 사람이서 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르델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하거나 마법으로 막았다.
‘쉽네.’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만만하게 유은하를 돌아보았다.
“…….”
아르델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또다시 예상외였다. 유은하는 날아오는 탄환 무리를 어렵지 않게 족족 피했다. 어느 순간 유은하가 흠칫하며 양손을 올리더니 자신의 앞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쾅! 갑자기 방어막 앞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뭐, 뭐야?!”
“아, 말 안 했는데 이 탄환은 서로 부딪치면 폭발한다! 그 주변에 있는 탄환은 죄다 연쇄 폭발할 거고. 위력이 제법 있으니까 알아서들 조심하셔!”
“으아악!”
“그런 건 빨리 말해 주세요!”
‘뭐지, 방금?’
아르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말하기 전에 눈치챈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놀라 방어막을 칠 이유가 없다. 덕분에 유은하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멍하니 있던 아르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쟨 마법을 피하고 방어하는 건 굉장히 잘했어. 그러니까 그걸로, 아마 어떻게든…….’
전투에 약한 건 마법사로서 치명적이다. 하지만 공격과 방어 중 하나라도 제대로 익힌다면 살아남을 수는 있다. 아르델의 생각이 또 하나 어긋났다. 알고 보니 유은하는 살아남을 수는 있는 마법사였다.
아르델은 공격을 피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중간하게 집중해서 피하려다 호수에 빠지는 아이도 많았고, 그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공격에 맞아 물 아래로 가라앉는 아이도 수두룩했다.
아르델은 평소 같이 다니는 편입생 친구들의 실력을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조차 지금은 허둥대고 있다.
아르델은 다시 유은하를 보았다. 유은하는 공격을 한 번도 맞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을 피하고 방어하는데 발밑의 파문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쟤가 마력을 굉장히 잘 제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아르델은 억지로 납득하려고 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탄환은 호숫가에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하지만 유은하의 주위만은 오롯이 고요했다. 아르델은 유은하한테만 신경을 쓰다가 결국 몇 발 맞고 말았다. 급소는 한 군데도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불쾌했다.
점심시간 이후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다만 훈련 클리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섬을 도는 추가 훈련을 해야 했다.
이번 수련회를 계기로 유은하를 파헤쳐 보겠다고 결심했던 아르델은 점심을 먹은 후 바로 유은하를 찾았다. 그러나 유은하는 식당에도, 방에도, 운동장이나 매점에도 없었다.
아르델은 잠시 주민희에게 유은하에 대해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걔는 감이 너무 날카로워.’
유은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훈련 시간이 되어서였다. 오후의 첫 훈련은 무술 연습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마력과 육체 기술만으로 대련한다. 마음대로 팀을 짜도 되었기 때문에 유은하의 상대는 주민희였다.
‘평범하네.’
대련하다 말고 다른 사람을 구경하는 아이는 많았다. 아르델은 주민희와 유은하의 대련을 보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주민희는 대단했다. 유연한 움직임으로 몇 번이나 유은하를 제압했다. 하지만 유은하는 몹시도 평범했다. 보통 사람보다 빠르지도, 힘이 세지도, 기술이 대단하지도 않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이 힘이다. 어쨌든 ‘천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려던 아르델은 어떤 장면을 보고 잠시 멈췄다. 주민희가 유은하를 향해 주먹을 뻗은 순간 유은하가 주민희의 팔꿈치 아래를 주먹으로 올려 치더니 목과 다리를 동시에 쳐 주민희를 넘어트리려 했다. 당연히 주민희는 넘어지기 전에 빠져나왔다. 그게 그나마 볼만했던 장면이었다. 그 이후는 다시 평범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훈련은 서바이벌 경주였다. 정해진 코스를 달리며 함정이나 공격을 잘 피하고 방어한다. 공격을 하는 것은 기계병이라고 한다.
아르델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출발점으로 이동하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아르델과 아르델의 친구들의 관점에서 유은하는 재능과 운만 믿고 잘난 척하는 여자애였다. 아니, 어쩌면 잘난 척은 아닐지도 모른다. 유은하는 소심하고 얌전한 성격이니까. 하지만 추켜세워지거나 사랑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마는 그런 여자애다.
아르델이 유은하의 틈을 노리듯 다른 아이들도 유은하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마법 재능만으로 강해진 것치고는 체력도 좋았고, 공격을 잘 피했고, 방어력도 뛰어났다. 그저 운으로만 강해진 것치고는 이상했다. 아르델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것을 조금씩 느꼈다.
‘평화로운 삶밖에 모르는 운 좋은 어린애 주제에. 강자다운 카리스마 따윈 하나도 없고,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웃고.’
서바이벌 팀은 제비뽑기로 나뉘었다. 팀 구성은 3인 1조, 아르델은 우연히도 유은하와 짝이 되었다. 나머지 한 명은 이영민이라는, 평범하게 유은하를 좋아하는 남자아이였다. 아르델이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잘 부탁해.”
“어, 나도. 야, 은하야, 잘 부탁해.”
“두 사람 다 잘 부탁해.”
아르델은 태연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앞을 보았다. 그러나 이영민은 유은하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을 걸었다.
“네가 있으니까 우리 팀은 문제없겠다. 혹시 기록 세우는 거 아냐?”
“어? 글쎄……. 나 팀전은 별로 해 본 적 없는데.”
“걱정 마. 원래 강한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다 해결돼!”
아르델은 이영민을 고까운 눈으로 흘겼다.
‘팀전이랑 개인전은 전혀 다르다고. 그것도 몰라?’
게다가 그에게서는 강자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학년에서도 중하위쯤? 1등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아르델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범하게 웃었다.
‘발목 잡힐 것 같네.’
코스는 숙소 뒷산 기슭에서 동굴을 넘어 산꼭대기 종이 있는 곳까지였다. 걷든 뛰든 날든 여러 장애물을 넘어 골에 도착하면 된다. 이영민이 조잘조잘 떠들었다.
“우리 뛸까? 나 1등 먹고 싶어.”
“글쎄……. 공격도 오고 함정도 있는데 처음부터 뛰는 건 별로 안 좋지 않을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연히 빨리 가는 게 최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