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6
6
나란히 서서 걷던 해민이 느닷없이 걸음을 멈췄다. 반푼이처럼 실실 웃던 한결이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이도한이 있었다.
한결은 해민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늘고 날렵한 선을 가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최 읽어 낼 수 없는 표정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체 왜? 왜 저 자식을 보고 돌처럼 굳지?’
서해민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겨우 허물어 낸 벽이 순식간에 다시 쌓인 기분이었다. 엿 같았다. 원인은 분명했다. 이도한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속이 뒤틀렸다.
해민과 이도한이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눈다? 가당치도 않지. 그 꼴을 보면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를 끌고 나와 저 자식을 향해 돌진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결은 서해민을 건물 안으로 떠밀었다. 얼른 들어가라고. 저 쓰레기 새끼한텐 눈길도 주지 말라고. 투명하고 옅은 해민의 눈동자에는 오롯이 저만이 담겨야 한다고.
머뭇거리며 연신 뒤를 돌아보던 해민이 이윽고 로비 안쪽으로 사라졌다. 도한과 한결, 둘만 남은 건물 입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독기를 가득 품은 이도한의 눈이 가소로웠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그의 발치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말해 주고 있었다. 아, 이 새끼 멘탈 아작 났구나.
“남의 집 앞에서 뭐 해, 도한아.”
“……개새끼.”
입술 끄트머리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지만 그냥 웃음이 났다. 한 뼘보다 더 작은 놈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끼눈을 치뜬 게, 퍽 우스웠다.
“전부 치우고 가라. 안 그러면 관리 아저씨한테 아주 혼나.”
한결은 도한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씩 웃었다. 제 속이 뒤틀린 만큼 그의 속도 한껏 뒤틀리길 바랐다. 부아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는 새끼 앞에서 여유로운 웃음을 걸치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으니까.
“남의 거 뺏으니까 좋냐, 이 개새끼야?”
한결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 안으로 혀를 굴렸다. 짙은 눈썹이 미묘하게 불균형을 이루었다. 누가 봐도 분노를 꾹 삭이는 얼굴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 망나니같이 날뛰는 불가촉천민을 다루는 왕족처럼 점잖게 웃어야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윽고 한결은 혀로 입술을 쓸며 도한의 지척에 다가가 섰다.
“남의 거?”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잘 벼른 칼날처럼 도한의 목을 베었다.
“빼앗아?”
턱 아래께에 있는 도한과 눈을 맞추기 위해 한결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도한의 악다문 잇새로 떨리는 목소리가 뻗어 나왔다.
“씨발. 내가 먼저였는데……. 네가 갖고 싶어서 서해민한테 나 떨어뜨려 논 거잖아. 이 비열한 새끼.”
이 덜 떨어진 놈은 맞는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전부 틀렸다. 애초에 저는 서해민한테 다가갈 의도 따윈 없었다. 그저 이도한이 더러운 쓰레기라 더 나은 콩고물을 받아 처먹기 위해 제 발로 떨어져 나간 것뿐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개조를 시켜 줘야 하나. 녀석의 어두운 미래만큼이나 막막했다.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도한이 이 씹새야.”
한결이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리며 도한의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퍽, 하는 다소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려 살살 달래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한결의 손길은 거칠고 투박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그 썩어 빠진 사상부터 어떻게 좀 하고 와, 응?”
도한은 수차례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그 손등에 툭툭 불거진 힘줄이 보였다. 등신. 시원하게 휘두를 배짱도, 용기도 없으면서.
“선빵 치면 맞아는 줄게. 근데 도한아, 너…….”
그러나 이도한한테는 그보다 더 없는 게 있었다.
“돈 많아?”
한결이 입술 끝을 씩 끌어 올렸다. 도한의 얼굴에는 절망이 스쳤다. 뺨 부근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초점 잃은 동공이 허망하게 흔들렸다.
“그래, 그래. 앞으로도 쭉 그렇게 주제 파악하고 살아.”
한결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 준 뒤에 그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열이 올라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고작 저딴 새끼 때문에 열기가 몰렸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예전 같았으면 안중에도 없었을 놈인데. 그래, 너는 짖어라. 그렇게 생각하고 내버려 뒀을 놈인데.
로비 안쪽으로 들어서자 스르르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한결은 성큼성큼 다가가 비집고 들어갔다.
그 안에는 서해민이 있었다. 먼저 들어가 있으라니까. 이 앞에서 몇 분이나 서성거렸을 해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웃었는데, 분명히 웃었는데…… 저를 보는 해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해민은 치고받고 싸운 건 아닌지, 어디 다친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결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왜. 내가 어디 가서 쳐맞고 다닐 새끼로 보여요?”
“아니. 아무나 때려눕히고 다닐 새끼로 보여.”
“잘 봤네.”
지금 이 안으로 들어선 사람이 제가 아니라 이도한이었어도 그런 눈으로 바라봤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목구멍이 콱 틀어 막혔다.
그러니까…… 서운했다. 서해민한테 밑도 끝도 없이 서운했다. 처음부터 나였으면 좋았잖아.
상대만 바뀌었을 뿐 가짜 연애를 계속하는 거니까 달라질 게 없는 거 아니냐고 한 사람은 바로 저였다. 분명 그때는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도한과 고한결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이제라도 해민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제 자신이 유치하고 치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결이 손을 뻗어 불이 들어와 있는 11층 버튼을 눌러 껐다. 그리고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11층을 지나쳐 위로 향했다. 해민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우리 집 가서 놀아요.”
“…….”
“……내 생일이잖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고한결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태어났다. 오늘이 진짜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는 그렇게 입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댔다.
착해 빠진 해민은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그래.”
해민과 함께 있으면 늘 이도한 같은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었다. 흥분에 절어 날뛰어 대는 저를 해민은 항상 담담한 손길로 어르고 달랬다.
언젠가부터 한껏 비틀리고 지저분한 제 속내를 해민이 알아챌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진저리를 치며 도망가려나? 서해민한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졌고, 혼자 속 끓이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 * *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입을 쩍 벌렸다. 한결은 해민의 손을 얽어 잡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열 개 남짓의 세대가 들어찬 아래층과는 다르게 탑 층에 있는 현관문은 고작 두 개뿐이었다.
해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한결을 바라보았다. 그는 싱긋 웃으며 도어 록을 해제했다.
“처음 올라와 보죠? 우리 집 놀러 온다는 말은 지나가는 말로도 안 하더라. 좋은 구경 시켜 주려고 했는데.”
“같은 건물이니까 당연히 똑같을 줄 알았지. 혹시 가족분들이랑 같이 사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그런 거면 뭐 하러 데려오겠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141592.”
“어?”
“비밀번호 바꿔 놨어요.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도 된다는 뜻이야.”
술에 취한 해민이 알려 주었던 그녀의 집 비밀번호였다.
해민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말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때마다 가슴 깊숙한 곳이 간지럽다는 걸 알까 모르겠다.
한결은 땅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우두커니 서 있는 해민의 손을 끌어당겼다. 늘 커다란 신발만 놓여 있던 현관 구석에 아담한 단화 한 켤레가 놓였다. 본인 성격만큼이나 가지런히 벗어 둔 걸 보자 푸스스 웃음이 샜다.
한결의 집은 원룸 형태인 해민의 집과는 크기는 물론 구조도 달랐다. 긴 현관 복도를 지나면 운동장만 한 거실이 펼쳐졌고, 스튜디오 같은 주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욕실이 달린 침실과 게스트 룸, 드레스 룸이 있었지만 한결에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공간이었다.
세 명이 뒹굴어도 넉넉한 사이즈의 침대가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형 티브이가 걸려 있어야 마땅한 맞은편 벽은 빔 스크린이 차지했다.
해민은 그 아래 쪼그려 앉아 빼곡하게 채워진 영화 DVD 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결도 그 옆에 몸을 웅크려 앉았다.
“뭐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그냥 신기해서……. 전부 처음 들어 보는 영화들이네.”
“원래 수집광들은 희소성 있는 영화일수록 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요.”
“그러니까. 네가 그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영화 수집광이라는 게 신기해. 이런 건 관심도 없고, 우르르 떼 지어 다니면서 술만 퍼마실 거 같은데.”
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헛헛함을 달래려고 무리 속에 파묻혀 다녔으니까. 덕분에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긴 했지만.
고개를 돌리자 빨갛게 익은 해민의 앙증맞은 귀가 보였다. 한결은 그것을 반사적으로 입 안에 함빡 머금었다. 해민이 몸을 파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았다.
“아, 뭐 하는 거야.”
해민이 가늘고 긴 팔을 휘적거리며 한결을 떼어 냈다. 그러더니 새빨개진 귀 끝을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새치름하게 치뜬 눈으로 힘 있게 노려본다.
“너무하네. 나 오늘 생일인데…….”
“네 생일 선물로 귀 한쪽 떼어 줄 생각은 없어.”
“떼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물고 빨기만 하려고 했는데 한 술 더 뜨네.”
한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오늘따라 입 안이 떫었다.
그를 따라 일어난 해민이 당연하다는 듯 주방으로 가려고 하기에 덥석 팔뚝을 잡았다.
“어딜 가요?”
“응? 케이크 안 먹어?”
“먼저 씻어야죠. 외출 후에는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봐. 위생, 위생!”
한결이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해민을 욕실로 안내했다. 문간을 짚고 선 해민이 눈썹을 한데 모으며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속옷…… 안 챙겨 왔는데.”
이거 뭐지. 도발? 다리 사이가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속옷. 그렇지, 속옷. 한결은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기며 사르르 눈을 접었다.
“벗고 나오면 되겠네.”
“야, 고한결.”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안 가는 데가 없어.”
그런 말을 하고서 한결은 욕실 수납장에 고이 개어 넣은 배스 가운을 해민의 품에 안겨 주며 뿌듯하게 웃었다.
제 몸에 맞춰 제작한 사이즈라 굉장히 클 테지만, 커다란 배스 가운을 걸쳐 입은 해민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음흉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해민도 그런 그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봤는지, 재빨리 한결을 욕실 문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달칵, 잠금장치까지 꼼꼼하게 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파렴치한을 보듯 바라보는 해민의 시선이 심장을 푹 찔렀다. 짐짓 억울하기까지 했지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씻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안쪽에서 쏴아아, 물줄기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한결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냈다. 드레스 룸에서 옷가지를 챙겨 들고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향했다.
* * *
한결이 씻고 나오자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집에 갔나?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주한 손길로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던 휴대폰을 찾아 들었을 때, 주방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집이 원룸이 아니라는 게 못마땅했다. 서해민이 언제나 제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으면 했다.
과분한 욕심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다시 기분이 한껏 가라앉았다. 오늘따라 감정 변화가 들쑥날쑥하니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한결은 실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생크림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있던 해민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히는 눈매가 한결을 반겼다. 오늘만 해도 열댓 번은 더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간 얼굴이 야속했다.
“초 안 붙여도 되는데.”
진짜 생일이 아니니까.
“이왕 챙겨 온 거니까 그냥 불자. 응?”
해민이 한결의 소매를 끌어당겨 식탁 의자에 꾹 눌러 앉혔다. 해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결은 입술을 감쳐물며 해민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일렁이는 촛불로 시선을 옮겼다.
“뭐 해? 고사 지내? 얼른 불어. 촛농 떨어진다.”
마지못해 후, 바람을 불어 초를 끄자. 초라해진 촛대에서 거뭇한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 꼴이 꼭 누구 같네. 한결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오늘따라 왜 이러지, 진짜. 이도한 그 새끼 때문인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분명 기분이 좋았다. 길모퉁이에 서서 하염없이 해민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마냥 설렜다. 밖에서 해민과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고, 손을 맞잡은 채 거리를 거닐 땐 서로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평범한 연인이 된 것만 같아서 행복했다.
제과점 앞을 지날 때는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해민의 온몸에 생크림을 발라 놓고 샅샅이 핥아먹는 상상을 하자, 손끝 발끝까지 저릿해져서 도통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랬는데…….
설탕에 절인 과일이 잔뜩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눈앞에 있음에도 기분이 바닥을 기었다.
초를 정리한 해민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한결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깜짝.”
그 탓에 한결은 흠칫 놀라 숨을 짧게 집어삼켰다. 화장기 하나 없이 뽀송한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때문에 그래? 아니면…… 이도한 때문에?”
다소 직설적으로 날아든 물음에 조금 놀랐다.
“그 새끼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요.”
“그럼 나 때문에 지금 네 상태가 이렇다는 거네?”
“아니, 말이 왜 또 그렇게 돼. 아니에요, 그런 거.”
해민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그의 기분을 살폈다. 덩달아 눈치를 보게 된 한결이 슬그머니 해민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순순히 다가온 해민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작은 등에 고개를 파묻자 저와 같은 향이 훅 풍겨 왔다.
해민이 몸을 반쯤 틀어 앉으며 한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겨 주었다.
“너 아까 전부터 진짜 이상한 거 알지?”
“뭐가 어떻게 이상한데요?”
곧장 되묻자 해민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뜸을 들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해민이 입술을 모으고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린다. 그러다가도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우더니 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나랑 이도한이 그런…… 사이였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거면, 안 그래도 돼.”
“응?”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가슴 아래 꽉 뭉쳐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얼굴만 봐도 기분 파악할 줄도 알고.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감동에 한결은 해민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비비적거렸다. 이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민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감정 변화에 해민은 기막힌 듯 헛웃음을 치더니, 동그랗게 드러난 한결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쪽.
“너는 이마가 예뻐서 이렇게 머리 올리고 다니는 게 보기 좋아.”
순간 한결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눈이 휘어지도록 예쁘게 웃는데,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한 듯했다.
그런 얘기야 숱하게 들어 봤지만 서해민이 해 주는 말이라서 더 절절하게 와닿았다. 내 이마가 예쁜가? 하긴, 안 예쁜 데가 없겠지. 나중에 얼마나 예쁜지도 물어봐야겠다.
“가끔은 이렇게 올리고 다녀.”
“싫은데.”
머리를 살살 쓸어 올려 주는 손길이 일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맨날 까고 다닐 건데.”
“그러시든지.”
해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탓에 되도 않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있잖아요, 선배.”
“응.”
“이도한이랑 키스도 해 봤어요?”
해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해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만면에 대답하기 싫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한결은 순간 아연해졌다.
“했겠지? 하, 이런 씹…….”
뭐라는 거냐, 이 등신아. 어리광을 가장한 추태였다. 내면에 숨겨진 한결의 또 다른 자아가 함부로 지껄여 대는 그의 주둥이를 타박했다.
했으면 어쩔 거고, 안 했으면 또 어쩔 건데. 어쩌긴, 입술이 다 부르틀 때까지 쪽쪽 빨아서 아주 그냥…….
때마침 해민이 붉게 부푼 한결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꾹 잡아 다물렸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려는데, 웅웅거리는 소리만 나와 한결은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이대로 벌떡 일어나서 집에 가겠다고 할까 봐. 너처럼 경우 없는 놈이랑은 한시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다고 할까 봐.
그러나 이윽고 들려온 말에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해졌다.
“한결아, 욕하지 마.”
한결은 힘없이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 했어.”
아, 안 했어? 안 했구나. 한결은 그 말을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조금 놀라 커다래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제야 해민이 한결의 입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입술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샜다. 주먹으로 입가를 가려 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한결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불쾌함을 역력히 드러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필하는 거예요?”
“얘 또 뭐라는 거야.”
이번에는 해민이 두 손으로 한결의 두 뺨을 감쌌다. 해민의 미간이 와락 구겨진 게, 한껏 꾸짖어 주고 싶다는 기색이 다분해 보였다. 타박이 날아들기 전에 한결이 재빨리 선수 쳤다.
“그런데 어쩌지? 난 키스 같은 거, 처음이든 엄청 많이 해 봤든 전혀 상관 안 하는 타입인데. 물론 난 서해민이랑 한 게 첫 키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한테까지 그런 걸 바라는 건, 좀 뭐랄까…… 촌스럽고 폭력적이잖아요.”
반대로 말하기 대회에 나가면 대상감이었다. 그래도 해민한테 너저분한 속내를 고스란히 내보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그럴싸하고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었다. 결코 지나간 스킨십 따위에 연연하고 경거망동하는 놈이 아니라고 인식시켜 줘야 했다.
“이런 말을 이런 상황에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결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래.”
해민이 무료하게 내뱉은 말에 한결은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기억하자, 고한결. 쿨한 사이, 쿨한 사이, 쿨한 사이…… 아니 뭐, 이 정도면 쿨한 편 아닌가?
한결이 자기 암시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사이, 해민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케이크 끝에 올라간 생크림을 푹 찍었다. 제 입으로 가져가려나 싶었는데, 그녀의 손끝을 좇던 한결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찐득한 생크림 감촉이 입술에 닿아 온 탓이었다. 해민은 한결의 입술을 질척하게 문질러 댄 끝에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생일이라며? 케이크 맛은 봐야지.”
한결은 뜨거운 살덩이를 찾아 들어온 손가락을 쪼옥 빨아들였다. 혀끝에 감도는 맛이 다디달았다. 계속해서 해민의 손가락을 잇새에 끼워 자근자근 씹었다. 단맛은 생크림이 아니라 서해민한테서 나는 맛이었다.
멋대로 침범한 손가락은 여린 점막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며 흥분을 고조시켰다. 혀를 얽어 감으며 입 안을 탐험하는 해민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어 갔다. 나른하게 풀린 눈을 마주하자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이윽고 해민은 한결의 입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주변에 묻어 있던 생크림을 핥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왜 이렇게 묻히면서 먹어? 애도 아니고.”
기시감이 엄습했다. 한결은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다리 사이로 고여 드는 뜨거운 열기를 더 이상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요?”
“나한테 이런 거 알려 준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밖에 없어, 너밖에 없어. 해민이 귓가에 속살거린 그 말이 뇌리에 단단히 박혔다.
“그럼 고맙다고 해 줘요.”
한결은 입가를 매만지다가 떠나려는 해민의 손을 단숨에 낚아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억지로 펼쳐 그 위로 제 뺨을 비볐다. 미지근한 체온이 살결 너머로 전해졌다. 해민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응, 이상한 거 알려 줘서 고맙다.”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평이한 어조였다. 그럼에도 가슴 아래가 절절하게 끓어올랐다.
이제 별게 다 꼴리네. 서해민 말대로 언젠가부터 머릿속에는 온통 그 짓거리를 하는 생각뿐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해민은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큰 사이즈의 배스 가운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손목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린 게 보였다. 허리 매듭을 꽉 묶는다고 묶었나 본데, 자꾸만 어깨가 흘러내려서 추켜올리기에 바빴다.
한결은 벌어진 가운 틈새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화들짝 놀란 해민이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벗겨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가운을 밀어젖히자 동그란 어깨가 공기 중으로 드러났다.
“너 또……!”
“왜요? 불편해 보여서 아예 벗겨 준 건데.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좀 서운하네?”
한결이 해민을 따라 순진무구하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씨이……. 꽉 다문 잇새로 분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욕하지 말라면서. 반쪽짜리 욕은 해도 된다 이건가?
속으로 곱씹던 한결은 해민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려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그녀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러자 하반신이 꽉 맞물렸다. 바깥공기를 쐬게 해 달라고 안달이 난 아랫도리가 제법 묵직했다.
“근데 케이크는 나만 먹나? 생일 주인공이 먹었으니까 초대받은 손님도 먹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응, 그렇지. 그래야 맞지. 자문자답하듯 고개를 끄덕인 한결이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푹 찍어 해민의 입가로 가져갔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음에도 해민은 꼭 이럴 땐 수줍다는 듯 얼굴을 붉힌다.
몸을 뒤로 물리며 피하려기에 한결은 한 팔로 해민의 허리를 홱 끌어당겼다. 맞닿은 가슴팍 사이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본인이 먼저 하셨잖아요.”
그러고는 통통하게 부푼 해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손끝으로 말캉하고 미끄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러자 해민이 새하얀 생크림이 묻은 제 입술을 혀로 할짝거린다. 이윽고 한결의 손가락마저 혀로 핥으며 입 안으로 물고 들어갔다.
“맛있게 빨아 줘요. 내가 먹여 주는 거니까.”
한결이 갈고리 모양으로 손가락을 구부렸다. 혀로는 닿지 않았던 입 안 구석구석을 꾹꾹 누르며 자극했더니, 해민이 숨을 집어삼키며 혀끝으로 손가락을 감쌌다.
깊게 빨아들이자 뽀얀 뺨이 움푹 파였다. 혀에 돋아난 돌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느낌이 생경했다.
“후우.”
왼쪽 허벅지 위로 드러나 있던 두툼한 윤곽이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한계였다. 해민의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싶었다. 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축축하게 젖은 신음 소리가 듣고 싶었고, 벗어날 수 없도록 제 아래 눕혀 놓고 밤새 괴롭히고 싶었다.
한결은 해민의 반대편 어깨에 걸쳐져 있던 배스 가운까지 한껏 끌어 내렸다. 그리고 사선으로 벌어지는 틈새로 손을 넣어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아흣.”
손아귀에 차지게 잡혀 오는 감촉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해민에게는 커도 너무 큰 배스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슴에 가해지는 악력이 흥분을 부추기는 듯 해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상체를 뒤로 물리려 했다. 어림없지.
“자꾸 가긴 어딜 가요.”
한결의 굵직한 팔뚝에 갇혀 움직일 수 없게 된 해민은 제자리에서 온몸을 바르작거리기만 했다. 그럴수록 뻐근하게 부푼 아랫도리에 자극이 더해졌다.
“선배님.”
그가 정중하지만 느물거리는 말투로 해민을 부르며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선배님이 저 빨아 주셨으니까 저도 빨아 드려야 맞는 거겠죠?”
“아니…… 난 괜찮은 거 같아…….”
“거짓말 하는 거 얼굴에 다 티 나요.”
한결이 이를 앙다문 채 신음을 참아 내는 해민을 향해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웃어 주었다. 그러자 해민은 얼굴을 붉히더니 수줍은 듯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녀가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댄다.
“좋으면서.”
“하나도 안 좋거든?”
“와아, 진짜?”
한결은 해민의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생크림 케이크로 가져가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손아귀에 잔뜩 묻은 생크림을 해민의 가슴에 치덕치덕 펴 발랐다. 말랑한 살결을 아래에서 위로 꽉 그러쥐자, 해민이 가늘게 떨리는 신음을 흘렸다.
“싫으면 안 할게. 하지 말까요?”
해민은 그제야 가느스름하게 뜬 눈초리로 한결을 바라보며 으응? 하고 되물었다. 싫다고는 안 하면서 꼭 한 번씩 밀어낸다니까. 그게 퍽 괘씸해서 재차 물었다.
“응? 하지 마?”
해민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더니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두 팔을 뻗어 한결의 목을 감쌌다.
“……키스부터 해 줘.”
한결의 입가에 뭉근한 웃음이 떠올랐다.
“키스? 좋지, 키스.”
한결이 케이크 위에 올라간 과일 중 딸기를 하나 집어 입에 머금은 뒤, 입술을 내려 해민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질척하게 뒤엉키는 혀 아래로 새콤한 열매가 짓뭉개졌다. 입 속에 가득 퍼지는 과일 향에 정신이 혼몽했다.
한결은 해민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해민을 식탁에 살짝 걸터앉히고는 상체를 밀어 눕혔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한결은 딸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에 입술을 옮겼다. 해민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귀 뒤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잘게 입맞춤을 쪼개어 퍼부었다.
그러다 또렷하게 도드라진 빗장뼈에 이를 박아 넣고 깊게 빨아들였다. 손가락으로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울긋불긋한 흔적이 만족스러웠다.
한결은 생크림으로 범벅이 된 해민의 가슴을 게걸스럽게 핥으며 물고 또 빨았다. 단내에 취할 것만 같았다. 지금껏 먹어 본 생크림 중 가장 일품이었다.
해민은 저만 몸을 드러낸 게 꽤나 억울한지, 어설픈 손길로 한결의 등판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티셔츠를 벗겨 냈다. 그러더니 날개 죽지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하반신을 바짝 밀착해 왔다.
뻐근하게 일어난 성기에 강렬한 자극이 더해졌다. 한결의 입가에 느른한 웃음이 드리웠다.
“하아, 바지도 벗으라는 거구나. 역시 우리 선배님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한결이 트레이닝팬츠와 함께 브리프를 끌어 내리자 몸집을 크게 부풀린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튕겨져 나왔다.
한결은 흠칫 놀란 해민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성기를 쥐게 했다. 어설프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솔직히 쌀 뻔했다. 구겨지기 직전이었던 자존심을 겨우 치켜세우며 빳빳하게 일어난 해민의 정점을 쪽, 쪼옥 핥아 올렸다.
“흐읏.”
빨갛게 부풀어 오른 반대쪽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엄지로 살살 굴리자 해민의 달뜬 신음이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서해민 존나 밝힌다. 어린놈을 그렇게 따먹고 싶었어요?”
“흐으, 내가 따먹는 거 아니잖아…….”
“그럼 누가 따먹는 거야. 여기 누가 또 있어?”
“나 아니야. 네가…… 네가 나를…….”
“인체 구조상 그래요. 선배가 날 따먹는 거예요. 인정할 건 쿨하게 인정해 주자, 그냥. 응?”
한결은 해민의 손길로 이미 한껏 축축해진 귀두를 질구에 맞추었다. 갈라진 틈을 뭉근하게 문지르고 비벼 대며 해민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손을 아래로 뻗어 흥건하게 젖은 음핵을 둥글게 굴렸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그것을 엄지 끝으로 튕길 때마다 울컥하며 뜨끈한 애액이 쏟아졌다.
“와아, 물 많은 거 봐. 헤엄쳐도 되겠네.”
한결이 해민을 놀릴 기세로 놀랍다는 얼굴을 하자, 해민은 식탁에 누운 채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입 안으로 험한 욕을 꾹 눌러 삼키는 듯했다.
한결은 깜빡 잊을 뻔한 콘돔을 바지 주머니에서 재빠르게 꺼내들었다. 그는 콘돔 포장지를 벗겨 내고는 해민의 손에 내용물을 쥐여 주었다.
“내가 콘돔 씌우는 거 많이 봤죠? 오늘은 선배가 해 줘요.”
해민은 제 손에 들린 콘돔과 한결의 성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결은 황망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제법 볼 만했다. 큭큭, 한결의 낮은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이윽고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입술을 일자로 꾹 맞다문 해민이 다리 사이에 자리한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잡기에도 버거운 성기를 쥐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착실하게 콘돔을 씌웠다. 돌돌 굴리며 쓸어내리는데, 처음 해 보는 행위에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해민의 두 눈이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한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직 좀…… 서투네?”
“서툴러?”
“응, 어설퍼요. 오늘 몇 번 더 해 봐야겠다.”
이로써 하룻밤 만에 콘돔 한 박스를 비워 낼 명분이 생겼다. 매번 겨우 한두 번에 까무룩 잠이 드는 해민이었다. 기절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했지만.
혼자만 몸이 달아 샤워를 하며 스스로를 달래는 건 몹시 굴욕적이었다. 그 사실을 해민은 알 리 없었다.
“나는 콘돔 씌우는 것쯤은, 흐응…… 서툴러도 상관없는데.”
“뭐?”
“네가 능숙하게 잘하니까.”
그 말을 들은 한결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가끔씩 해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무구한 눈을 하고서 대담한 말로 저를 놀라게 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때마다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실렸고,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치미는 흥분을 억눌러야 했다.
“또, 또, 혼자만 좋자고 이런다. 딜도 취급 지긋지긋.”
* * *
식탁 위에서 시작된 정사는 주방 싱크대를 거쳐 욕실까지 이어졌다. 쉼 없이 이어진 교접에 해민의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한결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해민을 제 무릎에 앉혀 머리를 감겨 주었고, 온몸에 치덕치덕 묻어 있는 생크림도 꼼꼼히 씻겨 주었다. 커다란 배스 타월로 물기를 닦아 주다가 잠기운이 역력한 해민의 눈과 마주쳤다.
죽지도 않고 꼿꼿이 서 있는 한결에게 맞춰 주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대견하고 기특했다. 비록 콘돔 한 박스를 전부 비우는 건 실패했지만, 평소보다 무리하긴 했다. 문득 걱정이 밀려들어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세웠다.
“잠깐 벽 짚고 서 봐요. 많이 부었는지 보게.”
한결이 그대로 해민을 일으켜 세워 두 손으로 타일 벽을 짚게 했다. 해민은 졸려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한결은 해민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바닥에 무릎을 댔다.
맹세코 또 괴롭혀 댈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한결의 이성은 그러했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양옆으로 벌렸다. 손바닥에 차지게 감겨 오는 감도가 좋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주물렀더니, 손 모양대로 뭉개지는 새하얀 살덩이에 새빨간 손자국이 남았다. 빠끔거리며 호흡하는 구멍은 붉게 부어 있었다.
“후우.”
케이크 위에 올라간 초를 불 때처럼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겨우 바닥을 딛고 있는 해민의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파요?”
소리 낼 힘도 남아 있지 않은지 해민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한결은 질구를 벌리고 있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꽉꽉 조여 무는 내벽은 여전히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겨우 다 씻겨 놨더니 손가락 하나 넣었다고 물을 질질 흘려 대는 모양새가 음란했다.
“하아…….”
아무리 몸을 맞대고 흔들고 처박아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한결은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콘돔 포장지를 뜯으며 구차하게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응?”
타일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돌아보는 해민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더는 탓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지친 얼굴에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지치지도 않아?”
“……그러게요. 나도 제발 내가 지쳤으면 좋겠다.”
진심이었다. 아무리 혈기 왕성한 나이라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동안 정절을 지켜 온 대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치는 성욕이라니.
하지만 해민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 물꼬를 터 준 게 서해민이었으니까. 누가 그렇게 꼴리게 생기랬나. 목소리, 행동, 성격, 손짓 하나하나도 모자라 글씨체까지 죄다 제 취향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 박는 건 내가 할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 하읏.”
한결은 손자국이 남은 엉덩이 골을 따라 뭉툭한 귀두를 슬슬 문질렀다.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욕실 안을 울렸다. 이윽고 질구를 찾아 기둥을 쑥 밀어 넣었을 때, 타일 벽을 짚은 해민의 손마디가 새하얘졌다.
뒤에서 보니, 허리에서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굴곡이 아찔했다. 한결이 참지 못하고 등에 움푹 파인 홈을 따라 입술을 맞추었다.
서해민의 몸에서 풍겨 나는 제 바디 워시 향, 입술에 닿아 오는 보드라운 살결, 빠듯하게 좆을 물어 대는 뜨거운 내벽. 어느 하나 흥분을 부추기지 않는 게 없었다.
해민의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아래로 내려 납작한 배를 더듬자 볼록 튀어나온 윤곽이 느껴졌다. 한결은 해민의 손을 겹쳐 쥐고 아랫배로 가져갔다.
“느껴져요? 여기, 이거…….”
“흐으, 으응.”
“이거, 내 좆. 응? 후으…… 네가 지금 나 먹고 있잖아.”
허리를 얕게 쳐올리자 그대로 움직여 대는 윤곽이 선명했다. 아랫도리로 온몸의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한결이 해민의 어깨에 이를 박고 가쁜 숨을 쏟아 냈다.
“해민아.”
오늘따라 해민을 향한 서러움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들어 기어이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허리 짓을 할 때마다 그 마음은 찰박찰박 차올라 목구멍 끝에 매달렸다.
한결은 하고 싶은 말을 안에 담고 있는 성격은 못 됐다. 때로는 약이 됐고, 때로는 독이 되었던 습관. 아니나 다를까, 서해민 앞에서만큼은 꾹 참아 보자고 했던 다짐이 무색해졌다.
“이도한 그 씹새끼랑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말도 섞지 말아요. 기분이 아주 좆같으니까.”
해민은 벽을 보고 서서 간신히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는 좆 뿌리까지 안쪽으로 꾹 밀어 넣고 해민의 몸을 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잇자국이 난 어깨에 턱 끝을 괴고 귓불을 물어 당겼다.
“욕……하지 말랬지.”
“좆같은 걸 좆같다고 하지, 뭐라고 해요 그럼. 좆같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데.”
해민의 얼굴을 마주 봐야 만족감이 배가되기에 뒤에서 성기를 박은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눈을 마주친 상태에선 꽉 뭉친 응어리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테니까.
“왜 대답이 없어요?”
한결은 대답을 종용하며 퍽, 퍼억, 허리를 움직였다. 돌아온 해민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러는 너는, 흐읏, 과팅……도 했었다며.”
“과팅? 내가?”
그런 걸 했었나. 먼지 쌓인 기억들을 들춰 봐도 마땅히 기억나는 장면이 없었다. 쓸데없는 건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성격이었기에.
“미대랑…….”
해민의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말을 듣자, 무언가 가물가물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아.”
생각났다. 저녁 같이 먹을 사람을 찾아 메시지 창을 죽죽 내려 보던 중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었다. 흔쾌히 나갔으나, 그 자리엔 낯선 얼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소과였나, 디자인과였나. 그런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어쨌든 뭐 미술, 그런 거였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저와 어울리지 않았다. 흥미도 없는 자리에 끌려 나온 게 짜증나서 술만 진창 퍼먹었던 기억이었다.
한결의 잇새로 피식 웃음이 샜다.
“질투해요?”
“그건 네가 하는 거겠지.”
단호하게 못을 박는 해민이 못내 서운했다. 희미하게 피어난 기대가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없는 질투가 생겨나라, 생겨나라, 주문을 외운다고 생겨날 리 없으니 허리만 난폭하게 쳐올릴 뿐이었다.
“좀 해 주면, 후우, 어디가, 덧나나.”
한결은 해민의 몸을 돌려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공중으로 붕 떠올라 당황한 해민이 몸을 바짝 밀착하며 한결의 목에 두 팔을 둘러 왔다.
의지할 데 하나 없어 혼신의 힘을 다해 저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는 해민을 들어 안은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놓인 침대로 걸어가는 동안 맞물린 성기로 민감한 지점을 꾹꾹 자극했다. 그때마다 제 목을 감싼 팔에 힘이 실렸다. 이 상태로 전국 일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한결은 침대 한가운데 누운 해민을 꼭 끌어안았다.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풍만한 가슴에 고개를 처박은 채 사정의 여운을 즐겼다.
본격적인 행위에 돌입하기 전 물고 빠는 애무도 좋았고, 섹스도 좋았지만, 해민과 숨을 섞으며 잠에 빠지는 순간이 가장 좋았다.
한결은 해민의 품에 안겨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어둠이 가라앉은 공간에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한결아.”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져 주는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너 오늘 생일 아닌 거 알아.”
알고 있었구나. 언제 알았지? 왜 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했지? 그럼 내 진짜 생일도 아나?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잠기운에 취해 입 한번 벙긋하지 못했다.
“그래도.”
“…….”
“생일 축하해.”
한결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매년 생일날마다 연락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성대하게 파티를 열었다. 그날만큼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면 외로움이 채워질까 해서였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백 번의 생일 축하를 받았지만, 지금 해민에게 받는 생일 축하는 특별했다. 비록 진짜 생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했다.
해민은 한결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 찍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서해민이 새빨간 거짓말의 공범이 되어 주었다. 이유 모를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건,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 * *
한결의 외할머니인 윤옥경 여사는 한 해가 끝나기 전 온 가족들을 전부 강원도에 있는 신양 호텔로 불러들였다. 연례 행사였다. 평소에는 모이기 힘드니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 먹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밥 한 끼는 주말 2박 3일을 의미했다.
집안에서 윤옥경 여사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래서 한결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평생 몸 바쳐 꾸려 가던 신양물산을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 낸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외할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직전, 윤옥경 여사에게 물산을 정리하고 그 돈으로 편히 노후를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제 남편의 혼이 담긴 회사를 팔아넘기느니 제 손으로 키워 보자고 쓸쓸히 다짐할 뿐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을 때마다 한결은 윤옥경 여사의 이름을 댔다. 어렸을 때는 그게 누구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토요일 밤,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호텔 라운지를 꽉 채웠다. 한결은 눈앞에 놓인 음식을 깨작거리며 연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제 강의가 끝나자마자 차를 몰고 산을 넘어 강원도에 도착했다. 해민과는 강의 시간이 맞지 않아 얼굴도 보지 못하고 와야 했다.
[이번 주말에는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같이 못 있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해민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괜찮냐는 물음이 우스웠다. 다 큰 성인이 혼자 주말을 보내는데 괜찮지 않을 게 뭐 있냐고. 그래도 괜찮지 않다고, 안 가면 안 되냐고 붙잡아 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물었다.
[응, 잘 다녀와.]매정한 사람. 쿨한 답장에 속이 쓰렸다. 부풀어 있던 기대가 바닥으로 천천히 침몰했다. 괜찮지 않은 건 바로 저였다. 제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주말 동안 뭐 할 거예요?]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돌아왔다.
[그냥 쉬려고.]메시지 창을 위로 쭉 올려 보니 물음표를 붙이고 있는 건 저뿐이었다. 해민의 답장은 언제나 마침표로 끝났다.
메시지 앱에는 ‘999+’라는 빨간 배지가 떠 있었다. 999개가 넘는 메시지보다 서해민한테 받는 메시지 한 통이 더 기다려졌지만, 하루 종일 휴대폰을 보고 있어도 새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999번 들여다 본 한결은 999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해민과 온종일 붙어 있어도 모자란 지금, 형식적인 웃음을 걸치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하는 가족 모임은 몹시 귀찮고 짜증 날 따름이었다.
“얼굴 썩은 거 봐라.”
한결에게로 다가온 그의 형, 윤결이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건들지 마라.”
“시건방진 말본새 여전하고?”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 여전하네.”
“남 말하십니다.”
낮게 웃은 윤결이 한결의 옆자리에 앉았다. 토요일 낮에 중요한 미팅이 있으니 끝나자마자 오겠다던 그였다. 거의 반년 만에 본 면전에 대고 내뱉은 첫 인사말이 참으로 고윤결다웠다.
“휴대폰만 그렇게 들여다보면 뭐가 나오냐?”
“신경 끄시고요. 밥이나 처드시고요.”
“할머니한테 일러야지. 고한결 말 존나 싸가지 없게 한다고.”
“아아, 그거.”
한결은 눈살을 찌푸리며 턱 끝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고심하는 척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배웠더라. 고 뭐 씨였는데. 이름이 윤결인가 윤개인가 했던 거 같은데.”
윤결이 피식 웃으며 안 그래도 넓은 어깨를 옆으로 쫙 펼쳤다. 한결의 의자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치더니 그의 뒤통수를 기분 나쁘게 쓰다듬었다.
“귀여워, 내 동생. 응? 귀엽다고.”
한결은 실실 웃는 윤결을 노려보며 그의 손을 퍽 쳐 냈다. 윤결이 아야, 내 손목, 우는소리를 하며 다른 손으로 제 손목을 움켜쥔다. 조폭같이 산만한 덩치로 엄살을 피워 대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고윤결은 신양 그룹 계열사인 영화 투자 배급사 ‘시네마박스’의 대표였다. 윤옥경 여사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신양의 기둥인 신양물산 전무 이사 자리를 제안했으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하며 시네마박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댔다. 당시 한결로선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체격과 아우라가 남다른 윤결이 대표를 맡은 덕분에 ‘시네마박스’의 소문은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시네마박스’가 어둠의 세력에게로 넘어갔다, 신사옥 밑에 수많은 시체가 묻혔다, 비윤리적으로 벌어들인 돈을 주체할 수 없어 영화 투자에 박차를 가하는 거다, 하는.
고윤결의 학창 시절 첫사랑이 영화배우가 되었고, 그것이 윤결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건 한결도 훗날 알게 된 사실이었다.
고작 첫사랑 따위에 미래를 걸다니. 쯧쯧. 한결은 그를 비웃으며 혀를 내둘렀다. 입술을 한 번 감쳐물고는, 이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유일한 사람에 대해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는.”
“오시겠냐?”
“…….”
“바쁘시겠지.”
신양물산 장녀와 젊은 정치인의 연애결혼은 당시 심심찮게 오르내리던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한결의 친부를 물어뜯으려고 안달이 난 반대 세력이 온갖 추문을 퍼뜨렸었으니까.
그 추문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굳혀 주었다는 건 정말 웃기는 코미디였다.
아버지는 가정의 화목에 심혈을 기울이는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 적어도 어머니의 죽음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녀가 죽은 후로 그는 바깥일에만 전념하며 집안에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얼굴 까먹겠네. 아버지 맞아? 몇 년 동안 얼굴 본 적이 손에 꼽아.”
“사진 봐, 사진. 검색하면 나오는 게 아버지 얼굴인데 다 큰 새끼가 뭔 어리광이냐.”
두 장정 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음식은 좀처럼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덩칫값 못 한다는 말이 딱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음식들이 왜 저를 먹어 주지 않냐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한결이 통 얼굴을 비추지 않는 아버지나, 연락 한 통 없는 서해민이나 매정하긴 똑같다고 생각하며 잠잠한 휴대폰을 빤히 들여다 볼 때였다.
한 손으로 의미 없이 나이프를 돌려 대던 윤결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좋아하냐?”
“뭘.”
“휴대폰…….”
“뭐래.”
“으로 메시지 보내 올 사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인마.”
한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겨 윤결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게 뭔데.”
윤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며 미간을 구겼다.
“요즘 시나리오 쓰냐? 때려치워. 너 재능 없어.”
말을 할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어느 하나 개운해지는 구석이 없다. 해민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릿속에 부유하는 모든 상념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는데.
한결은 무슨 생각을 해도 오직 서해민으로 귀결되는 사고 회로가 어색했다. 그동안 보고 싶으면 보고, 만나고 싶으면 만났으니 하루 이상 떨어져 본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무언가 휑한 기분에 입 안이 떫어진 한결은 연신 물만 들이켰다.
윤결은 테이블 중앙에 놓인 화병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한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또 무슨 뻘짓인가 싶어서 한결은 손에 들린 꽃 한 번, 실실 웃고 있는 고윤결 한 번,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선물이 좀…… 소박하네?”
“자, 형아가 시키는 대로 해 봐. 꽃잎을 하나씩 떼어 보면서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시작.”
……존나 짜증 난다.
한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찬바람이라도 쐬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였다.
그대로 호텔 뒷문으로 나가 벽에 기대어 섰다. 손에 들린 휴대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바라봤을 때 한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 씨, 뭐야 이거.”
고윤결이 건네준 꽃 한 송이가 풍성한 잎을 매단 채 제 손에 들려 있었다.
어떻게 꽃점으로 사람 마음을 점쳐 볼 생각을 하는 건지. 나이만 처먹었지 고윤결의 사고는 아직도 성장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한결에게 사랑,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감정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무나 품을 수 없는 숭고한 감정이라고 여겼다. 한편, 사랑이 결실을 맺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하기에 무척이나 번거롭고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주위엔 그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이로운 일들이 많기에 딱히 구미가 당기지도 않았다.
평생 어머니만 굳게 사랑하다가 그녀가 죽고 나선 사적인 감정을 전부 거둬들인 아버지 때문이기도 했고, 첫사랑을 잊지 못해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다가 결국 그녀를 따라 영화판으로 뛰어든 형 때문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마저 날려 버리는 건지. 어떻게 하면 사람을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건지. 늘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의문이 있었다.
최근 한결은 그 의문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평생 연애를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그의 머릿속에 어느 순간부터 서해민이 꽉 들어찬 탓이었다. 절대 변치 않을 것 같던 생각들이 해민으로 인해 점차 변해 가고 있었다.
한결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꽃잎을 하나씩 떼어 냈다.
나는 서해민을…….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발치에 꽃잎이 수북이 쌓였다. 마지막 하나 남은 꽃잎을 떼어 낼 때 나온 말은.
“……아니다.”
이거 좀 아닌 거 같은데? 한결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아, 아직 하나가 더 남았네. 손에 들린 꽃대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좋아한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리자 그 감정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 댔다.
손에 꽃이 쥐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뭔 헛짓거리인가 싶어 윤결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결국 이 헛짓거리를 제가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해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세요. 쓰레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시면 어쩝니까. 예?”
그때, 윤결이 입에 담배를 물고 등장했다. 그를 올려다본 한결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윤결은 웃음을 꾹 참으며 하얀 막대기 끝에 불을 붙였다. 그가 볼이 홀쭉해질 때마지 숨을 들이마시더니 후, 연기를 내뱉는다.
“담배…… 제발 꺼져.”
“여기 흡연 구역인데. 누가 꺼져야 하는 건지 알려 줘?”
필터를 물고 있는 윤결의 잇새로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건 한결을 향한 조롱 섞인 비웃음이었다. 제 감정 하나 자각하지 못해서 꽃잎이나 떨구고 있는 모양새가 웃기다고. 또렷한 눈빛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를 한결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한결은 아랫입술을 질끈 씹으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형, 정답 좀 알려 줘.”
“문제부터 알려 줘야지.”
문제. 그렇지, 문제. 문제가 뭐였더라. 착잡하게 기분이 가라앉는 원인이 뭘까.
‘나는 서해민을 좋아한다.’
그래, 그건 이제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럼 서해민은? 서해민은 나를 좋아하나?’
정답을 알려 줄 상대는 고윤결이 아니라 서해민이었다. 그러나 휴대폰은 울릴 기미가 없어 보이고, 고작 전화로 할 말도 아닌 듯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한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면, 그 대답을 들려줄 때까지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윤결과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이 다분해 보이는 눈빛에 발가락이 오므라들 것 같았다. 그와 이런 낯간지러운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형.”
윤결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고분고분 답했다.
“예, 동생님.”
“나 지금 가도 되나?”
“미친. 안 되지. 외할머니 성격 모르냐? 카드부터 자르신다. 장담해.”
윤결을 구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어 결국 목숨을 잃은 어머니. 그 죄책감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아가던 윤결은 외할머니 등살에 떠밀려 외국으로 보내졌다. 유학이라는 명목이었으나, 유능한 상담 치료사를 만나게 하기 위한 윤옥경 여사의 큰 그림이었다.
다시는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던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음이 폐허가 되어 버린 아버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한결은 어마어마한 대저택에 혼자 남았다. 그때가 고작 열한 살 때였다.
가끔씩 집에 들러 한결을 돌봐 주는 사람은 외할머니뿐이었다. 둘째 이모와 막내 이모도 있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장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외할머니는 한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윤결이 그룹 총괄 경영을 포기하고 영화 배급사를 갖겠다고 한 후에는 그 기대가 더욱 심해졌다. 하루가 지날수록 한결의 어깨는 무거워져 갔다.
한결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문득 귓가에 속살거리던 해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형.”
“……슬슬 한계다. 그만 불러.”
“나 이마 예뻐?”
윤결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더니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네마박스’ 대표가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더라. 어때. 첫 희생양이 되어 볼 생각 있어?”
“내가 형 손에 그냥 당하고만 있을 새끼로 보이나 봐.”
그러자 윤결은 기가 막힌다는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며 주먹을 꽉 쥐자 손등에서부터 팔뚝을 타고 푸른 힘줄이 불끈 돋아났다.
감히 형한테 쌍욕을 지껄인다며 얻어맞았던 어릴 적 기억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딴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팠다는 건 기억이 난다.
“시간이 없네, 시간이. 맞짱 떠 줄 시간이 없어.”
한결은 제 손목에 걸친 시계를 두드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영차,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들어가 볼 시간이었다. 우리 윤옥경 여사에게 아양도 좀 부리고 예쁨도 받아 놔야 앞으로도 꽃길이 펼쳐질 테니까.
윤결이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담뱃재를 털어 내며 한결을 향해 고갯짓했다.
“서울 가고 싶으면 지금 얼른 가, 인마. 고한결이 담배 피우다가 돌진하는 차에 치여서 비명횡사했다고 둘러댈 테니까 걱정 말고.”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지껄이는 말에는 어째 맞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한결은 비흡연자이고, 지금 호텔 뒷문에는 주차된 차량조차 없으며, 비명횡사는커녕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살아 있었다. 핑계를 대도 좀 그럴싸하게 할 것이지. 윤결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형이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안 되긴 뭐가 안 돼. 난 지금까지 뭘 해서 안 돼 본 적이 없어.”
“첫사랑한테 미쳐서 영화판으로 기어 들어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결이 선 넘네.”
고윤결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첫사랑.
도끼눈을 뜨고 죽어라 노려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구슬프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윤결의 얼굴이 청승맞았다.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존나 안 어울리게.
“한결아, 너 말 그렇게 못되게 하면…… 객사해.”
“비명횡사보단 낫네.”
한결이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푹 찔러 넣자 차 키가 잡혔다. 뒷주머니에는 지갑도 있었다. 휴대폰 있겠다, 차 있겠다, 지갑 있겠다, 당장 강원도를 벗어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이었다.
“형, 간곡하게 부탁 하나만 할게.”
“뭔데.”
“비명횡사 말고, 다리 하나 부러져서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해 줘. 아참, 객사도 안 돼.”
윤결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까닥거렸다. 갈 거면 빨리 가라고.
* * *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둑한 밤에는 안전 운전을 지향하는 터라 예상보다 조금 지체됐다.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서해민을 보지 못할 테니까 더욱 주의했다.
한결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지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집에 있겠지? 당연히 집에 있을 거다. 집이 아니라고 해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다. 집순이 기질이 어디 갈 리 없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숫자가 바뀌고 있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응시했다.
8, 9, 10, 11……. 이윽고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한결은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성큼성큼 복도를 따라 걷다가 익숙한 현관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를까? 전화를 또 해 볼까? 바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갈까?
그는 별 같지도 않은 것에 망설이다가 해민에게 다시 전화를 걸며 동시에 초인종을 눌렀다.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현관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는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해민아.”
집 안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도 같다.
“서해민, 나 왔어.”
초인종을 한 번 더 누르려는 순간, 도어 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결이 재빨리 문고리를 잡고 확 당겼다.
“……!”
안쪽에서 문고리를 쥐고 있다가 힘없이 끌려 나온 해민의 얼굴이 해쓱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더 희게 질려 있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던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제 몸을 제대로 겨누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얼굴이 왜 이래요. 아파?”
“주말 동안 못 본다더니……. 어떻게 왔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프냐고요. 약은 먹었어?”
한결은 파스스 부서질 것처럼 축 늘어진 해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와 해민을 침대에 눕혔다. 다행히 약은 챙겨 먹은 모양인지 협탁에 빈 약봉지와 물컵이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감기야? 어디가 아파?”
“머리…….”
“머리 아파?”
이마에 손을 얹자 불에 델 듯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도 그 못지않게 뜨거웠다.
한결은 외투를 벗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마른 수건을 찬물에 적셔 들고 나왔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는 손길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언제부터 아팠는데요. 연락을 하지. 전화기는 왜 꺼 놓고, 하…….”
“내가 끈 거 아니야. 꺼진 거야.”
“아무튼.”
“전화 안 받아서 온 거야?”
“아니. 보고 싶어서 왔는데. 뭐 좀 먹었어요? 설마 하루 종일 쫄쫄 굶은 거 아니지?”
“죽 끓여 먹었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의도치 않게 언성이 높아졌다. 가물거리던 해민의 두 눈이 놀란 나머지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가 숨을 짧게 집어삼키더니 눈을 깜빡거린다.
“아……. 큰소리 내서 미안해요.”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니야. 괜찮아.”
“맨날 괜찮대.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나 진짜 괜찮아. 죽 먹고 약 먹고 자니까 좀 나아졌어.”
한결은 죄 지은 사람처럼 매트리스에 고개를 묻었다. 후우, 거칠어진 호흡을 몇 차례 가다듬고 나서야 안정이 찾아들었다.
해민은 한결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넘겨 주었다. 익숙하고 따뜻한 손길. 그래, 바로 이게 몹시도 그리웠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는 것도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결이 해민의 손을 잡아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쯤 내리뜬 해민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겨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서해민 안에 고한결이 있다는 사실에 찾아든 안도였다.
한결은 해민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쪽, 쪽. 입맞춤을 퍼붓자 해민이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어디 다녀온 거야? 정장까지 차려입고.”
“그걸 이제 물어봐요?”
“이제라도 물어보잖아.”
“가족 모임. 깡시골에서 밥 먹는 거라 돌아오는데 애 좀 먹었어요.”
“그렇구나. 가족 모임이었구나…….”
잔잔하게 귓등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퍼석하게 갈라졌다.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대신 제가 아프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한들 인간의 욕심을 전부 채우지는 못했다. 대신 아파 주는 약 같은 거 빨리 안 만들고 대체 뭐 하는 거지. 원망의 화살은 엄한 데로 날아가 꽂혔다.
해민은 한결의 손아귀에 잡힌 손을 느리게 빼내었다. 한결은 그 손끝이 어디로 가나 잠잠히 지켜보았다. 이내 그녀가 파자마 단추 위로 손을 올리더니 톡, 톡,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결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간에 그어진 미세한 실금도 점점 깊어졌다. 한결은 황망하게 떨리는 동공을 해민에게 겨누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할래?”
“……뭐?”
“하고 싶어서 지금 이 시간에 먼 거리를 달려온 거 아니야?”
해민의 얼굴은 여상하기만 했다. 좀처럼 속내를 짚어 낼 수 없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기가 찼다. 저렇게 예쁜 입으로 어떻게 그런 못된 말을 서슴없이 할 수가 있는 거지? 자신이 마치 섹스에 눈 뒤집힌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기분이 수면 아래로 깊이 끌려 내려갔다. 속이 한껏 뒤틀렸고, 그 시끄러운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한결의 얼굴 또한 힘껏 일그러졌다.
“개새끼 취급받는 거, 기분 좀 더러운데.”
해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헛웃음 쳤다.
“한결아, 너 왜 화내?”
“화내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상황이 좀…….”
서운하잖아.
서해민이 잘 있는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하루 종일 연락 한 통 없어서 더 안달이 났다.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 내다가 한계에 이르러서 이 거리를 달려온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하니까 기어이 서운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불덩이가 된 상황에서도 해민은 저를 보면 섹스 생각뿐인가 싶어서. 섹스를 제외하면 저는 서해민한테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덕분에 속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해민은 한결의 뺨을 느릿하게 쓰다듬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더 가관이었다.
“어차피 우리 곧 있으면 안 볼 사이잖아.”
……믿었던 누군가가 절벽에서 떠민다면 이런 기분일까. 불시에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재미있게 놀면 그만이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응?”
얼음덩어리를 한입에 삼킨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얼핏 들으면 다정하기만 한 말투인데,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느껴질 수가 있는 건가.
나 너 좋아해. 너도 나 좋아해?
그따위 유치한 질문을 건네려고 했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설렘? 기대? 달뜬 흥분? 그딴 건 절벽에서 추락하는 순간 함께 떠내려갔다.
한결이 입술을 감쳐물고는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아, 그렇지. 우리 그런 사이였지?”
첫 단추를 단단히 잘못 꿰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근데 내가 하자고 한 건 섹파가 아니라 연애였지. 안 그래?”
말은 삐딱하게 새어 나갔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내면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탓이었다.
등신 같았다. 서해민은 곧 헤어질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이별을 앞두고 저 혼자 설레어하며 들떠 있는 꼴이 정말 못 봐 줄 정도였다.
한결은 입 안에서 혀를 꾹꾹 누르며 분을 삭였다. 아니, 삭이려고 했다.
“……씨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저리 같은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결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팽개쳐 놓은 외투를 손에 들고 현관을 나섰다.
등 뒤로 쾅, 문 닫히는 소음이 크게 들려왔고, 현관문에 기대어 서 있다가 스르르 미끄러진 한결은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처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헤어짐을 염두에 둔 연애였다. 그 첫 단추를 꿴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다 알고 있었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존나 개같네.”
누군가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 아려 오는 게 빌어먹을 정도로 아팠다.