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5
5
[점심?]해민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발신자는 고한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결은 해민의 요구대로 순순히 약속을 이행했다. 캠퍼스 내에선 부담스럽게 따라붙지 말 것. 대신 캠퍼스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며 쫄래쫄래 쫓아왔다. 집에 식재료를 잔뜩 사 들고 와 고한결표 볶음밥을 해 주겠다고 하질 않나, 어디선가 사 온 고급 도시락을 식탁에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질 않나. 저녁을 해치우고 나면 어김없이 가벼운 스킨십이 질펀한 섹스로 이어졌다.
이건 새롭게 펼쳐진 해민의 일상이었다. 처음엔 저 버거운 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황망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해민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혼자만의 일상을 엉망으로 헤집고 들어온 고한결에게.
강의실 창밖으로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보였다. 하늘에 있어야 할 구름이 온통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몽글몽글한 나날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어딘가 간질간질한 게, 진짜 ‘연애’라는 걸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자리해 있었다. 어차피 이번 학기가 끝남과 동시에 끝날 관계니까. 졸업하고 나면 다신 볼 일 없을 고한결이니까. 대학생으로서 누리는 마지막 추억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까 후련했고, 그를 대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나중에 후회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즐기면 되는 거였다.
“……언니, 해민 언니? 휴대폰 계속 울리는데. 급한 일 있는 거 아니에요? 확인 안 해 보셔도 돼요?”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옆에 앉은 은진이 계속해서 진동하고 있는 해민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어? 아, 괜찮아. 급한 일 아니야.”
두 시간 전,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물고 왔다. 기말시험을 조별 과제 발표와 리포트 제출로 대체하겠다고. 교수님이 떨어뜨린 폭탄은 조별 과제를 피해 해당 과목을 수강 신청한 학생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해민도 그중 하나였다. 마지막 학기까지 팀플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시간표를 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했었다. 전공 이수 학점은 넉넉히 채웠지만, 한 학기 등록금이 아까워 흥미 있는 교양 수업을 골라 넣었다. 물론 출석과 지필 시험만으로 성적을 산정하는 과목을 쥐 잡듯 뒤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을 바꿔 버리니 배신감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교수님이 임의대로 짜 온 조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욕 넘치는 정치 외교학과 4학년 김희성이 조장을 자처했다는 거다. 가장 나이가 많아 긴장하고 있던 해민은 아무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다들 밥은 드셨어요? 다 같이 학식 먹으면서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눈치를 살피던 이영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은진도 기다렸다는 듯 호응했다.
“맞아요. 아침도 못 먹고 왔더니 너무 배고파요. 오늘 학식에 치즈돈가스 나온다던데 천천히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네?”
예전 같았으면 파트 분담해서 따로 연락 달라고 했을 해민도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에 학식이라면 굶주린 학생들로 꽉 차 바글거릴 게 뻔했지만, 뭐…… 괜찮지 않을까?
해민은 학생 식당이 한산한 틈을 노려 느지막이 점심을 챙겨 먹거나, 교내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끼니를 때웠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를 보탠 건 아주 작은 변화였다.
얼마 전 고한결과, 그의 친구 신승협과의 점심 식사가 그리 고역은 아니었다는 것. 타인과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먹는 밥이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장이 된 희성이 가방을 챙겨 들며 해민에게 같이 나가자고 눈짓했다.
“그래? 그럼 가자. 학식은 내가 쏠 테니까 잠수 타기 없기다.”
무리를 지어 캠퍼스를 거니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아니, 그런 적이 있긴 했는지 까마득했다. 해민은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며 밀려 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모두 한결이었다.
[같이 먹을래요?] [나도 지금 시간 뜨는데.] [아직 수업 안 끝났어요?] [왜 답이 없지?]손끝으로 액정을 톡톡 두드리며 마냥 기다리고 있을 한결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저 말고도 같이 밥 먹을 사람은 주변에 차고 넘칠 테니까. 해민은 재빠르게 엄지를 놀려 답장을 보냈다.
[조원들이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어. 이따 보자.]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학식?]“너네 다 치즈돈가스 먹을 거지?”
“네! 잘 먹겠습니다.”
“네네, 저도요. 해민 언니는요?”
“응, 나도. 고마워. 잘 먹을게.”
입으로 대답하랴 손으로 대답하랴, 아주 정신이 없었다. 해민은 서글서글 웃으며 대답한 뒤에 다시 한결에게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ㅇㅇ]그러고는 휴대폰을 가방 깊숙한 곳으로 쑤셔 넣었다.
예상대로 학생 식당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요령 있게 자리를 맡아 놓은 희성이 조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해민이 그의 맞은편에 겨우 식판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게 바로 치즈돈가스의 힘인가 봐요.”
옥수수 스프를 크게 한 숟갈 떠먹은 이영이 감탄했다. 시끌벅적한 탓에 잘 듣지 못한 은진이 이영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라고?”
“이게 바로 치즈돈가스의 힘인가 보다고!”
“어? 다시, 다시!”
“이게 바로 치, 즈, 돈, 가, 스, 의……!”
“……치즈돈가스의 힘이래.”
이영이 힘겹게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말하자, 은진의 옆에 앉은 희성이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이어 주었다. 그제야 은진이 푸스스 웃으며 맞장구쳤다.
해민이 이런 곳에선 도저히 과제 얘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섯 명의 학생 무리가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난 반 진담 반인 욕설을 섞어 가며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와, 귀청 떨어질 뻔했어.”
“그러게. 여기가 지들 집 안방인가.”
“자, 그럼 이제 파트 분담해 보자.”
희성이 눈치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시각 디자인과 동기라는 은진과 이영이 서로 날렵하게 눈짓을 주고받다가 해민과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발표는 하기 싫어, 전부 같은 마음이라고.
해민은 입술을 말아 물며 눈동자를 굴렸다. 관상을 볼 줄은 모르지만 이제껏 쌓아 온 눈치가 사람 성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곤 했다. 희성의 얼굴에는 ‘관종’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넌지시 말을 흘렸다.
“너 발성 되게 좋다. 발표하면 잘할 거 같아.”
“맞아, 맞아. 저도 오빠 목소리 듣자마자 딱 그 생각 했는데.”
“우와, 신기하다. 역시 다 똑같이 느끼나 봐. 뭐랄까? 시선을 확 휘어잡는 힘이 있는 목소리랄까? 취업 면접도 반은 먹고 들어가시겠어요.”
아부성 칭찬 세례를 받은 희성이 그래? 하고 재차 물으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해민은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발표자만 아니라면 전부 자신 있었다. 특히 그동안 모아 온 피피티 템플릿 자료만 해도 차고 넘쳤다.
“그럼 내가 자료 취합해서 피피티 만들게. 단체 메신저 방에 메일 주소 올릴 테니까 은진이랑 이영이가 조사한 자료, 거기로 보내 줄래?”
파트를 나누고 발표 주제를 정하면서 얼추 틀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느낌이 좋았다. 다년간 수많은 조별 과제를 해 오면서 프리라이더를 분별해 내는 촉이 발달한 해민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 고한결! 여기 자리 비었다. 이리로 와!”
순간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귓가로 날아들었다. 흠칫 놀란 해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식판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고한결이 보였다. 힘겹게 틈을 비집고 테이블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우스워질 만큼 태평하고 여유가 넘치는 걸음걸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그런지 멀리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그의 등 뒤로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에게 알은체를 해 오는 이들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는 얼굴은 타성에 젖은 사람처럼 무료해 보였다.
그때, 희멀건 얼굴에 또렷이 박힌 눈동자가 해민에게 닿았다. 아주 짧은 찰나, 그의 동공에 선명한 이채가 스쳤다.
한결은 제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해민의 옆 테이블에 식판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해민을 한 번 보고는, 그녀와 함께 앉은 이들을 슥 훑어보았다.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단정한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들 치즈돈가스에 영혼을 팔았나 봐. 사람 존나 많아.”
해민은 애써 한결의 시선을 피하며 밥알을 깨작거렸다. 바닥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조원들이 옆 테이블을 살짝 곁눈질했다. 이윽고 은진이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가를 가리더니 속닥거렸다.
“목소리로 취업 면접 반은 먹고 들어갈 사람이 저기 또 있네요.”
“목소리가 반, 외모가 반. 내가 면접관이었으면 무조건 합격이다.”
“얘들아, 취업 면접이 무슨 연예인 오디션인 줄 아니?”
희성이 눈을 길게 찢으며 퉁퉁거렸다. 겨우 발표할 사람으로 세워 놨는데 괜히 심기를 건드려 파투 낼까 봐, 해민은 재빨리 듣기 좋은 말로 희성을 달랬다.
“그래. 목소리는 우리 조장 쪽이 좀 더 나은 편이지. ‘존나’라는 말도 안 쓰고.”
얼굴은 몰라도……. 해민이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눈치껏 알아들은 은진과 이영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그냥 한번 얹어 본 말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이 자꾸만 옆 테이블로 향하는 건 명백히 고한결 탓이었다. 그는 무리 사이에서 혼자만 반사판을 댄 듯 화려하게 빛났다. 그가 밥을 퍼 먹을 때마다 길게 뻗은 목에 자리한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였다.
그의 친구들은 저들끼리 웃으며 떠들다가도 ‘그렇지, 한결아?’ 하고 물으며 그의 동의를 구했다. 그러면 고한결은 심드렁하게 어, 대꾸하거나 피식 웃었다.
어느 순간, 해민은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집이 아닌 밖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그와 눈을 맞춘 게 얼마 만인지 생각해 보다가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은밀한 교감이라도 하듯 해민을 따라 수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덕분에 해민은 웃음이 터질 뻔해서 입술을 일자로 꽉 맞물었다.
한결의 시선이 해민의 식판에 닿았다가 다시 느릿하게 해민을 따라왔다. 해민은 소리 없이 벙긋거리는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밥 천천히 먹어요.’
해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기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한결은 만족해하며 시선을 옮겼다.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귓전을 때려 대는 소음을 뚫고, 그와 제 사이에 앉은 수 명의 사람을 건너,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말을 주고받는다는 건. 영화에서처럼 주변이 전부 포커스에서 밀려나고 오직 이곳엔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조용, 조용. 밥 먹을 땐 조용히 밥만 처먹어야지, 얘들아. 어?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고 다니면 지옥 가서 천벌받는다.”
귓가에 숟가락으로 식판을 탁탁 두드리며 내뱉는 상스러운 말투가 들려왔다. 여지없이 고한결의 것이었다.
“이 새끼 또 이러네.”
“내버려둬. 한두 번이냐? 놀랍지도 않다.”
그의 친구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그 말을 무시하며 수저를 놀렸다. 해민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버릇이었다. 저를 대할 때와 친구들을 대할 때의 간극이 엄청나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래도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영이 옆에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소곤거렸다.
“언니도 저 오빠 알죠? 경영이라던데.”
그러자 희성과 은진도 상체를 바짝 기울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경영 아니어도 다 알지. 우리 학교에 고한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저 오빠, 성격이 조금 별나다고 유명하던데 진짜 그런가 봐요. 껍데기는 멀쩡하다 못해 아주 훌륭한데.”
풉. 해민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고한결과 또다시 눈이 마주친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한결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황급히 그 시선을 피했겠지만, 해민도 어느 정도 그에 대한 내성이 생긴 터라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웃어 주었다. 그러자 한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알지, 고한결. 인성이 좀…… 그렇잖아.”
“역시. 언니도 알고 있네요? 미대에서도 진짜 유명해요. 예전에 저 오빠랑 과팅 한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과팅?”
모처럼 찾아온 기회에 그의 신경을 살살 긁어 보려고 했는데, 도리어 놀라 눈이 커진 건 해민이었다. 다소 언성이 높아진 해민 때문에 덩달아 놀란 은진이 숨을 짧게 집어삼켰다.
“해민 언니 목소리, 지금까지 들어 본 것 중에 제일 컸어요.”
“아, 미안.”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려고 했더니 광대 부근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열심히 놀 수도 있지. 과팅이 뭐 대수라고.
“고한결이 과팅……도 나가고, 그랬구나……. 학교생활 열심히 했네.”
“뭐, 본인 의지로 나온 건 아니었나 보더라고요. 고한결이 나온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니까 저 오빠 친구들이 팔아먹은 모양이던데. 그래도 그렇지, 입 한번 안 열고 술만 궤짝으로 퍼마시더니 사라졌대요.”
“저도 들었어요, 그거. 완전 레전설. 그래 놓고 밥값이랑 술값은 전부 계산하고 갔다잖아요. 진짜 희한한 인간이야.”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고한결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해민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속에는 자조가 뒤섞여 있었다.
사실 저도 고한결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고 말을 나눠 본 것도. 요 며칠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었다고 유대감이 꽤나 쌓인 모양이었다.
‘이런 게 흔히들 말하는 몸 정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괜스레 귓가가 화끈 달아올랐다. 저 건너편에서 한결의 시선이 넘어왔다. 하필이면 붉어진 귀 끝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통에 해민은 연신 귓바퀴를 문질렀다.
이쯤 되면 알아서 눈길을 거둘 법도 한데, 그의 눈동자는 집요했다. 해민은 미간을 슬쩍 좁히며 손으로 뜨거워진 귀를 감쌌다.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기말고사 전까지는 과제 포화 기간이었다. 그 탓에 교내 카페도 전부 인구 포화 상태였다.
해민은 랩탑이 든 무거운 가방을 끌어안은 채 의도치 않게 카페 투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겨우 찾아낸 빈자리에는 콘센트 연결을 할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랩탑은 방전된 상태였고. 어쩔 수 없이 해민은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나와 캠퍼스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학관 2층에 위치한 카페 밖을 서성거렸다. 여기도 자리가 없으면 집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서적들이 굉장히 무거워서 과제를 끝내자마자 반납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해민이 발끝을 세워 실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별 과제 때문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각자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마땅치 않은 환경에 해민은 흐음,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으슥한 데 찾아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음습한 목소리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날 정도로 낮고 굵직한 음성이었다. 해민이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로 길게 뻗은 한결의 눈매가 예쁘게 휘어졌다.
“통했다. 나도 으슥한 데 찾고 있었는데.”
해민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카페 안과는 다르게 밖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걷거나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뿐이었다.
“하나도 안 통했어. 으슥한 데가 아니라 콘센트 연결할 수 있는 자리 찾는 중이야.”
“그러니까요. 으슥하면서 콘센트 연결도 할 수 있는 자리. 나 좋은 데 아는데.”
“어디? 카페 다 돌아다녀 봤는데 콘센트 자리는 이미 만석이던데?”
“꼭 카페여야 하는 거 아니잖아. 과제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한결은 자연스럽게 해민의 어깨에 걸쳐진 숄더백을 가져갔다.
“더럽게 무겁네. 어깨 안 빠졌는지 한번 봐 봐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감싸 왔다. 살살 힘을 실으며 주물거리는 그의 손길에 음흉한 의도가 엿보였다. 등줄기를 따라 찌릿하는 전율이 일었다.
해민은 쏟아질 듯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얄미워서 그의 손등을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아야.”
한결이 어울리지도 않는 엄살을 부린다.
“약속한 거 까먹었어? 개수작 부리지 마.”
한결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도 안 보는 곳이면 괜찮죠?”
괜찮다마다……가 아니라, 일단 과제를 끝내는 게 우선이었다. 해민이 한결의 손에 들린 제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가방을 번쩍 들어 올리며 따라오라고 턱짓했다.
“오 미터 밖에서 따라와요. 누가 보면 아주 큰일 나니까?”
제법 빈정이 상했는지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일품이었다.
학관을 벗어난 한결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2 학관 건물로 들어섰다. 해민은 착실하게 오 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랩탑과 두꺼운 책까지 들어 있어 벽돌을 넣고 다니는 것 같았던 무거운 가방이 한결의 손에서는 가볍게 달랑거렸다. 웬 여자 가방을 들고 다니냐는 주변 시선이 한결에게 일제히 쏟아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뒤에서 넓게 벌어진 등을 물끄러미 감상하며 따라 걷던 해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결이 수상해 보이는 문 앞에 서서 해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되게 잘 지키네요. 정확하게 오 미터 간격 유지하는 거, 그거 쉽지 않은데. 줄자인 줄.”
“여기가 어디야?”
가뿐하게 무시한 해민이 문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단정하게 정돈된 손끝으로 도어 록을 해제하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콘센트 연결할 수 있는 으슥한 곳.”
해민은 문이 닫히기 전에 그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 의자가 죽 늘어져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유기 동물 보호 동아리’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굉장한 악필이었다.
한결은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쳤다. 해민은 햇볕이 잘 들어 절대 으슥할 수 없는 공간을 억지로 으슥하게 만드려는 그의 의도를 모른 체해 주었다.
콘센트를 찾아 동아리방을 빙 둘러본 해민이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올려져 있던 제 숄더백에서 책과 랩탑을 꺼내 콘센트를 연결했다. 그제야 전원이 나갔던 랩탑 모니터에 환한 불이 켜졌다.
“나 고맙죠?”
“응, 고마워.”
“나 좋아하죠?”
“…….”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해민이 새치름하게 치뜬 눈으로 그를 쓱 흘겼다. 한결은 흐흐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건 동아리 부장이 쓴 거야?”
“내가 썼는데요.”
어색하게 가라앉은 침묵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과제하기에 마땅한 공간까지 알려 줬는데 솔직하게 말하기엔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어설픈 칭찬을 덧붙였다.
“아…… 그래? 글씨 예쁘네.”
한결은 해민의 옆으로 의자를 끌어오더니 바짝 붙어 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싱긋 웃는 얼굴이 저 필체보다야 훨씬 예뻤다.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 봐요.”
그렇겠지……. 그 말은 꾹 눌러 삼켰다.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한 건 전부 예뻐 보이나?”
굳이 들떠 있는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한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더 가까이 붙어 왔다.
한결은 해민의 의자 등받이에 자신의 한 팔을 걸치고 손끝을 세워 새하얀 뒷목을 스윽 그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뭉친 근육을 풀어 주듯 목 언저리를 감싸며 주무르는 노골적인 손길이 이어졌다.
“정말?”
“자, 잠시만 좀 비켜 줄래? 나 이거 종합 자료실 닫기 전까지 다 끝내야 하거든.”
해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결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한결은 못마땅한 듯 몸을 뒤로 무르며 손목에 걸친 시계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세 시간이나 남았네.”
“세 시간밖에 안 남은 거지.”
“……우리가 붙어먹을 시간이.”
서둘러 책을 펼치던 해민의 손이 멈칫했다. 해민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를 흘겨보았다.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뿐이야?”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내 밑에 깔려서 좋다고 헐떡거리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법이었다. 얼굴까지 새빨갛게 열이 오른 해민이 그의 터진 입을 손으로 홱 틀어막았다.
“제발 입 좀 어떻게 해 봐.”
그러자 그의 입을 가로막은 손바닥에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뱀처럼 달라붙었다. 스윽, 여린 살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해민이 화들짝 손을 떼어 냈다. 붉은 혀를 잇새에 끼운 한결이 씩 웃었다.
“이렇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건 줄 알았는데. 요구를 할 거면 확실히 해 줘야 착오가 없죠. 선배님이 그것도 몰라.”
머리가 어찔해진 해민이 이마를 짚었다. 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해민의 뒤에 놓인 소파에 길게 몸을 누였다.
“끝나면 깨워요. 아무리 급해도 자고 있는 사람 덮치면 안 돼요. ……나야 좋지만.”
그래, 차라리 자라. 그 편이 해민에게는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등 뒤에서 혼자 피식피식 웃어 댔다.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이윽고 쌕쌕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하지 못하고 귀를 바짝 곤두세우고 있던 해민은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려 손등으로 꾹꾹 뺨을 문질렀다.
* * *
마지막 마침표를 찍자마자 저장 버튼을 눌렀다. 두께가 엄청난 책을 탁, 덮자 개운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해민은 피로를 털어 내려 뻐근해진 눈을 깜빡거렸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몸을 길게 늘이는 순간이었다.
“왜 맨날 기다리게 해요?”
천장을 향해 높이 뻗은 손목이 단숨에 잡혔다. 대답할 새도 없이 익숙한 감각이 입술을 덮쳐 왔다. 고한결 특유의 체향이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와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
해민은 맞물린 입술이 교차하는 틈을 타 힘겹게 물음을 던졌다. 뒤에서부터 치고 들어온 한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 안을 파고들었다.
한결은 해민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더니 그녀를 테이블 위에 걸터앉게 했다. 해민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반사적으로 가시를 세웠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까부터.”
한결이 해민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더니 그 사이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하반신을 바짝 밀착시키며 반쯤 일어난 바지 중앙을 은밀한 부위에 비벼 댔다.
“나는 안중에도 없던데.”
“흐읏…….”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어요? 응?”
그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리더니 느리게 문질렀다. 마치 새가 부리를 쪼듯 퍼붓는 키스였다. 쪽, 쪽. 야릇하면서도 담백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간지러운 탓에 해민의 잇새로 푸스스 웃음이 샜다.
“왜 웃어요?”
“간지러워서.”
“간지럽기만 해요?”
한결의 눈매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안 되겠네. 다른 걸 더 느낄 수 있게 내가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야지. 입 벌려 봐요.”
입을 살짝 벌리자 그가 더 크게, 라면서 턱 아래쪽을 꾹 눌렀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입이 크게 벌어졌다. 뜨거운 살덩이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돌기가 맞물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넘나들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숨 쉬기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 그는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해민의 턱선을 따라 잘게 입맞춤을 쪼개어 퍼부은 한결이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달싹거리는 감각이 흥분을 끌어 올렸다.
“간지러워, 한결아…….”
“꼭 이럴 때만 내 이름 불러 주더라.”
허벅지 안쪽을 은근하게 주무르는 손길이 청바지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해민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니트 안으로 들어왔다. 한결이 납작한 해민의 배를 더듬거리더니 기어이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을 힘차게 그러쥔다.
“나 섰어요.”
“그건 안 서 있을 때가 없는 거 같던데.”
“가슴 빨게 해 주세요.”
“너는 꼭 이럴 때만 공손하더라.”
뒤늦게 해민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동아리방에 아무도 없더라도 보통 이런 곳엔 CCTV가 있지 않나. 황급히 제 가슴을 유린하고 있는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누가 보면 어떡해…….”
“보긴 누가 봐요. CCTV도 안 달려 있는데. 여기 올 사람도 없어.”
“하아, 그래도…… 여기 학교잖아…….”
가슴을 주무르는 그의 악력이 더욱 거세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브래지어 안으로 들어오더니 꼿꼿하게 일어선 정점을 둥글게 굴렸다.
“빨고 싶어요.”
“너, 진짜…… 변태야?”
“네에. 선배님은 그 변태 따먹은 여자 친구시고요.”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옷자락이 걸리적거렸는지, 니트를 홱 걷어 올린 한결이 그 끝을 해민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물어요.”
“……뭐?”
“안 그러면 지금 여기서 박을 거예요.”
미친, 미친…….
“미친놈.”
입 안에서만 웅얼거리던 말을 내뱉자 어쩐지 후련해졌다. 드디어 고한결의 정체를 제대로 명명해 준 느낌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더니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미친놈 맞으니까 물어.”
해민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을 하고선 니트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다. 어쩌다 이런 놈한테 걸려서.
한결은 뒤로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공기 중으로 훤히 드러난 해민의 가슴을 함빡 입에 물고는 혀끝을 세워 유두 주변을 수차례 쓸며 일부러 애태웠다.
한결이 끈질기게 양손으로 새하얗고 동그랗게 부푼 가슴을 주무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민의 눈가가 흥분에 취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해민은 한결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정작 원하는 부분은 살짝살짝 비껴가며 약을 바짝 올리는 게 퍽 얄미웠다.
“해 줘어…….”
옷을 입에 물고 있는 터라 발음이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해민이 뭘 원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듯했다.
“뭘 해 줘요?”
“빠, 빨아 줘. 응?”
“빨고 있잖아요.”
“거기 말고, 흐응…….”
“거기 말고 어디. 요구할 땐 확실히 말을 해 줘야 안다니까.”
해민이 샐쭉하게 접힌 한결의 눈매를 손으로 쓸며 애원했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끙끙,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한결이 엄지 끝으로 유두를 꾹 눌렀다.
“여기?”
번쩍 스치는 쾌감에 해민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한결이 능글맞은 웃음을 걸쳤다. 그러더니 튀어나온 정점을 잇새에 끼우곤 자근자근 씹어 댔다. 혀로 핥아 올리며 실컷 입 안에서 굴려 대면서도, 가슴을 아래서부터 위로 움켜쥐며 주무르는 손길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하, 존나 말랑말랑해. 뭐 이런 게 다 있지.”
한결은 해민의 여린 살 위로 쪽, 쪽, 입을 맞추었다. 그가 위 가슴을 입에 물더니 세게 빨아들였다.
“아흣!”
이번에는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파묻더니 한가운데에 붉은 흔적을 새겼다.
“흐읏. 뭐, 뭐 하는 거야?”
그제야 입술을 떼어 낸 한결은 훤히 드러난 가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벼 댔다.
“도장 다 찍었어요.”
해민이 뱉어 낸 니트를 아래로 꼼꼼하게 내려 준 한결이 다시 입술을 찾았다. 가벼운 입맞춤이 연달아 이어졌다.
한결은 제가 하고자 한 행위를 마친 덕분에 뿌듯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해민은 아니었다. 한번 고개를 치든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불규칙한 숨을 토해 내던 해민은 이윽고 얼굴을 붉히며 이를 앙다물었다.
“차…… 가져왔어?”
한결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이 입술을 감쳐물고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책 반납하고…… 학생 주차장으로 갈게.”
“하.”
한결이 고개를 떨구었다. 새빨개진 그의 귀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한결만큼 음란한 놈이라면 제 말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리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수줍게 붉힌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젖꼭지 빨아 달라고 앙앙댈 때 알아봤어. 선배님 정말 변태시네요.”
해민은 울고 싶었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울상을 지은 채 재빠르게 짐을 챙겨 동아리방을 뛰쳐나왔다. 서늘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온몸에 달아오른 열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 *
산을 깎아 만든 캠퍼스에서 나무가 우거져 어둑하고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짙게 선팅 된 검은 스포츠카는 새카만 어둠 속에 묻혔다.
“하아, 한결아…….”
차 내부는 후텁지근한 열기로 뒤덮여 숨통이 콱 막힐 정도였다.
비좁은 조수석 시트는 한껏 뒤로 젖혀졌다. 해민은 제 위에 올라탄 묵직한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불씨를 당긴 건 다름 아닌 바로 저였으니까.
해민이 한결의 결 좋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가슴이 깊게 빨릴 때마다 그의 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쯥, 쯔으읍. 적나라한 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귓가로 날아들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해민은 다리 사이에 뜨겁게 고인 열기로 인해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럴수록 빈틈없이 밀착한 한결의 존재가 절실히 느껴지는 바람에 하릴없는 신음만 흘렸다.
“계속 발정 난 소리 낼 거예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정신을 차려 보니 바지와 속옷은 이미 발목까지 말려 내려가 있었다. 울컥, 하염없이 애액을 토해 내는 다리 사이로 커다랗고 기다란 손이 침범했다. 그가 집요하게 음부를 비벼 대며 쾌감을 부추겼다. 찔꺽찔꺽. 야릇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여기, 흐응, 아무도 없다며어……!”
해민은 얼른 차를 타고 집에 가서 뭉친 욕구를 해결하자는 의미로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한결은 한술 더 떠서 카섹스를 요구하는 걸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한결은 어떤 얼빠진 새끼가 이 시간에 이런 곳을 찾아오겠냐며, 누가 있을 리가 없다고 감언이설로 해민을 꼬드겼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누가 들으면 어쩌냐니. 아래를 지분거리는 그가 너무 얄미워서 해민은 말아 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내려쳤다.
“아야. 아얏. 이거 뭐야. 솜방망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음에도 한결은 그저 큭큭 웃으며 맞아 주고 있었다. 하긴, 도리어 저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건 그의 어깨가 아닌 제 주먹이었다.
한결이 한 손으로 더듬더듬 콘솔 박스를 열더니 콘돔을 꺼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오냐는 물음은 그의 입술에 집어삼켜졌다. 부드럽게 해민의 아랫입술을 짓뭉개며 들어온 말캉한 혀가 입 안을 휘저었다.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달큼하고 다정한 혀 놀림이었다.
그와 키스를 할 때면 어쩐지 스스로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한결과의 키스를 떠올릴 정도로.
귓가에 바지 버클이 툭,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가슴팍에 시야가 가로막혀 있으니 오로지 청각만이 바짝 곤두섰다. 콘돔 비닐이 벗겨지는 소리, 브리프 안에서 튀어나온 성기에 러브 젤이 묻은 콘돔을 살살 씌우는 소리.
이윽고 뭉툭한 성기의 끝이 흠뻑 젖은 틈을 따라 오르내렸다. 한결은 통통하게 부푼 음핵을 손끝으로 튕기다가 비비기를 반복했다.
해민은 머릿속에 번쩍이는 섬광이 스칠 때마다 한결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다가도 그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훤히 드러난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뭉개졌다. 까슬한 옷감에 맨살이 비벼지는 느낌은 생경했지만 또 다른 긴장을 선사했다.
기회를 엿보며 연신 움직여 대던 그의 성기가 뻐끔거리는 질구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흑!”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안쪽은 한눈에 보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성기를 힘겹게 받아 냈다. 한결은 서서히 밀고 들어오면서 손끝으로 해민의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선배, 후우, 있잖아요.”
“……으응.”
한껏 예민해진 내벽엔 한결의 성기에 돋아난 힘줄 하나하나까지 전부 느껴졌다. 그가 반쯤 들어갔을 때 해민은 고개를 저으며 끙끙, 그를 뱉어 냈다. 물러나듯 조금 뒤로 몸을 물린 그가 다시 천천히 구멍을 넓히며 밀려 들었다.
“내가 만져 주면 기분 좋죠?”
“응, 조, 좋아…….”
그 대답을 꺼냈을 때 그의 좆이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꽉 다문 한결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후우……. 내가 기분 좋아지는 방법 알려 줬잖아, 그렇죠?”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이러는 걸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해민은 당장 울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아흐윽!”
해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싫은 기색을 보이기가 무섭게, 거대한 크기의 기둥이 뿌리까지 콱 처박혔다. 한결이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치켜올리며 불손한 어투로 물었다.
“싫어? 하지 마? 뺄까?”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여린 내벽이 기둥에 달라붙었다. 그가 허리를 뒤로 뺄 때마다 해민의 다리 사이에서 아쉬움에 울컥, 물이 샜다.
한결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쑥 빠져나갔을 때 허망함만 남는 게 싫었다. 그래서 아래를 꽉 조였다. 한결의 잇새로 으윽, 하는 옅은 신음이 샜다.
“이거 봐. 내가 좋은 거 알려 줬는데 재미는 혼자 다 보고, 딜도 취급이나 하고.”
“…….”
“선생님, 이라고 해 봐, 해민아. 그럼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뭐 이딴 걸 요구하지? 해민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감자 뺨을 타고 뜨거운 물이 흘렀다. 수치심에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해민이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헛소리……하지 마.”
“싫으면 말고요.”
한결이 혀를 쯧 차며 멀어지려고 했다. 다급해진 건 해민이었다.
“아니, 자, 잠깐만.”
“잠깐만요, 라고 해야지.”
“……잠깐만요.”
한결은 눈썹을 들썩이며 그다음 말을 이어 보라고 채근하는 눈짓을 보냈다.
“서, 선……생님.”
“어, 그래, 해민아.”
“……해 주세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쇄골 언저리에서 흩어졌다. 심장이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쿵쿵, 크게 들려왔다.
한결의 웃는 얼굴이 흐릿해진 시야에 가득 담겼다. 좋단다. 선생님 소리 한 번 해 줬다고 아주 좋다고 웃는다. 한 번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 얼른. 얼른…… 해 줘요, 네?”
한결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윽고 그가 새하얀 엉덩이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며 퍽, 퍽, 처박기 시작했다.
“내가, 학생을, 잘못, 가르친, 죄지. 후…….”
한층 거세진 추삽질에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해민은 제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한결이 해민의 턱을 움켜쥐고 아래로 내렸다.
“서해민, 제대로 봐. 네가 내 좆 씹어 먹는 거. 봐 놔야 복습을 할 거 아냐.”
흉흉하게 일어난 성기가 빠듯하게 물려 접합부를 들락거리는 모습이 망막에 새겨졌다. 직접 눈으로 보고 나면 이 음란한 행위가 정말 실감날 것 같아서 이제껏 마주하는 걸 피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직접 보고 나니 안쪽을 문지르며 헤집는 강렬한 자극이 더욱 선명해졌다.
“흐으, 못, 보겠, 어…….”
“못 보겠어? 그래도, 봐야지, 어? 욕심 많은, 해민아.”
한결이 해민의 허리를 감싸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싶더니, 순식간에 자세가 반전됐다. 해민은 떨리는 동공으로 제 아래 깔린 한결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울상을 지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하지 마, 응? 하지 마세요…….”
“뭘 하지 마, 해민아. 네가 지금 선생님 덮치고 있잖아. 배운 대로 해 봐.”
한결은 허리를 얕게 쳐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매끈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를 해민이 손으로 더듬었다. 그는 하얗고 고른 이 사이에 해민의 손가락을 끼웠다. 애무하듯 혀로 찬찬히 쓸었다.
“얼른. 허리 흔들어.”
해민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가 했던 대로 허리를 살짝살짝 흔들자, 아랫배에 묵직하게 들이찬 존재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한결의 두 손에 가느다란 허리가 잡혔다. 위로 올렸다 떨어뜨릴 때마다 살결이 탁, 탁, 맞붙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하아, 어떡하냐. 우리 해민이, 갈 길이 구만리다. 선생님이 안 해 주면, 아무것도, 후우, 못 하네.”
순간 오기가 뻗쳐 일어났다. 애잔하게 올려다보는 한결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 해민의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어렸다. 이제껏 섹스의 주도권은 고한결이 갖고 있었다. 부끄럽고 민망하다고 해서 마냥 숨으려고만 했던 제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입술을 일자로 꽉 맞물었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을 세워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가 콱 치받을 때마다 화끈거리는 쾌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탁, 타악, 탁. 느리지만 좆 뿌리까지 머금을 기세로 꾹꾹 내리눌렀다.
“후우…… 서해민.”
서늘한 목소리가 바닥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한결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미간에 미세하게 그어진 실금을 눌러 펴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너, 누가, 이렇게…… 하, 씨발.”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한결이 해민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고선 허리를 쳐올렸다.
해민이 노력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진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다. 푹, 푸욱. 굵고 긴 기둥이 내벽을 들쑤시며 예민한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존나, 야해 가지고, 씹. 너, 다른 데 가서, 후우, 이러면…….”
“하, 흐으, 그, 그만, 한결아, 그마안……!”
“다 같이 죽는 거야, 씨발. 응? 알아들어?”
머릿속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으로 어찔했다. 내지르는 교성이 더없이 음란했다. 해민의 입술이 한결의 입술을 찾았다. 서툴게 핥고 빨아 대며 더운 숨을 불어 넣었다.
그의 허리 짓은 멈출 줄 몰랐다. 키스가 기폭제가 된 양 더욱 거세게 추삽질을 이어 갈 뿐이었다.
한결의 목에 매달린 해민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방금 전 직접 목격한 교접 행위가 새하얘진 시야에 어른거렸다. 두 눈을 감으면 첨예한 감각이 배가되었고, 두 눈을 뜨면 흥분에 젖은 고한결의 얼굴이 보였다.
두 눈동자는 초점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뜨자, 붉은 혀가 엉망으로 뒤엉키는 모습이 보였다. 해민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야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해민이 한결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새빨개진 귓불을 입 안에 넣고 굴리며 질척한 타액을 묻혔다. 뻗어 나가려는 신음을 목구멍 너머로 겨우 눌러 삼키며 애원했다.
“그, 그만……, 이제 그만…… 응? 나, 흐응, 너무, 힘들어.”
“싸야, 그만하지. 혼자만 질질 싸면 다야?”
해민은 출렁이는 가슴을 그의 가슴팍에 짓뭉개며 흐으, 울음 섞인 투정을 부려 댔다. 이윽고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해민이 두 눈을 내리감았다. 한결의 커다란 어깨를 움켜쥔 손톱 끝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얼굴 곳곳에 잘게 입맞춤을 퍼부은 뒤에 다시 귓가에 속살거렸다.
“……선생님, 싸 주세요.”
치욕스러웠다.
순간 한결의 숨이 턱 멈추는 게 느껴졌다. 추삽질이 뭉근하게 이어지더니 이내 아랫배에 뜨거운 무언가 울컥, 고여 들었다.
“아아, 돌겠네.”
해민이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자 한결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며 연신 허탈한 숨을 쏟아 내고 있는 고한결이.
“지금 뭐…… 한 거예요?”
한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는 시선을 피하려는 해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집요하게 따라갔다.
“응? 뭐라고 한 건지, 다시 말해 봐.”
해민은 정말이지, 고한결이 이럴 때마다 울고 싶었다. 그는 남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학적인 취미라도 있는 걸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대답을 안 해 주면 그는 절대 성기를 빼내지 않을 기세였다. 그래서 입술을 한 번 감쳐물고 그를 슬쩍 흘겼다.
“너 존……나 짜증 난다고.”
한결의 입에선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던 속어가 어쩐지 어색하게 발음되어 새어 나갔다. 그도 똑같이 느꼈는지 푸훕, 웃음을 터뜨리며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아, 존나가 뭐야, 존나가. 존나 상스러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반쯤 체념한 해민이 그를 힘껏 노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해민은 한결과 얼굴을 마주한 채 신나게 웃어 젖혔다. 발정 난 짐승처럼 캠퍼스 내 으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도, 되도 않는 상황극 때문에 치욕스러웠다는 것도, 또 그에 강렬하게 반응한 고한결도, 전부 우습기만 했다.
고한결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진부하고 고루한 기억만 남긴 채 대학을 졸업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해민은 예쁘게 휘어진 한결의 눈매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덕분에 재미있었어.”
흑백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대학 생활을 찬란한 색으로 덧칠해 줘서. 해민은 제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한 조각 정도는 남겠구나, 싶었다.
한결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더니 해민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 *
수능이 다가오면 갑자기 기온이 훅 떨어진다는 수능 한파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쩐지 코끝에 알싸하게 찬 기운이 맴돈다 싶었다. 달력을 확인하니 벌써 11월이었다. 공휴일은 하나도 없지만 곧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설렘에 마음이 들뜨는 계절.
그러나 해민은 언제나 그랬듯 묵묵히 살아 낼 뿐, 연말의 설렘 따위 느껴 본 지 오래였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올해는 뭐가 좀 다르려나? 일말의 기대감이 잠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시답잖은 감상을 뒤로한 채 코트 깃을 여몄다. 그러고는 찬바람을 뚫고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머릿속으로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꼽아 보는 중이었다. 봄가을용 침구를 전부 빨아서 넣고, 뽀송한 겨울 침구를 꺼낼 것.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할 것. 냉장고 안에서 썩어 가는 음식물을 정리할 것.
‘아, 냉장고에 맥주가 있어요? 맥주가?’
불현듯 떠오른 장면에 피식 웃음이 샜다.
‘싹 다 갖다 버려요.’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 말투에 적응되는 날이 다 오다니. 누가 볼세라 입가에 머문 웃음기를 황급히 지워 냈다.
십여 분 정도를 걷자 우뚝 솟은 오피스텔 건물이 보였다. 큰길가에서 모퉁이를 돌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드디어.”
고한결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져 있으면 딱 어울릴 법한 모습인데 그는 의외로 비흡연자였다. 한결은 늘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비누 향을 풍겼고, 제 집에서 자고 가는 날에는 저와 같은 샤워 젤 향을 풍겼다.
그밖에도 뜻밖의 면모는 더 많았다. 그는 물건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성정이었고,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실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집에서 영화 감상하는 걸 즐겼다. 수업은 절대 빼먹지 않았으며 과제도 나름 성실하게 해 가는 편이었다.
날티 나는 외양으로 짐작컨대 섹스에 눈이 돌아 버린 놈이라는 건, 실제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밖에서 데이트를 할 수 있겠군.”
한결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해민의 앞에 다가와 섰다. 남다르게 큰 키와 슬림한 체형은 모델 뺨을 칠 정도라 어떤 옷을 입혀 놔도 잘 어울렸다. 라이더 재킷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한결이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 왔다.
“밥 먹으러 가요.”
언젠가부터 해민은 한결의 요구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쳤…… 아니, 떡이 나왔다. 그가 추천해 주는 영화는 하나같이 명작이었고, 어쩌다 보니 같이 영화를 감상하는 취미까지 생겼다. 새로운 취미는 메마른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가 공유해 주는 플레이 리스트는 등하굣길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
해민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결이 손을 뻗어 해민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깍지를 껴잡았다.
“집 안에만 있으면 온몸에 곰팡이 펴요. 가끔은 이렇게 바깥바람도 쐬고 바깥 음식도 먹고 그래야지.”
“바깥바람은 학교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충분히 쐬고 있고, 학식도 바깥 음식인데.”
“그거랑은 결이 다르지.”
“뭐가 달라?”
“학교에선 나랑 같이 못 있잖아.”
가끔 이렇게 으스대며 존재감을 어필할 때 얄미워 보이기도 했지만, 귀엽게 봐 줄 수 있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뭐가 달라?”
“그걸 아직도 몰라요?”
“모르겠는데.”
“……한참 멀었네.”
한결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해민을 슬쩍 흘겼다. 해민은 애써 모른 척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고한결과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했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학기 초 서해민이 이 얘기를 들었으면 코웃음 칠 게 뻔하지만. 그로 인해 뒤바뀐 자신의 세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학교와 반대 방향으로 나란히 걸었다. 해민도 그저 한결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맞잡은 손이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근데 거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나 기다리고 있었어?”
“그럼 길바닥에서 뭐 하고 있었겠어요.”
“언제부터?”
“오억 팔천만 년 전부터.”
“아아, 오 분 팔 초 전부터.”
그는 황당한 눈으로 해민을 빤히 바라보더니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린 해민이 멋쩍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고는 타박이 이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뭐 먹을래? 내가 살게.”
“네에, 잘 먹겠습니다.”
한결은 언제나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도 한 번도 해민이 지갑을 꺼내게 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만큼은 꼭 제가 먼저 계산하고 나오리라, 해민은 속으로 다짐했다.
한결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이탈리안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메뉴판을 펼치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비싼 메뉴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파스타 하나에 5로 시작하는 가격이 있을 수가 있나. 오천 원대는 아닐 거고…….
“서해민 선배님이 사 주신다니까 개비싼 거 먹어야지.”
한결은 능숙한 손짓으로 서버를 불렀다. 그리고 해민의 손에 들린 메뉴판을 빼앗아 테이블 끄트머리에 올려놓았다.
“부담 갖지 말고 먹을게요.”
“내가 해야 할 말 아니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해민을 보며 한결은 씩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장을 차려입은 누군가 한결에게 알은체를 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인마. 학교도 가까우면서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자주 좀 들르라니까.”
“내 얼굴 보기가 쉬운 줄 알아? 바쁜 척하는 게 집안 내력이야.”
“그건 그렇지. 윤결이 놈도 개업했을 때 딱 한 번 얼굴 비추더라.”
“나는 형보다 더 바쁜 대학생이잖아. 눈 감았다 뜨니까 한 학기가 끝나 있더라고.”
해민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세히는 몰라도 이 가게 사장과 한결이 아는 사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
뒤늦게 해민의 존재를 알아챈 남자가 한결에게 슬쩍 물었다. 해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뻣뻣하게 굳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한결은 해민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여자 친구, 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한결이 여자 친구시구나! 반가워요.”
남자는 넉살 좋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해민도 손을 뻗어 안녕하세요, 대답하려 했다. 그 순간 마주 앉은 한결이 대뜸 해민의 손을 맞잡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형, 디너 A코스 둘. 빨리, 빨리. 나 배고파 뒈져.”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한결과 해민은 처음 만난 사람인 양 악수를 나누고 있었고, 남자는 허공에 붕 뜬 손을 머쓱하게 거두어들이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여전히 별난 놈이네.”
그러더니 한결의 어깨를 메뉴판으로 툭 치고 사라졌다.
해민은 제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한결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넌 도대체 언제부터 별났던 거야?”
“알면 뭐요.”
한결이 고집스럽게 퉁퉁거렸다. 분명 뭔가 언짢은 게 있는 거다. 그는 서버가 가져온 식전 빵을 뜯어먹으며 해민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왜 그렇게 봐?”
“……이상하네.”
“뭐가?”
“원래 안 그러지 않았어요?”
대체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묻기도 입 아팠다.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보면 참다못한 한결이 결국 제 할 말을 내뱉고는 했다.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항상 혼자 다녔잖아요. 학식도 혼자 먹고, 강의도 혼자 듣고. 다른 사람이랑 털끝 하나 닿는 것도 싫어했잖아.”
해민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을 잘도 파악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도 불편해서 피하곤 했던 자신을 어떻게 아는 걸까.
그렇지만 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달랐다. 굳이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건, 고한결의 태도를 보고 배운 거였다.
“그게 뭐? 그럼 난 평생 다른 사람이랑 말도 섞지 말고 지내야 해?”
문득 서운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래서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한결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저를 이렇게 만들어 준 게 그였으니까.
한결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초조한 기색으로 뒷목을 쓸어내리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럼 나는요?”
“네가 뭐?”
“다른 사람이 생기면…… 이제 나는 필요 없어지는 거 아닌가?”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결은 미간을 좁힌 채 해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바라는 거였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실로 오랜만에 의중을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해민은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얼어붙은 분위기가 풀어질 수 있을지. 한결과 어색해지거나 멀어지는 건 싫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테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해민이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왜 네가 내 필요에 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낸다고 해서 네 자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한결의 짙고 깊은 눈동자가 순간 잘게 요동쳤다. 이윽고 그는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붉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그가 침을 꼴깍 넘기자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가 보였다.
고한결이 이상한 말을 꺼내기 직전의 전조 증상이었다. 해민은 문득 덮쳐 온 긴장감에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선배.”
“응.”
“키스해도 돼요?”
“하.”
감동받았다는 걸 희한하게 표현하는 고한결이었다.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해민은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냈다.
“안 되지.”
대신 손바닥에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캉하고 폭신한 감각이 다녀갔다.
“알겠어요, 알겠어. 집에 가서 할게요.”
가로로 길게 뻗은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며 눈웃음을 만들었다. 해민은 손바닥에 묻은 타액을 바지에 슥 문지르며 한숨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등장한 서버가 테이블에 애피타이저를 내려놓았다. 한결은 냅킨을 펼치며 해민의 앞에 놓인 음식을 턱짓했다.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사장님이 쏘신대요.”
“여기 사장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관심 갖지 말고 먹어요.”
고한결은 끝까지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 함구했다. 그러나 해민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한결의 형과 아는 사이겠구나, 하고. 또 그의 형에 대해 물으면 으르렁거리며 날 세울 게 뻔하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 * *
그릇을 비워 내기 무섭게 다음 요리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디저트에 커피까지 해치우고 밖으로 나오자 배가 너무 무거워서 걷기 힘들 정도였다. 오늘도 결국 한결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구나. 그 생각에 해민의 마음마저 무거워졌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해민이 몸을 부르르 떨며 코트 깃을 여미자, 한결이 해민의 손을 맞잡아 제 재킷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안엔 따끈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얼어붙을 뻔한 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핫 팩?”
“손발이 찬 편이잖아요. 아까부터 넣어 뒀는데 아직 따뜻해서 다행이네.”
답지 않게 세심한 배려까지. 나중에 그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생기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애인이 될 것 같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미래의 여자 친구가 조금 부러워졌다.
해민도 현재 그의 여자 친구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긴 했으나, 한결에게 해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아서 죄책감이 뒤따랐다.
“너는 뭐 필요한 거 없어? 갖고 싶은 거라든가.”
“나는 선배면 되는데요.”
보고 있으면 한결은 참 낯간지러운 말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잘도 내뱉었다.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게 그의 말 때문인지,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헷갈렸다.
“나 말고…….”
프랜차이즈 제과점 앞을 지날 때였다. 한결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필요한 건 없고, 해 보고 싶은 건 있는데.”
그의 시선이 통창 너머 케이크 진열장에 꽂혀 있었다. 늦은 밤이어선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두어 개가 전부였다.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응, 해 보고 싶은 거.”
어쩐지 한결의 동공이 몽롱하게 풀렸다. 해민이 그의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어 봐도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간을 좁혔다.
“오늘 당장은 못 먹을 거 같으니까 내일 눈뜨자마자 신선한 케이크 사 줄게.”
“아뇨. 꼭 오늘…….”
오늘따라 한결이 이상하게 고집을 부려 댔다. 팔을 아무리 끌어 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오늘 생일이에요.”
“뭐? 진짜?”
그제야 한결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연한 기색이 묻어나는 표정에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진작 알았으면 생일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생크림 케이크면 돼요.”
소박하기도 해라. 결국 해민은 제과점 안으로 들어가 몇 개 없는 케이크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포장해 나왔다. 해민의 손에 달랑거리는 케이크 상자를 본 순간, 한결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었지만, 해민은 그저 생크림 케이크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고 흘러가듯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그의 생일을 챙겨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까.
오피스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결은 피식피식 웃었다. 두 뺨이 발그레 상기된 채였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아니, 그냐앙.”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게 퍽 수상했다. 해민은 그에게서 미심쩍은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찜찜했다.
“왜 웃냐니까?”
재차 묻는 질문에도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피스텔 앞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채 정면으로 고개를 홱 돌린 해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한결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덩달아 표정을 굳히며 그대로 멈추어 섰다.
“뭐지, 저 새끼는.”
도한이었다. 줄담배를 피워 대던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발치에 손톱만큼 남은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장초마저 바닥으로 툭 떨구더니 발로 불씨를 비벼 껐다.
한결이 한 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해민의 어깨에 걸쳤다. 그런 뒤 해민을 제 가슴팍으로 바짝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요?”
낮고 굵은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왜 저 새끼 보고 멈췄어요?”
그러게. 왜 멈췄더라……. 순간 사고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잊고 있었다. 고한결은 이도한과 함께 다니는 무리 중 하나였고, 이도한과의 관계가 끝나자마자 한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는 걸. 마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묘했다. 그리고 찝찝했다.
한결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안겨 있는 해민의 발걸음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스팔트 바닥이 신발 밑창을 콱콱 붙잡는 듯했다.
이윽고 건물 입구를 막아 선 이도한이 허탈하게 웃으며 욕을 짓씹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다.”
거침없는 언사에 흠칫 놀란 해민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결이 먼저 막아섰다.
“저 새끼랑 말 섞지 마요.”
그러고는 허리를 세우며 도한의 한쪽 어깨를 슬쩍 밀었다.
“비켜, 새끼야.”
한결은 건물 입구 안쪽으로 해민의 등을 살며시 떠밀고는 먼저 들어가 있어요, 하고 해민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해민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싸움이라도 붙을 기세였다. 그러나 한결이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도한은 이를 으득 물며 그런 한결과 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서 망설여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둘 사이에 끼어들어 봤자 더 복잡하게 일이 꼬일 것만 같았다. 고한결도 그래서 먼저 들어가라고 한 거겠지.
해민은 그를 믿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혹시나 고성이 들리면 당장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억겁과 같은 십여 분이 흘렀다.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쩍 벌렸다. 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올라탔다. 사달이 났으면 진작 났겠지 싶어서. 그냥 내릴까, 올라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애꿎은 케이크 상자 손잡이만 매만졌다.
은색 양문이 스르륵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잡았다.”
문 틈새로 뻗어 나온 손이 길고 곧았다. 반자동으로 열린 문을 비집고 들어선 사람은 고한결이었다.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그는 멀쩡했다. 뽀얀 얼굴에 생채기라도 난 건 아닌가 싶어서 샅샅이 뜯어보았지만 늘 그랬듯 잘생기기만 했다.
“왜. 내가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닐 새끼로 보여요?”
시건방진 말본새도 여전했다.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아무나 때려눕히고 다닐 새끼로 보여.”
“잘 봤네.”
매끄러운 호선이 떠오른 입매를 본 해민은 그제야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고한결의 눈은 어쩐지 미소 짓는 기색이 아니었다.
결핍의 심리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