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88
“꺄아악!”
파편은 당연히 유정 언니에게도 날아갔다. 유정 언니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환각이었다. 얼음을 없애기는 했지만 저렇게 화려하게 깨지도록 만든 적은 없다. 그런 위험한 짓을 내가 왜 하겠어.
눈을 꽉 감고 있던 유정 언니는 아무 고통도 없자 고개를 들었다.
“어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둘러보던 유정 언니는 이내 방금 그것이 환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대련은 무릎을 꿇으면 패배다. 유정 언니가 분한 표정으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 번 더! 이건 너무 허무하잖아!”
맞는 말이다. 기왕 결심하고 한 대련인데 결과가 너무 허무했다. 나는 두 번째 대련을 받아들였다. 그때 이미 시선이 몰리고 있었음은 꿈에도 모르고서.
바닥에서 솟아난 얼음을 환각 석영으로 깨트리는가 하면, 날아오는 공격을 환각 검으로 다 잘라 버리기도 하고, 남은 얼음을 문자마법으로 되돌려주기도 했다. 범위가 넓은 환각을 사용했을 땐 유정 언니도 눈치채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그 안에 섞인 마력 탄을 눈치채지 못하고 또 당했다.
결국……내 압승이었다. 내리 다섯 번을 진 유정 언니는 허탈한 얼굴로 무릎 꿇었다.
“그래도 내가 인호보다는 센데.”
“그래?”
“그래! 인호와 대련할 땐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
어라? 마력은 인호 오빠가 더 많은데? 마력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미심쩍었다. 특히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점이. 왜냐면……인호 오빠는 유정 언니를 좋아하니까. 우리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유정 언니뿐이다.
‘아무리 좋아해도 한 번도 못 이겼다니, 좋아하는 사람은 공격 못 하는 타입인가?’
갑자기 인호 오빠와 대련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인호 오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던 나는 흠칫했다.
‘헉!’
대련에 빠져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보니 주위 아이들이 대련은 하지 않고 멍한 얼굴로 나와 유정 언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하자!”
“유정 언니, 있잖아…….”
유정 언니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나한테 한 번 더 하자며 재촉했다. 내 표정이 상당히 이상했던지 유정 언니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나는 슬쩍 손가락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유정 언니가 창백하게 굳어 다시 정면에 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였잖아……. 오늘은 그냥, 여기서……그만둘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만큼은 아니지만 유정 언니도 소심한 면이 있다. 아니, 평범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주눅이 들리라. 우리는 한마음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대로 걸어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봤자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시선이 좇아오는 성가신 상황으로 발전할 뿐이다.
‘인호 오빠는……찾았다!’
나는 유정 언니의 손을 붙잡고 인호 오빠의 근처로 휙 텔레포트 했다. 인호 오빠가 갑자기 옆에 나타난 우리를 보고는 조금 놀랐다.
“갑자기 웬 텔레포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도망쳐 나왔어.”
인호 오빠가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키득 웃었다.
“굉장했지. 너희를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쳤어. 소리도 컸으니 주목받는 게 당연하지.”
“에휴.”
대련에 빠져 주위를 보지 못했던 내 실책이다. 결계를 치고 할 걸 그랬다.
…….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유정아, 아까 조금 위험해 보이던데 다치진 않았지? 은하가 잘 조절했을 것 같지만…….”
“그럼! 전혀 안 다쳤어. 그리고 은하 마법은 대부분 환각이잖아? 화려하기만 했지 하나도 안 아파.”
“다행이다.”
인호 오빠가 진심으로 안도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와, 빛나고 있잖아. 얼마나 빠졌으면 저럴까. 이제 그냥 사귀면 되겠네.
유정 언니가 조금만 더 눈치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유정 언니의 매력이다.
“은하는 다친 데 없어? 유정이는 너처럼 제어가 능숙하지 않으니까 걱정되네.”
“괜찮아.”
“봤으면 알잖아. 한 방도 못 먹이고 졌다고. 상처 날 일이 어디 있다고.”
“역시 은하는 굉장하네.”
“맞아. 우리 후배 정말 굉장해.”
난 여태까지 또래랑 대련하다가 상처 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정말로 생채기 하나 난 적 없다. 전부 결계 덕분이다. 나는 다치는 것도, 아픈 것도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위험할 것 같으면 무조건 몸 위에 결계를 걸치고 시작한다. 방어에 재능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참, 시선을 모으는 대련이라면 하나 더 있어. 한수랑 인하야.”
“응? 두 사람이 왜?”
“엄청난 기세로 때려 부수고 있거든. 저기 봐.”
“으응?”
나는 당황하며 인호 오빠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화려하게 싸우고 있는 한수와 인하가 있었다. 빛으로 나무를 부수고 이글이글 태우는 인하, 수많은 나뭇가지를 자라게 하여 인하의 공격을 막고 반대쪽에서 고유마법+속성마법으로 인하를 공격해 들어가는 한수.
쾅쾅! 파지지직! 두 사람이 마법을 쓸 때마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눈이 부셨다. 정말이네, 엄청 화려하다. 나는 그 대련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호각이기도 힘들겠다고.
☆
아르델은 어안이 벙벙한 채 그 광경을 보았다. 아르델만이 아니다. 평소 유은하를 고깝게 생각하던 학생들도, 좋아했던 학생들도, 관심 없던 학생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대련할 때 보여 줬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분위기부터 천지차이였다.
챙! 쾅!
학교에서 보는 유은하는 언제나 얌전하고 순해서, 아르델은 그녀를 심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마법 실력은 나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전투를 할 만한 기술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자’의 느낌이 난다.
다른 또래 아이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주위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동자,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정도로 차가운 무표정.
무엇보다 마력의 기세가 달랐다. 두 사람의 마력이 부딪칠 때마다 폭풍이 일어났다.
유은하가 모든 공격을 흘려보내는데도 그랬다.
“말도 안 돼…….”
아르델은 그 순간 위압감을 느꼈다. 마치 성인 마법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압도적인 느낌이다.
유은하를 상대하는 한유정의 실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6학년에 저렇게 강한 마법사가 있었던가? 다른 6학년생들도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아르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괴감이 들었다. 아르델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둠의 조직 손에 키워졌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지금의 실력을 손에 넣기까지 끔찍한 고문과 부단한 훈련을 겪어야 했다. 아르델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고통과 울분뿐이었다. 울고 소리치고 피를 토했던 나날.
그런데……아르델이 그렇게 해서 겨우 얻은 강함을 지금 저 평화밖에 모르는 여자애가 갖고 있다.
타고난 재능이 대단하다는 이유만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적도 없는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저 자리에 서 있다.
아르델은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내 지난 시간은 무엇이었냐고 신에게라도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야, 너. 진짜 뭐냐고.’
평소 소심한 분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마력이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왜, 내 앞에 너 같은 게 나타난 건데.’
그날 하루 아르델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본능적으로 피하긴 했으나 훈련 내용이 뭐였는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다만 시선을 돌리면 항상 유은하가 눈에 들어왔고, 멀리서 웃고 있는 유은하를 볼 때마다 미칠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가. 아이는 아르델이 원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재능, 다정한 가족, 절친한 친구, 그녀를 사랑해 주는 아주 많은 사람들, 평화로운 삶.
아르델은 갑자기 정민아가 보고 싶어졌다. 아르델이 속해 있던 조직을 무너뜨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아르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람. 아르델과 마찬가지로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있던 어린 조직원들을 부모의 품에 돌려보내 주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아르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민아는 아르델의 구원자이지 부모가 아니다. 가족이 아니다. 선생님은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르델은 이틀째 훈련이 끝난 후 밥도 먹지 않고 아무도 없는 복도 소파에 앉아 고민했다. 기나긴 고민 끝에 아르델은 주먹을 쥐고 결심했다.
‘그럼 내가 더 강해지면 되잖아.’
그래, 그러면 된다.
‘그런 녀석한테 질까 봐? 행복에 늘어져 있는 그런 녀석한테……. 적어도 마법으로는 질 수 없어. 이기고 말 거야.’
아르델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걘 아무 노력도 안 하잖아.’
결심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평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실감 났다. 아르델은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다시 훈련하자. 이번엔 예전처럼 강제로,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의지로 노력하자.
오늘은 수련회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하느라 많이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할 마음이 생겨난 지금 하고 싶었다.
‘이 수련원엔 훈련실이 많이 있었어.’
아르델은 기억을 되살려 수련원 전체 지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도에 적힌 안내 사항을 보니 다행히도 훈련실은 제한 없이 개방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디로 갈까?’
아르델은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며 지도를 꼼꼼히 살피던 아르델은 건물 외곽에 있는 훈련실 하나를 발견했다. 구석진 장소에 있어서 그만 지나칠 뻔했다.
‘사람 눈에 안 띌 것 같네. 좋아. 여기로 하자.’
아르델은 즐거워하며 발을 옮겼다. 아르델이 점찍은 훈련실은 숙소와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심지어 같은 건물도 아니었다.
아르델은 기억을 되짚으며 훈련실을 찾았다. 처음엔 약간 헤맸지만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었다.
훈련실 안으로 들어서던 아르델은 걸음을 멈췄다. 훈련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덜컹덜컹, 휙, 슥, 형체가 없는 소리다. 그것은 때론 숨소리 같았고, 때로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혹시 누가 있나?’
이런 시간에? 아르델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섬에 있는 사람은 대현 초등학교 5, 6학년생과 담임 선생님, 그리고 수련원을 지키고 있는 선생님뿐이다.
아르델은 반가운 기분에 창틀에 손을 짚어 창문 너머로 훈련실 안을 엿보았다. 창문이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까치발을 해야 했다. 다행히 훈련실 안을 훔쳐볼 수 있었다. 그러나 훈련실 안의 풍경을 확인한 아르델은 그만 입을 벌린 채 멍해지고 말았다.
훈련실 안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흑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여자아이였다. 훈련을 시작한 지 제법 됐는지 여자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그럴 수밖에. 어제오늘 계속해서 아르델이 쫓아다니던 여자애였으니까.
바로 유은하였다.
‘왜……저 애가 여기에?’
사실 이유는 뻔했다. 훈련실을 찾은 이유가 훈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어째서, 왜? 오늘 하루 종일 지쳐 쓰러질 정도로 훈련을 했다. 아마 지금 숙소에 있는 학생 중 누구도 이 이상 훈련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오직 아르델과 유은하를 제외하고는.
가슴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재능만으로 그 자리에 있는 축복받은 여자애. 아르델은 줄곧 유은하를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생각도 이번 수련회를 계기로 많이 바뀐 거였다. 처음엔 그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운 좋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재수 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했으니까.
독기도 없고, 무표정일 땐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 보이나 심약한 여자아이다. 그런 아이가, 그렇게 복 많고 어려움 없이 자라 온 아이가, 저렇게……남몰래 노력하고 있었다고?
‘이상해.’
아르델은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울분을 참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상해. 뭐야 그게. 이상하잖아.’
아르델은 멍하니 창문 너머에서 움직이는 유은하를 바라보았다. 헉헉거리다가 씩 웃더니 다시 마법을 쏜다. 유은하의 마법은 분명 문자마법과 결계마법일 텐데 정면에 솟아오르는 마법은 어째서인지 바람속성마법, 그것도 굉장한 위력이다. 벽 너머에서 펼쳐지는 것이라 마력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유은하의 눈은 활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인다…….’
아르델은 힘없이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그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아르델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을 흘끔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이불 위로 쓰러졌다. 시간만이 뿌옇게 흘러갔다.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밤이 깊었을 무렵에야 유은하가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10시 정각이었다. 주민희는 이번에도 유은하를 타박했다. 하여간 넌 정말! 이렇게 늦게까지! 아르델은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어제도 이렇게 훈련하다 돌아왔던 걸까. 주민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친구가 당연히 훈련하고 왔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여태까지 노력해 왔던 걸까.
실체를 까발리고 실컷 욕해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단한 점만 극명해지고 있다. 아르델은 우울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아르델은 다음 날부터 유은하를 전보다 더 유심히 관찰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딜 가는가 싶었는데 산책로에서 조깅을 한다. 30분 정도 달린 후에는 명상을 하며 마력을 모은다. 명상이 다 끝나니 딱 기상 시간이었다. 방으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다음 막 일어난 주민희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그 후에는 수련회 스케줄에 따른다. 유은하는 느슨해 보여도 충실하게 스케줄을 따랐고, 쉬는 시간 틈틈이 개별 훈련을 하러 갔다. 여태까지 대체 어떤 훈련을 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아이는 지쳐 쓰러질 정도의 훈련을 유은하는 헉헉대면서도 소화해 냈다.
유은하는 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훈련실에 개별 훈련을 하러 갔다. 아르델은 고민하다 훈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유은하가 당황하며 아르델을 돌아보았다. 아르델은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해?”
“어, 그……마법 연습을 조금…….”
유은하는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더니 말을 돌렸다.
“너는? 아, 혹시 훈련하러 왔어?”
“응. 그런데 네가 있더라고.”
아르델은 유은하에게 좀 더 다가갔다. 눈빛이나 표정을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
“열심이네. 안 힘들어?”
“으, 응? 그런가?”
유은하는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배시시 웃었다. 아르델은 움찔했다. 처음 안 것이지만 유은하는 무표정일 때와 웃을 때의 차이가 컸다.
“너 평소에도 이래?”
“응? 평소에도……라니?”
“평소에도 이렇게 훈련하느냐고. 지치지 않아? 난 수련회 엄청 힘들던데. 그런데 넌 또 훈련하고 있잖아.”
“응? 아아……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많이 하는 편인 것 같긴 해.”
유은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확신이 없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래? 그럼 다른 때는 어떤데? 평소에는 어떻게 훈련을 해?”
아르델의 물음에 유은하는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음……일어나면 먼저 명상을 하고……그다음에 체력 훈련 겸 30분에서 1시간 정도 매일 조깅을 하고……. 그건 아침에 할 때도 있고, 저녁에 할 때도 있어. 학교에 가고……수준별 수업 시간에는 하라는 대로 하고, 또……학교가 끝나면……그냥 집에 가서도 3시간 정도 마법 연습하고 그래. 그리고 자기 전에 또 명상을 하고……. 보통 아침에는 내법 명상을 하고, 밤에는 외법 명상을 해.”
얼버무린 기색이 강했지만 아르델은 그걸 굳이 꼬치꼬치 따지지 않았다. 대신 유은하의 훈련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았다. 학교 수업의 반이 마법 실습 및 이론이다. 거기에 집에 돌아가서도 3시간?
그냥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매일 3시간이다. 조깅과 명상을 제외하고 순수 마법 훈련만 3시간. 학교 수업까지 계산하면 하루 최소 5시간을 마법 훈련에 투자한다고 보면 된다. 그것을 매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훈련을 하는지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회피 훈련이나, 방어 훈련이나, 가상 시스템을 사용한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어? 그냥 다른 사람이랑 비슷한데…….”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자율 훈련 할 때 참고하고 싶어.”
“음……그러니까…….”
유은하는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굴렸다.
“심심할 땐 마법으로 할 수 있는 게 더 없나 공책에 적어 보고, 편할 때 마력을 몸에 돌리거나 방출하면서 마력량 늘리는 연습을 하고, 그리고……적어 뒀던 아이디어를 마법으로 사용해 보고……마법을 사용해 보는 게 제일 많아. 훈련실에 들어가면 항상 하고 싶은 만큼 마법을 쓰고 또 쓰니까…….”
‘어제도 주야장천 속성마법만 연습하고 있었지.’
아르델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말을 이어 가는 유은하의 얼굴이 점점 활짝 펴졌다. 종내에는 즐겁게 웃으며 훈련 내용을 꼽았다.
“대련도 많이 해. 대련을 하면, 내 마법의 어떤 점이 부족한지 알게 되거든. 궁금한 게 생기면 부모님이나 아는 어른들한테 물어보면서 도움을 구하고, 마법을 사용하다가 지치면 마법에 관련된 책을 읽고, 무엇보다 마법 쓰는 게 재밌어서…….”
아르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눈이 부셨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유은하가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아르델은 무심코 눈을 비볐다. 유은하가 말을 잇다 말고 의아한 기색으로 아르델을 바라보았다. 이미 눈부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르델은 자신을 보는 유은하의 말간 눈동자에 잠깐 흠칫했다.
“그렇게 훈련하면 힘들지 않아……?”
훈련 내용이 제법 많다. 그걸 다 하는데 정말 다섯 시간으로 충분할까? 거기에 책까지 읽는다고? 열정에 질식할 것 같다. 하지만 유은하는 활짝 웃었다.
“재미있는걸!”
아르델은 할 말을 잃고 유은하를 보았다. 유은하가 말을 이었다.
“마법을 배우는 건 재미있어.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실력이 느니까, 다음에 또 뭘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돼.”
올곧은 시선에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다시 질문하는 아르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래도……힘들잖아? 훈련량도 많은 것 같고……보통은 지쳐서 관두지 않나……?”
“음……그냥 강해지고 싶은 마음뿐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마법이 좋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 않아. 힘들어도 그게 즐겁게 느껴져. 정말 재미있어서 지나고 나면 힘든 걸 잊어버리고 말아.”
“즐거워? 노력하는 게…….”
“그럼. 나는 배우고 싶어서 마법을 배웠어. 하고 싶은 것도 많아. 그럼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노력은 아까워서 하는 게 아니잖아?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아르델은 입을 다물었다. 눈부시게 빛난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아르델은 고개를 숙였다.
아르델은 언제나 마법을 훈련하는 게 괴로웠다. 그래, 유은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하고 싶어서 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라는 말을 들으며 마법을 배웠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강해졌다. 고문이었고, 지옥이었다.
하지만 유은하는 달랐다. 진정으로 즐기기 위해서 마법을 훈련한다. 이런……이런 건…….
‘지독해.’
아르델은 손바닥으로 입을 막으며 헛구역질을 삼켰다.
‘기분 나빠.’
같이 재능을 타고나, 한 명은 평화로운 환경에서 마법을 즐기고 노력하고, 한 명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며 실력을 키워 간다.
이렇게 잔인한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아르델은 지금 당장이라도 유은하를 두들겨 팬 후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때리기는 싫었다. 이만큼 구역질 나는데 저 미소를 볼 수 없게 되는 건 왠지 싫었다.
아르델은 휙 몸을 돌렸다.
“아델만……?”
“아……졸리다. 훈련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난 방으로 돌아갈래.”
“그래?”
유은하는 웃으며 아르델을 배웅했다.
“푹 쉬어.”
“……으응.”
말간 눈동자를 직시하기 너무 힘들었다. 아르델은 어색하게 유은하를 뒤로하며 훈련실을 벗어났다.
가슴이 괴로워 힘껏 달렸다. 힘이 풀려 바닥에 엎어진 아르델은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누군 이렇게 되고 싶었는지 알아! 나도 너처럼 살고 싶었어……! 마법을……좋아하고 싶었다고!”
속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분노가, 슬픔이 터져 흘렀다. 더욱 짜증 나는 것은 그런데도 유은하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는 거다. 추한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도 달리.
그것이 밉고, 증오스럽고……너무도 눈부시게 느껴졌다.
☆
여자아이는 졸리다고 한 것치곤 꽤 다급하게 훈련실을 달려 나갔다. 어디 부딪치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곧 다시 자리를 잡고 섰다. 여자아이의 질문 덕분에 나는 내 훈련 일정을 새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사실 하루 3, 4시간은 어느 정도 축약해서 한 말이었다.
내 평소 평일 스케줄은 이렇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30분 명상,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마법 실습을 하고, 틈틈이 몸 주위로 마력을 돌리며 새로운 마법 기술을 생각한다. 오후 3시 넘어서 학교를 마친다. 방과 후 일주일에 세 번은 스승님을 만나러 간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친구들과 놀러 가고, 남는 시간엔 책을 읽거나 소설을 쓰는 등 여가 시간을 즐긴다. 한……6시까지 말이다.
6시부터는 개인 훈련을 한다. 1시간 정도 무술 훈련이나 조깅 등 체력 훈련을 하고 나면 지칠 정도로 마법 훈련을 한다. 방 안에서 연습할 때는 반드시 결계를 쳐서 시간을 달리한다. 덕분에 내 방은 부모님이나 친구들한테 다른 세계 취급을 당하고 있다. 자기 전엔 또 반드시 명상을 하고 잔다.
되짚어 보니 하루에 최소 5시간을 훈련으로 보낸다는 계산이 나왔다. 사실 5시간은 내가 생각하기엔 별것 아니다. 오히려 하루가 너무 짧아 한탄이 나온다. 가상 현실 장치와 결계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힘들지 않아?’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나는 훈련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할 거다. 내가 그렇게 훈련을 하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그냥 마법이 좋으니까, 재밌으니까, 그것뿐이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애에게 말한 것처럼 정말로 재미있어서 전부 잊게 된다. 조금이라도 실력이 늘었다는 걸 깨달으면 보람차고 기쁘다.
과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전생은 더 심했으니까. 그때는 자고 먹고 집안일 하는 시간만 제외하고 죄다 소설을 쓰는 데 쏟아부었다. 내가 질릴 정도로 글을 쓰고 또 쓸 수 있었던 건 결국 쓰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일생을 함께할 과제인데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슬프다.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강한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거다.
마법은 정말 성장하면 할수록 새롭게 느껴진다. 나는 평생 마법에 한해선 질릴 일이 없을 거다.
“후우…….”
한동안 숨을 고르던 나는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물+번개속성 융합은 이제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러나 아직 가장 효율이 높은 융합 점을 찾지 못했다. 좀 더 속성 융합에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바람에, 번개를 더해서!
눈앞에 거센 폭풍이 몰아닥쳤다.
☆
아르델은 유은하를 쫓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유은하를 상대하기도 싫었다. 점점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러나 원래 사람 일은 원하는 대로 되는 법이 없다. 멀어지려고 할수록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아르델이 유은하를 피하려고 하자 또 우연히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날은 제비뽑기로 대련 상대를 정했는데, 아르델의 상대는 바로 유은하였다.
‘대체 왜 이래? 이제 상대하고 싶지 않다니까?’
아르델은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며 속으로는 온갖 짜증을 냈다. 유은하는 불편한 기색으로 아르델의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어제 봤던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아르델은 긴장을 삼키며 손바닥 위에 마력을 모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기겠어.’
아르델은 유은하를 노려보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마법을 사용한 것은 유은하였다. 한유정과 대련했을 때보다 훨씬 빨랐다. 빠르게 소환된 공책 안에서 문자가 빠져나왔다.
『물감 비눗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